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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단편 소설

안락사론

by 자한형 2022.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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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락 사 론(安樂死論)-서기원

 

1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깨진 유리창 안으로 튀어드는 빗방울은, 공교롭게도 바로 그 구멍 밑에 앉은 김우진의 머리 얼굴 목덜미 할 것 없이 산산이 뿌려지는 것이었다. 뻣뻣이 마른 걸레 따위와 진배없는 노타이는 빗물을 발아들이자 고리타분한 내음새를 뿜으며 우진의 등어리에 짝 달라붙은 꼴이 차라리 헐대로 헐은 그의 표피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는 볼 위로 해서 입 가장자리로 흐르는 찝찔한 구정물 맛을 무관해하기엔 그의 생리가 지나치게 민감하였다. 이 방에 갇힌 백 명 가량의 사내들 가운데 하필 홀로 달갑지 않은 세례를 받게 된 좌석의 우연을 하찮은 태도로 실소할 여유가 그에게 또한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억지로 입술을 비틀어 누렇게 뜬 입념을 보이고 웃었다.

제기! 좀 비켜야겠는걸. !

하며 무르팍으로 856호의 옆구리를 슬그머니 떠밀었으나,

왜 이랫 ! 어딜 비키라는 거야? 소견머리가 그렇게두 없어?

그리고는 도리어 우진 쪽으로 그 육중한 상체를 비스듬히 기대는 것이었다. 우진도 그런 대꾸를 미리 짐작 못한 바 아니었기 저쪽으로 비켜라 ! 하고 도도할 투가 없었던 것이지만,

이 사람아, 예까지 붙들려와서 이 고생을 서루 나누면서두, 그럴 수가 있나.

제법 으젓하게 목청을 가다듬었다.

뉘 할 소릴 하는 거야, 네 일전에 한 말은 까먹었군 그래. 내 발모가지가 네 몸뚱이에 좀 닿다기로서니 그래 그게 할 소리였더냐 말야, 어림없는 수작 말아!

856호는 코웃음을 치고 나서, 우진과는 반대편으로 등을 맞대인 통칭 -눈썹- 이란 별명 그대로 흡사 굵은 송충이 두 마리가 소나무 가지를 기어오르는 모양의 눈썹을 가진 사내에게,

자넨 안으로 더 조일 수 있겠나?

우진 보라는 듯 빈정대는 말투로 건네니까,

날 눌러 죽일 셈인가? 헛헛헛 -

눈썹마저 그를 비웃는 것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노여움을 의식하기 전에 보기 좋게 조롱 당했다는 창피스러움을 어찌할 수 없었다. 양옆구리에 붙어 있는 827호와 828호에게 당부하려던 말문까지 막혀버렸다. 그때,

그러지 말구 한치씩만 조이면 되지 않는가, 그렇게 하슈!

방 한복판에서 나지막하나 굵은 목소리가 울리는 것이었다. 우진은 사방을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이 목소리의 임자가 박연철임을 알 수 있었다. 쓸데없는 참견은 하지 말라고 목구멍까지 넘어오는 것을 꿀컥 되삼켜 버리는 동안, 벌써 그들은 두어 자 사방 남짓한 자리를 마련해놓은 것이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 자리에 엉덩이를 옮기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가슴속에 남은 것은 박에 대한 질투와 증오뿐이었다. 그보다도 서넛은 손아래로 보이는 박을 사람들이 박형, 박형하며 경의에 가득 찬 눈으로 위해바치는 것이 도시 그로서는 아니꼽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사변 전엔 모 반공학생단체의 지도자였다고 하지만 공산치하도 아닌데야 낸들 못했으랴 싶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원 제자리를 살펴보았다. 힘줄이 앙상하게 드러난 낡은 송판마루 위는 방석 넓이만큼이나 거무스레하게 물이 배어 있었다.

시월 달에 접어들긴 했지만 요 며칠래로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더니, 오늘 아침부터는 검은 구름이 끼던 끝의 궂은 비인 것이다. 우진은 온몸이 자꾸만 땅 속에 꺼질 듯 심란해지는 것이었다. 아마도 십여 명이 조금씩 몸을 조여서 장만한 자리였지만, 그의 앞가슴을 압박하는 856호와 옆의 두 사내의 체중이 여느 때보다도 더 느껴지고 사뭇 신경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개돼지 만두 못한 것들! 너이들 고린내 나는 모가지가 내 이 손아귀에 쥐여 있는 걸 모르기 망정이지 어디 더럭더럭 코나 골아봐라!

연상 뭐라고 입 속에서 뇌이는 것이다. 이런 욕설이 나오기까지엔 여간한 울분이 아닌 것이다. 웬만한 경우엔 가령 무지몽매한 놈들, 저능아들, 하고 자신이 그늘에 비해서 월등한 위인이며 식자라고 스스로 다짐하는 것으로 비위를 가라앉힐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작자들의 생명을 손아귀에 쥐었다는 거창한 발상은 다름 아닌 그의 숙부가 6, 25전엔 -북로당-의 간부였고, 시방은 -정치보위부-에서도 또 기밀에 속하는 요직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그가 납치되어온 경위나 현재 수용소 생활의 생태로 미루어봐서 그의 숙부가 그의 맹랑한 처지를 알 리가 만무했으며, 또한 설사 알았다 치더라도 내 아랑곳 있으랴는 뱃속이 아닐는지 자못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를테면 믿음직한 빽이 못된다고 몹시도 안타까웁게 여겨온 터이었다. 하기야 나무랄 곳 없는 논법이되, 한편 마음구석에 저으기 든든한 -덩어리-가 자리잡고 있어서 그를 위안하기에 지장은 없었다. 그리고는 829호란 자기의 번호를 새삼스레 가감(加減)해보는 것이다. 섰다 노름에서 가보니까 운수가 트일 것 같기도 한 망상을 한갖 망상으로만 돌리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6호실 나오라아!

복도에서 인민군 경비병의 변소집합 구령이 울렸다. 하루에 세 차례, 아침끼니 전과 중식은 없으나 그 즈음 해서, 그리고 저녁때, 이렇게 세 차례인데 따발총의 덜그락 거리는 쇳소리를 등어리에 들으며 용변을 마치고 돌아오곤 하는 것이었다. 석 달 동안 틀에 짜인 습성은 그들의 생리현상까지 알맞게 조종해버려서 그 구령을 듣기 전엔 곧잘 요의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었다. 6호실이라고. 제법 근대적 시설이 완비되고, 하얀 양회칠 벽에 넓은 유리창이 뚫린 병원의 입원실 번호라도 부르듯 상냥하게 발음할 수도 없지 않은 것이다. 원래는 소위 인민학교 교실이었다. 더 내력을 캐자면 일제시 어느 시골구석에서도 쉽사리 볼 수 있었던 목조 단층의 국민학교인 것이다. 교실 수가 열서넛, 한 교실에 백여 명씩 가두어왔기에 수용된 납치자들의 수효는 곧 헤아릴 수 있었다. 거의 다 경인지구의 출신이란 것도 그들의 말투로 미루어 풀이되었다. 납치자라 해서 뭐 두드러지게 드러난 반공투사나 사회의 저명인사들은 아니었다. 가령 -의용군-을 끝내 피하다가 잡혔다든지 혹은 전혀 까닭도 없이 걸려든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구태여 갖다 붙인다면 -빨갱이-들에 협력을 아니했다는 죄과일까? 그러니까 이른바 악질 반동분자가 못되는 그들을 감금함에 삼엄한 경계는 아닌 듯 엿보이는 것이 천여 명의 수용인 수에 비해서 불과 오륙십 명 정도의 붉은 군대로써 감당하고 있었다. 허나 방마다 경비병이 배치되어 있지는 않을망정 한일자로 뻗은 긴 복도의 양 모퉁이엔 낡은 것이나마 체코식 경기(輕機)를 사낭(砂囊) 위에 장치하고는 명령 없이 복도에 나타나는 물체를 쏘아붙일 자세라든지, 현관문 앞에도 역시 경기가 교정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건물 내부를 겨누고 있으며 게다가 시멘트 기둥을 세운 교문 안에도 마당을 노리는 중기(重機)------납치자들이 죄다 흐리멍텅하고 맥빠진 분자라고 막상 깔보는 태세는 아닌 성싶었다. 마당 한가운데엔 두어간 사방쯤 되는 백포(白布)에 적십자를 그린 표식이 땅위에 펴져 있었고 또 게슴츠레해진 양기와 지붕에도 네 군데나 그려져 있었다.

일상 유엔군의 공습은 퍼하려는 수작이었지만 납치자들을 위주로 해석한다면 정녕 병명조차 없는 중환자를 수용한 병원이 기어코 아니다고는 못할 것이었다. 애써 병원을 고른다면 지난날에 한창이었던 이질(痢疾)과 결부시키면 될까. 중복 더위 때의 어느 날, 갓난애 주먹만한 콩과 보리로 얼버무린 밥덩이가 쉬었던 모양이었다. 설사가 이어 이질이 되었고, 하루 세 번의 변소 집합이 여섯 차례로 늘어도 방안이 온통 변소같이 코를 찔렀었다. 어쩌다가 우진의 방의 -개퉁수-라는 중년이 쌀알만큼이나 됨직한 이를 한 마리 엄지손가락과 인지뜰) 사이에 끼우고는,

허어 ! 이렇게 큰놈은 처음인걸-

그러지 않아도 긴 인중을 유난히 길게 늘이며 감탄조로 중얼거렸다.

? ? 얼마나 큰 게야. 어디 좀 보세.

시름시름 졸고 있던 -말대가리-가 눈을 떴다.

! 이거군. 바로 이눔이야, 이질을 풍겨놓은 눔이 이게로군!

그는 대퉁수와 같은 시늉으로 이를 눈앞에 대이고 노려보았다.

허 허,,,,,,

대퉁수는 허탈하게 그러나 유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말대가리는 그 웃음소리에 지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반듯이 세우며,

정말야, 옘병두 이가 괴면 걸리지만 말이지, 이질두 그렇다는 걸 모르나? 이렇게 뱃속에 거무티티한 것이 백힌 놈이 탈이라는 걸 자네 모르나?

,,,,,,

대퉁수의 웃음소리에 섞여,

너 먹구 싶걸랑 먹어라!

하고 앙칼지게 쏘아붙인 것은 눈썹이었다. 모두들 키키키키 하고 원숭이 웃음을 터뜨렸다. 허나 그들의 충혈된 눈방울 속엔 이건 빈대건 간에 노린내나는 것에 대한 갈욕이 서슬을 품는 것을 놓칠 수는 없었다. 우진은 덩달아 쓴 입맛을 다시며 달겨들었다.

기가 막혀! 이질이 아니라 발진티푸스란 게다, , 기가 막혀, 이질이라니까 이가 서방질하는 병인 줄 알었군.

사방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는 그럴 수 없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가 뜻밖에 효과를 거두는 데 매우 흡족했던 것이다,

 

2

 

며칠 전부터 저녁식사가 끝나면, 으례 대퉁수와 눈썹이 박연철에게로 가서 셋이 이마를 맞대고 소근거리는 것을 우진은 눈여겨보는 것이었다. 대퉁수는 항시 손에서 놓지 않는 여섯 구멍 짜리 대퉁소를 여전히 그 두터운 입술에 잇대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대퉁수는 그 방안에서도 좀 색다른 존재였다. 앞이마가 벗어진 말상인데, 이제껏 두어 차례나 경비병한테 볼때기를 맞아가면서까지 끝내 그 때기름이 흐르는 물건을 버리지 않은 것이었다. 한편에선 기막힌 숙맥이라 단정하는가 하면 다른 패들은 여간 수양된 도사(道士)가 아니라고 했다. 아무도 그 물건의 내력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자랑삼을 얘깃거리가 못되었던 것이다. 만주 간도에서 해방을 맞이하자 가족 없는 그는 낡은 륙색 하나를 짊어지고 귀국하게 되었다, 만주인 친구 하나가 전별로 예의 물건을 선사하였다. 마귀를 쫓는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대견스럽게 여길 정도로 맹랑한 위인은 아니었으나 그 만주인의 친절이 고마웁다기보다는 앞으로 내디디는 한발자국 앞의 운명을 도무지 예기할 수 없는 여정인지라 어쩐지 그것을 팽개쳐버리기가 꺼림칙했던 것이다. 두 달 후 무사히 서울에 도착했을 때엔 타령깨나 불 수 있게 되었다, 만주에서처럼 종이장사를 시작했다. 경기도 일대에서는 장 이름과 날짜엔 훤하게 되었다. 대퉁소를 심심풀이 겸 손님을 끄는 선전구로 삼았다.

사변이 터지고 피아군이 낙동강변에서 싸울 무렵, 서울시내 단골 종이 매집 다락에서 숨어 살았는데 얄궂게도 어느날 밤 대퉁소를 신나게 불어 제키다가 그것이 귀에 거슬린 -내무서원-에게 붙들렸던 것이다, 그 순간 그는 기묘한 결심을 하였었다. 이것 때문에 우연히 붙잡힌 것이나 결국 이것으로 해서 나는 다시 살아나리라고.

이러한 그를 업신여기는 축 안에서도 우진은 누구에게도 못지 않았다. 근자에 와서 대퉁수가 박과 가까이 지내게 되매 그를 멸시하던 패들이 점점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마침내 수그러지는 눈치를 우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은근히 시기하면서 한층 더 반발을 느끼는 것이었다. 네 따위 서넛이 모의를 해야 별 신통한 수가 나서기는커녕 총살감이지,,,,,, 이렇게 우진은 일소에 붙이려는 것이나, 한편 마음은 딴판으로 적어도 이 방안에서 무슨 일이고 간에 의논할 상대를 찾는다면 마땅히 나를 추대해야 될 일이 아니냐고. 설혹 그것이 목숨을 걸어야 할 탈출계획이라 할지언정 나를 빼놓을 수가 있는가 ! 괘씸한 한편 섭섭한 마음을 누를 수가 없었다. 갈수록 박이 두각을 나타내고 인기가 집중되는 사실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는 우진으로서, 첫째는 박에 호감을 갖지 않는 몇몇을 규합해서 이를테면 박의 반대파를 조직하여 그가 리더가 되는 것이, 일은 적지 아니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으나. 그렇다고 박을 싫어하는 분자들이 과연 우진을 받들어 모실는지 그 여부는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터이었다. 다만 완전히 고립된 자기를 뼈저리게 의식하는 것이었다.

만일에 그들의 계획이 탈주라 할 것 같으면 그로서는 수용소에 들어올 당초부터 몇 번이고 망설이던 일을 단행할 수밖에 없다고 다시금 다짐해보는 것이었다.

탈주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자살 행위로 믿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송환되려니 믿고 있었다. 그의 판단의 이면엔 실은 숙부와의 연락을 요행으로 바라는 심사가 꿈틀거리고 있었으나,,,,,,

박을 중심으로 한 세 사람이 잡담인지 밀담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태도로 때로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하는 것이 남의 눈을 속이려는 캄플라지가 아닌가 싶었다. 딴사람들은 한 주먹의 꽁보리밥의 부족감을 이젠 아예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식사 당번이 주먹밥을 바께쓰에 받아다가 그걸 가지고 갓에서부터 줄을 따라가노라면 그들은 우선 바께쓰 속에 대가리를 처박고 큰 덩어리를 고르기에 혈안이 되곤 하다가, 이건 내 몫이니 아니 내가 먼저 짚은 것이거니 하고 말다툼 끝에 주먹질쯤은 일쑤였다. 그러다 먹고 나면 언제 누가 그런 추태를 부렸었느냐는 듯이 흡사 고급 양식(洋食)이라도 양껏 채우고 난 뒤의 트림을 연달아 쏟으며 손발을 함부로 내던지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뵘콰봐 링봐봐 봐봐봐봐-

오래간만에 대퉁소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아리랑이었다. 그 소리는 상기 의식하지 못했던 바깥 비 내리는 소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먼 바닷가에서 물결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 해변가의 바위 위에 걸터앉은 김우진의 머리 위엔 실오라기 같은 초생달이 아물거리고 있었다. 다른 바위틈에서 멋진 퉁소소리가 울렸다. 아니 어쩌면 그가 불고 있는지도 모른다. 앳된 아내의 얼굴이 그의 턱밑에서 웃음을 담고 치어다보는 것이다------

룅뵘봐 뵘봐 링봐-----

대퉁수의 아리랑은 춤추는 박자로 멋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는 대퉁수의 두터운 입술에 눈총을 주었으나 불현듯. 잠시나마 퉁소소리가 그를 안가(安價)한 센치 속에 젖게 했음을 의식하자 밸이 뒤틀렸다.

집어치웟!

자신도 모르게 양철을 비비대는 소리가 나왔다. 발바닥으로 마루를 치며 일어섰다. 대퉁수는 고개를 멈칫했으나 그 물건은 여전히 입에 대인 채 우진에게 힐끗 웃음이 어린 눈총을 쏘고서는 다시 불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당장 치우지 못해!

우진은 두 팔을 앞으로 허우적였다.

으깨서 치우란 말야, ?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지르며 불쑥 솟아난 것은 -눈썹-이었다. 굵고 긴 눈썹이 희미한 램프 불 아래 짙은 음영을 이루고 있었다.

넌 또 뭐야? 듣기 싫으니까 치우란데, 네 무슨 상관이야!

우진은 입 모퉁이에서 거품을 뿜었다.

이 자아식이 ! 임마, 너 듣기 싫음 그만이야? 난 듣기 좋다. 으쩔 테야?

눈썹의 대꾸가 끝나기 바쁘게 이때껏 못 본 체하고 도사려 앓았던 박이,

거 그만두어요. 김군도 참구------

하는 것이었다. 김군이라니 ! 우진은,

! 넌 또 뭔데 참견이야!

주먹을 불끈 쥐어 허공을 마구 치면서 무릎으로 앞을 헤치려는 것이었으나,

망할 짜식!

누군지 발목을 끌어당기는 통에 그는 쓰러지고 말았다, 이게 ! 그래. 이 빌어먹을 놈이 !어쩌구 하며 씩씩거리는 숨소리와 잠께 온 몸뚱아리에 무수한 주먹질을 까마득히 느끼며 그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 후에 눈을 떴을 때엔 모두들 거들떠보지도 않고 빈정대는 눈웃음을 치는 놈도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노라니까 해어진 바지 위에 눈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국민 학교 삼 학년때 아버지의 매를 한차례 맞고 도망친 일이 있은 뒤 남의 벌을 받은 적이라곤 이것이 처음이었다. 방안에 누운 백여 명이 죄다 그의 적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열시,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흑판 위에 걸린 램프 불이 꺼졌다. 취침시간이다. 그처럼 엉덩이 붙일 여유도 없는 자리에서 다리 팔을 펴보자니, 김장배추를 포개어 쌓듯 신기하게도 터를 잡는 것이었다. 얻어맞은 곳이 지끈지끈 쑤셨다. 코고는 소리가 서로 다투고 있었다. 그는 몸매무새를 가다듬고 주섬주섬 상체를 일으켰다. -원한을 갚아야지 -뭐라고 외마디소리를 내며 주먹으로 제 무릎을 쳤다. 손바닥을 앞장에 세우고 더듬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이게 누구야!)(!)서넛이 잠꼬대 같은, 그러나 노기 서린 목소리를 질렀다.

미안하오 ! 미안해, 설사, 설사 때문에

그는 연상 이렇게 씨부렁거리면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간신히 출입구까지 다다랐다. 방문이 밖으로 잠겨져 있는 것을 아는 그는 주먹으로 조용히 두드렸다. 경비병의 구둣소리가 가까이 오자,

동무 ! 설사가 심합니다. 막 나옵니다.

문 틈새에 입을 대고 말했다. 문이 열리자 그는 허리를 굽혀 아랫배를 움켜쥐면서 말했다.

이거 미안합니다!

그리고 변소 근처까지 이르렀을 때,

동무! 실은 설사가 아닙니다. 큰일났습니다. , 조용히 하십시오. 실은 전 세포조직의 한 사람입니다. 시급히 지도군관 동무한테 보고할 일이 생겨서,,,,,,

뭐이?

경비병은 허세를 부리듯 한번 되물었으나 이어 픽! 하고 고소(苦笑)하고는 우진을 앞장에 세웠다. 지도 군관실은 학교 숙직실로 쓰이던 건물 같았고 뒤뜰에 있었다. 경비병과 함께 방안에 들어섰다. 초를 쌍불로 테이블 위에 켜놓고, 그 사이에 구레나룻이 시커먼 얼굴이 노려보고 있었다.

세포라니?

그렇게 말해야 여기 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 용무는 머이야!

큰일났습니다. 음모입니다.

음모.

우진은 이마의 땀을 팔목으로 닦으며,

880호가 주모잡니다!

채근채근 말해봐!

박연철이란 놈 말입니다. 벌써 달포 전부터 놈들의 거동이 수상타구 살펴보았지요. 근래 와서 집단적으로 탈주할 음모를 세우고 있습니다. 거 거짓말 아닙니다. 박은 우리가 미구에 북쪽으로 이동하게 된다고 믿구 있지요. 그때 도망칠려고-,,,,,

그름 동문 왜 그걸 나한테 고해바치는 거야?

군관 동무! 전 전, 결코 반동이 아니올시다. 반동 취급을 당하다니 정말 억울합니다. 제 숙부는 시방 정치보위부의 간부로 계십니다. 전 그 숙부의 교육을 줄곧 받아왔습니다. 저는 전 결코!

이봐! 개소리 그만하구, 대관절 너이 숙분디 먼디가 그르타문 넌 왜 여기 끌려온 거야, ?

군관 동무 ! 그건 정말 어이없이 당한 일이지요. 무고당했지요. 전 선량한 일개 은행원이었습니다. 아니올시다. 아주 하치 은행원입니다. 종일 남의 돈만 세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아무 죄도 없이 무고 때문에,,,,,,

중학생이 독본을 외우는 격으로 단숨에 읽어 내리는 것이었다.

이 쌔끼가! 그따우 헛소릴 고디 들을 줄 알아? ! 너 정신병자구나! 아무래두 좀 돈 거이 아냐?

아 아닙니다. 이 참!

닥쳐 ! 쌔끼 ! 아으래두 어드른 놈이 머 저이 동생이 인민군대 대좌라나. 알구 보니 새빨간 거짓말이라 그거야. 당장 총살이디. 너두 총알 받구 싶어?

거짓말 아닙니다. 전 충성을 다하는,,,,

그만해 ! 네가 반동이었는지 어드른지 몰라두, 여기 오믄 반동이야.

군관은 피던 담배꽁초를 우진의 얼굴에 던지는 것이었다. 따가운 촉감이 볼 위를 스쳤다.

! 억울합니다! 아아!

좌우간 너이 성의는 알았다. 그쯤 공로는 갚아주디. 돌아가서 잘 보란 말야. 너이 숙부가 당원이건 아니건 별 문데구,,,,,, 내가 말이디, 정티보위라은 덮어놓구 발발 떨 줄 알았다간 큰일난다! 서툰 수작 말구. 정보나 잘 수집하라우 ---- 알갔디?

군관은 타이르듯한 말투로 바꾸는 것이었다. 우진은 일의 결말을 재빨리 타산해보는 것이었다. 군관이 그의 숙부의 존재를 믿지 아니한 것이 도리어 마음 놓이는 일이었다. 혹시 숙부에게 조회를 했을 적에 그런 조카가 있지도 않다고 딱 잡아떼는 날엔 낭패 여부가 없지 않은가. 그와 같은 불신이 끝내 사라지지 않았기에 오늘날까지 신중을 기해온 터이지만 어쨌든 뜻밖의 방향으로 일이 전환돼서 그가 인민군 당국의 신임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은 실로 다행한 일이라고. 히죽히죽 웃음이 절로 나오는 것이었다

 

3

 

사흘 후, 박연철이 잡혀갔다. 경비병 둘이 따발을 겨드랑이에 끼고 들어오더니 880! 나오오!하는 것이었다. 박은 당황하는 빛은 보이지 않았지만 사뭇 긴장한 어조로 되물었다.

왜 그러슈?

잔말 말라잇 ! 군관 동무의 명령이어!

박은 못 들은 척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사방을 훑어보고 나서,

동지들! 나는 돌아오지 못할 거요. 동지들! 식사 때마다 눈을 딱 감고 바께쓰 속에 손을 넣으시오. 서너 번만 그러면 눈을 뜨고도 밥 덩어리의 부피에 관심이 없어질 것이오. 이것을 잊지 마시오.

무슨 잠꼬대야 ! 빨리 나왓!

따발 개머리판으로 등허리를 맞아가며 박은 끌리어갔다. 남은 사람들의 일부는 밀고자에 몹시 분연해하는 기색을 나타냈으나 태반의 표정은 불안스러운 것이었다. 그들은 박과 대퉁수들의 거동을 무심히 보지는 않았었다. 적지 않은 기대가 있었다. 일말의 불안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박은 분명히 탈주 기도의 주모자 혐의로 잡힌 것이다. 그렇다면 뒤에 닥쳐올 일은 쉽사리 헤아려지는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엔 6호실 전원이 총살당할지도 몰랐다. 그중 무사히 되더라도 너덧 끼니 굶길 것은 빤한 일이었다.

우진은 그들의 눈초리가 무서웠다. 그들이 자기가 밀고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들에게 당할 사형(私刑) 심지어 죽음까지 머리를 감도는 것이었다. 그는 곁눈질로 대퉁수를 보았다. 대퉁수는 턱밑과 무르팍 사이에 퉁소를 끼어 받치고는 물끄러미 창 밖을 내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당초 예기했던 쾌감(박이 잡히면 얼마나 고소름할까 하던)은 없었다.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아침나절에 한때 개었던 날씨가 다시 흐려졌다. 검은 구름이 교정의 포플라 나무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은 실없는 잡담이나 장난을 의식적으로 삼가는 모양이었다. 기침소리 하나 없는 고요가 흘러갔다. 그러는 동안에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소리 속에서 무엇인지 놓쳐서는 아니 될 기적의 음향을 잡으려는 듯 한결같이 고개를 숙인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에 빗소리에 섞인 색다른 음향을 발견할 수 있었다면 그건 먼 남쪽하늘에서 은은히 울리는 포성뿐이었다. 두려우면서도 반가운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저건 대포소리 아닌가?

저건 말이외다. 우리들 장례식의 개회인사라 그런 말씀이외다.

이렇게 농조로 말한 것은 대퉁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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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대가리가 비굴한 웃음소리를 내다말고 대꾸했다.

오래잖아 이동하겠군.

방안은 소란해졌다. 유엔군이 북쪽으로 진격해오면 그들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킬 것인지를 캐어보기 전에 우선 그 질식할 것만 같은 돼지우리 안에서 해방될 숨가쁜 흥분에 싸이는 것이었다. 그중 당황한 것은 우진이었다. 일단 수용소가 폭동이나 포격으로 해서 터지는 날엔 그들은 그를 동지로 여기기는커녕-빨갱이>(밀고자-라 하여 호되게 쥐어박지를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자니 인민군에 협력하겠노라고 나선다면 따발총이나 메어주고 최전선 참호 속에 처넣기가 고작일 것이었다. 그와 같은 판국에선 그는 도시 살아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한시바삐 -이동 지시-가 내리기만 고대하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비도 포성도 멈추지 않았다. 포성은 더욱 가까와진 성싶었다. 아침식사가 끝날 즈음에 교문으로 한대의 트럭이 들어서는 것이었다. 연달아 이십여 대 가량이 마당에 모이는 것이었다. 누구나 이동차량으로 믿어버리기 십상이었다. 경비병 하나가 나타나서 곧 운동장에 모여라!하고 외쳤다. 어딜 가나요?얼빠진 목소리가 물었으나 난 모르오! 자 일어섯 ! 번호 순서대로 나오라출입문을 활짝 열어 젖히며 수선을 떨었다. 마당엔 어느새 오백 명이 넘도록 비에 맞아 굶주린 양떼들처럼 말없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트럭은 ---인데 누런빛 우의(雨衣)를 걸치고 그 위에 완전 무장한 병사들이. 한 트럭 보대 위에 서넛씩 걸터앉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대에 오십여 명 그러니까 두 대에 한 조를 분승시키는 것이었다. 우진이 탄 차는 열일곱 번째 것이었다.

선두 차가 떠나고 나서 약 오 분 후에야 다음 차가 발동을 거는 것이었다. 그 다음 차도 그만큼은 기다렸다가 움직이는 것이다. 우진은 시간 반이나 아래턱을 떨면서 멍청히 서 있었다.

동무! 왜 이렇게 늦는 거요!

참다못해 누가 볼 메인 소리를 질렀으나 운전대 지붕 위에 걸터앉은 경비병은 몰라하고 눈을 흘기는 것이었다. 차는 신작로에 나서자 북쪽으로 뻗은 고갯길을 향하였다. 그들은 통속의 콩나물처럼 빽빽이 박혀서. 버림받은 지 해묵은 밭과 논들을 헛되게 지나쳐버릴 뿐이었다. 그처럼 삼십 분은 달렸을 것이다.

우진의 탄 차가 다시 더 경사진 고갯마루에 걸렸을 때 별안간 소총소리가 들렸다. 일분을 채 지나기 전에 다시 울렸다. 따발임에 틀림이 없었다. 총성의 진폭과 다음 것과의 간격이 거의 같은 것이다. 우진은 잔등에 얼음물을 퍼붓듯 오한을 느꼈다. 그 고개를 넘어서자 앞으로 꽤 넓은 분지가 벌어졌는데 나직한 산이 가로막았고 그 중턱에서부터 고개까지 애소나무밭을 이루었다,

저 저것!

일제히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트럭들이 길도 아닌 장소에 늘어져 있고 그 아래턱엔 앞서 떠났던 무리들이 구렁이처럼 길게 열을 지어 웅크려 앉아 있는 것이다. 수용소 밖에서 임시로 파견되었는지 줄의 양쪽을 따라 십여 미터 간격으로 지키고 있는 병사들의 수효는 백을 훨씬 넘을까 하였다. 줄의 우두머리에서 좀더 높은 곳엔, 납치자 다섯이 무릎을 꿇었는지 들뜬 엉덩이 채로 나란히 앓았는데, 바싹 뒤켠에선 역시 다섯의 병사들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따발을 겨누고 있었다. 총소리와 함께 다섯은 돌에 채인 듯 고꾸라졌다.

!

-

차에서 내린 그들은 무슨 짐승의 울음 같은 짧은 신음소리를 토하긴 했지만, 경비병의 명령에 흡사 선생 앞의 학교 아동들처럼 순종하는 것이었다.

구렁이 줄의 길이는 백 미터는 넘을 성싶었다. 오열 종대, 다섯씩 죽이기 수월한 대기자세인 것이다.

열여섯 번째지 아마.

오십하구, 오륙 삼십이 라, ,,,,,,

우진의 앞줄에서 일상 다반사를 지껄이듯한 한 토막의 대화가 들리는 것이었다. 짙은 안개처럼 빗줄은 가늘어졌다

 

4

 

김우진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현기증이 일어나는 것이다. 손바닥을 내렸다.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총살 현장은 낡아빠진 영화의 한 장면인 듯 좀처럼 현실감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도수장 앞에 늘어선 소나 돼지보다도 못한 것들이지, 그래 소란 놈은 슬피 울 줄이나 알지 않느냐 !

병사들이 사방을 둘러싸아 있다고는 하자. 이왕 죽을 바엔 못할 짓이 있겠느냐! 구더기만두 못한 놈들 ! 차차 정신이 든 우진은 이렇게 속으로 뇌까리는 것이었으나 그 자신 돌처럼 죽어버린 몸뚱이를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아예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앞줄 다섯이 한발자국 앞으로 다가앉으면 거의 기계적인 동작으로 애소나무 가지를 헤치고 발을 내디디는 것이다. 이는 꿈일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이 지구 위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우진은 다시 고개를 세웠다. 역시 꿈은 아니었다. 그들은 눈동자에 못이 처박힌 듯 시선에 생채(生彩)를 잃었다. 순간 우진은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이상히도 이내 사라지고 며칠 전에 인민군에 잡혀간 채 소식이 없는 880호 박연철의 네모진 얼굴이 그려지는 것이었다. 어쩐지 박은 아직 살아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자신이 죽더라도 박은 어디선지 기어이 살아남을 것만 같은 것이다. 박만은 다른 작자들처럼 도망칠 염도 못 내고 개죽음을 당할 위인이 아니라고 문득 생각키며, 옛날에 헤어진 친구에게처럼 은은히 정이 가는 것이다.

한편 대퉁수는 우진보다도 너덧 뒷줄에서 악착스럽게도 상기 예의 물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의 움파진 볼엔 빗방울이 맺힌 듯 번쩍이는데 우진에겐 눈물 방울로만 보이는 것이다. 우진은 그것이 미웠다. 눈물을 흘릴 여유가 있다는 것이 미웠다. 문득 그는 시방 현장에서 좀 떨어진 바위 위에 앉아서 총살을 지휘하는 지도군관에게 달려가 <군관 동무 ! 저는 반동이 아닙니다, 저를 잊으셨습니까? 저는 결단코,,,,,,>하고 애원해볼 것이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곧장 결심하기엔 너무도 거리가 먼 자신의 위치를 의식하는 것이었다. 애원의 효력을 못미더워하기보다 이 자리서 한시간 후에 닥쳐올 죽음이 불가항력의 숙명으로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천여 명의 동족들이 아무 까닭 없이 학살을 당하는 이 마당에 하기야 복통할 우연일망정 한몫 끼어 있다는 자각은 모두가 고스란히 죽어 가는데, 홀로 살아남는다는 가정(假定)이 결코 저질러서는 아니 될 무시무시한 죄악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아니라면 일 초 일 초 다가오는 죽음의 위력 앞에 완전히 매료되어버렸는지도 몰랐다. 주검.

멍충이 따우 같은 쌔끼 ! 머리통을 정통으로 못 맞춘단 말야! 총 쏠라믄 똑똑히 배우라.

지도 군관은 바위에서 뛰어내렸다. 권총을 빼들더니 오른쪽 갓에 쪼그린 사내의 뒷머리를 쏘았다. 속을 후벼낸 바가지처럼 뭣이 회끄무레한 것이 드러나 보였다. 다음 순간 몸뚱이는 깊숙이 판 구덩이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

총살지휘자의 호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총살 장소인 구덩이 언저리에서 여남은 발자국 떨어진 음지에 앉은 다섯은 흡사 고무공이 땅위에서 튀기듯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비틀거리며 꿇어앉는 것이었다.

고개 들엇!

고개를 드는 것이다.

따따따, , ,, , ,

으악!

왼쪽의 중늙은이는 귀에 맞았다. 턱을 높이 치켜올리며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더니 제힘으로 구덩이 속으로 날아 들어간 것이었다.

사람 살려!

구덩이 속에서 아우성이다. 이젠 총살자들도 피로했는지 조준이 정확하지 못했다. 어떤 것은 전혀 상처 없이 뛰어들었다.

여보! 여보슈! 여길 쏴주시오!

빨리 바라! 빨리 ! 빨리!

여기다 ! 여기, 여길 쏘아다오오!

그들은 산 채로 송장 속에 파묻힌 것이다. 그 위로 진짜 송장이 겹겹이 쌓이는 것이다. 눈이 뒤집힌 경비병 하나가 쏘식 장총(長銃)으로 울부짖는 근처를 대충 가늠해서 쏘아붙였다. 그러니까 잠잠해지는 것이었다. 우진은 예리한 칼끝으로 뼈골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눈앞이 다시 캄캄해졌다,

아이쿠! 사람 죽는다! 여깁니다. 여길 먼저 쏘아 주시오!

어머닛! 날 살려어 ! 어어!

그러나 총살자들은 이젠 눈썹 하나 까딱하지도 않고 인형 같은 동작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날 쏴라! 빨리!

비명의 여음이 길게 우진의 귓전을 맴돌고 있었다. 캄캄하던 눈앞이 노란빛으로 변했다. 좁쌀 알 같은 것이 무수히 하늘을 온통 가리고 있었다. 혓바닥이 뻣뻣이 굳어버렸다. 그는 입을 헤벌리고 할딱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다리를 휘청거리며 술에 취한 걸음걸이로 앞을 향하는 것이었다.

이쌔끼가! 앉아! 앉아랏! 네 순서는 어림도 없다. 상기 멀었어.

경비병이 총구를 돌리며 잔인하게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날 죽여라! 나부터 죽여. -

그는 손가락으로 앞가슴을 찌르며 총구 앞에 다가섰다.

앉지 못해 ! 쌔끼 죽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아니?

경비병은 발길로 우진을 걷어찼다. 엉덩방아를 찧은 우진은 순간 죽기 위해선 도망치는 흥내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고개를 들어 힐끗 경비병을 쳐다보자 기어가는 자세로부터 허리를 펴며 동시에 달음질치기 시작하였다. 납치자들은 일제히 일어섰다.

,,,

우진은 허공을 두팔 안에 담뿍 안으며 앞으로 쓰러졌다. 약속이나 한 듯 사람들은 짧은 탄성을 지르며 동요하였다.

앉아! 앉아랏! 쏜다!

주위를 둘러싼 경비병들은 총구를 안으로 돌렸다

앉아 ! 죽인다!

경비병의 둔탁한 외침과 거의 때를 같이 해서 또 다른 외침이 줄 안에서 울렸다. 날카로운 쇳소리였다.

도망하자 ! 도망쳐라!

대퉁수가 두 팔을 하늘에 뻗친 채 아가리를 딱 벌리고 있었다. ! ! 하고 거센 바닷물결이 바위를 휩쓰는 소리가 퍼지며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사방으로 달리는 것이었다.

,,,,,,

,,,,

그들의 뒤를 쫓아갈 염을 내지 못하는 병사들은 허둥지둥 그 자리에서 맴돌며 함부로 따발을 퍼붓는 것이었다.

 

비는 그쳤다. 고개 넘어서 불어오는 모진 바람이 소나무 잎을 흔들며 지나갔다. 풀 위에 엎어진 김우진의 등허리엔 진흙에 잇개인 구두자국이 무수히 찍혀 있는 것이었다, -

 

 

 

 

서기원(徐基源: 1930- )

 

서울 출생. 서울대 상대 중퇴. 1956<현대문학><안락사론><암사 지도>가 추천되어 등단함. 그는 전쟁을 겪고 폐허가 된 공간에서 느끼는 절망, 고통, 부조리, 죽음 등의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보다 궁극적으로 탐구하려 한, 예리한 시대적 감수성을 드러낸 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전야제>, <연가>, <마록열전>, <혁명>, <아리랑>, <이조 백자 마리아 상>, <왕조의 제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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