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生命) 안치소(安置所)에서-박순녀
어느덧 우리는 우리들의 현실이라는 특수한 벽 속에서 불평 없이 추악하게 살아가는 묘한 양들이었다. 우리는 그 벽을 깨뜨려보려 움직여본 일이 없었고 벽밖의 이질(異質)의 움직임을 갈망해 열중해본 일도 없었다. 너무나도 현명한 양들인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 벽 속에 얼마나 강력한 전류가 감추어져 흐르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전류는 때로 파리 같은 물질을 팍. 하는 일순의 불꽃으로 소멸시켜버렸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그때 불꽃이 되어 소멸한 일순의 빤짝임을, 우리는 잊은 지가 오랜 기대나 희망이라는 것으로 막연히 회상하곤 했다. 그리고 역시 그뿐이었다. 우리는 기대나 희망을 갖고 있지 않는 한 벽 속의 생활이 절대로 무사 안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와 그리고 나와 공동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그 소설가와의 공동생활 속에도 기대나 희망 같은 것이 존재하는 예외는 있을 수 없었다. 그와 나는 그런 것 없이 그러나 매일 매일을 극히 충실히 살아나가는 이 벽 속의 모범적인 주민이었다. 우리에겐 할 일이 많았고 그도 게으른 편은 아니었다. 신문의 연재 소설 쓰기, 그리고 대학을 갓 졸업한 약간 지능 부족의 여자들이 쓴 육아 일기 심사, 그런 것으로 그는 수면 부족을 호소하는 일조차 있었다. 우리는 절도 있는 가정인답게 수입과 지출에 대한 의견을 이야기하고 좀더 무리하지 않을 수 없는 생활의 함정에 말려든다. 그래서 우리는 우울에도 짜증에도 잠길 여유 없이 일어(日語))번역의 아르바이트라도 맡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공동생활의 시초에 나는 소설가의 세계는 그것과는 다른 그 무엇인 줄로 알고 있었다. 가령 작가와 창의성, 환희와 죽음에 이르는 그들 특유의 대화, 그리고 요즘 행동성 없이 운위되는 참여에의 검토, 토론 따위, 포즈에 대한 비판 정신, 그러나 나는 이어 나의 인식론상의 소설가란 그 얼마나 가공적인 것이며 방관자의 이기적인 설정인가를 깨닫게 됐다. 그들은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은 역시 하지 못하는 극히 소극적인 지성인일 따름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아니 그에게 어떤 소망을 걸건 어떤 실망을 갖건 전혀 나의 일방적인 일이었다. 나는 사실 그에게 희망도 기대도 갖고 있었고 그런 것이 유년시절에만 통용되는 낱말
이라고 원칙적으로 믿고 있는 여자는 아니었다.
「당신은 왜 작가가 됐을까요? 나는 가끔 생각하는데 작가란 되기 어려운 것이죠? 그 되기 어려운 작가가 이런 아르바이트의 연속 속에서 왜 작가이고자 할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이상하다고 느낍니까?」
그의 어조가 갑자기 정중해진다. 그것은 그가 완전히 나를 잘라버릴 때의 어조인 것이다.
나는 일순 몸이 굳어오고 혼란에 빠져 내가 무슨 잘못된 말을 했나를 어려운 작업처럼 되새겨봐야 한다. 그리고는 긴 침묵에 빠져 서서히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처럼 힘을 잃어간다------
그러나 눈물겹도록 그의 부드러움이 소생하는 것이 이런 날 밤이라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특수한 관계가 하등 믿을 것이 못된다는 공동생활에의 불신으로 능동적일 수 없는 나를 그는 달빛이 흐르면 반드시 그 빛을 받도록 위치를 잡아주며 열기를 띠지 않으면서도 나의 전신에 향락을 느끼게까지 세심한 마음을 쓰는 것이다. 그것은 기대라는 것을 잃은 지 이미 오래인 우리들의 생활을 뒤늦게나마 깨닫고 힘을 잃어 가는 나에 대한 그의 부드러움이었을까, 아뭏든 만족에 모든 것이 애매해질 때 나는 눈을 감고 아름다운 얼굴이 되어 텅 비어버린 머리를 그의 팔에 얹어놓는다.
「몇 점?」
그는 속삭인다.
「백 점..」
「경기군.」
우리들 사이에 잔잔한 웃음이 퍼진다. 트러나 이어 그것은 폭발적인 것---. 변해버려 한사람의 웃음에 또 한사람의 웃음이 겹치는 웃음의 연쇄 작용을 일으키고 마는 것이다.
한때 우리 어린이들은 경기, 서울의 관문을 향해 100점, 99점의 평균 성적을 올려야 했다. 그런데 그 맹렬한 노력의 댓가인 100점, 99점의 경기, 서울의 득점선이 우리들의 밤 작업에도 나오는 수가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확인하고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 유발되는 심한 웃음에 사로잡힌다.
「몇 점?」
때로는 내가 묻는다.
「백 점.」
「경기.」
그날 우리에게 무슨 회피할 수 없는 내전(內戰)이 있었던지 나는 지금 그것을 생각해낼 노력은 하고 있지 않지만, 그 겨울밤의 심한 추위가 밤 열두 시를 향해 한참 부풀어오르고 있은 그날 그 시가. 우리 소설가는 최상에 가까운 부드러움 속에 있은 것만은 틀림없었다. 우리는 땀 밴 몸에 이불을 잡아당겨 덮고 있었다. 경기. 서울을 확인하고 난 뒤의 웃음이 겨우 우리들 사이에 멎어준 직후였다.
「감기」
그는 말했다.
발길에 채는 내의가 거기 있었으나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감기 들겠어요.」
나도 말했으나 그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는 꼼짝 않고 휴식을 취하는 자세였다. 그러면서 몸에서 몸으로 흐르는 체온이 겨울밤을 얼마나 정겹게 하는가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곧 고른 숨소리에 파묻혀 가물가물 의식을 잃어갈 것이었다. 20세 전후에 성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를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면 30세를 넘어서 그것이 이미 사는 것의 의미를 풍부히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리라. 이제 성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공동생활은 존속할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때로 극도의 부드러움이 예고도 없이 우리를 사로잡고 마는 것은 무슨 때문일까. 우리는 역시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말하자면 이 안온 무사한 생활이 우리가 늙어 자연 소멸하는 그날까지 단절을 모르고 예속할 것만 같은 놓여날 수 없는 결정에 대한 두려움이라든지 또는 발작적으로 자가하게 되는 우리의 이별에 대비한 마지막 밤을 장송(葬送)하는 부드러움 같은 것이었을까. 그러나 그때, 우리의 포기에 놓인 생활을 향해 어느 맹목의 탈주병이 필사의 접근을 해오고 있은 것을 우리는 알 까닭이 없었다.
「밖은 추운가봐요. 」
나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춥겠지.」
그는 대답했다.
「이제 자요.」
「그러지.」
「금년에 눈은 오지 않나봐------」
「…」
눈, 눈,,,,,, 그리고 졸음----
대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되살아나는 청각 속에서 우리는 귀를 모았다.
「우리 집이죠?」
「그런 것 같은데.」
소리는 약간의 사이를 두었다가 또 났다.
「우리 대문소리에 틀림없어요.」
나는 아직도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말했다.
「누굴까?」
「글쎄.」
「이상하네.」
우리는 통금 직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나가요?」
나는 비로소 몸을 움직여 나갈 의사를 갖고 말했다.
귀찮은 일이지만 이런 때면 묘하게도 나는 그를 두둔하여 싫은 일을 맡고 나서는 습성이 있었다.
「내가 나가지.」
그는 말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발 밑에 팽개쳐진 내의를 입고 그리고 그는 웃옷을 걸치고 나갔다,
누굴까, 무슨 일로? 두 번 나고 그리고 잠잠해진 대문소리. 그러니까 그 두 번의 소리도 그리 크지는 못했고 우리를 꼭 두들겨 깨워야겠다는 기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술친구는 아닌 듯했다. 다급한 전갈 같지도 않았다. 고리고 나에게 불길한 예감은 없었다. 물론 예감으로 말한다면 우리들의 공동생활도 나에게 아무런 예감 없이 온 것이었고 옛 애인과의 어느 날의 해후나 이불 속에서의 내 개인적인 결심 따위도 전혀 예감 없이 이뤄지는 일들이었다. 그래도 예감이라는 것은 깊은 밤일수록 순간적으로 번개처럼 와 닿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탈주병을 데리고 들어섰다. 급히 옷을 챙겨 입고 이불을 한구석으로 밀어붙인 후, 문을 열어 상규를 맞은 내 기분은 전혀 예감 없이 이뤄진 이 일에 대한 속수무책이었다, 군복을 입고 상규는 문께에 두 손을 읍한 자세로 서 있었다. 나는 그를 소설가에게 우선 소개해야 할 필요부터 느꼈다.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
나는 말했다.
「M농장에서 만난 학생이에요.」
그러나 나도 사실은 상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부대를 도망쳐 왔다는군.」
소설가가 말했다.
「도망요?」
나는 반문했다.
그러나 소설가도 상규도 나의 놀라움에는 반응이 없었다.
「앉지.」
소설가가 말했다.
우리는 앉았다. 그때까지의 우리 셋은 무의미하게도 우두커니 서 있었던 것이다.
「언제 도망했소?」
소설가가 물었다.
찾아 문 담배를 깊숙이 한 모금 빨고 난 뒤였다.
「어젯밤입니다. 」
상규는 대답했다.
「부대를 무단 이탈하고 바로 서울로 오는 군용 열차를 탔습니다. 여러 번 헌병의 눈을 피해는 보았습니다만 결국 잡히고 말았습니다.」
「어디서?」
「용산 역에 닿기 전에 열차에서 뛰어내려 거리에 나섰습니다만 그 직후 길에서 잡혔습니다.」
「길이 더 도망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군.」
「저처럼 잡혀온 군인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한나절을 잡혀온 군인들과 합류하기 위해 기다렸다가 밤이 되어 군 트럭에 실렸습니다. 다시 도망칠 가망은 도저히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대로 잡혀갈 수는 도저히 없었습니다.」
군대식을 연상케 하는 -습니다- 투성이의 그의 설명은 나직이 계속됐다.
「트럭에서 내려 뛰었군?」
「네」
「호송병은?」
「있었습니다. 트럭이 내내 속력을 내어 달리다가 삼각지에 이르러 약간 머뭇거렸습니다. 그때 저는 호송병의 바로 앞에서 내려뛰었습니다.」
상규는 여기서 말을 끊고 그때의 삼각지 거리를 회상하듯 꿈속 같은 눈길이 됐다. 이미 판단력을 잃은 한 병사의 탈주에 비명을 지르며 급정거하던 자가용, 핸들을 자구 꺽어 좌충우돌로 피해준 대형의 시내버스 패트롤카도 어쩌는 수 없이 교통신호를 무시하고 과속으로 빠져 길을 터 주었다. 모든 차량이 순간적 인 협력으로 그를 길 건너 보도에 무사히 서게 한 것이다. 그리고 질서는 곧 회복되어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차들은 다시 미끄러져 나갔다. 그의 호송병이나 군 트럭이 그를 잡겠다고 길 복판에서 더 머뭇거릴 계제는 아니었다. 본의 아닌 협력을 강요당한 자가용 -시내버스-패트롤카가 신경질이 되어 차를 마구 몰아댔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시간은 통금에 가까워 오고 있었습니다」
하고 상규는 계속했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생각해냈고 그리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
처음으로 상규는 시선을 고정시켜 나를 쳐다봤다. 그는 M농장에서도 나를 선생이라 불렀고 지금도 그 시선이 가리키는 대로 나를 선생이라 부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부르는 근거를 나는 알 수 없었다.
「식사는?」
나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식사는 괜찮습니다. 하룻밤 묵게만 해주십시오.」
식사는 사실 상규가 요구할 까닭이 없었고 나도 간예할 의사는 조금도 없었다. 그보다 그때까지도 내가 사로잡혀 있은 것은 역시 그에 대한 속수무책이었다. 생각해보면 이 탈주병이 왜 내 집에 뛰어든지부터를 나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따라서 설명할 수 없는 자의 출현에 대해서 내가 대비할 바를 알고 있을 까닭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결국 도달하는 곳은 왜 그가 내 집에 뛰어든지를 알 수 없다는 출발에서 시작해 그에 대한 책임감의 무(몫)라는 결론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타인을 싫어했고 더구나 곰 같은 신경으로 내 집에서 자보겠다는 따위 제의를 거의 무서워하는 여자였다. 그쪽은 잠자리의 변화 같은 것을 모르고 잘 수 있어도 나는 밤을 밝혀야 하는 당치않은 고통이 우선 싫었다. 이런 내 성격대로 하자면 나는 상규에게 짜증이 동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느 격렬하게 추운 겨울날 새벽에 절박한 마음으로 탈영을 결행한 한 청년에게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내가 짜증만 갖고 있을 수가 있었을까. 쫓기는 자에 대한 관심과 동정이 꼬리를 흔들며 물 속 깊이 자취를 감추는 물고기처럼 그때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내려앉는 것을 나는 보았다.
「자도록 하지.」
하고 소설가가 말했다.
나는 소설가를 쳐다봤다. 불이 들어 있는 방은 우리가 앉아 있는 안방뿐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여기서 함께 자지, 하는 무신경을 드러낼 것을 나는 경계했다. 그는 그런 것에 감각적으로 오는 역함을 모르는 위인이었고, 고것을 자기의 키질로 인정하고 싶어하는 소설가였고 자기가 느끼는 감동을 그런 방법으로 표현해온 전형적 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상규에 대한 문호는 개방하고 있다 하더라도 안방에 자게 하는 내 질서의 혼란은 가져올 수 없었다.
「마루에서라도 자겠습니다」
하고 상규가 말했다.
「추운데 어떻게,,,,,,」
하고 소설가가 말했다.
그는 도저히 그런 가혹한 짓을 이 암담한 얼굴의 탈주병에게 할 수 없는 심정인 모양이었다.
「그런 훈련은 되어 있습니다. 흑 모포 같은 것이 없습니까?」
「슬리핑백이 있어요」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럼 됐습니다. 그것만 있으면 아무 데서라도 잘 수 있습니다.」
나는 다락으로 기어올라가 얼음 덩어리 같은 차가움으로 돌돌 말려 있는 슬리핑 백을 찾아 안고 내려왔다. 이것이면 눈 속에서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 감동에 민감한 소설가는 나에게 약간 불쾌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우리들의 이불 위에 포개져 있던 고급품에 속하는 부드러운 담요를 마루에 깔아주고 들어왔다.
그러나 하룻밤의 도피를 마치고 상규가 돌아가자 우리는 정체불명의 자극에서 해방되어 서로가 전대로의 잔잔한 얼굴로 돌아갔다. 우리의 생활은 이미 아무 것에도 영향을 입을 수 없게 견고히 무장돼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의 장래를 상징하는 한 청년이 그 생을 엉망으로 파괴해놓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생각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었다. 소설가와 내가 어느 오후에 보고 나온 영화는 일신 교도에 가해지는 로마 왕의 참상을 극한 형벌 방법이었다. 우리는 그 영화를 보면서 전차(戰車)를 잘 구사하는 자와 몸에 닥치는 위험을 초인적인 힘으로 이기는 무사를 탄복해 마지않았다. 그 시대엔 그들이 확실히 정의의 사자였던 것이다. 만일 고들과는 판이한 몸짓으로 어느 나약한 육체의 소유자가 왕을 이긴다고 나섰다면 관중은 조소를 금치 못하고 시시한 영화 집어치라는 욕설이나 퍼부었을 것이다. 영화 제작자는 죄도 없이 망해버린다. 그러기에 현명한 관중이나 제작가, 나와 소설가까지도 망하는 길로는 가지 않는 법이다.
그후 내가 역시나 아무 예감 없이 상규를 다시 만난 곳은 그전과 같은 M농장이었다. 여기는 내가 소설가와 공동 생활에 들어가기 전에 살던 곳이었고 내 부모 형제가 지금도 살고 있었다. 상규는 오빠 친구의 동생이라는 것이었다. 무심히 병아리 부화장의 문을 열었을 때 그는 황금을 쌓아올린 것 같은 짚 부스러기 속에서 쑥 빠져 나왔다,
「어머, 여기 와 있었어요?」
「네.」
그는 짤막히 대답했다.
그리고 내 쪽으로 먼지가 날지 않게 마음을 쓰며 옷을 툭툭 털었다. 옷을 대강 털고 난 그는 부동 자세에 가까움직한 태도로 두 주먹을 가볍게 쥐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그를 보는 순간 외치듯이 반가와하며 말을 걸었으나 사실 더 말할 것이 없는 것을 곧 깨달았다. 여기 이렇게 와 있는 것을 보면 혹시나 잡히지 않았을까 했던 염려는 해소된 셈이었다. 나는 시선을 돌려 부화장 안을 두루 살폈다. 이천여 마리라는 병아리들이 완전한 보온 상태에서 사금처럼 밀려다녔다. 허리를 굽혀 손을 내밀자 그것들은 덮어놓고 내 손가락을 쪼아댔다.
「그날 밤 선생님 댁에서 폐를 끼치고 말입니다.」
상규가 옆에 와서 말하고 있었다.
「바루 여기 왔더랬어요?」
「아닙니다.」
나는 허리를 펴고 짚 무더기 앞으로 가 그것을 깔고 앉았다. 상규도 그 옆에 다소 떨어져 앉았다.
「서울 거리를 쏘다녔습니다. 당장 밥을 먹을 수 있는 생활이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몸을 누일 수 있는 작은 방과 세 끼의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어떤 천한 일이라도 할 각오로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무서운 냉대 속에서 일자리는 얻어지지 않았습니다. 가정 교사 자리라도 하고 신문 광고에 무슨 희망을 걸고 싶었습니다만 저에게는 돌아다닐 교통비마저 없었습니다, 결국 걸어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얻어지지 않았습니다. 배는 고프고 사람들의 냉대는 무섭고 또 돌아다니기에도 그만 지쳐버렸지요. 할 수 없이 이리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참 후에 나는 물었다.
「집에는요?」
그러나 상규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체포될 염려가 있어요?」
그래도 역시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체포되면 어떻게 돼요?」
「지금이라면 아마 제 부대로 도루 압송되겠지요. 그래서 그곳 감방에 처넣어 집니다. 부대에는 법무관들이 다 있으니까요.」
나는 이야기의 방향을 돌렸다.
「오빠는 아마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아할 거예요.」
오빠 - 나는 그 사람의 교정 불능의 결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침식을 잊고 병아리와의 생활에 열중해 있다가도 사람만 보면 자기 일을 떠맡겨 버리는. 도무지 책임 소재 불명의 사나이였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명동이나 빈들거리는 것이 가장 좋은 모양이었다. 지금도 이 부화장에 없는 것을 보면 기차를 타야 가는 그 명동에 내뺀 것이 분명했다. 20세 전후에 성악가가 되려던 소망을 포기 당한 후 다신 소망이라는 것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저는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상규가 별안간 선서 낭독조의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을 살아가는 저의 고통을 문학에 절실히 호소하고 싶습니다. 선생님, 저는 K시에 있는 어느 결핵 병원에처 보초로 근무했습니다. 그것도 제 초소는 시체실 옆이었습니다. 제가 상사를 카빈총으로 때리고 도망치기 며칠 전 한 젊은이가 죽어서 그 시체실에 들어갔습니다. 밤중에 보초를 서노라면 깨진 유리 창으로 달빛을 받은 푸른 시체들이 조용한 목소리로 밤을 새워 속삭이는 말이 들려오지요. 저는 며칠 전에 죽어간 그 젊은이가 어떻게 살다가 죽어간지를 그 속삭임으로 알게 됐습니다. 선생님, 그 젊은이는 중학교를 마쳤으나 고등학교 엔 진학 못한, 온천장 거리에서 자란 사나이였습니다. 어느 여름날 관광호텔 앞에서 자가용 안의 서울 처녀가 그가 파는 복숭아를 사먹고 돈을 모욕적으로 던졌답니다, 그날부터 서울 상류 사회의 처녀를 정복하는 것이 소년 시절을 통한 그 젊은이의 야망의 전부였답니다. 그러나 서울 상류 사회 처녀는 그가 죽기까지 신기루로 남아 있었을 뿐이었지요. 선생님, 그때 저는 문득 저의 소망의 전부도 결국은 신기루로 남고 저 역시 그 젊은이처럼 죽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일단 그런 암시에 걸리자 지금까지 억누르고 있던 공포가 막을 길 없는 파상 상태로 밀려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더는 보초근무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제 얼굴은 달빛을 받아 푸른 사자들의 그것보다 더 창백했습니다. 카빈총을 든 손은 발작적으로 떨려 오더군요. 제 목숨을 노리는 검은 마수가 제 목 언저리를 슬슬 쓰담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 그 상사가 나타난 것이지요. 그는 이유 불문 저를 때리려 들었습니다. 순 심심풀이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우리를 얼마나 때려왔겠습니까. 저는 그가 발길을 들어 제 복부를 걷어차기 일순 전에 떨리는 손끝으로 카빈총을 번쩍 쳐들어 그를 후려쳤습니다. 한참 후려치고 난 후에도 저는 그 손이 제 손이었던지 사자들의 손이었던지 잘 분간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그의 이야기 도중에 벌떡 일어났다. 우연히 시선을 보낸 한 구석의 병아리들이 묘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동료 하나를 주위의 여러 놈들이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쪼아대고 있었다. 쫓기는 놈은 피를 흘리며 다른 무리들 속으로 기어든다. 그러면 여태까지 아무런 이상 없이 귀여운 모습 그대로 삐약대며 놀고 있던 그놈들이 또 삽시에 동요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피 흘리며 도망온 동료를 감춰줄 생각은 추호도 없이 더 맹렬한 기세로 달라붙어 쪼아댄다. 그 가혹성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털을 뽑고 살을 헤치고 내장이 쏟아져 나와도 멈출 줄을 몰랐다. 세로도 가로도 없이 그저 노랗게 몽글몽글한 방울 같은 어린놈들이 그 무슨 잔인성일까. 상규를 찾자 그는 내 뒤로 와서 팔을 내밀어 빈사직전의 그 중상의 병아리를 주워들었단. 그러자 그 자리에 다시금 조그만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자기 동료를 집요하게 쪼아대던 그 중의 한 놈이 이번에는 자기가 공격을 당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놈은 왜 자기가 공격을 당하든지 납득이 가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도망갈 생각은 않고 집적대기 시작하는 자기 주위의 동료들을 이리 돌아다보고 저 리 돌아다보고 했다. 그러나 그놈의 납득 여하는 하여간에 공격대의 투지는 가열되는 기세였다.
「왜 이래요, 이 병아리들이?」
나는 놀라서 물었다.
「피를 보면 미칩니다」
하고 상규가 대답했다.
그는 자기 손아귀 속의 중상의 병아리를 한옆에 내려놓고 새로이 공격을 받기 시작한 그 어리둥절한 놈을 골라들었다. 그 목 언저리 꽃솜 같은 털 한 끝에 붉은 핏방울 한 점이 묻어 있었다. 자기가 쏘아 중상을 입힌 동료한테서 묻은 핏방울이 분명했다. 상규는 그것을 말끔히 닦아서 도로 제자리로 돌려주었다. 공격대들은 이미 아무 관심이 없이 돌아온 그놈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병아리들은 피로 흥분할까요, 색으로 흥분할까요?」
하고 나는 물었다.
「글쎄요,,,,,,」
상규는 막연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큰일이었다. 이 부화장의 주인, 내 오빠는 병아리 이천여 마리를 열다섯 마리도 죽이지 않는다는 우수한 양계사였다. 그러나 그러기까지는 한달 가까이 병아리와 함께 자고 함께 먹보 함께 호흡하는 철저한 몰두가 있어야 했다. 먹이의 내용에서부터 온도 조절, 전문적인 치밀한 관찰, 그리고 지금 같은 그들간의 돌발 사고에 이르기까지 잠시의 방심도 있어서는 안되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반체제(反體制) 소설 구상에 정신이 없는 한 도망병에게 자기의 전 재산을 내맡기고 있다. 병아리들은 이제 성의 없이 배합된 먹이에 급성 장염을 일으켜 그 불만의 출구로 저들끼리의 간단없는 반란을 일으켜 무더기로 쓰러져나갈 것이었다. 그리고 상규는 나만 나가면 그 황금 짚 무더기 속으로 다시 기어 들어갈 것이 뻔했다.
그리고 계절을 좇아 찾아온 늦은 봄, 상규의 편지가 원고 꾸러미와 함께 우송돼왔다. 역시 내 앞으로 보내온 것들이었다.
선생님이 M농장을 다녀간 후 저는 할 수 없이 집으로 내려왔습니다. 집에선 부친께서 또 걱정이십니다. 개 짖는 소리만 나도 저를 체포하러 헌병이 찾아오는 건 아닌가 하고 불안해하십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소설을 썼습니다. 선생님이 소설을 읽으시면서 난폭한 표현을 느끼시면 한 청년이 난폭한 상태에 놓여 있는 그 생활을 믿어주십시오. 제 생활의 밑바닥은 제가 표현한 것 이상으로 난폭합니다. 환경이 저를 이렇게 만들어줍니다. 부친이 저 때문에 불안해 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입니다. 마을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매일 방구석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집에 왔을 때 산 위에는 눈이 덮였었는데 벌써 복숭아꽃이 피었나 지고 지금은 파랗게 잎이 돋아 있습니다, 그 동안 한번도 밖에 나가지 못하고 감옥에 들어간 것처럼 방안에만 있어야 했습니다. 거의 미칠 것 같은 기분입니다. 선생님! 삶다운 삶을 가지고 싶습니다. 읽을 책도 없이 방안에서만 보내야 하는 미칠 것 같은 이 일 - 그 동안 여러 번 자수할까 하고 마음먹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년여의 형기와 나머지 군복무를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참혹한 일입니다. 아니 그것보다 군대 생활을 생각하면 지금도 거의 생리적인 역함을 느낍니다. 죽음의 댓가를 치르더라도 다시는 군대생활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 제 소설이 인정이 되어 기천 원의 고료만 받을 수 있다면 어떻게 서울로 올라가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친이 약한 노구를 이끌며 불안 속에서 밭가는 모습을 멍청히 방안에서 구경만 해야 하는 저의 젊은 육체를 저는 진정 미워합니다. 집을 떠나기만 하면 좀 살 것 같습니다. 저의 욕망을 걸 순 없을까요.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것이 지나친 파렴칠까요, 그래도 기다리고 싶습니다.
나는 그 난폭 속에 있다는 청년의 편지를 다 읽고 나서 원고 꾸러미와 함께 소설가 앞으로 밀어보냈다. 그는 편지는 받아 읽었으나 원고는 내 앞으로 도로 보냈다.
「당신이 먼저 읽어봐요」
하고 그는 말했다.
「시간이 나면 나도 읽어보기루 하지.」
편지를 읽고 아무 말이 없는 그에게 나는 물었다.
「이 청년은 도대체 어떻게 될까요?」
「생각보다 생명력이 강한 법야. 그에게는 욕망이 있으니까」 하고 소설가는 대답했다.
「욕망?」
하고 나는 짧게 웃었다.
「내게도 욕망은 있었는데 그 욕망에 건 생명력 때문에 나는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자 소설가는 묘하게 웃었다. 자기 납득에 도달한 자만이 보일 수 있는 그런 묘한 웃음을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은 내가 욕망 없는 사나이로 판명된 날. 자기의 생명력 없는 생애가 시작됐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런 감상이 못마땅하세요 ? 여자는 사나이에게 욕망을 걸면 안되나요?」
「내가 이 시대를 고난에 차서 사는 위대한 소설가고 당신이 그 아내라는 욕망 따위?」
「그렇다면 또 안 되나요?」
「안 되지. 나는 영웅을 원치 않아. 그럴 필요도 없어. 그리고 나와 똑같은 얼굴로 사는 아내도 원하지 않소. 또 그래봐야 어느 날엔가 당신은 결국 당신이 혼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요. 인간이 남의 힘으로 욕망을 이를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지.」
「그렇다면 우리들의 공동생활도 결국은 아무 필요가 없는 것이게요?」
「그렇지야 않겠지. 우린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야.」
그리고 그는 또다시 그 웃음을 웃었다. 흥분하지도 않고 요란스럽지도 않게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또 말했다.
「나는 가끔 당신의 기분으로 해서 느끼는 것이 있는데 나를 떠나고 싶은 생각을 품을 때가 있는 모양야. 그렇다면 내가 좀 묻겠는데 당신은 우리가 이 공동 생활을 해소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았소? 생각해보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손해를 입지 않는다는 계산은 서 있소? 우리가 몇 번 손해를 보고 나면 생명의 마지막을 맞게 되는 거야, 그래서 결과적으로 우린 우리의 생애를 남에게 몇 조각으로 나눠준 것밖엔 안돼. 사실 우리가 상대방에 기대하는 게 뭣이겠어? 문제되는 건 자기뿐이지. 기분을 떠나 내가 말 하는 손해라는 것을 정말 구체적으로 생각해봐요. 나는 솔직히 말해 당신이 원한다면 무엇이나 응해줄 추도 있어, 긴 주저 없이 당장에라도 말야. 그것을 당신은 알고 있나?」
그는 역시 웃는 얼굴을 잃지 않고 그 이상한 부드러움 속에서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너는 우는 나를 상상하겠지만 마지막에 웃는 사람은 나라는 혼자만의 세계에 익숙한 자의 웃음과 부드러움 같았다. 그러자 나는 서늘한 어떤 당황감 속에서 며칠 전에 있은 그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어느 회식석상이었다. 우리를 초대한 주인측이 신문사에 관계하는 직업인이었던 탓인지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5,6명도 그 계통의 사람 같았다. 회식은 시작되고 남자들은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죠니워커를, 여자들은 전야제 없는 본 메뉴인 식사로 바로 들어갔다. 내가 소설가의 부인으로 불리는 것처럼 남자들 사이사이에 섞여 앉아 있는, 가정이 목까지 꽉 차 있는 듯한 그 여자들도 거기 있는 누군가의 부인들일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는 여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입에 대지 않는 그 술이 사실은 경이적인 효능을 갖고 있는 것을 나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것은 둔한 예술가를 날카롭게 만들어주고 실의에 빠진 패배자를 용자로 둔갑케 하고 노인을 청년으로 환원시키는 등 가지가지 조화를 부린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전설대로 우리 소설가도 그 효능을 재빨리 보였다. 그것도 양주를 마신 탓으로 신사도쯤으로 생각했던지 옆의 여성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싫다는 술을 자꾸 권한다. 그것이 좀 집요하다고 느껴졌을 때 그와 나의 특수 관계 때문에선지 내 신경이 우선 편치 못했다, 저렇게도 가정으로 꽉 차 있는 여성에게 그 입장을 살려주는 것이 본시 신사도인데 싫다는 술을 자꾸 권한다. 참 저 신사 내게 창피를 주는군, 제발 그쯤으로 그만뒀으면 - 나는 될 수만 있다면 그와 내가 아무 관계없다는 표정이라도 지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 그 여성은 당연한 일로 자기 입장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치맛자락을 아무개의 부인답게 싹 감아 안고 분연히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내가 「앗!」하고 입을 가릴 잠도 없이 술잔 하나가 소설가의 면상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것은 농구 선수를 연상케 하는 정확성을 갖고 소설가의 이마에 와 부딪쳐 죠니워커를 그 얼굴에 뒤집어씌웠다. 동시에 머리가 작고 아래로 덩치가 커지면서 균형이 잘 잡힌 서구적인 체구의 한 사나이가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시시한 새끼야, 당장 이 자리서 나가! 니가 소설가라고? 소설가가 대단한 줄 알았구나. 웃기지 말자, 이 새끼야. 우리 신문들이 너 같은 새끼를 먹여 살리기 위해 소설을 씌우고 있다, 굶어죽는 새끼들을 살피고 있는 거야. 그거나 알고, 이 새끼야, 소설 쓴다고 해라.」
술로 인해 좀 지나쳤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우리 소설가의 빗나간 신사도를 술의 이름으로 눈감아줄 아량이 상대방엔 조금도 없었다. 주인측이 성난 그의 등을 두들기고 이북 방송 막듯 그 입을 틀어막지 않았던들 그 모멸적인 질타(叱咤)는 얼마나 계속됐을까. 주인은 이 사람똬 저 사람께 「야, 야」를 연발하고 「이러지 말자, 이러지 말자」를 되풀이했다. 서구적인 사나이는 역시 주인측의 입장에도 세련된 이해를 보였다. 그는 세기적 대배우의 은퇴 모습처럼 만류하는 사람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회식 석상에서 나갔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도 더 있어달라는 협박이나 받게 될 것처럼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그때까지 우리의 소설가는 머리를 떨구고 긴장감이 하나 없는 술취한 사람의 자세 그대로 몸을 흔들어댈 뿐, 아무 반응도 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한 우리 소설가를 감개와 분노에 서린 눈길로 한동안 지켜보았다. 술, 아니 소설가의 이름으로 왜 그렇게까지 완벽한 모욕을 당해야 하는지 나은 이해할 길이 없었다. 이윽고 나는 주인측의 같이 가시라는 협박이라도 역시 받게 될 것처럼 그 자리서 마지막으로 뛰쳐나왔다. 내 속은 완전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길에 나선 나는 정신없이 달려가다 그러나 이내 멈춰 섰다. 그리고는 돌아서 온 길로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우리의 소설가는 오리처럼 뒤퉁거리는 걸음으로 막 골목에서 나서는 중이었다. 그는 일단 나선 지점에서 휘휘 사방을 둘러봤다.
-나를 찾고 있겠지.-
맹렬한 분노가 수치감과 함께 몸 속을 달려 퍼진다. 나는 다시금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적당한 거리까지 와서는 뒤를 돌아다봤다. 소설가는 마침 개천가에 버티고 서서 굵은 오줌줄기를 내갈기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그 엉망인 제 분수로 나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그와 관계지어지는 것을 목이 터져라 부인하고만 싶어지는 나를「여보, 여보오.」 안하무인으로 내 이름을 불러 댄다. 술기운으로 발음도 분명치 못한 그 취한 특유의 늘어진 목소리로.
-바보 병신 꼴값 마라. 왜 날 찾아, 쓸개도 없이 그 꼴을 당하면서.-
새로운 분노가 이제는 나를 무분별로 몰아넣는 듯했다. 바르르 떨려오기까지 하는 몸을 날려 나는 다짜고짜 큰길을 건넜다. 그리고 나를 찾아 헤드라이트가 깔린 밤길을 헤맬 그야 죽거나 말거나내 알 바 아니었다. 스러질 줄 모르는 분노를 안고 가로등이 없는 어두운 길을 나는 그저 달렸다, 그러면서 나와 그와의 관계를 저주했다. 저 거지발싸개만도 못한 소설가와 관계가 없었던들 나는 이렇게 비참한 심정이 될 리는 없었다. 그와 내가 - 마침내 헉헉거리는 발길을 멈춰 나는 어느 전선주 밑에 섰다. 그러자 호흡이 점차 가라앉아 가면서 무슨 착각으로선지 차들이 질주하는 소란한 거리가 눈에 깊이 파묻힌 인적 없는 겨울 거리로 변해갔다. 그리고 나는 그 겨울 거리를 망연히 내다보며 생각하는 것이었다.
소설가란 본시 신문들을 죽이고 살리는 위대한 존재다. 신문들은 소설가의 팔 소매에 매달려 살아야 한다. 소설가가 눈 꼬리를 한번 치떠 보여도 가슴이 철렁해서 그 눈치를 살핀다. 모모 신문들이 소설가로 인해 흥하고 망했다. 따라서 우리 소설가의 문전에도 신문들이 비실대고 우리 소설가는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 한다.
「난 창신들 신문에 글을 쓸 수 없소.」
진정 지금이라도 그는,
「난 당신들 신문에 글을 쓸 수 없소!」
하고 얼마나 외치고 싶을까 !
그날 밤 우리는 각자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겨울 거리서 돌아온 나와 발 밑이 출렁이는 밤거리서 돌아온 그는 조심스런 새 연인들처럼 말없이 그날 밤을 잤다. 그리고 새 아침에 그는 새 사실을 확인하고 마음을 걷잡을 수 없는 사람처럼 말했던 것이다.
「당신은 피가 마른 사람이야. 어떻게 그 거리에다 나를 버려 두고 올 수 있었소?」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가라앉아서 나는 그가 나에게 증오를 느끼고 있는 것을 명확히 알았다,,....
내가 고독과 결혼할 갈망을 갖기 전엔 말단적인 기분으로 해서 이 사나이를 흔들어놓는 일은 이제 하지 말자, 나는 하나의 원칙을 끄집어냈다. 실로 우연한 일로 그의 깊이 주름잡힌 속마음을 들여다본 듯해서였다. 그러나 그 원칙은 마마 딱지를 긁지 않는 만큼이나 지키기 어려운 일이었다. 상규의 글을 읽고 난 나는 그 속에 담긴 악마적인 속삭임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삼가기로 한 반역을 자꾸 강요해왔다. 그리하여 결국 나는 흥분을 누르지 못하며 말했다.
「그 원고 다 읽었어요.」
「어땠어?」
하고 그는 물었다.
「기가 막혀요. 마구 사람을 끌어들여요.」
「어떤 소잰데?」
「황색 먼지가 항상 일고 있는 어느 농촌의 얘기예요. 긴 보릿고개의 여름날, 배고픈 아이들은 풀을 뽑아먹으려 거기 방죽을 달려요. 그 속에서 동양적인, 채식 민족적인 어떤 유약성을 저주하는 한 청년이 어처구니없는 욕망을 키워 갖고 나타나는 거예요. 그는 자기의 모든 방황이 젊은 날의 무의미한 하나의 민감성에 지나지 않지 않나고도 괴로와해요. 그러나 그는 자기의 젊음을 다해서 조국에의 증오를 말하고 있어요. 동시에 학대받아야 하는 이 민족의 슬픔을 이야기해요. 그러면서 나중에는 그 조국에 대한 영탄이 점철되고 그것은 매혹적 인 설득력을 갖고 읽는 사람의 가슴을 흔들어놔요. 너무나도 매력에 차 있는 글예요!」
나는 저도 모르는 새 붉게 가열되어 오른 눈길이 되어, 밤이면 심각해지고 문학을 생각한다는 청년을 위해 찬미를 아끼지 않았다. 사실을 말해 내가 그 청년을 절실한 정열을 갖고 그토록 찬미하는 것은 우리 소설가와는 전혀 다른, 증오나 애정에 대한 현란한 세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지금껏 나와 같이 사는 사람의 소설을, 그 세계를 헐기 위해서만 남의 작품을 이상한 적극성을 갖고 읽어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찬미를 늘어놓을 때 그것은 곧 그에 대한 반역이었다.
「그렇게 좋았어?」
아니나다를까, 그는 나의 흥분을 놀리듯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읽어봐요, 당신은 전문가니까」
하고 나는 대답했다.
「읽지.」
「좋다고 생각되면 길을 터 주세요, 한번.」
「터주지.」
그러나 그는 신문 소설과 잡문 쓰기에 바빠서 좀체 시간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나면 우선 책방이나 하다못해 영화관이라도 돌아다니고 싶어했다. 겨울밤에 도망 온 한 청년을 본능적으로 껴안아주고 싫어했던 기억은 이미 저항 없이 깨끗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상규의 욕망에의 절규는 이렇게 하여 우리 집 다락 속에서 숨소리도 가녀린 노파처럼 쭈그리고 앉아 오지 않을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여름은 장마가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우리 소설가는 무더위와 습기를 핑계로 매일 게으름을 피려 들었다. 신문 소설 몇 장만 써 갈기면 해방감에 충족된 얼굴이 되어 우산을 펴들고 거리로 나선다. 우수 깃든 여학생처럼 비오는 거리를 좋아하는 꼴 그것이었다. 뒤에서 내가 불러 세우기라도 할까봐 등 넓이를 좁히며 대문을 나서는 것이다. 나는 심리적인 통찰력을 갖고 그의 게으름이 결국 그를 채찍질할 뻔한 순환을 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증세는 정직히 나타나 그는 우선 상규에 대한 관심을 표시했다,
「책도 없이 감방 같은 방 속에 갇혀 산다니 읽을 책이나 몇 권 갖다주지.」
「네?」
「그 도망병께 말야.」
「당신이 갖다줘요.」
나는 금방 생기 도는 목소리가 되어 물었다.
「당신이 다녀오지, 시골 공기도 한번 쐴 겸.」
역시 도망병에 대한 겨울밤의 감동은 그리 절대적일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댁은 무슨 책을?」
「잡지나 갖다주지.」
「그렇게 하지요. 허지만 원고에 대한 것을 물으면 뭐라 하죠?」
「당신이 느낀 대로 말해요.」
「참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군요.」
「왜? 당신이 읽었는데.」
그에 대한 반역은 삼가자던 나였지만 웬지 갑자기 내 안구 속으로는 눈물이 밀려나왔다. 나는 그것을 긋느라고 몇 초 동안 말이 없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 학생이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부르는 상대가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그가 나에게 이성적인 설레임이라도 느껴 나를 그렇게 부르는 줄 아세요? 그는 당신을 부르고 있는 거예요. 소설가인 당신을, 나를 통해 절실히 부르고 있는 거예요. 당신에게 자기의 고민과 앞날과 갈망을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직접 대하는 것이 무섭소 떨리는 나머지 나라는 매개체를 통해 돌을 던져보는 것이죠. 그가 나한테 원고를 보내올 까닭이 있어요 ? 자기가 되고 싶고 그래서 자기에겐 절대자인 소설가, 당신에게 보내는 것, 그것이에요.
내가 한가지 답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지금을 사는 이 땅의 소설가로 그가 왜 당신을 생각했는지 그 점은 모르겠지만 그는 결코 나 따위 일래 독자의 변엔 환희도 그렇다고 절망도 느낄 수 없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이야기하고 나자 나는 내가 깊은 슬픔에 빠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문득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고 내가 사정없이 버린 학생 시절의 애인이 그리워졌다. 아, 우리는 이대로 늙어 가는 것이다. 우리 소설가는 이제 체중이 70킬로를 넘는 비만체로 화해지고 그 눈은 우둔할 정도로 고요함과 영구적 인 미소를 잃지 않게 되는 것이다. 서서히 서서히 눈에 띄지 않는 벽에 의한 살인이 이렇게 우리 주변에선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상규의 체포로부터 일년이 지났다. 녹음은 짙어가고 뜨거운 태양과 뭉게구름은 그때의 상규를 초조하게 했듯이 지금은 나를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내가 그의 체포를 모르고 달 지난 잡지 몇 권을 싸들고 황색 먼지가 항상 일고 있다는 그 농촌으로 내려갔을 때 아이들은 쭐을 뽑아먹으러 역시 방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잎이 돋았다던 복숭아는 벌써 무성한 푸르름 속에서 열매를 내보이고 있었다. 내가 그곳엘 갔다는 것을 나중에야 전해듣고 교도소에서 보내온 상규의 편지에서도 말했듯이 나를 맞은 그의 어머니는 얼굴 색이 변해 가지고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시골에서만 살아온 그녀로서는 내가 책을 싸들고 나타났다는 것이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 모양이었다. 상규는 그 실례를 대신 깊이 사과 드린다고 했다. 불길한 연상 속에서만 줄곧 살아온 그녀는 잔뜩 긴장해서 어색한 표정으로 찾아온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었을 것이 라고 송구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깃발을 뺏긴 유랑의 사단병 처럼 자기의 실지회복에 몸을 해치고 있는 듯했다.
---선생님, 피로에 지치고 연약해진 제 영혼은 그때 시골에서 농부처럼 평범히 그리고 안일하게 살고픈 유혹에도 빠졌었습니다. 그러나 전 그렇게 유약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혹독한 중노동과 작은 가다 밥 한 덩어리 때문에 닷새에 한번이나 대변을 보는 이 고난의 A산성 아래의 교도소생활. 그러나 저는 지금도 제 소설이 세계적인 문제성을 던진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습읍니다. 제 친구는 죽어갔습니다만 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제가 이렇게 욕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용기 있게 살고 싶습니다, 실망과 환멸로 가득히 적
시어진 제 욕망을 지키기 위해서도 그렇게 살아보겠습니다,,,,,,
나는 A산성 아래 교도소로 상규를 면회 가는 우리를 상상해보았다. 그럴 때면 곡 우리가 함께 내 眼底에 잡히고 내가 그 제의를 하면 소설가도 동의의 뜻으로 말이 없었다. 어느 날 소설가와 나는 A산성을 향해 손을 잡고 가면서 한 탈주병이 느닷없이 우리 생활로 뛰어든 그 격렬하게 춥던 겨울밤을 생각한다.
그는 우리에게 묘한 돌 한 개를 던졌는데 우리는 그것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그리고 막상 상규와 마주서는 우리는 그에게 무엇을 느끼게 될까. 이젠 끊을 수 없는 견고한 애정일까. 그러나 내 공상에 보장이 없어질 때 나는 초조히 여름 하늘을 흐르는 뭉게 구름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A산성행을 차일 피일로 미루고 있는 중 M농장의 부화장 주인이 알콜 중독으로 정신 이상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그것은 우리가 피치 못할 하나의 불행으로 각오한 일이기는 했다. 우리는 M농장으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 알콜 중독자는 식사 거부의 단식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몸을 깊이 감추고 있다고 믿고 있는 부화장으로 들어서자 지금은 병아리들을 성계사로 내보내고 텅 비어 있는 그 한 켠의 눈익은 짚 무더기 속에 그는 누워 있었다. 그는 우리를 알아보고 반듯이 누웠던 몸을 돌려 배를 깔고 우리를 맞았다.
「왜 이러고 있어요, 오빠?」
하고 나는 어떤 유머스러한 감마저 들어 무의식 중에 높은 소리로 말했다.
그는 우리를 슬쩍 쳐다봤을 뿐이었다. 우리가 맡고 있는 임무는 그에게 식사를 권해보라는 것이었다.
「오빠, 왜 쫄쫄히 굶고 있어요?」
나는 다시 물었다.
「약을 탄 음식을 주잖아.」
쉽사리 그가 입을 열었다
「약? 무슨 약을?」
「독약이지. 날 죽이려는 거지.」
그는 당연한 일처럼 말했다.
「누가 오빠를 죽이려 해요?」
「모두가 그래.」
그런 것은 뻔한 모양이었다.
「그럼 내가 갖다드려요? 절대 약을 넣지 않은 걸로 말예요.」
그는 말이 없었다. 소설가가 나에게 눈짓을 했다. 나는 살림집으로 나가 이미 마련돼 있는 죽과 삶은 계란을 들고 부화장으로 다시 왔다. 나를 쫓아오려던 가족들은 나의 만류를 미심쩍은 얼굴이 되어 내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정성어린 식사 제공을 독약이 들었다고 일언지하로 거부해온 그 알콜 중독자가 변심한다면 사실 안도감보다 수모감이 앞설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그것을 권해달라고 말했었다.
「오빠, 식사 가져왔어요.」
나는 그의 코밑에 뽀얗게 잘 퍼져 있는 김 도는 죽 그릇을 디밀었다. 계란도 가지런히 놓아 주었다. 알콜 중독자는 나를 보고 음식물을 보고 그리고 혼잣말로 말했다.
「너를 믿고 먹지.」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우스꽝스런 일이었다. 그는 식욕이 없는지 이어 음식물들을 밀어냈다. 그렇지만 그의 단식은 일단 중지된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일어선 우리를 있어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그에겐 환청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모양으로 누가 쉴 새없이 죽이려 든다고 했다. 그가 적지 않은 돈을 사기해먹은 일을 나는 알고 있는데 그런 데서 그의 정신이상이 필연적으로 온 것인지도 몰랐다.
「아, 그렇지만 내가 뭘 나쁜짓을 했누!」
마침내 그는 울부짖으며 짚더미 속에서 기어 나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하고 국가원수의 이름을 불러대는 것이었다. 마리아상 앞에 기구 드리는 안타까운 신자처럼 두 손을 가슴 앞에 꼭 모아쥐고 - 소설가와 나는 얼굴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오. 」
살려달라는 애걸은 여전히 계속되고 그 상대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국가원수에게 어떤 잘못을 저지른 씻지 못할 기억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하필이면 크게 나와 국가원수를 찾다니. 그것은 아무래도 우리에게 어떤 유머러스함과 웃지 못 할 충격을 동시에 주는 이상한 광경이었다.
M농장에서 순경이 동승한 차로 부화장 주인이 뇌병원으로 실려간 후 사람들은 한동안 뒷공론으로 분주했다.
「순경 말을 고렇게 잘 듣다니 놀랐어요. 」
가족의 한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 옆의 가족 역시
「순경을 생각해낸 건 히트야」
하고 대답했다.
「밖엔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다고 버티던 사람이------」
「자기 보루를 나서면 죽을 것 같아서 그랬을 거야.」
「그 정신 속에서도 순경은 역시 권위있는 존재였던 모양이죠?」
「절대자였겠지. 」
「나오라니까 너무도 네, 네, 하고 굽신대는 바람에 순경나리가 오히려 면구해 하는 얼굴이었어요.」
「순경 없이는 데려 내올 재간이 없었을 거야. 광인의 고집은 여간해서 꺾을 수 없을 거니까.」
정말 광인이랄 수밖에. 부화장 밖에 동네 처녀가 보이면 바지를 훌렁 벗더라는 오빠이다.
「부화장 문을 아주 못질해 버리든지 해야지, 상규녀석이 교도소에서 또 도망쳤다는 걸.」
「그 학생이 또요?」
「아까 순경이 말하더군. 오면 바로 신고하사면서 말야.」
「그 학생도 참 문제예요.」
한숨과 함께 말한다.
그 녀석 때문에 지난번 병아리가 그 지경이 되지 않았어.」
「그거야 좋다구 붙잡아 맡긴 사람의 잘못이죠.」
「아뭏든 그녀석이 오면 불길해. 이번엔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겠어.」
소설가와 나는 듣고만 있었다. 이젠 놀라기에도 늦었고 또 그 누가 뭐라 하기에도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에게 뻗쳐오는 손이란 항상 이렇게 늦게 마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