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어(鯉魚)의 눈-문순태
1
추수가 끝나고 벼의 그루터기들만 을씨년스럽게 남은 황량하게 팅 빈 늦가을의 들판을 탕탕탕 양수기 돌아가는 소리가 온통 줴흔들었다.
논바닥이 쩍쩍 갈라진 큰 가뭄에도 물 한 방을 퍼내지 못했던 월곡리 용소(龍沼)의 물을 품고 있었다.
빨갛게 물든 붉나무며 개옻나무의 잎이 쫓겨가는 가을의 마지막 몸부림으로 우수수 털어지고 있는 마을 앞 산등성이에 등황색 노을이 엷게 비껴 내렸다.
나는 안산의 노을을 보며 발바닥이 껄끄럽게 느껴지는 논바닥을 가로질러 비석거리 주막으로 향했다. 양수기가 마치 내 마음속 가장 깊숙한 곳에 괴어 있는 양심의 찌꺼기들을 뿜어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양수기 돌아가는 소리가 녹슬어버린 패 양심에 끌질을 하는 것처럼 들렸다. 맷돌을 매달아 깊은 용소에 빠뜨려 죽음을 당한 석구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혀왔다. 지금도 석구 아버지는 무거운 맷돌을 지고, 명주실꾸리 하나가 다 들어간다는 용소 바닥에 깔려 있을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뿌려놓고 간 죄업(罪業)의 씨를 거두기 위해 30년 만에 고향에 내려왔다.
30년 전 아버지가 용소에 처넣어 죽였다는 석구 아버지의 유해(遺骸)를 건져내기 위해 월곡리에 왔을 때, 이상하게도 마을 사람들은 이를테면 살인자의 아들인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기실 고향 사람들을 대하기가 면괴스럽고 두려웠었다. 그런데도 뜻밖에 그들은 마음속에야 서슬이 퍼런 후비칼을 감추었을지 몰라도 겉으로는 구김살 없이 흔연스럽게 대해 주었다.
용소에 양수기를 대고 물을 품어내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마을의 노인들은 마을이 생긴 이래로 물 한 방을 손대지 않은 터에 깡그리 바닥을 내겠다니, 그렇게 되면 일시에 월곡리가 폐촌이 될 것이라면서 반대를 했다. 용소에는 등천(登天)을 기다리는 큰 이무기가 살고 있다는 거였다.
그러나 마을 노인들도 그것이 믿을 수 없는 한갓 전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였으므로, 곧 나의 설득에 양해를 해주었다.
고향 사람들이 나를 홀맺힌 눈으로 흘겨보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판사(判事)라는 나의 지위 때문에 아픈 과거를 까맣게 잊고 있는 거였다. 그들은 어쩌면 나를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그들을 대할 때마다 나의 심장은 엽록소가 빠져버린 떡갈나무 잎처럼 바싹바싹 죄어들었다. 오히려 고통스러웠다.
"자네가 고등고시에 합격했을 때, 월곡리에 인물 났다고 온통 떠들썩했구만. 면에를 나가나 융에를 나가나 자네 자랑뿐이여. 깨복쟁이 판사 친구를 가졌으니 뻐길만도 허재 머."
나를 처음 본, 어렸을 때의 월곡리 친구들은 스스럼없이 반겨주었다.
비석거리 주막에 당도하자, 박쥐의 날개 같은 칙칙한 어둠이 월곡리 마을을 거뭇거뭇 덮기 시작했다. 대추나무와 대죽나무가 바자울 위로 우듬지를 쳐들고 서 있는 주막의 마당에도 어둠이 배를 깔고 땅에 납작 엎뎠다.
"추접시런 방에서 귀하신 서울 나리가 어뜨케 기무실란가(주무실가는가)모르겠네요. 군불은 흠씬 지폈응께 방은 뜨뜻헐 것입니다만..."
십여 년 전 읍에서 이사를 왔다는 비석거리 주막의 나이 많은 과부가 버릇처럼 김밥 싸듯 두 손을 마주잡아 싹싹 문지르며 말했다.
나는 쉬고 싶었다. 시간이 너무 지루한 탓인지 심신이 진흙처럼 가라앉았다. 주막의 아낙이 전등의 개폐기를 돌려 불을 켜주고 나갔다. 낮에 왔을 때까지만 해도, 횃대에는 옷나부랑이들이 너절하게 걸려 있었고, 방 웃목의 대발 속에 흙 묻은 고구마가 가득 들어 있었는데, 그사이 깨끗하게 치워졌다.
나는 신문지로 언틀먼틀 도배를 한 벽에 등을 비스듬히 기대고 참담하게 앉아 있었다. 양수기 돌아가는 소리가 지쳐버린 나의 신경을 갈기처럼 찢어 발겼다.
용소의 물을 다 품어내자면 꼬박 이틀 밤낮이 걸릴 것이라는데, 그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어떻게 감내해야 할지 눈앞이 아뜩하였다. 자식된 도리로 아버지의 죄 닦음을 대신하자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마음을 다독거려 보았지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아버지에 대한 원망스러움이 독 오른 황백색의 붉은 말뚝버섯처럼 목구멍에 뻗질러 치솟는 것을 짓누를 수가 없었다.
낮에 용소에 긴 호스를 집어넣고 양수기를 돌리기 시작하자, 월곡리 사람들이 소의 주위를 겹겹이 빙 둘러쌌다. 30년 전의 주검을 화인하기 위해, 용소를 들여다보는 그들의 눈에는 일말의 슬픔도 없이 구경꾼의 호기심만 팽팽했다. 그들은 살인자의 아들인 나를 질시하기는커녕, 되려 큰 구경거리를 만들어 준 데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는 듯싶었다. 나는 그런 그들이 얄밉거나 비굴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내 마음의 중심을 가늠하기 어려운 고통을 맛보았다.
석구까지도 그랬다. 그 역시 과거의 아픔 따위는 칼칼이 씻어버린 듯, 슬퍼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참말로 고맙네. 자네 땜시 우리 아버님 유볼을 찾게 되었으니. 이 은혜 워치게 갚을까잉. 자네가 아니었더라면 우리 아버님 유골은 영영 용소 바닥에 쟁겨 있을 것이 아닌감. 참말로 이르케 와줘서 고맙구만. 우리 아버지 유골이 용소 바닥에 쟁겨 있는 것을 알려 준 것만도 천만번 고마운듸, 양수기 돌리는 기름값이랑, 인부들 품삯이랑 묘지 쓰는 비용이랑 다 부담허겄당께, 참말로 자네 볼 면목도 없구만 그려!"
낮에 양수기가 물을 품기 시작하자 석구가 내 손을 꼭 움켜잡고 허리까지 굽적여가며 한 말이었다. 나는 그런 석구에게 할말조차 잃어버렸다. 나는 다만
"모든 비용은 내가 부담할 테니 걱정 말게."
하고 같은 말만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석구 자네는 바보인가 아니면 예수님인가 하고 혼자 말했다.
석구가 처음 나를 찾아온 것은 지난해 초봄이었다, 그는 헙수룩한 점퍼 차림에 넥타이를 맸는데, 와이셔츠의 목깃에 땀이 누렇게 배어 있었다. 석구가 월곡리에서 함께 자란 어렸을 때의 친구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 나는 필시 판결에 앙심을 품었던 죄인이, 형기를 마치고 찌그렁이를 부리려고 찾아온 것으로 착각했었다.
"나,,,,, 박 석구로구만."
그는 판사실 내 방으로 들어서자 허리를 굽적이며 지싯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월곡 사는 석구라니께!"
내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뜨악해 하자 답답한 듯 다시 말했다.
나는 월곡이라는 말에 비로소 어렴풋하게 귀가 트였다. 나는 월곡에서 열 살 때까지 살았다. 그리고 열 살 되던 해 여름, 월곡의 안산에 빨강 보라색의 양초꽃이며 노란 곤달비꽃이 흐드러지게 필 무렵 서울로 이사를 왔다. 그 뒤로 한 번도 고향에 가보지 않았다. 월곡리 말만 꺼내면 아버지가 버르르 화를 냈다. 아버지가 왜 고향 이야기만 나오면 화를 내는지 그 이유를 알 턱이 없었다.
"애비한테는 고향도 절도 없다. 그러니 내 앞에서 월곡리 이얘기는 꺼내지도 말거라. 고향이 무신 밥 먹여 준다더냐?"
그런 아버지였기 때문에 나는 고향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고향을 생각할 수 없는 내 머릿속 유년 시절의 기억은 하얀 백지로 비어 있기 마련이었다. 고향의 산 이름, 나무와 풀잎, 새들, 물고기의 이름도 잊어버렸으며, 심지어는 열 살 때까지 함께 멱감으며 무자맥질하던 고향의 어렸을 때 친구들 이름 하나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그런 나였기 때문에 박 석구라는 이름을 알 턱이 없지 않겠는가.
나는 판사실로 나를 찾아온, 나보다 열 살쯤은 더 되어 보이는 박 석구라는 헙수룩한 남자가 분명 고향에서 올라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아, 네 -앉으시지요."
하고 소파에 앉기를 권했다.
"허허, 나를 몰라보시는구만. 나 자네 깨복쟁이 친구 석구라니께 그러네."
그는 내가 존댓말을 쓰자 답답한 얼굴로 나를 찬찬히 되작거려 보며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나보다 열 살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그가 나와 어렸을 때의 친구였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와 마주 앉은 지 한참 후에야 그의 왼쪽뺨 툭 불거진 광대뼈 밑에, 거머리가 달라붙어 있는 것 같은 흑갈색의 흉터를 보고서야, 그가 바로 우리 옆집에 살던 뚝보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성깔이 워낙 뚝뚝하여 그렇게들 불렀다.
뚝보 박 석구는 월곡 안에서는 무서운 싸움장이였다. 그는 하루도 싸움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같은또래 아이들하고는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보다 두서너 살 아니면 대여섯 살 위의 큰 아이들하고만 싸웠다.
뚝보는 그의 아버지가 살잽이꽃을 만들 때 쓰는 날캄한 송곳을 가지고 다녔다.
뚝보의 할머니는 무당이었으며 그의 할아버지는 양중이였다, 그 때문에 월곡 사람들은 나이 많은 그들 노부부한테 하게로 반말을 하였다.
뚝보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뜨자, 뚝보 아버지가 징이며, 북, 장구, 꽹과리 등을 지고 굿판을 따라다니며, 뚝보 할아버지 대신에 무당 어머니의 바라지를 해주었다. 목이 길어 황새라고들 부른 뚝보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양중이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징채를 잡았고, 열 살 때에는 박자가 틀린 곳을 알아낼 만큼 굿거리 장단을 쉽게 익혔다고 하였다.
그러던 황새는, 어머니마저 죽자 할 일이 없어져버렸다. 그는 장구를 메고 걸립패를 따라다니기도 하였고, 상여도가에 가서 종이꽃을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그는 모란꽃, 연꽃, 살잽이꽃, 막잽이꽃, 옥살잽이꽃, 국화, 덤불국화. 산함박, 불도화, 다지화, 매화 같은 갖가지 꽃들과 탑등, 용문등, 꽃등. 동전, 은전, 오귀문, 신 광주리까지도 잘 만들었다.
목이며, 머리, 다리가 길쭘하여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빼어나게 수려한 황새는 말수가 없었다. 그는 월곡 사람들과는 어울리지도 않았다. 무당의 자식이라 하여 조무래기 아이들이 반말을 해도 표정 없이 수걱수걱 긴 목을 주억거려주었다.
그런 황새와는 달리 그의 아들 뚝보는 늑대처럼 성질이 사나왔다. 그 때문에 뚝보가 차츰 커가면서부터는 아이들이 뚝보 앞에서는 그의 아버지일 황새한테 반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뚝보의 왼쪽뺨에 거머리만한 상처가 어쩌다가 생겼는지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뚝보보다 나이가 여섯 살이나 위인 우리 집 꼴머슴 팔만이가, 뚝보 앞에서 그의 아버지 황새한테 반말을 하여 싸움이 벌어졌던 것이다. 팔만이는 언제나 그랬듯이 아침을 먹고 꼴망태를 메고 꼴을 베러나가다가, 돈들막에서 황새를 만났는데, 무심히 지나는 말로
"나도 황새 모양으루 장구잽이나 되고 싶은듸, 장구 좀 갈쳐줄란가?"
했을 뿐이었다. 이 말을 들은 뚝보가 물레방앗봇도랑으로 꼴을 베러 간 팔만이의 뒤를 밟았다. 필시 싸움이 벌어질 것이었으므로 나는 아이들과 함께 뚝보의 꽁무니를 지싯지싯 따랐다.
"야, 이 느거멈 헐 쌔까. 아까 너 장구잽이가 되고 싶다고 했쟈?"
뚝보가. 마악 봇도랑에서 쇠무릎이며 둥굴레, 닭장이풀, 개비름 등을 한 움큼 휘어잡고 낫질을 하기 시작하는 팔만이 앞에 바짝 붙어서며 튕겨댔다. 팔만이가 낫을 든 채 허리를 펴자 뚝보는 그보다 키가 한 뼘이나 더 큰 팔만이의 멱살을 죄어잡았다.
"내가 설장구 놀음을 갈쳐줄 텐께 흔 좀 나볼래 이 쌔까?"
뚝보는 그러면서 팔만이의 멱살을 잡아쥔 채 함께 빙빙 돌았다. 한참을 돌다가 뚝보는 멱살을 놓으며 팔만이를 물레방앗간의 물이 넘실넘실 흐르는 봇도랑 안으로 밀어뜨려 버렸다. 팔만이는 첨벙 봇도랑 속에 처박히고 말았다. 미꾸라지처럼 흠씬 젖은 팔만이가 낫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낫끝이 뚝보의 왼쪽뺨을 깊숙이 찢었다. 뚝보의 뺨에서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피가 흘렀다. 뚝보의 뺨에서 피가 나자, 팔만이가 섬뜩 돌아섰다. 이때 뚝보가 언제나 조끼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송곳을 꺼내들고 미친 듯 달려들어 팔만이가 미처 낫을 치켜들 사이도 없이, 송곳으로 어깨와 등을 마구 찍어댔다. 뚝보는 아픔에 못 견뎌 비칠거리는 팔만이를 넘어뜨려 배 위에 올라타고 앉아서는, 송곳으로 팔만이의 눈을 찔러버릴 기세였다. 이때 마을에서 황새가 뛰어와 뚝보의 등덜미를 나꿔챘다. 뚝보의 얼굴은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아버지한테 끌려가면서도 송곳을 휘둘러대며 목청껏 팔만이에게 욕을 퍼부어댔다.
"자네가,,,,,, 이거 어쩐 일인가? "
나는 석구에게 담배를 권하고 라이타에 불을 댕겼다. 내가 불을 켜주자 그는 몇 번이고 엉덩이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송구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해 하였다.
"진작 자네를 찾아뵐려고 했네만 면목이 없어서,"
석구는 내가 불을 댕겨준 담배를 짧은 숨으로 빠끔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가 무엇 때문에 면목이 없다고 한 것인지 그의 말뜻을 몰랐다.
"자네를 첫눈에 몰라봐서 미안하이. 헤어진 지가 한 삼십 년 되니까,-----그래 자네는 지금도 월곡에 사는가?"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이야 어디 뿌리를 욈기기가 그리 쉬운가?"
"그래. 서울엔 무슨 일로 왔는가?"
"자네를 만나려고 일부러 큰맘 묵고 왔구만,"
"나를 만나려고?"
나는 필시 박 석구한테 송사(訟事)가 생겼거니 짐작하였다. 그의 성질이 워낙 급하고 왁살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이라, 싸움질을 하다가 사고를 냈거니 생각하였다.
그런데, 30년만에 내 앞에 앉아 있는 박 석구는 옛날의 뚝보답지 않게, 성질이 사나와 보이지가 않았다. 늑대 같던 그가 총 맞은 고라니처럼 맥이 없어 보였다. 몸집도 나보다 훨씬 작았으며, 발라먹은 대추씨처럼 피골이 상접하고 까무잡잡한 얼굴은, 광대뼈와 거머리 같은 흉터만 남은 듯싶었다. 목소리도 삶에 지쳐버린 듯 창자 속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고, 수리부
엉이의 눈 같았던 동공도 거무죽죽하게 찌푸린 여름날 하늘처럼 흐렸다.
"송사라도 생겼는가?"
나는 애써 친근감이 느껴지도록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워디가!"
그는 갑자기 격렬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나 말이시, 옛날 뚝보가 아니라네. 우리 아버님이 그 일을 당한 뒤로 성질이 죽어뿌렀어!"
나는 그가 송사 때문에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일단 마음을 놓았다.
"실은 말이지,,,,,, 죄송천만이네만 우리 아버님 유골을 좀 찾아주십사 흐그?----
석구는 고개를 바로 들지 못하고 한사코 내 시선을 피하며 힘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는듸, 지난 겨울에 어머니가 눈을 감음시롱 이야기를 허시드만. 자네 아버님헌테 찾아가서 백배 사죄흐고, 우리 아버님 유골 찾으라고 말이시,,,,,,"
"아니 ? 우리 아버님이 자네 춘부장님 유골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아신다고?"
나는 박 석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석구가 뭔가 그의 어머님한테서 이야기를 잘못들은 듯싶었다.
"암턴 면목이 없네. 물론 우리 아버지 죽음이 떳떳하지 못했던 것만은 잘 알고 있다네. 돌아가셔야 마땅한 분이었어. 흐재만 자식된 도리로 유골만은 찾아서 뫼시고 싶어서 말이시,,,,,, 그러고 어머님 유언도 그렇고."
나는 뚝보 아버지 황새에 대한 인상이 자꾸 헷갈려 확연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황새는 한 사람이 아니고 두 사람이었던 것만 같았다.
도무지 말이 없고 누구하고 어울리지도 않았으며, 목낭청이처럼 이래도 응 저래도 응 하는 배알도, 줏대도, 성깔까지도 없는 것만 같았던 황새가 전쟁이 터지자 갑자기 딴사람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비행기 소리며, 탱크 굴러가는 소리, 가슴에 쉥쉥 바람구멍을 낼 것 같은 총소리에 간경이 뒤집혀버린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월곡 사람들은 성질이 갑작스럽게 새벽 호랑이처럼 변해버린 황새를 보고, 어느새 뚝보가 커서 사나운 어른이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착각을 할 정도였다. 그는 총을 멘 엷은 배추색 옷을 입은 사람들과 휩쓸려 다니면서 큰소리로 월곡 사람들을 심하게 욱대겼고, 숨은 사람을 찾아내는 일이며 일러바치는 일, 고문을 하고 죽이는 일에 미치광이처럼 날뛰며 앞장을 섰다.
그러던 그가 세상이 손바닥 뒤집어지듯 하루 아침 사이에 다시 바뀌자 월곡리에서 사라졌다.
"참말로 죄만스럽네. 자네 어머님을 그 지경으로 만든, 사람답지 않았던 아버지 유골을 찾겄다고 뻔뻔스럽게 자네 앞에 나서다니,,,,, 용서해주소."
순간 나는 석구의 말 중에서, 자네 어머니를 그 지경으로 만든, 하는 대목이, 마치 목구멍에 명태 가시가 걸린 듯하여, 그 말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반문하려고 하였으나, 석구 쪽에서 지싯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지는 사람이 아니었어. 이웃에 삼시로, 그것도 자네 아버지도 안 계시는 그 난리통에 자네 어머님을 욕보이다니, 그 짓을 어찌 사람의 탈을 쓰고 헐 짓인가? 우리 아버지는 짐승이었어."
나는 떨리는 손으로 몇 모금 빨지도 않은 담배를 재털이에 짓비벼 껐다. 심장과, 온몸의 근육과, 핏줄과, 신경 세포들이 한꺼번에 파닥거리며 떨려 왔다. 떨리는 뇌세포 안에서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비에 젖어 낙화한 목련꽃처럼 휘주근하게 떠올랐다.
석구 아버지 황새가 미친개처럼 월곡 안통을 휘젓고 다닐 무렵, 어머니는 용소 위에 시체로 떠올랐다. 횐 고무신을 용소 옆 푸른 보라색의 물달개비꽃 풀섶 위에 가지런히 벗어놓은 채, 8월의 아침해와 함께 물위에 하늘을 향해 반듯하게 떠올라 있었다.
새벽마다 찬 각시 샘물로 목욕을 하고, 앞마당 살구나무 밑에 물을 떠놓고 남쪽 끝으로 피난을 간 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풀잎 같은 마음으로 빌던 어머니가 죽은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왜 용소에 빠져죽었을까 그 이유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었다. 해가 머리 위에 떠오른 뒤에야 마을 사람들이 어머니의 시신을 건져내, 흰 고무신이 가지런히 놓인 물달개비 풀섶 위에 반듯하게 뉘이고 거적을 덮었다. 그리고 혼을 건져주지도 않는 채 용소 위 떡갈나무 밭에 묻었다.
그때 나는 울지 않았다. 아마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눈물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눈물이 봇물 터지듯한 것은, 그해 가을, 어머니 무덤 옆의 붉나무며 옻나무 잎들이 빨갛게 물들고, 세상이 한번 더 엎질러져서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였다.
아버지가 돌아오자 황새의 모습이 사라져버렸었다.
"죽은 우리 아버지 대신에 내가 자네헌테 용서를 비네. 그러니 자네가 우리 아버지를 용서해 준다면,,,,,, 유골을 찾게 해주소."
석구는 그러면서 우리 집에 같이 가서 아버지를 만나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석구를 집에 데리고 가고 싶지가 않았다. 집에 가고 싶지 않은 것보다, 그가 아버지와 대면을 하는 것이 아직은 싫었다.
나는 곧 월곡으로 연락을 해주겠노라고 하며 그를 돌려보냈다.
그날 나는 퇴청 시간이 되기도 전에, 어렸을 때 떼어낸 맹장이 다시 돋아나 염증이 생기기라도 한듯, 노골적으로 괴로운 얼굴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때도 이르게 참담한 기분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고 아내가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털진득찰처럼 달라붙으며 성가시게 캐물었으나, 나는 대꾸를 해주는 대신 다급하게 아버지부터 찾았다.
그 즈음 아버지는 바빴다. 노인회 새바람 운동을 한다면서, 아침 일찍 나가서 여럿이 어깨에 띠를 두르고 공원이며 도심지를 누비다가 어두워서야 돌아오곤 하였다. 회갑이 지난 지가 8년이 되었는데도 새벽마다 냉수 마찰을 하고 약수터까지 뛰어갔다 오곤 하였다. 아버지의 소원은 백 살까지 사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자랑은 6. 25때 공비토벌 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었고, 나라가 누란(累卵)에 처했을 때 애국 충정으로 혈서를 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말대로라면 자유당 때만 해도 이승만 정권을 위해 열두 차례나 혈서를 썼노라고 하였다,
중학교 다닐 때, 나는 아버지가 혈서를 쓴 것을 보았었다. 장충 공원에서 선거 연설이 있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집에서 가까운 곳이어서 연설장에 구경 삼아 나갔었다. 시민들한테 별로 인기도 없는 자유당 후보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아버지가 연단 위로 뛰어올라가서, 그 후보를 지지한다는 혈서를 썼다. 그때 나는 아버지가 너무 불쌍해서 울고 싶었다. 아버지는 또 학생들과 공무원들이 동원되는 큰 궐기대회 때마다 혈서를 썼다. 혈서를 쓴 날의 저녁상엔 어김없이 푸짐하게 고기가 올랐으며, 아버지는 왕성한 식욕으로 맛있게 고기를 먹으면서, 거즈를 감은 손가락으로 허공을 찌르며, 애국 투사가 된 기분으로 일장 연설을 하곤 하였다.
나는 아버지가 혈서를 쓴 날엔 상에 오른 고기를 한 점도 먹지 않았었다.
그 무렵 우리는 너무 가난했다. 단간 월셋방에서, 두 번째 얻은 작부 출신의 새어머니와 셋이서 함께 엉켜 살았다. 뚜렷한 일자리가 없는 아버지는 낙선된 국회의원 후보의 당사무실 주변을 맴돌면서 궐기 대회가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혈서를 쓴 다음날엔 나는 어김없이 혈액 병원으로 가서 피를 팔았으며, 아버지가 혈서를 써 주고 고기를 사온 대신에, 책과 학용품들을 샀다.
아버지가 서울에 올라와서 얻은 새어머니들은 일 년을 못 넘기고 도망쳐 버리곤 하였다. 아버지가 회갑을 맞았을 때, 기념사진까지 찍었던, 어머니라고 하기보다 누님 같았고 고향도 같은 전라도 출신인 마지막 새어머니까지 합하면 모두 여섯 여자가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새어머니들이 도망치듯 해버린 것이 우리가 너무 가난한 탓이겠거니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가난 탓이 아니고 모두 아버지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젊어서 과부가 되어 식모살이로 떠돌음하다가 우리 집에 들어온 아버지의 여섯 번째 여자가 집을 나가면서, 내게 한 발이 끝내 삭여지지 않고 명치끝에 바늘처럼 꽂혀 있었다.
"자네를 봐서라도 이 집을 나가지 않으려고 했네만, 징해서 더는 못 살겠네. 자네 아버님은 사람이 아니고, 무서운 악마구리여. 나 말이시, 가난에는 평생에 이골이 난 년이라서 얼매든지 참을 수가 있재만, 양심이라고는 담배씨 만큼도 없는 막된 사람허고는 살붙이고 살 수아 없네. 지난 난리 통에 사람을 많이 쥑였으면 이제라도 심뽀를 고쳐서 속죄허는 마음으로 살어야 헐 것인듸, 되레 이력나두룩 자랑을 해쌓니, 징그러워서 못 살것당."
그러면서 여섯 번째 새어머니는, 아버지와 4년 동안 함께 살아온 죄로 절에나 다니면서 아버지를 위해 부처님께 빌겠다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대, 다섯 번째의 여자들도 어쩌면 마지막 여자처럼 가난을 못 이겨서가 아니고, 아버지가 입심 좋게 자랑해 쌓는 그 끔찍스러운 과거 때문에, 고개 내두르고 도망쳐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런 아버지를 내 아내와 아들놈까지도 늘 뜨악하게 대해오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월곡에서 아버지를 따라 나올 때와 같은 나이든 아들 녀석이 최근에
"할아버지는 꼭 인디언들을 많이 쏘아 죽인 미국 기병 대장 같다니까."
하는 말을 뚜벅 했을 때, 아버지는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흔들고 뻐기면서 웃어댔지만, 나와 아내는 아들놈을 크게 꾸짖었었다. 아버지는 그때 되레 손자를 꾸짖은 나를 꾸짖었다.
아버지는 손자인 내 아들녀석한테 전쟁 때의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까발리곤 하였다.
공비를 죽였을 때마다 눈깔을 후벼파서 꼬들꼬들하게 말려 모았었다는 이야기며, 밤에 지서를 습격해 온 놈들을 잡아 그가 먹은 나이만큼 몸에 스물 두 군데 총구멍을 내어 죽인 이야기, 지리산에서 산 채로 두 눈깔을 후벼파 버린 뒤에 놓아주었더니 눈에서 피를 흘리고 도망을 치다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더라는 이야기 60밀리 박격포를 골통에 바짝 들이대고 쏘았더니 머리가 흔적도 없이 없어져버리더라는 이야기를 게게거리며 늘어놓았었다.
아버지는 그때 죽은 공비들의 입에서 빼낸 금이빨들을 모아 구멍을 뚫어 훈장처럼 걸고 다녔었다. 그 금이빨들이 목걸이처럼 여러 개였었는데, 서울에 올라와 혈서를 쓰고 살면서 야금야금 곶감 꼬치에서 곶감 빼먹듯 다 팔아먹고 지금은 호박씨처럼 생긴 것 딱 하나만 남아 있었다.
내가 언젠가 아버지한테 제발 그 금니랄 좀 목에 걸고 다니지 말라고 하였더니
"이놈아, 이것은 내가 나라를 위해 용감하게 살아온 마지막 남은 증표여. 죽어서 무덤까지 갖고 갈 테니께 그따우 소리 말어!"
하고 벌컥 화를 내던 것이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여섯 번째의 새어머니 말대로 악마구리처럼 무섭다거나 징그럽게 느껴지지 한때 용감했다거나, 나쁘게 말해서 잔인했던 사람들, 또는 죽을 고비를 무수히 겪어온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어리석을 정도로 마음이 약한 일면을 볼 수 있어, 오히려 불쌍하게 생각했다.
나는 아버지가 지난날 전쟁에서 사람들을 죽였을 때의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떠들어댈 때마다 내 아들녀석보다 더 약해진 아버지의 속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석구가 나를 만나고 간 날, 아버지는 검실검실 어둠이 내려 덮일 무렵 어깨에 새바람 운동 띠를 두른 채 불콰하게 술에 취해 돌아왔다.
"저, 아버지. 월곡에서 사람이 찾아왔던데요?"
저녁 밥상머리에서,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숟갈을 국에 적시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월곡에서? 뭣 때문에?"
아버지는 누가 찾아왔었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고, 무엇 때문이냐고 하였다.
"박 석구라고요,,,,,, 제 사무실로 찾아왔었어요.
"박 석구가 뭣 하는 놈인듸?"
아버지는 또 무엇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매사에 그랬다. 사람을 돈과 지위로만 따지려는 위인이었다.
"황새라고,,,,,, 아시지요?"
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아버지의 눈빛과 얼굴의 움직임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표절은 눈에 띌 만큼 주름살 한 가닥도 달라지지 않았다. 불콰한 얼굴에는 그저 사는 것이 떳떳하고 자랑스러울 뿐이라는 듯 느긋함이 진흙처럼 끈끈하게 괴어 있었으며, 불만이나 괴로움 같은 거무죽죽한 표정, 회한의 회색 그림자 따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무당집 황새 말입니다."
"그래 그놈이 어쨌다는 게여?"
아버지는 내가 되풀이하여 이야기하자 핏발 선 눈으로 나를 쏘아보며 벌컥 화를 냈다.
"그 황새의 아들 석구가 찾아왔더라니까요."
나는 말소리를 나지막하게 죽이며 지나가는 말투로 가볍게 말했다.
"그놈이 뭣 땜시 너를 찾아왔단 말이여."
아버지는 여전히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를 다는 걸 그냥 보냈어요. 얼마 전 석구 어머니가 세상을 떴는데요, 임종 때 유언을 듣고,,,,,,"
나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시선을 내려버렸다, 아내와 아들녀석이 듣는 자리에서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나는 밥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수저를 놓아버렸으나, 아버지는 밥 한 그릇과 국 한 대접을 다 비우고, 숭늉으로 입안을 헹군 다음 여전히 화난 얼굴로 주방에서 나갔다.
나는 갑자기 밥 입맛이 뚝 떨어져 조금밖에 먹지 않았는데도, 복부 팽만감과 함께 기분이 들독에 눌린 듯 찜부렉해졌으며, 끄억끄억 트림까지도 하였다. 아내를 시켜 소화제를 따먹어 보았지만 여전히 속이 거북하였다. 여태껏 소화불량 따위로 단 한 번도 고생을 해보지 않은 나는, 갑자기 소화가 되지 않고 끌끌거리자 신경줄이 머리카락처럼 미세하게 갈라지는 것 같았다.
나는 속이 답답하여 화장실로 들어가서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어 저녁에 먹었던 것을 모두 토해버렸다, 그제서야 트림도 나오지 않았고 팽만감도 없어졌다.
입을 헹구고 담배 한 대를 이빨로 휠터를 짓씹어 돌려가며 피우고 나서 아버지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내가 석구의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려고 들어오는 것으로 짐작하고, 표정을 무겁게 떨구었다.
"석구 이야긴데요. 자기 아버지 유해를 찾아달라고 부탁을 하던데요. 석구 아버지 유해가 어디 있는지 아버님만 알고 계신다면서,,,,,,"
나는 말끝을 흐리며 정면으로 아버지를 보았다, 저녁에 먹은 것을 깡그리 토해버렸는데도 또 트림이 나왔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텔리비젼 화면만 지켜보고 있었다.
"석구 말로는...... 자기 아버지는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이지만---자식된 도리로 유골이 라도 찾아야겠다고,,,,,,"
"황새 그놈은 백 번 뒈져도 마땅해."
아버지가 갑자기 버럭 고함을 쳤다.
"석구 어머니 유언으로는,,,,,, 아버님만이 석구 아버지의 유골이 어디 있는지 아신다고 했다는데요."
"삼십 년도 더 지난 옛날 일인의, 그까짓놈 뼉다귀는 찾아서 뭣흐게!"
"그래도,,,,, 자식된 도리로는,,,,,,"
그러나 아버지는 더 이상 달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듯 나한테 등을 돌리고 텔레비젼을 향해 모로 누워버렸다.
다음날 아침을 먹은 뒤에도 나는 소화가 되지 않았다. 점심을 아예 굶어버렸으나 팽만감으로 뱃속이 더부룩하여 손 발 하나 까닥하고 싶지가 않았다. 갑자기 나는 포장집 도마 위의 해삼처럼 무기력해져버린 것이었다. 무기력해진 대신에 신경질만 늘어났다. 신경줄이 키타 줄처럼 팽팽해져 걸핏하면 소리를 왝왝 내지르곤 하였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서너 숟갈 떴으나 트림이 계속 나와서 다시 손가락을 넣어 토해버렸다. 아내는 걱정이 되어 병원첼 가보자고 성화였다. 그러나 나는 왜 갑자기 내 위장이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과거의 한 토막이 가시처럼 내 식도에 걸려 있기 때문인 것이었다. 그리고 내 촉구멍에 걸려 있고, 머릿속에 뇌종양(腦腫瘍)처럼 돋아난 아버지의 과거는 갈치의 뼈보다 뻗세고 명주실보다 더 질겨서, 아버지의 마음속에 쌓아올려진 오욕(汚辱)과 불민(不敏)의 탑을 허물어버리지 않은 한, 죽을 때까지 소화불량으로 끌끌거리며 해파리나 갓거리처럼
무기력하게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였다.
어쩌면 30평생을 홀몸으로 살다가 세상을 뜬 석구 어머니의 철쭉빛 한(恨) 덩어리가 내 목구멍으로 옳아온 것인지도 몰랐다.
다음날 저녁 나는 다시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갔다.
"석구와 약속을 했는데요."
내가 아버지한테 황새의 유골 이야기를 꺼낸 뒤부터 아버지는 한사코 나를 피하는 눈치였다.
"무슨 놈에 약속을 했다고 그려?"
"석구 아버지 유골을 찾아주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버님이 황새를 끌고 가서, 죽였지 않아요?"
나는 참지 못하고, 화장실에서 음식물들을 토해버리듯 그렇게 내뱉고 나서, 내 목소리가 크고 날카로운 것에 적이 놀랐다.
"그런 놈은 백 번 뒈져도 싸!"
아버지는 그 말뿐이었다. 그리고 전날처럼 내게 등을 돌리고 모로 돌아 누워버렸다.
그날 밤 세상이 온통 죽은 듯 참담하게 엎뎌 있는 사이에, 나는 아버지의 방으로 몰래 들어가, 아버지가 훈장처럼 목에 걸고 다니는 금이빨 목걸이를 훔쳐서 수채 구멍 속에 처넣어버렸다. 그러고 나서야 늘 팽만감으로 더부룩해 있는 뱃속이 조금은 개운해진 듯싶기도 하였다.
아침에, 금이빨 목걸이를 잃어버린 아버지가 온통 집안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마구 휘저었다.
"제발, 아버지도 이제 그만 하늘 무서운 줄 아세요. 이래갖고 돌아가실 때 어떻게 눈을 감으실려구 그래요? 나한테 죽은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아버지의 영혼을 지옥으로 보내겠어요. 아버지가 찾고 계시는 금이빨 목걸이는 전리품도 훈장도 아십니다. 지금은 전쟁을 하고 있지 않아요. 전쟁이 끝난 지가 삼십 년이 지났어요. 이제는 좀 뉘우칠 줄 알고
속죄를 할 때가 아닙니까. 아버지는 누가 뭐래도 어쩔 수 없는 살인자가 아닙니까."
나는 이성을 잃고 그만 아버지를 향해 흥분한 목소리로 숨가쁘게 쏘아붙이고 집을 나갔다. 사무실에서 회전의자를 돌려 앉아, 내 머릿속처럼 하얗게 공백으로 빈 회벽을 멀뚱히 바라보면서 아버지한테 너무 심한 말을 했구나 싶어, 소화가 되지 않아 무기력해진 것보다 훨씬 견딜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한테 용서를 빌어야겠다 싶어, 아버지의 새 구두 한 켤레를 사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날 밤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갈 만한 곳은 다 찾아다녀보고, 파출소에 신고까지 했으나 아버지의 소식은 잡히지 않았다.
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되어버리자 내 마음은, 30여 년 동안이나 죽은 아버지의 유골을 찾지 못해 안타까워한 석구보다 몇 배 더 초조하고 불안해 졌다. 나를 찾아온 석구가 원망스럽기까지 하였다.
아버지는 닷새 만에야 휘주근한 몰골로, 마치 남의 집에 들어오는 것처럼 식구들 눈치를 보며 돌아왔다. 닷새 동안에 아버지는 10년쯤 더 늙어 버린 듯싶었다. 알밤의 껍질 같기만 하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구겨진데다가, 눈빛은 소나기 퍼부은 뒤의 하수도처럼 흐려있었고, 두 어깨까지도 평생을 목도질만 해 온 사람처럼 무겁게 짜부라져 있었다.
말 한 마디 없이 어디를 갔었느냐고 물어도 대답을 해 주지 않은 채 방에 들어가 조용하고 힘없이 누웠다. 그날부터 아버지는 서리맞은 고춧잎처럼 시들부들 쇠잔해지기 시작하더니 앓아 눕고 말았다. 병원에 입원도 하지 않겠다고 하여 의사 친구를 매일 집으로 불렀다. 의사의 말로는 특별한 병은 없고 기력이 쇠진했을 뿐이라고만 차였다. 그 나이에 새벽마다 냉수마찰에 약수터를 뜀박질로 오르내리던 아버지가, 단 며칠만에 그렇게 기력이 빠져버리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집을 나갔다가 돌아와서 꺼져 가는 짚불처럼 앓아 눕기 시작한 지 일주일쯤 후에, 아버지는 희미한 목소리로,
"나 말이다. 월곡에 댕겨왔다."
하고 큰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가 30여 년만에 고향 월곡에 갔다 왔다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고향 이야기라면 아예 뻥긋하지도 못하게 닦달하던 아버지가 그 닷새 동안에 월곡엘 갔었다니 모를 일이었다.
"운산읍에서 하룻밤 자고 새벽 일찌기 택시 대절해서 아무도 모르게 살짜기 월곡에 갔다왔어."
"그러셨군요. 가셔서 누구를 만나셨어요?"
나는 혹시 아버지가 석구를 만나고 왔는가 싶어 아버지 옆으로 바짝 다가 앓으며 허리를 구부리고 물었다.
"아무도,,,,, 아무도 안 만나고,,,,,, 마을만 한 번 먼발치로 바라보고 왔어."
아버지는 힘없이 말했다.
죽어도 그 징그러운 월곡에는 두 번 다시 발걸음을 하지 않겠다면서 서울로 이사를 온 이듬해 봄에,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의 유해마저도 서울 근교의 공원묘지로 이장을 해버린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비록 아무도 만나지는 않았을지라도 남몰래 고향엘 다녀오다니.
나는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어, 아버지의 얼굴을 오랫동안 내려다보았다
그로부터 사흘 뒤에 아버지의 얼굴에 청홍색의 얼룩점들이 돋아나기 시작했으며 이내 조용히 눈을 감았다.
"황새,,,,,, 그놈, 네 어머니가 빠져 죽은 용소에,,,,,, 맷돌을,,,,,, 지고 있을 겨."
하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어찌됐건 아버지의 죽음은 나를 심한 자책감에 허우적거리게 만들었다.
나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2
"나 석군데, 안에 계시는가."
밖에 석구가 와 있었다. 나는 석구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머릿속에서 팔랑개비 돌아가듯한 아버지에 대한 생각들을 멈췄다. 그제서야 용소의 물을 품느라고, 죽은 황새나 내 아버지의 성깔처럼 어기차게 돌아가는 양수기 소리가 귀에 가득 들어왔다
"들어오소."
나는 꼼짝 않고 등을 기대어 어슷하게 반쯤 누운 채 말했다. 문이 열리고 지퍼가 고장나 앞섶을 옷핀으로 꿴 낡은 회색 점퍼 차림의 석구가 미적거리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제서야 나는 상반신을 움직여 고쳐 앉았다.
"워낙 피곤해서 ,,,,,,"
"나 땜시 참말로 자네 쌩고생 허는구만."
"양수기 한 대로는 오래 걸릴 것 같으니, 한대 더 구할 수 없겠는가."
나는 하루라도 빨리 월곡을 떠나고 싶었다.
"양수기야 구할 수가 있재만,,,,2
"경비는 걱정 말고 당장 한 대 더 갖다대소."
"기름 값이다, 사용료다, 눔삯이다, 옴니암니 경비가 솔찬헐 텐듸!"
"경비 걱정은 말라니까,"
나도 모르게 나는 석구에게 신경질적으로 말을 튕겨내고 있었다.
"그래도 자네한테 미안해서,,,,,,"
"당장 한 대 더 동원해 보게. 두 대로 품어내면 내일 밤까지는 용소가 바닥이 나겠지."
"저녁 묵고 그렇게 험세."
"지금 당장에 서두르소. "
나는 꼬리에 불붙은 강아지처럼 엉덩이를 들먹거리며 석구를 재촉하였다.
"우리 집으로 저녁이나 묵으러 가세."
"나 저녁 생각 없구만."
"무슨 정떨어질 소린가. 서울 올라갈 때꺼정은 찬은 없어도 우리 집에서 묵고 또 방도 치워놨으니께 우리 집에서 자세. 이 사람아, 내 일 땜시 고향에 어려운 발걸음 해 갖고 주막 신세를 지면, 나도 고렇고, 월곡 사람들 다 욕 얻어묵는단 마시."
그러면서 석구는 당장 나를 끌고 갈 기세로 허리를 굽히며 일어섰다.
"내 걱정은 말소. 나는 여기가 편하고 좋네."
나는 다시 등짝을 벽에 찰싹 붙이고 두 발을 쭉 뻗으며 말했다.
"왜 ? 우리가 사는 꼴이 너무 추접스러워서 그러는가? 어쪄됐건 고향에 왔으니께 고향 사람들 사는 꼴도 봐야 헐 것 아닌가."
"아녀. 난 정말 주막에 있고 싶네."
나는 정말이지 석구의 집에 가고 싶지가 않았다. 아예 마을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가 않은 잣이었다. 석구의 말마따나 고향 사람들 사는 꼴이 추잡스러워서가 아니었다. 마을 고샅에 발을 들여놓을 만한 용기가 없었다. 마치 벌거벗은 알몸으로 치부를 드러내놓은 채 고향사람들 앞에 서 있는 꼬락서니가 될 것만 같았다. 어쩌면 아버지도 그래서 고향에 발걸음을 뚝 끊어버렸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며칠 전 홀연히 고향에 내려왔다가, 새벽에 아무도 몰래 마을만 산 구경하듯 먼 발치로 바라보고 되돌아서 버렸을 것이었다.
석구의 호의를 무시하고 주막에서 묵고 가버린다면, 석구뿐만이 아니고 월곡 사람들이 모두 나를 정 없는 사람이라고, 서운해 할 것이 뻔했다. 심하면 내가 가난하고 애잔하게 사는 그들을 업신여겨 상대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피하는 것이라고 몰아 붙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나는 결코 석구를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부탁이네. 나 좋을 대로 있게 내버려 두소."
나는 아버지가 내게 했던 것처럼 벽을 향해 모로 돌아누워 버렸다.
"참말로 서운하구만. 나나 자네나 이래서는 안 되는 건듸, 월곡 깨복쟁이 친구들이 자네허구 술판이나 한번 벌였으면 허던듸,,,,,, 자네가 이렇게 담을 싸버리면 으디 어려워서,,,,,, 참말로 이러면 욕 얻어 묵는 것은 월곡 사람들이여."
석구는 한동안 방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가,
"그러면 낼 아침에 보세."
하고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을 하고 풀이 죽어 방에서 나갔다.
석구가 돌아가 버리자 나는 비로소 올가미에서 풀려난 듯한 기분이었다. 마음이 약간 찜찜하긴 했어도 그것은 잠간이었고, 피로와 함께 심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양수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얼핏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러나 깊은 잠은 못 자고 양수기 소리에 다시 깨어나곤 하였다.
석구한테 부탁한 대로 양수기 한 대를 더 돌리기 시작했는지, 양수기 돌아가는 소리가 더 커져 온통 월곡의 밤을 꿰흔들었다. 눈을 감고 누워 있어도 용소의 물이 우쭐우쭐 줄어드는 것이 보이는 듯싶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용소의 바닥 맷돌에 깔려 있을 황새의 유골을 찾는다는 생각보다 용소에 빠져 죽은 어머니의 혼을 건져내기 위해서 물을 품어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석구 아버지 황새의 유골은 맷돌에 깔려 있는 대신, 어머니의 혼은 물방개나 게아재비가 되어 용소의 물위에 떠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새벽마다 봉창이 희번하게 트이기 시작할 무렵, 잠이 깨어 마당에 나가보면 어머니는 언제나 살구나무 밑에 정화수를 떠놓고 보름달처럼 앉아 있곤 하였다. 그런데 그날 새벽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정화수 그릇과 상이 엎질러져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부엌으로 뒷간으로 뛰어 다니며 어머니를 외척 불렀다. 어머니는 헛간 짚 북더기 위에, 입 가득히 헝겊을 물고 두 손이 묶인 채 죽은 사람처럼 동댕이쳐 있었다. 치마의 말기 끈은 풀어 헤쳐졌고 아랫도리의 속살이 양파껍질처럼 드러나 있었다, 열 살 먹은 나는 어머니한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차렸다. 나는 울지 않고 침착하게, 그러나 형언할 수 없는 분노에 떨며 묶인 어머니의 손을 풀고 입에서 헝겊들을 빼내주었다. 어머니는 미친 듯 울며 방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방문을 안으로 걸어버렸다. 어머니는 온종일 방문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용소 위에 횐 옷에 가을 햇살을 받으며 떠올랐다.
다시 수렁에 빠지듯 잠이 들었다가 양수기 돌아가는 소리에 눈과 귀를 동시에 열었더니, 주막의 바자울 옆 때죽나무 가지에서 참새들이 석구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용소의 물 속에 빠져버린 내 영혼을 미치게 쪼아대듯 재잘거렸다. 고향의 아침을 열어주는 참새 소리가 30년 전의 오뇌(懊惱)하는 모든 사람들의 울부짖음처럼 들렸다.
아침에 다시 옛날 뒷집에 살았던 장또삼이와, 어머니와 한때 가깝게 지냈던 두껍다리 안집 강촌댁이 반 시간쯤의 간격으로 아침을 먹자고 데리러 왔으나, 나는 역시 사죄를 빌듯 거절을 하고 말았다. 그들은 호의를 거절당하고 돌아가면서, 역시 너는 월곡 사람이 아니로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주막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조금은 감미롭게까지 느껴지는 가을날 아침 햇살을 받으며, 물을 품어내고 있는 용소로 나갔다. 용소에는 양수기를 돌리는 키가 작고 젊은 두 사람 외에, 마을 사람들 스무남은 명이 바의 옹두리에 둘러 앉아서들 물이 줄어들고 있는 소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용소에서 등천하지 못한 이무기나, 귀가 달린 큰 구렁이, 아니면 석구 아버지 황새의 해골, 내 어머니의 머리칼 한 가닥이라도 물위에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호기심이 거미줄처럼 끈끈하게 엉킨 시선으로 용소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내가 나타나자 엉거주춤 일어섰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어른들까지도 일어서는 바람에 그들을 대하기가 면구스러워졌다,
용소에 나온 마을 사람들이 나에게 계산 없는 웃음을 보탰으나, 내 표정은 그들의 미소를 받아들일 한 치의 여유도 없을 만큼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물이 워느니 줄어들었재?"
석구가 내 곁으로 가까이 오며 큰소리로 물었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애매하게 쓴 미소를 빼물었다. 아버지의 유해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석구는 여전히 슬픈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회갑연 같은 큰잔치가 열리기라도 한 듯 즐거운 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석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어 순간에 생각이 꽉 막혀 버리고 머릿속이 달걀 껍질처럼 공허하게 비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석구가 손으로 가리키는 용소의 암갈색 바위 벽을 내려다보았더니 물의 깊이가 내 키만큼 줄어들었다. 줄어든 물의 깊이만큼 풍뎅이 색깔의 물때가 햇볕에도 말라 없어지지 않고, 먹줄을 튀겨놓는 것처럼 선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고러나 아직도 용소의 물은 검푸르게 깊어 보였다.
"쪼금 전에 장대를 넣어 봤더니, 아직 두 키 요량이나 남었더구만. 내일 낮에는 바닥이 날 거여."
석구가 말했다.
나는 석구에게 구경나온 마을 사람들한테 술이라도 한 잔씩 돌리라고 만 원 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주고 주막으로 돌아왔다. 석구가 지폐를 든 채 연신 굽적거리며 논둑 길까지 따라왔다.
나는 마을 사람들의 틈새에 끼어 용소에 더 있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괜히 기분 좋아하는 석구를 보기에도 마음 아팠다. 더구나 월곡 사람들 중에서 나보다 서너 살 아래이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대충 알아 볼 수가 있었으나 사십대 밑의 젊은이들과 한창 죽순처럼 커가는 아이들은 모두가 생소하여, 고향의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기가 부끄럽고 괴로울 뿐이었다. 어른들 가운데서도 월곡으로 이사를 온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낯선 얼굴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고향에 돌아와서, 고향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소원(疎遠)함을 느낀다는 것은 먼 이국의 공항 대합실에서 당하는 고독감보다 몇 배 더 견딜 수 없는, 절망적인 기분이었다.
"아주머니, 오늘 밤은 읍에서 자고 오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주막의 아낙에게 미리 말을 해놓고, 풀석풀석 땅껍질이 벗겨지는 신작로를 따라 걸었다.
반 시간쯤 메마른 신작로를 따라 걷다가, 꿀참나무 숲 아래, 교실이 여섯 개밖에 안 되는 국민학교 정문 앞 늙은 버찌나무 옆에 서 있었다. 3년 동안 다녔던 학교였으나 꿈속에서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나는 어쩌면 석구가 내 사무실을 다녀간 뒤부터 현실과 차단된 꿈의 이완지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현실감 없는 고향의 모습들은 오히려 공허하게 느껴졌다. 누구에겐가 나의 과거를 박탈당해 버린 기분이기도 하였다.
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고 운산읍까지 나와서 느꼈던 황량할이만큼 낯설고 공허한 기분은 나를 더욱 조그맣게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낯설고 쓸쓸한 운산읍의 거리에서 나는 생명을 느낄 수조차 없는 번데기처럼 위축되고 말았다.
운산읍의 허름한 하숙옥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옛날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몇 번 왔었던 기억들을 끄집어 내려고 하였으나, 기억 장치에 녹이 슬어버렸는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월곡 용소에서 물을 품는 양수기 소리가 10킬로나 떨어진 온산읍의 하숙옥 방에까지 들려오는 듯싶었다. 그대도 나는 월곡의 주막에서보다 훨씬 자유로울 수가 있어 좋았다.
나는 월곡 주막에서보다 편한 기분으로 양수기 돌아가는 소리를 가슴으로 들으며 잠을 잘 수가 있었다.
꿈속에서도 나는 용소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와 석구가 뒤바꿔 것이었다. 왼쪽 뺨에 거머리만한 흉터가 있는 석구가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냉담할 정도로 무표정하게 잔뜩 굳어진 얼굴로 뒷짐을 지고 서 있었으며, 나는 지퍼가 고장난 낡은 회색 점퍼에, 쑥대머리처럼 헙수룩한 몰골로 연신 석구에게 허리를 굽적거렸다, 꿈속에서 나는, 석구가 그랬던 것처럼 바보처럼 헤벌거렸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용소의 물을 다 품어내고, 질컥한 흙바탕 속에서 건져 올린 것은 먹구 아버지의 유골이 아닌, 얼마 전에 세상을 뜬 내 아버지의 시신이었다. 물달개비 풀섶 위에 반듯하게 뒨 아버지는 세상을 뜨기 전 말없이 집을 나갔을 때 입었던 짙은 밤색의 양복에 목에는 내가 시궁창에 집어넣어 버렸던 호박씨 모양의 금이빨 목걸이까지 걸고 있었다.
석구 아버지의 유골이 아닌, 세상을 뜬 지 얼마 안 되는 아버지의 시신을 건져 올린 것을 보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석구와 구경나온 월곡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하기라도 하다는 듯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꿈이 깨면서 잠도 함께 갰다. 나는 불을 켜고 앉아서 머릿속이 맑아지기를 기다리며 줄담배를 피웠다. 날이 밝기 전에 운산읍을 떠나 서울로 가버리고 싶었다. 다시 월곡으로 돌아가서 용소의 물이 말라붙기를 기다렸다가, 석구 아버지의 유골을 건져 올리는 것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꿈속에서처럼 용소에서 석구 아버지의 유골 대신 세상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은 내 아버지의 시신을 건져 올리는 것만큼이나 끔찍스럽게 생각되었다.
석구가 부탁한 대로 그의 아버지 유골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었으니 내가 할 일은 이미 끝났지 않으냐고 자신에게 물어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날이 밝기 전에, 택시를 불러 타고 다시 월곡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두 대의 양수기는 여전히 기세 좋게 돌아가고 있었다.
월곡에 도착하자 아침해가 이슬에 젖은 대지를 참빗으로 곱게 훑어 내리듯 넉넉하게 쏟아져 내렸다.
"나는 또 자네가 가버린 줄만 알았다네. 다시 와줘서 참말로 고맙구만."
용소에 나가자 석구가 큰소리로 반갑게 말했다.
용소는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구경나온 마을 사람들의 수가 훨씬 불어난 듯싶었다. 그들은 긴장된 얼굴로 물이 줄어들고 있는 용소 바닥을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깔린 큼직한 돌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몇백 편 아니 몇천 몇 만 년 동안 죽이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역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 속에만 처박혀 있었던 큰 돌들은 암청색으로 보였으며, 햇빛을 받자 사뭇 파란 빛을 발했다. 큰 고기들이 파닥거리기도 하였다. 고기가 파닥거리며 물이 출렁일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놀란 듯 표정을 움츠리곤 하였다.
용소는 이내 빨대를 넣고 음료수를 빨아 용기(容器)를 비워버리듯 그렇게 쫄딱 물이 말라붙고 말았다. 껴적껴적 검은 흙탕물만 바닥에 조금 괴어 있었으며, 품어낸 물 대신 가을 햇살이 가득 출렁였다.
석구는 작업복 바지를 걷어올리고 용소 안으로 들어갔다. 월곡 사람들 두서넛도 석구를 따라 들어갔다.
"어허, 이놈에 고기들 좀 봐. 고기들 땜시 발을 못 딛겄네. 고기가 한 트럭도 더 되겠당께!"
석구를 뒤따라 들어간 장또삼이가 소리쳤다. 아닌게 아니라, 용소의 바닥에는 고기들이 여러 겹으로 구물거리고 파닥거렸으며, 물이 쫄딱 줄어들자 허연 뱃바닥들을 벌렁벌렁 뒤집었다, 마을 사람들이 고기 구경을 하려고 우루루 용소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고기를 잡지 않았다.
"들어오지 말어. 고기 밟혀 죽겠구만, 뭐땜시들 들어 와!"
누구인가 소리치자, 다시 마을 사람들이 용소에서 나갔다. 나는 구두와 양말을 벗고 바짓가랑이를 무릎 위까지 걷어올리고 조심스럽게 용소로 들어갔다. 나는 발붙일 곳 없이 붕어며, 미꾸라지, 메기, 가물치, 망상어 등 고기떼가 긁어 올린 그물 속처럼 파닥거리고 구물거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이, 석구 아버지의 몸에 매달았다는 맷돌을 찾느라 용소 안을 부지런히 쑤석거려 보았다.
"석구, 맷돌 짝을 찾어보소. 자네 아버님은 맷돌을 메고 돌아가셨다네."
나는 손으로 용소의 흙바닥을 더듬고 있는 석구 옆으로 가서 나지막하게 말해주었다. 석구는 고맙다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석구가 맷돌을 찾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맷돌이 여기 있네 ! 맷돌 짝을 찾었당께!"
석구는 바지가 온통 흙벌창이 된 채 구부슴히 허리를 구부리고 손으로 흙바탕 속을 꽉 누르고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감격스러운 듯 큰소리로 말했다. 석구의 목소리가 어찌나 크고 감격적이었는지 구경나온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 석구가 맷돌을 찾았다는 소리에 나는 그 무거운 맷돌에 머리를 왐 부딪치기라도 한 듯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나는 석구 옆에 그냥 서 있기만 하였다. 석구가 열심히 맷돌을 더듬고 있었다. 그는 매의 심봉-조라)에서 두어 자 길이의 철사 도막 같은 것을 꺼내 햇볕에 비추어 보았다, 그것은 낡고 가는 전신줄이었다. 그 줄을 맷돌의 심봉에 묶어 석구 아버지의 목에 걸었으리라 짐작할 수가 있었다.
석구는 전신줄을 팽개쳐버리고 다시 맷돌을 더듬기 시작했다. 맷돌을 두 손으로 들어 옮기고 맷돌 주변의 수렁을 갈퀴질하듯 더듬었다. 그러나 그의 손에 잡힌 것은 주먹만한 돌멩이들뿐이었다. 석구가 갑자기 굳어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제서야 나도 와이셔츠의 팔을 걷어올리고 흙바탕 속을 더듬었다. 물렁한 수렁의 흙뿐,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용소에 들어와 있던 너댓 사람이 모두 허리를 구부리고 열 손가락으로 용소의 바닥을 샅샅이 갈퀴질을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석구 아버지의 유골을 찾아 내지 못했다.
모두들 용소 밑바닥을 갈퀴질하여 파헤치기에 지쳐 있을 무렵, 바위 밑둥지의 웅텅이에서 촤르륵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시커먼 것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용소 바닥을 뒤지는 사람들이나, 밖에서 구경을 하는 사람들이나 소스라치듯 놀라며 시선을 한곳에 모았다. 석구가 소리 나는 쪽으로 엉금엉금 걸어가더니, 시커먼 것을 두 손으로 붙들려고 하였다. 그러자 꼬리를 휘저어 촤르륵 흙탕물을 튀기며 물이 찌적찌적한 수렁 위로 올라왔다. 그것은 길이가 두어 자쯤 되는, 엄청나게 큰 잉어였다. 어찌나 크던지 고기같지가 않았다. 석구는 털썩 쪼그리고 앉아서는 아가미를 벌룸거리는 잉어를 들여다보았다. 명주 실타래 같은 가을 햇살이 잉어의 등에서 따끔거리며 부서졌다.
"이무기가 나왔는가?"
용소 밖에서 누구인가 큰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석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살아 있는 아버지를 만나기라도 한 듯 경건한 눈빛으로 잉어를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어이, 물을------용소 안으로 물을 품어주소. 냉픔 양수기 호스를 걷어올리고 이쪽으로 물을 넣어주랑께!"
석구가 양수기를 돌리는 인부들을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키 작은 두 인부가 양수기 호스를 걷어 을려, 응소 밖의 물웅덩이에 처넣었다.
"아니 ? 자네 아버님 유골은 안 찾을란가?"
나는 석구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나무람하듯 말했다. 그러자 석구가 나를 쳐다보았는데, 그 눈은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으며, 황흘한 기쁨이 넘쳐 있는 얼굴이었다.
“아버지를 찾은 것이나 진배 없구만 이 큰 잉어의 눈을 좀 들여다 보소. 꼭 우리 아버지 눈 같단 마시."
석구는 무엇엔가 도취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물이 용소 안으로 쏟아져, 용소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석구만은 용소에 잠겨버리기라도 할 듯, 꼼짝하지 않고 쭈그려 앉은 채, 황홀한 얼굴로 잉어의 눈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문순태(1939- )
전남 담양 출생. 전남대 철학과 입학, 숭실대 편입, 조선대 국문과 졸업. 1973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백제의 미소>가 당선되어 등단. 순천대 교수 역임. 현 전남일보 편집국장. 그는 토속적인 향수와 한을 주된 정조(情調)로 하여 우직하고 진실한 인간상을 그려내는 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징소리>, <흑산도 갈매기>, <걸어서 하늘까지>, <타오르는 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