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는 아침 -양귀자
웅정 고개에서 나는 갈곳을 모르는 고아처럼 잠시 멍해 있었다. 나의 이 -멍함-은 때때로 별이 되어 하늘로 흘러가고 있었으며 지척을 분간 못하는 어둠속에서 그것은 하나의 등대처럼 오히려 나를 부추기었다. 나는 사금파리가 문득 빛을 '는 자갈길을 밟아서 고개 마루턱을 넘어 한없이 먼 저편을 향해 섰다.
이제부터 나는 뛰리라. 일생을 걸어만 왔었으니 이제쯤은 뛰어도 보리라. 나는 심호흡을 두어 번 하고는 사뭇 뛰기 시작했다. 아랫도리로 차가운 아람이 씽씽 지나가면서 가끔씩 허리가 결리기도 했으나 뛰는 일을 그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뛰었을 때 뒤에서 밝은 불빛이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처럼 내 초라한 신체를 은밀히 어둠 속에서 건져냈다. 치밀하고 완벽한 어둠 속에서 갑자기 발견 당한 나의 모습은 이미 뛰거나 걸을 필요조차 없는 무기력한 고깃덩이로 둔갑해 있었다. 그 강한 불빛은 곧바로 내게 쏟아지며 멈추었고 운전석 문이 열리면서 텁수룩한 얼굴이 나를 불렀다.
「뛰는 것보다는 빠를 것잉게.」
트럭이었다. 내가 그의 옆에 편안히 착석한 다음 무심코 바라본 옆 창으로 마침 별똥이 하나 길게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잠깐 뒤, 하늘은 자국도 없이 쌩둥 거리는 얼굴로 창 한켠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용정 고개에서 신도안 대궐터 까지는 십 분이면 족했다. 매번 밤 기차로 내리는 나는 때로는 걸어서, 때로는 뛰어서, 운 좋으면 택시에 편승해서 신도안에 들어와야 했다. 역에 내려서 전화를 하면 정운은 손수 털털거리는 경운기를 몰고 마중을 나오기도 하였지만 자갈길에서 한참을 털털거리고 나면 실로 고약한 기분이어서 아예 포기하곤 하였다.
대궐터에서 내린 나는 우선 다방으로 들어갔다. 시골의 다방다웁게 레지는 적당히 미웠고 커피는 넘치도록 붓는, 그러나 복돌이 엄마나 김 주사까지도 소상히 꿰고 있는 마담이 있어서 절대로 불안하지 않는 그런 다방이었다.
우유를 한 잔 마시고 징징거리는 텔리비전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을 때 벙거지 모자에다 군용 점퍼에 우화까지 신은 정운이 나왔다.
「바쁘죠?」
나의 첫인사는 시비조였다. 마음과는 달리 나는 냉정하고자 했다. 물론 바쁠 것이 틀림없었다. 미륵사 창건 이래 재작년부터 치러오는 이 떡공양만큼 큰 행사는 일찌기 없었다. 그러나 일의 규모가 커서 그것을 빗대놓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내일부터 떡공양이 시작될 터인즉 그가 바빠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공양주인 그 떡보살에 있었다.
떡보살. 이 신도안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나만큼 그녀에 대해서 복잡한 감정을 갖는 사람도 아마 없을 것이었다. 같은 성(性)을 가진 여자끼리면서도 때때로 나는 그녀를 깊이 존경했다가 한없이 경멸하기도 했다.
떡보살은 삼십 후반의 나이에 어울리는 푸짐한 체구가 조금도 눈에 거슬리지 않을 만큼 나름대로 짜임새가 있는 미모의 여자였다. 그녀는 늦가을의 신도안에 나타나서 일주일쯤 숫용추 밑의 암자에서 기거하는 동안 씀씀이의 헤픔이나 화려한 치장으로 신도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본래 숫용추는 아이 못 낳는 부인네들의 치성터로, 그곳에는 아기 점지하는 무당의 집만도 다섯 채였다. 계룡산 줄기의 한 골짜기에 자리잡은 숫용추는 말하자면 폭포였다. 물줄기에 패인 암반의 모습은 흡사 여자의 음부(陰部)였고, 그곳을 향해 힘차게 내리 꽂혀지는 물줄기는 혼신의 힘을 다하는 숫용의 거대한 꿈틀거림이었다. 짓궂은 어떤 이의 말처럼 「처녀가 치성을 드려도 포태할 장소」임에 틀림이 없을 만도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가 말한 대로 치성을 드릴 필요도 없는 과부였으므로 그녀의 출현을 동네 사람들은 「과부의 심심병」이라고 풀이했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미륵사 아래채 방을 치우고 미륵교에 입교하는 것을 보고 나는 선뜻 세상의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그것은 말하자면 나의 여자다운 예감이었다. 그리고 나의 예감은 고스란히 들어맞아서 오히려 나를 부끄럽게 하였다. 마침 이곳에 내려와 있던 나는 떡보살의 돌연한 입교(入敎)에서 막연히 어떤 음욕한 냄새를 맡았던 모양이었다.
미륵교의 교주(敎主)인 성산은 그녀와 불시에 짝이 되어 미륵의 뜻을 더욱 오묘하게 펴가는 재주를 부리기 시작했는데 정운은 이런 경우 성산의 뜻을 거역하지 않는 효심 깊은 아들이고자 하였다. 혹 그 자신이 피해자가 될지라도, 또는 그의 여자인 내가 피해를 입을지라도 정운은 차라리 성산의 뜻을 따랐다.
성산은 그 속명을 용(龍)이라 하였으나 깨달은 바 있어 전 우주를 상대로 미륵의 뜻을 세상에 천명하였다, 하지만 이 신도안 내에서 우주를 상대로 하지 않는 종교 단체는 아예 존립하지 않았으므로, 수백에 이르는 많은 종교를 다 젖혀 두고 떡보살이 미륵교에다 거금을 공양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성산은 그 종교의 근본이 어떻든 간에 인물은 인물이었다. 사리에 밝고 지혜를 방편지(方便智) 이상으로 활용하는 능력이 있었던 까닭에 미륵교의 법문을 편지 칠개 월 만에 지금의 미륵사를 지었다. 그러고도 그의 아들을 서울로 유학시켜 현대 철학을 수학케 했고 아들로 하여금 성산 2세가 되는 것에 불만을 품지 않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사람이란 두 가지를 갖추어야 비로소 사람인 법인데 그 하나는 머리요, 하나는 힘이렷다. 헌데 너는 본시 약골인데다 상(相)도 여자상이라 별 수없이 머리 하나라도 트여야 할 것 같다. 너를 공부시킨 것도 다 이런 까닭에서 나온 것이니라. 부모만큼 자식 잘 아는 사람 없다 하였고 부모를 거역함은 천리를 거역함과 같으니 그리 알거라.」
천리라는 것은 바로 성산의 교훈이었다. 하늘의 이치가 세상에 두루 범접하여 만사형통이 다 그에 의만 것으로, 이는 곧 유학에서 말하는 이(理)와 기(氣)였다.
-이-와 -기-를 완전히 소유함을 불(佛)로 보고 있는 성산이 미륵교라 이름 짓고 그에 따라 돌부처를 법당에 모신 처사를 나는 모순의 극치라고 야유하곤 했다.
「정운이란 이름도 사실 그래요. 구름은 형체도 없는 것 아녜요? 거기에다 옳은 것 바른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이러니에요. 구름은 옳고 그름에 편승할 만큼 목적을 지니는 사물은 아니니까요.」
-정운-이란 이름은 그의 열 가지도 넘는 법명 중의 하나였다. 그와 성산 모두 정운이란 이름에 의견의 일치를 본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그들은 다분히 서정적이었다.
하기야 돌에 관해서는 일가견을 넘어선 것이 또 성산이었다.
「태초에 뜻이 있어 천륜에 따라 힘을 받은 것이 곧 돌멩이렷다, 해서, 근본 지혜를 뚤뚤 뭉쳐 받은 것이 또한 저 돌이니라. 겉모양만 봐도 우람한 저 바위들이나 냇가의 닳은 돌이나 모두 천리 속에 제자리를 찾는 법이어서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하나라도 모두 제자리를 찾아 고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 역시 결국에는 한 줌 흙이 되며 그 흙이라는 게 또 돌의 마지막 모습이니 결국에 가서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이나 죽어 있는 저 돌이나 다 같은 법이다.」
어미에 -.....하는 법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성산의 특징이었다. 그러나 그 억양이 어찌나 구성지고 오묘한 장단과 고저를 갖추었는지 그가 말하는 법이라는 것이 절대 틀린 법이 아니라고 믿어버릴 정도였다.
점퍼 포켓에 맥없이 손을 찌르고 앓아 있던 그가 나의
「바쁘죠?」
라는 시비조의 첫인사에 피곤한 웃음을 보였다. 첫 떡공양을 지내던 해에 이미 떡보살이 정운에게 매혹되어 성산과 손을 잡았다는 말을 들어버린 나는 그 뒤로부터 공양이 있는 12월이면 서너번씩 이 「바쁘죠」라는 말로 내 원망을 다 담았다. 그 외의 어떤 말을 할 수 있는 나도 아니었지만 그 이상의 직설적인 야유를 삼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은 그에 대한 나의 사랑 때문이었다.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좋아한다는 것은 싫어한다는 것의 시작이며, 역시 싫어한다는 것은 좋아한다는 것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나이지만 그 많은 역겨움을 다 참아내고 있는 까닭도 역시 사랑이었다.
「가자구. 여관에 불 넣으라고 일러야지.」
다방을 나오면서 나는 그의 어깨에 묻은 지푸라기를 발견하였다. 그에 대해 다소 차가왔던 나는 일순 지푸라기와 그를 동시에 포옹하였다.
「잠깐만 기다려요.」
묵묵히 앞에 가던 그가 내게로 돌아섰다, 신도안의 저녁 10시에 우리는 자갈 길 위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지막하고 우중충한 동네들이 그의 어깨 너머에서 하나씩 불을 끄고 있는 중이었다.
충청 여관 안주인은 나를 보자마자
「아이구 어쩐지 오실 것 같아 불을 넣을까 했는데 참말 어쩌지유?」
라고 허둥대면서 우선 연탄 집게부터 챙겨 들었다, 별수 없이 이부자리를 깔고 앉은 우리는 방바닥이 따뜻해질 때가지 오들오들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파란 불이 이글거리는 연탄이 아궁이 속에서 힘찬 열기를 들여보내고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암담하기조차 할 추위였다.
「올해는 얼마나 돼요?」
나는 이랬다. 그를 증오하면서도 그의 모든 악(惡)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가끔가끔 나는 세상의 모든 악과 손잡고 앉아 있는 기분이 될 때가 있는데 지금 같은 경우 떡보살의 희사액을 물으면서 나는 내 속에 들어앉은 마귀가 발을 뻗는 기척을 들었다.
「쌀 삼십 가마하고 과일 십만 원어치, 돼지 사십 두.」
그는 세무 검사 나온 관리처럼 대답했다. 나는 성산이 적어도 공양물의 반절은 도매 상인에게 넘겨 백오십 정도는 현금으로 차지했으리라고 짐작했다.
떡공양 첫해, 떡보살은 쌀 백 가마를 내놓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산은 한 가마니도 축내지 않고 백 가마를 고스란히 떡으로 쪄냈다. 떡보살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과시는 필요하다고 본 성산다운 계산이었다, 그해 열 가구에서 꼬박 일 주일을 만들어 낸 흰떡이 신도안 내의 모든 집에 푸짐히 돌려졌다. 어지간한 집의 명절 떡에도 충분한 분량이었다.
참 그날은 볼 만했다. 시루에서는 안개처럼 푸진 김이 올라왔었고 미륵당 앞 뜰에는 신도안 주민들의 거의 반절 이상이 이 기상천외한 구경거리를 위해 알뜰히 운집했다,
「과부란디 혼자 운수사업 인가를 한대유.」
이것은 정류장 앞에서 주막을 하는 곰보아줌마의 말.
「운수사업이라니, 사주관상업 말인가?」
곰보댁 치맛자락을 주인 몰래 넉넉히 서너 번은 열었을 고깃집 털보의 능청을 받은 것은 충청 여관의 안주인.
「차사고가 하도 많이 나니께 이 짓을 하는 모양인디유, 서울서도 알아주는 부자래유.」
「하기야 여자 혼자서 수억을 굴리는 것을 보드라도 통은 대통인게, ,,,,」
곰보아줌마의 부러움 섞인 경탄 속에는 백 가마 중 열 가마만 줘도 텔리비전과 냉장고를 살 것인데, 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저녁 아홉 시만 되면 문 닫고 옆집으로 연속극 보러가는 그녀였고 냉장고만 있으면 여름에 아까운 안주감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그녀였으니까.
「근데 어떻게 미륵교를 점찍었는가 몰라. 그야 성산씨 수단도 보통은 넘으닝게.」
충청아줌마의 말에 나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천만의 말씀이라는 듯이 고깃집 털보가 너스레를 떨었다.
「무슨 소리여, 성산 같이 늙은 가짜중 어디가 얼마나 잘났다고 팽팽한 과부가 달라들겄어. 접때 숫용추 가운뎃집 무당이 그러는디 그 과부가 정운이헌테 깜박 넋을 줘버렸대여. 아, 그 언젠가 정운이가 가운뎃집에서 이틀인가 묵지 않았남? 그려. 바로 칠성어메 신령 모실 때 말여. 그때 저 과부가 정운이헌테 반해 가지고 치성이고 뭐고 싹 집어쳐 버리고 미륵당으로 내려왔다 이거여. 과부라도 젊은 놈 그것이 더 좋다는 디는 할말 있어?」
털보가 곰보의 허리를 툭 치며 헛웃음을 쳤고 곰보아줌마가 째지게 눈을 흘겼다.
법당에서 보는 정운은 잘 다듬어진 숙련공이었다. 도서관에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전혀 그런 얼굴 표정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때 그는 -장자-를 읽고 있었다. 내게 장자의 호접 꿈 이야기를 해주던 그는 나무랄 데 없는 학자였었다. 나비꿈 속에 머물던 몇 초간과 장자의 전생(前生)을 동일시했던 나에게 그는 「此之謂物化」를 「하나의 개념을 열 가지로 해석한 차이」로 풀어 설명했다.
「사람이 스스로 그 자신에게 내리는 자기판단이라는 것은 영원불멸한 것은 아냐. 무수히 변하는 한 순간의 찰나적인 느낌에 불과한 것이지.」
「물론 그렇죠. 순간이란 것은 때때로 유(有)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이는 무(無)이니 까요.」
나는 우선 수긍할 수 있었다. 지금 이처럼 차가운 방바닥이 몇 시간 후에는 틀림없이 뜨거울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듯이, 우선 나는 그를 수긍했다.
「춥지?」
그의 점퍼 포켓에 넣어진 내 차가운 손을 쥐면서 그는 내 얼굴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충청 여관 3호실, 이 방에서 그와 나는 숱하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여 있다고 믿었던 까닭이었다. 떡보살이 나타났던 몇 해 동안에도 나의 믿음은 여일했었다. 그와 나는 피해자이고 성산과 떡보살이 가해자라고 믿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능동과 수동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행위에 참가했던 것으로 보면 그도 역시 가해자의 대열에 속해 있었다, 그렇지만 확실히 나는 피해자였다. 떡보살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쯤 그의 아이 하나를 낳고도 남음이 있었다.
성산은 아들과 나와의 결혼을 격려하는 입장이었다. 처음 성산을 만났을 때 그는 대뜸 「하늘과 땅의 만남」이라고 하였다.
「천생배필이야. 정운이 놈의 머리로 고른 여자라면 나 역시 이의가 없어. 좋아! 자넨 기름진 땅이 될 수가 있겠어. 여자란 자네처럼 맺힌 데가 없이 순탄하게 빠져야 되는 법이지. 암, 그렇구 말구. 그래야 남자가 마음놓고 쉴 수 있는 법이야.」
성산 같은 욕심장이가 나의 어디에 점수를 주었는지는 지금도 알 길이 없었다. 그는 며느리감으로 채택된 나를 이의 없이 받아들여 내년쯤에 길일을 택해 식을 올리자고 했다.
그런데 그해 겨울에 떡보살이 -돈-이라는 힘으로 성산의 지혜를 막아 세운 것이었고 그 뒤부터 성산은 순리대로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이 순리냐고 물으면 정운은
「급한 불부터 끄는 것」
이라고 대답했다. 급한 불, 확실히 과부의 불은 급하기도 할 것이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떡공양이 있는 섣달 보름날에는 일부러 신도안에 내려와 떡보살의 제물이 되는 정운을 지켜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의 고달픈 버릇은 도대체 무엇에 연유하는 것일까?
하지만 추위로부터 사랑하는 여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이처럼 냉기에 몸을 내맡기고 있는 그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 그가 내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떡보살과 성산에게 오히려 뜨거운 감사를 올렸다.
「떡보살은 언제 내려왔어요?」
「초하룻날에 왔어.」
「그 동안 쭉 거기에 있었어요?」
「응.」
「몇 번이나 같이 잤어요?」
「매일 밤 같이 잤어.」
나는 다시 말문이 막혔다. 목구멍으로 쥐를 삼킨 기분이었다. 그의 솔직함이 비위에 거슬리기는 또 처음이었다.
물론 그가 떡보살과 육체 관계를 갖고 있음을 모르는 내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이 신도안에서 공개된 비밀이었다. 작년부터 떡보살은 십이월 초순에 내려와 공식적으로 그의 방에서 여장을 풀었다. 그녀가 이곳에 내려올 때 가지고 오는 두 가지 명목, 즉 휴양과 공양을 유감없이 만족시켜줄 장본인은 바로 정운이었다.
「오늘 밤도 가셔 야 해요?」
「아니, 오늘은 금욕일이야.」
나도 오늘이 금욕일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불공 전날에는 몸을 깨끗이 하고 불공날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그런 날이면 그와 나는 더욱더 육체에 탐닉하여 생의 마지막 몫까지 가불하기도 서슴지 않았다. 그와 나는 공범자로서의 은밀한 쾌감에 익숙한 위험한 연인들이었다.
떡보살과 자는 일은 금기라도 나와 자는 일은 금기가 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정운의 논리는 그 귀결이 정확해서 나 역시 그렇게 믿었다.
「떡보살과는 확인 이외의 어떤 뜻도 없어. 천리(天理)의 확인, 생명의 확인, 순간의 확인,,,,,,」
「그럼 나는?」
「너와의 그 일은 내게는 일종의 성례(聖禮)야. 온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이는 상태니까. 불타에 일보 다가선 경지, 불문(佛門)으로 들어가는 경지------」
어쩌면 나는 그의 이런 감언이설에 온 희망을 걸고 매달려 있는지도 몰랐다, 그의 논법이 아버지를 거역하지 않기 위해 특별 제조한 것이란 사실쯤 모르는 내가 아니었지만 나는 그 말에 완전히 집착하고자 노력했다. 어느새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몇 개의 진리를 깊숙한 곳에 처박아두고 완전 봉쇄를 단행해버린 모양이었다.
가끔은 그녀를 찾아가서 나의 입장을 밝히고 지금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가를 따지고 있는 나의 모습을 상상할 때도 있었다. 영악하고 깐깐한 스물여섯의 처녀는 충분히 황혼길로 접어선 그녀를 이겨내고 있었다. 그럴 때의 나는 잔다크보다 더 용맹스러웠다. 그러나 정작 그녀와 맞부딪친 나은 모래알보다 더 작아진 나의 용맹에 스스로 혐오의 혀를 깨물어야 했다.
그녀와 정면으로 맞부딪친 것은 작년 미륵당 앞에서였다. 정운의 좌선 시간이어서 법당 앞 계단에 나는 앉아 있었다. 마침 성산이 대전으로 일을 보러 나갔기 때문에 나는 마음놓고 따스한 양지에 앉아 그의 등 너머로 보이는 돌부처를 감상하고 있었다.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그 부처는 탱화를 뒷배경으로 하고 앉아 있었다. 어찌나 정성 들여 윤을 냈는지 돌이건만 흡사 보석처럼 단단한 빛을 내고 있는 그것은 절에서 흔히 보는 석가여래상이었다.
부처뿐 아니라 미륵교의 법당은 여느 사찰의 대웅전과 흡사했다. 다만 왼쪽에 걸린 공자의 입상화와 금부처가 아닌 돌부처가 다를 뿐이었다. 나는 비로소 미륵교의 교리가 공히 유(儒) , 불(佛) , 선(仙) 사상(思想)을 함유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성산의 지론을 떠나서라도 공자의 입상과 돌부처와 단정한 그의 뒷모습은 삼위일체로 뭉쳐 미륵교가 무엇 무엇의 보탬인가를 담박에 알게 하였던 것이다.
그때 아래채 쪽에서 슬리퍼 끄는 소리가 나더니 떡보살의 모습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처음 보았을 때의 인상보다 훨씬 여자다운 분위기였고 푸진 체구와는 달리 섬세한 느낌을 주었다. 피해자를 둘씩이나 거느릴 만큼 흉악무도한 가해자의 모습은 아니었다. 혈색 좋은 얼굴 밑으로 뻗어 내린 목은 도자기처럼 우아하였다. 무르익은 중년의 아름다움은 겨울 햇볕 아래서 더한층 나를 주눅들게 하였다.
그녀는 계단에 앉아 있는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당당하면서도 권위 있는 목소리로 무슨 일로 오셨느냐고 물었다.
「정운 스님을 만나러 왔어요.」
「그래요? 하지만 스님은 좌선중인데 다음에 다시 오도록 하세요.」
그녀는 내게 퇴장을 종용하고 있었다. 나는 별안간 속이 메슥거려와서 얼굴을 찌푸린 채 퉁명스럽게 내 뱉았다.
「기다리죠 뭐.」
내 말에 떡보살은 잠깐 놀라는 표정이더니 깔깔 웃으면서 뒤돌아 섰다.
「아무렴, 기다리셔야죠. 퍽 맹랑한 아가씨군.」
참으로 부러운 오만이었다. 돌계단의 차가움도 잊은 채 나는 그녀의 값비싼 옷과 장신구가 -힘-의 근원이라고 믿고 있는 성산이 못마땅해 하마터면 소리쳐 정운을 부를 뻔하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나는 결코 잔다크가 될 수 없었다.
드디어 방바닥이 미지근해오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지쳐 있었다. 아까부터 달라붙기 시작한 피해자와 가해자의 한계 구분이 나를 그에게서 얼마만큼 객관화시켜주기 시작했다. 떡공양 삼 년만에 무릇 나는 인간으로서 대우받기를 간절히 희구하는 한 마리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금욕일이래도 상관없어요. 혼자 잘 테에요. 」
나는 분명히 그에게 혼자라는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 말은 갑자기 나를 흥분과 긴장 속에 밀어 넣었다. 그렇다. 나는 이제 혼자 존재해도 좋을 만큼 많이 부대낀 것이었다. 떡보살의 욕망이 나의 욕망보다 무궁무진하게 깊으며 오래 지속될 성질의 것임을 이미 간파하고 있는 이상
「두 여자 사이에서 조화를 갖는 것이 도(道)」
라는 성산의 뚜쟁이 같은 이론에 더 이상 귀 기울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늘 하룻저녁의 혼자에 불과할 뿐이지 내일도 혼자여야 한다면 틀림없이 나는 두고 두고 나의 실언을 책망할 것이 뻔했다.
「가지 않겠어. 아니. 못 가.」
다행히도 그는 나의 사려 깊은 조바심을 깡그리 묵살했다. 나는 그의 팔을 베고 누워 도대체 그녀의 떡공양이 얼만큼 오래 갈 것인지를 생각했다. 이 지긋지긋한 엄동설한을 헤치고 얼마나 더 달려와야 하는지 난감하고 귀찮았다.
우리의 결혼은 순전히 떡보살 그녀 때문에 뒤로 미루어지고 있었다. 성산은 앞으로 삼사 년 더 그녀의 힘을 얻어낼 작정인 모양이었다. 정운에게는 늘 떡 벌어진 혼인식을 해줄 테니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는 내게 그 말을 전할 때는 다시 각색해서
「혼인잔치를 크게 해주고 싶어서 그러시는 것」
이라고 했다.
「사랑해. 그러고 미안해. 」
정운이 내 허리를 휘감고 입술을 대어왔을 때 차라리 나는 절망했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인가. 나는 내년 이맘때도 여기에 누워서 사랑한다는 그의 말을 듣고 진저리를 칠 나를 상상했다.
햇살이 쨍쨍하게 내려 쬐는 아침, 나는 창 틈으로 새어 들어온 선명한 빛줄기에 눈을 떴다. 정운의 자리는 벌써 비어 있었다.
올 공양은 이틀거리였다, 삼 년째 공양은 이틀 치성을 드려야 한다는 성산의 고집이 있었던 까닭에 자연 판도 더 커질 것이라는 공론이었다. 거기에 발맞춰 성산이 열 섬의 막걸리를 풀기로 되어 있어 신도안은 물론 용정 고개에 사는 남정네들의 군침까지 돋우고 있었다.
미륵사 입구는 멀리서 보아도 오색이 찬란했다. 국민학교 운동회같이 오색기가 펄럭였고 마당으로 천막이 네 개나 펴 있었다. 엄청난 공양이었다. 시시각각 들이닥치는 떡시루와 구루마로 밀려오는 사과, 감, 귤들, 그리고 돼지머리들로 이미 법당 안은 가득 차 있었다. 공양이 끝나야 음식들을 얻어먹을 것인즉 몇몇 노름패들은 일찌감치 화투들을 벌이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정운이 풀기 빳빳한 장삼 자락을 휘감으며 나타났고 뒤이어 성산이 삼베 도포를 입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법당으로 들어갔다. 조금 후 사람들 앞에 나타난 이는 소복 단장한 떡보살이었다. 눈부시게 횐 공단에 날아갈 듯한 -학이 수놓아 있었다. 얼핏 보면 소복같은 횐 한복지 그 은은한 수로 인해 지나치게 화려했다. 그녀가 잘 손질된 머리를 매만지며 서둘러 법당 안으로 들어올 때 머리 부근에서 해가 반짝 빛났다.
「몇백만 원 하는 다이아반지래.」
어떤 여자가 침을 꼴깍 삼키며 반짝 빛난 해를 설명했다.
「떡보살 말이 미륵치성을 드린 뒤로는 차 사고가 한번도 없었대는 거여. 돈! 어찌 잘 들어오는지 하루 온종일 돈 세기에 바쁘다는구만.」
떡보살이 얼마나 부자일까? 나는 그녀와 같은 서울에 살면서도 그녀가 얼만큼 부자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녀에 관한 소식은 신도안에 와야 들을 수 있었으니 서울이 넓기는 과연 넓은 모양이었다.
그날 밤. 정운은 여관에 들르지 않았다. 공양 때 얼핏 보고는 아직 이야기도 못 건네본 하루였다. 잠간이 라도 얼굴을 보이고 가는 그였기에 나는 늦도록 바깥 기척에 귀를 모았다. 충청 아줌마가 가끔가끔 내 방을 기웃거리면서
「아직도 안 오셨수?」
하고 물었다. 부끄러웠다. 틀림없이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 역시 나를 사랑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부끄러들 수가 없었다. 부끄러움을 참고 있는 나의 젊음이, 부끄러움을 주고 있는 그의 젊음이 부끄러웠다.
어린 시절에 나는 언니가 하나 있었다. 언니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 버스에 치어 죽고 말아서 내게는 어린 시절의 기억밖에 없었다. 그녀와 나는 같이 공중 목욕탕에를 다녔다. 나보다 세 살이 위였던 언니는 옷을 못 벗고 주춤거리는 나에게 살짝 눈을 흘기며 말했다.
「쬐그만 게 무에 부끄럽다구, ,,,,,」
그렇지만 번번이 나는 마지막 속옷을 못 벗고 주춤거리기만 해서 늘 그녀는 쬐그만 나의 부끄러움에 눈을 흘겼었다.
부끄러움이란 것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신이 책임져야 할 도덕적 감정이었다. 때문에 어리디 어린 그 시절, 나의 속옷을 못 벗던 부끄L러움은 차라리 음흉한 조숙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내게 엄습한 이 부끄러움은 조숙도 아니었다. 더우기 도덕적 감정도 아니었다. 다만 줄에서 떨어진 곡예사의 상처난 자존심이었다,
충청 아줌마가 사과와 감을 들고 다시 내 방을 노크했을 때 기어이 나는 울고 있었다. 그녀가 들고 온 과일들을 보자 비축해둔 나머지 눈물까지 쏟아졌다.
「도대체 처녀 나이가 몇이디냐?」
「스물여섯이에요.」
「쯧쯧. 정운 스님이 올해 스물여덟이지?」
「네.」
「얼마나 어울리는 한 쌍이누.」
사과 한쪽을 내게 집어주고 연방 혀를 차던 충청아줌마가 별안간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런데 처녀, 혹시 본당(本堂)을 새로 짓는다는 소리 못 들었남?」
「본당을 다시 지어요?」
「떡보살이 해동하면 신도안에 공사를 시작한대여. 어마번쩍하게 짓는다는디, 그 돈을 혼자 다 내겠다고 약속했대여. 성산이 천진교에 와서 자랑을 해쌓는다고 하드만 모르는 일잉게. 하여간 그 과부 돈도 많아......」
갈수록 태산이었다. 떡보살의 공양이 커지면 커질수록 정운은 그들의 먹이 역할에 더욱 충실해야 될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그들에게 정운을 내맡겨야 완전한 내 몫이 될까? 그는 이제 그만 효자여도 좋지 않을까? 아니 지금쯤 넌덜머리를 내고 박차야 할 시기는 아닌가......
그날 밤 정운은 끝내 오지 않았고 나는 심란한 마음으로 날을 밝혔다. 아침에 방문을 열어보니 밖은 밤새 내린 눈으로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나는 둘째 공양에 참석하는 일을 포기하였다. 대신 숫용추 계곡의 편편한 바위에 앉아 시간이 날개를 파득이며 저녁을 향해 날아갈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숫용추의 아랫자리는 여자의 음부였다. 깊게 패인 그곳의 바닥에는 치성에 쓰다 남은 마른 명태가 허옇게 부풀어올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섬뜩하도록 짓푸른 물 밑으로 드문드문 보이는 밥찌꺼기, 몽당초들이 아기 못 낳고 애태우는 여자들만큼이나 안스럽게 보였다.
미륵사에 몰린 사람들 탓인지 계곡은 고즈넉했다. 바위에 앉아 시린 발을 동동 구르다가 슬픈 노래만을 골라서 부르다가 노랗게 죽어 있는 마른풀을 뽑다가, 또 뽑다가 드디어 나는 옅어진 산그늘과 함께 온 밤의 냄새를 맡았다. 추위에 떨며 여관으로 들어오던 나는 충청아줌마에게서 본당에 관한 속보를 들었다.
「내년 공양은 새로 짓는 본당에서 올린디야. 낙성식인가 뭔가를 함께 한다는디 또.,,,,,,」
충청 아줌마가 내 얼굴을 슬쩍 살피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날 정운이와 결혼식도 올린다고 하드라는디,,,,,,그것은 어디까지나 동리 사람들의 소문잉게 별로 믿을 만한 이야기는 못 되여.」
어디까지나 동리 사람들의 소문이라는 말이 차라리 무서웠다. 본당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어제 이미 나는 거기까지 상상하고 있었으므로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게 정말 동리 사람들의 소문이라면 동리 사람들 역시 나와 정운이가 결합하기보다는 떡보살과의 혼인을 더 바란다는 뜻이 된다. 사람들이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소문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결국 나는 발길을 되돌려 정운에게로 갔다. 그를 만나지 않고서는 무엇 하나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처럼이나 명백히 피해자가 되다니, 나는 못난 내 자신이 한없이 혐오스러웠다.
미륵사는 아직 어수선한 잔치집 뒤끝을 남기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뒤채로 돌아가 정운의 방 창문 아래 몸을 숨겼다. 방안에 누가 있는지 알 수가 없어 그를 부를 수가 없었다. 만약 떡보살이라도 와 있다면, 하고 생각하는데 마침 방안에서 까르르 웃는 것은 분명 떡보살이었다. 숟가락소리, 밥그릇 부딪치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그리고 정운이 무어라 말하는 소리. 그 말을 받아 숨이 넘어가게 재밌어 웃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벽 저편에서 새어 나왔다. 순식간에 나란히 겸상을 받고 있는 그들의 저녁 한때가 남김없이 상상되었다. 생선의 가시를 발라주고 숭늉을 부어주고 반찬 그릇을 이리저리 옮겨주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안 보고도 넉넉히 그려낼 수 있었다.
여관으로 되돌아온 나는 차근차근히 이불을 펴고 코트를 벗고 양말을 벗고 이부자리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이불을 머리괄까지 뒤집어쓴 다음 비로소
「엄마아!」
소리부터 내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요이땡! 하고 출발신호를 내리기도 전에 울음은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와 결혼하고 싶다. 나도 그에게 생선의 가시를 발라주고 싶었다. 그와 결혼하지 않고는 살아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가 나 이외의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참는 것보다는, 다른 여자와 잠을 자는 한이 있더라도 나와 결혼하는 쪽을 택할 것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그를 내 곁에 두고 싶었다. 그녀에게서부터 내게로 그를 불러올 수만 있다면 신(神)이여, 다른 모든 것을 다 가져도 좋다.
방문을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을 때 방안은 캄캄했다. 울면서도 혹시 그가 올지도 몰라 자정이 넘도록 잠을 자지 않았는데,,,,,, 눈물이 말라붙어 뻣뻣한 얼굴을 손으로 문대면서 까는 가증할 만한 잠을 잠깐 증오했다.
「누구세요.」
「나야. 문 열어.」
「몇 시예요?」
「새벽 두 시. 어서 문 열어.」
「무엇하러 오셨어요」
「무엇하러 오긴. 어서 문이나 열어.」
그가 나의 여유 있는 수작에 화를 내기 시작하는 동안 나는 서울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다. 떡보살이 떠난 다음에 고를 만나리라. 그리고 그에게 말할 것이다.
「나는 당신을 놓치지 않아교」
라고.
「문 열지 않겠어요. 오늘은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
「왜 그래. 나를 이해해줘야지.」
「물론 이해해요. 너무나 이해해요. 그래서 문을 열지 않는 거예요.」
진심으로 그를 이해했기 때문에 그가 아버지에게 거역하지 않는 것도, 떡보살을 거부하지 않는 것도, 나를 여관 구석에 내팽개치는 것도 다 용납하는 나였다. 혹자는 그를 우유부단하다고 잘라 말할 수도 있으리 라. 그러나 그것은 우유부단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는 고가 세태에 부응하면서 고뇌하는 미륵불이 라고 믿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내 자존심까지도 형편없이 뭉개질 판이었으니까, 나는 기를 쓰고 그를 이해하였다.
「나 내일 올라갔다가 며칠 후 다시 내려올께요. 그때 이야기해요.」
「정말 문 안 열겠어?」
「정말 안 열어요.」
「알았어. 그럼 잘 자.」
첫버스를 타기 위해 나는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났다. 충청 아줌마가 부수수한 머리로 연탄을 갈다가 놀라면서 물었다.
「가시유?」
「녜. 곧 다시 오게 될 거예요.」
돈을 치르고 대궐터 쪽을 향해 뚜벅뚜벅 걷노라니 계룡산 봉우리마다 아침안개가 철갑을 두른 양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내자 내는 입김이 영하의 새벽에 금방이라도 얼어붙을 듯이 추웠는데 상봉의 안개는 솜이불처럼 푹신하게 보였다. 대전으로 나가는 첫버스는 시동이 걸려 있었으나 텅텅 빈 채 한없이 을씨년스러웠다. 나는 창가에 앉아 장갑으로 성에가 낀 유리창을 닦았다. 맑아오는 유리창 저쪽으로 그가 뛰어오고 있었다.
「집에 가면 어머님께 말해, 내년 십이월에 결혼식을 하겠다구.」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버님이 허락하셨어. 본당 낙성식을 하는 자리에서 우리들의 결혼식을 올리는 거야. 하지만 아직은 떡보살 귀에 들어가면 안되니까 말조심해.」
그와 나의 시선이 공범자의 그것처럼 빛을 내며 공중에서 맞부딪쳤다,
「알았지?」
「네.」
「미안해. 하지만 잘 참아줘서 고마워.」
끊임없이 부르릉거리는 엔진소리 속에서 그가
「고마워」
하고 말하자 눈물이 불쑥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장갑을 벗고 그의 손을 잡았다. 미래의 미륵불 이 될 그의 손은 너무나 차가왔다,
차가운 그의 손에 내 손을 대면서 비로소 나는 가해자의 대열로 끼어든 나를 발견하였다. 나는 갑자기 온 세상에 두루 나의 승진을 알리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하였다. 나마저 피해자에서 일약 가해자로 뛰어올랐으니 이미 우리들 사이에 아픔을 가진 자는 없었다. 그래서인가. 다시 부우옇게 흐려진 창 밖으로 내다본 신도안의 아침은 평화스럽게 보였다. 그러나 유리창 저 쪽은 터무니없이 추울 것이다.
양귀자(梁貴子: 1955- )
전북 전주 출생. 원광대 국문과 졸업. 1978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다시 시작하는 아침>과 <이미 닫힌 문>이 당선되어 등단. 그는 감각적이고 세련된 문체로써 현대 한국인들의 평균적인 일상의 삶을 우수에 잠긴 정다운 모습으로 표현하는 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종이꽃>, <방울새>, <원미동 사람들>, <한 마리의 나그네 쥐>, <귀머거리 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