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이 야 기 -유순하
그는 살갗이 가무잡잡하고, 몸집이 통통한 편이었다. 양쪽 볼 아랫부분에는 살 한 점씩을
따로 붙여 놓기라도 한 것처럼 볼록했고, 가늘게 열려 있는 눈은 쥐의 그것처럼 음험스러운
빛을 내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마흔 서넛쯤, 한낱 계장으로서는 늙었다 싶은 나이...... 굳이 따져 보자면 일촉즉발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밭은 상황이었지만, 나는 이런 것들을 찬찬히 살펴 볼 만큼 여유가 넉넉했다. 이런 게임도 해볼 만 하구나 싶었다.
"어떻게든 되는 길이 없겠습니까?"
나는 한껏 간청하는 투를 애써 꾸며 한 번 더 물었다.
"없습니다."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권위를 불려 나타내려 애쓰며 잘라 말했다.
"하늘이 두 쪽 난다 해도 안 된단 말씀이죠?"
"그렇다니까요."
그는 조금 더 솟아올랐다. 약발을 잘 받는 체질 같았다.
"만일 말입니다...... ."
나는 조금 더 나아갔다.
"저는 회사에 돌아가서 계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어떤 경우에도 될 수 없다, 이렇게 보고했는데, 회사에서 다른 경로를 통해 알아봐서 된다 했을 때는, 저는 아주 골로 가는 게 되는데요. 아시다시피 양놈 회사라는 거는 더럽거든요."
나는 제법 익살스러운 낯빛을 지어 엄살을 피워 보였다.
그쯤에서 그는 노골적으로 불쾌해 하는 낯빛이 되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눈길에 적의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조금 더 재미있다는 기분이 되었다. 그건 바로 내가 겨냥해 바라고 있는 현상이었기에. 그를 어떻게든 긁어서, 적어도 이 건에 대하여는 죽어도 해줄 수 없다는 결심을 하도록 해야만 했다. 내가 빤히 바라보고 있는-좀더 긁기 위한 심리적 전술로서-사이에, 그는 마침내 의자를 돌려 버렸다.
그 뒷자리의 과장이 멀끔한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들이야, 이
런 눈빛 같았다. 나는 과장 책상 위의 명패를 눈 여겨 봐두었다.
"계장님, 감사합니다.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나는 그의 엇비슷한 옆모습을 향해 고개를 꾸벅 해보였다. 그는 돌아다 보지도 않았다. 내
가 꼴도 보기 싫은 듯했다. 그럴수록 나는 기분이 더 좋아졌다. 나는 곧 밖으로 나왔다.
김포의 하늘은 그랬다. 티없이 맑았고, 햇볕이 쨍쨍했다. 오늘도 푹푹 삶는 날씨가 될 건 뻔해 보였지만, 내게는 그것마저도 기분 나쁘게 여겨지지 않았다. 나는 주차장으로 가서 차에 올라타자마자, 마치 속도를 즐기기라도 하듯이 냅다 몰아 여의도에 있는 회사를 향해 치달렸다.
회사에 도착하여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는 길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으로 올라가 잉거햄의 방을 향하는 내 발걸음은 의기양양했고, 잉거햄의 널찍한 방에 들어서는 즉시 두 손바닥을 펴 천장을 받치고는 양어깨를 추썩 해 보이며 두 눈을 치떠 보인 내 몸짓도 역시 그런 기백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를테면, 거 보슈, 이런 눈빛은 삼갔다. 그를 지나치게 꼬드겨 놓는 것은 내 신상에 그다지 유리할 게 없다는 계산 속에서였다. 나의 내심이야 어떻든, 최선을 다해 봤지만 유감스럽게도 뜻과 같게 되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태도만은 이래야 마땅했다.
잉거햄은 여유작작했다.
조금도 기분 언짢아하지 않았고, 더구나 난감해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네가 그런 답을 가지고 나타나리라는 것을 미리 헤아리고 있었다, 이런 낯빛 같아 보이기도 했다.
"오케이, 미스터 파앙."
그는 내게 소파를 권했다. 그의 발성 조직에 실려 소리가 되어 나오는 내 이름은 들을 때마다 이상스럽기만 하다. 아무래도 '팽'이라는 소리는 내지 못하는 듯, 언제나 '파앙', 그 비슷한 울림이 되곤 하는데, 내가 그것을 바로잡아 주려고 애쓰다 보면 '피융', 이런 식으로 총알이 빗나가는 소리 같게 되기도 한다. 나는 그가 권하는 소파에 앉았다. 그는 짤막하고 투실투실한 목을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꺾어 본 다음에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만났던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오?"
"우리 나라에 입국하는 외국인의 자격을 심사하여 허가 또는 거부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직위는 뭐요?"
"과장입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콰창?"
그는 우리말로 그렇게 되뇌며 고개를 뒤로 젖혀 천장을 잠시 치켜 보았다. 과장이라는 직책에 앉아 있는 사람의 무게를 달아 보고 있는 듯했다. 콧구멍이 유난스레 크고 깊어 보였다. 그의 눈길이 나를 향해 내려왔다.
"그 위에 있는 사람을 만나 봐도 안 되겠소?"
"무슨 뜻입니까?"
"오케이, 미스터 파앙."
그는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자는 낯빛이 되어 내게 담배를 권했고, 라이터도 켜 대 주었다. 나는 조금 떫은 기분이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중요한 것은 기분이 아니라, 궁극의 승부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가 물었다.
"당신이 만난 과장 위에 누가 있소?"
"국장이죠."
"그 위에는?"
"차관보겠죠."
그가 번연히 알고 있으면서도 묻는 거였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 다음이 차관, 장관, 이렇겠군. 그렇지 않소?"
"맞습니다."
"그 중에서 말요, 누굴 만나면 이 미묘한 문제의 해결을 도모할 수 있겠소."
'미묘한'이라는 표현에서 나는 하마터면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그렇기는 했다. 이건 참 '
미묘한' 문제였다. 더러는 잉거햄 마누라의 생리 문제까지도 돌봐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없는 바는 아니지만, 이것도 역시 이야깃거리랍시고 말하기가 좀 쑥스러울 만큼 미묘했다. 그랬기에 어떻게든 틀어 버리고 싶은 내 마음은 조금 더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를 조금쯤이나마 놀려 주고 싶은 마음도 더불어.
"이 문제에 관한 한, 누굴 만나도, 어떤 경로를 거쳐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법적으로 명확한 규제 사항이기 때문에."
나는 득의만만해졌다. 그의 속을 훤히 읽고 있었던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지시해도?"
그렇게 물었다.
"그렇죠."
"그럼 말요, 이 나라에서 대통령보다 더 강력한 것은 뭐가 있소?”
그는 또 물었다. 내내 그런 얼굴로. 여유작작한. 얼굴 가득 웃음을 띄워, 두툼한 입술이 반달형으로 크게 휘고, 우뚝 솟아올라 있는 매부리코가 아래를 향해 조금 휘어진 듯한. 그는 마치 말장난을 즐기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그가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는 했으나, 박자 맞춰 화답할 수는 없었다. 그가 기대하고 있는 답을 종잡아 볼 수도. 짧은 실력으로 그네들과 이야기할 때에 일쑤 당혹해 하게 되곤 하는 경우가 바로 이런 거였다. 의사는 겨우 통한다 해도, 정서의 교감은 전혀 가능하지 않은 그런 상태. 이럴 경우에 당혹해 해야만 하는 것은 언제나 이쪽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네들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져 있는 불평등한 질서 가운데 하나였다.
못내 당혹해 하면서도 그것을 은근히 숨기려 드는 나의 속내를 읽어 버리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는 조금 더 즐거워하는 낯빛이 되었다. 그 다음에 스스로 답하듯 툭툭 튕겨 올렸던 말이, 탱크? 마니? 깃쌩?, 이런 것들이었다. 그런 다음에 그는 웃핫웃핫 하고 크게 웃어 젖혔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이럴 경우, 내 얼굴은 영락없이 원숭이의 그것과 흡사하리라 생각하며. 그의 웃음이 차차 스러지며 나를 향한 눈길이 이윽해졌다.
그 얼굴에 아까와는 다르게, 음흉스러운 웃음이 삐끗이 떠올라 온 것은 잠시 뒤였다. 나는
그 웃음의 의미를 읽어 낼 수 있었다.
"알잖소, 미스터 파앙. 이 나라 정부에는 되는 일두 없구, 되지 않는 일두 없다는 것을."
이런 거였다.
그의 말은 실증적으로 옳았다.
멀리는 그만두고라도 지난번 덕소 공장 부지 문제를 해결했던 경우에만 해도 그랬다. 공장 확장은 지지난해부터 추진해 왔던 거였는데, 문제는 부지 확보였다. 공장 주변에 빈땅이 있기는 했는데, 그 지목이 '임야'로 되어 있었다. 그린벨트 안이기 때문에 지목 변경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상수도 보호지역이기 때문에, 수도권 방위 목적상...... 이렇게 일일이 기억해 낼 수 없을 만큼 많은 장애물들이 가로놓여 있었고, 적어도 그 처음에는, 그 하나하나가 완강했다. 아무래도 일이 되지 않을 만큼. 가는 데마다 '절대로' 안 된다고들 했다. 그러나 말 못 할 우여곡절들을 겪기는 했지만, 스물 몇 가지나 되는 허가들은 결국 이쪽의 뜻 꼭 그대로 되었다. 이 나라에서 기업이 하려고 마음먹어 되지 않는 일이 없다는 말 꼭 그대로였다고나 할까? 그 하나하나의 허가를 얻어 올 때마다, 잉거햄은 거기에 찍여 있는 정부의 벌건 도장을 들여다보며, 그 도장은 자신이 홍콩에 있을
때 중국인으로부터 받은 부적과 비슷하다고 하면서, 예의 그런 웃음을 씨익 웃어 보이곤 했다. 그러면 나는 그 웃음에 능동적으로 호응하여, 마치 무용담이라도 발표하듯, 그 허가 하
나를 얻기까지의 내 수고를 훨씬 더 틔워 이야기하곤 했다. 그가 어떻게든 이기죽거리고 싶어하는 우리 나라의 현실을 함께 이기죽거려 즐기기라도 하듯.
그런데 이번만은 내 기분이 그렇지 않았다.
문제가 하도 '미묘'한 것이기 때문이었을까?
나도 내 심정을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이번만은 어쩐지 어떻게든 틀어 버리고 싶었다.
스스로 생각해 보기에도, 나는 민족 의식이니 하는 것이 나의 의식 세계에서 흔적도 없이
휘발되어 버린 지 이미 오래여서, 내 민족의 형편없는 면을 이기죽거려 대기에 이골이 나 있는 터였고, 명예든 돈이든 내게 이익이 될 만한 게 있다면, 그 이익이 아무리 사소하고, 그로 인하여 내 나라가 또는 내 민족이 입게 되는 손해가 아무리 엄청나다 할지라도, 그 손해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던 적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어찌 된 일일까? 이번만은 정말, 이 나라에도 '안 되는 것은 역시 안 되는 것이다.' 라는 것을 본때 좋게 증거해 보이고 싶었다. 되나 안 되나, 사실은 별것도 아닌 일에 승부를 걸고 있는 내 꼴이 우스꽝스러워 보이기까지 했으나, 괜한 고집일까, 나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국장을 만나보아 주겠소?"
여느 때와는 다르게, 제 웃음에 호응해 주지 않고 있는 내 얼굴을 건너다보고 있던 그는 그렇게 말했다. 예의 그 웃음기는 그대로였다. 그의 말은 표현이야 정중하게 간청하는 투였지만, 내용은 명령조였다. 그러면 될 거요. 그는 이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되리라는 쪽으로 확신하고 있는 빛을 굳이 감추려 들지 않았다. 나는 약간 굳어졌다. 어떻게든 유연성을 유지하려 애써도 잘 되지 않았다. 승부욕에 지나치게 매달려 있었던 것일까?
"한국 정부의 국장이란 그렇게 쉽사리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요."
이런 말만 해도 내용은 같다 할지라도 표현의 묘를 기할 수 있었어야만 했다. 그럴수록 그는 유들유들해졌다.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은 낯빛이었다.
"내가 요청하는 것이라 하시오."
나는 실소를 참았다. 그 뒤에 이어졌던 아니꼬움도. 이 빌어처먹을 양키 새끼, 한국 정부
의 관리들을 장기판의 졸로만 알고 있군 싶었다.
"컨티넨탈 일렉트로닉스라 하구."
내가 내면 수습을 위해 얼핏 대답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는 그렇게 덧붙였다. 나는 하마터면 콧김을 내뿜을 뻔했다. 갈수록 태산이다 싶었다.
[포춘]지 선정 세계 50대 기업 가운데 하나임을 굳이 들먹거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컨티넨
탈 일렉트로닉스는 미국의 대표적 다국적 기업 가운데 하나였다. 그 위세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아 보려면, 미국 영사관에 가 보면 된다. 비자 심사가 까다로운 곳 가운데 하나가 주한 미국 영사관인데, 컨티넨탈 일렉트로닉스에서 투자한 컨티넨탈 일렉트로닉스 코리아의 고용인이라는 서류 하나만 붙이면 제꺽 비자가 나온다. 컨티넨탈 일렉트로닉스 코리아에 대한 컨니넨탈 일렉트로닉스의 투자액은 그래 봐야 달랑 400만 달러밖에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말입니다...... ."
나는 아무래도 지나친 게 아닌가 조바심하면서 조금 더 나아갔다.
"미국 정부의 국장을 그렇게 쉽사리 만날 수 있습니까?"
나로서는 이건, 목에 핏대를 숨기기는 했지만, 안간힘을 다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
는 점점 더 느긋해지고만 있었다.
"여긴 미국이 아니오."
그의 대꾸는 간단 명료했다.
사태가 이쯤에까지 이르자, 나의 고집은 오기 쪽으로 옮아갔다.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라도 이번 일은 꼭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식의. 일이 되도록 하기는 쉽지 않지만, 안 되게
하는거야, 그게 뭐 어려울 게 있으랴 하고 생각하면서. 이건 내가 하려고만 든다면 승부는 너무 빤해 보였다. 이럴 때 중요히 여겨야 하는 것은 승부의 모양새 아니겠는가. 나는 짐짓 느긋함을 꾸며 적당히 튕겼다.
"저는 그렇게 현명하지 않은 노력은 아예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모처럼만에 줏대 반듯한 표현을 입밖에 내놓을 수 있게 된 것을 속마음으로 은근히 기뻐했다. 상당히 모험적인 대화를 하고 있다 싶어 조금 쯔밋거려지기까지 하면서도 기분은
자못 괜찮았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 앞으로 드물게마나 일부러 만들어서라도 줏대를 빳빳이
펴 보도록 해야겠군. 이런 사념을 머금어 보게 되었던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으리라. 그러나 그도 만만치 않았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만나겠소. 약속만 해주시오."
윽박지르둣 하는 말투였다. 내친김이었다. 나는 즉답했다.
"아세요? 국장과의 약속이란 글쎄 쉬운 게 아니고, 또 그런 종류의 약속이라면 당신 비서가 해도 될 일이 아닙니까? 저는 지금 과천에 가 봐야 합니다. 폐수 처리 시설 때문에. 시간 약속이 되어 있거든요. 그쪽 관리들과."
그건 그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상수도원으로서의 팔당댐 오염 문제가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면서, 관변측은 익히 길들여져 있는 습관대로 대뜸 촉각적이 되었다. 면에서, 군에서, 도에서 당장 요절이라도 내 버리고야 말 것처럼 설쳐들 댔다. 그뿐일 수 있는가. 정부의 관련 부처에서도 마침 잘 걸려들었다는 것처럼 오라가라 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요즘 경영층에서는 그 대책에 고심하고 있는 판이었다. 우선 순위가 당연히 앞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 내가 과천에 가려는 것은 사실은 그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서 예의 그런 웃음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눈빛만은 내가 확실히 느낄 수 있을 만큼 바뀌어졌다. 사해 동포주의니 하는 것은 어디에 가져다 놓으나 허울뿐일 수밖에 없는 것. 자비심이니 여유니 너그러움이니 하는 것도 확고한 지배 의식이나 우월감의 소산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존대감이 건들렸다는 노여움이 그 눈빛에 아른거렸다. 한국 놈이, 유색 인종이, 감히 미국인에게, 백인종에게...... 그런 빛, 그도 충분히 노회했기에, 그런 기운이야 내비칠 듯 말 듯 여린 것이기는 했으나, 어찌하랴, 이 바닥에서 십여 년 세월 바쳐 가며 산전수전 다 겪다시피 하여 눈치에 잘 길들여져 있는 내가 그 정도를 놓칠 리는 없다.
그러나 나는 조금 전과는 다르게 그다지 조바심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걸핏하면 '컨티넨탈 일렉트로닉스'나 들먹거리고 있는 그의 형편없이 되바라진 의식을 이번 기회에라도 좀 다스려 놓아야겠다 싶을 뿐이었다.
"오케이."
그는 어깨를 추썩 해보이고는 그 대화를 끝내 주었다.
그의 방에서 물러 나오며, 나는 그런데 그가 마지막에 내보인, 벼르는 듯하던, 그 눈빛만은 아무래도 마음에 켕켰다.
"짜식...... ."
이런 욕설을 잇새에 깨물어 보게 되었던 것도 그래서였으리라.
"너무 알아도 병이란 말야. 너무 모른다는 것도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
나는 툴툴거렸다.
내가 그 동안에 그래 봐야 밥벌이를 위하여 보아 온 미국인이 모든 미국인의 전형이 될 수는 없지만, 내가 이해하고 있는 미국인은 대체적으로 쩨쩨하고 겁이 많다. 쩨쩨한 것부터 쳐 보자면, 우리네보다 수입이 열 곱절쯤은 되는 그네들이, 예를 들어 포커판에서 단돈 100달러만 잃어도 얼굴빛이 노랗게 변한다. 그네들보다 수입이 10분의 1쯤 밖에 되지 않는 우리는 하룻밤에 잃든 따든 500달러 상당쯤은 돈을 들고 나가야만 노름하는 맛을 느끼는 것과는 판연하게 다르다. 술을 마셔 봐도 역시 그렇다. 명색 사내자식들이 제 여편네가 쓰는 돈 한푼 두 푼까지 따지고, 저금 통장과 수표책을 아예 속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은 또 어떤가? 겁이 많은 것으로 따져 보자 해도 역시 그렇다. 다른 것은 다 젖혀 둬 버리고, '법'에 대한 태도만 한 번 짚어 보자면, 우리네야 법이 안 된다 하면, 우선 빠져나갈 구멍부터 찾고, '금지' 팻말이 세워져 있으면, 일부러라도 넘어서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하고, '법대로'라고 할 경우에, 댓바람에 코웃음부터 핑 날려 버리곤 하는데, 그네들에게 있어서 법이란 곧 알아모시지 않으면 안 되는 신주단지나 마찬가지다. '법' 앞에서는 지레 겁을 먹고 설설 긴다고나 할까? 어느 정도냐 하면 변호사의 '법적 의견'이 없으면 한발도 움직이려 들지 않는다. 사사건건 밥맛 떨어지게 하는 민이라는 이름의 희떠운 친구가 하나 있는데, 녀석에 의하면, 그건 바로 그네들이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뜻한다는 것이지만, 나로서는 그네들의 그런
모습이나, 민의 소견 따위, 양편 모두가 가소롭기 그지없을 뿐이다.
그런데, 잉거햄은 다르다. 교활하고 음흉스럽다는 면에서 우리네보다 오히려 한술 더 뜨는 쪽이라고나 할까? 그가 컨티넨탈 일렉트로닉스 코리아의 상임부사장으로 부임한 것은 이제 두 해째지만, 동경․홍콩․싱가폴․마닐라 등, 아시아 지역에서만 15년을 일해 온 그는 서울에서도 '컨티넨탈 일렉트로닉스 서울 주재 대표'로서 79년부터 82년까지 근무했던 적이 있는 '아시아통'으로, 적어도 아시아적인 것에 대해서라면 속속들이 꿰고 있는 편이다. 제 모습을 제 자신은 제대로 볼 수 없다는 면에서, 그는 우리네보다 우리네의 참모습을 더 잘 알고 있다 싶은 경우까지도 있을 정도다. 그는 결코 쩨쩨하지 않았고, 겁이라는 게 없었다. 그뿐인가. 대개의 외국인이 이 나라의 정치적 현실에 대해서는 일부러 입도 떼려들지 않으려는 데 반해, 그는 작은 일까지도 즐기듯이 이기죽거려 대고 있는 처지였다. 그는 자신이 머물렀던 아시아의 여러 도시 가운데서 동경을 제일 싫어하고, 서울을 제일 좋아한다. 동경은 사람값과 물건값이 비싸, 개인 운전사․개인 경비원․개인 식모 등 '몸종'을 거느릴 수가 없는 데다가, 저축을 제대로 할 수 없기에, 해외 근무의 '이점'이 그다지 없다는 것이 그 까닭이다. 서울을 제일 좋아하는 까닭이야 동경의 경우와는 모든 면에서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방(이라고 해봐야 어깨 높이의 칸막이가 되어 있는 좁은 공간에 지나지 않지만)에 돌아오자 곧, 인터폰으로 김 과장을 불렀다. 내가 송수화기를 놓자 1분만에 김이 들어왔다. 그 손에는 국영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주간지를 한 뭉텅이나 들고 있었다.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사는 국영 기관에서 포르노 잡지를 발행하는 나라는 아마 우리 나라 빼놓고는 쉽지 않을걸요. 이건 김이 실쭉 웃으며 했던 말이다. 딴은 의미심장한 의견이다. 내가 주간지 따위가 필요할 때 일부러 그 주간지를 찾는 것은, 나의 주간지 용도에 그게 딱 어울린다 싶기 때문이다.
김은 주간지부터 내 책상 위에 놓았다. 좀 들춰보십시오, 이런 눈빛으로. 나는 그의 뜻에 순종하여 주간지 한 권을 앞으로 당겨 앞장에서부터 주루룩 훑어 가다가, 가랑이를 짝 까발리고 있는 여자의 누드 사진에 가서 눈길을 멈췄다.
"하이튼 이딴 사진 하나도 엽전 꺼는 표가 난다니까."
나는 마치 내가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김이 힐끗 넘겨다보고는 나의 비웃음에 제꺽 함께 해주었다. 이미 본 모양이었다. 나는 더
들여다볼 것도 없다는 것처럼 그것을 탁 덮어 밀어붙여 버렸다. 김은 속주머니에서 봉투들을 꺼내 두 무더기로 갈라놓았다.
"이쪽 것은 이거구...... ."
김은 손가락 열 개를 쫙 펴 보였다.
"이쪽것은 이겁니다."
김은 이번에는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펴 보였다. 모두 일곱 개였다.
"일곱뿐인가?"
"다섯은 그저께 집행했잖습니까?"
"아, 그렇지."
하도 바쁘다 보니까 깜박 잊고 있었군, 나는 이런 낯빛으로 고개를 갸웃갸웃해 보인 다음에, 주간지 사이에다 봉투 하나씩을 끼워, 열과 다섯을 쉽사리 분간할 수 있도록 황색 큰 봉투에 넣었다. 대봉투의 앞쪽에서 빼면 열짜리, 뒤쪽에서 빼면 다섯짜리, 그랬다.
"김 과장, 같이 갈까? 오다가 보신탕이나 먹구 오게."
"혼자 다녀오시죠. 옆에 누가 있으면 그 사람들 아무래도 꺼리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나는 금세 알아들었다.
"그런데...... ."
나는 화제를 바꿨다.
"잉거햄 그 친구 뿔이 약간 돋을락말락해 있는데...... ."
나는 상황을 요약했다.
잉거햄의 그 일이란 본래 한이라는 서무 담당 직원을 시켰던 거였다. 대수로운 게 아니라
생각했기에, 여행사 사람들한테 이야기해서 해결해라, 이랬다. 그런데 알아보니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더라, 이런 답을 한이 가져오면서, 그 일은 우습지도 않게 대수로운 것으로 꼴바꿈하게끔 되었다. 잉거햄이 '한국에서 미국 달러 더 쓰고 가겠다는데 안 된다 하는 이유가 뭐요?', 이런 식으로 드러내 놓고 비웃다시피 하고 나섰고, 김과 함께 그 자리에 있던 나는 기분이 그만 좀 언짢아진 것이었다.
그 언짢은 기분이 바로, 그 뒤에 내 마음에 인 일련의 예외적인 느낌의 단초였다는 것을
나 자신이 알아차리게 된 것은 시간이 약간 지난 다음에였지만, 그것은 정말 나 자신의 내부에서 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조차도 잘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전 같았다면, 그랬다. 그까짓것 정도야 쿵쿵 소리가 나게 박자를 맞춰, '그렇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정책이죠. 하여튼 한국 정부의 관리들이란 싸그리 바보 멍청이 비능률의 도사들이죠', 이런 식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쪽 현실을 일부러 지어내서라도 함께 비웃어대, 잉거햄의 기분을 좋게 해주었을텐데, 그 자리에서는 무단히, '짜식, 미국 달러면 꼬량들이 껍뻑 죽고 못 사는
줄로 아는 모양이지. 야, 임마, 우리도 지금은 보유 외환이 너무 많아 목하 고민을 할까말까
하고 있는 판국이다. 넌 임마, 요새 해외 여행자 때문에 김포 공항이 미어터져 나가는 것두 모르냐', 이런 아니꼬움이 불쑥 고개를 치켜들어 버렸다. 잉거햄이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일을 나에게 부탁했을 때 몹시 떫은 기분이 되어, 이거 일부러라도 좀 안 되게 해야겠군, 이런
식으로 오감을 품어 보게 되었던 것도, 결국은 그런 아니꼬움의 한 결과치였던 셈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그런 기분을 내색할 만큼 우둔하지는 않았기에,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김포에 다녀오는 성의를 보여 주는 척했던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 가운데, 내 내부에서 일어난 약간 뒤틀린 느낌들을 빼놓는다면, 모두가 김도 알고 있는 내용이다. 나는 그 다음에, 그러니까 잉거햄의 방에 들어가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이야기한 것이었다.
나는 물론, 내가 일부러라도 안 되게 하려 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제 서른 둘, 아직 청운의 꿈이나 더듬고 있어야 마땅할 법함에도 불구하고, 요즘 그 또래 대개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지나치다 싶으리 만큼 영악한 김의 배신에 대비해서였다.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로, 합작 회사에 있는 엽전들은 의리가 없고, 그것은 다국적 기업의 무국적성 때문이라고들 하지만, 나의 소견으로는 어찌 합작 회사에서 밥벌이하고 있는 사람들뿐이라 할 수 있으랴 싶다. 이건 나의, 나의 생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거의 유일한 듯싶은, 깊은 의혹이지만, 이 시대가 아무래도 이상스럽다. 도대체가, 사람을 믿을 수 없다. 믿다가 발등 찍히지 않는 경우가 드문 판이다. 나 자신부터가 그렇다. 나는 나에 대한 남의 믿음을, 결과적으로 보아, 그다지 존중하지 않는 편이다. 나 스스로 생각해 보기에도 이상스럽기 짝이 없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나는 나에 대한 남의 믿음을 헌신짝 내팽개치듯이 저버리고도 그다지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다 그런건데 뭘. 그쯤 편안하게 생각해 버릴 뿐. 그러면서도, 이게 아닌데라든가, 이래서는 안 되는 데라는 따위의 생각마저 해보지 않는 것이었기에, 인간과 시대에 대
한 나의 의혹은 깊은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김에게, 뻔히 안 될 일을 잉거햄이 자꾸 고집하고 있다, 단지 이런 정도로만 설명했다.
그런데 김은 뜻밖으로 신랄했다.
"그 친구, 틀렸어요."
우선 김의 눈빛부터 그랬다.
"그딴 사고 방식 가지고 있는 한, 일부러라도 안 되게 해서 콧대를 확 분질러 놔야 합니다. 그딴 소리 다시는 입에 올리지도 못하게. 그게 어디 말입니까? 아닌게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도 좀 본격적으로 반미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너무 고분고분하니까, 그 친구들 더욱더 기고만장해서 하늘 높은 줄을 모른 거거든요."
거기에서 내가 김의 신랄함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김의 진의를 살피듯, 그 속을 들여다보는 눈길이 되었던 것이야 물론, 내가 먹고 있던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그
다음에, 이 사람이 내 속 떠 보느라고 이러는 게 아닌가, 이런 의문을 가져 보게 되었던 것도. 그런데 아무래도 그건 김의 진실 같았다. 붉은 기운이 느껴질 만큼 이글이글거리고 있는
눈빛으로 봐서 그렇게 생각되었다. 입이야 거짓을 꾸밀 수 있다 할지라도 눈빛이야 속일 수
없는 게 아닌가. 내가 김을 수상쩍어했던 것과, 그 앞에 경계심을 품었던 것까지를 아울러 미안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은 그쯤에서였다. 내 가슴이 조금 뜨거워졌다. 김의 손을 잡고 싶었던 것은 그 다음이었다. 이게 바로 동포애라는 것이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실로 모처럼만에 민족주의자가 된 것이었다.
나는 김과 결속을 다짐하는 눈웃음을 나눈 뒤에 곧 서둘러 과천을 향해 차를 몰았다. 바쁘다 바뻐. 이런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러면서도 살맛을 느끼게 하는 야릇한 열기가 온몸
세포에서 스멀거렸다. 권력에 광기라고 하는 게 있다고 하던가. 나는, 그래 봐야 권력자도 아닌,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또는 나 자신에게서, 그 비슷한 기운을 느끼게 되곤 한다. 예의 민이라는 희떱기 짝이 없는 친구는, 제법 유식한 척, 그런 기운에 '탐욕의 광기'라는 이름을 붙여 놓고는, 예로서 '돈독 올라 환장한 놈들'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맞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너나없이 모두가 벌겋게 달아 올라서 분망하게 움직이며, 바쁘다 바뻐, 하도 바뻐서 죽을 새도 없다, 하고 거푸 외쳐 대고 있는 판국이기에...... .
무심결에 액셀러레이터를 너무 세게 밟았던가. 나는 문득 위기를 느껴 속도를 줄이며, 몸을 내려 등받이에 기대고는 라디오를 눌러 켰다. 굵직하게 무게를 꾸미려 애쓰고 있는 목소리의 사내가, 명색 국회 의원이라는 사람들은 다급한 민생 문제는 젖혀둬 버린 채로, 파당 싸움, 이권 싸움이나 일삼고 있고, 돈푼이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염치불구하고 과도한 향락에 빠져 있고, 정부는 허구한 날 국민들이나 속여 먹고 있는 판국이니, 이 사회가 어찌 온전할 수가 있겠는가 하고 개탄했다. 그 목소리는 자못 비통했는데, 물론 보이지야 않았지만, 그의 입술에서 튀고 있을 침방울이 눈에 선했다. 개탄 시대였다. 너도나도 다투듯 개탄하고 있었고, 또 모두가 개탄에 익숙했다. 한심한 백성들이다. 이건 이 시대에 대한 나의 개탄이다. 나는 라디오를 눌러 껐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라도 우선 그 목소리가 역겨워서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과천 정부종합청사, 식당, 매점, 방문객 접수처 따위가 들어 있어 안내동이라 불리고 있는
건물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경찰들과 대치 중이었다. 거기에 갈 때마다 드물지 않게 맞닥뜨리게 되는 풍경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여느 민원 관계 진정인들과는 좀 달라 보였다. 가슴과 머리에 무슨 구호가 적힌 붉은 띠를 두르고 있고, '...... 하라! ...... 하라!', 이런 구호를 외쳐 대고 있는 거야 다르다 할 수 없었으나, 그들의 행색과 몸짓, 특히 경찰들을 대하는 태도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경찰들이 쩔쩔매고 있었다. 시위대는 청사 구내로 들어가려 하고, 경찰은 한사코 그걸 막으려 했다. 대치 상태는 그 사이에 이루어져 잇는 긴장이었다. 무슨 외침일까, 들어보기 위해, 나는 차창을 내렸다. 후끈한 열기가 갑자기 들이닥친 것밖에는, 그들의 소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차를 대 놓고 우회로를 거쳐 안내동으로 들어가며 곁눈으로 훑어보았다. 그들의 머리와 가슴에 두르고 있는 구호들은, '국보법 철폐하라!' '노동악법 개정하라!' '교육악법 개정하라!' '방송악법 개정하라!' 이런 것들이었다. 누구누구 타도, 무슨 무슨 당 해체, 이런 구호들도 어김없이 섞여 있었다. 나로서는 심드렁한 기분이었는데, 외치고 있는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그들 사이에 남루나 다름없는 옷가지들을 걸친, 상당히 나이 들어 보이는 한 무리의 여자들이 끼어 있었다.
가만히 보니까 '민가협'이라는 단체 이름이 눈에 띄었다.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이름 같았지만, 어떤 사람들의 모임이었던가는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들은 아마 여러 단체가 모여 합동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인 듯했다. 백발이 성성하고 몸이 자그만 남자 노인 하나도 섞여, 젊은이들에게 지지 않을 만큼 거세게 경찰들에게 덤벼들었다. 자세히 본 것은 아니었지만, 특히 여자들이 악바리로 보였다. 경찰들의 방패를 발로 차고, 몽둥이로 때리는 정도가 아니라, 장벽처럼 늘어서 있는 방패 위를 날쌔게 타고 올라가, 경찰들의 뺨을 느닷없이 냅다 때려 버리기도 했다. 많이 해본 솜씨였고, 아무리 보아도 도대체가 공권력을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반면에 어찌 된 셈인지, 경찰들은 대항을 한다고 하기는 하고 있는데, 마냥 비실비실거리고만 있는 꼴이었다. 온갖 욕설 다 들어가며, 짓이겨지다시피 하고 있으면서도, 난처하다는 것처럼, 병신 같은 웃음이나 시일실 흘리고 있는 것부터가 그랬다. 잘 모르기는 하지만, 예사 시위대는 아닌 것 같았다.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풍경이었다.
한편으로는 명색 공권력이라는게 그런 식으로 비실거리고나 있는 꼴이 불안하기도 했다. 나도 물론 이 시대에 대하여 어떤 소견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내가 궁극적으로 바라고 있는 것이야, 두말 할 나위도 없이, 안정, 바로 그것이다. 그건 나의 안면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금속성이 자꾸 높아지고, 위기가 때도 없이 들먹거려지곤 하면, 그 동안에 애써 쌓아올려 놓은 행복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야 말 듯하여, 나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어떤 사회심리학자가 가로되, 대개의 사람들이 사로잡혀 있는 불안 가운데 칠할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들에 대한 것'이라 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려 애써도 불안감이 느껴지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내가 화염병 처벌법인가, 화염병 던지는 사람 처벌법인가, 그런 것이 거론될 때 '절대 찬성'쪽에 섰던 것은 모두 불안감 때문이다.
안내동 아래층 안쪽에 대형 그릴이 있다. 점심 시간에는 가벼운 양식을, 그 밖의 시간에는
방문객이나 청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간단한 음료나 간식 따위를 파는 장소였다. 자리가
아마 500이나 1000쯤은 될 법할 만큼 넓은 공간이다. 나는 거기에 들어가기 전에, 구내 전화
로, 내가 만나려고 하는 일곱 사람에게 전화하여, 10분 간격으로 그릴에서 만나자는 약속을했다. 이것도 역시 경험치이지만, 10분이면 충분했다.
나는 그릴로 들어가 주위를 살핀 다음에 창문 쪽에 앉았다. 그릴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점심 시간에 대비하여 종업원들 몇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릴에는 문이 둘 있다. 하나는 안내동 입구 쪽, 그러니까 내가 들어갔던 문이고, 다른 하나는 청사 구내로 들어가는 문과 이어져 있는 문이다. 나는 물론 청사 구내 쪽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약속한 첫번째 사람은 곧 나타났다. 바쁜 걸음이었다.
"또 왔네요."
나는 일어나 그의 손을 잡으며 안내동 바깥쪽을 눈짓했다.
"골수들이죠. 물불 가리지 않는. 하여튼......"
그는 그들이 어떤 부류들인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자기들이 악 쓴다구 세상일이 어디 그대로 되나......"
그 사람도 역시 심드렁해 했다.
소녀가 다가왔고, 그 사람이 천 원짜리 지폐 하나를 내밀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거나."
내가 말했다.
"인삼 드링크 둘."
그 사람이 소녀에게 말했다.
대개의 경우에는 그랬다. '인삼 드링크'였다. 커피를 청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건 아마 언제나 속이 쓰릴 만큼 술을 많이 마셔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이 아닐까...... .
우리가 창 밖 무더운 날씨에 대하여 건성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에 소녀가 병에 든 인
삼 드링크 둘을 거스름돈과 함께 가지고 왔다. 우리는 거의 단숨에 드링크를 마셨고, 그 사람이 병을 탁자 위에 놓을 때쯤, 나는 황색 큰 봉투에서 '열짜리'주간지 하나를 꺼내, '이 답답하고 무거운 세상에 이런 거나 보시죠.'하고 내밀었다.
"이쁜 여자 있습디까?"
그는 주간지를 당겨 손에 쥐었다.
"자, 그럼."
그는 서둘렀다.
우리는 절차에 익숙했다.
나는 그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저는 조금 있다 가겠습니다."
나는 물론 '휴가비나 하시라고', 이런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 사람은 청사 쪽으로 바로 나갈 수 있는 문이 아니라, 안내동 입구 쪽으로 나갔다. 나는, 내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헤아려 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이 그쪽에 있는 화장실에 들르리라는 것을. 그리고 화장실에서 주간지 속의 봉투를 꺼내, 그 내용물은 자기 지갑에 넣고, 봉투는 잘게 찢어 변기에 흘려 버린 다음에, 주간지는 말아 쥐고, 휘파람을 휘휘 불며 자기 사무실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그건 어느 핸가, '서정쇄신'의 한 방법으로 암행감찰관이 면회하고 돌아오는 공무원들의 주머니를 뒤졌던 것으로부터 비롯된 풍습 가운데 하나였다. 주간지
따위 책자를 이용하는 것도 대략 그 무렵부터 새로 개발된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막으면 샐 구멍을 찾는다는 현실 공식은 이 경우에도 어김없이 적용된 셈이다.
안내동 앞의 눈동자에 핏발 선 사람들이 마침내 경찰들의 저지선을 허물어뜨려 버린 것은, 내가 나의 여섯 번째 고객까지를 대접해 들여보내고 난 바로 뒤였다. 그들은 내가 앉아 있는 창 바로 바깥 길에 쇄도하고 있었다. 선불 맞은 짐승 같다고나 할까? 꼭 그런 기세였다. 나이든 여자들까지도 그랬다. 손에 몽둥이나 돌멩이를 들고 있는 패도 여럿 되었다. 그들은 거침이 없었고, 당당했다. 마침 염치없는 도둑이 몰래 차지하고 있는 제 집을 찾아 들어가는 주인의 노기 띤 발걸음 같았다.
안내동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길이 그들의 뒤를 우르르 따라갔다. 나도 그랬다. 자칫 놓치기라도 할세라, 그릴에서 나가 청사 구내로 통하는 문으로 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제복의 경비원 두 사람이 사람들을 가로막았다. 나는 까치발로 몸을 세워, 널따란 구내를 치달리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다른 궁금증이나 기대는, 적어도 그때까지는, 없었다. 폭력적인 어떤 장면이 있지 않겠는가는, 엽기적 호기심밖에는. 나는 물론, 내 불면증의 주요한 사유로서의 불안감을 조성하는 파괴적 교란 행위에 대한 적개심이야 확고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심풀이 구경거리마저 마다할 수 있으리 만큼 심지가 굳지는 못했다. 나는 기왕이면 좀더 드라마틱한 것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제법 오랜만에 맞닥뜨리게 된 시대적 격동의 현장이었기에. 그런 내 심정에 야릇한 변화가 일게 되었던 것은, 그 다음에 이어진 조금 더 기묘하게 보이는 몇몇 풍경 때문이었다.
100여 명쯤이나 되어 보이는 그들의 뒤에는 경찰들이 쫓고 있었는데, 명령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피동성 때문일까, 말하자면 충분히 훈련된 병사들이고, 또 고르게 젊은 패들이며,
그 머릿수로 본다 할지라도 다섯 곱절쯤은 되어 보이는 경찰들은 앞장서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을 미처 따라잡지 못했다.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달리기 내기 같았다. 하기야, 숫자상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경찰 저지선이 무너졌다는 것부터 그랬다. 그런 데다가 경찰들은 앞엣사람들만큼 기운차지도 당당하지도 못했다. 쫓아가라고, 누군가가 뒤에서 후려치고 있으니까, 마지못해 쫓아가는 흉내나 내고 있는 꼴이었다. 이상스럽다는, 나의 느낌은 그 언저리에서부터였다. 제복의 경찰이 쫓을 거라면, 법을 어긴 자들밖에 없을텐데, 쫓기고 있는 자들의 저런 당당함이라니. 그리고 명색 쫓는다고 쫓고 있는 자들의 저런 주눅이라니. 관악산 기슭, 잘 손질되어 있는 현대식 종합청사 널따란 구내에는 쫓고 쫓기는 사람들의 찰나를 다투듯한 격동적 움직임과, 멀찌거니들 떨어져서 대개는 우두커니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의 정지 동작이 한데 어울려 기묘한 조형을 이룩하고 있었는데, 그 물경이 내게 몹시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러면서도, 정말 이상스럽게도, 여느 때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이 시대의 다른 풍경에 대해서와는 다르게, 겉짜증스럽게나, 또는 해묵은 먼지 빛깔로 심드렁하게만 보이지 않고, 내 나름으로는 제법 심각하다 싶게 보였던 것은, 아마도 그 풍경이, 공권력의 총 본산이라고나 할
법한, 중앙정부 종합청사구내, 바로 그 한복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무법적 상황을 밑그림으로 깔고 있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리고 또, 이곳도 확실한 검증을 거친 것은 아니지만, 남들은 남루를 걸치고, 양심과 정의를 부르짖어 대기에 눈동자에 핏발을 세우고 있는 판인데, 바로 같은 현장에서, 나는 뭐, 내가 보유하고 있는 온갖 지혜와 기량을 다 동원하여, 그래 봐야 매판적 이익 추구를 위해, 부정한 거래나 공들여 하고 있다니 하는, 말하자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좀 뭣한 느낌 때문이었을는지도 모른다. 하늘은 티 하나 없이 맑았고, 바람 한
점도 없는 그 드넓은 공간에는 햇살이 온통 쨍쨍했다. 그리고 물론 엄청나게 무더웠다.
앞장서 치달리고 있던 사람들의 표적은 ㅂ부 청자는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까 그 건물 앞에는 한 무리의 경찰들이 이미 포진을 끝내 놓고 있었다. 저지선을 아예 그쪽으로 옮겨 놓고 대비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나같이 눈동자에 핏발 서 있는 그 사람들은 곧 경찰 대열 앞에 들이닥쳤는데, 그들은 이번에는 덤벼들거나 하지 않고, 그 앞에서 연좌 대열을 갖췄다. 뒤에 쫓아간 경찰들이 그들을 에워쌌다. 경찰들이 그들을 댓바람에 나꿔채 비웃두름 엮듯 하지 않고, 그렇게 보호하듯 하고 있는 풍경도, 그 순간의 내게는 이상스러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멀어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또 '...... 하라!...... 하라!'하고 외쳐 대고들 있는 듯했다. 손을 칼날처럼 펴 쫙쫙 뻗는 모습만 멀리 보였다. 그들 주변에 아지랑이가 아른아른거리고 있어선가, 그 모습이 얼핏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 기묘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풍경으로부터 내가 눈길을 돌리게 되었던 것은, 나의 일곱 번째 고객의 출현 때문이었다. 그는 정지 동작의 한 부분으로부터였고,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듯, 어깨를 흔들흔들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원 병태 같은 친구들 때문에' 늦은 것을 미안해 했다. 나는 다시 그릴로 들어가 자리에 앉기보다는 아예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나는 벌써 인삼 드링크를 여섯 잔이나 마시고 난 판이었다. 일곱 잔째까지를 생각하니까 좀 끔찍했다. 인삼 냄새가 아니라 썩은 풀 냄새가 코에서 풀풀거리는 듯할 만큼. 12시가 가까워 가고 있었다. 더운데 나가서 보신탕이나 한그릇. 나의 제안에 그 사람은 두말없이 냉큼 따라왔다. 저 친구들, ㅂ부 장관 나와라야. 그 사람은 안내동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가며, 내가 알아듣지 못하고 있던 그쪽 소식을 전해 주었다. 법 없애구 새로 만들구 하는 게 ㅂ부 장관이 하는 일인 줄 아는가봐. 그 꼴에 민주화니, 새 세상이니 하고 있는 게 우습지 않아? 하여튼 이 세상 꼴이...... 그는 툴툴거렸다. 내 심정에 일었던 야릇한 변화가 뒷걸음쳐서 본디 꼴을 갖추게 되었던 건 그쯤에서였다. 차안은 한증막이었다. 나는 차창을 내리며 시동을 걸었다. 거 정말 우습네. 국회 의원이 뭐 하는 직업인 줄도 모르는 모양이지. 하기야 뭐 국회 의원이 뭐 하는 것인 줄 아는 국민이 얼마나 되겠어? 말을 하고 보니까 정말 우스워해야 할 것은 그거였다. 나는 차를 움직이며, 에어컨을 가동시키며, 차창을
닫았다. 조금만 참으슈. 나는 숨이 턱턱 막힌다는 낯빛를 불려 짓고 있는 그를 돌아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을 데리고 사당동 전철역 부근, 수육맛이 기막힌 보신탕집으로 가서, 땀을 뻘
뻘 흘리며, 소주 몇 잔을 곁들여, 황구-주인의 말이 사실이라면-수육과 탕을 먹었다. 나는 물론 나의 고객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갖은 비나리를 다 쳤다.
'고객 관리'에서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여느 때에 잘 모셔 두는 것이다. 나의 용어로 이걸 '기본 아첨'이라고 하는데, 그래야만 거래 관계에 막상 부딪치게 되었을 때, 일을 하기도 수월할 뿐만 아니라, 비용도 적게 든다. 따라서 명절 같은 경우는 물론이고, 휴가철에 그리고 '오늘은 날이 궂으니까', 이런 때를 잘 챙겨 두어야만 한다. 물론 고객이 애경사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나의 경험치에 의하면, 신경써 챙겨야 하는 애경사는, 고객의 친족으로는 사촌 정도까지, 처족의 경우에는 대개 직계 정도면 무난하다. 실컷 마시고 씹어 뇌와 배가 적당히 즐거운 다음에 나는 그를 태워 과천으로 돌아갔다. 마지막 하나 남은 주간지를 그에게 건네준 것은 과천가는 길에서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봉투를 꺼내 알맹이는 자기 지갑에 넣고 빈 봉투는 내게 돌려주었다. 가져가 또 쓰슈. 원가 절감이 딴 거유. 이렇게 말하며. 나는 그를 정부종합청사 구내로 태우고 들어가는 실수를 물론 저지르지 않았다. 지하도를 지나서 후문 부근에서 차를 세웠고, 그는 거기에서 내려 흔들흔들-그러고 보니까 그렇게 흔들거리는 것은 그의 버릇 같았다.-걸어 청사 구내로 들어갔다.
내가 회사에 돌아왔을 때는 오후 2시 반경이었는데, 잉거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갑시다."
비서의 전갈을 받고 그의 방에 들어가니까, 그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어딜?"
나는 약간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내 입에서 물씬거리고 있는 개고기 냄새와 마늘과 들깨 향기가 그의 후각에 어떤 반응을 일으키게 될까 자못 조심스러워하여, 그는 예의 그런 웃음부터 삐끗이 지어 보였다. 국장과의 약속이 이루어졌다, 이런 것이었다. 그건 내게 뜻밖이었다.
미국인들이 보고 있는 거야 어떻든간에, 중앙관서의 국장이란 그렇게 쉽사리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를테면 중앙관서의 한낱 주사 끗발이 어느 정도냐 하면, 경제부처쯤으로 쳐본다면, 대개가 별 출신인 국영기업체 사장을 열중쉬엇 시켜 놓고 훈시를 내릴 수가 있으며, 문교부쯤으로 본다면, 종합대학의 총장을 손가락 끝으로 오라 가라 할 수 있다. 국장이란 그런 권능을 가진 주사로서는 감히 쳐다보기도 어려울 만큼 높은 하늘과 같은 존재였다. 잉거햄이 아무리 미국 시민이라 하지만, 그래 봐야 그쪽 나라 끗발로 쳐보자면, 일개 기업의 과장급도 제대로 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본다면, 컨티넨탈 일렉트로닉스 안에 회장이 하나 있고, 그 아래에 사장이 일곱, 그 아래 부사장이 50명쯤, 그 아래 이사가 200명쯤, 그 아래 매니저가 천 명쯤인데, 여기까지가 컨티넨탈 일렉트로닉스 전화 번호부에 올라 있는, 이른바 '디렉토리 레벨'이다. 비상 연락망을 겸한 사내 전화 번호부에 이름이 올라갈 자격이 있는 계층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잉거햄은 이 계층에 끼어 있지 않다. 하기야 이런 거 따져 봐서 무엇하랴. 미국 국무성의 많은 차관보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 시건가 담밴가 하는 아저씨가 우리 나라에 와서 개판 다 치고 다닌 것을, 대개의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적어도 잊지는 않고 있을 터인데 말이다. 좋은 고기 배불리 먹어 향취 드높던 입 안에 씁쓸한 맛이 돌기 시작한 건 금세였으나, 그렇다고 마다할 수 있는 입장은 물론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는 나의 생사 여탈권을 움켜 쥐고 있는 존재였기에. 사장은 한국인이고, 명목상 인사권이야 사장에게 속해 있지만, 사장은 그래 봐야 나와 다를 바 없게 한낱 고용인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에 잉거햄은 주주 쪽의 법적 대표권을 행사하고 있는 처지다. 사장이니 부사장이니 하는 행정적 기능으로는 잉거햄이 사장의 아래지만, 주주와의 관계, 일단 이런 위상에 서면, 사장이라는 사람은 한낱 부장이나 과장보다도 더 취약한 입장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 하면, 부장이나 과장은 또는 평사원은 그 신분이 노동관계법의 보호라도 받고 있는 처지지만, 사장은 주주가 엄지손가락 하나만 거꾸로 세우면, 그대로 끝이다. 그렇기에, 외국 투자가가 실세를 장악하고 있는 합작 회사의 사장이니 하는 사람의 매판성은 인간적인 면에서 동정의 대상이 될 만하다는 게 나의 소견이다. 그리하여 일단 생사 여탈, 이런 것을 고려해야만 하는 경우가 되면, 나는 제꺽 보호 본능을 발휘하여 목줄에 매여 끌려가는 개의 흉내를 익숙하게 내게 될 수밖에 없다. 내 목에 매어져 있는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야 잉거햄, 바로 그 사람이다.
나는 나로서는 어떤 상판대기의 사낸지도 알 수 없는 그 국장이라는 작대기에 대하여 모멸감과 배반감을 동시에 느끼며, 그보다 더 심각하게는, 나의 기대를 배반하고 이런 만남을 주선한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를 의아스러워 하며, 잉거햄과 함께 차에 올랐다. 이런 만남을 주선한 사람은 사외에 있을 수도 있기는 했다. 미국인 상공회의소나, 한국인과 미국인의 친선 단체 등을 통하여 한국 사회에 많은 지면 관계를 터놓고 있는 잉거햄이기에, 그런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일의 내용이나, 만남이 추진된 시간적 구성 따위로 보아, 아무래도 사내에 있는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진 만남 같았다. 내가 금세 고개를 내저은 것은
비단 오전의 그런 대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느 때의 그로 미루어 보아 그토록 표리 부동하지는 않다는 판단 쪽이 더 큰 이유였다. 더구나 그는 이제 갓 과장이 된 처지로, 적어도 아직은 나를 적수로 바라보거나 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굴까? 그럴 만하다고 짐작되는 몇 사람의 얼굴이 순서도 없이 들쭉날쭉 떠올라 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문득 눈길을 들어 보니 내가 탄 차는 김포가 아니라 과천을 향하고 있었다.
"국장은 김포에 있는데요?"
나는 그를 깨우쳐 주었다. 그가 뭔가 착오를 하고 있는 것이기를 바라면서. 그는 빙긋이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국장이 하나가 아니지 않소?"
그는 나를 가르치려는 눈빛이 되어,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V자 꼴로 곤두세워 보였다. 그가 왼손으로 먼저 잡아 흔든 것은 검지였다. 그것이 김포에 있는 국장이었다. 그는 그 국장의 업무 범위와 권능에 대하여 요약 설명했다. 다음은 엄지 차례였다. 그건 과천에 있는 국장이었다. 그는 또 그 국장의 업무 범위와 권능에 대하여 요약 설명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과천에 있는 국장은 내외국인 출입국 관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처지였다. 그러니까, 김포에 있는 국장이 야전 조직의 어느 한 부분을 지휘하는 사람이라면, 과천에 있는 국장은 그 모든 야전 조직을 총괄하는 본부의 총책 정도가 되는 듯했다. 내 업무 가운데 일부로서 대정부관계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쪽이야 거의 드나들 기회가 없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명은 매우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싶었다. 나는 좀 놀랐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소상하게 알게 되었습니까?"
나는 자못 놀랍다는 낯빛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으며 물었다.
"내가 어떻게 그렇게 소상하게 알게 되었느냐구?"
그는 나의 질문을 그대로 흉내내어 되물었다. 그 다음에 빙긋한 웃음...... .
어쩌면 대답을 슬몃 피해 버릴 것 같던 그가 입을 연 것은 잠시 뒤였다.
"대답할 수 없소. 그가 그 자신을 타인에게 노출시키기를 바라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난 그는 예의 그 웃음을 머금은 채로 나의 낯빛 변화를 면밀히 살폈다. 나의 기분은 젬병이었지만, 그러나 적어도 아직은 패색을 드러내거나, 더구나 항복의 표시로 흰 깃발을 그에게 바치거나 할 처지는 아니었다. 잉거햄이 '그'라고 표현한 그 사람에 대한 의아스러움이 더 심각해졌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일의 추이, 그 자체였다. 나는 아침 일찌거니 김포에서 만난 계장의 신념에 찬 확언을 믿고 있었고, 또 그게 아니라 할지라도 상식적으로 생각해 본다 해도, 이따위 일 같지도 않은 일에 대하여, 중앙관서의 명색국장이니 하는 사람이 왈가왈부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통령이 시골 면장이 할 법할 일까지 시시콜콜 챙기고 있는 풍습이 연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는 할지라도 말이다.
내가 믿고 있는 카드는 또 하나가 있었다. 어떻게 해서 맺어지게 된 약속인가를 알지 못하고 있기는 했지만-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나 물어 보지 않는 쪽으로 했다. 물어 봐야 이기죽거림밖에는 곧이곧대로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았기에-어쩌면 그가 국장의 비서나, 그 아래 주사 하나쯤이나 만나게 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대개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해대로, 국장이니 하는 높직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의 일정이야 벌써 며칠 전부터 빈틈없이 짜여져 있을 수밖에 없을텐데, 어떻게 그런 식의 벼락치기 약속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싶은 것이었다. 더구나 내가 들어서자마자 나가자고 서둘렀던 것을 보면, 정해진 시간이 따로 있는 것 같지도 않지 않은가? 잉거햄이 나의 뇌수를 들여다보고 있기라도 했던 걸까?
"국장이 오후 중 어떤 시간에라도 만나겠다고 했소. 매우 친절하게도."
찌르듯, 그렇게 말했다.
제길 싶었다.
"분명히 국장 그 자신과 직접 약속했습니까?"
나는 약간 따지는 듯한 투가 되었다.
"물론이오. 왜 그 점에 대하여 의문을 갖고 있소?"
그는 조금도 기분 언짢아하거나 하지 않고 빙긋 웃어 보이기만 했다.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입맛이 쓰기만 할 뿐.
과천 정부종합청사 구내, ㅂ부 건물 앞에 이르러 보니까, 거기에는 아까의 시위대, 그 눈동자에 핏발 선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경찰들만 몇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 상황이 끝난 듯했다. 그 사람들은 어디로 끌려간 것일까?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거기에서 오래 머뭇거리고 있을 틈이 없었다. 우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입구에서 방문객 표찰을 받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에 잉거햄은 제 명함을 내게 내밀었다. 오른손 검지와 중
지 사이에 끼워서. 삐끗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나는 잠자코 명함을 받아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부터, 나는 잉거햄의 명함을 두 손으로 받들어 모시는 입장이 되었다. 잠시 뒤에 명함은 국장의 비서-여자-손에 옮겨졌다. 비서는 명함의 이름을 자기 책상 위 일정표에서 찾으려는 것처럼 이쪽저쪽 번갈아 보았다. 비서는 좀 곤란해하는 낯빛이 되었다. 나는 비서가 '약속이 되셨나요?', 이렇게 물어주기를 기다렸다. 아니면 아예, '약속이 되어 있지 않으시군요. 약속을 하고 다시 와주세요.' 라고 하거나. 그런데 비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고개를 갸웃이 한 채 명함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거기에 놓여 있는 낡은 소파에 앉았다. 몇 호흡에 필요한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비서는 문을 열고 나왔다. 들어갈 때와는 다르게 매우 공손한 낯빛이었다. 두 사내가 비서의 뒤를 따랐다.
손에 서류를 들고 있었고, 우리들을 스치지 않기 위해 매우 조심스러워하는 몸짓으로 몸을 조그맣게 오그려 비서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나 혼자 있을 때보다는, 미국인과 함께 있을 때 더 양질의 대우를 받게 되곤 하는, 바로 그런 경우에 처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까 그 앞, 비서의 의아스럽던 낯빛이나 행동도 금세 이해가 되었다. 우리는 곧 방으로 안내되었다. 넓은 방이었고, 그 책상 위에 있는 묵직한 자개 명패로
보아, 우리가 만나고 있는 사람은 바로 국장이 분명해 보였다. 정부 각 부처 출입 십여 년 만에 국장실에 들어간 것도, 또 국장급 고급 공무원을 가까이에서 본 것도 처음이었기에, 나
는 어쩔 수 없이 좀 긴장했다. 국장은 잉거햄의 몸집이 그다지 커 보이지 않을 만큼 허우대가 큼직했다. 호인형이었고, 영양 상태는 물론 좋아 보였다. 웃을 때 윗잇몸이 약간 드러나 보였고, 명함을 내밀 때 보니까, 손이 유난스레 작고 도톰해 보였다.
"오, 아주 좋은 한국 이름을 가지고 계시군요. 빅 쉽."
국장은 잉거햄의 명함을 앞뒤로 뒤적거려 보며 말했다.
"예, 바로 이 사람으로부터 선물 받은 이름입니다."
잉거햄은 나를 돌아다보았다.
임거함(林巨艦), 그런 이름이다.
나는 말하자면 말거간을 위해 따라가게 된 거였는데, 국장은 매우 서툴렀음에도 불구하고
잉거햄과 직접 이야기하기를 바라고 있었기에, 나는 그다지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처음에 멋모르고 괜히 말거간의 몸짓을 지으려 했던 것만 우스꽝스러운 꼴이 된 셈이었다. 나는, 일진이 사납군, 그런 생각이나 하며 잠자코 있었다. 그러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고
있었던 거야 두말 할 것도 없이, 김포의 계장이 안 된다고 했던 것을, 국장과 잉거햄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더 확인하게 되는 것이었다. 믿고 있는 카드가 이중삼중으로 있다는 식으로 뻣대듯 하고 있으면서도, 그 순간 내가 조바심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역시, 아닌게 아니라,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더라는 경험치 때문이었다. 그래도 나는 설마하니 하는 쪽에 내 기대를 얹어 두고 있었다.
"사실은...... ."
대강의 수인사가 끝나자, 잉거햄은 본론에 접어들어, 예의 '미묘한'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의과 대학에 다니고 있는 제 딸이 남자 친구와 함께 방학을 이용해 한국에 왔습니다. 제 딸은 미국에 있는 한국 영사관에서 비자를 받았지만, 제 딸의 남자 친구는 예정에도 없이 갑자기 따라왔기 때문에, 김포에서 겨우 십오 일간의 입국 허가를 받았을 뿐입니다. 모레가 바로 그 십오 일째가 되는 날이죠. 제 딸과 그 남자친구는 당신네 나라 한국이 너무 좋아서 앞으로 이 주쯤 더 머물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런데 김포에서는 제삼국으로 나갔다가 다시 오든가, 아니면 재외 한국 영사관에서 비자를 정식으로 받아 오든가 해야지, 그대로는 안 된다고 해서, 제 딸이 매우 언짢아하고 있고...... ."
그 다음에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추려 설명했다.
"오우."
국장은 깊은 동정의 뜻부터 표시했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제가 도와드리죠."
국장은 곧 인터폰을 꾹꾹 눌러, 김포의 누구를 대, 이렇게 명령했다. 아침에 내가 그 명패만 눈여겨 봐 두었을 뿐인, 바로 그 과장의 이름이었다.
그 순간, 나의 조바심은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고조되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 계장의 단언과, 내가 잔뜩 긁어 돋워 올려놓은 오기에 대한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이제 곧 회심의 미소를 짓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드라마틱한 효과면에서, 잉거햄이 국장을 만나게 된 것은 오히려 잘된 일이고, 그뿐인가, 잉거햄에게 뚫을 구멍을 일러 준 사람이나, 잉거햄으로 하여금 국장을 만나게끔 주선해준 사람까지도 그런 효과에 기여한 셈이 된다. 말하자면 이때까지의 모든 것이, 하나의 절정을 위해 잘 조직된 갈등이나 복선과 같은 것이 되는 셈이었다. 나는 정말 절정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나는 정말 그렇게 말해 볼 수 있게 되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었다. 거 보슈, 빅 쉽 선생. 이 나라에도 안 되는 것은 역시
안 된단 말요, 라고.
전화가 이어지기를 기다리며 국장은 잉거햄에게 물었다.
"따님께서 그 친구와 결혼할 예정입니까?"
"오, 알 수 없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뒤에만 벌서 다섯번짼가 되는 남자 친구니까요."
잉거햄은 어깨를 추썩해 보였다.
국장은 비로소 자신이 촌스럽기 짝이 없는 질문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몹시 겸연쩍어하는 낯빛이 되었다. 그런 낯빛은 그 덩치나 그 방의 크기에 썩 어울리지 않을 만큼 치졸했다. 불려 꾸미고 있었던 거였겠지만, 제법 장자연하고 있던 그 느긋한 여유가 그토록 쉽사리 무너져 버린 것도 내겐 이상스럽게 보였다. 국장의 어려운 경우를 구해 준 것은 전화였다. 김포가 이어진 것이었다. 나의 조바심은 최고조에 다다랐으나, 상식적인 판단에 대한 나의 믿음도 만만찮았다. 나는 이제, 안 되는 것은 역시 안 되는 것이다, 잉거햄이 상식의 이런 벽에 부딪혀 조금 전 국장처럼 몹시 겸연쩍어하는 낯빛을 짓게 될 때, 너무 표나게 드러내 놓고 기분 좋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데 대하여 생각해 두는 쪽에 섰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건 내가 너무 용렬한 사내임을 스스로 표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기에. 그런데 결과는, 적어도 나의 상식 정도에 비춰 본다면, 너무 뜻밖의 것이 되었다.
국장은 잉거햄이 명함을 손에 들고 그 이름을 또박또박 불렀다. 일의 내용을 서너 마디로요약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이 분 따님의 남자 친구가(국장은 거기에서 잉거햄에게 그 이름을 물어 저쪽에 또박또박 이야기해 주었다.) 입국허가를 연장받고 싶어하고 있는데, 그렇게 해주도록 하라, 이런 '명령'이었다. 전화를 끊고 난 국장은 자신이 그렇게 해주도록 '명령'했음을-국장은 '명령'이라고 표현했다-잉거햄에게 이야기해주면서, 자신이 그런 '명령'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있음을 은근히 뽐내고 싶어했다. 잉거햄은 썩 만족해하는 낯빛으로 깊은 사의를 표명했고, 국장은 당신의 어려움을 도와줄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하며, 자신의 방문은 언제나 열려 있으니까, 만일 장차에라도 다른 어려움이 있을 경우에는 언제든지 주저말고 찾아와 달라는 간곡한 당부를 덧붙였다. 국장은 어느덧 장자적 여유를 되찾아 그 얼굴에 실어 두고 있었다.
잠시 뒤에 나는 잉거햄과 나란히 잉거햄의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차는 여의도가 아닌, 잉거햄의 딸과 그 남자 친구가 묵고 있는 조선호텔 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잉거햄은 한시라도 빨리 이 소식을 자기 딸에게 전하고 싶어했다. 나는 내 딸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서두를 수밖에 없소. 그는 그렇게 말했다.
잉거햄은 국장 방을 나와서부터 내내, 예의 그런 웃음을 삐끗이 머금은 채, 때로 즐기듯한
눈길로, 나의 얼굴을 는적는적하게 핥곤 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 식으로 애써 버티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의 기분은 주먹 맞은 상투 꼴이 되어 있는 판국이었다.
"미스터 파앙. 어디가 불편하시오? 어찌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소?"
잉거햄은 일부러라도 그 점을 꼬집어 지적해 보고 싶은 기분인 듯했다.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한심한 놈들. 그딴 놈들에게 비싼 녹을 먹여? 이런 심정일 뿐,
그리고 과연 누가 잉거햄의 귓바퀴에 입술을 대고, 뚫을 구멍을 소곤거려 주었을까 하는 의혹에 사로잡혀, 입 꼭 다물고 홀로 속이나 끓이고 있을 뿐, 그를 향해서든, 또는 나 자신을 향해서든, 해볼 수 있는 말이라고는 통 떠오르지 않았다. 난감했고, 갈증이 심했다. 나는 사실,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어떤 현상에 대해, 거의 처음 머금어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나 자신의 이런 분노를 어떤 눈길로 바라보아야만 하는가, 이런 것부터가 무척 어정쩡했다. 나는 사실 그 동안에 분노가 일 법한 대상이라면 아예 피해 버리거나, 아니면 멀찌거니 밀어붙여 두는 쪽이었다. 무난함과 원만함의 가치를 숭상했으며, 심각한 국면이라면 딱 질색했다. 예이 민이, '정당한 분노의 고귀함'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도, '엿먹어라', 이런 기분이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는 사이에 나는 현실적으로 실익이 되지 않는 모든 대상을 심드렁한 눈길로 넘겨 바라보기가 일수였다. 결과적으로 보아, 말하자면, 분노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고나 할까? 나는 무엇보다도 내 가슴속에서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는 그 격동적 느낌이 무척 낯설었다.
잉거햄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이제 나 따위는 훑어볼 가치도 없다 생각하고 젖혀둬 버리기로 한 듯했다. '돌아오지 않는 강'이었다. 그건 그가 기분이 최고상태임을 나타내는 증거 가운데 하나였다. 손에는 국장의 명함이 들려져 있었다. 들여다볼수록 신기하기라도 한 것처럼 요리조리 매만지작거렸다. 그가 앞자리에 놓아 둔 서류 가방을 당겨 와 제 무릎 위에 놓은 것은 잠시 뒤였다. 그는 가방을 열고, 거기에서 종이 하나를 꺼냈고, 가방을 닫은 다음에, 종이를 그 위에다 펴놓았다. 내 눈이 그쪽으로 돌려졌던 것은 그때였다. 그건 ㅂ부의 기구표였다. 김포의 국장과 과천의 국장 옆에 특히 상세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아까 잉거햄이 말로 설명했던 꼭 그대로였다. 기구표는 아이비엠 볼타자기로 작성된 것이었다. 사용한 볼은 흔히 '왕볼'이라고 불리는 굵직한 활자체였다. 오른쪽 아래에는 잉거햄의 글씨로,
오늘 날짜와 그 바로 아래에 'PREPARED BY'라고 적혀 있었다. 'BY'다음에는 기구표를 작성하여 잉거햄에게 건네준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을 터였다.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의도적인 것이었을까? 잉거햄의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바로 그 위를 누르고 있었다. 잉거햄은 왼손에 볼펜을 쥐고, 기구표상 과천 국장 밑에다 명함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 넣었다. 이름을 다 적고 난 그는 볼펜을 속 주머니에 넣고 나서 가방을 열어 기구표를 그 안에 넣었다. 따딱. 가방이 닫혔고, 가방은 잠시 뒤에 앞자리로 되돌아갔다. 그 사이에 내 신경은 팽팽하게 곤두섰다. 그건 잉거햄의 계산이었을까? 그러고 보면 잉거햄의 계산은 아까 과천으로 가는 차안에서의 '그'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였다. '그가 그 자신을 타인에게 노출시키기를 바라지 않고 있기 때문에'라던. 그 말은 사실은 굳이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어떤 계산이 없다면. 이제 또, 기구표를 그런 식으로 꺼내 나의 시야에 슬몃 던져 놓으면서 엄지손가락으로 'BY' 아래를 가리고 있었던 것도 그랬다. 나의 내부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것은 증오감이었다. 그랬다. 그건 이간질이었다. 그건 그의 상투적 방법이었다. 그런 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네는 잘도 놀아나곤 해 왔다. 어찌 그뿐이라 할 수 있으랴. 그건 그대로 제국주의자들의 상투적 방법이기도 했다. 미국 시아이에이의 제3세계 정책 기조가 그렇다던가. 우리식 비유대로라면, 어부지리의 도모였고, 손대지 않고 코풀기였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라면, '누구'라는 구체적 개인을 노출시켜 두기보다는, '그'라고 표현해두는 것이 효과적 아니겠는가? 그러고는 또 '물증'삼아 기구표 정도를 넌지시 비춰 보이면서 작성자의 이름을 감춤으로써 이쪽의 의혹을 짙게 하는 방법 또한 써먹어볼 만한 방법이리라. 이간 효과의 극대화를 위하여.
잉거햄의 콧노래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흠흠흐 흠흠흠흐으...... 나는 그 소리를 밀어내려 애쓰며, 또한 나의 증오를 다스리려 애쓰며, 한 사내의 얼굴을 열심히 쫓고 있었다. 김이었다. 틀림없이 그놈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건 막연한 짐작이 아니었다. 나는 그만 보았던 것이다. 기구표상에 철자 하나가 잘못되어 있는 것을 고친 부드럽고 굵은 글씨, 수성펜의 잉크가 녹색이었음을. 그건 김의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잉거햄 주위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김을 빼놓고는 그런 빛깔 잉크를 쓰는 사람은 없다! 나는 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입맛은 너무 썼고, 바깥날씨는 너무 벌갰으며, 차 안은 너무 서늘했다.
그 꽃이 내 눈에 띄게 되었던 것은, 이수교를 건너 한남동 쪽으로 들어가는 조붓한 도로를 달리고 있다가, 신호 때문에 차가 잠시 멈춰 섰을 때였다. 그 왼편에는 미국 주둔군이 진을 치고 있는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기다란 담장이었는데, 꽃은 그 담장 바투 아래에 있었다. 낡은 콘크리트 담장-아마 50년대의 것이리라-주변은 삭막했다. 뙤약볕이 유난스레 쨍쨍한 것처럼 느껴졌던 것도 그런 삭막함 때문이었을는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이름 모를 외줄기 노란 빛깔 꽃 한송이가 피어 있었던 것은 바로 거기였는데, 꽃잎은 너무 파리하고 시들어 본디 빛깔을 잃고 있었으며, 그 외줄기 꽃대는 너무 야위어 수척했다. 땀을 흘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이제는 흘릴 땀도 없다는 것처럼 배들배들 메말라 가며, 그대로 어떻게든 버텨내려 온갖 안간힘을 다 쓰고 있는 듯해 보이기도 했다. 신호가 열려 차가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자, 나는 목을 돌려, 나의 눈에 띈 하찮은 꽃 한 송이를 바라보았다. 오래잖아 그 꽃은 나의 시야에서 지워져 버렸다. 그때 내 가슴에 일기 시작한 비애에 대하여, 나는 잘 설명할 수 없다. 하도 바쁘다 보니까-그런가?-꽃 이야기를 해 보았던 적도, 더 지독하게는 꽃 '따위'를 시야에 담아보았던 적도 없는 듯한데, 모처럼 눈에 띈 꽃마저도 저런 꼬락서니라니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때 느낀 비애가 그 꽃에 대한 것인지조차도, 사실은 분명하지 않았다.
잠시 뒤에 나는 그 하찮은 꽃 한 송이를 한 번 더 보게 되었다. 비애 그대로 고여 있는 내 가슴속에서였고, 핏발 선 눈동자들과 더불어서였다. 그리고 또, 허우대 큼직한 국장과 김의 이글이글거리고 있는 눈빛이 먼 빛으로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건 내가 목도하게 된 또 하나의 기묘한 조형이었다.
나는 이때까지의 내 행태로 보아 객쩍다 싶으리만큼 깊게 가라앉아 나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는 낯선 세계에로 막 발을 들여놓기라도 하는 듯한 심정이었다. 차는 남산 3호 터널을 지나가고 있었다. 아직은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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