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빠똥 장군(將軍) 김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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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聯隊)에 리빠똥 장군이 부임해 오리라는 소문이 나돌고부터 장사병들은 사기가 꺾여 있었다. 그의 비인간적인 통솔 방법과 무자비한 행동은 군단 내에서도 꽤나 이름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연대 본부의 장교들은 집무 시간에도 일손이 잡히지 않아 전전긍긍했으며 한둘만 모여도 리빠똥 장군의 과거 행적을 하나하나 들춰내어 두려워하기도 하고 비웃어 주기도 했다. 지휘관이란 부하들의 비위에 꼭 맞아떨어지지가 어려운 것이었지만, 장군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면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때는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철조망으로 살금살금 넘나드는 가을이었다. 식사 시간에 식당에서 먼저 식사를 끝내고 나온 사병들은 식당 벽 양지쪽 여기저기에서 떼를 지어 웅성거렸는데, 그것큰 장군에 대찬 전설적인 일화에 대한 것들이었다. 고위층을 알고 있는 장 교들은 이 연대를 떠나가야겠다고 푸념처럼 뇌까렸다. 화났을 때 그가 사용하는 주특기는 부하들의 정강이를 군화발로 차는 것으로, 이름지어 '쪼인트 깐다'였다. 이것이 터졌을 시기에 대비하여 고위층에 연줄이 없는 장교들은 집무실에 모여서 군화발을 피하는 시늉으로 깡 총깡총 뛰는 연습을 하면서 법석을 떨기도 했다.
마침내 리빠똥 장군이 부임했다. 그러나 다른 부대로 전출한 장교는 한 명도 없었고, 간단한 취임사로 연대 장병들에게 선을 보인 장군은 이후 소문이 무색하도록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그것은 고요한 바다의 폭풍 전야처럼 소리 없이 검은 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는 징조였을 뿐. 드디어 전 부대가 그의 힘에 부대껴야 할 날은 닥쳐왔다.
먼저 알아둘 일은, 리빠똥 장군이란 실제로 별을 딴 장군이 아니라 그다지 달갑지 않은 별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계급은 대령으로 연대 지휘관이었다. 그도 남들처럼 장군을 바라기는 했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오 잘 알 것이다.
그가 대대장 시절의 이야기다. 하도 시달림을 받던 인사 행정관이 하루는 그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결재 때마다 꼬투리를 잡혀 욕설 세례를 받거나 구둣발에 채이지 않으면 결재 서류가 대대장 실이 좁다고 날아가는 판이니, 실상은 그가 폭군 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를 달래고 조금은 쫄려주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이다,
"대대장님, 요즘 장사병 사이에서 들리는 말에 의하면 장군을,,,,,,아니 대대장님을 장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리빠똥 장군이라고--- "
"허, 그래? 리빠똥 장군이란 어떤 사람이었나?"
대령 계급장을 달고서 장군이라는 말을 들으니 미상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래서 용기를 얻은 인사 행정관인 그 중위는 옆방의 전령들이 들을 만큼 큰소리로 외쳐 댔다.
"리빠똥 장군이라 하면,,,,,"
그리고 또 대대장의 눈치를 살폈다.
"빨리 말해라, 이거 더듬기는."
"네, 빨리 말하겠습니다. 리빠똥 장군이라 하면, 저 나폴레옹의 유명한 참모였습니다."
"허, 그래?"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나폴레옹이 백전백승한 것은 모두 리빠똥 장군의 우수한 작전 계획을 그대로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날 그 중위는 이례적으로 거침없이 1주일간 밀렸던 서류에 결재를 얻었다. 내내 장군이라는 별칭에 기분이 흐뭇했던 대대장은 역사 책을 뒤적였고, 마침내는 열흘이나 걸려 일본에서 발간된 (세계 인명 사전)을 구해다가 눈을 까뒤집고 찾아보았으나, 안타깝게도 리빠똥 장군이라는 이름은 나타나지 않았다. 낮이나 밤이나 리빠똥이라는 이름이 그의 머리 안에 뱅뱅 돌고 떠나지를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그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역시 리빠똥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파리 한 마리가 그의 벗겨진 이마 위에 사뿐히 앉는 것이 아닌가
"이놈의 똥파리가!"
그는 이마를 손바타으로 탁 쳤다. 그러자 번개처럼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지혜가 있었다, 리빠똥, 리빠똥, 리파똥 파리똥 파리, 똥파리,,,,,
아아, 이것은 똥파리 장군이었던 것이다. 물론 다음날 아침, 대대장은 인사 행정관인 그 중위를 대대장 실로 불렀다.
"뭐, 리빠똥 장군이 나폴레옹의 참모였다구? 이 새끼, 대가리에 괴도 안 마른 새파란 새끼가 누구를 놀리려는 게냐? 이 새끼, 다시 한번 말해 봐라."
그는 중위의 얼굴과 배, 다리를 손과 발로 치고 차면서 고함을 질렀다
"이 새끼, 다시 한번 말해 보라니까."
중위는 토끼 모양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대대장실 안을 맴돌았다. 결국 한번 더 불러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죽었다 싶었지만 다시 한 번 크게 외쳐 댔다.
"리빠똥 장군!"
옆방에서는 전령들이 이 소란을 듣고 있었다. 중위가 대대장 실에서 기진맥진 흐느적거리며 나왔을 때는 이미 리빠똥 장군이라는 별명이 말 많은 전령의 입을 통해 전 대대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리빠똥, 똥파리 장군.
이 전설 같은 별명을 지닌 리빠똥 장군이 부임해 오고 1주일쯤 지났을까, 연대에 월남 전선에서 돌아온 중위 하나가 부대 정훈관으로 전임돼 왔다, 장군의 피퍅한 면모는 이 중위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위의 이름은 정 호영이라 했다, 처음에는 별로 그에게서 언동으로 봐서는 특이한 것을 발견할 수가 없었으나 그래도 생김새가 특이한 존재로서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하자면 그의 얼굴은 고릴라 상이었다. 이마는 별로 넓지 않았으나 납작코에다 턱이 유난히 길면서 앞으로 휘어져 나와 있었다. 1미터 76센티의 키에 어깨가 떡 벌어졌다. 그가 특이한 존재로서 인상을 굳히게 된 것은 전임돼 온 다음날 신고 때였다, 리빠똥 장군과 고릴라 중위가 맞닥뜨린 것이었다.
"뭐 똥파리 장군이라고 인간이 아니겠능교?"
인사 장교 조 소령이 정 중위에게, 들어가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무엇을 물으면 정확한 발음으로 답변해야 한다고 예비 지식을 주자 정 중위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막상 연대장 실로 들어갔을 때 정 중위는 바닥에 칠한 에나멜의 붉은 색깔에 정신이 현란했다. 그것은 바로 핏빛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부동자세로 서서 조 소령의 소개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월남에서 귀국해서, 휴가가 끝나고 전임한 칭 호영 중위입니다. 지난번 결재 때 말씀드린 바 있는,,,,,,"
정 중위에게 명확한 발음으로 답변하라고 말했던 장본인인 조 소령의 음성은 말 마디마디마다 부들부들 떨려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리빠똥 장군은 얼굴을 한번 들어 툭 튀어나온 두 눈으로 정 중위를 흘끗 보았을 뿐, 읽고 있던 신문에 다시 시선을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 소령은 정 중위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 눈짓으로 빨리 신고를 하라는 것이 아닌가. 정 중위는 목청에 힘을 모으고 소리질렀다
"중위 정호영은 일천구백육십팔 년 시월 십팔일 귀국 중대로부터 XX연대에 전입되었기에 신고합니다."
그러나 리빠똥 장군은 쿠션에 묻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것은 정 중위보다 조 소령이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정 중위의 신고는 틀린 데가 없었다. 발음도 떨면서 우물쭈물하는 자기보다는 월등히 좋았다. 그러나 무엇인가 리빠똥 장군의 비위에 맞지 않는 것이다.
"자네 신고하는 데 왜 그리 악을 쓰나, 좀 조용히 하게."
조 소령은 장군의 눈치를 보면서 한마디했다. 그래서 정 중위는 조금 낮은 음성으로 다시 반복했다. 그래도 여전히 끄덕도 않는다. 더 이상 두 사람은 할말이 없었다. 그렇게 부동자세로 10분 이상은 서 있었을 게다.
"어떻게 하면 좋으시겠습니까?"
마침내 이렇게 말한 것은 조 소령이 아니라 정 중위였다. 서서히 신문이 얼굴 앞에서 걷혀지고 뚫어지게 노려보는 리빠똥 장군의 두 눈이 나타났다.
"흥!"
장군은 코웃음을 쳤다,
"나가서 처음부터 다시 들어와."
두 사람은 연대장 실을 나왔다.
"이봐, 정 중위. 이번엔 자네만 들어가게, 소개는 된 거니까. 나는 더 들어가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자, 노크를 해 가며---"
조 소령은 날 살리라는 듯이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다.
"제에길 조 까치. "
정 중위는 연대장실 도어를 두드렸다. 반응을 기다렸으나 아무 소리도 없었다. 또 두드렸다. 그래도 무반응이라 문을 열고 성큼 들어서고 말았다. 핏빛 같은 에나멜의 바닥, 맞은편 벽에는 대통령으로부터 사단장가지의 사진이 너덧 개 주욱 붙어 있고, 오른편 벽에 완전 무장의 배낭이 하나, 그 위에 철모가 얹혀 있고 권총 탄띠가 총이 든 채 축 늘어져 걸려 있다. 왼쪽에는 연대기 그리고 전통에 빛나는 각종 경연 우승기가 힘없이 서 있다. 맞은편 사진이 붙은 밑에는 창문이 있었는데, 밖에 두 해 가량 자라난 포플러의 줄기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사양이 나뭇가지 위를 지나 땅에 떨어지고, 그것을 받으며 낙엽이 몇 잎 뒹굴고있었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바닥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자꾸만 회상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찔하는 현기증이 때때로 그의 뇌리를 스쳐갔으나 쓰러지지 않으려고 주먹에 힘을 주며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20분쯤 지났다. 차츰 리빠똥 장군은 인간이 아닐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똥파리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제가 인간이라면 나도 인간인데 이렇게 골탕먹일 수가 있을까
"자네 월남서 몇 번이나 전투했나? 기록에 의하면 소대장을 했다고 하던데."
느닷없이 신문 뒤에서 흘러온 말이었다. 그 동안이면 볼 만한 기사도 다 보았을 법도 한데 장군은 신문을 놓지 않았다.
"교전이 있었던 전투는 여섯 번입니다."
"그래 많이 했다고 생각해?"
"제 생각에는 중간 정도라 생각합니다. "
"자네 정훈관이 마음에 드는지?"
"예. 신통치 않는 보직이지만 마음에 듭니다."
리마똥 장군의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싶었다, 그래서 그는 내킨 김에 아예 쏟아 놓고 말았다.
"그래도 학교 때는 문학이라고 한답시고 다녔으니까 말입니더."
안 할 말을 했는지 모른다.
"그래 ? 자네 경상도 내긴가 본데, 무뚝뚝하지만 쓸 만해. 자네 내 부관 하지 않겠어? 말하자면 장군들은 부관을 거느리고 있지 않은가? 대령이라고 섭섭히 생각지는 말고,,,,,, 정훈관이란 부관이 할 일도 맡아 하는 게야."
부드럽고 은근한 음성이었다. 이런 우라질. 그러나 직제 상에 없는 대령 부관이지만, 이 마당에서 마다할 수 없는 처지가 아닌가.
"맞습니더. 장군은 되고 싶으면 될 수 있는 겁니더. 우선 여기 서 있는 저라도 말입니더."
그러자 신문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옆으로 제쳐지더니 미빠똥 장군은 헤벌쭉거리며 웃었다.
"좋아. 돌아가도 좋아."
2
그러나 정 중위는 직제 상에 없는 부관직이나마 1주일도 안 돼 여지 없이 박탈당하고 말았다.
"개새끼, 나도 장군이 될 수 있다고 떠들 때부터 어쩐지 머리가 돈 것 같았단 말야, 초급 장교들의 해이된 정신을 바로잡기 위해 정신 교육을 시켜야겠어. 오늘 오후 한 시에 전 장교를 식당에 집합시켜. 알겠어? 시간 엄수해서 말야."
리빠똥 장관이 화를 내게 된 것은 사건의 경위로 보아 당연한 것이었다.
지난 일요일의 일이었다. 일직 장교와 3분의 1의 잔류 장교 그리고 잔규 병력이 남아 있었을 뿐 장병이 외출을 나간 부대 안은 조용했다. 연대 연병장에는 몇몇의 병사들이 이따금 떼를 지어 지나가고, 한쪽 구석에서는 상의를 벗은 병사들이 배구 볼을 가지고 공중에 높이 높이 쳐 올리고 있었다. 리빠똥 장군도 외출을 나가 연대장 실도 비어 있었다. 그래서 무료해진 그의 전령들도 창 밖으로 한가한 연병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을 때였다.
갑자기 창밖에 뽀얀 먼지가 일며 도로를 따라 한 대의 짚차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두 명의 전령은 장군이 오는가보다 생각하며 재빨리 자리를 차고 건물 밖으로 뛰어나갔다. 짚차는 연대장실 앞에 와서 삐익하며 멎었다. 한데 거기서 뛰어내린 것은 리빠똥 장군이 아니었다. 작업모에는 한 개의 별이 번쩍거리는 진짜 장군이었다. 무조건 전령들은 얼어붙은 듯 부동자세로 경례를 붙였다.
"이봐, 리빠똥 장군은 있는가?"
굵직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전령들이 다시금 쳐다보았을 때, 그들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릴라 정 중위였던 것이다.
전령들은 다시 한번 말문이 막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을 딱 벌리고 자기를 바라보고만 서 있는 전령들을 향해 그는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리빠똥 장군은 있는가?"
"지금 안 계십니다."
"어디 갔어?"
"시내 외출중이십니다. "
"외출중이라--- 두 시간 전에도 있었는데."
중얼거리고 정 중위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자기의 발등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얼굴을 들었다. 큰 몸체는 좀 전에 짚차에서 뛰어내릴 때와는 달리 기운이 없고 두 팔은 축 늘어져 있었다. 검은 얼굴은 핏기가 없어 창백했다. 코스모스 꽃밭을 바라보는 가늘게 뜬 눈에서 전
령들은 고릴라의 실의를 보았다. 그의 입술이 바르르 떨었다. 드디어 전령들은 서로 눈을 끔뻑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틀림없이 미친 것이다,
"저, 왜 그런 계급장을?"
그러나 정 중위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몸을 돌려 훌쩍 짚차에 올라 운전대에 앉더니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연병장을 한 바퀴 돌고, 먼지를 일으키며 그가 온 길로 되돌아 달아났다.
"정 중위가 미쳤다!"
두 전령의 입에서 이 말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이 리빠똥 장군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리빠똥 장군은 정 중위가 미친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자기에게 도전하려는 집착에 빠져 있을 뿐이라고 단정했다. 이 사실은 중대한 것으로 그를 제외한 다른 장병들과 견해를 달리한 것이다. 그는 정 중위가 요즘 초급 장교의 해이된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그것은 곧 지휘관에게 도전하는 초급 장교의 암적인 힘의 발로라는 것이다.
그날 오후 한 시 정각, 연대 식당에는 스피커가 장치되고 소위부터 중령가지 백여 명의 장교가 집합했다. 장교들은 장군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두려우면서도 부임 첫 일성이 되므로 진가를 측정할 수 있는 기대에 차 있었다. 3분이 지나자 조 소령의 '차렷' 하는 구령이 났다. 웅성대던 장내가 조용해졌다. 리빠똥 장군은 왼손에 윤이 나는 까만색의 짧은 지휘봉을 들고, 배를 불쑥 내밀고서 잔걸음으로 단 위에 올라섰다.
"군대의 지휘 계통을 문란케 하는 암적인 존재가 장교들간에 섞여 있다는 말입니,,,,,,"
경례를 받자마자 리빠똥 장군은 팩 소리를 질렀다. 그는 '다'자를 발음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질서라는 것은, 특히 군대에선 말요, 질서라는 것은 규율을 어기지 않고 절대 복종하는 데서만 유지되는 거요. 내가 오늘 제관들을 집합시킨 것은 이와 같은 것을 공부시키려는 거요."
장교들은 벌써부터 입에 침을 물고 열변을 토하려는 장군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으려고 기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않았다.
"군대에는 불평 불만이란 있을 수 없는 게야. 단위 부대를 지휘 통솔하는 것은 지휘관이야. 연대는 내가 지휘하는 게야. 연대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가 책임져. 아무리 좋은 머리를 갖고 있더라도 나의 머리를 혼돈시킬 수는 없어. 요즘 장교들간에, 특히 초급 장교들 사이에는 뚱딴지 같은 짓을 하는 놈들이 있단 말야."
어느새 그의 말은 지휘관답게 부하들에게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초급 장교들은 이론이 서지도 않는 자유주의를 철조망 안에서 내세우고 있어, 내가 빨갱이 놈들의 남침 전쟁 때 3백 회 이상이나 접전을 벌이면서 신조처럼 된 것이 있다면, 군대 안에서는 자유고 평등이고 나발이고 없는 거라는 게야. 나는 제관들을 지휘해. 제관들의 목숨은 나에게 달려 있어. 그런 책임을 국가가 나에게 부여했단 말야. 대령 계급장을 보기 좋으라고 달은 겐지 아나? 나는 이 연대 안에서는 좋은 의미의 군주가 될 수 있다는 말야. 그런데, 보라구. 이 나를 무시하구 준장 계급장을 달고 이 부대 안을 쏘다니는 미친 고릴라 같은 놈이 있단 말야. 이건 다른 의미로 말하면 반역이요 구테타야. 그놈이 미쳤다고 방금 말했지만 미친 척하는 거지 실상 미치지 않았단 말야."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손등으로 입술의 침을 쓱 문지르고 소리쳤다.
"정 호영 중위 앞으로 나와!"
고릴라 정 중위가 뒤에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천천히 걸어나가 장군 옆에 올라섰다. 정 중위는 두 눈을 끔뻑거리며 장교들을 내려다 보았다.
"자네, 미쳤나?"
"아닙니다,"
"아닙니다!"
정 중위는 장군의 물음에 연거푸 소리질러 대답했다.
"미친놈보고 미쳤느냐고 물어 보면 물어 본 놈이 미친놈이란 말이 있지만, 이 친구는 절대 미치지 않았어. 그리고 나도 미치지 않았고---"
장교들 사이에 참다 못해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나더니, 급기야는 와 하고 웃음보가 터졌다. 리빠똥 장군도 멋적은 듯이 흐물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정 중위만은 결코 웃지 않았다.
"이것은 돈키호테 연극 구경하는 것 같은데. 꼭 돈키호테와 산쵸야."
누군가 웃음소리 가운데 이렇게 말하는 것이 들렸다. 별로 큰소리가 아니었기에 장군과 정 중위는 듣지 못했으나 그 주위에 있던 장교들은 그 소리를 듣고 또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때의 정경은 전혀 달리 표현할 수 있었다. 곡마단의 곡예사가 고릴라를 놓고 회초리를 후려치며 곡예를 하도륵 강요했으나 고릴라가 제대로 연기를 못해 곡예사는 관중에게 비굴한 웃음을 띠고 고릴라는 미안해서 침울해 있는 것과 같았다. 리빠똥 장군은 장내를 다시 엄숙한 분위기로 전환시키려고 지휘봉으로 교탁을 탁탁 두드렸다. 장교 식당 안에 웃음소리가 사라지자, 그는 매어달리듯 정 중위의 어깨를 한 손으로 움켜쥐더니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정 중위는 꼼짝도 않았다.
"이봐라, 말 좀 해 봐라."
"잘못했습니다."
정 중위는 얼굴을 들고 좌중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무뚝뚝하고 침울하게, 그러나 뒷자리까지 들릴 만한 큰소리로 말했다.
"누가 잘못한 걸 말하라고 했나? 이런 얼간이 같은 놈."
"그럼 뭘 말해야 되겠십니꺼?"
"왜 준장 계급장을 달았느냐 말이닷!"
"그저 달고 싶었을 뿐입니더."
"이유가 있을 게 아닌가?"
"저만 알고 있으려고 했으나 여러 장교님들도 그걸 알기를 원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말하겠심더, 월남서 동기생 하나가 적탄에 맞아 죽었심더. 항상 전투에 나갈 때는 소위 계급장 대신에 별 하나를 달았심더. 2개 분대 병력을 끌고 가다 다리에서 기습을 받아 완전히 포위 당한 상태였심더. 연락을 받고 제가 증원 나갔을 때는 그는 죽어가고 있었심더. 그가 피묻은 손을 들어 별을 만집디더. 그리고는 씩 웃고 그만 갔십니더. 그놈을 부등켜 안고 하늘을 보았지예, 별들이 총총했심더, 별들이...,,, 그가 말한 적이 있습니더. 나는 왜 전쟁터에서 별을 달고 다니는지 모른다고. 저는 그놈의 별을 뜯어 포킷에 넣어 가지고 왔심더, 저는 그놈을 이해하려고 했십니더.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았십니더, 그런데 어제 갑자기 그 별을 달아보고 싶어졌던 겁니더. 그러나 제가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놈의 말처럼 왜 별을 달았는지는 모르겠심더, "
언제까지든 이어나갈 것 같았으나 정 중위의 말은 여기서 끊겼다.
짙은 눈썹 아래 두 눈이 번쩍했다. 명확한 것은 없으면서도 그의 말에 무언가 뼈대가 있는 듯이 느껴져 장교들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나를 만나려고 한 목적은? "
장군에게는 아직 정 중위를 공격할 여지가 남아 있었다. 정 중위는 한동안 머뭇거리고 있더니 장군을 마주 향해 소리쳤다,
"미칠려고 그랬는지 모르겠십니더."
그러자 장교들간에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났다. 다시금 장군은 교탁을 탁탁 치고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그의 입에서 욕이 튀어 나왔다,
"군의관, 이 새끼 끌고 가서 진단 좀 해 봐. 뭣하면 정신병동에 처넣어 버려."
그는 교단을 발로 꽝 구르고는 지휘봉을 옆으로 흔들면서 경례도 받지 않고 식당을 나갔다
3
정 중위는 리빠똥 장군의 지시로 의무실 짚차에 실려 군단 병원으로 갔다, 정신 상태에 대한 감정을 받느라고 이틀 동안을 보냈다. 그러나 외부로부터의 압박감으로 인한 저항 노이로제 증세가 조금 보였을 뿐 현대 인간들에게서는 대부분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입원할 요건이 안 된다는 진단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연대로 돌아오고 말았다. 돌아오던 날 군의관과 함께 정 중위는 장군에게 돌아왔다고 보고했다.
"음, 알고 있어. 전화가 걸려 왔더군. 별일 아니라구 말야. 군의관, 자넨 나가도 좋아."
하고 군의관에게 눈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군의관이 나가자 정 중위는 우뚝 서서 장군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한번 시험해 볼 필요가 있어. 지금부터 제식 교련을 하는 거다."
"여기서 말입니꺼?"
"그렇다. 우향우."
소리가 크지는 않았지만 구령대로 움직여 줄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동안 멀거니 지휘관을 내려다보았다.
"우향우."
좀 전과 같은 억양으로 구령이 떨어졌다. 그는 오른쪽으로 오른발을 90도 각도로 발뒤꿈치를 떼지 않은 채 돌렸다가 왼발을 가져다 붙였다.
"좌향좌."
"우향우.
"뒤로 돌아."
"좌향좌."
"좌향좌."
"우향우."
정 중위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구령대로 스무 번 가량 이리 돌고 저리 돌고 했다. 그리고 그는 붉은 색의 에나멜 빛깔에 머리가 띵해 옴을 느꼈을 때 갑자기 연대장 실이 조용해졌고, 그는 리빠똥 장군에게 등을 보이며 벽을 향해 서 있는 자신을 알았다.
"음, 틀림없군. 됐어. 나를 향해 돌아서."
유난히도 장군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큰 입이 헤벌쭉 벌려져 있었다.
"자, 이제부터 자네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국에 대한 충성심으로 나에게 충성을 하는 게야. 내가 자네에게 시키는 일에 대해 절대 비밀을 지켜 달란 말야. 누구든지 나에게 대해서 자네는 위험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지만 나는 고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는 거야. 자넨 말일세, 순진한 친구이거든 나는 자네를 믿고 있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할라캅니꺼?"
"좋아, 좋아. 거기 앉게."
장군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서랍을 열더니 세 통의 편지를 꺼냈다.
"자네, 휴가를 갔다 오게. 오늘은 밖에 나가 놀고 내일 아침 열차로 서울에 올라갔다가 이 편지를 부치고 그 다음날 귀대하란 말일세."
"그럴 필요가 있습니꺼 ? 우표값도 안 들고 여기서 군 우편으로 부치지요."
"이런 얼간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러는 거 아닌가?"
"뭡니꺼? 이유라는 게?"
"정말꺼, 꺼 소리좀 뺄 수 없어? 나도 운동 좀 하고 싶어 그런다."
"아하, 때가 됐군요."
정 중위는 이제 알았다는 듯이 장군을 바라보았다. 장군의 눈이 다시금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운동할 철이 되었어요. 날씨도 추워지고, 말하자면 워밍업이라는 거로군요."
"그렇다, 그래. 20년 군대 생활에 별을 달지 못한다면 어디 군인이랄 수 있는가?"
"옳습니더."
정 중위는 장군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하나는 모 삼성(參星) 장군에게 보내는 것이고, 하나는 모 국회의원에게, 또 나머지는 모 재벌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만나 보지 않아도 되는 겁니꺼?"
"부치기만 해. 모두들 의리가 있는 대학 동창들이니까. "
"그럼 지금 출발할랍니더."
정 중위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동자세로 섰다.
"이거 급하긴. 잠깐 기다리게. 서울 충강 아파트에 가면 마누라가 살고 있는데, 만나 보고 이걸 전해 줘."
장군은 가슴 주머니에서 또 하나의 봉투를 꺼냈다. 두툼한 부피로 보아 돈인 듯 싶었다.
"충강 아파트 3백 15호다, 적어 둬."
정 중위는 수첩을 꺼내 315호라고 볼펜으로 끄적거렸다.
"그리고 영수증을 받아 와. 서비스가 좋을 테니, 그것만은 기대해도 좋다."
장군과 정 중위는 의기가 투합한 동지처럼 마주보고 씩 웃었다.
제기랄. 정 중위는 부대를 빠져 나오자 침을 한번 퉤 뱉고 푸르디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왠지 슬픈 감정이 왈칵 치밀어 올라왔지만,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보다 이쪽에서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그 슬픈 감정을 얼버무렸다.
어쨌든 답답하고 규칙적인 일과에서 해방된 느낌인 듯하면서도 또 아닌 듯했다. 똥파리 때문에 시달림을 받다가 똥파리의 아량으로 열차를 타게 되었지만, 똥파리의 더러운 모습과 냄새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약간 비열한 장난일지도 모르지만 장군의 부인을 곯려 주고 싶었다. 그가 다음날 오후 서울역에 내려 일부러 중앙 우체국까지 가서 세 통의 편지를 부치고 충강 아파트를 찾았을 때는, 늦가을의 해는 이미 떨어지고 주위는 어둡기 시작했다. 충강 아파트는 한강을 바라보며 우뚝한 언덕 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일시에 깜빡거리기 시작한 서울의 휘황찬란한 밤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315호실이렷다. 정 중위는 그 숫자가 선명하게 보이는 문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그것은 오랜 시간인 것 같았다. 스물 예닐곱 가량 나 보이는 여인이 빠끔히 문을 열고 얼굴을 밖으로 내어밀었다.
"누구십니까?"
정확한 발음이었지만 목소리는 탁했다.
"저 정 호영 중위라캅니나. "
"정 호영 중위라니요?"
남편이 군대에 있는 여인으로서는, 한 중위가 계급장을 단 군복을 입고 찾아왔다면 심부름 온 장교쯤이란 것은 알고 있을 게다
"장군님의 심부름으로, ,,,"
"장군이 라니요?"
"리빠똥 장군 말입니다, "
"네?"
"아 참, 말이 헛나왔습니다. 김 수진 대령으로부터 심부름 온 장교입니다."
"아, 그러세요 ? 전 장군이라는 바람에,,,,,,"
정 중위는 여인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아니, 예쁜 것을 지나쳐 약간의 요염기마저 감돈다고 생각했다.
"어서 들어오세요. "
정 중위는 성큼 문 안으로 들어서 마루에 걸터앉아 군화 끈을 풀었다. 아파트의 내부는 깨끗이 정돈되었고, 텔리비전이며 레코드며 값싼 책들로 채워진 서가가 불그스레한 불빛을 받고 있었다.
"무슨 일이신지?"
"이것을 전해 드리라고 해서 말입니다."
소파에 앉자 정 중위는 품에서 돈이 든 봉투를 꺼냈다. 그것을 본 여인의 눈이 약간 반짝이는 것 같았다. 여인은 보통내기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번 여인의 차림새를 보았다. 여인은 엷은 분흥 빛깔의 실내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천장에 달린 전
등불로 인해서 더욱 붉게 보이는 벗이었다. 리빠똥 장군에게는 좀처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녀에게서 그는 무엇인가가 퍼뜩 짚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붉은 색이라는 것이었다. 핏빛으로 느껴졌던 연대장실의 바닥과 이 여인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내부는, 그러고 보니까 모두 붉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탁자 위에 올려진 봉투를 집어 여인은 그것을 뜯었다. 오백 원 짜리 지폐가 나왔다. 그녀는 야비하다는 약간의 염치도 들지 않는지 그의 앞에서 세기 시작했다, 정 중위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세는 소리는 들려왔다. 10만 원이었다.
"그 양반은 이걸 가지고 얼마나 살라고 하던가요? "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그 죄가 정 중위에게 있다는 듯이 그녀는 사나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돌아가셔서 전해 주세요. 저는 이런 돈은 받기도 싫고 인연도 더 계속하고 싶지 않다구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가 ? "
"무슨 말이기는 무슨 말이에요? 말한 대로예요. 조금 후에 누가 온다고 했으니까, 중위님도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는 그 말을 듣자 여인의 얼굴을 냅다 후려치고 싶어졌다. 가슴이 분노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참아야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입에서는 이런 짤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미안한 생각이 났던지 여인이 생긋 웃었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정 중위는 묵묵히 그 방을 나왔다. 서늘하게 식어 간 대기가 그의 몸을 감쌌다.
"이런 미칠 노릇이 있나? 영수증도 받지 않았군."
정 중위의 가슴속에는 여인에게보다도 자신에게 대한 반감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리빠똥 장군이 바보스럽고 불쌍하게 느껴졌다. 어찌 해서 저 같은 젊은 여자를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서비스가 최고라고 늘어놓던 자랑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더구나 그 여자를 만나기 전에 똥파리에게 시달리던 대가로 그 여자에게 화풀이하겠다고 벼르던 자신이 또한 가소로워졌다.
오히려 화를 입고 물러 나온 고릴라 중위였다.
4
"일본의 덴노헤이카는 부대 검열을 받을 때 지붕 위의 먼지까지 쓸어버렸다. 연병장과 부대 주위의 사금파리를 줍는다는 것은, 그에 비하면 수고하기가 새 발의 피다. 여러분들은 이번 검열의 우열에 따라 조금 더 편하게 지낼 수 있는가 없는가가 결정될 것이다."
리빠똥 장군이 11월 초순께 어느 날 저녁 연대 회의실에 장교들을 집합시켜 놓고 연말 검열에 대해 일장 훈시를 하면서 사금파리까지 주워야 함을 누누이 강조했다. 이에 따라 병사들의 검열 준비를 서두르게 되는 것이다. 소대장부터 시작하여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그리고 사단장까지의 검열을 거쳐가자면 검열 때마다 부대 이발소를 뻔질나게 드나들어야 하고 단 한 벌밖에 없는 작업복을 분주히 빨고 다려야 하는 것이다. 온종일 총 기름으로 손이 터지고, 새로 온 신병은 조금만 서툴러도 저녁에 선임병들에게 불려나가 기관총 총열로 두들겨 맞아 볼기짝이 찢어지기 일쑤다.
장군과 대대장과 연대 참모들에게 맡은 바 소임을 일일이 지시하고 나서, 마지막 연대 수송관을 불렀다.
"김 대위, 자네는 특히 명심해 둬. 지난번에 정 중위가 짚차를 빌려 타고 뚱딴지 같은 짓을 하도록 보고도 내버려 둔 것을 내가 알고 있는데, 이번엔 그런 사고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게. 알겠나?"
"넷."
하고 김 대위는 피식 웃으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장군의 말에 장교들이 오랜만에 '와' 웃어젖혔다. 정 중위는 장교들의 제일 끝줄에 앉아서, 장군이 왜 이런 말을 새삼스럽게 꺼내는 것일까 생각했다. 지난번에 시킨 일은 어김없이 실천하고 돌아왔다. 그래서 자신이 어깨를 두드리며 수고했다고 치하의 말씀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정 중위는 곧 그뜻을 알 수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연대 선임하사관이, 오늘이 진짜 장군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가 판가름나는 날이라고 귀띔해 준 것을 상기했던 것이다.
"그럼 내 의도를 알아들었으면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끝을 맺겠소."
그러자 인사 참모가 차렷 구령을 소리쳐 불렀다.
"이런 제에길, 성급하긴,,,, 오늘은 내가 여러 장교들에게 양식을 먹는 강의를 이제부터 할까 하는 참이야."
리빠똥 장군의 희한한 발언에 장교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장군, 아니 연대장님!"
수송관 김 대위가 소리쳤다.
"왜 그래?"
"양식이라니 그 양자가 식량 양자를 말합니까? 아니라면 서양이라고 할 때 쓰는 넓은 양자를 말하시는 겁니까?"
"양? 멍텅구리는 가만히 있어,"
하더니 문 앞에 서 있는 선임하사관을 불렀다
"선임하사관! 전화 아직 없나? "
"네, 없습니다. "
"알았어. 그러면 전령을 시켜 매점에 따서 빵 한 쪼가리와 포크, 그리고 나이프를 가져 오라고 말해 주게."
전화와 포크는 전혀 이질적인 물건이면서도 오늘의 장군에게는 그의 초조한 심경을 표시하는 데 있어 하나로 연관지어져 있었던 것이다. 회의를 끝내고 서울로부터 올 중요한 전화를 기다리기에는 불안하고 초조했던지라, 그것을 조금이나마 극복하기 위해서 양식(洋食) 먹는 강의를 시작하려고 한 것이다. 알 만한 장교들은 이러한 장군의 심경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양식 먹기 강의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무릇 장교란 국제 신사이기 때문에, 적어도 이 정도의 에티켓은 알고 있어야 하는 겁니다."
리빠똥 장군은 이렇게 서두를 꺼냈다
'좋아하네. 여기 앉은 장교들이 크 정도도 모르는 줄 알고 있다면 웃기는 이야기지.'
모두들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지만 겉으로 나타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군으로부터 어떤 강의가 튀어나올까를 생각하면 전혀 흥미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전령이 그가 앉은 앞에 탁자를 하나 옮겨 놓고 크림빵 한 개와 포크와 칼을 접시에 받쳐 들고 들어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여러분들."
장군은 약간 멋적은 듯 크고 삐죽 내민 입으로 헤벌쭉 웃었다.
"내가 군 교육으로 미국에 갔었을 때 이야깁니다. 어느 서민 가정에 초대를 받아 갔었습니다. 그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가정이었기 때문에 식사 전에는 꼭 주기도문을 외었던 것입니다. 그날도 예외 없이 주기도문을 외고 났는데, 그 집 주인 아주머니가 날더러 한국말로 주기도문을 외라는 것이었죠. 체면상 모른다고는 할 수 없고 이거 큰일났다 싶었는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겁니다, 해서---"
장군은 여기가지 말하더니 좌중이 어느 정도의 흥미를 갖고 있는지 한번 훑어보았다. 그리고 만족한 듯이 계속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령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장군은 다시 엄숙하게 얼굴을 들고 정면 벽을 바라보았다.
"소월의 (진달래꽃)을 외었어요. 그랬더니 주인 아주머니 하는 말씀이, 참 멋지군요, 한국말이 그렇게 율동적이고 음악적인 줄은 미처 몰랐지요, 하면서 원더풀을 연발하지 않갔시요."
그는 자신의 말에 감동되어 사투리를 섞어 가며 떠들어 댔다.
"이런 애국자는 되지 못할망정 남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면 안 되겠기에 오늘의 강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시작합니다. 자기 앞에 썰지 않은 빵이 놓여졌을 때는 자세를 바로잡고 포크를 오른손에, 나이프를 왼손에 잡은 다음 이렇게 한가운데를 자르고 다시 먹기 좋을
만하게 잘라서 포크로 이렇게, ,,,"
그는 칼이 잘 들지 않아 허물어진 빵 쪼가리를 입에 갖다 대었는데, 크림이 그의 턱밑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자 좌중은 킥킥거리며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드디어 와 웃음보가 터졌다.
그러나 일단 입에 들어간 빵을 뱉을 수도 없고 그 웃음 속에서 우물우물 입을 놀리고 있었다.
이때였다. 바로 옆방에 붙은 연대장실에 전화벨이 울렸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들 소리내어 웃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벨소리를 듣지 못했다.
"선임하사관!"
갑자기 리빠똥 장군이 자리를 박차면서 외쳤다. 거의 발작과 같은 행동에 장교들은 웃음을 딱 그쳤다. 전화벨이 너무나도 명료한 소리로 이쪽 방으로 전달되고 있음을 알았다. 웃음 속에서 그 소리를 들었던 것은 장군밖에 없었던 것이다,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꼬아보았으므로 선임하사관은 연대장실로 급히 달려갔다. 그리고 그는 곧 허둥지둥 되돌아왔다.
"전홥니다."
그가 소리쳤다,
장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뒤뚱거리며 캉교들 사이를 지나 나갔다.
리빠똥 장군이 다시 회의실로 돌아온 것은 5분 가량 지나서였다. 그는 이제 허둥대지도 않고 우스꽝스러운 인상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그는 증오의 화신처럼 어떤 대상에 대하여 분노의 불길을 태우고 있었다. 그는 단 위에 올라서더니 침울찬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개새끼들!"
그리고는 정 중위를 불렀다.
"자넨 군대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정훈관으로서 대답해 봐."
"계급과 명령으로 움직이는 대표적인 집단입니다."
"그런가 ? 그러나 이 중에는 내가 장군으로 진급되지 못하도록 음모를 꾸민 작자가 있단 말야."
"그렇지만 집단인 이상 하나의 축소된 사회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겁니다. 거기에는 항상 충성과 모반이 함께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새끼, 너무 아는 척하지 마. 나는 20년 동안 오직 충성으로만 몸바쳐 온 몸이닷. 개새끼들."
그는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여러분들, 나의 준장 진급은 실패로 돌아갔고, 여러 장교들은 검열 준비를 서두르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아직까지 이렇다 할 명령은 없었으나, 모 소식통에 의하면 우리 연대는 훈련을 위해 이틀 안으로 모 지역으로 이동해야 할 것 같다. 얼마나 오래 갈는지는 모르나, 나는 나를 험구했던 모든 개새끼들에게 나의 충성심이 어떠한가를 이 기간 동안에 보여 주겠다."
어느 쪽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옳은지 지금은 아무도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명확해진 것은, 그는 리빠똥 장군 특유의 면모를 계속 발휘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5
리바똥 장군이 그렇게도 염원하던 장군 진급 심사에서 탈락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슬퍼할 겨를도 없이 대간첩작전 훈련 명령을 받고 강원도 태백산맥 골짜기로 들어간 것은 그 이틀 후 밤이었다. 보병 1개 대대, 포병, 전차 소대, 공병 소대와 함께 차량 마흔 대를 이끌고 목적지인 삼척 육백산 계곡에 도착했을 때 장군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계곡의 밤바람이 코끝을 에어 낼 것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나무 등걸을 주워 모아 지핀 화톳불이 여기저기서 타오르고 그 주위에서 병사들이 불을 쬐고 있었다. 어디선가 이따금 들려 오는 고함소리가 차량을 정리하는 수송반의 엔진소리와 함께 산간의 적막을 흔들어 놓
고는 했다, 이따금 불꽃 사이로 배낭와 총을 멘 일단의 장병이 개울가 자갈을 밟으며 계곡 쪽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장군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병사들은 화톳불 주변에서 그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똥파리는 왜 묻어 왔지? 씨팔, 이게 대대 훈련이지 연대급 훈련인가. 낮에 난 말야, 재수 없게 쪼인트를 깨였어. 트럭이 정지했길래 차에서 뛰어내려 오줌을 싸고 있는데, 더럽게도 똥파리 차가 뒤에서 달려오고 있더란 말야. 불알 붙들고 경례 붙일 수 있나? 짚차가 삑 서고 똥파리가 내리더니만 왜 경례를 안 붙이냐면서 느닷없이 쪼인트가 들어오더란 말야."
"군의관에게 가서 아파서 훈련 못하겠다고 버터 보지 그래."
병사들뿐만 아니라 장교들까지도 그의 훈련 참가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그는 어디까지나 연대장이었지 대대 지휘관이 아니라는 원칙적인 반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원 주둔지에 있는 2개 대대를 부연대장에게 맡기고 1개 대대를 따라왔다는 것에 훈련에 대한 고문격이라는 이유를 달 수 있었지만, 그는 출발부터 지휘관 노릇을 했으므로 고문이라고는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대대장 송 달명 중령은 이 훈련 기간 동안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더구나 이번 훈련은 단독 훈련이 아니라 다른 사단에 배속되는 관계로 실수해서 망신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곁들여 있었는데, 대령이 대대를 지휘하다니 그것부터 망신살이 뻗치는 징조였다.
리빠똥 장군이 갑자기 1개 대대 훈련 명령을 받고 어리둥절하다가, 그 나름대로 결심을 굳히고 짚차를 몰아 사단장에게 달려가서 의견을 천명하면서 그가 간곡하게 말한 것은 바로 타부대에서 망신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번 훈련에는 제가 나가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형이 전혀 생소한 산악지역인데다가, 전투 경험이 없는 신임 대대장이 지휘를 하다가는 사고가 발생할 우려가 있으며, 그리고,,,,,, 다음 1년을 바라보기 위해서도 저에게 더 없는 기회인 것 같습니다. 저를 내보내 주신다면 부대를 훈련이 끝날 때까지 무사히 유지하겠으며 타부대에서 우리 사단이 망신당하지 않는 정당한 길이 될 것입니다."
"훈련이란 실수도 있는 법이지,,,,,, 그렇지만 소원이다면 나가 보게, 망신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로서도 좋은 일이고 뭣보다도 요즘 나는 자네의 그 두꺼비처럼 부어 있는 쌍통이 보기 싫단 말야. 그러나 지휘는 대대장에게 맡기는 것이 현명할 게야."
어디서 새어 나왔는지 사단장과 리빠똥 장군 사이에 이 같은 대화가 오고 갔었다고 대대 장교들에게는 알려져 있었다, 리빠똥 장군이 망신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지론을 표면에 내세운 것은, 그러한 명분 속에 그의 야심을 은폐하고 부하들의 반발을 최소한도로 줄여보자는 속셈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조금만 눈치가 빠르다면 모를 사람이 없을 것이었다. 이와 같은 리빠똥 장군의 거취에 따라 항상 장군으로부터 시달림을 받던 고릴라 정 중위를 비롯하여 연대 참모진들과 병사들은 한시름 놓았지만, 훈련에 참가한 대대 장병들은 장군과
의 팽팽한 긴장감을 맛보아야만 했다.
언 땅 위에 개인 천막을 치고 몇 시간의 새우잠으로 밤을 넘긴 병사들은, 다음날도 여전히 나뭇가지들을 위윙 휘몰아쳐 대는 바람에 몸을 펴지 못했다. 서서히 어둠이 걷혀 가자 병사들은 개울을 건너 좁은 보리밭 위에 연대기가 펄럭거리는 것을 보았고, 거기에 CP가 위치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모자도 쓰지 않은 채 지휘봉을 들고 똥배를 내밀며 설치고 있는 장군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좀 더 가까이 위치하고 있는 병사들은 그가 지금 병사들에게 무엇인가 호통을 치고 있다는 것까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CP에서 전문을 받고 전하느라고 통신기 앞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교대원을 기다리는 통신병은 장군이 소리지르는 고함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듣고 있었다.
"대대장이 기합이 빠져 있으니 그 전령 놈들도 군기가 엉망이군. 야 새끼야, 네 대대장 빨리 깨우라. 내가 지시한 지 30분은 넘었을 끼야. 완전 무장을 하고 내 천막으로 빨리 오라고 해."
장군의 천막에서 10여 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를 두고 쳐진 대대장 천막에서 대대장은 분명히 장군의 고함소리를 들었을 것이었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장군은 울화가 터졌는지 차마 대대장 천막 쪽으로 가지는 못하고, 통신병이 이 소란을 듣고 있는 CP천막 쪽으로 허둥지둥 걸어가서 상황판을 들여다보았다.
"야, 작전 장교! 이게 지도라고 그리고 있는 거야? 도대체 이렇게 평탄한 길만 이용해서야 어디 간첩 한 마리라도 잡겠나, 간첩은 험한 곳을 이용한단 말야. 다시 그려!"
그는 거대한 상황판을 쓰러뜨리고 전화기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며 화풀이를 했다. 순식간에 CP는 난장판이 되었다. 충청도 출신인 대대 작전 장교 김 국진 소령은 원망에 찬 눈초리로 한번 장군을 바라보더니 묵묵히 상황판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작전 보좌관과 함께 밤을 새워 그려 넣은 작전 상황도를 헝겊에 휘발유 칠을 하여 슬픈 얼굴을 지으며 싹싹 지워내렸다
"원, 더러워서. 새벽부터 똥파리가 설쳐대니 사람이 배겨 낼 재간이 있나."
그는 천막 밖으로 뭐가 또 그렇게 급한지 허둥대며 나가는 장군의 등에 대고 중얼거렸다. 장군이 수송반에 내려가, 기름 묻은 착업복을 입고서 경유를 뿌려 가며 아직도 화톳불을 놓고 있는 병사들 앞에 나타나서 다시 한번 볶아 대고 자기의 천막으로 돌아왔을 때, 대대장 송 중령이 천막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 봐, 자네는 뭘 하고 있는 거야. 잠만 자면 다야? 내가 나온 것이 불만이겠지만, 나는 이미 자네가 이 꼴로 부대를 운영하리라는 것을 알고 왔다는 것을 명심해 둬, 병사들은 모두 소풍 나온 것처럼 정신이 해이해 있고, 장교들은 상황판 하나 똑똑히 그릴 줄 모르는데 무슨 놈의 훈련을 하겠어 ? 게다가 대대장이란 작자는 천막 속에서 꿈쩍도 않고 있으니 도떼기시장이지 군댄가?"
장군보다 목 하나가 더 큰 대대장은 눈을 한번 끔뻑거리고 목청을 가다듬어 말했다.
"이미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부대 지휘는 연대장님이 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야 그때부터 보직이 없는 거와 같으니 천막 속에서 잠이나 자고 심심하면 훈련 관전이나 하는 거죠."
장군은 씨근덕거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천막 안에 난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밖에서 금방 들어온 장군은 숨이 헉헉 막히는지 붉어진 얼굴을 쳐들고 대대장을 노려보았다.
"야 이것 봐라, 부대 안에서는 고릴란가 하는 정 중위란 놈이 나를 우롱하더니만, 여기 나와서는 송 중령이란 사나이가 대신하기로 했군. 뭐 보직이 없는 것과 같다구? 자네 말 잘했어. 완전 무장은 하고 왔나? 아냐, 아냐. 하고 오지 않았어도 괜찰아. 준비는 해 놓았겠지? 지금 이 시각부터 임무를 부여하겠어, 이리 와, 이리 와."
장군은 이렇게 소리치더니, 대대장의 군복 소매를 잡고 밖으로 끌고 나와 CP천막 쪽으로 가서 그 안으로 쑥 들어갔다.
"자, 잘 봐. 이 지역 안에서 가장 높은 고지가 어떤 것인가?"
장군은 방금 전에 말끔히 지워진 깨끗한 상황판 앞에서 지휘봉으로 CP지점을 가리키고 적어도 실제 거리 14킬로미터를 반지름으로 하는 원을 그렸다.
"1천 2백 67고지 마봉산으로 압니다."
"야, 이거 왜 이래? 압니다는 뭐야. 마봉산이면 마봉산이지. 이 시각부터 자네는 이 고지 이쪽에 연해 있는 육백산 정상에 OP를 설치하고, 훈련이 끝날 때까지 자네 말마따나 관전이나 즐기도록 해, 이것은 전혀 농담이 아니고 자네에게 임무를 부여하는 명령이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부터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지는 병력을 통제할 만한 임무를 완수하기에는 자네 외에 아무도 없단 말이야."
"OF라니 포병 OP입니까? "
대대장도 조금은 흥분하고 있었다. 대대 지휘권을 본의 아니게 박탈당한 것도 분한데, 중령 계급장을 달고 관측 장교라니 어처구니가 없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멍텅구리야, 산간 지대에서는 사단과 대대, 대대와 중대 사이의 교신이 잘 안 되니까 중계 역할을 하란 말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통신 중계소야."
대대장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납빛처럼 창백하게 굳어 갔다, 사실 이와 같은 역할이란 통신 선임하사관의 직책이면 능히 해낼 수 있는 것이었고, 기술적인 분야보다도 지휘 능력을 길러온 대대장에게는 당치가 않은 처사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병력은 장교로는 작전 보좌관을 대동하고 그 외에 통신 하사 1명, 통신병 1명, 보초병으로 보병 3명만 데리고 가도록 해. 나는 그 이상을 생각할 수 없으니까."
이렇게 해서 유례없이 지휘권을 연대장 리빠똥 장군에게 바친 대대장 송 중령은 험준한 육백산으로 올라갔다.
6
훈련 지역에서 1백 50여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본대 1연대에 이 아름답지 않은 소문이 전해짐과 동시에, 장군이 고릴라 정 중위를 호출한 것은 대대장이 육백산으로 올라가고 난 사흘 뒤의 일이었다. 그 동안 훈련병들은 소대 단위로 산간 요소 요소에 투입되었지만 간첩
부대로 둔갑한 가적을 한 명도 가사살하거나 체포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리빠똥 장군의 부대를 배속 받은 사단장은 리빠똥 장군에게 은근한 불만과 함께 경멸의 언사를 표시해 왔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장군은 울화가 치밀어
"애새끼가! 끄나불이 있다고 별을 주워 단 놈이 선배를 몰라보고, 이 역전의 용사를 몰라보고 주둥아리를 놀린단 말이야."
하고 뇌까렸으나, 군대 조직의 현실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렇다고 그는 어떤 개선책을 강구하려고 애를 쓰기보다는 육백산에 올라간 대대장을 견제하고 있었으므로, 이번 정 중위를 부른 것도 말하자면 대대장 행동에 대한 감시책으로서였다.
왜 또 나를 볶아먹으려는 것일까, 장군의 속셈을 모르는 정 충위는 지레 겁을 먹고 훈련장에 도착하자 땐 아래 위치한 수송반부터 들러 역시 지원 나와 있는 김 대위에게서 대강의 분위기를 익혔다.
"하여간 정 중위도 죽었다고 복창해야겠구만. 또 미친 척이나 해서 병원으로 후송 당하는 것이 상책일 게요."
하면서 김 대위는 기름 묻은 시꺼먼 장갑을 낀 손으로 코를 풀어 내고 씩 웃었던 것이다.
정 중위가 대대 CP에 도착해서 주위를 기웃거리는데, 난데없이 CP 천막 안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 새끼야, 네가 작전 장교란 말인가. 이 똥대가리 같은 놈아. 대대장더러 빨리 예하 부대와 교신하라고 독촉해. 중대가 어디 틀어박혀 있는지도 모르고 무슨 작전을 수행할 수 있어?"
장군의 목소리를 받아 기가 죽은 작전 장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열심히 체크를 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오늘 아침부터 두절입니다. 원래 산간벽지라서 이런 낡고 성능이 없는 통신기로는 작전 수행이 불가능합니다."
정 중위는 배낭을 등에 짊어진 채 천막 안을 살펴보았다. 장군은 등을 보이고 지휘봉을 공중에 휘두르고 있었고, 작전 장교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지휘봉에 얻어맞지 않으려고 자꾸 안으로 밀려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 이 새끼가 도망을 가? 도망가면 어쩔 테야? 차렷, 차렷, 차렷하지 못하겠나? 이 종간나 새끼야, 차렷하면 치지 않겠다."
마침내 순진한 작전 장교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나 철모를 쓰고 방한복을 입고, 그 위에 권총을 차고 있는 그로서는 완전히 두 손이 허리 밑에 붙지 않아 어정쩡하게 두 팔이 몸에서 떨어져 주먹을 쥐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장군에게 도전하는 자세로도 보였다.
"어, 이새끼가 폼을 잡아?"
"무슨 폼을 잡습니까 ? 보시다시피."
"이 새끼가 권총을 뽑으려고 하지 않아."
그는 자신의 말에 동의를 구하려고 주위에 움츠리고 섰는 장교들을 둘러보았다.
사실 작전 장교의 오른손은 권총 가까이에 멈춰 있었던 것이다.
"네? 권총요?"
작전 장교는 무의식중에 권총을 잡아 보고 아니라는 듯이 얼른 손을 떼었다.
"아, 저 새끼가 나를 쏘려고 하는구나. 저 새끼를 붙들어 ! 붙들란 말야. 이건 무시 못할 하극상인데."
그 우스운 작전 장교의 꼴에 공포감을 느낀 장군은 이렇게 외치더니, 후딱 몸을 돌려 허둥지둥 천막 밖으로 나가다가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정 중위와 딱 맞닥뜨렸다,
"으흐흐. "
흠칫 놀랐던 장군은 그것이 정 중위인 것을 알자, 공포를 사그러뜨리려는 것인지, 또한 안도의 한숨인지 울음소리와 같은 웃음을 흘렸다.
정 중위도 장군만큼이나 당황했다. 그래서 몸을 잔뜩 긴장하고서 부동자세로 경례를 붙였다.
"정 호영 중위, 연대로부터 방금 도착했습니다. "
얼이 빠진 듯 그를 올려다보고 있던 장군은 새삼 자신의 위치로 되돌아온 듯 다시 얼굴을 굳혀 갔다.
"어, 잘 왔어. 내 천막으로 와."
천막 안에서 두 사람이 대면하자, 장군은 목소리를 낮추어 은근히 접근해 갔다.
"지금 부대가 엉망이다. 자네를 부른 것은 나를 보좌하는데 측근이 되어 달래기 위해서란 말야. 육백산 고지에는 대대장이 위치하고 이 친구가 태만을 부리고 있는지 나에 대한 감정이 어떤지 따위를 잘 감시하고 내게 보고해 달라는 것이다. 정확한 위치를 작전 장교에게 물어서 내일 아침에 출발하도록 해. 알지? 지난번 진급을 하기 위한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나는 이 운동을 중단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게. 운동에는 체조가 있는가 하면 축구도 있다는 것을 알란 말야."
장군은 회심의 미소를 띠고 정 중위의 어깨를 쳤다.
"자넨 명목상으로 거기에 가 있는 작전 보좌관 놈과 교대를 하면 되는 거야."
"거긴 꽤나 추을 겁니더."
"춥기야 하겠지. 그러나 이 나의 심복으로서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그까짓 추위쯤이야 별것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그 시간부터 정 중위의 1천 2백 고지의 등산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장군의 의도와는 달리 고릴라 정 중위는 그의 심복으로서가 아니라 대대장을 측은히 여기는 한 장교로서 대대장을 만나야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날 오후의 하늘은 심상치 않게 구름이 끼더니 저녁부터 눈이 흩뿌리기 시작했다.
"수고하십시오."
하고 짚차에서 내리자 운전병은 정 중위에게 경례를 붙였다. 그리고 차는 눈발을 헤치고 오던 길을 되돌아 사라졌다.
눈이 내리면 날씨는 오히려 포근하련만 바람이 몹시 휘몰아치고 있었으므로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대기는 차가웠다, 덜커덩거리는 차 안에서 지도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을 때는 OP로 가는 지름길을 곧 알 수 있을 것 같았으나, 막상 차에서 내리니까 갈피를 잡기다 어려웠다. 이미 시간은 정오가 훨씬 넘어 있었다.
지도는 오로지 능선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지도의 등고선은 고구마 형태로 길게 북쪽으로 뻗어 있고 등고선이 서로 맞붙을 만큼 좁았다. 사이사이에 깊은 계곡이 있고, 가는 길의 양쪽은 절벽이어서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절벽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 갈 것 같았다. 세 개의 계곡을 넘은 북쪽 끝은 역시 절벽으로서 그것은 OP가 있는 고지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가 차에서 내린 지점과 OP와의 직선 거리는 4킬로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나, 실제 도달 하자면 그 세 배의 거리를 걸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날이 어둡기 전에 도착하리라는 기대가 점점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산 속을 걷기 시작했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으므로, 계속 산을 오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졌다.
"똥파리, 개새끼 ! "
하는 욕지거리로 그는 위로를 삼는 것이었으나, 결국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눈발에 가리운 산의 형체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때때로 그의 길을 가로막는 절벽이 죽음의 함정처럼 그를 공포로 몰아갔다.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날로 OP에 도착하겠다는 계획을 포기했다. 배낭에서 삽을 꺼내 땅을 파고 반 쪽짜리 천막을 쳤다. 그리고는 모포로 몸을 감고. 구덩이 속에 웅크리고 살갗 속으로 파고드는 매서운 추위를 의식하며 잠을 자는 등 마는 등 밤을 넘겼다.
새벽이 되었을 때 천막을 들쳐 보니 눈은 그쳐 있었다. 그러나 그대로 더 있다가는 얼어 죽을 것 같아 그는 다시 배낭을 꾸려 짊어졌다. 이제는 산봉우리와 절벽이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으나 고지로 오르는 지형이 뚜렷하게 그의 뇌리에 들어와 박혔고, 그는 걸음을 재촉 했다. 정 중위가 맑은 햇볕을 받으며 한 명의 보초병이 고지 위에서 추위를 떨쳐 버리려고 총을 어깨 위로 올리며 집총 체조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그의 손목시계가 8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곧 두 개의 개인용 천막이 나타났다. 보초병은 그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까지도 그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훈련이 시작되고 그 보초병은 한번도 물을 찍어 바르지 않은 것처럼 얼굴은 더러웠고, 눈꼬리에는 눈물 찌꺼기로 된 눈꼽이 끼어 있었다, 그는 정 중위가 바로 앞에 나타나자 놀랐던지 총을 들이대고 소리질렀으나 곧 고릴라 정 중위라는 것을 알고 총을 내렸다.
"여기가지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십니다."
그렇다. 적어도 어제 오후부터 지금까지 내내 이곳을 향해 왔으니까. 그런데 정 중위가 대대장에게 신고했을 때, 그에게서도 보초병과 조금도 다름없는 초라하고 더러운 모습을 그는 보았던 것이다.
"이곳에는 장교라고는 자네와 나뿐, 작전 보좌판도 연락 받고 어제 내려갔어. 4명의 사병과 하사관 1명이 있네. 자네는 오늘부터 이들을 통솔할 책임이 있고 나를 도와서 전문을 접수하고 발송해 줘야겠네. 식량은 쌀 한 가마, 보리 한 가마, 그밖에 건빵이 50봉 있지. 우리는 최초 이곳에 와서 이틀간 건빵으로 연명했어. 이곳에서는 구명을 간청하거나 지원을 요청하거나 교대를 희망한다고 해서 꼭 그것이 이뤄지는 게 아니네. 들어주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게다가 우리는 군인이고, 군인은 명령 없이 자리를 이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
두게."
아침 햇빛이 두 개의 천막 위를 비춰 왔다. 간밤에 내린 눈이 은색으로 빛나며 차츰 그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러면 그곳에는 조직의, 군대의 빛깔이 정 중위나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대대장은 천막 앞에서 해를 향해 팔과 어깨와 다리 운동을 했다. 그리고 또 말했다.
"정 중위, 군대란 인간을 움직이고 있거든. 아주 평범한 그리고 상식적인 이야기로 들리겠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군대는 인간이 만든 거지. 모순이 있어. 자네가 별을 달고 부대 안을 횡행했다는 사실도 따지고 보면 자네와 군대와의 부조화에서 오는 것일 꺼야. 그러나 자기 존재를 합리화시키기 위해서는 조화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조화 없이는 아무 데도 생존의 거처는 없다고 보는데, 군대를 떠났다 해도 그보다 더 큰 사회에 소속하게 되니까. 우리는 종종 신문에서 읽고 있지. 무엇인가에 부대끼고 있는 인간들을, 어디론가 떠밀려 다 니는 인간들을. 그러다가 지치면 자살이라는 방편으로 자멸해 버리는 인간들을."
그는 천막 안으로 얼굴을 디밀었다가 면도칼을 들고 나왔다. 그의 얼굴은 차가운 대기 속에서 불그레 상기되어 있었다.
"그럼 어떻게 조화를 찾습니까 ? 부조화의 결과는 조직을 다스리는 인간에게 자비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하고 있는 사람의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꺼."
"자네는 신을 믿나, 신을? 안 믿고 있을 거야."
"믿지 않습니더."
"합리화와 조화를 갖기 위해서는 신을 믿어야 하네."
"신은 불행한 인간들이 만들어 낸 도덕률의 구속자일 뿐이라 생각하는데됴. 조직과 같은 것입니더. 조직처럼 인간을 타락시키고 있습니더. "
"너무 비약하고 있군. 생각에 체계가 없으면 비약할 수밖에 없어, 자, 일을 시작해 볼까."
대대장은 덥수룩히 자란 수염을 비누칠도 하지 않고 버석버석 밀어냈다
그런데 대대장이 무전기 앞에서 그날 오후 눈물을 홀리는 것을 정 중위는 목격하고 말았다. 왜 눈물을 흘려야 했을까, 왜? 밖에는 바람이 몰아치고, 천막은 단단히 지주 핀과 소나무 가지에 연결했는데도 펄럭거렸다. 밖에는 한 명의 보초병이 이따금 발이 시려웠던지 발을 구르는 소리가 퉁퉁대며 정 중위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땅을 울리고는 했다, 무전기에는 여전히 리빠똥 장군의 발악이 그치지 않고 있었다, 대대장은 더 이상 답변할 것이 없었다. 들리는 말로 미뤄 보아 장군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대대장은 무전에서 떨어져 벌렁 모포 위에 누웠다. 펄럭거리는 천막을 올려다보는 그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는 감정을 억제치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제 오전까지 연락되던 대대의 일부 수색 부대가 동쪽으로 전진하자 오후부터 두절됐다. 그런데다 사단장은 작전 수행에 차질이 있다고 호통을 쳐왔던 것이다. 리빠똥 장군은 대대장을 불렀다. 그러나 대대장으로서는 어제 오전까지의 상황만 되풀이할 수 있었을 뿐, 떨어져 나간 수색대의 상황을 알릴 수가 없었다. 장군은 갖은 욕지거리로 대대장에게 모욕을 주었다. 그것이 오후 내내 계속된 것이다.
대대장은 마지막으로 이런 문구를 받고 말았다.
"어떻게 하든 연락을 취하라. 이 명령을 불이행시는 귀관을 포 사격으로 뭉개 버리겠다. 귀관은 OP의 임무를 망각하고 있다. 자네는 하이킹을 하고 있는 것이 아냐. 자네를 대신해서 이곳에 나와 내가 고생하고 있는 것을 안다면 나를 배신할 수 있는가? 이 바보 같은 놈
아. 연대장."
대대장의 흐느끼던 소리가 멎고 다시 바람소리와 보초병의 이따금 발 구르는 소리만이 들려 왔다.
7
"대대장님?"
정 중위가 침묵을 깼다. 대대장은 얼굴을 들고 그를 보았다.
"까짓거 아무렇게나 생각합시더. 운이 좋으면 교신이 될 거 아닙니꺼."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릴 때까지 대대장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촛불이 펄럭거렸다. 추위 속에서 그들에게 희망이라고는 없었다. 방한모를 쓰고 있었음에도 목덜미에 한기를 느꼈다. 발은 점점 더 얼어 오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피의 순환은 정지한 것 같았다. 몸이 그대로 석고처럼 얼어붙는 것 같았다. 따라서 마음에도 인간에 향한 따뜻함이 없었다, 리빠똥 장군의 지시에 따라 이 두 명의 장교는 이제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몰아치는 산중에서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와 같은 공포가 쉬임 없이 엄습해 오고 있었다, 다시는 날이 밝지 않고 영원한 어둠 가운데서 이 고지의 장병들은 망각되는 것인지도 모르는 두려움이 앞섰다.
"결코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 무언가 이루고야 말겠어. 한번 시도해 볼 만한 일이 남아 있다, 정 중위."
대대장은 천막 문을 헤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무전기를 밖으로 끌어냈다.
"여기보다 더 높은 고지가 꼭 하나 있네. 마봉산 고지다. 거기로 올라가지. 자네는 통신 하사에게 이 OP를 이동시키도록 지시하고, 사병 하나를 우리와 동행시켜 먼저 떠나자."
정 중위는 통신 하사관에게 천막을 꾸리고 곧 따라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세 명의 사나이는 곧 길을 떠났다. 그 고지는 맞바라보며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으나 깊숙한 계곡을 하나 건너야 했다. 바람이 산정으로부터 사납게 몰아쳤다. 길은 미끄럽고 때때로 끊기고는 했다. 그들은 바로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무전기를 짊어진 김 병장은 가운데서 앞에 가는 대대장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려고 걸음을 빨리 하다가 비탈길에 주저앉고는 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에서 눈꽃이 떨어졌다.
산은 아무리 걸어도 막아서는 장벽과 같았다. 정 중위는 다리를 떼어 놓을 때마다 시간과 관계없이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다만 허위적거리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었다. 어느 산에선지 짐승의 울부짖음이 메아리 되어 계곡을 울리고 있었다. 처음에 그 소리는 맞은편 산에서 시작되는 것 같았는데, 뒤에서 울리고, 그것은 사방에서 짐승들이 합창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짐승들은 인간들의 움직임에 대하여 민첩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저놈들은 잠도 자지 않는 모양이죠? "
숨이 차는지 헉헉거리며 가던 김 병장이 얼굴을 돌려 느닷없이 지껄였다.
"저놈들에게도 리빠똥 장군 같은 놈이 있어 잠을 자지 못하게 들볶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구먼."
다시 침묵. 대대장은 때때로 걸음을 멈추고 플래시로 지도를 비추어 보았다. 그럴 때 언뜻 어둠 속에 떠오르는 그의 얼굴은 이상하게 창백했다. 더러운 몰골 위에 창백한 빛이 덮여 있는 것이다. 키는 컸으나 여자와 같이 가냘픈 얼굴의 선. 그런데 그 모습 안에 불굴의 의 지가 깃들여 있었다. 그것은 절망에서 자기 자신을 시험해 보려는 안간힘이랄까, 그런 것을 정 중위는 보았다.
"대대장님, 왜 고생을 사서 합니꺼."
"고생? 이따위를 고생이라고 생각하나? 적어도 나는 연대장보다 현련명해지려는 것뿐이야. 나는 실제로 이런 훈련에서 내 부대를 마음대로 움직여 보지 못한 지휘관야. 말하자면 대대장이 대대의 OP장교를 하고 있다면 누구든지 웃어 버리고 말겠지. 그러나 나는 연대장 을 이기고 말겠다."
계곡에 다 내려갔을 때, 그들은 가시덤불의 덩굴 속을 헤쳐 가고 있었다. 양 기슭으로부터 덩굴이 개울의 하늘을 덮고 있어 전진하기가 힘들었다.
"자네는 별을 달고 피에로 짓을 했지만, 나는 격하된 피에로라네. 결과적으로 자네가 훨씬 능력 있는 피에로인지 모르겠어. 나는 연대장이 자네를 보낸 이유를 알 듯하네. 그러나 나는 사관 학교에서 의지를 배웠지. 의지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의 몸뚱어리와 정신이라는 게 무언가? 이것들은 모두 의지에 의해 지배되고 있어. 의지는 인간 위에 존재하고 있단 거야. 자네와 내가 다른 것은 이런 점이겠지. 자네는 어떤 힘,,,,,, 겨우 리빠똥 장군의 힘에 의해서 부대끼다가 자기를 절망 상태로 끌어내리고 어쩌면 파멸해 버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지가 않아. 나는 굴욕 속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마음이 있다네. ,,,,,,이와 같은 넝쿨이 저 산정 위까지 뻗어 있어 나의 몸뚱어리가 갈기갈기 찢어진다 해도 나는 기어코 저 위까지 올라가는 거야. "
"그렇다면 왜 우셨습니꺼?"
"그건 나에 대한 울음이지. 그것은 나를 연약하게 한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의 강심제가 됐어."
"저에게 무엇인가 가르치고 있으신 것 같은데요! 대대장님. 대대장님은 오류를 범하시고 있습니더, 제가 대대장님의 행동을 염탐하기 위해 보내진 건 장군의 힘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조직의 힘인 것입니다. 대대장님의 의지나 저의 피에로에의 타락은 인간과 조직과의 싸움에서 비롯되는 하나의 투쟁 방법이 아닙니꺼?"
"그것이 누구의 힘이건 나를 꺾을 수는 없다. 자네는 조직의 힘이라고 하지만, 그렇다면 연대장이란 인간을 무시할 수 있나?"
대대장은 덩굴 숲을 빠져나가 바위 위에서 손을 아래로 내밀고 김 병장을 끌어올리면서 중얼거렸다. 세 사나이는 이제부터 산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올라가고 있는 곳은 비바람에 쪼개져 나간 돌멩이들이 뒹굴고 있어 발을 디딜 때마다 계곡 아래로 룰러 내려갔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별이 총총했다. 그들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 걷고 있었으나, 피로한 줄 몰랐다. 정 중위는 계곡으로 굴러가는 돌멩이 소리를 들으며 자연에 대한 두려움에 가끔 숨소리를 죽였다. 그것은 차츰 인간에 대한 두려움으로 변해갔다. 착실한 것은 월남의 숲 속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착각에 사로잡혔다.
갑자기 숲 속에서 일발의 총성이 들려 왔었다. 소대원들은 납작 엎드렸다. 당시 정 중위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숲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음흉스러운 암흑뿐이었다, 그 암흑 속에서 누군가 총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그때 그가 엎드리고 있는 땅 위에서 기어올랐는지, 나뭇잎에서 떨어졌는지 한 마리의 콩알만한 갑충이 팔뚝 위를 스멀거리며 기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생각에 잠겨 갔다.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생각이었다. 그는 소대원들에게 무엇을 지시하고 이 위험 속을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하는지를 머리에 그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절망에 관한 것이었다. 갑충이 이 사태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절망했다면 꼼짝도 않고 나처럼 엎드려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갑충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필연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당하는 인간과의 경험에서 갑충은 절망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갑충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절망하고 싶어도 절망할 줄 모르는 갑충. 이 벌레에게는 신일 수도 있는 나는 이 벌레를 대견하게 여겨야만 할 것이다. 그는 또 생각했다. 가령 인간에게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생명을 노리는 이 함정에서 빠져나가야만 한다. 그래야지만 신은 나를 대견스럽게 생각할 것이 아닌가.
갑자기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다. 그리고 이쪽에서도 누군가 응사하고 있었다. 그는 절망 상태에서 무기력해 있었다. 날이 밝아 왔다. 총소리가 사라지고, 적이 숲 속으로 자취를 감춘 후에 그는 엎드렸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목시계의 침은 OP의 천막을 떠나온 지 두 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정 중위는 뒤를 따라가며 여전히 생각했다. 세 명의 부하를 잃고, 그는 항상 전투 때마다 절망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절망감은 마침내 노이로제 증세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그는 지금도 왜 별을 달고 리빠똥 장군 앞에 시위하려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어떤 대상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그 나름대로의 우연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으나 아무래도 자신이 정상적인 일간이 아니라는 느낌이 어렴풋이 들고는 했다. 갑충의 탈출 위협에로 도전하려는 힘은 그에게 전혀 없었다.
그는 조직을 운영하는 리빠똥 장군, 아니 보직에 부대끼는 리빠똥 장군이라는 미친 신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한 마리의 갑충이라는 절망감이 들었다. 그러자 대대장의 의지가 차츰 부러워졌다.
8
"소주를 가지고 오라는데 윌 꾸물거리고 있는 건가?"
리빠똥 장군은 벌써 네 번째 이 말을 되풀이해서 외쳐 대고 있었다. 대대 CP천막 안에는 일일 초과분으로 가지고 온 경유가 방금 도착해서 난로는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주위에는 작전 장교를 비롯해서 대대 전 참모와 특과 부대의 포병 장교가 둘러서 있었다.
그 가운데 리빠똥 장군은 계급장도 없는 방한복을 걸치고 앉아서 곧 터질 것 같은 울화통을 겨우 누르고 난로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는 오늘 내내 사단장으로부터 상황 보고를 하지 않는다고 욕을 들은 데다 훈련 상황을 둘러보기 위해 나온 군단장으로부터 '형편없는 지휘관'이라는 딱지를 받고 보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의 판단으로는 모든 원인이 예하 부대와 무전교신을 하지 못하고 있는 대대장 송 중령에게 있다고 여기고, 책임을 자기보다는 대대장에게 있음을 주지시키려고 했으나, 그럴수록 상관들은 그를 무능한 지휘관이라고 일침을 놓았던 것이다.
"개새끼, 어디 보자."
그가 이렇게 중얼거렸을 때, 전령이 통조림과 2홉들이 소주 두 병을 가지고 들어왔다.
"음."
그는 신음소리를 한번 내고 전령을 힐끗 돌아다보았다.
"주보병의 위치가 어딘데 이렇게 늦었어? 주보란 항상 지휘관의 위치와 같이 있어야 하는 거야."
이렇게 일갈한 그는 캔틴컵에 따라 주는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했다. 그는 계속 술을 들어 한 병을 다 마시더니, 나머지 병은 건너다보지도 않고 작전 장교를 불렀다.
"자네는 지금 대대장의 참모가 아니라 내 참모야. 지금부터 나의 명렁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작전 장교는 무슨 소리가 나올까 해서 두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멍청하니 서 있지 말고 내게 가까이 와."
그리고 그는 소주 한 병으로 돈 취기에 의자에서 일어나 약간 다리를 휘청거리며 상황판 앞으로 다가갔다.
"자네OP가 위치한 지점을 지적해 보게, 옳지, 옳지. 맞았어."
장군은 기특하다는 듯이 작전 장교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현 CP의 위치, 그렇지. 됐어. 자넨 물러나 있게. 다음 포병 장교 이리 와."
포병에서 차견된 젊은 오 중위가 성큼 한 발 나섰다. 그는 이 부대에 파견되기 전만 해도 리빠똥 장군의 명성은 잘 듣고 있었지만 그와의 대면은 신고 이후 두 번째인지라 공포감부터 먼저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겉으론 패기에 찬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마음속은 마구 떨려 왔다. 장교들은 그의 마음속을 자신의 그 속을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그것을 자신들도 경험했던 탓이다.
"보다시피 이곳이 대대 OF,또 여기가CP, 그러면 자네 포병이 위치한 곳은 어딘가?"
"여깁니다."
오 중위는 CP보다 좀 후방에 그려진 포병 부대 표지를 가리켰다.
"됐어. 지금부터 포 사격 제원을 산출해 내게."
"네."
오 중위뿐만 아니라 일동은 아연 긴장해졌다. 그런 장교들의 표정을 미리 알고나 있었던 듯 리빠똥 장군은 보일 듯 말 듯 조소를 흘렸다.
"목표는 어딥니까?"
"이런 우라질 놈. 어디긴 어딘가. OP야!"
장군은 두 주먹을 오 중위의 눈앞에 들어올리고 악을 썼다, 오 중위는 입을 딱 벌리고 공포에 잠긴 눈으로 장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거긴, 거기엔,,,,,대대장님이 있지 않습니까?"
"이 새끼 ! 그걸 누가 모르나!"
마침내 장군의 지휘봉이 오 중위의 철모 위에 획 날아들었다. 오 중위는 이미 사시나무 흔들리듯 오들오들 전신을 떨고 있었다. 다음 무엇인가 결심했는지 얼굴을 돌려 장교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사격 명령이 떨어진 것은 아니니, 우선 제원을 산출하는 것을 용서 바랍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되받는 것은 장교들이 아니라 장군이었다.
"이건 돌아도 무지무지하게 돌았군. 지휘관은 나야. 참모들이 아니란 말야,"
오 중위는 상황판으로 다가서서 삼각자로 거리를 재고 포킷에서 제원표를 꺼내 탄종 별에 따른 제원을 하나하나 기록해 갔다. 모두 오 중위의 행동을 마음속에 새기듯 뚫어지게 바라보며 드디어 오 중위의 입이 열릴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연대장님 1백 5밀리 포로써는 겨우 최대 사거리로 쏘아야 도달할 것 같습니다. 거리가 멀고 산의 지형이 고르지 않아 명중률은 희박합니다."
"그래 ,,,,,,"
장군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땅을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거짓은 아니겠지?"
오 중위는 제원은 틀림없다고 대답하고 사각(射角)도 곁들여 설명했다.
"됐어. 그리고 통신관?"
"넷!"
"대대장 그놈은 아직도 예하 부대와 연락을 못 취하고 있나?"
"네, 그렇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몇 시간 전부터 이곳에 아무 연락도 없이 대대장님과의 통신마저 두절되고 말았습니다. "
"뭐라고? 개새끼가 잠만 자고 있단 말야? 이젠 부를 필요도 없다. 포병 장교, 사격 명령을 내려!"
장교들은 리빠똥 장군이 미쳐 간다고 생각했다. 그 뒤처리는 미뤄 놓더라도 당장 몇 명의 인명이 포탄에 날아갈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이 미친 행동을 제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판단을 대표해서 앞으로 나선 것은 작전 장교였다.
"연대장님! 사격했다가는 큰일입니다. 사람이 죽습니다,"
"이 새끼가 반역하는가?"
꽥 소리지르고 동시에 장군은 권총을 뽑아 들었다,
“내가 오늘 당한 것을 모두 보았겠지? 나를 모반하여 전부터 모함하고 다닌 놈이 누군지 아는가? 나를 파멸로 몰아넣은 놈이 누군지 아는가? 여기에 답변하지 못하는 놈은 잠자코 있으란 말야. 주둥아리를 까불면 죽인다."
"그렇지만 연대장님께서는 대대장은 그렇더라도 거기에 정훈관 정 중위가 어제 올라가지 않았습니까?"
"흠, 정 중위, 고릴라 말인가. 그놈은 희생당하는 거야. 군대에서 그따위 해이한 정신을 가진 놈은 사라져도 밑질 것 없어. 너도 이젠 입을 다물어. 알겠나?"
작전 장교는 권총 앞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오 중위, 명령 내려!"
오 중위는 전화통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좀 전처럼 그렇게 떨고 있지는 않았다. 적어도 사람이 죽으리라고 생각지는 않는 것 같았다.
"감마? 여기 알파다. 사격 명령. 목표---"
장교들은 그의 음성이 실감나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잔소리하지 마라. 선임하사관, 자네의 책임은 내가 진다. 자네가 찾은 대로 목표는 OP가 맞다."
그리고 얼마 후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사격 준비 완료."
오 중위는 다시 확인하려는 듯이 장군을 바라보았다. 리빠똥 장군의 두꺼비와 같이 비죽 내민 입이 씰룩했다. 그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천막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육백산 고지 위를 바라보았다. 흰눈이 덮인 산야에 바람이 나뭇가지를 울리며 휘몰아치고 있었다.
바람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죽음과 같은 정적이 주위를 휩싸고 있었다. 그 대지 위에 작달막한 키를 세우고 리빠똥 장군은 미친 사람처럼 소리쳤다.
"사격 개시 ! "
오 중위는 전화통을 입에 댄 채 그 명령을 되받았다.
"사격 개시! 제 1탄."
그 순간 적막을 깨뜨리는 발사 포성이 들리더니 육백산 고지 어디쯤에 불빛이 번쩍 하고 얼마 후에 폭발음이 은은히 산곡을 울렸다. 그리고 다시 정적이 찾아 들었다.
“계속 쏴!"
장군이 또 외쳤다.
"제 2탄."
“제 3탄,,,,,,"
오 중위는 1탄이 발사된 후 이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 다른 장교들과 CP의 병사들은 천막 밖으로 뛰어나와 리빠똥 장군이 권총을 휘두르며 발악하는 모습과 산정의 불빛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오 중위는 천막 안의 무전기에서 무슨 소린가 들려 오고 있음을 느꼈으나 그로서는 아무런 사고도 구사할 수가 없었다. 밖에 나간 장병들은 더구나 그 무전기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알파, 알파. 여기는 부라보. 감 잡고 나와라. 알파, 알파, 육백산에 터지는 정체 불명의 포탄에 대해서 확인해 주라. 알파, 알파, 부라보는 육백산보다 더 높은 고지를 점령하여 방금 동쪽에 위치하여 수색하던 촬리 중대와 교신에 성공했다, 알파, 알파, 이 사실을 CP장 에게 알려라. 알파, 알파, 나와라."
그리고 무전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욕지거리가 흘러 나왔다.
"똥파리 개새끼야, 여기는 부라보. 느그들 모두 뒈졌구나."
그것은 정 중위의 음성이었으나, 이윽고 무전기의 가느다란 외침은 들어가고 말았다. 그래서 아무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9
겨울 날씨치고는 유난히도 포근한 1월 하순의 어느 날 오전, 연대장실 앞에 짚차 한 대가 와서 멎었다. 문이 열리고 서류 뭉치를 옆에 낀 한 새파랗게 젊은 대위가 내렸다. 그는 여유 있는 태도로 연병장을 둘러보고, 연대장실로 들어가는 입구의 부대 간판을 올려다보더니 천천히 발을 옮겼다. 안경을 걸친 그의 얼굴은 무척 창백하게 보였으나, 무엇인가 규명해 내려는 듯이 두 눈만은 또렷이 빛나고 있었다. 그의 목깃에 달린 배지는 그가 법무관이란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짚차 소리를 듣고 연대 선임하사관이 허겁지겁 뛰어나와서 경례를 붙였다. 그 대위는 선임하사관에 흘깃 눈길을 주고 나서 연대장실 도어 쪽으로 곧장 걸어가면서 말했다.
"물론 계시겠지요?"
"네,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는 노크도 없이 도어를 쓱 열어젖혔다.
"법무 참모실에 근무하는 장 운철 대위입니다."
하고 그 법무관은 조금은 시껍지 않다는 말투로 자기를 소개했다
리빠똥 장군은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장군의 눈은 벌겋게 충혈 되었다. 그의 입술과 두 손은 눈에 보일 만큼 떨고 있었다. 그는 그 자신 떨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던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두 손에 힘을 주고 테이블을 꾹 눌렀다
"거기 앉으시오."
장군은 눈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장 대위는 의자에 앉자 여유를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연대장님께서는 오늘 제가 온 목적을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만, 요지를 말하자면 바로 이렇습니다. 에, 육백산 훈련 당시 대대장과 정 중위가 있던 OP를 타깃으로 정하고 포를 쏘아 대었다는 사실이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사건으로 대두되었다는 것입니다. 본인들과 사단장님은 없었던 일로 덮어두자고 하지만, 띠 사실은 이미 군단에서 알고 조사할 것을 지시해 왔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로서 우리 조직이 지닌 병폐의 한 측면을 드러낸 것이라는 말입니다. 좀 가혹한 말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연대장님을 병원체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오들 저의 질문도 이러한 전제를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 테두리에서 벗어나지는 않겠습니다. 그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 대위는 리빠똥 장군을 바라보았다. 그는 입을 꽉 다물고 뿌루퉁한 표정으로 붉은 에나멜칠을 한 방바닥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좋소, 그 건에 대해서는 좀 과한 행동을 했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지만, 아직도 나는 정당하다고 믿고 있소. 내가 20여 년간 익혀 온 상식으로는, 군대란 어디까지나 지휘관 위주의 군대여야 한다는 말이오. 부하를 위한 서 푼어치 동정보다는 지휘관은 결정한 바를 행동에 옮기는 것만이, 그리하여 먼저 승리하는 길만이 오직 국가를 위한 충성이란 말이오. 군대 조직은 단순히 국가 이익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니까,,,,,, 여하튼 좋소. 어서 질문하시오."
서류를 들척거러며 조용히 듣고 있던 장 대위는 얼굴을 들고 리빠똥 장군의 얼굴 위에 눈길을 꽂았다.
"자신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첫 질문부터 장 대위는 장군을 조롱할 심산인 듯이 보였다. 그러한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장군은 처음 어리둥절한 듯이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럼. 나는 정상적이야."
그러나 이렇게 대답하고 나니까 뭔가 퍼뜩 짚여 왔다. 별을 달고 연대를 누비고 다니던 정 중위에게 자네 미쳤느냐고 물어보았던 일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정 중위가 자기에게 당했던 것처럼 꼭 그런 위치에서 꼭 같은 질문을 자신이 받고 있구나 하는 슬픈 감정이 솟아 올랐다. 다음, 화가 불끈 치솟았다.
"아니, 자네 장 대위 말야, 나를 미친놈으로 취급하는가?"
"그것은 병원에서 진단할 것이지만 워낙 사건이 상식 밖의 일이라서 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신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건 그렇고, 왜 포 사격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까?"
"그건 뻔하오. 중령 계급장을 단 장교가 통신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연락도 취하지 못하니 말이오."
"중령과 통신기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가령 연대장님께서 그곳에 있었다면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글세--- 불가능했을지도 모르나, 요는 지휘관이란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부하를 혹사할 수도 있소. 나의 지휘관이 그것을 요구했다면 나는 깨끗이 당하겠소."
"부하를 채찍질하기 위해서 다른 방법을 놓아두고 포사까지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사실은 상관에게 불만을 품고 부하에게 화풀이한 독재적 광포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연대 장교들에게 알아본 바에 의하면, 연대장님은 그런 성격을 띤 대표적 인물이라는 인증이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영내에서는, 지휘관이란 현명한 군주가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해 왔으니까, 장 대위가 말한 가운데 광포성이란 말만 들어가지 않았다면 만족하겠는데...."
"그렇다면 연대장님은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리빠똥 장군은 순간 얼굴의 근육을 씰룩거리며 찡그렸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현명이라, 현명이라......"
이번에는 장 대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그는 그가 찾아올 때 지니고 온 임무의 한 가닥 실오라기를 풀어놓았다.
"광포성이 아니라면,,,,,,"
장군은 웃음을 딱 그쳤다
"뭔가?"
"정상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해 주셔야겠습니다."
"정상적이 아니라는 것이나 광포성이나 모두 정상적이 아니지 않소?"
리빠똥 장군은 떨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장 대위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장군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장 대위의 얼굴 앞에 그의 코끝을 들이대고 다그쳤다.
"내가 미쳐 있음을 자공(自供)하란 말인가? 모두들 그것을 요구하고 있단 말인가."
"짐작하셨군요. 20여 년 동안 오로지 군 생활에 몸을 바쳐 온 연대장님을 군재에 회부하느니, 차라리 정신 이상자로 가정하여 차제에 군대를 떠나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군재에서는 당연히 연대장님이 불리합니다. 병원에서 몸을 쉬시다가 적당한 때에 떠나 주시는 것입니다. 죄송한 말입니다만 어쩌면 연대장님은 가벼운 노이로제 증상을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장 대위는 안경을 고쳐 쓰고 장군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띠는가 살펴보았다. 이제 장군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펴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장군의 두 눈에 눈물이 얼른 비쳤다.
"나는 아직도 내가 옳았다고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그것만 인정하면 된다는 말이지? 좋소. 이젠 더 이상 변명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아니 꼭 한마디만 말하겠소. 티껍고 더러운 개새끼들이 우글우글한 데, 왜 내가 걸려들어야 하는지,,,,,, 내가 나빴더라도 그것은 내가 군대에서 배워온 대로 행동했기 때문이야. 군대가 나를 이 꼴로 만들었다는 것이오. 어느 면에서는 권모술수를 몰랐던 너무나 순진한 기계처럼 일을 해 왔기 때문이오. 그리고 일정한 궤도 안에서 그 순리만을 좇아왔던 나는 인간성을 하나하나 빼앗겨 버린 것이오. 좋소, 내가 미친 것을 자인하더라고 가서 보고하시오."
"감사합니다.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
이내 장 대위는 일어섰다. 그의 태도는 처음의 인상처럼 건방졌고, 항상 무엇인가 찾아내려는 듯이 두 눈을 빛내고 있었으며, 자기의 소임이 무사히 끝났음을 심히 만족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리빠똥 장군은 육백산 포 사격 사건 이후 즉시 지휘권을 대대장에게 넘기고 사단장에게 불려가 호통을 받았고, 때때로 여러 장교들에게서 비난의 소리를 들어 왔지만 이렇게 쉽사리 몰락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수송반 쪽에는 모처럼 따스한 날을 맞아 차를 정비하느라고 병사들이 부산히 움직이고 있었다.
육백산에서의 그 훈련이 끝나고 송 중령의 대대가 돌아온 것도 한 달이 지나 있었던 것이다.
10
장군이 정신 병원으로 후송되고 당분간 연대는 부연대장이 지휘하고 있었다. 연대의 장사병들은 폭군이 사라졌음을 기뻐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그 인간에 대해 일말의 동정을 아끼지 않는 축들도 있었다.
그래서 연대의 전체 분위기는 착잡한 쪽에 기울고 있었다. 이러한 낌새를 알아차린 상부에서는 곧 새로운 지휘관이 부임하리라는 언질과 함께 송 중령의 대대에 대해 훈련기간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금일봉을 전달해 왔다.
리빠똥 장군이 그 사건 이후 시달림을 받고 있는 동안 송 중령이나 연대 본부의 정 중위는 화제의 인물이 되고 있었다. 그 OP위치를 떠난 이후에 포탄이 날아갔다는 기적과 같은 신기성을 떠벌렸고, 그 불굴의 투지로 육백산보다 더 높은 정상을 정복하여 교신을 할 수 있었다니 장군의 악의에 비하면 영웅적 행동이 아니겠느냐는 칭찬이었다.
정 중위는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다소 기분이 들뜨기도 했지만 송 중령은 전혀 그런 내색을 엿보이지 않았다. 내려온 금일봉으로 약간의 떡을 빚고 막걸리를 장만하여 식당에서 대대 장병 파티를 열고 연대 참모들까지 초대했을 때에도 여전히 송 중령은 오만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만 그에게 인사하는 장교들에게 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한창 막걸리 파티가 무르익어 갈 무렵 송 중령이 초급 장교들 틈에서 술잔을 집어 들고 있는 정 중위에게 일부러 다가와서 은근한 음성으로 속삭였던 것이다.
"자네 이따가 이 파티가 끝나면 나를 좀 만나 주었으면 좋겠네."
정 중위는 어지간히 취기가 돌아 있었으므로, 끝나기 전에 먼저 돌아가 잠을 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은근한 음성 밑에 깔려 있는 어떤 강요와 같은 것을 느끼고 일찍 돌아갈 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트럼펫의 고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왜나 한다는 사병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시시덕거리는 웃음소리, 그리고 자욱한 담배 연기가 식당 안을 꽉 메운 그 속에서 두어 시간이 지나자 장교들은 하나 둘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대 선임하사관이 밴드 단원들을 인솔하여 식당을 나갔을 때, 송 중령은 저쪽 끝에,
정 중위는 이쪽 끝에 서서 술잔을 들고 서로의 얼굴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열려진 문으로 밤의 차디찬 대기가 스며들고 난로 불은 꺼져 가고 있었다.
"이리 좀 오게."
그 소리는 정 중위가 듣기에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있다고 여겨졌다. 고릴라 정 중위는 뚜벅뚜벅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웬일이십니까?"
하고 그는 우선 씩 웃었다
"자네 요즘 기분이 좋겠지?"
송 중령이 물었다.
"모든 게 다 대대장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더."
"그럴까? 나는 장군의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장군이라면 리빠똥 장군 말인가요?"
"그래."
그들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송 중령은 텅 빈 술잔을 하나 들어 술을 따라 권했다.
"그는 어떤 면에서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스승과 같으니까."
"무엇을 배우셨습니까?"
"그의 통솔 방법이야. "
"네?"
"그가 나를 학대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 OP를 고수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도저히 교신을 가능케 할 수 없었지. 더구나 그가 나의 분노를 일으키게 하지 않았다면 자네나 나나 포탄에 희생되고 말았을 거야. 이것을 바꿔 말하면 그가 포탄을 날려보낸 것은 아직도 그 OP에서 통신기를 주물럭거리며 너희들이 꾸물거리고 있다면 맞아 죽어도 좋다는 의미가 이치겠는가?"
"그렇다면 누구에게도 인기를 얻지 못하고 손가락질을 받은 그 잔학한 통솔법이 반복된다는 말입니꺼? 아, 이건 모순인데요."
정 중위는 이렇게 외치고 두렵다는 듯이 몇 발짝 뒤로 물러섰다.
"이봐, 연극은 그만둬. 자넨 처음부터 연극을 하고 있단 말야. 자넨 장군에게 이용을 당하면서도 장군에게 반항하고 있었고, 나와 함께 있을 때에도 나에게 자네의 어떤 고뇌의 감정을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척했단 말야. 군대의 조직을 무너뜨리고 그 잘난 인간성을 복귀시키기 위해서 말야. 어림도 없는 연극이다. 장군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 나는 감정이라곤 털끝만치도 없기 때문에 합리적이면서도 더 잔인해질 수가 있지."
정 중위는 도무지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 나갈 수가 없었다.
"저는 저의 행동이 연극이라고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더. 연극일 리가 없지요. 오히려 대대장님께서 훈련 때 보여 주신 장군에 대한 저항 같은 것이 연극일 것 같습니더."
"무슨 소리를? 건방지게 시리, 자네가 별을 달고 영내를 횡행했던 것이 연극이 아니고 무엇이었나? 미친놈 소리를 들으면서도 자네는 그의 희극성을 자극시켜 여러 사람 앞에서 그를 망신시키려고 말일세. 그리고 결국 몰락시키려고 말야. 자네는 오류를 범하고 있어. 조직은 결코 자네의 뜻대로 되어 가지 않고 있네. 인간은 좀더 냉철할 필요가 있지."
정 중위는 어이가 없었다. 믿고 의지했던 한 사나이가 또 리빠똥 장군의 뒤를 이으려고 하는 것이다.
"전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하실 말씀은 그뿐입니까? "
송 중령은 담배 한 개비를 뽑아 불을 붙이고 천장에 연기를 훅 내뿜었다.
"또 있네. 우리가 이렇게 화제의 인물이 되고 있는 이상, 장군에게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나? 연대 참모들과도 의견을 나누었는데 20여 년간 군대에서 몸을 바쳐 온 그가 찾아오는 놈 하나 없이 정신 병동에 들어박혀 있다면 너무나 기구한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그를 위로해 줄 사람은 자네뿐이라고들 생각하고 있네. 연대에서 가장 신임을 받은 장교는 자네뿐이었으니까. 잘 부탁하네. 멋있는 연기를 보여 주었으면 좋겠네."
송 중령은 모자를 집어들고 식당 밖으로 나갔다. 식당에는 그 혼자였다. 한 시간 전만 하더라도 그는 리빠똥 장군의 흉을 보는 무리들 속에서 위대한 인물로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고독했다. 가만히 다시 생각해 보면 그 무리들의 칭찬은 단순한 야유였는지도 몰랐다.
'정 중위는 처음 이 부대에 전임해 올 때부터 범상하지 않더니 과연 희극적인 인물이었지.'
'그 얼굴을 보게. 고릴라 같은 인상 속에 인간적 풍자가 있었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이게 야유가 아니고 뭔가. 정 중위는 결코 '리빠똥 장군'을 이겨낼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송 중령처럼 제 2의 '리빠똥 장군'을 길러내는 데 이용을 당하고 있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날 밤 그는 그의 침실로 돌아가자 별을 두 개 꺼내 중위 계급장 대신에 그 별을 붙였다. 그리고 거을 앞에 다가서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별, 별,,,,,, 그는 월남 전선에서 죽어 간 전우를 생각했다. 그것은 계급장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으며, 한편 인간의
욕망과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최고의 권위이기도 했으며 조직을 움직이는 힘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 중위는 그 별을 증오하고 있었다. 그는 거울 속에서 소리 없이 울었다. 그는 다시 천천히 그것들을 뜯어냈다.
"대대장의 말은 내일쯤 찾아가서 위로해 주라는 뜻이겠지."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이미 그에게는 하나의 결심이 섰었던 것이다,
그는 모포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눈에는 유리창 밖 하늘의 별들이 보였다. 유리창이 때때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니 내일은 꽤 추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정 중위는 꿈을 꾸고 있었다. 연대장실의 에나멜 바닥이 서서히 액체로 변하더니 피가 되어 문 밖으로 넘쳐 흘러가는 것이었다. 정 중위는 그것을 막으려고 발버둥치다가 그 자신도 그 핏물에 휩쓸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는 소리치고 있었다
"리빠똥, 리빠똥,,,,"
11
리빠똥 장군 때문에 조금이나마 정신 병동의 맛을 보았던 정 중위가 정신병동에 입원중인 장군을 위문하러 간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송 중령이라는 타인의 요구에 의해서 취해진 행위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제 정 중위는 이 행위가 자의적
인 것으로 되어야 한다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장군을 방문함에 한 가지 목적 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야전 병원은 쓸쓸한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2층의 병원 건물은 블록으로 쌓여졌지만 제법 튼튼하게 보였다. 그러나 주위에는 몇 그루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을 뿐, 황량해서 병원 건물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정 중위는 송 중령이 빌려 줘 타고 온 짚차에서 내리자 곧바로 정신병동의 군의관실로 들어갔다.
"수고하십니다."
하고 그는 책상 앞에 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 있는 한 장교 앞으로 다가갔다. 그 장교가 얼굴을 들어 뒤로 돌아보았다.
"이거 오랜만입니다. "
먼저 알은 체를 한 것은 정 중위였다. 코 장교는 지난번 정 중위를 압박감에서 오는 가벼운 노이로제 증세를 나타내고 있을 뿐, 입원할 요건이 안 된다고 진단을 내렸던 바로 그 군의관이었기 때문이었다.
"웬일이시오? 뭐, 또 꾀병은 아니겠죠?"
"아, 아닙니다. 꾀병이라니요. 사람을 놀리시는군요."
정 중위는 너털웃음으로 얼버무리고 다시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군,,,,,,"
"장군이라뇨?"
"리빠똥 장군 말입니다."
"아, 그 환자,,,,,, 병문안 오셨습니까?"
“네."
"그 환자는 중태입니다.
"중태라고요?"
정 중위의 표정은 허풍만은 아닌 듯, 진실로 놀랍다는 기색을 띠었다.
"그렇다면 만나볼 수도 없나요?"
"뭐 그리 속단할 것은 없습니다. 피해 의식이 과도하게 발달하고 있어, 누구나 보면 저주하는 언사를 씁니다. 자기 본위로 생각했던 인간의 피해 의식이란 무서운 일면이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정 중위 같은 사람을 만나면 과히 환영할 것 같지 않습니다. 얌전할 때는 아주
얌전합니다만,,,,,,"
그는 좀 바쁜 서류를 작성하던 참인 듯 다시 펜대를 놀리기 시작했다. 그가 들려준 장군의 증세는 소문을 퍼뜨리기 위한 하나의 위장된 함정인지도 모른다고 정 중위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바쁘신가보군요?"
"예. 지금 그의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그는 앉은 채로 몸을 돌려 복도 건너편 방을 향해 소리쳤다.
"이 소위!"
곧 간호 장교 한 명이 나타났다.
"정 중위에게 김 대령의 방을 안내하지."
이 소위라 불린 간호 장교는 깡마른 얼굴에 딴에는 애교 섞인 웃음을 띠고 따라오라는 듯이 앞에 서서 군의관실을 나갔다. 그 간호 장교는 복도를 두 번이나 꺾어 가는 동안 앞에서 끼득끼득 웃고 있었다.
정 중위는 화가 나기도 하고 그런 여자의 모습이 호기심이 나기도 해서 물었다.
"뭐가 그다지도 우습소?"
"아니에요. 그저 우스워서요."
하면서도 간호 장교는 정 중위의 얼굴을 한번 올려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제기랄, 이 계집년이 내 얼굴을 보고 있군 그래.
"여깁니다."
복도 끝 방이었다. 그녀는 휙 돌아서더니 이제는 호호 제법 큰소리로 웃고 사라져 갔다. 밖에서 문을 잠그지 않은가 보았다. 정 중위는 문을 두드렸다.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또 두드렸다. 그러나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슬그머니 문을 밀었다. 열렸다, 방은 전혀 정신 병자의 그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탁자와 조그마한 소파가 중앙에 마련되어 있고 침대도 눈에 띄었다. 그리고 누구의 것인지, 언제부터 걸려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낡은 그림도 한쪽 맞은편 벽에 걸려 있었다
리빠똥 장군의 작고 똥똥한 체구가 등을 보이고 창가에 서 있었다. 그는 황막한 벌판에 눈을 던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음, 왔군. "
침묵을 깨뜨린 것은 장군이었다. 그러나 그는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네, 연대장님. 정 중위입니다."
"알고 있어, "
“……"
"저 아래 송 중령의 짚차 에서 내리는 자네의 모습을 진작부터 보았지. 왜 왔는가?"
이윽고 리빠똥 장군은 폼을 돌렸다.
그의 모습은 조금도 달라진 데가 없었다. 흰색의 가운을 걸친 그는 예전보다 훨씬 고상한 티를 발하고 있었으며, 그의 두 눈도 한결 맑아 보였다.
"어떻게 지내시는가 알고 싶었습니다."
왜 왔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정 중위는 딱히 꼬집어서 대답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리빠똥 장군의 태도는 너무나도 정중했고 사람을 압도하는 위압적인 풍모마저 지니고 있는 듯이 느껴졌으니까.
"거기 앉지."
하고 장군이 말했다. 그는 천천히 걸어와서 마주 앉았다. 그들은 말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겨울의 마지막 추위가 유리창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방안은 스팀이 돌고 있어 따뜻했다. 이렇게 장군과 마주 앉아 있으니까 역시 정 중위는 자기가 패배한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쪼인트 까기'로 유명하던 이 사람이, 자기를 미친놈으로 취급하던 이 사람이, 연병장의 조그만 사금파리마저 주워 내라던 이 사람이, 준장으로 진급하기 위해 애를 쓰던 이 사람이, 그리고 OP에다 포를 쏘아 대던 이 사람이, 마침내 정신병동의 신세를 지게 된 이 사람이, 결국은 인간적인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 같았다.
"정 중위, 자네처럼 집요한 친구는 처음 보았어."
장군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꺼?"
"끝까지 내 뒤를 쫓아오거든. 어쨌든 나는 처음부터 자네가 좋았었네. 나는 원래가 희극적인 자네를 달리 어떻게 대접할 도리가 없었네."
"그러시다면 죄송합니다만 언제부터 희극적이 되셨는가요?"
리빠똥 장군은 껄껄껄 웃었다.
"그것을 안다면 희극적으로 되지는 않았을 걸세. 확실한 것은 나나 자네나 송 중령이나 법무관이나 군의관이나 모두 머리들이 핑핑핑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야."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을 안다면 머리가 돌지 않았을 걸세."
"그건 조직 가운데서 뭔가 자꾸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글쎄, 아무래도 좋아. 이렇게 되어 버린 이상에는...... 한데 자네는 자네가 처음부터 기도했던 하나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을 거야."
"제가 뭘 기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꺼?"
"자네, 시치밀 떼지 마라."
그리고 장군은 탁자 앞으로 두꺼비 같은 얼굴을 내밀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뇌까렸다.
"내 부탁 하나 들어주겠나? "
"가능한 것이라면 여부가 있겠읍니꺼 7"
그렇게 대답했으나 그의 표정은 겁먹은 읏이 보였다
"물론 가능하지. 가능하고 말고......"
"뭡니꺼?"
"권총을 가져오게."
"권총을요?"
"놀랄 것은 없어. 모두 정해진 제스처가 아닌가?"
"아, 그건 어려울 텐데요."
"시치밀 떼지 마. 자네는 내 입에서 이 말이 나을 것을 기대해 본 적이 없나? 내 입에서 이 말이 나오지 않는다면 자네가 충동질을 하고 말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단 말이지. 리빠똥은 죽써 마땅하다고 말이지."
"그건 옛이야기입니다. 오늘은 한없는 슬픔이 앞을 서고 있읍니다."
리빠똥 장군은 정 중위의 두 어깨를 꽉 끌어쥐고 이번에는 애걸하는 어조로 호소했다.
"내가 몸바쳐 온 생의 터전은 모두 끝나 버렸어. 그리고 마누라에게서도 이혼하겠다는 내용의 편지가 왔단 말야. 나는 단순하게 내 목숨만 끊으면 된다. 자네가 권총을 제공했다는 것이 탄로 나면 신변이 위험하겠지. 하지만 권총은 내가 처음부터 지니고 들어 온 것으로 하면 되네. 권총은 연대장실 책상 가운데 서랍 안에 있네. 실탄 여섯 발과 함께. 여기 서랍 열쇠가 있으니 받아 가게."
장군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머리맡 시트 밑에서 열쇠 꾸러미를 가지고 왔다. 그 중의 다른 하나를 가리키며 이것은 연대장실 문을 여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 중위는 그것을 받았다.
그는 방을 나오자 생각했다. 일이 잘 되어 가는군.
12
밤이었다. 선임하사관이 있는 방에서는 바둑판 때리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들려 왔다. 아직 잠들을 자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살그머니 전령들이 있는 방문을 열고 얼굴을 기웃거려 보았다. 간막이가 가로막혀 서 있었기 때문에 그 안쪽에서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 크지는 않았으나 걸고는 소리가 들려 오는 것으로 보아 전령은 잠에 떨어진 것 같았다.
멀리서 보초병이 누구얏 하고 수하하는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정 중위는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왼쪽으로 돌아서면 간막이 이쪽에 연대장실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열쇠를 끼우고 틀었다. 짤카닥 하는 소리가 났지만 전령은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코를 골고 있었다. 방안은 캄캄했다. 불을 켤까 생각하다가 보초병에게 들키면 안 되겠다 싱어 그냥 더듬거리며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권총과 실탄 여섯 발은 정확히 가운데 서랍 속에 있었다. 그는 그것을 두 손에 움켜쥐고 한동안 주위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는 그것들을 가슴속에 넣었다. 다시 서랍을 잠그고, 문을 잠그고 전령이 자고 있는 간막이 앞에 이르렀을 때 잠시 멈칫거렸으나 코고는 소리는 여전히 들려 오고 있었으며, 선임 하사관실 바둑알 두드리는 소리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가 수하하는 보초병들에게 신분을 속이면서 20리 길을 뛰어 병원에 도착한 것은 새벽 한 시가 가까와 오고 있었을 때였다. 그는 병원 보초병에게도 요양 환자로서 외출했다가 늦었다고 적당히 대꾸하고 무사히 병원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리빠똥 장군과 헤어지고 사흘이 지난 새벽이었다. 리빠똥 장군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지 정장을 하고 있었다.
"자네가 돌아가고 난 날부터 이 옷을 입고 있었네. 물론 가지고 왔겠지?"
"네."
정 중위는 가슴속에서 권총과 실탄 여섯 발을 내놓았다. 그리고 좀더 창백해진 리빠똥 장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정 중위에게 웃음을 보냈다.
"곧 가야 하겠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뭔가 자꾸 말하고 싶어지는군. 나는 많은 사람들, 특히 부하들에게 못된 짓을 많이 했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것이 꼭 나의 죄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군. 나처럼 잔인해질 수 있는 인간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것도 그들의 죄가 아닐 걸세. 우리는 좀 묘한 세상에 살고 있는 셈이지. 자, 그럼 지체하지 말고 돌아가게. 눈치를 채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니까, "
"연대장님, 저의 마지막 선물입니다. "
마고 정 중위는 윗포킷을 뒤적거리더니 한 쌍의 별을 끄집어냈다.
"최후까지 날 조롱할 셈인가? "
이렇게 말은 하고 있었지만 장군은 흡족한 듯이 웃었다.
"참으로 희극적이군. "
그리고 그는 대령 계급장을 떼고 그것을 대신 달았다. 전혀 어울리지가 않았다.
"자, 지옥에서나 만나지."
리빠똥 장군과 고릴라 정 중위는 악수를 나뒀다. 꼭 죽음을 앞둔 사람이나 그 죽음을 도우려는 사람들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좀 담담한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정 중위가 장군의 병실을 나섰을 때, 그의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의식했다.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서자 복도의 창문을 넘었다. 그리고 황막한 벌판을 뛰어 철조망 밑을 기어 나갔다. 거기서부터 논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정 중위는 논둑에 서서 불빛이 띄엄띄엄 빛나고 있는 병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참으로 먼 곳에서 들리듯 땅, 땅, 땅, 연달아 세 발의 총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싹하는 전율이 전신을 타고 내렸다. 결국 죽었단 것이겠지.
다음날 아침 부대에서 정 중위는 리빠똥 장군이 자살했다는 비보를 들었다. 머리에 두 날, 가슴에 한 발을 쏘고 죽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은 연대 내에 구구한 억측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가 정말 미쳐서 발광을 했다 하기도 하고, 그의 부인이 그를 버린 데 절망해서였다기도 하고 별을 달지 못한 것을 원통히 여겨서라고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죽음의 의미를 똑똑히 가려내려는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똑똑히 가려내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이 마지막에 현명한 방법을 택했다는 데로 귀결을 짓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상부에서나 수사 기관에서나 그의 옛 부하였던 사람들도 그의 죽음을 한결같이 당연한 종말로 취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별을 달고 죽었다는 것이 그 인물에 대해 희극적인 요소를 한층 돋구어 주는 데 기여했을 따름이었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확실하게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다. 권총의 출처도, 그의 간단한 유서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본인 김 수진 대령은 광인이 되기는 싫었으며, 군대를 떠나기는 더욱 싫었다. 본인은 아직도 본인이 옳았다고 생각하며 나쁜 점이 있었다면 본인이 살아가는 방법이 틀린 것이라고 사료된다. 이 살아가는 방법, 본인이 살던 조직 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택해진 것이다. 단지 수수께끼로 남는 것은 왜 본인만 파멸하는 것인가이다. 본인은 병원으로 오기 전에 이미 죽기로 작정했으므로 소지하고 온 권총으로 자살한다.
이 풀 수 없는, 정말 수수께끼 같은 유서도 한낱 그를 이야기하는 데 웃음거리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의 장례식은 간단하게 병원 시체실 옆에서 치러졌다. 애초에는 사단장으로 성대하게 계획되었으나 갑자기 취소되었다. 상부에서는 그의 자살설이 외부로 나가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장례식에는 사단장과 부연대장을 비롯하여 송 중령 등 대대장급과 연대 참모들이
참석했다. 트럼펫의 구슬픈 조가가 울려 퍼지고 그의 영구가 차에 실려지자 정 중위는 장군이 있던 병실 쪽을 올려다보았다.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병사들이 창가에 붙어서 걸레로 유리창을 열심히 닦고 있었다. 거기에 한 인간이 죽어 갔다는 흔적은 아무 것도 없었다.
리빠똥 장군을 실은 앰블런스가 병원 정문을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정 중위의 시선은 이윽고 송 중령의 눈과 마주쳤다. 정 중위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이, 정 중위. 자넨 왜 앰블런스, 그 영구차에 타지 않았나?"
송 중령은 야유하듯이 그에게 소리쳤다.
"가고 싶지가 않아서요."
그리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오는 정 중위를 향해서 그는 또 말했다.
"장군은 불쌍한 사람이었어."
"제가 알기로는 대대장님만큼은 못 되지만 용감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 그런가?"
"대대장님."
정 중위는 이렇게 불러 놓고 차가운 시선으로 송 중령을 건너다보았다.
"저는 아직도 연극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
"뭐라구?"
송 중령의 여윈 얼굴이 왜나 놀라는 표정이었다.
"어쩌자는 거야?"
"부대로 돌아가시는 길에 저를 함께 태워 주십시오. 사단 본부에서 내리겠습니다."
"그래서?"
"헌병대로 가겠습니다."
"그건 왜?"
"장군에게 권총을 제공한 것은 접니다. 저는 장군의 죽음이 이렇게 조용히 끝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캐어 내기 위해서 저는 마땅히 체포될 줄 알았습니다. 병원에 장군이 있는 동안 그를 방문한 유일한 장교였으니까요."
"왜 무사히 넘어가는 사건에 대해 자승자박하는가? 으흠, 그러고 보니까 이제 와서 자네는 나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구만 그래, 응? 그러나 아무도 이 조직의 틀을 인간 쪽으로 돌리기는 어쩐지. 장군이나 자네나 나나 모두 틀에 얽매여 떠밀려 갈 뿐이야. 냉혹해질 수밖에 없어. 그 파도에서 헤어나려면,,,,,"
그러나 정 중위는 울부짖듯이 소리치고 있었다.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차들 태워 주지 않으시겠다면 전 걸어서라도 가야겠습니다."
"정 그렇다면 타게. "
하고 송 중령은 못마땅한 듯이 볼멘소리로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