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속 (約束)-서정인
연휴가 다가왔다. 모두들 놀러갈 궁리에 부산한 눈치였다. 김은 아까부터 담배를 퍼워물 때마다 무슨 냄새라도 맡으려는 것처럼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주위 사람들을 살폈다. 그냥 일요일 하나라면 누가 누구를 데리고 어디를 가든지 마음을 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마 넉살 좋은 장이 「어이, 미스 유, 나하고 내일 덕수궁 미술관에 가지 않겠어?」라고 떠벌리면, 윤이라는 처녀는 왼쪽 눈썹 한 가닥 까딱하지 않고 「어머. 정말이세요 ? 같이 갈 사람이 없으면 혼자서라도 가을 국전을 구경가려 했었는데」라고 승낙을 하거나, 「미안해서 어떡하죠? 발송과 송하고 경복궁 가기로 선약이 있거든요」라고 거절을 할 것이고. 듣는 사람들은 누가 아무렇지도 않게 「뻔뻔들 하군」이라고 말하면,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한바탕 웃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토요일이 공휴일이어서 노는 날이 겹치게 되면 사정이 조금 달라진다. 그 사이에 밤이 끼어 있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하고 있어? 내일 계획 짜는 거야?」
박이 옆엣책상의 빈 의자 위에 앉으면서 김에게 물었다. 그도 남에게는 놀이 궁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계획은 무슨 계획. 달력에 발간 글씨가 나란히 씌어 있는 것을 보니, 어쩐지 아가씨들의 신변이 걱정되었을 뿐이야.」
「특히 미스 정의 신변이 걱정되었겠지.」
「너도 그랬어?」
「사람의 눈은 비슷한 법이지.」
그들은 소리를 낮춰서 낄낄거렸다. 한 줄 건너 저만치서 정이라는 아가씨가 낌새를 챘는지 새침해진다. 박이 담배만 두어 모금 뻑뻑 빨고 있다가 더욱 은근해진 목소리로 김의 귀에다 대고 소곤거렸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번엔 행운이 너의 머리통 위에 떨어진 것 같다. 꽉 붙잡아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반드시 내 차례래서가 아니라, 저 애 눈이 나에게로 많이 오고 있어.」
「지난 번 오천 년전 때 행운이 너에게 떨어지고. 이번엔 행운이 나에게 떨어지는 건데 그랬어. 경복궁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거든. 부러워 죽겠다. 걔 아버지는,,,,,,」
「관둬. 나는 지난 주에 쟤네 대학 때 서클 패거리들과 어울렸어. 걔 중에는 쟤만큼 쏙 빠진 애들도 더러 있었지만. 난 지겨워서 죽을 뻔했어, 부자집 아이들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은 아무래도 과대평간가 봐.」
「하루 낮을 어울리니까 그렇지.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 개들 아무하고나 어울리지 않어. 설악산이나 대둔산이나 속리산 같은 데를 가면 그렇게 지겹지만은 않을 거야.」
「미스 정 너한테 양보할까?」
「정말이야?」
「양보 받을 자신 있어?」
「너만 양보한다면.」
「했다. 잘해봐라.」
「후회 않겠니?」
「왜 해?」
박은 그를 잠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미스 정 쪽을 한번 흘낏 보고 풍경화가 걸려 있는 벽을 향하여 조금 커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 그림은 항상 봐도 어디 중학교 사생대회 입선작 같단 말야. 사진틀은 고풍이고. 」
「감각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감각이 없어서 그렇지.」
김이 대답하기 전에 건너편의 그가 기입하고 있는 장부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를 모르는 사람 같으면 누가 말을 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박은 김에게 눈을 크게 한번 떠 보이고 휘적휘적 제자리로 걸어갔다.
「이발소 그림보다는 나은데요. 」
김이 턱을 받치고 물끄러미 그를 건너다보면서 말했다.
「이발소 그림이 어째서? 당신은 이발소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고 있어. 그게 바로 당신이 싫어하는 중류 근성이야.」
그가 역시 상대방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김은 아차 했다. 저것이 고의 좋은 점이자 나쁜 점이었다. 똑같은 짓이 나쁜 점으로 나타났다면, 아무래도 이쪽 잘못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은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딴입을 닫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이따 막걸리나 한 잔 합시다. 」
그가 장부를 다 기입하기를 기다렸다가 김이 말했다. 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퇴근을 한 김이 승강기를 내려서 붐비는 건물의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을 때. 누가 다가와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박이었다.
「따라와, 천씨씨 샀다.」
「선약이 있어.」
김이 말했다.
「얼른 한조끼 하고 가. 오백 할래?」
「천씨씨 사라. 삼십 분은 여유가 있다.」
「내가 고맙다고 해야 되냐?」
그들은 길 건너 경 양식집으로 들어갔다. 안은 음흉스럽게 어두웠고 좁은 공간을 너무 활용해서 천박한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요란스러운 음악이 열심히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음악이 잠잠해질 때마다 메기처럼 입을 쩍쩍 벌리는 사내가 들어 있는 유리상자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 집에서는 그래도 거기가 그중 조용했다.
「너 미스 정 정말로 날 주는 거지?」
박이 말했다. 김은 잔 속으로 노리끼한 액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기 뭐 타지 않았을까?」
김이 그렇게 말하고, 잔을 들어 길게 한 모금을 빨았다.
「오줌을 탄다더라. 」
박이 말했다. 그리고 그도 한 모금을 빨았다.
「정은 걱정 말아라. 내가 생각이 있으면, 노는 날이 겹친 때 정을 너한테 넘겨주겠니? 어디로 갈래?」
「부석사로 가기로 했어. 처음엔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고 하더니, 내가 김 군은 아마 딴 계획이 있을 거라고 하자, 집에 가서 아빠한테 물어본다고 하더라. 걔한테서 전화가 오면, 뭐라고 할래?」
「딴 데 선약이 있다고 하면 되겠지. 그런데 전무가 딸을 경상도 영주까지 내려보낼까?」 「그건 아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갠 틀림없이 친구들과 함께 간다고 할 테니까. 」
「전무님이 돈 벌기에 바빠서 몰라 그렇지, 저런 친구들이라면 차라리 너가 더 안전하겠다.」
그들 옆 자리에는 스물을 갓 넘겼을까 한 어린 여자아이들이 둘 앉아 있었는데, 하나는 병맥주를 따놓고 입에 거품을 물며 잔을 빨고 있었고, 또 하나는 손가락 사이에 불붙인 기다란 담배 개비를 뱅뱅 돌리고 있었다.
「저것도 중류 근성이냐?」
박이 잘했다.
「아니야. 중류 근성의 희생물이다.」
김이 말했다. 그들은 목소리를 낮출 필요가 없었다. 불란서 여자가수와 유리 상자 속의 메기가 번갈아 가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소음 속에 묻어버렸다.
「난 그만 가봐야겠다. 벌써 삼십 분이 되었어.」
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도 따라서 일어섰다. 밖에는 빛을 잃은 태양이 고충건물 옆으로 떨어지고 있었고 햇볕이 오염된 공기 속에서 흐느적거렸다.
「너 새로 하나 생겼구나?」
박이 옆으로 다가서면서 그를 힐끗 쳐다보고 말했다.
「군 두부집으로 고처사 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 다. 보리 술을 마셨으니, 이제 쌀 술을 좀 해야지. 잘 가. 월요일에 재미있는 이야기나 해라.」
김은 희뿌연 햇빛을 등으로 가득히 받으면서 사람들 속으로 묻혀 들어가 버렸다.
「처사가 사람 하나 버렸군. 좋은 청년이 금이 갔어.」
박이 김이 사라진 쪽에다 대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고처사는 벌써 와서 두부집 한쪽 구석에 앉아 혼자서 약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
김이 그 앞에 마주앉으면서 말했다. 고는 홀짝거리던 자세 그대로 잔만 내려놓으면서 「아니, 내가 십분 빨랐어」라고 말했다. 주모가 사발 하나와 두부 한 접시를 더 내왔다. 사발 밑의 사기가 술 탁자의 사기 타일에 부딪쳐서 작은 쩡그렁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거기에는 그런 작은 소리들을 깔아 뭉개버리는 음악 소리나 설명소리가 없었다.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음악소리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은 조금 우스운 일이었지만, 아마 세상 모든 물건에는 다 그 쓰임새가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김은 제 술잔에다가 부연 막걸리를 부었다. 혼식이 아니라 혼음이 될 판이었다. 그는 잔 바닥에 찌꺼기만 남기고 주욱 들이켰다. 고가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제 앞에 있는 반쯤 남은 술잔을 홀짝 들이마셨다. 그들은 말없이, 그리고 잔을 바꾸지도 않고 또 한잔을 가자 따라서 마셨다.
「고 선생. 요즘 쉬는 날에는 어떻게 지내시오 ? 우리들의 코앞에는 이틀이라고 하는 괴물이 길게 기지개를 켜면서 뻗어 있어요.」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옛날 왜놈 때 게스게스가스이모구긴긴이 라는 말이 있었어. 월월화수목금금이라는 이야기지. 이레마다 하루씩 노는 것은 물론이지만, 토요일 반쪽 노는 것조차 아깝다는 뜻이었어.」
「그래 일주일에 이레를 일했어요?」
「모르지. 나도 주워들은 풍월이니까. 」
「하긴 요즘도 촌에 가면 공일 반공일이 없지요. 일주일 칠일을 일하거든요. 그 대신 명절이 왔다 하면 왕창 놀아버리지요. 왜. 저 보름세배라는 말이 있지 않아요. 추석 때도 마찬가지죠. 어떤 사람이 가을성주를 하는데, 추석이 끼어 들어서 열흘을 인부를 구하기 못했어요. 생일 하루 잘 먹자고 일년을 굶는 셈이지.」
「그 말은 거꾸로 해석해야 될 거요. 김형. 일 년내 굶주리다가 생일 하루 배를 채운다는 이야기 아니겠소? 연초와 추석 때 그렇게 쉬어봐야 다해서 한 달이 못 되는데, 도시는 어떻소? 무성격하게 정기적으로 노는 것이 일년에 쉰 두 번하고 절반이니까, 근 팔십 일이 되는군.」
「그렇지만 도시에서 열흘씩 스무 날씩 한꺼번에 놀아버릴 수야 없지 않아요. 농촌에서야 다 그렇게 놀도록 절기가 되어 있지만.」
「물론. 농촌 사람은 계절로 살고 도시 사람은 주일로 산다고 할 수 있지. 계절로 사는 사람은 계절로 사는 사람의 습성이 있고, 주일로 사는 사람은 주일로 사는 사람의 특성이 있겠지. 삼십 일을 둘로 쪼개서 쉬어야 되는 사람에게보다는 팔십 일을 쉰 둘로 쪼개서 쉬어야 되는 사람에게 삶은 더 반복으로 느껴지겠지. 도시인은 이 반복에서 무의미를 읽고 주말만 되면 혼과 살을 갉아먹는 그 무의미로부터 도망쳐보려고 버둥대지만, 그게 어디 버둥댄다고 되는 일이겠어? 버둥댈 여유조차 없는 것이 하류요, 버둥대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모르고 길길이 날뛰는 것이 중류요. 버둥대되 버둥대는 것의 쓸데없음을 깨닫고 조용한 몸짓을 배운 것이 상류야.」
「가령, 일요일마다 양로원을 찾아간다거나 하는 그런 조용한 몸짓 말이오. 고형?」
김은 취했다. 고 선생이 고형이 되었다.
「내일이나 모레, 노는 날 나하고 같이 어디 고아원에 놀러갈 생각 없어, 김군?」
고도 취해오는 모양이었다.
「아직은 없는데요. 」
「그렇겠지. 아직은 천지현황을 분간 못하고 길길이 날뛰던 습관이 남아 있을 테니까. 내일 모레는 노는 날이 겹쳐서 기회가 참 좋겠군.」
「고형, 내가 하숙하고 있는 집에 한달 전에 식모가 새로 왔어요. 촌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다만 열댓 되는 애였는데. 처음 막 와서는 텔레비전 켤 줄도 몰랐고 전화 받을 줄도 몰랐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전화, 티뷔는 물론이고, 세탁기니 냉장고 같은 전기제품을 주인아줌마보다 더 능숙하게 조작해요. 며칠 전에 시골에서 그 애 친구가 올라왔어요. 그 친구가 가정용 전기 기기에 서툰 것을 제일 우스워해하고 제일 핀잔을 많이 준 것은 바로 그 애였어요.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사람이란 자칫 자기가 가지고 있는 약간의 훌륭함을 너무 내세우기 쉽다는 얘기예요. 너무 내세운다고 해서 훌륭한 것이 훌륭하지 않은 것으로 될 리야 없겠지만. 작은 것을 자랑하다가 그보다 훨씬 더 위대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악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혹 잊어버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커다란 훌륭함에 비한 그것의 왜 포함의 정도 자체가 그것을 내세우는 것을 바보스러운 짓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거예요. 국민학교도 다 못 나온 식모애가 전기제품을 잘 다루는 것은 분명히 훌륭한 일이지요. 그러나 고 기기를 조립해낸 기술자나 그것을 발명한 과학자에 생각이 미치면. 그 기구를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다를 줄 아는 것을 대단하게 냉각하는 사람이 웃음거리가 되겠지요. 나는 길길이. 날뛰는 것을 좋다고도 생가하지 않지만, 그것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내가 길길이 날뛰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그것을 나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것 말고 딴것도 혹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가에서이지요. 나도 고형만한 나이가 되면 지금의 고형만큼 현명해질 수 있어요. 오 년은 꽤 긴 시간이니까요.」
「천만에. 만일 내가 지금 현명하다면 나는 오 년 전에도 그만큼은 현명했어. 만일 내가 오 년 전에 어리석었다면 지금도 꼭 그만큼 어리석어. 오 년 전보다 내가 더 현명해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오 년이 짧은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뿐일 거야. 너무 기대하지 말어. 김군 자네는 분명히 오 년 전의 나보다 현명해. 오 년 전 나는 앞으로 올 오 년이 길지 짧을 지에 대해서 전혀 생각이 없었어. 나는 그것이 영원인 것처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모양이야. 나는 나보다 오 년 더 세상을 산 사람들을 별로 믿지 않기로 하고 있어.」
「나도 근래에 와서 믿지 않기로 한 것이 하나 있어요. 역시 우리 집 식모 얘긴데. 그 애는 처음 왔을 때보다 사니, 본 적은 없지만 고향에서 물동이를 이고 옹달샘으로 물을 길으러 다녔을 때보다, 지금이 조금도 더 나아진 것 같지 않아요. 그 애가 지금 편리한 신식 기구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은 그 애를 더 비참하게 보이게 했으면 했지. 돋보이게 하지는 않아요. 아마 마찬가지겠지요. 그 애가 돈을 부지런히 모아서, 또는 운이 좋아서 돈 많은 남편을 만나 그런 물건들을 진짜 제것으로 소유한다 하더라도 형편에는 별로 변함이 없겠지요. 편리한 물건들. 가령 이십사 평이나 삼십평형 아파트를 열심히 믿었다는 점에서 나는 그 애와 다를 것이 조금도 없어요. 이제 나는 그런 물건들이나 그런 물건들이 풍기는 분위기 같은 것들을 한번 의심해봐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돼요.」
「김 군이 볼 때는 명약관화한 것을 식모애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수가 있거든. 마찬가지로 김 군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의심만 하는 것도 딴사람이 보면 불을 보는 것보다 더 분명할 수가 있지.」
「그 딴사람이 바로 고형이오?」
「미안하오, 미안해. 나는 그 말을 끌어내자고 한 것이 아니라 식모애의 형편은 식모애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만일 식모애에게 김형이 가지고 있는 의식이 없다면, 그 애는 김형이 만족을 느낄 수 없는 물건들을 가지고도 행복해질 수가 있거든. 우리 사장에게 피카소나 루오의 그림에서 즐거움을 느끼며 세상을 살아가라고 부탁할 수는 없지 않아. 그 사람은 돈에서 우리가 모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우리들은 그 사람이 돈에서 무엇을 느끼는지 속단할 수가 없어. 우리들은 그 사람만큼 많은 돈을 가져보지 못했거든.」
「고형. 취했소, 고형답지 않게 고형은 지금 상대주의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천만에, 상대주의를 적용시켜주어도 우리 사장 같은 사람들은 죄가 많아, 절대주의로 보자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 별로 없지. 너의 영역에서 갖는 자신과 뻔뻔함을 딴 영역에서는 고집하지는 마라, 결국 이거지. 그런데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거든.」
「절대주의로 보자면 어떻게 되는 거요, 고형?」
「남의 영역에서 건방진 소리하지 말 것은 물론이고. 자기의 영역에서도 자신의 식견만으로 사물을 판단하지 말라. 이런 식이지, 따라서 이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사물을 판단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그들 자신의 식견이 아닌 보편적 식견이 준비되어 있어야 된다는 점이야. 그런데 요즘 갈수록 이 보편적 식견이 그들에 의해서 능멸을 당하고 있어. 그들이 건방져져 가는 것과 보편적 식견에 험집이 생기는 것은 서로 악순환을 하고 있지. 이제 그들은 그들의 관건이 보편적 식견을 지배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야.」
「그들에게 상대주의를 적용시켜주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들에게 그들의 본분을 잊지 않게 해주는 것은 우리들의 상대주의가 아니라 절대주의였어요.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겠지요. 우리들의 분야 안에서 우리들 의견이 통한다면 우리들의 분야 밖에서 그 의견이 통하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 그래서 이제 거꾸로 그들이 절대주의를 들고 나오게 되었어요.」
「상대주의라거나 절대주의라거나 하는 것은 폭력으로 되는 게 아냐. 폭력에 의한 나눠먹기나 혼자 먹기는 상대주의나 절대주의가 아니거든. 상대주의나 절대주의는 폭력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야. 특히 절대주의는 상대주의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가치 체계를 의미하는 거야. 포괄적이지 못한 절대주의는 터져 버리거든.」
「그럼 우리 사장님의 오만함을 꾸짖기 전에 그 오만함까지를 포용할 수 있는 어떤 가치 질서를 찾아내야 된다는 말이군요?」
「대강 그런 얘기지. 보편적 가치를 세운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고, 또 세웠다고 생각이 되더라도 세운 사람이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은 조금 우스운 일이지. 십 년, 이십 년, 또는 백년 후에야 판가름이 날지도 모르거든, 어쩌면 영 안 날지도 모르고.」
「그럼 혼돈 아니오 ? 공통된 척도가 없이 각자 자기가 옳다고'생각한다면 결국 아무도 옳지 않다는 얘기 아니오?」
「상대주의에 다분히 그런 잡종 같은 데가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할 수 없지 않아? 꾸준히 암중모색을 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지.」
「판가름이 영 안 날지도 모르는데 꾸준히 암중모색을 한다는 것은 도로(徒勞) 같군.」
「판가름이 안 나버리면 그것은 분명히 도로지. 그러나 판가름 날지 안 날지는 아무도 모른단 말야. 판가름이 날지 안 날지 모르는 한, 그것은 도로가 아니라 시도(試圖)지.」
그들은 술을 한 주전자 더 하고 싶었지만 헛배가 불러서 그만두었다. 헤어질 때 김은 고에게 「고아원도 고형의 많은 시도들 중의 하나요?」라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김은 혼자서라도 이차를 할까말까 망설이면서 집으로 가는 도중 그의 시도는 무엇일까 하고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이리로 전화를 들어오시는 대로 걸어 달래요.」
집에 들어가자 식모애가 그에게 쪽지를 내밀었다. 그는 쪽지를 받아 넣고 그의 방으로 갔다.
「전화가 세 번이나 왔어요.」
식모애가 뒤따라오면서 덧붙였다. 그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벽에 기대앉아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나 밥 생각 없다.」
그가 말했다.
「전화는 어떻게 하셔요?」
「전화? 응, 알았다.」
그는 천정을 멀끔히 쳐다보면서 담배만 뻑뻑 빨았다. 식모애가 신발짝 소리를 내면서 부엌 쪽으로 사라졌다. 그는 일어가 큰방으로 가서 텔레비전의 음량을 줄이고 전화를 걸어 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가물가물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김 선생, 전화 안 거우?」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주인아줌마가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개비를 빼내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빼앗아 입에 물고 주인아줌마를 따라서 큰방으로 갔다. 주인아줌마가 텔레비전의 소리를 낮춰 주었다. 그는 번호를 돌렸다.
「정양 좀 바꿔주세요.」
그가 말했다.
「아. 미스 정이오? 나, 나요. 김이오.」
「한잔 하셨군요? 누구와 하셨어요?」
「앞 동네 고처사와 막걸리 한 투가리 했소.」
「엄머, 저한테 부탁했더라면 전야제를 멋있게 한번 여는 건데 그랬어요. 아까와라.」
「전야제라니, 내일이 무슨 제삿날이오?」
「우린 일박이일 코스로 등산갈 준비를 까고 있어요. 끼어들 생각은 없으세요?」
「없는데요. 선약이 있어요.」
「선약이요? 멋있는데 ! 행선지만 좋으면 같이 갈 수도 있어요. 어디 패거린지는 만나보면 알 테고.」
「미안하지만 이쪽에서 사절이오.」
「설마 단둘이는 아니겠지.」
「아니오.」
「단둘이야?」
「그래. 」
「야, 그 동안 다블 데이트했구나, 치사하다. 」
「내일 만나면 두 번째야. 」
「계획대로」
「무슨 계획?」
「미스터 김 출세 삼단계 계획.」
「아, 그 계획을 위해서라면 미스 정에게 접근해야지.」
「그럼 그앤 뭐야?」
「그앤 미스 정이 가지고 있는 건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애야.」
「약을 올리는군.」
「정말이야.」
「정말이니까 약이 오르지. 그 애가 가지고 있는 건 뭐야?」
「잘 모르겠어. 아마 약간의 빛과 어머니나 동생들 같은 부양가족이겠지.」
「가지고 있지 않은 건?」
「많지. 대학 졸업장, 돈 많는 아버지, 피아노, 슈피츠, 철딱서니 없는 친구들.」
「아, 대강 알 것 같군. 미스터 김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출세 작전을 포기하다니!」
「지난 토요일에 시골에서 친구가 찾아왔어. 우린 삼차로 청량리에 있는 한 맥주집에 들어갔지. 그때 눈알이 머릿속에서 헤엄을 칠 만큼 취해 있던 내 곁에 앉은 애가 바로 그 애였어.」
「아, 난 영등포 쪽인 줄 알았더니.」
「우린 무슨 얘기 끝에 다음 토요일이 한글날이라는 것을 알았어, 내가 그날 교외로 놀러가자고 제의를 했지. 그녀는 좋다고 했어.」
「미스터 김, 생가보다는 낭만적 좋아하시는군. 그 여자가 나을 것 같아?」
「우린 약속을 했어. 행선지는 송추. 장소는 남부역 개찰구. 시간은 한글날 아침 열시.」
「행선지가 호텔이고, 시간이 밤이라면 혹시 약속을 지킬지 모르겠군.」
「호텔이야 부석사 입구에도 많지.」
「우리의 행선지는 미정이야. 그러나 미스터 김이 작부 따라 송추에 갈 수 있다면, 나라고 아무를 따라서 부석사에 못 가겠어?」
「무량수전이나 잘 보고 오시지.」
「가긴 가야겠어. 서울에 남아 있으면, 교외선이 타고 싶어질지 모르니까.」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그는 수화기를 잠시 들여다보고 있다가 제자리에 얹어 놓았다.
「아주머니, 죄송해요. 시시껍적한 전화 때문에 벙어리 연속극을 보시게 해서.」
「하도 많이 봐서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훤하다우. 전화가 시시껍적만 하지는 않은가 본데?」
이튿날 김은 아홉 시에 집을 나섰다. 버스정류소로 나가는 골목 옆에는 꽤 큰 생필품 연쇄점이 항상 있었는데. 그는 문득 거기에 들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병이 동글동글하게 예쁜 자그마한 국산 양주 한 병을 사서 호주머니에다 찔렀다. 그리고는 말쑥하게 단장된 가게 안을 끼웃끼웃하고 있는데, 한 쪽 구석에 -특별 서비스-라고 비스듬하게 써 붙여 놓고 사람들이 그 아래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통닭들을 구워서 한편으로는 내오고 한편으로는 포장을 해서 팔고 있었다. 저것을 거추장스럽게 어떻게 들고 가나 싶었지만, 비닐 봉지에 넣어서 엷은 종이에 싸 가지고 손잡이가 있는 종이봉투에 집어넣으니 대단히 간편해 보였다. -통닭 한 마리 특별 봉사가격 900원-이라고 씌어 있었지만, 사실은 중병아리 몸통 반쪽이었다. 그는 두 마리를 샀다.
서울역에 도박했을 때 벽시계는 아홉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남부 역으로 가서 송추행 포 두 장을 끊었다. 그쪽으로 가는 교외선은 아홉 시 이십 분과 열 시 사십 분에 있었다. 그는 개찰구 일대가 잘 보이는 곳에 가 서서 열시 반까지 기다렸다.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소풍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쌍쌍이거나 패거리들이었고 남녀만에 혼자서 나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역원이 막 개찰구를 닫으려 했을 때 표를 내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송추에서 내리자 하늘이 기막히게 맑게 개어 있었다. 가녘으로 파르스름한 먼 산 위에 수채화처럼 엷은 구름이 경쾌하게 깔려 있었고, 복판은 새파란 가을하늘이었다. 김은 누구를 기다린다거나 하는 따위의 부담에서 말끔히 벗어나, 누렇게 익은 벼포기를 베어 포개놓은 논두렁 위를 가분히 뛰어갔다. 그는 전에 소문난 유원지에 볼 것이 별로 없음을 화낸 적이 있었다. 그는 이제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 유원지란 소나무 몇 그루와, 물이 흐르는 개천과, 더럽혀지지 않은 공기와. 쏟아지는 햇볕. 그리고 그런 것들을 알아볼 수 있는 마음만 먹으면 되었다. 호텔과 여관과 산장들, 전국 어디서나 다 똑같은 조개제품과 죽세공품과 털수건들, 관광버스와 승용차들, 훤소와 잡답, 이런 것들이 유원지를 만드는 것은 결로 아니었다. 기차에서는 괘 많은 사람들이 내렸었는데. 어느 틈에 어디로들인가 다 스며들어가 버리고 들판은 나른하도록 한가하게 텅 비어 있었다. 김은 사오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가지 걱정이 있었다. 목구멍을 톡 쏠 국산 양주는 그렇다 치더라도, 두 마리가 합쳐서 한 마리가 될 통닭을 어떻게 혼자 먹겠다고 벌여놓느냐였다. 놀러나가면 먹는 재미가 첫째라더니, 티없는 공기에 노출된 것만으로도, 온몸의 땀구멍이 왕성하게 신진대사를 했는지, 벌써 배가 고파왔다. 기는 난감해서, 우선 동글동글한 병을 꺼내어 들여다보았다. 수정처럼 맑은 액체가 병이 흔들릴 때마다 매끄러운 유리벽 위로 왁왁 퍼져나갔다. 그 병마개를 돌렸다. 따르륵 소리가 나면서 병마개가 도토리 껍질만한 잔이 되어 떨어져 나왔다. 그는 그 잔에다가 술을 따라서 입안에다 홀짝 부었다. 두툼한 유리가 아니라 뾰죽한 양철의 끝이 입술에 와서 닿는 감촉은 산뜻했고, 입안으로는 쥬니퍼의 향기가 확 퍼졌다. 그는 입맛을 쩍 다시고 병마개를 닫았다.
그때 저만치서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예요. 」 대개 그런 소리 같았다. 그는 얼떨결에 그쪽을 돌아보고 「나 말입니까?」하고 말했다.
「여기에 댁 말고 또 누가 있어요?」
여자가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글쎄요?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데요. 」
그는 정말로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왜 사람을 힐끔힐끔 훔쳐봐요?」
「내가요 -김은 한방 맞은 듯한 상태로부터 정신이 조금 드는 듯했다. 「내가 댁을 훔쳐봐요? 나는 댁이 나를 훔쳐본다고 생각했었는데요.」
「기가 막혀서. 아이, 재수 없어.」
여자는 홱 돌아앉아서 그에게 등을 돌렸다. -
김은 일이 조금 우습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등산복이나, 하다못해 잠바조차 아닌, 몸에 꼭 맞는 까만 저고리와 바지를 맵시 있게 차려입고 있었고, 통이 넓은 바짓가랭이 아래로는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있어서, 그런 데에서는 남의 눈을 쉽게 띄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마 그도 그녀의 그런 멋장이 양장을 한번쯤 쳐다보았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김 자신의 복장도 썩 등산객이나 소풍객의 복장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잠바는 입고 있었지만. 머리끝에는 아무 뚜껑도 없었고, 신사복 바지에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훌쩍 일어서서 톡톡 털고 가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완강하게 등을 돌리고 앉아서 아직도 머리를 털고 있는 것이, 아마도 코방귀라도 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통닭꾸러미를 냉큼 집어들고 그 자리를 피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그는 향긋한 냄새가 톡 쏘는 맛을 남기면서 밥줄을 타고 뱃속으로 스며들어가 버렸으므로 술병 뚜껑을 열고 또 한잔 따라서 홀짝 입안에다 부어넣었다. 역시 향기가 입안으로 확 퍼졌다. 그는 통닭봉지를 집어들고 어슬렁어슬렁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거 좀 같이 드시지 않으시겠어요? 」라고 말했다.
「먹을 거라면 저 안에도 많이 있어요. 지금 저걸 어떻게 다 먹나 하고 걱정 중에 있어요.」
그녀가 기를 힐끗 돌아보고는 그녀 발치에 놓여 있는 꽤 실팍한 꾸러미를 가리키면서 매몰차게 말했다.
「그것도 같이 먹으면 더욱 좋지요.」
「뻔뻔하게 굴시 마세요. 정말 생긴 대로야.」
그녀는 다시 한번 머리를 뒤로 발딱 젖히면서 코똥을 뀌었다.
「정 그러시다면 내가 자리를 피해드리지요. 난 아가씨가 처량하게 혼자 앉아 있는 것이 청승맞아서 그랬을 뿐이오. 아가씨도 바람을 맞았소?」
「남 걱정은 하지 마세요.」
「나는 남부 역에서 사십 분을 기다리다가 바람을 맞았소. 아가씨는 여기서 맞았소?」
「여기서 만나기로 했어요. 아직 기다리는 중이에요.」
「아. 바람을 맞고 있는 중이시군요 그러고 보니 내 짝도 다음 차로 올지 모르겠군. 」
그는 꾸러미를 내려놓고 또 한잔의 술을 따라서 홀짝 마셨다. 그리고 병을 주머니 속에 쑤셔 넣고 팔짱을 끼고는 천천히 고개를 푹 숙이고 저쪽으로 열 걸음씩 걸어갔다가 되돌아왔다. 그녀는 얼굴에 커다란 색안경을 걸치고 있어서 예쁜 얼굴인지 미운 얼굴인지 얼른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얼굴 색은 하얬는데, 콧날은 오똑했고 입술도 몸매에 어울리게 육감적이었다.
그들의 짝들은 기차가 반대 방향에서 한번. 같은 방향에서 한 번, 두 번이나 들어온 다음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김은 도토리 껍데기만한 잔으로 술을 홀짝거리면서 닭다리를 뜯고 있었다. 그는 술이 취해왔으므로 통닭 봉지를 터서 그녀가 원하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도록 그녀 손닿는 곳에 놓아 두고 다리 하나를 찢어 발겼었다. 마침내 그녀가 고기 한 점을 집어서 깨소금을 묻히며 「염병을 할 자식, I기어코 값을 하는군」이라고 말했다. 김은 깜짝 놀랐다. 그의 눈에 그녀가 모든 여성적인 가냘픔과 가련함을 벗어버리고 애증과 영욕이 얼룩진 한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하마터면 그녀의 여성적인 아름다움까지도 박살이 나버릴뻔했다. 그는 입이 떡 벌어졌다.
「댁의 짝은 뭣하는 사람이에요. 학생이에요?」
그녀가 그의 당혹함 같은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아니오, 학생이 아니에요.」
「내 짝은 부자예요. 그런데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어요. 부잣집 아들인지 제 자신이 사장인지, 재벌 회사의 간부인지. 아니면 남의 돈 속여먹는 사기꾼인지, 홀어미 장사 밑천 울궈먹는 개망나닌지. 도통 알 수가 없어요. 돈 하나 쓰는 건 분명하죠. 저게 만 원 가지고 장만한 거예요. 저걸 어떡하죠? 기차에서 여기까지 끌고 오는데도 혼이 났는데. 시내 같으면 택시라도 타지.」
「까서 먹어야죠. 먹고 나면 가벼워질 테니까.」
「잡숴요? 저 속에 뭐가 들었는데요?」
「맛있는 거 아니오?」
「맛있는 건 맛있는 거죠. 크래카, 알 사탕, 뽀빠이가 만 원어치 들었어요.」
「술이나 도시락은 없고요?」
「밥은 저 안에 들어가면 국수를 말아서 파는 데가 있어요. 가만있자. 가서 누구를 좀 나오라고 할까?」
「저걸 들고 가려고 그러시오?」
「네, 그래요. 약 오백 미터쯤 돼요.」
「같이 들고 갑시다.」
「어머. 정말 그래주시겠어요 ? 그렇다면 이 통닭 절반을 제가 먹어드리죠.」
그들은 마주 앉아서 닭을 뜯기 시작했다. 시장했던 터라 맛이 있었다.
「술은 이제 그만 하세요. 그것이 팔십푸르푸라면 사십 도라는 얘기예요. 벌써 반 병을 자셨어요.」
「글쎄, 취해오는군. 댁은 주일학교 선생이오?」
「이 양반이 사람을 웃기시나? 댁은 그렇게도 사람을 보는 눈이 없어요? 보면 몰라요?」
「댁은 척 보면 알아요?」
「대강 알죠. 월급 많이 주는 회사의 사원이고, 돈을 벌어서 좋은 일을 할까 나쁜 일을 할까, 아니면 공부를 더 할까 망설이는 중이고, 강남 어디에 대지는 마련해놓고 건축비를 여축 중이거나 아파트 매입 자금을 저축중이고, 부잣집 딸과 연애하면서도 슬슬 술집 색시들을 꼬셔서 재미를 보려 하고, 맥주홀 한 군데 정도는 외상이 통하고.,.,,」
「나도 알았다. 당신은 화장품 회사 외판원이다.」
「나의 단골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들이에요.」
「남자 단골을 가진 여자라면 술집 색시밖에 더 있나? 맥주홀이오?」
「내 단골 중에 돈을 아주 헤프게 쓰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나 저런 물건을 선뜻 사주려는 사람들은 그렇게 흔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런 물건을 직접 들고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더욱 드물어요. 저 꾸러미를 사준 사람만 해도. 처음 두 번은 용케 꼬셔 가지고 데리고 왔었어요. 그런데 세 번을 채우지 못하고 마는군요. 물건을 사주는 것이 다가 아니에요. 찾아가는 정성이 있어야 돼요. 아마 어디서 여학생이나 하나 나꿔채 가지고 입구에 호텔이 있는 절간에나 껍적껍적 찾아가고 있겠지요.」
「남자들은 그런 데 찾아가기를 좋아하지요. 여자들이 교회에 가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그런데. 지금 저걸 어디로 가져가는 거지요?」
「가보면 알아요. 교회완 아무 상관이 없어요. 난 그런 델 아주 싫어해요.」
「다행이군. 난 또 확성기 소리에 조건반사가 된 것인 줄 알고 겁을 먹었어요.」
「조건반사야 원숭이새끼나 하는 거겠지요.」
그들은 통닭 두 쪽을 맛있게 먹어 치우고 생활 필수품 연쇄점에서 넣어준 휴지 쪽으로 고양이처럼 입술을 닦았다.
「꽤 무거운데.」
김이 일어서서 한 손으로 꾸러미를 들어올려 보았다. 그녀가 따라 일어서서 한쪽을 맞들었다,
「둘이 들면 혼자 드는 것보다 훨씬 가볍죠.」
「정말 그렇군.」
「둘이 들면 혼자서 드는 것보다 배가 아니라 세 배 네 배가 가벼워지죠?」
그들은 동리를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김은 나머지 한 손으로 술이 반쯤 남은 동글동글한 작은 병을 거머쥐고 있었고, 여자는 깔고 앉아 있던 손수건을 쥐고 있었다. 김은 취했다. 그는 술병을 호주머니 속에 쑤셔 넣는 것을 잊었다.
서정인(徐廷仁: 1936- )
전남 순천 출생. 서울대 영문과 졸업. 하버드대 영문학과 수학. 1962년 <후송>이 <사상계> 신인상을 받아 등단. 전북대 교수. 그는 절제된 문장, 단일한 인상과 환상, 통일된 구성 등의 작법을 통하여 인생의 단면을 부각시키는 작가로 80년대 리얼리즘에 기여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토요일과 일요일 사이>, <철쭉제>, <가위>, <원무>, <강>, <달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