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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단편 소설

빛 과 소 리

by 자한형 2022.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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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과 소 리-양헌석

 

그녀가 사라져버렸다. 우물 안처럼 좁고 외곬진 생각을 품고 어디론가 가버린 것이다.

며칠 전 꼬불꼬불한 체모 몇 올을 이부자리에 남겨놓고 나간 뒤에 오늘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 몰래 편지 봉투에 모아둔 그 체모들을 신문 위에 쏟았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가득 실려 있는 누런 기사 위에 소복하게 쌓았다. 코가 사내들의 그것처럼 늠름하게 생긴 한 정치가가 길다란 테이프에 칭칭 감겨서 괴로워하는 모습이 만화로 그려져 있었다. 그 정신 박약아 같은 사내의 얼굴 위로도 몇 개의 체모가 상처처럼 내려앉았다.

나는 그녀의 작은 모습들을 모아 편지봉투 속에 집어넣었다. 나무통 속에 옹기종기 누워 있는 물감들 사이에 이것을 잘 감추어놓고 아직도 따뜻한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나는 색깔이 완전히 바래버린 그 신문을 집어들었다. 신문의 사회면까지 그 이 야기를 끌어들여 채우고 있었다. 멍청한 놈들-----혼자 중얼거리며 신문을 훑어보다가, 맨 마지막 부분에 조그맣게 실린 한 사내의 사망 기사를 발견했다. 어젯밤 술에 취한 이십칠팔 세의 젊은 행인이 통행금지 시간에 쫓겨 과속으로 달리던 차에 깔리어 즉사했는데, 신원 불명인 이 남자는 술에 취해 도로 복판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 같았다고 목격자들이 진술했고, 범행을 저지른 그 차는 그대로 도주했다는 기사가 짤막하게 실려 있었다. 까마득하게 지나간 어제의 사건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 사건은 바다 건너의 -워터게이트-보다 더욱 중요한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한 사내의 죽음이 불과 다섯 행의 글귀로 처리되었다니.

신문을 내려놓았다. 대신에 작은 신문기사 속에 갇혀 있는 그 사내의 죽음을 끌어올렸다. 그것은 행복한 죽음이었다, 그 사내는 분명히 맑은 정신으로 아스팔트 위에서 차량들이 자신의 몸 위로 시원하게 지나가 주길 바랬을 것이다.

그때 구원처럼 달려온 그 차를 보고 사내는 온몸으로 스며오는 짜릿한 만족감에 취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그 행복한 순간을 상상하며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쾌감을 느꼈다. 그것에 비하면 그녀와의 이런 쾌감은 도무지 시시하게 생각되었다. 나도 오래 전에 제재소에서 일할 때 전기톱 속에 손가락들을 넣어버리고 싶었다. 얼마나 시원할까 하고.

나는 웃목에 널려져 있는 이젤과 캔버스 등의 너저분한 풍경을 보고서 그녀가 아이와 함께 다시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덕지덕지한 캔버스엔 커다란 유방과 엉덩이와 불룩한 배가 노출되어 있었다. 그녀의 젖가슴은 오직 사내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았고 아이를 낳아야 하는 그 엉덩이도 마찬가지로 주름진 자신을 부끄러워할 줄 몰랐다. 그것들이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모든 부분이었다.

나는 그녀가 품고 있는 생각의 반경을 곰곰이 측정해보았다,

아름다운 음식에 취하거나 습기에 찬 잠을 자거나, 무엇인가를 소유해야만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만족해했다, 식욕과 성욕, 물질욕을 채울 수 있을 때 그녀의 두 볼에는 생기가 돌았다.

끓어오르는 분노에 자신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뱃속이 텅 빈 것을 느끼며 가벼운 현기중과 마주쳤다. 엉성한 부엌에서 라면이라도 찾아보았지만 허기를 채울 만한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늘은 틀림없이 그녀를 찾아가야겠다는 의지가, 주린 창자를 채울 음식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절망과 교체되어 가슴속에서 용솟음쳤다,

나는 허리띠를 졸라매고서 삐걱거리는 문을 나섰다. 좁은 문을 나서자 햇빛이 번득이는 산동네 판자촌 골목이 복잡한 미로처럼 나를 괴롭혔다.

골목길이 신발 밑에서 질척거렸다. 이 산동네 무허가 블록집도 곧 철거될 것이다. 거대한 생물체인 도시의 한구석에 부종처럼 돋아 있는 이곳도 도시 계획에 의해 조만간 제거되고 말 것이다.

햇빛이 사정없이 번득였다. 나는 쏟아지는 햇빛 때문에 몹시 눈이 부셨다. 몇 번인가 내 눈 속으로 바늘이 되어 찔렀고 나는 햇살이 들어올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고개를 들어 이글거리는 하늘을 볼 용기가 어디론가 빠져 달아났다.

골목길이 내 발 밑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몹시 현기증을 느끼며 언덕을 밀려 내려갔다. 고개즐 저었다. 그녀는 내가 처음 그녀를 본 것과 마찬가지로 카운터에서 외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확신은 전혀 없었다.

 

그때 나는 라면 몇 봉지를 싸게 사 가지고 산동네로 올라가기 위해 슈퍼마켓에 들어섰었다. 내가 들어서자 한 여자가

어서 오세요

하고 큰 소리로 외쳤었고, 내 옆으로 시장 바구니를 든 아주머니가 나가자

안녕히 가세요

하고 또 큰 소로 외쳤다

나는 슈퍼마켓 안에서 라면 봉투를 들고 나오다가 다시

안녕히 가세요

하는 소리에 심장이 얼어붙듯 깜짝 놀랐었다. 얼마 전에 우연찮은 실수로 술집에서 하룻밤을 잤고 다음날 아침에 나와 함께 잔 작부가 나에게

자기 잘 가.

또 와 응?

하고 이야기한 것과 지금 카운터에서 외치는 소리가 똑같다는 착각에 빠졌다. 글쎄 착각이라니. 지금

안녕히 가세요

하고 외치는 저 여자가 그날 밤에 나를 비단뱀처럼 칭칭 감았던 여자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녀는 앵무새처럼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만을 외치고 있었다. 그녀가 하루종일 하는 일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하루에 몇 번 정도 외칠까 하고 생각해보았지만 도저히 짐작이 안 되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 뒤로 하루에 한번씩 슈퍼마켓에 물건을 사러 내려갔었다. 나는 어릴 때 몰래 숨겨놓은 과자를 야금야금 꺼내어 먹듯이 그곳에서 살 물건들을 조금씩 조금씩 매일 사러가곤 했었다. 하루는 비누, 또 다음날은 칫솔, 또 다음날은 치약을 샀었고 그녀의

어서 오세요.

안병히 가세요

의 외침을 들으며 무엇인가 상실한 것을 되찾는 기분에 온몸을 떨었었다.

나는 거의 한달 가깝게 흘금거리며 그곳을 들락거렸지만 그녀는 도시 알아보는 것 같지 않았었다. 나는 그녀의 외침을 매일매일 들으면서 불현듯 그녀를 소유하고 싶다는 본능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씩 제재소를 쉬는 날리면 여러 번 슈퍼마켓에 가기로 정했었다. 쉬는 날에 아침부터 십여 번 그곳에 들락거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의 태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앵무새가 아니라 차라리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만 녹음되어 있는 기계였다. 기계, 똑같은 소리를 똑같은 목소리로 외치는 그녀의 모습은 틀림없이 기계라고 생각될 정도였었다. 그녀는 다른 것은 전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하루에 십여 번씩 들락거려도 그녀는 항상 똑같이 외쳐대고 있었다. 드디어 나는 그녀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져서 발길이 뜸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긴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로 제재소에서 일하던 중 나는 손가락들을 한번 잘라보고 싶다는 야릇한 충동에 사로잡혔었다. 나는 다른 사람 초상화나 그려주고 돈을 받는 일이 아주 지긋지긋하여 그 해만은 다른 일을 해야겠다고 제재소에 나갔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커다란 원목을 대형 트럭에서 조심스럽게 끌어내리는 일과 그것을 굴리거나 밀거나 하는 작업과 만들어진 베니어 따위를 손수레나 삼륜차에 싣는 일이 고작이었다. 나는 언제나 정해진 방식대로 원목을 굴리고 베니어판을 싣고 있는 일만을 했었다. 나는 능수 능란하게 일을 처리하였고 그곳에서 주는 일당도 나에게는 조금도 불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하루종일 별로 일이 없어 하품을 날리며 원목을 잘게 자르는 전기톱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문득 곡마단의 전기톱을 생각하였다. 한 여자를 눕혀놓고 전기톱으로 반쪽을 내었는데도 다시 지분지분 웃으며 살아나는 여자. 그녀는 아이들의 박수갈채를 받고,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했었다.

그녀는 매일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일만을 반복하며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서커스단의 한 사내와 마찬가지로 원목만을 하루종일 잘게 토막내는 새 앞의 사내는 일분에 몇 번씩 가슴이 불룩하도록 호흡하며. 또 삼십오륙 년 끊임없이 밥을 먹고, 매일 저녁이면 숫기 있는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삼백육십오 일을 변함없이 살아갈 것이다.

그 사내는 마치 인형과도 같은 옆모습을 보이며 정직하게 나무를 토막내었다. 나는 그 사내가 실수라도 하여 손가락이라도 잘려버렸으면 하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언제나 멀쩡하였고 한 달에 한 번씩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사장으로부터 월급을 받아 가는 것이 었다.

그 사내는 내가 자신이 하는 일을 흥미롭게 바라본다는 사실을 느꼈는지 나에게 조금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은 마치 완벽하게 만들어진 인조인간이 웃고 있는 것같이 감정이 없어 보일 뿐이었다.

그는 나에게 해보겠냐고 자신만만하게 물어보았고, 나는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전기톱 앞에 섰다. 그 톱은 칼날을 감춘 바람개비처럼 윙윙 돌고 있었고 그것은 하나의 아름다움이었다. 그 죽음의 날개는 한 떨기 은빛 꽃으로 피어나며 나에게 다가오려 했다.

사내는 휴식을 취하는지 -금연-하고 붉은 글씨가 씌어진 톱밥 위에 파묻혀 담배를 피웠다.

나는 몇 개의 나무토막에 몰두하였다. 똑같은 굵기, 똑같은 길이. 이것들을 자르며 못질하여 사람들은 똑같아지는구나 하고, 나는 그런 몇 가지 생각을 우울하게 하였고, 곧이어 이 원목 대신에 내가 토막토막 잘려 가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 나무들과 함께 내 손가락이 톱 주위를 가까이 갈 때마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쾌감에 등골이 다 근질근질해지는 것이었다. 수없이 손가락을 잘라보고 싶었고 온몸을 그 은빛 날개 밑에 던져 하나의 해방을 맞고 싶었다. 그러면 곡마단의 여자처럼 새로운 손가락이 깨끗하게 자라나고 불사조같이 탄생되어 새로운 하늘을 날을 것 같았다.

하지 만 나는 그날 끝내 손가락과 온몸을 무사하게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었다. 밤새 몇 번이고 전기톱에 내 손가락들과 내 몸뚱이가 무사하게 붙어 있다는 사실에 실망을 하곤 했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시간이 남는 대로 그 사내가 일하는 곳에 가서 그 전기톱을 몰래 훔쳐보며 나는 식은땀까지 흘리며 진저리를 치곤 했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또다시 멀쩡하게 돌아왔었다.

나는 결국 나 자신에 대한 모멸감만을 가득 가지고 그 제재소를 떠났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했고, 뚜렷한 직업 없이 어슬렁거리며 하루하루를 소비했었다.

언젠가, 지루하던 가을이 멀어져 가는 날이었다. 나는 낯익은 거리에서 미아가 되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거리의 모습을 구경하였다. 칼날 같은 오후의 햇볕을 퍼해 그늘로 걷고 있었다. 그때 나는 우연히 상점에서 나오는 그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상점에서 나와 그 다음 상점으로 또 들어갔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골목에 숨어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또 그 다음 상점으로 들어갔다, 나는 주의 깊게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아주 작은 상품을 사가지고 나왔다. 그녀가 나오자 그 상점의 점원이

안녕히 가세요.

하고 인사를 했고. 또 다음 상점에 들어서자

어서 오세요.

하고 외치는 소리가 나에게까지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아, 아직까지 그녀는 인간이었구나 하고 눈물까지 글썽거릴 번했다. 무엇인가 보상받기 위해 시내를 돌아다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를 계속 쫓아갔으며 나중에는 그녀에게 발견되길 바라면서 그녀가 들어가는 상점마다 나을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렸다.

오랜 숨바꼭질 끝에 그녀가 드디어 나의 존재를 발견했는지 내 앞에 섰다. 내가

즐거운가요?

하고 묻자 그녀는

글쎄요.

하고 대답했다.

우리는 사람들의 물결을 헤치며 나란히 앞으로 나갔다. 거리에는 인형과 같은 죽은 표정들이 수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이 거리의 사람들은 태엽을 감으면 묵묵하게 걸어가는 장난감 같았다.

그녀와 나는 또다시 몇 개의 상점에 들어가서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어두워지자 이 거리의 구석구석이 나른하게 하품을 하며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도시가 살아나자 수없이 숨쉬고 있는 쇼윈도에게 우리는 포위되어 있었다. 파란 신호등이 켜질 때 토끼떼처럼 눈치를 흘금거리는 인형들 틈에 섞여 길을 건넜다. 우리는 몇 번인가 길을 건넜고 거리를 꺾어 돌았다.

아직 이른 저녁이었다. 우리는 땅 위의 수많은 사람들을 퍼해 땅 밑으로 내려갔다. 불빛의 지루함 때문이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대낮과도 같은 환한 불빛 속에서 죽어가는 어둠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어둠과 만나기 위해 더 깊은 장소를 찾아 나섰다. 그곳은 지하철 플랫폼이었다. 매표소 안에는 한 사내가 무표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우리는 백동전을 밀어 넣고 지하철 표 두 장을 받기 위해 잠시 기다렸다. 그 사내는 숙달된 행동으로 표를 집어 날짜가 찍히는 기계 속에 표를 통과시켜주곤 가는 반복 동작을 거듭하고 있었다.

우리는 표를 들고 개찰을 하기 위해 미끄러운 바닥을 조심해서 걸었다. 우리는 줄을 섰고, 푸른 제복의 사내가 표를 하나하나 찍고 있었다. 그는 조금도 조급하거나 느리지 않게 사람들을 들여보내고 있었다. 그 사내의 표 찍는 행동과 그녀의

안녕히 가세요

하는 외침은 어느 쪽이 더 많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도저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우리들의 포를 무표정하게 찍었고, 그의 얼굴을 보면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그 사내를 피해 가듯이 재발리 더 깊숙한 땅 밑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곳에도 빛만이 가득 차 있었다. 무생물 같은 사람들이 밝은 불빛 아래에서 일렁거리는 데 다시 아연했다, 우리는 실망을 하며 풀이 죽어 벤치에 가서 앉았다.

그때 빠른 속도로 전동차가 다가왔고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또 홈에서 기다리던 사람은 그 전차의 뱃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개의 문은 한꺼번에 닫혀버렸고 밝은 불빛을 지나 어둠이 가득 차 있는 대지의 정원 속으로 사라져갔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그런 죽어 가는 풍경을 목격했고 대지가 몹시 진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까지 발견했다. 우리는 일정한 간격으로 들어오는 전동차의 바퀴소리와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의 겁먹은 표정과 시들어 가는 땅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다음 만났을 때에는 그녀의 직장이 휴일이었을 때였었다.

우리는 아침부터 만났고 나는 얼굴 간지럽게도 렌시드 , 테레빈 기름을 적당히 섞은 기름병과 이젤과 물감 등을 끈에 달고서 나타났다. 캔버스를 든 나의 이런 모습에 그녀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야외로 나가기로 합의했다. 잠깐 생각 끝에 사람들을 만날 수 없는 섬이 좋겠다고 같이 웃었다. 마침내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 다방 문을 열었다. 못 찾겠다 괴꼬리 괴꼬리 꾀꼬리 하는 목소리가 우리들의 옷자락에 매달려 쫓아 나왔다,

햇빛이 내리고 있었다. 햇빛 속에서 보는 그녀의 얼굴은 약간 푸른빛을 감추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신경이 쓰이는지 매일 형광등이 켜진 곳에서의 생활 때문에 그렇다고 말했다. 그녀의 퍼부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눈이 부신지 한 손으로 햇빛을 가렸다. 나도 몹시 눈이 부셨다. 우리는 음향성 식물처럼 그늘을 골라서 시외버스 터미널로 갔다.

틈만 나면 가보는 섬이었다. 우리는 곧 부두에 도착했고 한 장에 240원씩 두 장의 표를 샀다.

우린 햇빛을 피해 잠시 대합실에서 기다렸다.

곧이어 배가 도착해서 사람들이 나왔고 우리들은 배를 타기 위해 부두 쪽으로 갔다. 우리들의 맞은편에어 조개나 작은 해산물을 머리에 인 사람들이 나을 뿐 섬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그 섬을 잘 알고 있었다. 섬에서는 버스가 다니고 있었고 섬의 끝까지 가려고 하면 한시간 정도나 아니면 더 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곳에는 볼 만한 절경이나 섬 특유의 바다 풍경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어둠과 같이 진득진득하게 빠져드는 수렁과 끝없는 갯벌뿐이었다. 한쪽 구석에 약간의 갈대와 거품을 내뿜는 게들이 물 빠져나간 바닥을 기고 있는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나는 맑은 모래사장과 화안하게 웃고 있는 햇살과 낄낄낄 거리고 부서지는 파도가 어울리는 수많은 섬보다는 수렁과 갯벌뿐인 그 섬에 더욱 마음이 끌렸다. 그 갯벌의 소금기가 섞여 있는 짭짤한 냄새는 노동 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의 강한 체취를 연상시켜주곤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배에 올랐다.

그녀는 배를 처음 탄다고 하얀 피부 밑에 기미가 숨겨져 있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호기심을 싣고 뱃머리는 하늘을 가늘게 쪼개며 앞으로 전진했다.

그러나 바다는 온갖 더러운 폐수에 구역질을 하고 있었고 한참을 달려서야 기름이 끼어 있는 해안을 벗어날 수가 있었다. 멀리 해안은 선박들을 건조하고 있는 소규모 조선소로부터 제철소, 발전소, 기름 탱크 들이 버섯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항구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눈에 보이는 육지가 차츰차츰 질식사하고 있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곧 그녀는 볼 것 없는 풍경에 호기심을 감추고 시시한 표정으로 배 안으로 들어가길 원했다. 우리는 맥없이 햇빛을 피해 객실로 들어갔다.

배 안에는 여러 사람이 앓아 있었고 한 사내가 물건을 선전했다. 그 사내는 연필이 좋다고 선전했고 또 바늘과 빗을 꺼내어 고급품이라고 주절대었다. 배가 섬에 도착할 때까지 수없이 많은 종류의 허드레 물건들을 마술사처럼 꺼내어 차례로 선전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러 차례의 반복에 곧 싫증을 느꼈다.

섬에는 썰물인지 방파제가 바닷물 위로 높게 드러나 엉성한 골격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배에서 내리자 버스가 뱃시간에 맞추어 기다렸다. 그녀는 이곳에도 버스가 있구나 하고 중얼거렸고 곧 나에게 버스를 타야 하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햇빛 속을 건너 매표소로 갔다.

그녀는 재빨리 표를 끊어 왔다. 우리는 버스에 곧장 올랐다. 그녀는 종점까지 표를 끊었다고 자신의 차표와 내 것 모두를 나에게 주었다.

밖에는 서늘한 햇빛이 기분 나쁘게 우리들을 지켜보았고 몇 가닥의 바람이 떠오른 그녀의 머리 결 사이를 통과했다.

차는 뽀얀 먼지를 날리며 달렸다. 내리라는 남자 차장의 이야기에 우리는 버스에서 내렸다. 그녀는 바다가 어디에 있냐고 물어왔다. 저 언덕을 넘으면 바닷가가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아직 바다와 바닷가의 차이점을 잘 모르는 듯했다.

우리는 미류나무가 드문드문 하늘을 찌르며 뻗어 있는 언덕을 힘들게 올라가고 있었다. 앙앙한 가지만이 햇살을 엷게 걸치고 있었다. 이런 서늘한 햇빛조차도 우리들의 눈을 몹시 괴롭혔다.

우리의 그림자 이외에는 언덕을 넘어 갯가로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너무도 조용한 이곳의 풍경에 서먹서먹해하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지 도시인이 되어버린 우리들에게는 고요란 두려움을 의미하게 된 것이었다.

언덕을 올라서자 어린 소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몇 개의 작은 야산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 사이로 넓은 갯벌이 햇빛에 눌려 죽은 듯 엎어져 있었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지만 곧 자신이 원하는 바다가 없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는지 아무 말 없이 언덕길을 쫓아 내려왔다. 발 밑에서 자갈들이 짜증스럽게 꿈틀대었다,

우리는 갯벌과 수렁이 누워 있는 둑 위에 붙잡아매어진 움막의 그늘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항구에서 사온 통조림과 빵 음료수 따위를 내려놓았다.

이런 곳에서 무엇을 그릴 수 있냐 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글쎄

하며 이젤을 세우고 캔버스를 걸었다. 사실 내가 그릴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곳은 섬의 동남쪽이므로 서해의 일몰조차도 볼 수 없는 장소였다. 그저 검게 펼쳐진 황무지였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끊어지지 않고 바스락거리는 횐 모래가 펼쳐져 있는 해변보다도 마치 자궁 속과도 흡사한 축축하고 검은 진흙들이 늪으로 일렁이는 어 바닷가는 나를 편안하게 하였다. 또한 죽어 가는 도시의 땅과는 달리 이곳은 언제나 살아서 나를 유혹하곤 했다. 이곳에서 내가 태어났고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태어난 것 같은 터무니없는 생각조차도 들곤 했다. 원초적인 인간의 탄생지라는 망상과도 같은 상념들이 나를 이곳에 서게 만들었다.

나는 물감과 기름이 든 나무상자를 열었다. 나의 그런 행동에 시계를 보며

어머 한시가 다 되었네요

하면서 빵과 음료수들을 꺼내어 펼쳤다,

둑 밑의 갯벌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마다 한 쪽 팔이 기형적으로 큰 게들이 햇빛에 눈이 부신지 거품을 내뿜으며 들락거렸다. 붉은 색조를 띄운 아름다운 게들이었다. 이 게들은 냄새가 고약해서 인간들이 먹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이 동네 사람 누구도 잡지 않았다. 이 갯벌에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 게들이 살고 있었다. 인간에게서 버림받은 게와 갯벌. 그래서 그것들은 축복 받은 것이었다. 이런 황무지를 바라본다는 것은 나로서는 매우 유쾌한 일이었다.

나는 무턱대고 황무지를 캔버스에 담기 시작했다. 우선 기름 배합부터가 실수였다. 아침에 렌시드 기름을 너무 많이 넣었는지 붓이 조금 끈적이는 것 같았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이 황무지 속에도 작은 언덕과 계곡과 개울, 그리고 언덕 위로 솟은 이름 없는 야산들이 수줍게 자리잡았다. 여기에도 작은 미지의 세계가 존재했다. 이것은 썰물이 되어 바닷물이 멀리 빠져나가면 또다시 탄생되곤 하는 것이었다.

캔버스가 물감으로 채워지기도 전에 태양은 자기의 빛을 거두어들이며 패주해 갔다.

나는 물감과 이젤 등을 싸들고 갯벌에서 마을 쪽으로 가기 위해 일어섰다. 바닷물냄새가 진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다시 밀물임에 틀림없었다. 멀리서 바다와 땅이 뒤섞이며 희미한 파도소리를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융합을 위한 숨가쁜 신음소리를 의미했다.

우리는 둑에서부터 다시 언덕을 돌라갔다. 황무지엔 아무도 파괴할 수 없는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미류나무와 자갈들이 많은 언덕을 넘었다. 하늘에는 작은 별들이 뿌려졌다. 이곳 하늘은 아직 용케도 살아 있었다.

우리는 한 농가에 도착했다. 이 농가는 몇 번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나는 낯익은 노인에게 인사를 했고, 그 노인은 우리에게 방을 주었다. 반가운 표정은 노인의 손자뿐이었다. 아침에 그 노인의 어린 손자녀석에게 지폐를 쥐어주는 것이 관례였다.

우리는 방으로 들어가서 간단하게 저녁을 했다.

이곳의 바닷가는 쓸쓸한 것 같고, 섬에서 버스가 다니는 것이 이상하고, 이 방에서는 무언가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같다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사람이 적다고 반드시 쓸쓸한 것은 아니고, 섬이 매우 커서 그렇고, 이것이 바로 흙내음이라고 차례대로 대답해주었다. 우리들은 이런 상식적인 이야기를 한참동안 지루하게 했다. 이윽고 우리들은 껍데기에 쌓인 말들에 지쳤다,

내가 불을 꺼도 되겠냐고 말하자 그녀는 바닷바람 때문인지 머리카락이 몹시 끈적거린다고 대답했다,

나는 곧 어둠 속에서 그녀의 머릿결을 만질 수 있었다. 그것은 바닷말처럼 가볍게 일렁거렸다. 인위적인 들국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는 조금도 스스럼이 없었다. 남자의 품은 따뜻해서 좋다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에 의해 파헤쳐졌다. 그녀는 분명 갯벌을 연상하게 했다. 그랬다. 그녀는 빠지고 빠져 들어가도 끝이 없이 나를 익사시킬 수 있는 축축한 늪이었다. 소금 바람 부는 늪이었다.

나는 온몸의 모든 것들이 다 빠져나간 것 같은 허탈감에 짓눌려 있었다. 난 이곳에서 딴 여자와 잔 적이 있어. 내가 어둠 속에서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그녀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나지막하게 난 아기를 가졌어요 하고 어둠 속에서 웅얼거렸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배를 만져보았다. 그녀의 채가 부드럽게 숨쉬고 있을 뿐 잘 알 수는 없었다. 얼마나 되었냐는나의 말에 삼개 월 된 것 같다고 대답했다. 어떤 사람의 아이냐는 나의 물음에 그녀는 누군지 알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런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또다시 그녀는 뜨겁게 몸을 밀착시켰다.

그날 밤 나는 한 마리의 게가 된 꿈을 꾸었다. 나는 다족(多足)을 가지고 갯벌의 집 주위를 산책했다. 그녀는 축축한 늪이 되어 누워 있었다. 나는 몇 번인가 바닷물이 밀려들 때면 기쁜 환호성을 올리곤 했다. 그리고 바닷물이 한번 빠져 나가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멀리 둑을 막았다는 것이었다, 갯벌은 햇볕에 점점 말라갔다. 햇살은 너무 강해서 나의 의식을 흐리게 만들었다. 드디어 나는 멀리 도망가버린 바닷물을 찾기 위해 새로 만들어진 둑으로 가고 있었다. 갯벌은 말라 이곳저곳이 갈라지며 차츰 사막처럼 서걱거렸다. 나는 이것이 꿈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인가 실수 끝에 햇빛이 번득거리는 둑을 넘어 바다로 기어갔다. 하지만 다시금 나는 경악했다. 바다는 온통 기름과 폐수 등으로 뒤덮여 여기저기에 죽은 게들이 햇빛 아래에서 엎어져 있었다. 나는 이제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죽을 수 없었다. 이번엔 꿈속에서 깨어나려 했지만 꿈은 좀처럼 나를 놓아주질 않았다. 햇빛만이 끈질기게 나를 쫓았었다.

 

우리들은 곧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나는 어두컴컴한 방에서 낮잠 자는 버릇이 생겼고 나의 일과는 오후에 시작하여 새벽에 끝났다. 나는 끈적거리는 수렁과 같은 그녀의 육체에게 매일매일 소유 당할 수 있었다. 캔버스와 물감 통에도 먼지가 쌓였다. 그것들도 멀어졌다. 그녀는 낮에 슈퍼마켓에서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만 반복하다가 어두워지면 산동네로 올라오곤 했다. 나는 낮에 저축해놓은 에너지를 밤에 사용했고 그녀는 만족하체 받아들였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배가 조금씩 조금씩 풍선처럼 커져가며 탄력성을 잃어갔다. 그녀는 유산시키기를 원했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고 말렸었다. 나는 때때로 아이를 지우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위협도 했고 어떤 때는 아이의 아버지가 된 것처럼 그녀에게 매달려서 간청도 했다. 그녀는 이런 태도에 깔깔때며 비웃기만 했지만 무슨 까닭인지 침묵을 지키기도 했다. 나는 안심이 안되어 그녀의 거동이 조금이라도 수상하면 하루종일 낮잠도 안 자고 슈퍼마켓을 배회하며 그녀를 감시하곤 했다.

내 생각은 온통 그 아이에게 쏠려 있었다. 우리들의 행위가 끝나고 그녀가 잠 속으로 빠져들면 나는 그녀의 배에 귀를 대곤, 그 즈음에 산 가정백과사전을 독파한 지식을 상기시키며 아이의 발길질 소리를 미리부터 기다리곤 했다. 내가 이 아이의 아버지란 착각이 수없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귀를 갖다댈 때마다 그 아이의 응얼거림이 환청처럼 다가왔다,

아빠, 아빠---

아아, 그 소리란. 그것은 살아 숨쉬는 생명체였다. 탄생되기를 바라는 그 아이와 나는 밤새도록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

새벽에 그녀가 깨어나서 내가 자신의 배에 귀를 대고 있으면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곤 했다. 그렇게 신기하냐고, 또한 아이가 숨을 쉬고 있냐고, 무슨 소리가 들리냐고, 간지럽다고 여러 가지 말을 했다. 그러다가도 그녀는 금방 우울해하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이 아이는 틀림없이 태어나야 한다고 똑같은 살만을 되풀이했다. 나는 그 아이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 결심이었다. 아직도 아이는 기녀의 뱃속에서 절반도 채 살지 못했고 오랜 시간을 견디어야 하는 노릇이었다.

그 즈음 그녀는 아이를 낳으면 자신이 키울 수 없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 아이를 발리 지워야 찬다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밝은 햇빛 아래에서 아버지 없는 자식을 어떻게 키울 수 있냐고 결심을 굳혀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고 나에게 대들었다. 내가 아이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고백했을 때도 그녀는 미쳤다고 코방귀를 뀌었었다.

나는 골목을 벗어나 산등성이에 따개비처럼 초라하게 붙어 있는 동네를 돌아다보았다. 두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걸을 수조차 없는 졸은 골목과 마구 쏟아버린 물 찌꺼기에 언제나 땅바닥이 질펀한 언덕배기가 눈부신 햇빛 아래에서 아물아물 흔들렸다. 나는 연탄재부스러기와 사과껍질, 조개껍질 -우거지들과 물에 젖은 종이조각 등의 허접 쓰레기가 뒹굴고 있는 공터를 지나고 있었다. 여기저기 아이들이 불장난하다 남은 재가 흩어져 있었다. 그 중에는 타다 만 신발토막과 나무토막들이 화상을 입은 흥한 모습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풀석거리는 공터를 지나 커다란 축대가 버티고 있는 좁은 길로 들어섰다. 그 작은 길 응달에서 아이들이 놀이를 했다. 여자아이들은 고무줄과 땅따먹기에 열중했고, 꼬마아이들은 딱지치기와 구슬 따먹기에 정신을 놓았었다. 나는 그 아이들 노는 모습에 잠시 정신을 팔고 있었다.

아이들은 나의 모습에는 조금도 아랑곳없이 그들의 놀이에만 몰두했다. 나는 아이들 있는 골목을 지나 다시 큰길로 접어들었다. 잠시 응달이었던 곳을 지나 눈부신 햇빛 아래로 나서고 있었다. 나는 다시 어깨를 무겁게 눌러오는 햇빛 때문에 고개를 숙였다.

한달 전에 그녀는 우리들의 방을 뛰쳐나갔다. 자는 그녀를 찾기 위해 가까운 산부인과를 모두 뒤졌었고, 햇빛 아래에서 두더지처럼 기진맥진하여 슈퍼마켓에 갔을 때 그녀는 여전히 카운터에서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를 외치고 있었다.

나는 카운터에 숨겨져 있는 그녀의 배를 보았으나 얼른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잘 위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신했는지 또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구별이 쉽지 않았다. 그녀가 아직 무사하니 걱정 말아요

하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오늘 저녁에 일이 끝나면 들어가겠다고 소근거린 뒤 또다시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를 외쳤다.

그런 그녀와 헤어지면서 그녀에게 이제 인간적인 면이 있다면 어둠 속에서 나를 소유하는 육체와 꿈틀거리는 생명의 새싹이 달고 있는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직장에 있을 때의 그녀에게는 아기가 숨쉬고 있다는 것 외에는 도저히 36. 5도의 체온을 가진 인간이라고 생각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차라리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가 녹음되어 있는 기계일 뿐이었다.

나는 집에서 그녀와 아이의 생각을 골똘히 했다. 어쩌면 그녀의 낭비벽이 단 지 수술을 지연시키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의 말로 미루어보아 틀림없이 산부인과에 갔음이 분명했다. 나는 햇빛 아래에서 그녀의 행동을 상상했다. 그녀는 그 행위가 살인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는 처음부터 관심조차 없었던 게 분명했다. 그녀는 수태가 이루어진 순간부터 유산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굳혔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는 결심이랄 것조차 없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재고의 여지조차 없는 실수일 분이었다. 단지 시간의 흐름에 의해 눈덩이처럼 커져 있는 수술 비용에 짓눌려 있을 게 분명했다.

나는 낮잠도 자지 않고 오랫동안 그녀의 -비겁한 수단-을 막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그리고 귀가 번쩍 뜨이는 묘책을 생각했다. 이것을 생각해내고, 왜 이제까지 이런 방법을 쓰지 않았나 후회까지 했다. 우선 그녀의 옷을 벗긴 다음 그녀의 육체에 대해 칭찬을 한다. 그리고 그녀의 임신한 모습을 그리기 원한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유방과 엉덩이, 특히 불룩한 그녀 배의 선이 모딜리아니 선처럼 부드럽고 인상적이라고 이 야기한다. 어쩌면 모딜리아니를 모를지도 모른다. 밀레가 피카소는 알까. 아니, 그들도 모를지 모른다. 그런 것은 적당히 이야기하자.

어쩌면 그녀가 속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이곳이 너무 춥고 삭막해서 이불 밑이 아니면 옷을 벗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우선 그녀의 옷을 벗기기 위해 할 것은 분위기를 바꾸고 방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제가 쐬는 것이 불빛이었다. 그녀가 불빛 아래에서 옷을 벗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나는 가슴까지 두근거리며 해야 할 일을 치밀하게 계획했다.

우선 밀가루로 풀을 쑤었다. 그것은 몇 번 풀석풀석 하다가 곧 다되어 내려졌고, 부엌 구석에 처박힌 시멘트 포대를 오려서 방에 붙이기 시작했다. 나는 급하게 그것을 끝마치고 시장으로 뛰어내려가 석유난로를 골랐다. 철 지난 난로였다. 이번엔 지물포로 달려갔다. 그 중에서 가장 따뜻해 보이는 노란색과 연두색이 섞인 벽지를 샀고, 전파사에 가서 붉은 색 전등을 구했다.

나는 오랜만에 할 일을 찾아서 산동네로 뛰어올라왔다, 미리 쑤어둔 풀로 벽지를 빠르게 바르기 시작했다. 처음 해보는 작업이므로 나는 몹시 안간힘을 쓰면서 허둥거렸다. 벽지 바르는 일은 모자이크보다도 더욱 어렵고 고차원적인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끊임없이 실패를 하면서도 아이를 탄생시키기 위해 땀을 홀렸다. 몇 번인가 현기증과 마주쳤다. 드디어 천장까지 발라졌다. 나는 기진맥진하여 방바닥에 쓰러졌으나 태양이 기울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몸을 일으켰다. 내 등에서는 진땀이 진득진득 흐르고 있었다. 난로에 석유를 넣어 방에 놓았고 전등은 붉은 색으로 갈아 끼웠다. 오랫동안 내버려두어 먼지가 하얗게 쌓여 있는 물감통과 이젤을 물걸레로 닦았다. 한구석에 처박아둔 캔버스를 꺼내어 걸었다.

이제 모든 배경이 갖추어진 것같았다. 몇시간 사이에 감쪽같이 방은 변했다, 그녀가 출빛 아래에서 옷을 벗는데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벽에는 여러 장의 나체 사진을 붙였다. 방에 붉은 색 전등을 켰다. 그러자 마치 유곽과 같다는 생각에 이 따위 유치한 짓들을 때려 치워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아이를 살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선 참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어둠이 슬슬 모여들었고 한참을 지나서야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이 변해버린 풍경에 몹시 놀랐다. 그녀가 방에 들어오자 곧 석유난로를 활활 피웠고, 그녀를 위해 방을 새롭게 꾸몄다고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그녀와 입술을 나누면서 다시 유곽 같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태어나는 아이를 위해서 참아야 한다고 또다시 다짐했다. 나는 그녀와 또 입술을 교환하면서 미리 짜여진 계획의 순서를 상기했다, 그렇지. 우선 그녀를 깊게 포옹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면서 넌 아름다와 하고 중얼거렸다. 그녀의 가슴을 열고 아 이렇게 부드러울 수가 하고 감탄했다. 그래 되도록 옷을 벗겨야 한다, 사랑해 하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사랑찬다는 말, 이십팔 년을 단 한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이 말을 나는 이렇게 무참히 짓밟았다. 나는 분노를 느끼면서도 이미 알몸이 된 그녀의 가슴을 확인했다. 그녀는 사랑한다는 나의 말에 어색한 웃음을 조금 보내왔다. 분은 전등 아래에서 그녀의 웃는 얼굴은 창녀와 흡사하다고 느껴졌다, 나는 심한 구토를 느꼈다. 구토. 그것은 분명 구토감이었다. 속에서 창자가 다 뒤집히는 것이 느껴졌다. 내 품에 안겨 있는 뱃속의 아이가 나에게 발길질을 했다.

아빠, 아빠......

하는 소리가 머릿속을 휘저었다. 나는 새로운 탄생을 위해 세 번째로 그녀의 입술과 만나야 했다. 다음은 그녀의 모든 것이 존재하는 엉덩이에 찬사를 보내는 순서였다. 마치 캔디와 같아, 이 세상에서 가장 풍만한 여자야 넌, 하고 다시 속삭였다. 그녀의 스커트가 무릎 아래로 떨어졌고 나는 이 아이는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스물여덟 해 중 두 번째로 웅얼거렸다. 그녀는 다시 감격해서 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드디어 그녀는 완전히 알몸이 되어 나에게 안겼다, 나는 구토를 누르며 침을 삼켰다. 이제 겨우 서론이 끝난 것이다. 나는 본론으로 접어들기 위해 너의 몸은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와, 하고 소곤거렸다. , , 벽에 붙어 있는 저 유명한 여자를 보아. 너에게 비하면 형편없어. 그건 너 스스로도 알 수 있잖아. 너의 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난 그녀의 포옹을 풀고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녀의 알몸이 내 앞에서 노출되었다. 불빛 아래에서 그녀가 당황했다. 그녀는 정숙이란 글자조차도 사용될 수 없는 여자였지만 그녀 역시 불이 켜진 곳에서 알몸으로 서 있는 것은 유쾌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급하게 말했다. 정말 아름다와. 너 스스로가 저 벽에 붙은 여자들과 비교해보아. , , 얼른. 정말 천사와 같은 몸매야,,,,,, 나 자신이 마치 악마 같다는 생각이 나를 고뇌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만족하는 듯했다. 그녀를 깔려 있는 이불 위에 앉혔다. 아 세상에, 가슴에서 배로 흐르는 곡선이 저렇게 부드러 울 수가, 하고 나는 미리 준비된 감탄사를 마구 쏟아 부었다.

앞으로 얼마동안 옷 벗는 일에 불쾌감을 느끼지 않으리라. 나는 그녀에게 몸이 뒤틀려 고통스러운 포즈를 요구했다. 육체적 고통은 때때로 정신적 수치를 상쇄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어려운 포즈를 취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난 너의 그 부드럽게 솟은 배와 온몸을 그려 이 세상에서 모나리자와 같은 또 하나의 걸작을 남겨야 해. 마지막 결론을 쏟아놓았다, 그녀는 아이가 숨쉬고 있는 자신의 몸을 정말로 아름답게 생각하는지 몇 번인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녀를 화폭에 담으면서 여러 번 후회했고, 불빛 아래에서의 그녀의 나체는 참을 수 없는 구토감을 선사했다.

나는 그녀를 속이는 데 성공했고 적어도 삼일간은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나의 생각을 조금씩 알아차리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이 아이는 아버지가 없다고 말했다. 이 아이를 낳아서 밝은 세상에서, 햇빛 아래에서 어떻게 키우겠냐고 주장했다. 낳아서는 안 된다고도 격분했다. 그리고 그녀는 가슴과 배의 선이 아름답다는 나의 감언이설에 치를 떨었다.

나의 이런 생각이 그녀의 아이를 일주일 동안 지탱시켰던 것이다. 나는 적어도 그것이 내 행위의 댓가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며칠 전 또 다시 사라져버렸다, 그녀의 이기심과 물질욕이 나와의 작별을 가져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 아이는 물질이 아니라 생명이야. 생명. 햇빛을 외면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나 햇빛에 나의 눈은 계속 찔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늘을 찾았다. 햇빛 때문에 눈망울이 다 축축해졌다. 어젯저녁부터 굵은 다리가 햇빛 아래에서 수들거렸다,

정기 노선 버스가 다니는 큰길에 도달했다. 플라타너스 잎사귀들이 햇빛 아래에서 나른하게 몸을 틀었다. 땀이 손바닥에서 미끈거렸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얼마동안 나는 뱃속의 아이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i.과의 교신이 란,,,,,, 아아, 그 생명감이란,,,,,,

나는 단연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성취감을 맛보고 있었다. 그 애 나는 한 생명의 탄생을 가슴 졸이며 기원하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그 새싹과의 대화가 단절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의 급격한 변화 때문이었다.

하루는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그녀는 달려왔다.

나 아이 낳을까봐.

?

나는 기쁘기도 했지만 그녀의 돌변한 태도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날 밤 그녀가 주절거 리며 털어놓은 이야기는 나에게 큰 충격을 주는 것이었다. 그전에 나와 함께 잔 어떤 사내를 만났었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작자에겐 아이가 없어. 머리가 비긴 했지만 돈 많은 작자야. 내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에 달려 왔다나봐. , 자기 아이 아닌가 하고. 그래서 농담 삼아, 그런 것 같다고 말했지. 그 작자가 좋아 펄쩍 뛰는 거야------

그래서?

일이 재미있게 될 것 같지?

그녀는 탐욕스럽게 내 육체를 파헤치며 히죽거렸다. 그녀는 오랜만에 기분이 상승하는 모양인지 밤의 만찬을 계속해서 즐기려 했다. 융단과 같이 부드러운 그녀의 손길과 음습하고 뜨거운 그녀의 입술에 의해 내 육체는 수동적이기만 했다.

결국 내 무력한 몸뚱이는 그녀에게 마음껏 유린당한 후에야 그녀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포만감에 젖어 있는 그녀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새싹이 자라고 있는 그녀의 배에 귀를 갖다대었다. 그러나 아무런 전달이 없었다. 뱃속의 아이는 생명이 아니라 물질로 변해버린 것같았다.

다음날도 고 다음날도, 아이와 어떤 대화를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이기와 줄 질욕 때문에 새싹의 생명이 좌우되다니------

가슴속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나는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목을 누르고 싶었다. 눌러야지, 눌러야지, 눌러야지,,,,,, 내 손이 그녀의 목 가깝게 다가갔다.

아아, 나는 또 한번 절망감을 느꼈다. 아이 때문이었다. 언젠가 살아 있음을 알려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무기력한 날이 며칠 지나갔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나에게 어떤 살의를 느꼈는지 행동이 조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제 내가 할 행동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목이 몹시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햇빛이 나의 수분을 증발시키는 것이리라. 나는 모자를 쓰고 나오지 않았음을 후회했다. 나는 이 거대한 생물체에 부종처럼 돋아 있는 산동네를 돌아다보았다. 커다란 건물 뒤에 가려지고 머리 부분의 삼각만이 조금 아물아물 흔들렸다. 도로에는 차량들이 빠르게 질주했고 거리는 한산했다. 멀리 슈퍼마켓의 건물이 아이를 밴 임산부처럼 배를 불룩하게 내밀고 있었다. 나는 번쩍거리는 햇빛 아래에서 자꾸 현기증을 느끼며 그 건물로 다가갔다. 아지랭이가 흔들리는 보도 블록 위에서 그녀가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하고 표정 없이 외치는 모습이 환영으로 나타났다. 또 다시 현기증이 다가섰다. 몹시 눈부셨다.

이 도시의 하늘과 햇빛은 칼날이었다. 나는 햇빛 아래에서 눈을 내려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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