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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단편 소설

29. 악야

by 자한형 2022.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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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야 (惡夜)-김광주

 

눈을 떴다,

이상하게 잠자리가 편안치 않았다.

무슨 무서운 꿈에서 소스라쳐 깨어난 사람처럼 나는 두 눈이 휘둥그래서 눈을 떴다.

어디선지 뎅, . , 세시를 치는 괘종 소리가 또렷이 내 귀에 들려왔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에는 분명히 비 쏟아지는 소리가 주르륵주르륵 들려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집, 내 방 같지 않았다.

첫째. 나는 일찌기 내 집, 내 방에서 밤중 세시나 되어서 눈이 떠본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또렷한 괘종 소리를 들어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역시 큰댓자()로 팔다리를 보기 좋게 쭉 뻗고 드러누워 있는 것이었다.

제일 먼저 나의 흐리멍덩한 두 눈으로 들어온 것은 넓고, 높고, 네모반듯하고, 하얗게 깨끗이 발라진 천장이었다.

반듯이 드러누워서 아무리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봐도 그것은 내 집, 내 방의 천장은 아니었다.

그것이 만일 내 집, 내 방의 천장이었다면 이렇게 높고 반듯할 리가 없고, 거기에는 반드시 빈대 죽인 핏자국이며 파리똥이며, 또 군데군데 장마가 져서 빗방울이 샐 때마다 흙을 얹고 발라버리고 땜질하고, 그런 보기 싫은 흔적들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바라보고 누웠는 천장은 그런 것과는 너무나 틀리는 반반하고 반듯하고 하이얀 천장이었다.

그러면 나는 어디 와서 드러누워 있는 것일까?

하도 이상해서 나는 슬며시 머리를 바른편으로 돌려보았다. 벽 빛깔도 내 집, 내 방의 그것이 아니었다. 꽃무늬가 천착스러울 만큼 화려한 도배지로 발라진 것이라든지, 중간에서부터 머리맡 벽 구석까지 차지한, 소위 왜놈들이 말하는 -쇼오지- 라는 야트막한 들창의 가느다란 창살이라든지, 이건 분명히 내 집, 내 방은 아니었다. 내가 어디 와서 드러누워 있는 것일까?

어떤 여관? 어떤 친구의 집?

그러나 그것도 아니었다.

내가 꼼짝 않고 드러누운 채로 한번 쭉 훑어보고 난 바른편 벽, 나와 그 벽과 사이의 공간에는 조그마한 요가 덩그머니 깔려 있고, 그 위에는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쌔근쌔근 고단히 잠들어 있는 것이었다.

다섯 살 먹은 내 딸년이 내 옆에서?

그러나 그것도 내 딸년은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엉클어진 더벅머리를 되는대로 흐트러뜨리고 잠들어 있을 내 딸년이지, 결코 그렇게 얌전하고 예쁘게 깎은 단발머리를 곱게 빗어 내린 채 잠들어 있을 내 딸년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눈을 꼭 감기는 했으나 오똑 솟은 콧날이 라든지. 야무지게 다물은 입이라든지, 확실히 내 딸년보다는 아름답고 깨끗한 소녀였다. 그나 그뿐이랴 ! 그 어린아이의 머리맡에는 커다란 장난감상자가 보기 좋게 놓여 있고, 그 족에는 두 눈이 새파랗고 부리부리한 서 양인형 이며, 소꿉질하는 남비 접시며, 그 밖의 어린 계집아이가 가지고 싶어하는 장난감이란 모조리 사들인 것처럼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이었다.

둘씩, 셋씩, 어린것을 가져는 보았지만, 나는 일찌기 세살 먹은 어린 아들놈이 그렇게 사달라고 조르는 장난감 트럭 하나를 제대로 버젓이 사 가지고 들어가 본 일이 없는 사람인데,,,,,, 그러면 도대체 나는 어디 와서 드러누워 있는 것일까?

그리고 뉘 집 어린아이를 옆에 누이고 여태까지 잠을 잔 것일까?

그래도 좀처럼 선뜻 생각이 나질 않았다.

나는 여전히 큰 댓자로 팔다리를 쭉 뻗고 반듯이 드러누운 채로 이번에는 왼편으로 머리를 돌려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더 놀라운 사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누구라고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 한 젊은 여인이 흰빛 새틴으로 만든 파자마를 백 공작의 날개같이 날아날 듯이 입고는, 비스듬히 내편을 향하여 모로 드러누워서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두 볼에 가느다란 미소조차 띄우면서, 나의 표정을 어리석다는 듯이 살피고 있는 것이었다.

힐끗 한번 쳐다보아 아름다운 여인임에 틀림이 없었다. 밤이어서 그런지 비록 짙은 화장은 안 했으나, 넓이도 알맞고 얄팍하면서도 약간 뾰로통하게 내밀어진 어여쁜 입술에는 낮에 발랐던 연지가 아직도 다 지워지지 않은 채로 불그레하며. 갸름하면서도 오히려 둥그스름할이만큼 탐스러운 얼굴의 윤곽, 그다지 뾰족하지도 않으면서 제자리를 제대로 차지하고 있는 오똑한 코, 세상에서 흔히들 말하는 소위 -부녀 동맹형-이라고, 뒤통수에서부터 갈라붙여서 앞으로 둥그렇게 휘휘 감은 머리, 더우기 날카롭다거나 영리하게 생긴 편은 아니었으나. 둥글고 커다랗고 시원스러울 만큼 부리부리한 두 눈.

나의 시선은 그 여인의 보드라운 새틴 파자마 위로 떠오르는 멋들어지게 굴곡이 져 있는 육체의 선을 더듬으면서 발끝까지 내려가서 멈춰졌다. 미끈하면서도 알맞게 생긴 발, 양말도 걸치지 않은 발, 고리고 그 발톱에는 새빨간 메니큐어의 광채가 에나멜처럼 반짝이는 것이었다.

발톱에까지 물을 들인 여인.

누구일까 ?

그러나 좀처럼 생각이 나질 않았다.

몇 초라는 짧은 시간이 바와 그 여인 사이에 말없이 흘렀을까? 그 여인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 빙그레 웃던 얼굴에 히스테릭한 웃음을 띄우면서 드디어 입을 열었다.

, ,,, 선생님두,,,,,, 그렇게 놀라실 게 있어요. ,,,,,, 그렇게 겁나실 게 있어요?, ,,,,,,

나는 점점 더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고, 여기는?

참 선생님두, 절 모르세요? 모르시기도 하실 거야 ! 그렇게 술이 취하셨으니---- 소니아, 소니아를 모르세요? 그러구 여기는, 언젠가 말씀드린 그 아파트 바로 제집이구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 여인은 허리가 부러질 듯이 깔깔대고 웃는 것이었다.

소니아! 소니아! 아하아, 바로 그 여자!

그제야 나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번개같은 생각이 있었다. 아마 한달 전 일이었을까-나의 선배 되는 모씨가 노상에서 우연히 소개해준 소니아라는 여자. 그해 봄에 모 대학 영문과를 나와서 시()를 쓰고 있는 신진 여류 시인이라고 소개를 받은 여자.

그러자 그때 노상에서 소개받은 소니아는 검정빛 벨벳 짧은치마에 모시 깨끼 저고리를 얌전히 입은 그야말로 여학생 타입의 여자였는데,,,,,,

어쨌든 내가 아는 소니아란 그때 그 여자밖에 또 없었을 것이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보아 이 여자가 바로 그 여자임에 틀림없는 것이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노상에서 한번밖에 소개받은 일이 없는 이 여인의 집에를?

엉클어진 실마리가 한 마디 두 마디 풀리듯이 그날 아침부터 지낸 일이 하나 둘 차차로 갈피 잡히면서 내 머리에 떠올랐다.

그날은 바로 내가 다니는 잡지사의 월급날이었다. 아침에 집을 나을 때, 한 달이면 으례 한번씩은 빼는 일이 없이 되풀이하듯이 아내가 또 종알거렸다.

월급날이면 뭘 허누,----, 또 빈털터리겠지 ! 인제 잡지사고 문학이구 다 집어치구 구루마를 끌든지, 지게를 지든지, 어린 자식새끼들 벌어 먹일 생각이나 해--

아니나다를까. 내가 다니는 잡지사-석 달에 한번 책을 내놓기에도 쩔쩔매는 그 잡지사에서는 그날도 월급 한 푼 줄 리가 없었다.

그래서 해질 무렵에 잡지사를 나오자 내 딴에는 좀 우울했던 모양이다. 거리에서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서 술잔 마신 것이 밤은 깊고 비는 내리고------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을 더듬어보면 비가 죽죽 내리는 M동 머리 어느 상점 처마 밑에서 두어서넛 친구가 머뭇거리다가 결국 밤이 늦고 하니까 나를 자동차를 태워서 보낸 모양인데, 자동차에 오른 기억은 희미하나마 생각나지만, 그 뒤에는 어찌된 일인지 또렷이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마 집으로 돌아가기도 따분하고. 비는 오고 술은 취했고 한 바람에, 어떻게 하겠다는 목적이나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라, 여류시인이라는 일종의 호기심에 소니아를 얼토당토않게 생가해서 덮어놓고 차를 이 여인이 있는 아파트로 달린 모양이었다.

어쨌든 공교로운 밤이었다.

그날이 월급날만 아니었어도, 또 아내가 그렇게 바가지만 긁지 않았어도. 그리고 잡지사에서 다만 몇 푼이라도 월급이랍시고 타기만 했어도, 흑은 비만 내리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인데,,,-,

나는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 이거, 내가 어딜,,-, 정말 술 때문에 이거 너무 미안한 짓을 한걸.

쑥스러운 말이었다. 나는 어찌할 줄 모르고 공연히 머리를 긁적긁적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니아는 한바탕 또 깔깔대고 웃고 나더니 머리맡에 놓인 러키 스트라이크를 한 개 뽑아서 보기 좋게 피워 물고는, 여전히 한 팔로 턱을 괴고 비스듬히 드러누워서 종시 뭐,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라는 듯이 화를 내는 빛도, 성가시다는 빛도 없이 천연스럽게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아이 참! 선생님두, 무어 그리 새삼스럽게 미안하니 안됐느니 하실 게 있어요 ! . 우숴 죽겠네,,,,,, 사람이 한세상 살려면 이럴 때두 있구 저럴 때두 있지,,,,,, 남자와 여자가 한방에서 자기만 하면 무슨 일을 저지르는 건가요? ,,,,,, 아무 걱정 마시고 편히 쉬고 가세요,,,,,, 벌써 세시를 쳤는데------지금 일어나시면 어쩌시겠어요,,,,,, 밖에는 저렇게 비가 쏟아지구---,--걱정 마세요!

이렇게 똑바로 금이 그어져 있지 않아요 ! 선생님은 거기서 주무시구, 저는 여기서 이렇게 자구,,,,,, 자아, 아무 걱정 마시고, 드러누워서 무슨 재미있는 얘기나 해 주시구,,,,,,

쇼오지 밖으로 주르륵 들리던 빗소리는 바람마저 겹쳐져 이는 듯. 아주 폭풍이 되어서 쏴아쏴아 유리창을 후려갈기며 때로는 천둥소리 들리고 번개까지 번쩍번쩍, 이 공교로운 밤을 더 한층 어수선하고 무섭게까지 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노릇이었다. 도저히 한자리에 드러누울 수 없는 두 운명이 나란히 드러누워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상히 생각하고 쑥스럽게 생각하는 나와는 반대로, 이 소니아라는 여인은 조금도 그런 눈치조차 없이 태연자약한 것이 나에게는 더욱 알 수 없고, 이상스런 일이었다.

고래, 요새 시() 많이 쓰시구?

말주변 없는 나의 이런 쑥스런 말로부터 얘기는 시작되었다.

제가 시틀 써요? 그건 멀쩡한 거짓말입니다. 그저 그렇게 말해본 것이지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성악가라구도 하고, 춤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무용가라구도 하고---, 그저 그저 그런 거지요,,,-, .

그럼 당신은?

나요? 궁금하세요 ? 이렇게 혼자서 저 어린것을 데리구 사는 여자지요.

재는 따님이십니까?

미리! 참 멋들어진 이름이죠! 제 딸예요. 저에게 하나밖에 없는 생명 같은 거예요,,,,,,

그럼, 개 아버지는?

---개 아버지요, ,,,-, 선생님이 개 아버지 노릇을 해주시겠어요?

뭐요, 내가? 둘씩 셋씩 되는 내 어린것도 무거운 짐이 되어서 주체를 못하는 내가? ,,,,

,,,,,, 선생님, 그건 농담이구요,,,,,,

당신 올해 몇이지?

내 나이요? 아이 선생님두 실례 ! 왜 남의 여자의 나이를 물으세요. 여자의 나이야 화장 하나로 얼마든지 속일 수 있지요. 그때, 거리에서 처음으로 선생님을 뵈었을 때는 퍽 젊어 보였지요? 선생님, 그렇게 궁금하세요? 바른 대로 말씀드릴까? 놀라지 마세요 ! 올해 서른셋,,,,,,

네에? 알 수 없는 일인걸!

,--- 놀라실 것 없지 않아요? 하여튼 몹시 궁금하시지 ! 제가 뭣하는 여잔가 하셔서,,,, 그저 되는대로 살아가는 여자라고만 생각하시면 그만이지 뭐,,,,,

고향은 어디시지?

저의 고향까지 아시고 싶으세요? 다 말씀드릴까 ! ,,,,,, 저는 해삼위서 났어요----해삼위. 왜 아시지,,,,,, 홀어머님 슬하에서 곱게 자라났지요...,.. 그런데 우리 아버님이 누구라는 건 잘 몰라요. 제가 열여섯 살 때, 어머님이 돌아가시면서도 아버님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아니하시고 그냥 가버리시질 않았겠어요. 무슨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삼위로 흘러 들어온 망명객이었다고 똑똑치 않은 말을 일러주는 이도 있더구먼요,,,,,, 그까짓 것이야 어찌되었든 열여섯 살, 세상물정을 분간하기 시작할 만할 때, 그때 저는 어떤 러시아사람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접시를 나르는 소녀였습니다. 여기서부터 오늘날까지 살아온 저의 얘기를 어떻게 이 짧은 밤에 다 말씀드릴 수 있겠어요. 식당이 싫으면 카페로, 카페가 싫으면 카바레로, 또 댄스홀로. 천진, 북경, 남경, 상해 이렇게 흘러 다니는 동안에 저의 청춘은 다 늙어버리고, 상해에서 해방을 맞이했지요. 그래서 그때 세상에 나온 지 두 달밖에 안 되는 미리란 저년을 가슴에 안고 그래도 내 땅이라고 조선으로 돌아왔지요...... 미리의 애비! 그 건달녀석 때문에 저의 청춘도 사랑도 송두리째 짓밟혀버리고...... 그 자식은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바치는 불덩이 같은 저의 사랑을 좋은 미끼라고 생각하고, 고국에 버젓이 본처가 있는 자식이 저를 속이고, 갖은 못할 짓을 다 해서 저를 괴롭히고, 나중에는 도박, 그도 못마땅해서 아편까지 처먹고 꺼꾸러져 버렸지요------전재민이에요. 딸년이 라고 핏덩이 같은 것을 하나 부둥켜안고, 두 주먹만 불끈 쥐고 돌아온 전재민이자고 생각하시면 틀림없지요---

전재민?

그럼, 전재민이지 뭐예요? 깡통을 차지 않고, 방공호 신세를 지지 않는 것은 저에게 아직도 늙어빠지지 않은 육체와, 그저 남의 틈에 끼일 수 있는 얼굴을 가졌다는 까닭이겠지요.

흐응, 이제라도 늦지는 않습니다. 착실한 자리 있으면 재혼을 하시죠?

재혼을요 ? 결혼 말씀이지,,,,,, ,,,,,, 우스꽝스러워서 어떻게 결혼을 해요? 이 세상 남자라면 이에서 신물이 날 지경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빼놓고 말예요. ------, 미리의 애비만 해도 잘 죽었지, 잘 죽었어요. 그따위 자식들이 살아 있으면 살아 있을수록 세상의 여자들만 하나라도 더 들볶이고, 희생을 탈하고------저에게는 인제 아무 희망도, 미련도 없어요...... 애비를 생각하면, 이를 악물고 저주하고 또 저주해도 시원치 않지만, 그래도 이 인생에 있어서 나의 피를 나눈 다만 하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저는 단지 저 딸년 미리 하나만을 위해서는 몸이 으스러지고, 뼈가 부서져도 좋을 것 같아요. 떠는 무슨 짓을 해서든지 저것 하나만은 훌륭히 키워서, 저 하고 싶은 대로 중학, 대학 공부도 싫컷 시키고요---- 애비 없는 자식이란 소리를 들려주지 않기 위해서라도------그리고 또 이 에미년과 같이 불행한 길을 걷게 하지 않기 위해서, 저는 무슨 짓을 해서든지 저것만은 훌륭히 키워나갈 작정입니다, 인제 다 아셨지요. 제가 어떤 여자라는 것을,,,,,, 그런데 참, 제 얘기만 자꾸 퍼부어서 ------인제는 선생님 얘기를 들려주세요. 아이들은 몇이나 되시죠? , 그렇게 날마다 술을 자시구 댁엘 들어가시면 부인께서 퍽으나 싫어하시겠어요......저의 집에 오시던 얘기를 할까요,,,,,, 노하지는 마세요...... 글쎄, 열한 시가 훨씬 넘어서예요. 현관에서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뛰어나가 보니까, 택시 한 대가 현관 앞에 닿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선생님이 술에 정신없이 취하셔서 연방 소니아, 소니아, 하고 악을 쓰시면서,,....무슨 술을 그토록 잡수세요?

! 그랬던가요? 그럼 그때. 그자동차로 태워서 내 집으로 돌려 보내시지 않고---

그럴 수야 있어요? 열두 시가 다 돼오는데,,,,,, 어떻게 술 취하신 분을 그대로 가시라고야..,,,, 가시다가 봉변이나 하시면,,,,,, 그래서 가까스로--- 제방까지 모셔들이고 ,... 양복저고리를 벗겨드리고, 자리에 누우시게 하기까지 얼마나 제가 주정을 받은 지 아세요,,-, 저니까 망정이지 다른 여자한테 가서 이렇게 주정을 하시다가는,, ,,,, 아녜요, 노하지 마세요-, ------남자들이 술 취하실 때 하시는 노릇. 저는 너무 많이 봐놔서 이런 일쯤이야 양해해드릴 수 있으니까 조금치라도 언짢게 생각지 마시고,,,,,, 날이 밝도록 마음놓고 쉬시고 .... 무어 상관 있어요? 남자와 여자가 한자리에 눕기만 하면 무슨 일을 저지르는 줄 아는 것은 어린애 같은 생각이죠----------

바로 이때였다.

우리들이 우리들의 이야기에 서로 취하여 몰랐음인가, 혹은 비바람 -천둥 -번개 때문에 인기척 이 있음을 몰랐음인가. 하여튼 난데없는 노크소리가 우리들 발치에 잠겨져 있는 두 쪽 넓은 미닫이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란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 같았다.

! ! ! 노크고리와 함께 문 밖에서는,

소니아! 소니아!

하는 남자의 음성이 약간 떨리기도 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여태까지 태연자약하던 소니아는 얼굴빛이 핼쑥해지면서 날쌘 동작으로 벌떡 일어나서는, 벽에 걸린 원피스를 들치듯이 파자마 위로 그냥 입고는 한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리고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큰 소리를 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머리맡에 놓인 야트막한 책상에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앉기는 했으나, 어찌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소니아의 태도는 차츰차츰 당황하고 초조해갔다. 닫힌 문을 열어주어야 좋을지 어쩔지 쩔쩔매면서. 모기 소리만한 음성으로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는 것이었다.

제가 싫다는데도. 자꾸 결혼을 하자고 쫓아다니는 놈예요 ! 어떡하면 좋아,..,, 이 밤중에 퍼 미친놈이 어쩌자구 여길-----

결혼을 하자고 쫓아다니는 사나이.

이 비가 쏟아지는 밤, 천둥 번개가 요란한 밤, 세시가 훨씬 넘은 깊은 밤에 표연히 나타나서 여자의 방문을 두드리는 사나이.

문을 두드리는 품으로 보나, 당황해하는 소니아의 태도를 보나, 여기에는 심상치 않고 간단치 않은 심각한 관계가 숨어 있을 것만은 뻔한 노릇이었다.

그러면 나는?

소니아의 간부(姦夫)? 정부(情夫)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으로 변명할 여지가 있는가? 나와 소니아가 단둘이서 밤늦게 이방에 있었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로서, 문 밖에 서 있는 남자에게는 비치었을 것이다.

!! !

두 번째 노크소리가 처음보다도 더 요란스럽게, 더 무시무시하게 문을 흔들었다.

소니아! 문을 좀 열어 ! 그리고 내 말을 좀 들어.

애원하는 그런 종류의 음성이 아니었다. 명령적이요, 위협적인 거칠은 사나이의 음성이었다.

소니아는 더 한층 당황하고 초조하여 이제는 막 내게로 바싹 붙어서면서, 내 팔에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바들바들 떠는 것이었다.

선생님! 저 쇼오지 문으로 달아나면 뒤로 돌아서 문간으로 나갈 수가 있어요. 선생님, 얼른 저하구-----, , 저 자식 낯짝만 보면 구역질이 나서......

역시 모기 소리 만한 소니아의 안타까운 음성이었다.

그러나 이 비 내리는 밤중에 내가 소니아라는 여자를 데리구 쇼오지를 뛰어넘어서 밖으로------그러면 나는 변명할 여지도 없이 정말로 그의 간부나 정부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일 초, 이 초, 정말로 짧은 시간이 그러나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사나이에게는 수상하고, 지루하고, 안타까웠을 짧은 시간이 무서운 침묵 속에서 그냥 흘렀다.

그래도 문을 안 열 테야! 괜히 좋지 못해.

세 번째 노크소리가 이제는 문짝이라도 부셔버릴 듯이 들려왔다. 나는 대담해질 수밖에 없었다. 얕은 책상 위에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꼼짝 않고 앉은 채로 거의 명령적으로 소니아에게 외쳤다.

그건 안됩니다 ! 문을 열어드리십쇼.

어차피 당한 봉변이니 깨끗이 받자는 나의 각오였다. 문 밖에서 칼날이 튀어 들어올지? 주먹다짐이 뛰어들어올지 ?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어찌 되었든 문을 열어주는 것이 사나이 자식으로서는 떳떳한 일이요, 또 저도 사람이요 사나이 자식이라면, 내 입장을 알아들을 만큼 얘기해서 통하지 않을 법도 없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소니아도 이제는 막다른 골목이라고 각오를 했음인지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에선지, 어쨌든 그 뾰족한 입을 앙칼지게 다물고 둥글고 큰 눈에 일종의 독기조차 띠면서, 거의 발작적 행동같이 왈칵 문 앞으로 대들면서 고리를 벗기고 넓은 미닫이문을 홱 열어 젖혔다.

문 밖에 버티고 서 있는 사나이와 나의 시선이 번개같이 마주쳤을 뿐 양복도 말쑥하게 입고 이 비오는 밤에, 그건 또 무슨 시위 운동인지 바른편 어깨에 조그마한 카메라까지 걸머진 이 사십이 가까워 보이는 중년신사는 의외에도 나 같은 사람의 존재는 아랑곳이 없다는 듯이 거들떠보려고--. 않고 한 걸음 방안으로 들어설 생각도 없이 그냥 왈칵 팔을 뻗어 소니아의 소매를 붙잡아버렸다.

이리 좀 나오라니까,,,,,.

원피스 소맷자락이 북 찢어지면서 소니아의 전신이 쓰러질 듯이 문 밖으로 끌려나간 다음. 미닫이문은 전과 같이 왈칵 닫혀버리고 말았다.

소니아! 이건 너무 하지 않아? 대구에서 여기까지 올라온 사람의 체면도 좀 생각해줘야지,,,,,,

! 체면------체면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밤중에,,,,.. 남의 여자의 집엘 -----,

뭣이 어쩌고 어째! 그래도 종시 뻗대기만 할 작정이냐? 요런 깍정이 같은 것이라구,,,,,,

글쎄! 이 소매를 놔! 놓라니까,,,,,, 이젠 막 욕지거리로 나을 작정이야?

너도 사람 년이면 생각을 좀 해봐 ! 난 벌써 네년 때문에 본처와는 이혼수속을 다 해놓고------집까지 팔아버리고, 서울에다 발림을 벌일 양으로...... 인제 와서 그래, 모른 체를 하면 난 어떡하란 말이야? !

집을 팔든 이혼을 하든, 그건 내가 알 배때기 있나!

? 요런 앙큼스런 년. 그래, 네년은 천생 양갈보가 원이냐? 네 복을 네 손으로 박차버 리고 양갈보가 소원이냐?

문 밖은 마루를 깐 낭하인 모양이다. 발을 동동 구르며 발악을 하는 소니아의 음성이 이번에는 귀가 쨍쨍할이만큼 들려오는 것이었다.

양갈보? 그래 양갈보니 어쩌란 말이냐? 인제 못할 소리 없니 ? 이 자식아, 언제 내가 네놈하구 산다구 약속을 했느냐 말이다! ?

좋다! 좋다! 그럼, 돈을 내놔! 내 돈 빨아먹은 것을 도루 내놔!

이런 똥물에 튀겨 죽일 자식 같으니,-, 그러기에 나는 조선 사내녀석들 꼴도 보기 싫다는 거야, 사내자식이 오입하느라구 쓴 돈을 도루 토해 놓란 말이냐?

대관절 방안에 끼고 드러누운 놈팡이는 누구냐?

왜 그래? 그건 알아 뭘 해? 왜 그래? 내 애인이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내 정부야! 왜 그래, 어쩔래,,,,,,

점점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점점 이상해가고 미묘해지는 내 입장이었다.

정부? 애인? 좋아하는 사람? 다 좋아! 어쨌든 오늘밤에는 나 있는 여관으로 가자 ! 죽든지 살든지 둘 중에 하나 사생결단을 내고 말 테다......

글쎄, 놓라니까,,,,,, 이 팔을 놓지 못해?

안 된다! 안돼 ! 가자------가부간 날이 밝기 전에 결단을 내고 말자!

사나이의 무지한 완력에는 소니아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긴 낭하로 질질 끌려가면서 옥신각신 발악을 하는 모양이었으나, 그 소리가 점점 점점 현관 쪽으로 멀어지다가는 아주 사라져 버리고는 이 집에는 조용한 침묵이 무겁게 내리 누르듯이 흐를 뿐이었다. 쇼오지 밖으로 들리던 사나운 비바람소리도 적 이 멎어 가는 듯, 처음에 듣던 괘종 소리가 분명히 네 번을 쳤다.

언제 이 밤이 밝을 것인가?

나의 마음은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저것들이 옥신각신하면서 밤거리를 떠들고 다니다가 파출소에 걸려 ? 그거면 그 남자는 모든 것을 본 대로 고백할 것이 아닌가 ! 나와 결혼하겠다던 여자가 어떤 놈팡이를 끼고 드러누워서---그래서 ,,,,,,

그러면. 그 놈팡이를 데려오너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없고 기막히고 우스운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될 대로 되는 수밖에. 날이 밝기 전에 무슨 도리가 있었으랴 ! 나는 또 처음과 같이 처음 누웠던 자리에 역시 큰댓자로 드러누워서 담배를 한대 붙여 물고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나 공교롭고 우습고도 괴로운 밤이랴 ! 여태까지 말없이 콜콜 잠들어 있던 소니아의 딸 미리란 계집아이가 별안간 무엇에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사방을 두리번두리번하고 일어나 앉아서는 <엄마! 엄마!>를 부르고 <으앙 !>하고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예쁘지 ! 울지 마라, ! 너의 엄마 변소에 갔으니까,,,-, 곧 오신다,,,,,, 내 업어줄까?

내 아들딸도 한번 업어주기를 싫어하는 내가 할 수없이 등을 내밀고 업어 주마고 달래봐도 막무가내, 울음소리는 점점 귀 아플 정도로 높아갈 뿐이었다.

이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날이 박도록 들어야 한다는 것은 정말 파출소에서 순사가 나를 소니아의 정부라고 데리러오는 일보다 더 괴롭고 참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도무지 달랠 도리가 없었다.

언뜻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날 밤 선술집에서 술을 먹다가 내 딸년과 아들놈을 생각하고 사과 두개를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머리맡에 던져 있는 내 가방을 열고 사과 두개를 꺼내서 어린것 앞에 내밀면서 달래보았다,

자아 이거, 사과 줄께,,,,,, 착하지. 이거 먹고 자자, ! 그러면 너의 엄마 곧 오신다. ! 사과 먹고 자, 아저씨가 자장자장 재워 줄께,,,,,,

그러나 어린것은 사과 같은 것은 시들하다는 듯이 거들떠보지도 않고 집어 내동댕이를 쳐버리고 그저 엄마를 부르고 울기만 하는 것이었다.

자아, 그러면 아저씨가 돈, 돈 줄까? 가지고 자다가 날이 밝거든 내일 아침에 사탕 사먹을까? 착하지,,,,,, 미리 ! 아저씨 말 잘 듣지,,,,,, ,,,,,,

그러나 내 주머니에 돈이 들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바지 주머니를 톡톡 털어 보고, 웃저고리 포켓을 샅샅이 뒤져보니. 요행 꼬깃꼬깃한 십 원 짜리가 한 장 튀어나왔다. 나는 구세주나 만났다는 듯이 반색을 하며 그것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공손히 주름살을 펴서는. 어린것에게 내밀었다. 그런데도 어린것은 그냥 울기만 하고 역시 집어 동댕이치면서 백 원 짜리, 백 원 짜리,,,,,,-하고 트집을 잡을 뿐이다. 이 방안에서는 지폐의 단위가 백원부터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업어준대도 싫고, 사과를 주어도 싫고, 십 원 짜리도 싫고,,,, 나로서는 이제는 별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에잇 ! 그대로 모른 체하고 내버려둘까, 어쩔까? 하고 망설이면서 드러누울 수도 없고 일어설 수도 없고 엉거주춤하고 쩔쩔매려니까. 이번에는 별안간 내가 드러누웠던 머리맡에 있는 두 짝 미닫이문으로 된 벽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쪼꼬레,,,,,, 쪼꼬레,,,,,,-하고 여전히 울기만 하는 것이었다.

쪼꼬레?

<옳아 ! 저 속에 초콜렛이 들어 있으니 꺼내달란 말이구나 !>

하고, 나는 벌떡 일어나서 벽장문을 열었다.

분 냄새, 크림 냄새, 거기다가 무슨 이상한 고리타분한 냄새까지 섞여서 왈칵 내 코를 찌르는 벽장 속은, 이방 주인공의 생활이며 가슴속이며 머릿속을 여실히 표현하는 것처럼 어수선하고 뒤숭숭하였다. 거기 흐트러진 물체의 하나 하나가 모두 도깨비나 귀신이 되어서 내게로 대들지나 않나 하는 못생긴 생각을 하면서 나는 한 걸음 뒤로 주춤 물러나서 다시 전등불을 끌어 잡아당겨 그 안을 비추어가며 초콜렛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 넓지도 않은 면적을 칸을 막아서 이층으로 갈라 논 이 벽장 속 위층에는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타원형 조그만 거울이 달린 화장대, 그 아래로는 크림 통 , 분곽, 무슨 연지 등속, 콤팩트 종류들이 함부로 섞이어서 드러누운 놈, 오뚝 서 있는 놈-- 쓰러진 놈, 뒤로 벌렁 나가자빠진 놈, 뒤범벅이 되어 흐트러진 가운데 외국제 값비싼 위스키 병, 브랜디 병 들까지 한데 뒹굴려 있고 저편 구석으로는 여자의 양장이 무려 수십 벌, 웃저고리 , 스커어트, 내리닫이 붉은 것 ,푸른 것 -횐 것. 줄이 쳐진 것, 연한 꽃무늬가 있는 것, 일일이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형형색색의 옷들이 함부로 되는대로 집어던져져 있고, 그 사이로 어떤 놈팡이가 풀어 던지고 달아난 것인지 남자의 넥타이 끝도 내다보이며 누르스름한 군인복 바지 같은 것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아래층을 들여다보자니 거기도 역시 .그 모양. 버터며, 잼이며, 무슨 고기 종류의 통조림통들이 득시글 득시글하는 한편으로는. 굽이 높은 것, 얕은 것, 코가 뾰족한 것. 뭉뚝한 것, 구멍이 뻥뻥 뚫어진 것, 뱀허물 같은 것, 어쨌든 여자의 구두란 구두는 모조리 물어다놓은 것같이, 제짝도 제대로 찾을 수 없게 함부로 나동그라져 있다.

화장품들이 엎어지고 자빠지고 한 틈을 전등불을 비춰서 간신히 초콜렛 갑을 찾아내어 그 속에서 서너 개를 꺼내서 어린것의 손에 쥐어주고, 나는 못 볼 것을 본 사람같이 벽장 미닫이를 얼른 닫아버렸다. 그 이상 그 속을 더 들여다보는 것은 나 자신이 무슨 도깨비에 흘리는 것처럼 머릿속이 뒤숭숭해지는 것이었다.

소니아의 딸은 역시 초콜렛을 제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세 개 가운데서 한 개를 다 먹는 둥 마는 둥, 나머지 두개는 한 손에다 하나씩 췬 채로 슬며시 도로 잠이 들어버렸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나는 그제야 한시름 잊고 또다시 큰 댓자로 드러누워서 팔베개를 하고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잠이 올 리가 없다.

<어서 이 밤이 밝았으면-한시간만 후딱 지나면 동이 훤하게 터오련만---->

눈시울이 금시에 푹 꺼져 들어가는 것 같고, 전신키 나른하고, 머릿속에서 무엇이 달음질을 치는 것처럼 산란하곡 어지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이 밤이 밝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발치에 있는 아까 닫아버린 지 얼마 안 되는 바로 그 미닫이문 밖에서 또 자지러지는 듯한 여자의 음성이. 나를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키게 하였다.

-....... 아주머니...... 다시는 안 그럴 께-,----. 말 잘 들을 께------

그것은 고작해야 십칠팔 세밖에 더 안되어 보이는 소녀의 음성이었고, 분명히 이 방문 밖. 낭하를 격한 건너편 방에서 들려오는 고리였다. 뒤를 이어서 이번에는 사십이나 됨직한 중년 부인의 거칠고 사나운 음성이 들려왔다.

요년 ! 배라먹을 년 ! 너도 사람의 탈을 쓰고 났으면 남의 공을 알아야지 ! 조선_으로 나오는 뱃속에서 갈 데 올 데 없는 네년을 데려다가 사 년 오 년 거저 밥을 먹여 기른 줄 아니? 세상에 못할 노릇이 뭐란 말이야! 앞방의 미리 엄마 좀 봐 ! 잘 먹고, 잘 입고, 날마다 찝차만 몰고 다니고--좀 좋아서------네 복을 네 손으로 박차버리는 거냐? 한 놈만 물어 들여봐 ! 돈이 쏟아져, 서양 물건이 산더미처럼 생겨.-글쎄, 요년아-, 내 말을 듣겠니, 안 듣겠니?

회초리로 소녀의 등덜미를 함부로 갈기는 모양이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자지러져서 흐느껴 우는 소녀의 울음소리가 밤 공기를 슬프게 흔드는 것 같았다.

에그그. 에그머니. ..-. , 그래도 그건 못하겠어요--------차마 ...... 그건 코 큰 사람들 얼굴만 보면-.그 새파란 눈만 보면 징글징글 하구-. 무섭구.... 아주머니,,,,,, ---죽어두 그건------

뭣이 어쩌고 어째,,,,,요년!

회초리소리와 에그그 소리가 어울려서 한동안 들려오더니 이번에는, 벽력같은 남자의 거칠은 목소리가 내 귀를 터지라는 듯이 쨍쨍하게 울려왔다.

글쎄, 이 빌어먹을 것아! 왜 남 잠도 못 자게 이 깊은 밤중에 애비 에미도 없는 불쌍한 계집애를 못 살게 들볶느냐 말이야! !

! 임자는 언제부터 그렇게 동정심이 많소! ! 그럼, 돈을 벌어와! 돈을 ! 사내자식이면 돈을 벌어와 ! 난 인제 양담배장사도 지긋지긋해 못하겠고 - 가만히 들어앉아 있을 테니 임자가 돈을 벌어와 ! 조선 나와서 그나마 방공호, 깡통 신세를 안 지는 게 누구 덕인 줄도 모르고--------

뭣이 어쩌고 어째? 은행소 담구멍을 뚫으란 말이냐? 남 잠 못자게 떠들지 말라니까,,-, 무슨 앙탈이야.

이 번에는 그 남자가 그 여자(아내라고 생각되는)를 때리는 모양이었다. 엎치락뒤치락 한동안 어수선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 자식, 양담배장사를 시켜-, 야미 장사를 시켜------내 등골을 뽑을 대로 뽑아 먹고 인제는 사람까지 치고 덤비니---

소녀를 때려서 울리던 그 중년여자가 이번에는 자기 남편이란 작자에게 얻어맞고, 방바닥을 치면서 엉엉 우는 모양이었다. 통곡소리 ! 푸념 소리 ! 나는 그 이상 아무 것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자리에 드러누워서 천장만 쳐다보며 두 다리를 쭉 뻗어봤다.

누가 말렸는지, 혹은 제풀에 죽었는지 울음소리와 푸념소리가 점점 가늘어지더니 아주 조응하게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눈을 감아봤다. 잠이 올 리가 없다.

눈을 떠봤다. 머릿속이 더한층 어지러워지고 바라보이는 천장이 아물아물할 뿐, 좀처럼 이 괴상망측한 하룻밤이 밝을 것 같지도 않았다.

눈을 떴다 감았다, 드러누웠다 일어났다, 앉았다 섰다, 이러기를 무려 수십 차례. ! 그제야 저주스런 밤이 그 쇼오지 밖으로 희미하게 밝아오는 것이었다.

<인젠 살았다!>

내가 부리나케 넥타이를 찾아서 목에다 걸고 매듭을 지려 달 때였다, 이 집에서는 이 것만으로도 나를 돌려보내지는 않을 작정인 모양이었다.

이 번에는 높은 층층대에서 무엇이 우르르 굴러 떨어지는 듯한 요란스런 소리가 나더니 이방 저 방에서 사람들이 쿵쿵 한곳으로 몰리는 모양이었다.

도둑이야!

이리 잡아내려! 끌어내려!

붙잡어 ! 붙잡어, 놓치지 말고,,,,,,

나도 넥타이를 매는 등 마는 등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 보았다. 한 간 폭쯤 되는 긴 낭하가 쭉 뻗어서, 끝이 나려는 곳에 어제 내가 술이 취해서 자동차를 들이댔다는 현관이 있었고, 현관 채 못미처 왼편으로 이층으로 통하는 높은 층계가 있는데. 바로 그 층계 아래, 연통을 쑤시다 나온 사람같이 얼굴이 시커멓고 의복이 남루한 한 삼십대의 젊은 사나이가 한 손에 여자 구두 한 켤레를 든 채로, 또 다른 젊은 사나이에게 등덜미를 잔뜩 붙잡힌 채 부들부들 떨고 있으며, 젊은이, 늙은이, 남자, 여자, 이 방 저 방에서 몰려든 이 아파트 사람들이 그걸 에워싸고 웅성웅성 야단들이다.

우리 집 가방을 훔쳐간 놈도 바로 저놈일 거야!

저놈이 우리 집 남비도 훔쳤을 거야!

등덜미를 움켜쥐고 있던 사나이는, 그 얼굴이 시커멓고 부들부들 떠는 사나이를 마루바닥에 꿇어앉히고는 뺨을 보기 좋게 갈기고, 발길로 걷어차는 것이었다.

이 자식 ! 너 몇 번째 여길 들어왔지? 며칠 전에 저 이층구석방에서 시계와 양복을 훔친 것도 네놈이지? 바른 대로 말해! 이놈!

그 구두를 한 손에 든 사나이는 앞으로 폭 고꾸라지며 코피를 쏟고 눈물 섞인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는 도둑질이 처음입니다! 여기는 처음 왔습니다! 저는 저-----, 저 남산 밑 방공호 속에 살고 있는 전재민입니다...... 일본서 늙고 병든 어머님을 모시고 나와서 일자리는 없고 먹고 살 수는 없고 해서 오늘 새벽 이 일을 저지른 겁니다......

이놈! 능청스럽게 거짓말 말어 ! 너 이놈, 아편쟁이지?

아닙니다------그건,,,,,, 천만에, 아닙니다!

또 뺨을 얻어맞고 발길로 채고,

죽여 없애 ! 그런 놈은 혼을 내야지.

끌고 가요 ! 파출소로 가요!

결국 여러 사람의 의견이 일치한 모양이었다. 구두를 훔쳤다는 사나이는 매를 맞은 사나이에게 멱살을 잔뜩 붙잡힌 채로 몇 시간 전에 소니아가 맨발을 벗은 채, 그 새빨갛게 페디큐어로 물들인 발톱을 그대로 내놓고 끌려나갔을, 바로 그 현관을 목 매인 개처럼 질질 끌려 파출소로 향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이상 아무 것도 보기 싫었고 듣기도 싫었다.

어수선한 장면이 지나가는 동안에 그 지긋지긋하던 밤이 아주 활짝 밝아버렸다. 나는 얼른 방으로 다시 들어가서 가방을 들고 나섰다.

그러나 어린것이 혼자 잠들고 있는 텅 빈 방을 그대로 열어놓고 갈 수도 없고 해서 한동안 망설이다가 할 수없이 옆방 문을 가만가만히 두드렸다. 방문이 조금 열리더니 사람 좋아 보이는 노파 한 분이 얼굴을 쑥 내밀었다.

이거, 미안합니다. 옆의 방이 비었고 어린것 혼자 자고 있는데 잘 좀 봐주십시오!

노파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천연스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 방에는가끔 그런 일이 있는 걸요 뭐! 걱정 마시고 가시오! 걔는 초콜렛이나 많이 주구 백 원 짜리나 들려주면 제 어머니 없어두 혼자서 곧잘 논다우!

아하! 그래요!

내가 그냥 몸을 돌이켜서 현관으로 향하려 할 즈음 여태까지 잠들어 있는 줄만 알았던 소니아의 딸 미리란 년이, 그렇게 울어서 나를 못살게 굴던 때와는 딴판으로 그 예쁘장한 얼굴에다 방글방글 미소를 씨면서 깡총깡총 뛰어나와서는,

아저씨! 또와! ! 우리 엄마 있을 때 또 와서 놀아, ? 빠이 빠이!

하면서 고사리 같은 귀여운 손을 흔들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 그래! 그래!

나는 대답을 하는 등 마는 등, 뒤도 안 돌아다보고 이 아파트 현관을 단숨에 튀어 나와버 리고 말았다.

불안과 불쾌한 기분 가운데 며칠이 지났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무슨 소식이 있을까, 혹시 파출소에서 순사라고? 경찰서에서 형사라고? 소니아의 싸움에 나를 관련시켜 불러내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잡지사엘 나가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애꿎은 소니아라는 여인을 여류시인이라고, 주착없이 내게다 소개해 준 나의 선배 모씨만 나무라면서 내 앞에 나타나는 날이면 분풀이를 톡톡히 하리라 벼르면서 하루 이틀을 보냈다. 일주일, 열흘, 그래도 아무 소식도 없었다.

나는 그제서야 적이 안심하고,

<저희들 일이니까 저희들끼리 적당히 해결 지었겠지!>

하는 생각으로 될 수 있으면 소니아라는 여인과 그날 밤 술 때문에 생긴 어처구니없는 봉변을 깨끗이 잊어버리려고 애썼고 또 자연 시일이 경과될수록 희미하게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또 대엿새쯤 지냈을까. 그날 나는 잡지사에서 일이 좀 바빠서 저녁 일곱 시나 되어 여름날 석양이 서녘에 비치고 차츰차츰 황혼이 기어들려 할 무렵에 혼자서 집을 향하여 K() 넓은 거리 페이브먼트를 더벅더벅 걸어가고 있었다.

별안간 등덜미에서 -선생님! 선생님!-하는 날카로운 여인의 음성과 함께 -삐이걱-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지프차 한 대가 덜커덕 멈추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몸을 돌이키니 핸들을 잡고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았는 것은 가슴에 으리으리하게 훈장을 여러 개 달고 잔나비 같이 시뻘건 얼굴에 유난히 푸른 눈이 번쩍이는 미군장교요, 그 옆에 앓았다가 깡총 뛰어내리는 것은 은빛 하이힐에 횐 빛 이브닝 드레스를 달아갈 듯이 입은 소니아 바로 그 여인이었다.

마치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내편에서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재빨리 제 말만 참새같이 재재거리듯 주워섬기는 것이었다.

선생님 ! 선생님 ! , 지금 댄스파티에 가느라고 시간이 없어서 긴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전 번에는 참 실례했에요-,,--, 함부로 막 저의 정부니. 애인이니, 좋아하는 사람이니 해서,,,-, 그러나 그따위 자식을 딱지 시키려면 그런 소리라도 해야지 별 수 있에요! 용서하세요! ? 선생님 ! 그리구 아무 것도 걱정하실 건 없에요 ! 제가 아무리 이렇게 지내는 여자지만 까닭 없이 선생님께 불명예스런 결과가 미치게야 하겠어요 ! 이상한 기회에 술이 취하셔서 저의 집엘 오셨기로서니,,,,,, 자세한 말씀은 요 다음 또 뵈올 기회 있으면,---,-, 안녕히 계셔요! 빠이! 빠이!

내 말은 한마디도 들어볼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제 말만 주워섬기고는 또다시 깡총 지프차 위로 뛰어올라가면서 손을 흔드는 것이었다. 그 손을 흔드는 품은 마치 얼마 전에 내가그 아파트를 나을 때 소니아의 딸 미리가 <아저씨 또 와!> 하면서 손을 흔들던 그것과 꼭 같이 아무 거리낌도 없고, 아무 두려움도 없고, 그야말로 구김살 없는 벌거벗은 감정 고대로 같았다.

또 한 달이 지났을까? 소니아도, 그날밤 일도 완전히 내 머리에서 사라져버렸을 때다. 더위도 고비를 지나서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들선들한 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날 오후였다. 내가 다니는 잡지사는 어떤 빌딩 삼층에 있었고 바로 옆집이 K신문사요. 이 신문사 앞 한길 건너로 마주 바라다 보이는 삼층 높다란 집은 무슨 X인가, 무슨 P인가 하는 미국군인들이 점령하고 있는 기관이었다.

오후 서너너덧 시, 나는 그날 원고정리에 정신없이 골몰해 있었다. 별안간 나와 책상을 나란히 하고 일하던 A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저것 좀, 저것 좀 내려다봐요!

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열어젖뜨린 유리창으로 한길을 내려다보자니, K신문사 문 앞에서 석간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무수한 신문 파는 아이들이 제가끔 손에 모래와 돌멩이를 움켜쥐고 -와아-소리를 치면서, -양갈보 !>(양갈보 !)소리를 지르며, 길가는 한 여자에게 몰려들어 뿌리고, 끼얹고. 던지고 하는 것이었다.

A씨의 말에 의하면, 이 여자는 방금 길 건너 미국사람 기관에서 나온 조선여자인데, 이 짓궂은 신문 파는 아이들은 호기심에선지 장난에선지 하여튼 여기서 나오는 조선여자만 보면 저렇게 <양갈보! 양갈보!>하고 못살게 구는 것이라 한다.

돌팔매를 맞으며, 모래를 뒤집어쓰며 쫓기어가다가, 대항해보려는 듯이 몸을 돌이킨 그 여자 ! 연분홍 빛 원피스, 허리를 질끈 동여 멋들어지게 늘어뜨린 그 여자 ! 그는 분명히 한달 전에 내 앞에서 손을 흔들고 사라진 소니아 바로 그 여인이었다.

물밀듯이 몰려드는 여러 그악스런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을 한 여자의 힘으로는 막아낼 도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두 팔 속에 얼굴을 파묻어, 돌팔매와 모래를 피하면서, 퍼하면서 줄달음질을 쳐서, 한길 저편 골목 속으로 몸을 피해버리는 것이었다.

 

 

김광주(金光洲: 1910-1973)

경기도 수원 출생. 중국 상해 남양 의대 수학. 1933년 단편 '밤이 깊어갈 때'<신동아>에 발표하여 등단. 그는 중국 대륙에서의 오랜 방랑 생활에서 길러진 호방한 기질로써 폭이 넓고 선이 굵은 작품 세계를 보인 작가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포도의 우울', '악야', '석방인', '춘상', '장미의 침실', '흑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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