깨어 있지 않으리/ 김종완
한 달여 동안 한 줄의 글도 쓰지 않고 보냈다. 지금까지 내가 그래도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가끔씩 벌이는 이런 식의 파업 때문일 것이다. 드디어 바닥이 나고 말았다는 기분, 더는 버틸 수 없다는 위기감이 찾아오고 말면 그땐 생각을 멈춘다. 생각 없이 몸으로만 살아가기. 나에게 휴식은 이것이다. 이런 게으름이 너무 좋다. 며칠 전엔 공원을 산책하다가 불현듯 이런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기까지 했다. 행복하다고 느낀 순간, 스쳐 지나가는 어떤 설레는 낯섦. 당황했다. 과연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괜찮은가?
너무 긴 시간 동안 행복을 느끼지 못하며 살았었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쫓기듯 시달리며 살아왔다. 내가 원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공짜로 햇볕도 받았고, 살아 있는 것들에 기대어 살아왔으니 그 은혜는 갚고 떠나야 한다는 부채감을 떨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더는 그 부채감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오십이 넘어서야 그냥 살아주는 것만으로 내 몫의 의무는 다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이름을 얻겠다는 공명심도, 부자가 되고자 하는 헛된 희망도, 하물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 무엇이 되고자 하는 작은 바람마저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내 몸뚱어리뿐. 그날 나는 땀을 흘리며 공원을 돌고돌고 있었다. 그때 미풍이 이마를 스쳤고 난 양팔을 어깨 높이보다 조금 낮게 들어 올려 바람을 맞았다. 그러자 미풍에 스친 손끝으로부터 작은 행복감들이 스멀스멀 찾아왔다. 그 미풍의 달콤함이여!
청소년 때부터 문학을 했다면서 어떻게 글을 쓰지 않고 시골에서 오랜 시간을 견elf 수 있었느냐고 누군가가 나에게 물었다. 청소년 때, 나에게 문학은 참으로 성스러운 것이었다. 문학이 오락거리일 수 없었고, 그것은 자기구원이고 또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구원되지 않았다. 살아본들 때론 행복한 순간도 있겠지만 그것은 삶이 힘든 것에 비하면 너무나 짧은 순간일 것이다. 내가 살아야할 어떤 이유도 없었다. 내 의지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나진 거라면, 자살은 내 의지의 선택이라는 매력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런 것도 모른 채 죽을 수는 없었다.
그때 한 선생을 만났다. 그는 애당초 있음만 있다는 것이다. 우주는 한 점의 티끌도 새로 생기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거였다. 다만 변화일 뿐. 장작개비를 불에 태우면 장작개비는 죽지만 그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무기질로 변했을 뿐이라는 거였다. 없는 것(無)이란 애당초 없는 것이고, 그래서 인간은 없다는 걸 상상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無)란 무엇이냐? 그것은 있음(有)의 다른 형태, 즉 희미한 상태를 무라 부르는 것이라 했다.
그때 내가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라면, 애당초 죽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러면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런데 살아야 할 이유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절대허무란 말이 그때의 내 심정이었을 것이다. 내 눈에 비친 모든 사물들은 죽을 수 없어 다만 살아가는, 끊을 수 없는 삶의 굴레를 짊어진 신의 노예로 보였다. 피어 있는 꽃을 보면 그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눈물을 철철 흘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마저 처절한 울음을 우는 것으로 보였다. 지구가 돌면서 내는 소리는 너무나 커서 우리의 귀로는 들을 수 없다는 걸 지학시간에 배우고 그것은 지구의 통곡소리로 받아들여졌다.
그런 슬픔의 세월을 보내다가 어느 날 한 생각이 떠올랐다. 분명 이 우주에 죽음이 아니라 삶만 있는 것이라면, 산다는 것은 행복이어야 할 것이다. 그걸 사실로 느끼는 차원이 있을 것이다. 산다는 것만으로 즐거워지는 단계, 쾌락의 단계가 있을 것이다. 그때 이후 내 인생의 화두는 삶을 쾌(快)로 느끼는 것, 그걸 내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었다.
그런 눈으로 문학을 보자, 오늘의 문학은 허무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구원은커녕 생생한 사람마저 허무라는 병에 빠지게 하는 독약으로 보였다. 그러자 그 답은 종교에 있는 것 같았다. 그 선생을 찾아갔다. 남들이 대학을 갈 때, 문학을 접고 종교에 뛰어들겠다는 선언은 개미도 웃을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비장했다.
이후 그 선생의 문하에서 몇몇의 비상한 인물들을 만났다. 그들은 기성종단이나 신흥종단에서 맹활동을 하다가 실망한 사람들이었다. 종교운동에 있어서라면 그들은 혁명을 꿈꾸는 자들이었다. 그들과 함께라면 이 세상을 새로운 종교운동으로 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선생은 교회란 건물이 아닌 스스로가 교회라 했고, 기도란 손잡고 무릎 꿇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기도라 했고,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 이 땅에 처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세운 자라 했다. 하나님 신앙의 창시자라는 거였다. 그리고 메시아란 바로 너 자신이라 했다. 그 말은 나를 결정적으로 매료시켰다. 2000년 전 예수는 자신을 유대의 왕이라고 했지만, 현대에 재림하는 메시아는 스스로 메시아임을 거부하고 세상사람 모두가 다 메시아임을 선언하리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고백컨대 나에게 사상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의 팔 할은 그때 그 선생과 거기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빚진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을 선생의 문하에 있다가 군대에 갔었다.
그러나 제대 후 다시 돌아왔을 때 그곳은 많이 변해 있었다. 종단의 규모가 갖춰진 반면, 선생의 주변은 친족들에 의한 인의 장막이 쳐 있었고, 그들은 선생을 신성화시키면서 변화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려 했다. 선생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선생 자신이 대중적인 운동을 바라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뜻을 함께 했었던 그 사람들은 고립된 채 세속화의 주범 내지는 과격한 개혁주의자 등으로 몰려 있었다. 그 갈등의 구조 속에서 무언가 나의 역할이 있을 것 같아 동분서주했다. 종단 내에서 그 종단의 규율에 따라 아무런 생활대책도 없으면서 이른 나이에 결혼도 했다. 그 시점이 결혼을 해야 할 운명의 때라면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의 세속적인 행복 같은 것은 포기한 지 오래였으니까. 체계적 신학교육을 위해 신학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선생은 서서히 메시아로 등장하고 있었다. 뜻을 함께 했었던 그 사람들과 개혁안을 내놓고 그것이 수용되지 않으면 종단을 탈퇴하기로 했다. 결국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실패한 이상주의자 아니 환상주의자의 땅 한 평 없는 낙향이라니 얼마나 희극적인가. 그동안 관념의 성을 쌓고 초기 기독교인들의 공동체를 꿈꾸며 신이니 구원이니를 외치며, 세속적인 것들을 버리고 일생을 순교자적인 희생으로 살겠다는 내 꿈이 얼마나 허황된 일임을 뼛속까지 반성했다. 물론 기독교인이 말하는 그런 천국 같은 것은 꿈꾸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건 희생이 아니라 사람 하나 잘 만나서 이 세상을 넘어 저 세상까지 한 쾌에 영원히 성공하려는 가장 이기적인 행위였다. 세상에서 가장 불량한 도둑놈이 나였다. 이 세상을 성실하게 땀 흘려 살아온 사람들과 지금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모욕이었다. 내가 고향에 돌아가서 놀란 것 중의 하나는 농부들과 만났을 때 내가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생활이 없는 관념의 유희 속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관념을 털어내고 농부들의 흙의 언어로 생각하고 땀 흘려 노동하며 살고 싶었다.
아무런 생활대책도 없던 무모한 결혼은 발목을 잡는 족쇄였다. 아이가 생기고, 어쨌던 먹고 살아야 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웃긴 이야기이지만 낙향해서 모피용의 토끼 렉스를 키웠다. 토끼라는 게 계산상으론 암탉 한 마리 사다놓고 병아리 세는 것만큼이나 허황된 것이다. 새끼가 새끼를 낳고, 그 새끼가 새끼를 낳다보면 온 세상이 토끼로 가득 차고 말 것이었다. 단기간에 돈을 벌어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다가 웬만큼 규모가 갖춰졌을 때 안 것은 고급 모피용 렉스라는 게 토끼를 고액으로 분양을 하려는 완전 사기극이었다. 한 마리의 토끼도 팔지 않았다. 팔았던 것마저 회수했다. 그때 손을 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털을 깎아서 직물을 만든다는 앙고라토끼로 종자를 바꿨다. 그게 수지를 맞추려면 몇 천 마리 규모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만두면 앞으로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수지가 문제가 아니라 그럴싸한 토끼농장의 규모를 갖추는 게 최소한의 자존심이었다. 천 마리 정도의 규모로 농장이 갖춰졌을 때, 어머님의 부탁으로 친지의 빚보증을 섰던 게 잘못되어 농장에 차압이 붙었다. 드디어 손을 털었다. 10년 만에 해방이 되었다. 나의 생각과 언어는 관념의 틀을 비로소 얼마큼 벗어나 있었다.
그동안 몇 편의 소설을 구상했고 끄적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단편마저 완성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농장의 수입이라는 게 있을 없었고, 밤이면 아이들 과외지도를 해 번 돈으로 농장을 꾸려야 했으니까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일을 했었다. 그것들이 모두 미완의 조각들로 흩어져 버리고 말자 그 다음엔 그럴싸한 논리를 세워 나를 버텨냈다. 내가 쓰는 글들이라고 어찌 세월의 풍화를 견딜 것인가? 결국 내 대(代)에 내가 좋아서 그냥 쓰다가 나 죽으면서 사라질 것이 나의 문학이지 않겠는가! 내가 글 써서 밥 벌어 먹는 것이 아니라면, 나의 이런 식의 문학에 굳이 독자가 있어야 할 필요가 무엇인가? 독자 없이 문학하기. 나아가 글로 쓰지 않고 몸으로 문학하기. 내 몸의 감수성을 최대한으로 끄집어 올려 순간순간을 최대한으로 느낀 다음, 그냥 흘러 보내기. 그러다보면 종내에는 모든 것들이 무감각해져 그냥 스쳐 지나쳐 버릴 것이고…. 하지만 그런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1987년 광주 도청 앞에서 이한열 열사의 노제(路祭)가 예정되어 있었다. 수많은 인파가 장례행렬을 맞으러 모여 들었다. 장례행렬은 서울 시청 앞 노제가 끝나고 광주로 오는 동안 경찰이 중간 중간 길을 막는 바람에 예정된 시간이 훨씬 지나 어둑어둑해져서야 도착했다. 그날 매장까지를 마쳐야 했으므로 행렬은 도착하자마자 망월동 묘지로 향했다. 그 뒤를 따르면서 “한열아, 내가 정말 부럽다. 부럽다.”라는 말을 울먹이면서 되뇌었다. 죽어야 할 때는 언제일까? 그럴 기회가 나에게 허락이나 될까?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왜 난 행복하지 않았을까? 뭔가 내가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일이라는 것은 물론 문학이었다. 함께 문학을 했었던 친구들이 이 시대에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을 때 나만 낙오되어 있다는 사실은 참을 수 없는 열패감을 안겨 주었다. 문학하지 않고 독자로만 살면 안 돼?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품었던 궁극의 질문은 내가 살아 있는 한 따라다닐 것이고, 그것을 풀어가는 과정은 이미 운동을 접은 나로서는 문학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다 나이 50이 되는 날 문학만을 하겠다고 서울로 올라왔다. 자발적으로 가난해지기로 마음먹으면 못 할 것이 없어 보였다. 그 성패야 다음의 일이고.
그렇다. 나는 그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게으름을 피울 때는 꿈속에서나마 시달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다 작년에 내 생애에 가장 중요했던 도반(道伴)을 잃고 말았다. 그는 나에게 어머니였고, 큰누나였다. 이 글 서두에 나오는 ‘누군가’가 바로 그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사실 문학의 꿈을 포기하고 대신 적당히 글이나 쓰면서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을 작정이었다. 이미 병들어 있었고, 다만 어려서 꾸었던 꿈 때문에 가끔 괴로워할 뿐이었다. 그는 끈질기게 나의 꿈을 불러 일으켰고 끝내 일으켜 세웠다. 그가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갔다. 돌연히, 나는 죽을 때까지 그에 대한 감사와 그를 보낸 후회에서 벗어나지 못 할 것이다. 과거란 지나쳐 온 시간이 아니다. 과거란 기억으로 새겨져 현재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가 갔다고 간 것이 아니다. 그는 외출했을 뿐, 그가 부산에서 올라오지 않았을 뿐. 잠시 얼굴을 대하지 못 할 뿐. 아니다. 이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부르면 항상 내 곁에 있다. 기억이야 시간이 지나면 엷어지겠지. 그러면 그와의 만남의 강밀도(强密度)도 함께 엷어지겠지. 하지만 내가 죽어 기억의 더미를 다 내려놓는 순간까지 항상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드의 돌연한 죽음은 나에게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내 몸에 켜켜이 쌓인 속기(俗氣)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가 간 다음의 세월은 더디고 더뎠다. 49일은 몇 년 같았고, 몇 년이 지난 것 같은데도 아직 일 년도 되지 않았다. 그는 혼자 죽은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죽은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날 돌연히 살아났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임을 온몸을 통해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색으로 가득한 이 세상의 풍요로움이 눈에 들어왔다. 살아 있는 것들이 내뿜는 저 섬세한 책들의 풍요로움을 몸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컥컥거리며 울었다. 저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죽은 자들이 불쌍해서 컥컥거리며 울었다. 얼마나 슬퍼했을까. 슬퍼 몸져누워 있을 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살아서 이룰 것이란 애당초 없다는 걸. 저걸 그냥 보는 것만으로, 내 하나가 저 색 중의 하나로 함께 어우러지는 것만으로 족하다는 걸.
나는 더 이상 깨달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나는 깨달음의 경지에 대한 신비함을 갖고 있지 않다. 사람은 돈오(頓悟)할 수 있다. 그러나 문득 깨달아 눈을 뜨고 보는 세상은 여전히 똑 같은 삼라만상이다. 이 세상의 이치야 뻔하지 않은가? 깨닫기 전에 듣고 들었던 세상의 이치가 비로소 몸으로 실감나는 경지가 깨달은 경지가 아닐까. 불가에 소를 잃어버린 목동이 소를 찾아 집으로 돌아오는 심우도라는 이야기가 있다. 목동이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목동은 눈을 들어 세상을 바라본다. 세상은 여전히 똑같다. 산이 있고 나무가 있고 숲이 있고 새가 있고 물이 있고…. 모두가 제자리에 그렇게 있다. 무엇이 바뀌었는가?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었다. 그러자 한 세계가 활짝 열렸다. 만물이 따로따로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하나로 보인 것이다. 그것은 일체 우주가 하나라는, 듣고 들었으나 실감하지 못했던 바로 그 말이 눈으로 보인 것이다. 관념으로만 이해했던 것을 사실로 실감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역사상 많은 사람이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깨달은 후에 깨달음의 세계에 대해서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설명했을 것이다. 만약에 행여 내가 깨달았다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지금까지 깨달은 무수한 사람들이 남긴 말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그 세계는 말로는 가닿을 수 없는 세계라 했지만.
예수는 천국이 도둑같이 오므로 깨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깨달은 자만이 깨어 있을 수 있고, 깨어 있기에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항상 깨어있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나는 천국을 가기 위해서 잠의 달콤함을 포기하지 않으련다. 꿈 속에서 천국에 가면 되지, 꿈 또한 내가 내 몸으로 꾸는 것이라면 그 또한 하나의 현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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