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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단편 소설

남자만이 하는 이야기

by 자한형 2022.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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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男子)만이 하는 이야기  -박순녀

 

희령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녀의 집에 접어드는 세 갈래 길의 한 담 밑에서 검은 그림자는 나섰다, 그림자는 그녀 정면에 막아섰고 분노의 타는 눈길은 어둠 속에서도 그것만이 확대되어 튀어나왔다. 희령은 섬뜩하도록 몸이 굳어졌으나 그것을 이기고 발의 가도를 돌려 그의 옆을 돌아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러자 그림자는 말없이 다시 막아섰다. 그녀는 또 돌고 그림자는 또 막아서고, 두 사람 몸이 엉키듯이 함께 기웃해졌다. 그래도 희령은 세 갈래 길의 가운데에 위치한 경사진 쪽으로 나섰다. 그녀의 집이 그 앞에 있는 것이다. 그림자를 피하느라 그녀의 걸음은 지그재그가 되었으나 그림자는 포기하지 않고 조용하게 따라왔다. 결국 그녀네 대문이 보이는 지점으로 오자 그녀는 삥 돌아섰고 돌아서자 화가 나서 경사의 반대, 그러니까 내리막이 되는 길을 다다닥 내리뛰었다.

희령이!

하고 그림자가 그녀의 발 밑으로 빨리 와 다시 막아섰다. 오도가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

늦은 시간이다. 열한 시가 넘어 있는 것을 희령이는 알고 있었다.

어디서 오는 길야, 희령이?

그림자, 정규가 감정을 극도로 내리눌러서 물었다.

그는 긴장해서 두 잇몸이 딱딱 맞힐 지경인 모양이었다.

다니, 묻지 않겠어, 어디서 오건. 그 대신 나와 이야기 좀 해.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이야기는 이미 끝났다. 이야기가 되지 않았고 정규는 정규의 이야기, 희령인 희령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희령이는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으나 참았다. 정규가 두려운 것이다. 그렇다고 그 두려움에 굴할 수도 없다고 그녀는 입을 다문 채 곧장 얼굴을 세울 뿐이었다.

내가 몇 시간을 거기서 기다렸는지 알아 ? 나는 기다리면서 생각했어. 우리의 사이는 이제 끝났다고 하자. 그 대신 희령인 그 작자와도 만나지 말아야 돼. 만나서 나를 더 이상 흥분시키지 말아야 돼. 알겠어.

, 그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인다고? 전엔 그렇게 말했었지. 난 죽지도 않고 네 말도 듣지 않아 - 희령이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너무 늦었어, 오늘은 돌아가 주어.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그냥 돌아갈 순 없어.

그렇지만 시간이 없다는 건 알지?

한마디만 대답해주면 돼. 시간과는 상관없어.

- 네가 원하는 말은 해줄 수가 없어!- 하고 소리치면 변이 날 것이다. 희령이는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네 동네라는 것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만일 여기서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해서 정규가 날뛰면 막 문을 닫으려는 구멍가게나 약국에서 신이 날 것이다. 매일 지나다니는 길인데 말이다. 이렇게 사람은 자기 동네에서는 약한데, 정규는 자기 동네가 아니라는 데서, 자유에 넘쳐 집에 못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는 집에 안 돌아가서는 안 되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남의 동네에서의 자유, 그것이 희령의 약점인 것을 알아서 그는 늠름하고 강한 것이다.

희령이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래도 정규가 따라붙는다면 일은 났다. 그가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인데도 따라온다면, 그는 자기가 엄포한 대로 희령이를 죽일지도 모르고 그래서 두 사람의 끝장을 보고 말지도 모른다.

그는 따라오지 않았다. 회령이는 집에 돌아왔고 내일을 생각하면 기도 안 찼다. 같은 학교 같은 과()만 아니라도 일은 이렇게까지 숨막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왜 변심했냐고 다그치는데 그 봄에 그녀가 걸린 병을 그는 모른다. 그녀는 먹지 못하고 자지 못했는데 그녀가 앞뒤를 가리지 못하고 빠져들었던 남자가 없어져버렸던 것이다. 뒤에 남긴 쪽지에는 형님이 데리러 와서 따라간다고 적혀 있었다. 어디로? 모른다. 이 나라는 별로 크지도 않다는데 그녀는 그 남자가 간 곳을 모른다. 그 대신 그녀는 호되게 앓고 학교로 나가자 마침 잔디가 돋아나는 4월이었다. 그때 그 매가리없는 그녀 앞으로 정규가 다가왔다. 갔어도 그녀를 사로잡았던 남자에 비하면 맹물 같아서 부끄럽기까지 한 정규를 그러나 희령이는 받아들였다. 그 결과는 그의 연인이 된 셈이었으나 회령이 스스로는 알고 있었다. 화난 김에 서방질이라는 것을. 의도적은 아니었어도 그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정색해서 왜 변심했냐고 따지면 무슨 대답이 나을 수 있겠는가.

그와는 이야기에 이야기를 했지만 서방질 같은 말에 이르러서는 그는 절벽이 다. 듣기만 해도 부도덕해서 화만 터뜨려 놓게 되고 모욕으로만 알아서 펄펄 뛴다. 게다가 무슨 잘한 짓이라고 희령이가 당당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죽을 지경으로 속이 상하고 답답하고 화가 나고 욕이 나오고 끝내는 정규와 함께 펄쩍 펄쩍 뛰는 수밖에 없게 된다.

정규, 난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구. 애초부터 좋아한 게 아니었어. 미안해. 그리고 강요하지 마. 이런 거 강요로 되는 게 아냐. 제발 그런 강요는 말아. 권리 행사도 말고. 그런 거 나는 인정하지 않아. 나한텐 아무리 그렇게 나와봐야 소용이 없어. 정규는 날 탕녀라지만 탕녀가 아니기 위해서 정규와 그대로 사랑하는 척해야 돼? 나는 그렇게 못한다구?

희령이는 이것을 술술 말로 하기가 거북해서 속으로만 종알종알했다. 정 정규가 못살게 굴면 말로 해야 되는 걸까. 그러나 말하는 도중에 그가 칵 올라서, 그야말로 폭행이나 한다면, 그래서 죽이고 죽는 수도 있던데 그렇게 된다면?

그날 밤 희령이가 자기 집 대문 앞에서 가까스로 놓여난 후 정규는 더욱 살벌해져버렸다. 그는 희령이가 계속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고 그의 요구가 하등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자 다음에는 그녀를 만나는 자리마다에서 쓱 지나치면서 더러운 년!하고 뇌까렸다. 그것도 극히 낮은 목소리여서 정면에서 뇌까리거나 옆에서 뇌까리거나 그가 겨냥하는 희령이만이 대개 듣게 되는데 하루에 세 번쯤 이런 일이 거듭되면 희령이는 신경병에 걸린다. 그러나 피할 길이 없이 학교에서 당했다. 이젠 죽이고 싶은 것은 바로 희령이었다. 정규라는 사나이를 죽이고 싶어졌다. 그녀는 머리를 곧장 세우고 그의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되도록 혼자 다녔다. 자기에게 겨냥되는 말이라도 바로 옆에 누가 있으면 못 들으라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혼자 있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희령아, 같이 가.

해서 둘이 되고 셋이 돼서 가게 될 때도 있는데 하루는 그러한 때를 노리고 있었던 것처럼 미술관 앞에서 정규는 희령이를 붙잡았다.

너 나 좀 보자.

희령이는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러나 심정은 울고 싶도록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못 가!

정규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

희령이는 잡힌 채 토해내듯 말했다.

같이 가던 친구 하나가,

왜 그래.

하고 말했다.

왜 그럴까 정규씨, 난데없이?

하고 끼어 들었다.

그녀들도 물론 정규와 희령의 옥신각신을 알고 있었는데 매우 홍미가 있고 흉을 보는 일도 재미가 있었다.

좋게 좋게 해결해요. 지성인답게 쎄련되게.

그녀들의 하나는 또 말했다.

쎄련? 이런 더러운 년하고 쎄련이라고? 그놈이 나보다 돈이 좀 있어. 그거야 원인은.

그리고 정규는 희령의 손을 놓는 대신 똑바로 마주서며,

나도 너를 위해서는 돈을 썼다. 써서는 안 되는 돈. 도저히 쓸 수 없는 돈까지 써가며 그래서 집의 호출까지 받아가며, 공부 못 시키겠다는 협박 감수하며, 적지 않은 돈을 썼다. 안 쓴 게 아냐. 썼어.

그는 나중의 말을 목이 메듯이 내 뱉았다.

유치하다 - 희령에게는 그 말도 그 이상의 호소력은 없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좀 심각했다. 그들은 정규의 환경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데, 물론 희령이도 알고 있지만, 시골집에서 그를 공부시킬 만한 여유가 없어서 출가한 서울의 누님이 기숙을 시켜주고 학비는 아르바이트로 충당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희령이와 연애하기 때문에, 그래서 써서는 안 되는 돈까지 거기 쓰게 되어서 누님의 눈밖에 나게 되고 그것이 시골에 보고되어 야단이 났다는 것을 그의 지금 말로 해서 더 잘 알게 되었다. 흐흐, 우스운-사나이야. 하지만 여자들의 동정은 그에게 갔다.

그건 정규씨가 순진했네 뭐. 희령이 책임은 아니잖아.

그렇게 나도 했단 말야. 하는 데까진 나도.

시골 부모님께 안됐어.

그런데 이제 와서,,,,,, 그놈이 돈을 좀 가졌다 해서,,,,,,

그렇다고 이렇게 해서 해결이 날 건 아니잖아?

이 소리들을 언제까지 들어야 하나. 희령이는 얼굴을 곧추세운 채 속수무책을 느꼈다.

해결방법은 있어. 너 학교 나오지 마.

그게 무슨 소리야 정규씨 ?_I친구 중 하나가 또 물었다.

학교 집어치우란 거야, 저게. 나는 저것만 안 보면 되겠어. 그러면 마음을 가라앓히겠어.

친구 하나가 약간 어이없어하며 대답했다.

그건 정규씨의 독선야. 희령이도 다니라고 들어온 학근데.

여잔 시집이나 가면 되지만 남자는 그렇지 않으니까 저게 그만둬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정규는 희령에게 다시 말했다.

넌 나오지 마!

희령이는 거기까지 듣고 돌아섰다.

꼴값한다. 너나 그만두렴. 대체 넌 뭘 잘했고 난 뭘 못났기에 너는 그 서슬이니. 너는 내가 좋대지 ? 난 네가 싫어. 그것뿐야. 그런데 너는 왜 도덕적으로 날뛰고 나는 기가 죽어야해? 나는 굴하지 않는다구. 네 식에 굴하지 않아.

승태가 정규 이야기를 꺼낸 게 그 직후였다. 딱딱한 방바닥에서 성급한 성교를 치른 후 그는 말했다.

나 심정규를 만났어. 찾아왔더군. 집에.

집에?

회령이는 동요를 보이지 않고 옷 단추를 여며나갔다. 물론 충격이었으나 내색을 않고 같은 동작으로 잠가나갔다.

희령이와 자기 사이를 쭉 이야기하더군. 들어줬지. 그리고 왜 왔냐고 물으니까 헤어져달라는 거야.

신경 쓰지 마, 회령인 분명히 그 작자가 싫댔지?

싫어요.

그럼 됐어.

그리고 승태는 말했다.

학교 나가기 거북하지?

희령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가기 싫어요, 정말. 정말 못 나가겠어요! 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거북해도 나가요. 다니던 학교니까 마쳐야 돼. 무시하고 나가요.

이때 회령이는 비로소 물었다.

안 나가면 안돼요?

? 왜 그렇게 물어?

학교는 안 나가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나는 결혼하면 좋은 아내가 되고 싶어요. 다른 것이 되고픈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아니야. 희령인 되도록 대학 마치고 대학원도 나가고, 어디 교수 자리라도 땄으면 좋겠어. 난 희령이가 그렇게 되길 바래. 내가 도와줄께.

이상했다. 웬지 승태를 사랑하고서부터 희령이는 대학도 유학도 다 매력이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다만 열심히 사는 주부가 되고 싶을 분이었다. 그러나 역시 정규가 못 나오란다고 안 나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같았다. 까짓 학교, 그만둬도 좋다. 허나 정규의 강요에 의해서 그만둘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나한텐 비교적 공손했어. 난데없이 찾아온 걸 미안하게 생각한다면서 희령일 되게 욕하더군.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리고 승태는 좀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자기와의 사이를 이야기하면 내가 펀쩍 뛰고 놀랄 줄 알았큰데 그렇지 않으니까 알고 있었느냐고 묻더군.

알고 있었지. 그리고 둘이 정신없이 사랑했어. 회령이는 그 대답을 듣고 싶었으나 그는 밝히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고와 나는 라이벌인데 희령이 태도만 확고하면 돼. 희령인 날 사랑하지. 진짜?

희령이는 머리를 끄덕였다.

됐어. 그것만 확고하면 돼. 난 그와 싸울 수 있어. 희령이를 지키겠어. 내 전력을 다해서 지킬 테니 회령이는 나 하자는 대로만 해.

종이 한 장을 남기고 떠난 사람의 후유증이 정규 사건을 만들었다면 피해는 역시 정규가 입은 것이다.

그자를 진짜 사랑하지 않았지?

그걸 왜 새삼스럽게 물어요. 그 점에 대해선 미안한 생각도 없지 않아 있는데. 너무 못살게 굴어서 고 마음도 도망가긴 하지만요.

알겠어, 사랑했대도 할 수 없지만, 난 희령이를 뺏어서라도 사랑해야 하니까.

기분 나쁜 소리 말아요. 나는 나 좋은 사람을 좋아할 뿐예요. 그것이 너무 심해서 탈일 정도로요.

그런가.

그래요.

정규는 자기의 방문 결과를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의 시기하는 마음은 묘하고 골치 아파서 아름답게 쌓아올린 탑도 폭삭 날리는 수가 있다. 그는 그것을 바랬을 것이다. 악마의 속삭임을 승태에게 불어넣어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회령이를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계산은 가망이 없는 듯했다. 희령이는 여전히 태도를 흐트리지 않고 학교에 나왔고, 그와 마주서기를 퍼했고, 어쩌는 수 없이 마주서게 되면 딴 곳을 보면서도 세운 얼굴을 돌리는 법이 없었다,

그즈음 정규는 뻐끔 담배를 피워댔다. 연기가 목으로 넘어가면 캑캑거리고 한 대가 사그라지면 큰일이나 난 것처럼 또 붙여 무는 그런 담배였다. 연기만이 뻐끔뻐끔 그의 입에서 되돌아 나왔다.

저 녀석 큰일났어.

저러다간 장학금을 놓치겠는데.

이젠 술도 퍼마시겠다고 하겠어.

때를 벗고 있는 거야. 늦된 놈이 된통 치르면서.

안됐다. 장차 면접 결혼이나 하면 조건 잘 갖춘 놈인데 주제 파악을 잘못했어.

알고도 모를 게 여잔데 왜 덤비니. 앓아서 잡숫지.

그렇게 말하니 뭐 같잖아.

도대체 난 여자 때문에 인상 쓰는 놈 이해가 안가. 진짜 그렇게 비관이 드나?

모르지 그건 ? 심각하게 기집애 손 한번 만져봤어야지.

기집애들은 심각한 거 안 좋아해.

그래서 남학생들 쪽에서는 웃음이 터지는데.

희령이 걔 큰 코 다치겠어.

심심한 판에 잘됐지, 구경 좀 하구로.

남의 일이락꼬.

천만에, 보란 구경도 안 봐주니.

대체 어느 쪽이 잘못이라구 생각하니?

잘잘못이 어딨어. 다 옳고 다 잘못이지. 사랑에 무슨 잘잘못이야.

아쭈. 그래도 난 개처럼 사랑은 하고 싶지 않아. 무책임해, 싫어.

그럼 당하는 게 꼬소하겠다.

개가 당해 ? 살지 싸악 베지도록 날이 서 있던데.

그것도 또 못 봐주겠어, 아주 도도해.

도도해본들 뭣고. 작살은 다 난 건데.

무슨 작살. 오라는 님이 또 있는데 가면 되지.

어이그, 정규새끼 못났지. 꼴 봐, 채이지 않겠나. 영 남자가 흥미 없더라.

둘이 같아 얘, 그 남자를 좋아한 희령인 별 수 있어. 이제 와서 제 얼굴에 침 뱉기지.

추태야 추태, 한마디로.

신성한 학원에서 그치?

여학생들은 희령이를 꼬집지 못해 입이 근질거리는 모양이었다. 그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아래층에서 희령이가 올라와 여학생들이 몰려 서 있는 복도로 왔다. 다음 강의를 들으러 오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도도하다 해도 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정규가 정신이 돈 것처럼 행동하고부터 그녀는, 강의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까지 어딘가에 피해 있다가 강의가 시작되어 학생들이 다 자리를 잡고 교수가 앞문으로 들어설 때면 그녀도 뒷문으로 소리 없이 들어와 강의실 맨 뒷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시간이 끝나면 누구보다도 빨리 방을 빠져나가서 자취를 감춰버 리는 것이었다. 또 출석에 까다롭지 않은 시간에는 거의 누군가의 노트를 얻어서 학점 따기에만 지장이 없게 강의도 물론 많이 빼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 희령이가 아래층에서 올라오자 그 뒤로 허둥거리는 정규의 모습이 나타났다. 앞에 오는 희령이는 그것을 모르는 모양이지만 마주보고 있던 여학생들은 일제히 눈빛이 빛났다.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지는 것 같으면서 짜릿한 긴박감이 달렸다. 희령이는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앞에 있는 여학생들이 묘한 긴장을 보이는 데만 당황해서 그녀는 눈길을 둘 곳을 몰라 일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못 짓고 있는 것 같았다. 학생들이. 특히 잘 어울렸던 여학생들이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동료의식을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적의(敵意)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는, 그래서 자기 쪽에서도 벽을 만들고 있었는데 그러한

그녀들이 묘하게 빛나는 눈길을 보내자 그녀는 당황해져 버린 것이다. 그 순간이다.

!

큰 소리에 희령이가 전기에 오른 듯이 얼굴을 돌리자 정규의 한 손이 올라와 그녀의 뺨을 소리나게 후려쳤다. 실로 한순간의 일이었는데 복도에 있던 모든 학생들은 아연해지고 또 어리벙벙해져버렸다.

제일 먼저, 우뚝 서 있던 희령이가 빙 돌아서 오던 쪽 아래층으로 되내려갔다. 동시에 정규가 다다닥 바람을 일으키며 계속 이쪽으로 오더니 그들이 다음에 강의를 듣기로 되어 있는 강의실로 들어섰다. 복도의 여학생들은, 돌아서서 아래 층으로 사라져버린 희령에게도 대단한 관심이 있었지만 여하튼 강의는 들어야 하니까, 그걸 배먹고 희령이를 쫓아가 볼 만한 우정도 별로 없어서, 더구나 이런 때의 섣부른 우정은 곤욕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인지 한순간의 놀라움에서 벗어나자 생기(生氣)가 넘쳐 강의실로 몰려들어왔다. 그런데 여기서도 또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강의실엔 이미 들어와 있던 학생들도 많았는데 정규가 앞으로 나아 칠판에 이런 글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안희령이는 나와 육체 관계가 있었다. 따라서 나는 그녀를 성토할 자격이 있다!

 

모든 학생들의 시선은 칠판에 집중되고 갖가지 표정이 그 얼굴에 떠오르고 정규는 느낌표에 와서 소리를 치듯이 힘이 더하더니 분필을 놓고 벌건 얼굴로 빈 자리로 찾아가 앉아 떨리는 손끝으로 담배를 찾아내어 불을 붙였다. 뻐끔뻐끔. 그의 목뼈는 소리를 낼 정도로 아래위로 움직였고 강의실 속은 이상한 정적에 쉽싸였다.

남학생 하나가 일어섰다. 그는 앞으로 나가 칠판의 희령이는 ---육체 관계---성토를 지워나갔다. 아래로 위로 하나하나 깨끗이 지웠다. 그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얼마 후 교수가 들어오고 그 시간의 강의는 시작됐다.

희령이는 달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귀는 들리지 않았고 눈도 무엇을 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교문 밖으로 나와 잠시 섰다. 육차선의 큰길에는 대형버스가 가고 까맣고 노랗고 흑은 베이지색의 승응차 -택시 -용달차가 밀려오고 밀려갔다. 저 속으로 뛰어들까 그녀는 생각하다가 진저리를 쳤다. 발길을 돌려 보도를 걸떴다. 창피함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또 증오도 부풀어올랐다.

- 못난 자식, 더러운 자식!

그녀는 같은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걸었다. 이렇게 되면 그가 죽느냐 내가 죽느냐의 싸움인데 내가 죽을 순 없다 ! 그녀는 중얼거리며 걸었다.

- 학교를 그만둬?

그러자 분한 마음이 치밀었다. 창피하고 또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모를 그의 정신나간 행동을 생각하면 그의 앞에서 사라져주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더 창피한 일같이 생각되었다.

- 더러운 자식. 남자라고 해서, 단지 남자라는 것으로 해서,,,,,,

희령이는 재남이를 떠올렸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N시장을 향해 갔다.

재남이는 마침 A동 관리실에 앉아 있었다. 그는 희령이를 따라 길가로 나와 그녀의 이야기를 길게 듣지도 않고

알았어. 내가 해결할께

하고 말했다.

누나를 때렸다고 - 그것도 학교 복도에서? 그 새끼 죽고 싶은 모양이군.

그래, 죽지 않을이만큼 때려줘.

희령이는 말했다.

그건 걱정 마. 그렇게 나오는 새끼들은 한두 대만 먹여도 뻗어요. 겁만 살짝 줘도 뻗어버린다구.

네가 내 동생이라는 걸 분명히 해야 돼. 그래야 왜 얻어맞는지를 알 테니까.

그러지.

그날 밤 재남이는 정규를 불러냈다. 희령이는 거기가 누님집이니까 얻어먹는 주제에 거기서 소동이 벌어지면 그로서는 제일 죽을 지경일 테니까 너만 감당할 자신이 있으면 거기서 붙으라고 했지만 재남이는 그것은 비겁하다고 했다. 제 집도 아닌데 그런 약점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저는 정정당당했나, 칼에는 칼이야, .

그러나 재남이는 이렇게 말했다.

누나. 나는 공부도 못 했구 그래서 집에서도 싫어해서 이 시장바닥의 군기(軍紀)를 잡는 꼬붕으로 뛰고 있지만. 나는 정면에서 붙는 싸움이 아니고는 안 한다구. 일 대 일이 아닌 싸움은 안 한다구. 뒤에서 공격하구 자기 힘이 모자란다구 작당해서 습격하는 그따위 짓든 안 한다구. 그러니까 나는 내 식으로 할 테니까 걱정 마.

정말이지 정규는 회령이 동생이라는 말이 나오자 완전히 찔끔해버렸다. 게다가 눈이 반짝이고 몸이 =조그맣고 단단한 여자가 탐색적인 얼굴을 현관으로 내밀자 더 당황해버렸다. 그리고 그 여자가 또 뭐니?하고 발칵한 목소리로 쳐다보자 두말을 않고 재남이를 따라나왔다.

집 밖에는 마침 큰 빌딩이 있었다. 그리고 그 빌딩의 담벽을 따라 돌자 꽤 넓은 공지가 나왔다. 정규는 말없이 걷는 재남에게 점점 겁이 났던지 뒤처지면서 우물쭈물했다. 재남이는 그러한 정규를 한방 갈겼다. 정규는 물론 마주 때리지 못하고 또 맞고 또 맞았다. 퍽 쓰러지면 또 세워서 때리고 쓰러지면 또 세우고. 결국 정규는 한방도 마주 때려보지 못했다. 마침내 재남이는 때리는 것을 그만 두고,

, 이 쓰레기 같은 새끼야!

하고 말했다.

니 새끼는 어째 여자나 때릴 줄 알고 남자하곤 붙지 못하니.

어둠 속에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증오로 이글거리는 듯한 정규의 눈길이 재남의 몸에 와 붙었다. 그것을 재남이는 느낄 수 있었다. 정규는 꼼짝을 않고 서 있었다.

기분 더러운 놈. 네놈은 때릴 맛도 없다. 그러나 다시 한번 여자한테 손을 대봐. 그땐 살려두지 않는다.

정규는 집요한게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재남이가 돌아서려고 하자.

그년은 잡년이다.

하고 침을 탁 뱉고 말했다.

재남이는 그냥 돌아서 왔다. 그 뒤에 대고 정규는 또 뭐라고 지껄여대고 있었다. 통금이 거의 다 된 시간에 승태한테서 전화가 걸쳐왔다, 그는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희령이는 단번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희령이, 내일 새벽 여섯 시에 세검동 종점에서 나 좀 만나.

그는 필요 이상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세검동 종점은 왜 하필,,,,,,

왜요?

만나고 싶어.

회령이는 천천히,

그 새벽에요?

하고 물었다,

승태도 역시 잠시 뜸을 뒀다가,

요새는 그렇게 이른 시간두 아냐.

하고 대답했다,

꼭 만나고 싶으니까 시간 어기지 말고 나와줘. 그럴 수 있지?

무슨 일이 있었군요-하는 대신 희령이는,

그러죠.

하고 대답했다.

미안해, 너무 늦게. 그리고 신경 쓰지 마. 아무 일도 아니니까.

그는 다시 한번 부드럽게 되풀이했다.

잘 자. 그리고 아침에 늦지 말고.

.

전화는 끊기고 희령이는 여러 가지 사내분석을 해보았다. 재남이는 시시하게 끝났다고 간단하게 보고해왔는데 간단하게 끝난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정규는 승태를 또 찾아간 것이다. 회령 이를 협라하는 것보다 승태를 흔들어대서 복수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 아래 그리로 달려간 것이다. 그의 날뛰는 모습이 선히 잡히는 것 같았다. 이제 문제는 승태한테 있다. 정말 죽고 싶어 - 희령이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는 아직 강의실 칠판에 써진 육체 관계 어쩌구의 사실은 모르지만 자기의 도망길은 -죽음-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아까 재남이와 만나고 헤어지면서 역에 들러 부여행 차표를 샀다. 추악해지느니 차라리 죽음을, 백제의 삼천 궁녀가 꽃잎처럼 몸을 던졌다는 백마강에 가서 죽자 - 그래서 그녀는 부여행 차표를 샀던 것이다. 내일 새벽 승태를 만나 만사가 모두 자기의 죽음으로 끝나게끔 되어 있으면 죽는 거다. 꽃잎처럼 마지막을 장식하는 거다. 그러면 되겠지. 희령이는 지갑 속의 차표를 꺼내 보았다. 그것은 분명히 부여라고 적혀 있었다. 조그만 위안이 그녀 가슴에 살아나고 가급적이면 죽는 비극에까지 가지 말고 그녀가 그러한 각오라는 것을 승태가 눈치를 채서 그것이 뭐 죽을 일이냐고 승태만 강력히. 요동 없이 의연하면 문제는 해결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 자기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며 또 죽을 각오까지 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알 필요가 있었다,

그의 앞에서 차표를 떨어뜨려 ? 물론 자연스레 떨어뜨려가지고 그의 추궁을 받으면 일은 된다. 치사할 거 없다구. 이 세상 누가 죽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모든 게 잘 해결만 된다면 죽고 싶은 사람 하나 없다구. 회령이는 화가 난 듯이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오래도록 뒤치락거리며 진짜 죽어볼까 하는 생각을 되풀이했다. 죽어버리면 그만인데. 이런 것 저런 것이 다 덮여지고 죽음의 절대적인 폭력이 그 위에 군림하는 건데-

새벽에 희령이는 지갑에 차표가 들어 있는가 확인하고 집을 나섰다. 어쩌면 이 집에 다신 들어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쉽사리? 그녀는 천천히 걸어서 큰길에 나와 텅 빈 새벽 차를 탔다. 차는 곧 도심을 벗어나 관광길 같은 자하문 밖으로 나왔다. 희령이는 맥을 놓고 창 밖을 봤다.

정규는 결국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좋다. 죽어 보이는 수밖에. 무엇이 앞서고 무엇이 뒤지는가를 그렇게 보이는 수밖에. 게다가 계절이 좋아서 백마강에 뛰어들기에는 십상인 것 같았다. 그녀는 승태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종점에서 내렸다.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너무 일렀지?

하며 다자왔다.

미안해.

그도 이렇게 일찍 만나잘 때는 느긋하게만 있을 수 없어 그랬을 것이다.

괜찮아요.

희령이는 대답했다.

터널 쪽으로 걸으면 호텔이 나온다. 승태는 거기서 왼쪽으로 꺽이어 산으로 갔다. 둘은 아무 이야기 없이 산책을 하듯 걸었다. 등산로이기도 해서 주말이면 그렇게 붐비는 길도 아침 그 시간에는 거짓말같이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집들이 다 끝나는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고 동네를 내려다보면서 심호흡을 하고는 반반한 자리를 찾아 나무 밑에 앉았다.

공기가 좋지?

승태가 말했다.

그러네요.

희령이가 대답했다.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잠을 못 잤어?

희령이가 흐밋하게 웃자,

나도 사실은 못 잤어

하고 승태는 말했다.

희령이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침 산은 평화롭고 고즈넉했다. 아무 소리가 없는 속에서 갖가지 땅으로부터의, 하늘로부터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작자가 또 왔더군.

내 동생이 때렸어요. 참을 수 없었어요.

그랬다더군. 그래서 아주 흥분해서, 저번과는 아주 달라져서 미친 듯이 걷어 차고 들어왔어. 집에서 모두들 놀랬지.

?

승태는 뜻 없이 머리를 두어 번 끄덕거리고,

희령이

하고 불렀다.

희령이는 그를 쳐다봤다.

희령이는 왜 나한테 얘기해주지 않았어.

무슨 얘기를? 할 이야기는 했고 못할 이야기는 못했을 뿐이다.

나는 그렇게까지는 전혀 몰랐거든.

그는 덧붙였다.

좀 충격이었어.

뭘 뭘 뭘, 뭐가 그렇게 충격이었냐고 희령이는 묻고 싶었으나 못했다.

그 작자와 뭐 그런,,,,,, 깊은 관계가 있었다지?

희령이는 전신에 힘를 주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미리 얘기해도 되는 일인데 왜 하지 않았어. 미리 알고 있었으면 이렇게 충격은 크지 않지.

그래서 그 작자가 뭐래요, 그게 어쨌다는 거예요?

희령이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는 차분한 목소리가 나와주었다.

그것까지 알면서도 희령이와 계속하겠냐고 거의 협박을 하더군. 그땐 가만두지 않는다구.

별 옴두꺼비 같은 자식, 비겁한 자식.

승태가 희령이를 위로하듯, 어젯밤의 전화 소리처럼 필요 이상으로 부드럽게 계속했다.

걱정 말아요. 그런다구 지가 나를 어쩌겠어. 걱정할 거 없어요.

희령이는 일어났다.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일어나자 승태도 일어났고 그들은 나란히 완만한 산길을 걸었다. 그러면서 승태는 말했다.

밤에 영 잠을 못 자니까 어머니가 말하더군. 여자가 희령이뿐이냐고. 위로하는 거야. 그렇지만 그게 말이나 돼. 나는 희령이를 사랑했는데.

그는 계속해 말했다.

희령이두 괴롭지?

희령이는 땅을 보면서, 걸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희령이, 난 희령이와 결혼은 못하겠어.

뭐라구? 무슨 소리야? 희령이는 걸음이 멈춰지는 것을 가까스로 노력하며 걸었다.

역시 결혼은 못하겠어 이해해 줘.

그리고 그는 말했다.

사랑해, 정말 사랑 해.

희령이는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얼마 후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산 속은 여전히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으나 여러 가지 소리가 많았고 눈 아래로 보이는 집들은 너무나 평화로와서 희령이는 그 한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서서 뜻도 없이 미소를 떠올렸다. 그녀가 서서 미소를 떠올리자 승태는 무슨 말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지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희령이는

됐어요, 이제 가요

하고 조금 더 밝게 뚜렷이 웃었다.

그녀가 그렇게 밝게 웃자 승태는 무슨 말인가 하려던 말을 못했다. 희령이는 그것이 역시 자기를 위로하려는 말이라고 생각되었다. 그것은 백 번 안 하는 것이 나았다. 그들은 오던 때처럼 나란히 산길을 걸어 내려왔다. 그러나 어느 쪽도 그들 사이의 자연스러운 침묵을 깨지 않았다. 시내로 들어와 헤어질 때,

언제 만날까

하고 승태는 물었다.

희령이는 그때도 웃었다. 그러자 승태는 저녁에 만나자고 했고 내일 만나자고 했고 꼭 만나자고 약속을 시키려 했다. 더구나 그는 점점 당황해하면서 만나지 못할 것이 없지 않느냐고 따지려 들었다.

그래요, 만날께요. 왜 화를 내려 들어요? 화는 내지 마세요.

그렇게 말할 때도 희령이는 웃었다. 그것은 절대 억지웃음이 아니었고 그녀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혼자가 되었다. 학교? 그 길로 굳이 학교에 갈 마음은 없었으나 그러나 학교에는 가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보도를 걸으면서 극장 간판도 보고 들어 갈 생각도 해보았지만 시간이 너무 일렀다. 이른 시간이 너무 많다. 그녀는 생각하며 거리를 걸었고 아주 한가롭게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것을 탈까? 그녀는 다가가 소요 시간을 물었고 세 시간을 그 버스가 이곳저곳을 데려가 준다는 것을 알자 바로 올라탔다. 버스는 손님을 더 기다리느라고 좀처럼 출발해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신경을 쓸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완전히 자기 시간이 곤 버스 속에서 앉아서 이것도 저것도 절실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자기 시간을 메워주는 주위에 멀거니 시선을 보냈다.

버스는 사람을 기다리는 대노 기다리다 떠났다. 거의가 그녀가 가본 길이었고 본 일이 있던 곳이었다. 차가 멎으면 사람들은 내려서 무엇인가 둘러보곤 했지만 희령이는 그렇게 해서 의무를 다할 마음은 없었다. 그녀는 자기 시간 속에서 그저 편안하려고만 했다. 그러다가 어느 강변도로를 버스가 시원스레 달리고 있을 때 그녀는 생각이 나서 지갑 속에 끼워뒀던 부여행 차표를 꺼냈다. 그녀는 그것을 찢었고 창 밖으로 나비처럼 날려보냈다. 약속을 다한 차는 그녀를 다시 타던 지점으로 실어왔다. 이만하면 됐어 -그녀는 뭔가 자기자신에 봉사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앞의 세 갈래 길로 왔을 때 전날처럼 정규가 막아섰다. 다른 것은 밤과 낮이 다를 뿐이었다. 희령이는 그가 때릴 거라고 각오했다. 재남에게 맞았으니까. 그러나 전날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어디서 오는 길야 이 쌍년. 네가 한 일을 너는 알지?

그는 계속했다.

그리고도 또 그놈하고 만나고 있었구나.

만났어.

희령이는 대답했다.

그럼 말해봐. 어느 쪽을 택할 건가. 그놈과 헤어질 거야, 학교엘 안 나을 거야

그녀 얼굴에 피가 몰려들었다.

비겁한 놈!

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다.

나를 가게 해줘. 막아섰지 말고.

너는 정조도 망신도 없구나. 어쩌면, 그렇게 뻔번해.

가겠어. 비켜.

못 가. 대답하기 전엔.

너는 나를 잘못 알았어. 그런 걸 대답할 여자라고 잘못 알았어. 협박하면 무너질 여자라고 잘못 알았어.

그 말은 - 어느쪽야. 그놈하고 헤어지지 않고 학교에도 나온다는 거지? 좋다.

그는 빙 돌아서 달려 올라갔다. 경사진 곳의 희령이네 집 쪽으로 달려 올라갔다. 그 순간 희령이 얼굴에 덮였던 피가 내리굴렀다. 그녀는 얼굴이 뜨는 것을 느꼈고 발을 내디디면서 눈앞에 불똥이 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어찔거리는 몸의 중심을 의지력으로 잡으며 온힘을 다해 정규 앞으로 달려나가 그의 앞에 막아섰다.

못 가!

그녀는 소리쳤다.

정규 얼굴에 웃음 같은 것이 퍼졌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희령이를 노려보면서

너도 나를 잘못 봤다. 나도 너한테 짓밟히진 않아. 비켜.

어딜 가는 거야?

네 집에.

못 가. 거기만은 가게 할 수 없어. 절대 절대 못 가!

비켜. 죽고 싶지 않거든.

절대 못 간다고 했어. 안돼!

희령이의 부르짖음은 드디어 비통했다.

그것만은 안돼.

나도 죽인다면 죽인다.

정규의 주머니에서 칼이 나왔다. 그러나 희령이는 비켜서지 않았고 정규는 마침내 그 칼을 내리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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