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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단편 소설

97. 나비

by 자한형 2022.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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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비

-유진오

바나 카페에 있는 여자들의 세계라면 누구든지 첫째로 술, 둘째로 사내를 들 것이지만 프로라는 아직 술을 마시지 못하므로 그 에게는 오직 사내들의 세계가 있을 뿐이다. 허기야 프로라의 이름이 이 종로 뒷골목에 아무리 높고 그를 싸고 도는 사내가 아무리 많다 해도 이런 곳에 발을 들여 놓은 지 아직 석 달 밖에 안되는 프로라라 그에게 있어서 제 1의 사내는 아직까지는 그래도 그의 남편인 것이다. 생각하면 변변치 못한 인물이라 남과 같이 남편입네 하고 제법 믿고 공경할 만한 위인도 못 되기는 하나 어찌 됐던 몇 해 전에는 식도원에서 결혼식이라는 것을 거행한 사이고 민적 등본을 내 보아도 확실히 김대진 처에 최명순이라고 씌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저녁마다 밤 늦은 후 최종적으로 찾아 들어가는 것은 좋건 그르건 역시 그의 품속이니 어느 모로 뜯어보든지 그를 첫째로 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김대진을 첫째로 꼽는댔자 그러나 그것은 무슨 아기자기한 사랑을 그에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이만 해도 벌써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커녕 알고 보면 남편입시라구 심푸정스럽기 짝이 없는 존재다. 그 전에는 그래도 그렇게까지 심하게는 생각지 않았는데 요새 와서는 그저 변변치 못한 사내이것이 한마디로써 표현해 본프로라의 생각인 것이다. 전문학교를 졸업했다면서 어디 가 취직자리 하나 구하지 못하고 밤낮 거리로 비실비실 돌아다니기나 하는 그가 생활 무능력자라는 것을 안 것은 벌써 전의 일이나 그저 그렇거니 하고 반쯤은 운명으로 돌리고 있던 것인데 이런데 나와서 여러 사내들을 알게 되고 별의 별별 경험도 쌓고 해 가는 동안에 자기도 상당한 미인이라는 자신이 차차 들게 되고 만일 지금 김대진과 결혼한 사이만 아니라면 그보다 몇 십 곱절 난 사람을 얼마든지 골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됨에 따라 그에 대한 불만이 점점 더 또렷해 가는 것이다.

 

생각하면 데파트에 나선 지 사흘째 되던 날 김대진이 넌지시 갖다 디밀던 연애 편지를 박차 지 않고 받아 들던 그 순간에 벌써 발을 헛 내디딘 것이라 할 것이다. 어째서 그것을 찢어 버리지 않았던 것인가. 열여덟 살의 소녀 눈에도 몹시 유치해 보이는 편지였다. 그것도 역시 운명이었을까. 김대진이 나타난 후에도 프로라는 여러 사내에게서 가지가지 유혹을 받았으나 이상스레도 마음은 제 일착으로 편지를 써다 디밀던 김대진에게로무슨 훌륭한 사내라고는 생각지 않으면서도 쏠리는 것이었다. 연애도 무슨 경주 같아서 맨 먼저 뛰기 시작한 놈이 제일 유리하다는 것인가. 그런데다가 요새 와서는 남편의 사람됨이 좀 는질는질한 것 같이도 생각되는 것이다. 변변치 못해 보이는 것은 짐짓 꾸미는 것이고 실상은 프로라보다는 도리어 웃길 이어서 프로라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쯤은 뻔히 알면서 짐짓 모르는 체 함으로써 도리어 그것을 향락하고 프로라의 일거 일동을 슬그머니 감시하면서 혼자 히죽히죽 웃고 있는 것 같이 생각되는 것이다.

 

프로라가 밤늦도록 여러 사내를 상대로 웃고 떠들고 하다가 집에를 돌아가도 그는 태연 범범하다. 먹지 못하는 술을 그것도 장사라 손님의 강권에 못 이겨 몇 잔 마시고 술내를 훅훅 풍기며 들어가도 남편은 잔소리 한 마디 하는 법 없다. 사람이 암만 변변치 못하기로서니 그럴 수야 있나. 게다가 요새 와서는 프로라가 벌어다 주는 잔돈푼이 좀 풍성해지니까자기도 찻집으로 술집으로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다가는 프로라가 돌아올 때쯤이나 돼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버릇까지 생겼다. 그러고 보니 프로라로서는 그것이 하필 못나서만 하는 짓이 아니라 현재의 프로라와의 관계를 만족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도리어 향락하는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프로라)가 지금 있는 가게로 처음 나을 때에도 형식상으로는 프로라가 동무의 권청으로 스스로 움직인 것 같이 되어 있지만 좀더 따져 보면 남편이 그렇게 시킨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프로라자신 이런 세계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니 프로라에게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남편된 사람으로서는 도리어 그런 것을 말렸어야 할 것인데 그는 프로라의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체 글쎄 그래? 그럼 그것두 좋지 하는 식으로 우물쭈물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 고런 것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변변치 못해서 뿐 아니라 결과가 어떨 것쯤 뻔히 알면서 짐짓 모르는 체 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것 저런 것을 생각하면 프로라는 김대진과는 하루 바삐 헤지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으로도 생각이 된다. 변변치 못한 것이 라면 변변치 못하니까 헤져야 되고 그렇지도 않아 음흉스러운 것이 라면 한층 더 께름하지 않은가.

 

어찌 됐든 사랑은 질투라는데 김대진은 질투의 내색도 뵈지 않으니 자기를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이라고도 생각이 된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프로라는 그 놈의 어린것은 무엇하러 그렇게 닐름 태어났담 해보기도 한다. 하기야 밤마다 그는 프로라가 집에를 돌아오든 옷을 갈아 입든 간에 모른 체하고 눈을 감고 누웠다가는 불을 끄고 막 달디단 잠이 눈까풀을 내리 누를 때가 되면 담을 넘는 구렁이 모양으로 스르르 가까이 와서 지긋지긋 잡아당기고 하는 것이 버릇이 되다시피 돼 있고 그런 때면 프로라역시 모든 쓸데없는 생각을 저버리고 동물적인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글쎄 그런 것도 사랑이라 할까. 이튿날 아침이면 프로라는 어젯밤의 자기 자신의 흥분을 부끄럽게도 이상스럽게도 생각하는 것이지만 제 삼자로서 본다면 그것도 사랑의 한 방식이 아니랄 수 없는 것이요 또 그런 방식에 프로라가 매력을 느끼고 있지 않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라) 가 김대진과 헤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하필 어린애 때문만도 아닐 법 하구만두. 그러나 어쨌든 남편이라는 김대진이 그런 사람이 되고 보니 프로라는 자연 제이 제삼의 사내에게 무책임한 흥미도 가져 보는 것이다. 무책임이라는 것은 별로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또 나중에 이렇게 이렇게 하리라는 예정도 없이 그저 좀 흥미를 가져 본다는 뜻인데 제2의 사내라고도 할 이종식과의 관계는 말하자면 이 무책임한 것의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이종식을 안 것은 프로라가 여급으로서의 발을 내디디던 바로 그 첫 순간이었으니 말하자면 그는 데파트시대의 김대진에게도 비길 존재였다. 그 날 프로라는 자기를 그리로 끌어들인 게이꼬와 함께 처음으로 가게에 가서 주인하고 인사를 하고, 이름을 무엇이랄까 본명은 명순씨라죠, 아이, 건 싫어요, 그럼 새로 지어야 할 텐데-〈프로라옳지 프로라가 어떻소.

 

이번에 고만둔 사람이 마침 그런 이름이니, 하고 말을 주고받고 하고 있는데 마침 들어온 것이 이종식이었던 것이다. 홀로 뛰어나간 게이꼬는 반가운 손님인 듯 아이구 이상오늘은 대낮부터 이거 웬일이슈, 어 저 사생을 좀 나섰다가, 하고 몇 마디 주고받고 하더니 한참이나 쏘곤쏘곤 무슨 밀담을 한 끝에 별안간 ,

 

『〈프로라! !

하고 안으로 대고 소리쳤다. 그때의 그 프로라라는 이름의 울림은 몹시 이상스럽기도 신기스럽기도 하더니. 잊어버리지도 않는다.

 

그때 이종식은 바로 오른편 둘째 테이블에 캔버스며 오일 박스 나부랑이를 벽에 기대 세워 놓고 싱글싱글 웃는 낮으로 쭈빗거리며 나가는 프로라를 맞이한 것이었다. 이는 한참이나 말없이 프로라의 얼굴에서 발끝까지를 치드리 내리드리 훑어보고는,

『-음 미인인데. 미인인데.

한탄하듯 혼자 중얼거렸다. 프로라의 용모에 몹시 감탄한 것이다. 보통이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인사 한 마디 하지 않고 그런 소리부터 하는 것은 몹시 실례라 할 것이나 프로라에게는 미인이라는 찬사가 우선 귀에 부드러웠고 그렇지 않아도 예술가라는 것은 언어 행동도 보통 사람과 달라 몹시 솔직하거니 하고 일상 생각하던 그것이 들어맞은 것도 같아서 저절로 히 삥긋이 웃어지며 그에게 목례를 건넨 것이다. 그것이 또 아리땁게 보인 것인지 손은 또 한참이나 소리 없이 쳐다보더니,

이름은?

하고 비로소 묻는다. 『‥‥‥‥』 〈프로라프로라라는 이름이 서먹서먹해서 나오지 않아 또 빙긋이 웃었더니, 『〈프로라라니까요. 미인이죠? 귀애해 주세요.하고 게이꼬가 대신 대답한다. 이종식이 모델이 되어 달라고 간청한 것은 그 날 즉석에서였다. 아니 그 말 전에 이는 잠자코 스케치 공책을 꺼내 들고 프로라의 얼굴을 사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프로라는 자기 얼굴이 그렇도록 예쁜 것일까 하고 속으로 몹시 기쁘기는 했으나 이가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바람에 얼굴을 어디다가 둘 곳이 없어서 홀 가운데 장식해 논 벚꽃 가지로 시선을 향하고 있었는데 십 분이 못돼 이는 고만 좋소 하고 나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 몇 번 더 연필을 움직이고는,

잘 되진 않았구먼-』

하면서 테이블 위에다 데생만 된 그림을 내밀었다. 프로라는 단번에 감탄했다. 어쩌면 그렇게 잘 그렸을까. 그림을 생판 모르는 사람이면 그렇게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나 프로라는 학교시대에 그림에 취미를 가졌었고 광고 포스터 도안에는 제법 자신도 있던 처지라 예술적인 작품일수록 결코 모델과 똑같지는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눈이 좀 짝짝이가 되고 코가 좀 삐뚤어졌다 해도 그것은 그저 그렇거니 하는 것이다. 그런지라 모델이 되어 달라고 이가 청했을 때에는 프로라는 당장에라도 승낙할만치 속으로는 기뻤으나 그럴 수도 없어 대답을 몽롱하게 했더니 이는 그날 밤으로 친구를 데리고 다시 와서 프로라를 소개하고 자랑하고 찬미하면서 또 모델이 되어 달라고 졸라댔다. 프로라는 몹시 행복했다. 인제야 자기는 들어설 길로 들어 선 것인가도 싶었다. 화가라는 그런 존경할 명칭을 떼더라도 이는 그 가게에는 단골 손님이어서 아홉 명이나 되는 계집애들이 모두 그를 환영하는데 그들을 다 제쳐놓고 그렇게까지 자기를 좋아하는 것만 해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래 반쯤 승낙하고는 끝은 어름어름해 두었던 것인데.

 

이가 선전(鮮展)에도 입선되지 못하는 엉터리 화가라는 것을 프로라가 알아 내지 못한 것은 그리고 보니 무어 이상할 것 없는 것이다. 어쨌든 프로라는 이가 순식간에 인물화를 썩썩 그려내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았고 또 게이꼬는 이는 유명한 화가여서 동경 제전에도 출품만 하면 문제없이 통과될 것이지만 그까짓 관전(官展)은 문제도 삼고 있지 않다고 설명했기 때문에 그것도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는 취하면 자기 입으로도 그런 말을 했다. 이의 말을 그대로 곧이 듣는다면 조선서는 이 밖에는 화가가 없게 되는데 그것까지는 쫌 어떨까 했지만은 어쨌든 그가 훌륭한 화가임에는 틀림없다는 것이 프로라의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모델 노릇 하러 이의 집을 찾아가던 바로 첫날에 그가 별안간 프로라를 소파에 쓰러뜨렸을 때에 프로라가 하늘이나 무너지는 듯이 놀랐다 해도 조금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프로라는 총명한 여자라 곧 예술가란 것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법이라 이런 것이 예술가적 정열이거니 하고 고쳐 생각하고 노한다거나 크게 반항한다거나 하지는 않고 아이 왜 이러세요 하면서 가만히 떠민 것인데 이는 그것을 여자의 수줍은 승낙으로 잘못 알고 도리어 더 얼굴을 들이 비비는 것이었다. 그것 쯤야 또 무어 어떨까 만은 얼마를 그러자 프로라자신 스르르 맥이 풀리며 두 다리가 노곤해졌다. 그제서야 프로라는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펀뜩 들어 좀 세게 떠밀며 인제 고만 하세요. 안 놓으시면 소리를 지를 테에요 했더니 이는 그것을 또 오해한 것인지 의외에도 싱겁게 물러났다. 점직한 얼굴로 응접 테이블 위의 땅콩을 까먹고 앉았는 이와 모양을 보니 프로라는 슬그머니 우스운 생각이 들어 옷을 고치고 콤팩트를 쓰면서 빙긋이 웃어 보였으나 그때는 둘 이 다 고비를 이미 넘은 판이라 또다시 어떻지는 않고 말았다.

 

남편에게도 좀 미안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무어 어쩐 것은 아니니까 해 두고 그것보다도 마음에 꺼리는 것은 이가 그 때문에 낯이 없어 다시 가게에 오지 않게나 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도 헛 걱정이었다. 그날 밤으로 이는 태연스레 또 나타나 시치미 뚝 떼고 떠들어댔다. 그날 낮에 프로라가 이의 집에 갔던 것을 아는 축들은 입으로만 아무 소리도 안 할망정 슬그머니 두 사람 사이를 흠모하는 눈치로 이를 환대하는 것이다. 이는 이로서 또 낭자군의 그런 포위공격을 받으며 프로라와의 사이에 짜장 무엇이나 있었던 체 보통 때보다도 유유자적하는 태도였다. 프로라는 그런 태도를 갖는 이가 밉기 짝 없었으나 이따금 아직도 입가에 남은 이의 감각을 휙 느낄 때에는 또 그렇게 밉게 생각되지도 않는 것이다. 그런 것이 사랑을 거절한 여자의 마음이라는 것인가. 이는 그 뒤 얼마 안돼 사다꼬라는 여자를 걸고 그것 때문에 여러 가지 옥신각신이 있었기 때문에 내내 엉터리 화가라는 것까지 드러나고 말았으나 모든 여자가 모두 이의 욕을 하는 지금 와서도 프로라는 그를 그렇게 나쁘게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짜 화가 행세한 것 쯤야 그저 그렇다 치고 사다꼬와의 관계로 보면 나쁜 것은 도리어 사다꼬가 아닌가.

 

떨어질 듯 떨어질 듯하면서도 좀체로 안 떨어지는 프로라때문에 몸이 단 이가 그 분풀이로 거는 것인 줄을 모를 리 없으면서 사다꼬프로라에 대한 일 종의 새암으로 제 편에서 걸고 넘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프로라의 논리인 것이다. 여자들이 이의 욕을 하는 때면 프로라가 심푸둥해 부인화보를 집어드는 것은 이런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또 다른 여자들은 아직도 프로라가 이에 대해 무슨 생각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니 또한 우습지 않은가. 이에다 대면 훨씬 싱거운 관계이지만 오금동은 말하자면 프로라의 제3의 사내다. 허기야 홀에 나온 지 불과 얼마 안되어서 프로라의 평판은 이 종로 뒷골목에 자자해지고 그를 찾아오는 손님은 하루에도 몇 십 명씩 되는 것이지만은 그 중에서 좀 추려본다면 오가 제삼쯤 된다는 것이다. 오금동은 그러나 이종식 같이 남의 눈에 뜨이게 노는 축은 아니었다. 얼굴도 단정하고 차림차림도 깨끗은 하나 너무 그래서 도리어 값싼 월급쟁이라는 것이 당장에 짐작되는 그런 인물이다.

 

언제부터 가게에 오기 시작한 것인지도 아무도 모르는데 그의 말을 쫓으면 언젠가 회사에서 연회가 있던 날 밤 친구들에게 끌려 이 홀에 왔다가 우연히 프로라를 봤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프로라가 예쁘다거나 프로라한테 반했다거나 하는 등속의 말은 입가에도 올리지 않는다. 언제든지 혼자 와서는 술 한 병 또는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한없이 잠자코 앉았다가 프로라가 옆엘 가면 그제서야 기꺼운 듯이 삥긋삥긋 웃으며 뜨문뜨문 어색스레 말을 거는 것이다. 거기다가 팁조차 시원스레 놓지 못하고 보니 여자들의 환심을 살 리가 만무하다. 프로라도 그에게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고 어떤 때는 도리어 이 녀석이 백줴 무슨 다른 야심을 품고 짐짓 이렇게 수줍은 체하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오의 발길이 끈기차게 계속되고 나중에는 과자랑 분첩이랑 실없이 한 약 속을 꼭꼭 지켜 정성스레 사 가지고 오게까지 됨을 따라 차차로 그런 생각은 없어져 갔다.

 

그러나 그저 그 뿐 그 이상의 무슨 호의는 가져지지 않았다. 그래 마지못해 오의 옆에 가 앉으면 프로라도 오의 묻는 말에나 뜨문뜨문 대답할 뿐 그가 말이 없으면 자기도 잠자코 있는 것이다. 프로라의 그런 침묵을 오는 또 오대로 자기에게 대한 호의로 생각하는 것인지 만족한 듯이 삥긋삥긋 웃고 있는 것이나 그것은 오의 혼자 노름이요 프로라는 그런 때는 으레히 내일 낮에는 홀에 나오기 전에 화신에 가서 어린애 새 속옷을 하나 사다 입히리라는 등속의 다른 생각을 하고 앉았다가는 넌지시 시계를 쳐다보고 갑자기 몸이 몹시 노곤한 것을 느끼며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커다랗게 하품을 하는 것이다. 그래 오던 것인데 이것도 또 엉터리 회사원이라는 것이 의외로 빨리 탄로가 났다. 그 날 낮에도 오에게서 온 케이크 상자를 펴놓고 여자들이 둘러앉아 한창 시시덕거리고 있는 판인데 저축은행으로 돈 취하러 간다고 나갔던 메리가 대굴대굴 굴러 들어오며 무슨 큰 발견이나 하고 온 듯지지벌거렸다.

 

호호호호, 원 별 것 다 봤어. 건 또 뭐야. 거 또 오상헌테서 온 거냐, 어쨌든 하나 잡숫고. 허지만 좀 께림직헌데. 프로라, 오상말야, 이거 사 보낸 네 스짱말야, 뭐 무슨 회사원인가 뭐라구 버티었지. 원참 호호호호, 알구 보면 저축은행 고쓰까이더구나. 저축은행 대합실엘 쑥 들어갔더니 문 앞에 앉았던, 이렇게 쓰메에릴잡순 친구가 별안간 벌떡 일어나 줄 뺑소닐 치겠지. 그게오상이더란 말야. 달아나지나 않았더라면 몰라나 봤지. 원 우스워서 호호호호. 여보 오상허구 부를려다 말았어.

 

떠드는 품이 오 때문에 프로라에게 질투나 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몹시 통쾌해 하는 모양이다. 프로라는 목구멍을 넘어가던 케이크 쪽이 목이 메일 만치 불쾌했으나애가 왜 이래. 스짱은 다 뭐야. 내가 언제 그일 칭찬이나 한 마디 했던. 그이허구 연애했더면 노랑 살인날 뻔했구나. 저 좋아 저 온 것이지, 누가 뭐 어쨌나하고 나서.

허지만 고쓰까이건 말건 손님야 손님이지.

하고 변호까지 하는 것이다. 오가 여태껏 회사원이라고 속이고 다닌 것이 밉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 때문에 무슨 손해 본 일은 없는 것인데 오의 정체를 발견하고 메리가 공연히 좋아하니 그에 대한 반동으로 도리어 오에 대해 전에 없던 호감이 슬그머니 동하기도 하는 것이다. 오금동이가 자기는 아직 총각이요 집에는 어머니 한 분밖에 안 계시며 회사에서의 성적도 괜찮아서 오는 유월에는 승급도 되겠다는 얘기를 떠듬떠듬 해 가며 슬그머니 프로라에게 결혼을 청한 것은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밤이었다. 낮에 메리를 만났을 때는 원체 빨리 내뺐기 때문에 자기의 정체를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프로라는 그것이 좀 뻔뻔스러운 듯도 해서 한 마디 쏴 줄까도 했으나 말하는 오의 얼굴을 흘깃 보니 표정이 딴딴하기가 나무 조각 같다. 필시 오는 그 말을 꺼내기까지에 비상한 결심을 한 것이라 생각하니 도리어 우습기도 해서,

그럼 얼른 좋은 색시를 얻어 재미있게 살림을 하시지 그래요.

해봤더니,

색시요?

하면서 안타까운 듯이 프로라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런 좋은 자리에 누군 안 가겠어요. 나 같으면-』

하고 한 번 더 놀려댔더니 오는 놀리는 것인 줄은 모르고 눈을 빛내며,

당신이 당신이‥‥‥‥』

하며 당장에 침이 말라 말을 끝내지 못하고 프로라의 손을 잡으려 든다. 우스운 중에도 프로라는 오의 거짓 없는 정열을 느끼는 것 같아서 너무 지나치게 놀린 것이 미안쩍기도 해서 농담인양 호호호 웃고 다른 테이블로 가는 체 자리를 일어섰으나 어째 마음에 꺼 림칙하기도 하다. 오는 그 후로는 오기만 하면 프로라에게 자기와 결혼해 달라고 졸라댔다. 프로라는 귀찮기도 하고 그 이상 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결과가 좋지 못할 듯도 해서 그렇게 된 후로는 여간해 그 옆으로 가지도 않았다.

 

프로라의 태도가 변한 것은 오에게도 곧 짐작된 모양이어서 다른 손님들과 떠들고 놀다가 흘깃 보면 어떤 때는 이쪽을 뚫어지게 보고 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한숨을 짓는 듯 눈을 감고 있기도 한다. 자세히는 몰라도 한 달은 넘어 다녔으니까 아마 적어도 일이백 원을 썼을 게다. 고쓰까이라니 많아야 삼십 원 월급밖에 안될 텐데 저이가 무슨 탈이나 내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차차 프로라가 염려하기 시작하자 웬일인지 오는 홀에 오던 발을 뚝 끊고 말았다. 그러자 누구의 입에선지 그가 은행돈을 훔쳐냈기 때문에 경찰서로 잡혀갔다는 말이 나왔다. 큰일났다. 혹 자기도 경찰서에 불려 가지나 않을까 하고 프로라는 근심하고 있는데 하루는 그것도 거짓 소문이요 오는 여전히 저축은행에 앉았더라는 소식을 메리가 가져왔다.

그리고 고쓰까이라는 것도 헛말이고 사실은 그 보다도 높은 은행 수위라는 것이다.

허지만 아무튼 작자 싱겁게 깝대긴 착실이 썼지. 아마 적어두 다섯 해 모은 돈은 다 털었을 걸. 프로라는 너무 해.

하고 이번에는 오에게 동정하는 듯 프로라를 비난하는 듯한 말투다. 하지만 누가 오래서 다닌 것인가. 이종식이나 오금동 같은 사람은 좋건 그르건 처음부터 프로라를 좋다고 다니기 시작한 사람이지만 프로라의 제4 의 사내라고도 할 최형태는 또 좀 이상한 사이이니 그는 본시 게이꼬의 애인이던 것이 프로라를 알게 된 후 차차로 이편으로 기어 넘어온 것이다. 최는 유명한 부랑자로 홀 안의 평판도 아주 나빴다. 차림차림부터 벌써 구역이 나는 데다가 직업도 학식도 아무것도 없으면서 연극배우라고 자칭하는 사람, 투기하는 사람, 돈푼이나 있는 있는 부랑자, 이런 사람들과 용하게 사귀어 가지고는 날마다 당구장과 술집으로 굴러 돌아다니는 것이다.

 

게이꼬는 지금 와서는 최 때문에 갖은 고통을 다 겪으면서도 떨어지지 못하는 이상한 사이다. 최는 유흥비가 떨어지면 게이꼬에게서 뺏아다 쓰는 것이다. 게이꼬는 돈에는 무서운 여자라 그럴 때마다 번번히 쫑쫑거리고 싸우는 것이나 끝끝내는 넘어가고야 만다. 게이꼬가 얼른 돈을 안 주면 최는 홀에 있는 다른 여자들한테 쓸데없이 모션을 걸고

 

그러면 또 다른 여자들이 그와 시시덕거리니 이상하지 않은가그걸로도 잘 안되면 어디 가 낯모르는 여자를 끌고 와서는 부어라 먹자 술을 막 마시고 게이꼬보는 데서 일부러 여봐라는 듯이 어깨를 껴안고 뺨을 비비고 하는 것이다. 프로라로서 보면 최의 그런 행동은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유치한 짓이건만은 게이꼬에게는 그것이 단방약이 되니 또한 우습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밤이면 으레히 파장 후에 최와 게이꼬사이에 일대 격투기가 일어나는 것이나얻어 맞고 채이고 하는 것은 물론 게이꼬뿐이다그 이튿날이면 어젯밤의 모든 연극이 일장춘몽인 듯 둘이 의좋게 활동사진 구경을 가는 것이니 옆에서 보는 사람으로서는 더욱더욱 이상하다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최인지라 그가 프로라귀에다 대고 언제 한 번 한강에 보트 타러 가자고 가만히 속삭였을 때에는 대체 이 사람이 머리가 성한 것인가 하고 얼굴이 다시 쳐다봐지는 것이었으나 최는 태연자약한 것이다. 게이꼬프로라를 믿기 때문에 프로라하고 최가 얼마를 앉아 노닥거려도 별루 싫은 눈치도 뵈지 않았으나 프로라로서는 처음엔 한 귀로 흘려 버리고 대답도 않던 최의 청이 저녁마다 반복되자 나중에는 시끄러워서,

『〈게이꼬알면 또 화내우. !

하고 거절했다.

그랬더니,

제 그러게 누가 단 둘이 가래나. 게이꼬하구 으레 셋이 가자는 것이지.

한다. 그 말에 프로라는 까닭도 없이 부끄러워 낯이 확확 달았다. 허구 많은 말에 왜 하필 그렇게 말했던가 하고 후회하는 것이나 이미 해논 말이라 하는 수 없다. 그래 그 후 며칠인가 지나서 최하고 게이꼬하고 프로라셋이 한강을 나갔던 것인데 그 곳에서 의외의 봉변을 당한 것이다. 보트는 셋이도 넉넉히 탈 수 있는 것인데 최는 셋이 타면 위험하니 둘씩 타자고 우기면서 처음에는 게이꼬를 태워 가지고 근처를 한 바퀴 돌아 나와 이번에는 프로라태워 가지고 강 한복판으로 저어 나갔다.

 

프로라는 무섭기도 하고 강 기슭에 혼자 서있는 게이꼬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어서 인제 고만 나가자고 자꾸 졸랐으나 최는 괜찮다, 저 건너 숲 속 그늘이 좋으니 거기 가 놀고 오자고 하면서 덮어놓고 강을 건너갔다. 돌아다보니 게이꼬는 강변을 따라 올라오며 인제 고만 나오라고 소리를 치고 손짓을 한다. 프로라와 마주 앉은 최는 그러는 게이꼬를 정면으로 빤히 보면서도 게이꼬야 그러건 말건 강을 다 건너가 조그만 언덕 모퉁이를 돌아 보트를 강가에 대고 프로라의 손목을 쥐고 내 끌었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설마 했던 것인데. 퉁퉁퉁퉁 요란한 소리가 나며 모터보트가 와 닿고 거기서 뛰어내린 것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게이꼬였다. 망할 것이.투덜거리며 최는 일어나 게이꼬에게로 가며, 지랄 헌다. !머리채를 잡아 두어 번 흔들고는 힉 웃고 앞서서 배를 올라 탔다. 프로라는 자기에겐 잘못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어떻게 미안하고도 부끄러운지 게이꼬앞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흐트러진 머리를 쓰다듬고 옷을 고치고 할 기운도 없었다.

 

꼭 최하고 둘이 짜고 한 짓인 것 같이만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 말해 들렸으나 소용없었다. 하기야 이것은 나중에 생각한 것이지만 프로라가 그렇게 생각한 것도 결코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프로라는 돌아오는 자동차 속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래 자기는 최의 폭력을 그렇게도 항거할 수 없었던 것인가. 정조는 여자의 생명이라 한다. 자기는 생명으로써 그것을 보호할 각오가 있었던 것인가. 게이꼬의 이름을 꺼내고 남편 김대진의 이름까지 들추어 낸 것은 아무래도 추태다. 그러면 최에게 게이꼬가 없고 자기에게 남편이 없었다면 그때 최에게 몸을 내맡겼으리라는 것인가.

 

푸른 하늘. 푸른 물. 그리고 산들거리는 훈훈한 바람. 그리고 언뜻 침실의 김대진을 연상케 하던 최의 동물적인 눈과 입김과 몸. , 위험한 순간이었다고 프로라는 새삼스레 느낀다. 그때 만일 게이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니 단 오분이라도 늦게 나타났다면. 자기 몸 속 어느 곳에 그런 악마가 숨어 있는 것인가 하고 프로라는 몸의 일부분인 무릎 위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루비로 장식된 오동통한 분길 같은 고운 손. 그 사건 때문에 게이꼬는 아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최와의 관계를 끊으려 자취를 감춰 버렸으나 덕택에 홀에서는 게이꼬없어진 뒤의 최의 회계를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프로라의 이름으로 달아 놓은 것이다. 프로라가 잔소리를 하면 그럼 어떡허우, 최를 못 오게 하든지 돈을 내도록 하든지 프로라가 해 줘야지 않우, 하고 마치 프로라게이꼬대신 최의 새 정부나 된 것 같이 말하는 것이다. 까닭 없는 말이지만 게이꼬가 달아난 것도, 최가 여전히 그 홀에 다니는 것도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아주 모른다고도 할 수 없어서 최가 오면 프로라는 돈을 내든지 오지를 말든지 어떻게든지 하라 한다. 그러면 안 올 수는 없고 와야 돈은 없으니 어떻게 하라느냐는 것이 최의 대답이다. 그러는 동안에 외상 값이 한 이십 원 되자 주인은 최를 오지 못하게 하라는 말은 없어지고 최가 나타나면 도리어 은근히 호의를 보이면서 프로라에게만 돈을 받아 내라고 졸라댔다. 대체 왜 나더러 최의 책임을 지라는 것이냐 라고 몇 번이나 대들었으나 주인은 천치 모양으로 그럼 어떻게 하라느냐고 밤낮 한 대답이다.

 

기가 막혀 프로라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봤으나 별 도리 없는지라 결국 그때까지 밀린 외상 값은 자기가 책임지기로 하고 나서 최에게 다시는 홀에 오지 말라고 단단히 선언을 했다. 이십 원이면 큰 돈이다. 일주일은 벌어야 겨우 그 액이 될까 말까 한 것이요 살림에다 쓰기로 한다면 쌀을 한 가마니 팔고도 고기를 몇 근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만 돈을 무슨 까닭으로 최의 술값으로 바쳐야 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나 그것도 하기는 할 수 없는 일이다 .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우스운 것이라 최가 다시는 안 오겠다고 약속하고 간 이튿날 밤 의외에도 술이 잔뜩 취해 또 홀에 나타났을 때에는 프로라는 소름이 끼치도록 미운 한편 이상스레 마음이 설레는 것은 또한 어쩔 수 없었다.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은 일종 자기학대의 쾌감을 가져오는 것이라 최의 얼굴을 대한 순간 저 사내 때문에 내가 이십 원 빚을 졌거니 하는 생각이 프로라의 관능을 간지르는 것이다. 아차, 이게 내가 무슨 쓸데없는 생각인가, 게이꼬도 필연 처음에는 이런 심리로부터 차차 깊은 구렁으로 빠져 들어간 것이 아닐까 하고 무서운 꿈을 털어 버리듯이 머리를 흔들어 보았으나 기괴한 관능의 자극은 멈출 길이 없다. 날이 감을 따라 홀에서는 프로라스고이한 여자라는 평판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여자로서 손님 농락이 여간 아닌데다가 동무의 애인까지 가로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따위 남의 평판은 프로라로서는 실속이 없는 것이라 귓전으로 흘리고 만다 해도 제 5 의 사내들, 이만주, 권도빈, 김수만들의 그룹과 떠들고 놀고 하다가는 프로라도 문득 아, 나는 어느 새에 이렇게 됐는가 하고 스스로 놀라기도 하는 것이다. 하기야 그들과도 아직 이렇다고 책잡힐 짓을 한 것은 아니고 그저 홀에서 떠들고 논 것뿐이니 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상 함께 놀러 다니는 이, , , 세 사람에게 똑같이 호의를 표하고 세 사람이 다 각각 프로라는 자기한테 가장 호의를 가졌거니 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하기는 상당한 수완이 아니면 안될 노릇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 그것은 프로라가 일부러 그렇게 하려서 한 것이 아니라 사내들이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니 하는 수 없는 노릇이다. 세 사람을 놓고 어느 여자더러 추리라 해도 별 도리가 없을 게다.

 

이는 사람으로는 그 중 빠진다 할 것이나 제일 돈이 많을 뿐 아니라 시원스레 턱턱 쓰니 무시할 수 없고 권은 값싼 월급쟁이지만 몸집이 듬직하고 얼굴도 깨끗하며 김은 다른 것은 보잘 것 없으나 동경으로 해외로 여러 해 돌아다닌 사람이라 견문이 넓고 거기다가 말재주가 있어 세 사람이 놀러 오면 김 혼자 판을 꾸려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세 사람이 똑같이 프로라에게 호의를 갖는 것이니 프로라로서도 똑같이 그들을 다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내들이 제각기 자기가 제일 프로라의 마음을 잡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리고 보니 저희들의 책임이지 프로라의 알 바는 아니다 . 세 사람은 세 쌍둥이 모양으로 일상 함께 붙어 놀러 다니면서 프로라를 에워싸고는 은근히 지독히 경쟁을 하고 있으니 자기들끼리는 서로 서로의 비밀을 모르니까 괜찮다 하겠지만 프로라로서 보면 우습기 짝이 없다. 가령 셋이 놀다가 권, 김의 두 사람이 어째 자리에 잠깐 없게 되면 이는 벌써 어디 같이 가자고 청하는 것이다. 훌륭한 신사요 마음씨도 괜찮은 사람이라 별로 거절할 이유도 없으매 프로라는 가볍게 승낙하고 틈 나는 날 장충단공원쯤 산보를 같이 간다.

 

그러면 그 다음 셋이 같이 만났을 때에 이의 기뻐하는 꼴이란 가관이다. , 김의 두 사람을 제쳐놓고 자기만이 프로라와 그런 비밀을 맺은 것을 두 사람에 대한 승리로 아는 듯 크게 마시고 크게 떠들고 간간히는 두 사람은 몰라 듣고 프로라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끼워 가며 코를 벌름벌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라로서 보면 그까짓 장충단공원 산보쯤은 엿 먹기요 다른 사내들과의 접촉은 다 고만두고라도 그 곳에 같이 앉아있는 권하고도 두서너 번 차를 마시러 다닌 일쯤은 있는 것이요, 김하고도 덕수궁 안 미술관 구경을 가서 석조전 소파에 한 시간이나 나란히 앉았던 일도 있는 것이다 . 어느 것이든 프로라로서는 별로 깊은 이유가 있는 행동이 아니므로 탁 터놓고 이야기해도 상관 없는 것이나 사내들이 제 각각 쉬쉬하며 제 혼자 좋아하고 있으니 일부러 그런 말을 꺼냄으로써 공연히 그들의 기분을 상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자기 역시 잠자코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그리고 보니 프로라가 이, , 김의 세 사람을 한꺼번에 조종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좀더 캐고 보면 어린애 장난 같은 것에 지나지 않으나 어느 날 안상렬과의 일이 있은 뒤로는 프로라도 정말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안은 말하자면 프로라의 제6의 사내로서 광산업을 한다는 보기에도 스마트한 청년이었다. 자기는 시골 놈이라고 떠들어댔으나 차림차림은 종로를 활보하는 모던 보이이상, 숙소는 황금정 반도호텔 칠백 십 오호 실이라는 것이다. 일 년에 몇 번씩 금덩어리를 가지고 와서 지전 뭉치로 바꾸어 가지고는 뇌성벽력 같이 서울의 유흥가를 휩쓸고 나서 바람 같이 도로 산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의 노는 법식이다. 친구들을 몰고 홀에 나타나면 위스키를 들이킨다, 샴페인을 딴다, 야단법석을 치고는 갈 때면 으레히 여자들 전부에게 지전 몇 장씩을 턱턱 나눠주곤 한다.

 

그러고 보니 여자들은 뒷구멍으로는 그가 난포한 둥 야비한 둥 쑤군거리면서도 그의 그림자가 홀에 나타나기만 하면 일제히 고함을 치고 그의 주위로 몰려들어 어떻게 해서든지 한 번 그의 흥미를 끌어 보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눅진눅진하게, 연애를 하자는 둥 사랑을 하자는 둥 하는 시원치 못한 사내들만 들끓는 이 세계에서 안 같은 존재는 시원한 소나기와도 같아 프로라는 다른 여자들이 뒷구멍으로 그를 어떻다 어떻다 깎아 내릴 때면 도리어 그를 옹호하는 것이었으나 다른 여자들이 어떻게 해 요행 돈 소나기나 맞아 볼까 하고 그의 옆에 몰려들어 교태를 부리는 것을 보면 눈꼴이 틀려 일부러 안에게는 가까이 안 했는데 안이 이 홀에서 찾는 것은 역시 프로라였다. 그날 밤 안은 무슨 생각이 있음인지 친구들을 데리지 않고 혼자 놀러 온 것이었다. 법식대로 위스키를 몇 잔 마시고 나서 프로라에게,

여관을 오늘 옮겼네. 요 뒤 대동여관으로.

하고 그것은 프로라있는 가게에 자주 놀러 오기 위함이라 한다.

호호호호, 여기서 반도호텔이 그게 멀어요.

멀구말구. 총을 놀려면 그렇게 멀리서 놔서 맞나. 바싹 앞으로 들이대고 대포를 쏴야지.

대포?

아무렴 대포두 대포, 십자포화를 들이 부어야.

호호호호 무서워라.

 

그런 대화를 시작으로 안은 또 떠들기 시작해 여자들을 앞에 몰아 놓고, 자기는 여자들과 사귈 때에 무슨 연애니 무어니 하는 따위의 짓은 가깝스러 싫다, 그저 누구든지 마음에 들면 단도직입으로 말을 걸어 봐서 들으면 좋고 안 들으면 고만이라고 기세를 토했다. 어디 여자가 없어 한 여자에게 추근추근 매달리는 것이냐. 그대신 자기는 말을 듣는 여자에게는 사례를 후하게 한다. 맘만 내키면 당장에 아파트라도 한 채 사준다. 그렇다고 또 언제까지나 물고 늘어져서 그 값을 빼려는 것도 아니다.

한 번 지난 일은 지난 일, 하룻밤 자고 나면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이 자기 성미다. 자 이중에서 누구 응하는 이 없느냐. 싫으면 그 뿐이다. 어때 응, 사다꼬싫은가. 마이짱어때 싫은가. 프로라어때 있다가 가게 파한 후 어디 술 먹으러 같이 안 가려나하는 식으로 떠드는데 농담 같은 그 말이 반드시 농담으로도 들리지 않는 것은 역시 안상렬의 인품 까닭일까. 안의 말이 거짓말이 아닌 것은 누구에게나 짐작되는 바이므로 여자들은 아이 이런데 있는 여자라고 너무 멸시 마세요. 누가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줄 아나 하는 식으로 겉으로는 불복인 체하나 속으로는 그 말이 나한테 하는 것이었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는 것이다.

프로라역시 자기가 직접 안과 어찌하리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실로 모든 것이 안의 말과 같이 앞뒤가 깨끗한 것이라면 그것도 인간 애욕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해 본다. 도덕가에게 가지고 가면 무어니 무어니도 하겠지만 세상에 물질을 떠난 순 애정만의 남녀 관계라는 것이 어디 얼마나 있는가. 아니 돈 이야기는 빼더라도 서로 좋아하는 남녀가 단순 솔직하게 서로 사랑을 고백하고 싫어지면 담담하게 헤질 수 있다면 쓸데없는 쇠사슬에 얽매여 서로 미워하면서도 언제까지나 질질 끌어가는 그 따위 관계 보다 얼마나 나을 것인가 하고도 생각해 본다. 안상렬의 억지로 권하는 위스키를 두 잔 폭이나 받아 마셨더니 프로라는 눈이 팽팽 돌며 두 볼이 후끈후끈 해 왔다.

그래 눈을 감았다 떴다, 손은 안이 주무르는 대로 내 맡기고 나중에는 안이 잡아당기는 대로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고 안겨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비틀비틀 취한 다리로 걸어 들어오는 최형태의 그림자가 눈에 비친다. 에이 더러운 녀석, 남한테 몇 십 원씩 돈이나 물리고, 옳지 너 게이꼬한테 여봐라는 듯이 다른 년을 데리고 와서는 시시덕거렸겠다, 어디 너두 좀 당해 봐라 하는 얼토당토않은 헛 배짱이 생기어 프로라는 안에게로 바싹 다가앉으며 눈을 감고 몸을 내 맡겨버렸다. 그리고 보니 술 취한 기분도 해롭지 않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동안, 별안간 쨍그렁 하고 유리 컵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눈도 채 뜨기 전에 누군지 굳센 손으로 프로라의 덜미를 잡아 끌어올렸다.

이 놈, , 남의 계집을.

등뒤에서 최의 흥분한 소리가 들리며 동 시각에 머리 위로 무엇이 휙 지나가 안상렬의 뺨에 가 쩔꺽 하고 들어맞는다 . 안도 성난 범 같이 마주 일어섰다. 이어 술병이 나르고 테이블이 넘어 가고 의자가 부서지고. 순사가 와서 최를 끌어 간 뒤의 안의 태도는 놀랄 만치 태연한 것이었다. 얼굴빛은 좀 창백하게 질렸으나 금방 치르고 난 싸움을 잊어버린 듯 잠자코 앉아 맥주만 꿀꺽꿀꺽 들이마신다. 프로라는 안의 그런 태도에 차차로 압도를 느끼고 있는데 안은 별안간.

『〈프로라, 아까 싸울 때 나만 자꾸 말렸지.

하고 힐문하듯 한다.

그럼 그런 사람하고 싸우시면.

간단하게 묻지. 프로라의 영감인가.

원 별.

변명하려는데,

아닌가. 아니면 고만이지. 그렇지만 프로라가 내 팔에 매달리는 바람에 매는 나 혼자 실컷 얻어맞았구먼. 그 친구가 나한테 덤비는 것두 딴은‥‥‥‥』

원 별 말씀두. 호호호호‥‥‥‥』

프로라는 웃었으나 사실은 가슴이 뜨끔했다. 하기는 말을 듣고 보니 싸우지 말라고 안의 팔에 매달렸던 것은 최더러 마음놓고 때리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글쎄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최 편을 든 것이었을까.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으나, 또 안 그런 것도 아닌 성싶다. 그렇다면 어느 틈에 자기는 최에게 그렇도록 마음이 끌렸다는 것인가. 생각하니 무섭기도 부끄럽기도 하다. 그래 프로라는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감추려는 듯이,

자 술이나 잡수세요. 그까짓 일 잊어 버리구.

하고 술을 권한 것인데,

『〈프로라, 여기선 불쾌해 더 못 먹겠네. 어디 다른데 가 한 잔 먹세. 프로라때문에 매까지 맞았으니 그만 청야 듣겠지.

하는 의외의 대답이다. 문득 프로라는 말이 막혀 거절할 핑계를 찾아낼 수 없었다. 시계를 쳐다보니 열두 시 반,

한 삼십 분 동안이면.

, 한시가 되면 누가 기두르나.

기두르긴 누가 기둘러요, 호호호호‥‥‥‥』

그래 삼십분 동안만 안과 동행할 요량으로 홀 뒷문으로 빠져 나온 것인데 자동차는 의외로 남대문통 넓은 거리를 풀 스피드로 내닫는다.

아이 너무 멀리 가면 어떻게 해. 이 근처 어디 술집 없나. 너무 늦으면 안 되는데‥‥‥‥』

그러나 안은 그런 말은 이런 종류의 여자가 체면으로 하는 것으로 듣는 모양, 대꾸도 하지 않는다. 프로라는 가만히 생각하니 대체 자기는 이 밤중에 안과 함께 무엇 하러 어디를 가는 것인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파트 한 채가 탐이 나선가. 물론 아니다. 안상렬이가 마음에 들어 그와 어찌하자는 것인가. 그런 것도 아니다. 에라 무어 될 대로 되겠지. 배짱은 정해졌으나 자동차가 아스팔트 큰길을 바람 같이 내달아 한강철교를 순식간에 건너 캄캄한 산길로 들어서서 이리 꾸불 저리 꾸불 뒤 흔들릴 때에는 그런 경험은 프로라로서는 처음 것이라 몸이 바작바작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안을 솔직한 사내라는 둥 그의 방탕 철학을 그것도 그럴 듯한 소리라는 둥 생각하던 것은 철부지의 짓이었다고 후회도 하는 것이다. 그 생각이 점점 마디와 같이 뭉쳐져서 안의 얼굴을 하비고 어깨를 물어뜯고 했던 것인데쩔꺽! 정신이 번쩍 나게 뺨을 후려 갈기고,

그렇게 싫거든 가!

씹어 뱉듯 이 말을 내던지고 안상렬이가 물러앉아 맥주 컵을 집어들었을 때에는 프로라는 도리어 정신이 멍해지며 아이 이 사내도 생각하던 이만 같지 못하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래 프로라는 그에게 도리어 사과하고 자기편에서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노해버린 안은 아무 소리 않고 초인종을 눌러 하녀를 불러 가지고 이 손님은 가신 댄다고 선언을 해버렸다. 프로라가 핸드백을 들고 일어서도 안은 맥주만 들이킨다. 안 떨어지는 발을 떼어놓아 미닫이까지 와서 실례했습니다, 먼저 갑니다 해도 안은 대답도 않았다. 그러나하고 한강철교의 늘어선 등불이 다시 눈에 비치자 프로라는 비로소 가슴을 내리 쓸며 생각하는 것이다. 일은 될 대로 잘 됐다. 그 이상 안과의 관계가 더 나가 좋은 것은 무어 있는가. 안상렬이 무엇이라 한 마디만 말을 걸어 주었어도, 아니 미닫이를 닫던 그 순간에라도 프로라!하고 불러 주기만 했어도 자기는 그대로 주저앉아서 그때까지 상상치도 못하던 정열을 안에게 바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또 어쨌다는 것인가. 이튿날 밤 안상렬은 정말 그 날 아침으로 서울을 떠난 것인지 밤이 늦어도 홀에 나타나지 않았다.

프로라는 무엇을 잃어버린 것 같아 가슴 한편이 서거분하고 누가 권하는 사람이 있으면 술이라도 몇 잔 먹고 싶은 마음이었다. 마침 그런 판인데 발을 끊은 지 거의 한 달이나 되는 오금동이 술이 만취해 나타났다. 그러나 오는 한동안 안 오던 사람이고 또 그 전과는 사람이 몹시 변했으니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으로 쳐서 이 곳에는 프로라의 제7 의 사내라 해 둘까. 사실 친구들 둘과 함께 고주망태가 되어 애마행진곡을 고창하며 와당탕거리며 홀로 밀려들어온 오는 그 전과는 생판 딴 사람 같은 것이었다. 홀 한복판에 떡 버티고 서서,

오이 프로라. 술 가져오게, 술 가져와. 왜 빨리 안 가져오는 거야.

하고 야료를 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라는 그러는 오가 어쩐지 몹시 반가웠다. 엊저녁 안상렬에게서 잃은 것을 오에게서 땜질하자는 것인가. 오는 물수건을 가지고 간 프로라에게,

! 이게프로라렸다. 여보게들 이게프로랄. 유명한프로라. 예쁜프로라.

하고 빈정거린다. 같이 온 사람들은, 하고 보니 차림차림이며 모든 것이 그렇게 상등 손님은 안 돼 보이는 데 그 중 하나가,

응 뭐후로라상? 기 산월이라구 하려무나. 후로라〉〈후로라. 후로야는 아니구. 하하하하 아하하하.

하고 가장 재치 있는 변을 쓴 양 깔깔 거렸다. 십오 할 십오 할 하는 말이 자꾸 튀어나오는 것은 상반기보나스〉〈와리말인가. 그러나 오금동들 패는 워낙 술을 많이 먹은 끝이라 처음 기세만 맹렬하였지 곧 파김치가 되어 그 중 하나는 드르렁드르렁 코까지 골기 시작하였다. 오만은 뻘건 눈을 거듭 뜨고 그래도 처음 기세를 유지하려 애쓰는 것이나 응원으로 데리고 온 두 사람이 녹초가 되고 보니 고만 그전 바탕이 나와 역시 프로라의 적수가 못되는 것이다. 한 달 동안이나 어째서 술을 먹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안 먹긴 왜 안 먹어 이 집만 안 왔지 하고 대답하는데 눈치가 프로라에게 실패하고 한 달 동안 화풀이 겸 다른 데로 다니며 술 먹고 떠드는 기술을 닦아 온 모양이다. 말하자면 기껏 기술을 연마해 가지고 한 번 단단히 해 댈 작정으로 프로라를 찾아온 것인데 막상 프로라를 대하고 나니까 도로 기운이 수그러진 격이다. 그런 기맥이 역력히 보이매 또프로라로서는 기운을 내 떠들려고 노력하는 오의 모양이 도리어 우습게도 귀엽게도 보인다. 말끝이 끊어져서 잠깐 묵묵히 있으므로 프로라도 어주워서,

술이나 한 잔 더 잡숫구려.

하며 술을 줬더니,

『〈프로라한 잔만 하지,

하고 되려 권한다. 딴은 그런 소리도 그 전에는 못하던 소리다.

주시면.

프로라는 서슴지 않고 받아 마셨다. 가슴을 내려가는 감각이 짜르르 하다.

한 잔 더.

나만?

후래 삼배라니까.

호호호호 그럼 먹지요.

프로라는 깔깔 웃으며 또 두 잔을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오는 프로라의 술 먹는 모양을 의외라는 듯이 바라다본다. 그러나 오늘 저녁 프로라가 오의 술을 받아 마시는 복잡한 심정은 오로서는 아마 알지 못하리라. 술기운이 돌자 프로라는 마음이 커지며 자기는 누님이요 오는 동생이라는 얕잡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가만히 몸을 실려 보니 반응이 그럴 듯하다. 노곤한 체 손을 오의 무릎에 실렸더니 오는 감격하는 듯 슬그머니 그 손을 잡고 점점 더 힘을 준다. 이런 것이 술 취한 감정인가. 자기의 세계에도 어느 새에 술까지 들어온 것인가. 이렇게도 생각 했지만은 프로라는 풍선 같이 부풀어오르는 감정을 어쩔 수 없었다. 상대가 다른 사람이면 그렇지도 못할 것이지만 그것이 오금동이라는 것이 프로라의 마음을 한없이 가볍게 하는 것이다.

『〈오상우리 오늘 저녁엔 술 먹기루 헐까, 나두 먹구 싶으니.

프로라는 자청해 오와 술을 권커니 받거니 하기 시작했다. 새 술병을 가지러 비틀비틀 하며 카운터로 가노라면 동무들이 에그 프로라가 술을 먹었네. 저 애가 어쩔려구 저래 하는 것이다. 그러면 프로라도 지지 않고 왜 어쨌단 말이야, 두더쥐는 나비가 못 되라는 법 있나 하고 대꾸를 한다 . 그리고 보니 형세는 처음과 정반대가 되었다. 프로라가 점점 기운이 나 웃고 떠들고 하는 대로 오는 도리어 말이 적어져 가는 것이다. 내내 프로라가 정신이 핑 돌아 의자 등에 머리를 대고 잠깐 눈을 감았다가 깜짝 놀란 듯 눈을 떠 보았을 때에는 오는 심각한 표정을 하고 담배연기만 후후 내뿜고 있는 것이었다. 술도 다 깬 듯 얼굴빛이 창백하다. 잠깐 아찔했던 것으로 생각한 것은 프로라의 착각이었을까. 맞은 편에 앉았던 오의 친구 두 사람은 어느 새에 그림자도 없고 시계는 벌써 열두 시를 넘었다.

인제 좀 정신 나? , 좀 부러운데. 나두 애인이나 맨들까.

사다꼬가 옷을 고쳐 입다가 프로라를 보고 빈정거린다. 옷을 고치다니 벌써 집으로 가려는 것인가. 하기는 돌려다 보니 넓은 홀 안에 벌써 손님이 한 패 밖에 없다.

기 이러다가는 장사 다 해 먹겠네. 경칠, 비 좀 오기루서니.

프로라는 일어나 바람도 쏘일 겸 창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봄비가 소리도 없이 부실부실 내리고 있다. 밤에 집에 갈 때에 손님들이 자동차로 바래다 주는 것은 가끔 있는 일이지만은 오금동과 한 차를 탄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오금동이 돈을 치르고 집으로 갈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을 물으니 프로라와 방향이 같은지라 프로라편에서 같이 타고 가자고 청한 것이다. 그러나 오는 프로라가 친절을 보이면 보일수록 도로 옛날의 자네로 돌아간 듯 그저 하자는 대로 할 뿐 차안에 나란히 앉아서도 말 한 마디 하지 않는다. 그런 오의 태도에 그전 같으면 자못 권태를 느낄 뿐 아무 호의도 가져지지 않을 것이었으나 술기운이 아직도 얼근한 까닭일까 프로라는 도리어 마음이 안타까워지며 오에게 전에 없던 애착까지 느끼는 것이다.

애정이란 줄다리기 같은 것이라 할까. 이편이 한 발자국 나서면 저편은 한 발자국 물러서고 이편이 한 발자국 물러나면 저편은 한 발자국 나서는 것이다. 그것을 깨뜨리려면 그 곳에 무슨 비약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그러나 어쨌든 오는 누구보다도 깨끗한 사람이라는 것이 지금 프로라의 취한 머리에 가득 찬 생각이다. 하기야 지금 술 먹으러 다니는 사람치고 깨끗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만은 그래도 다소라도 마음이 쏠리지 않으면 사내들은 야심을 내지 않는 것이니 생판 야심만으로 여자를 농락하려 덤비는 사람도 야심을 내기까지에는 그만한 순정은 갖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 프로라의 전부터의 생각인 것이다. 일상 하는 버릇으로 프로라는 집에 들어가는 골목을 한 마장이나 앞에 두고 먼저 자동차를 내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듯도 하고 아주 맥이 풀려 버린 듯도 한 오에게 자꾸 마음이 끌려 얼른 문을 닫지 않고 문을 붙든 채 서서 미안하다는 둥 고맙다는 둥 안녕히 가시라는 둥 말을 주고받고 하고 있는데 저편에서 컴컴한 그림자가 가까이 와서 짐짓 이 광경을 못 본 체 고개를 돌리고 지나간다. 프로라는 그것이 남편 김대진인 것을 알자 별 죄를 지은 건 아니지만 가슴이 서먹했다. 그래 분주하게 인사를 마치고 문을 탁 닫고 돌아서려 한 것인데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별안간 오금동이 잠깐만 하면서 쫓아 내려온다. 몇 발자국 앞서 걸어가는 남편과 뒤쫓아 내려오는 오금동을 번갈아 보면서 프로라는 어떻게 할지를 알 수 없었다.

아이, 비두 오고 하는데 왜 내리슈. 그냥 가세요.

뭐 대단치 않구먼.

오의 목소리는 웬일인가 쉬인 것 같이 잘 나오지 않는다.

그래두.

그 말에는 대답도 않고 오는 따라와 프로라와 나란히 선다. 무엇인가 이상스런 압력이 오에게서 흘러 나와 프로라를 내리 눌렀다. 그의 어느 구석에 이런 압력이 있었더란 말인가. 프로라가 그렇게 느낀 것은 하필 몇 발자국 앞에 남편이 걸어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그 남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빨리 해 달아나는 것은 좀 마음의 부담을 가볍게는 해 준다. 집 들어가는 골목 앞까지 거의 다 오도록 프로라와 오 사이에는 말 한 마디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이 도리어 더 무겁게 프로라를 내리 눌렀다. 몸이 오그라지고 숨이 가쁜 품이 엊저녁 안상렬과 한강 건너 산 속을 달릴 때 몇 배 이상이다. 프로라는 오늘 저녁 오금동을 만만히 본 것을 후회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이 있으랴. 골목 들어가는 어귀까지 와서 인젠 정말 헤어지려고 잠깐 머뭇머뭇 하는데,

『〈프로라!

별안간 오가 옆으로 바싹 다가선다. .

?

『〈프로라! .

폭발하는 감정에 말을 미처 못 맺고 오는 달려들어 프로라를 껴안고 얼굴을 문지르고 길 옆 남의 집 화방에다 밀어붙였다. 저항할 수 없는 놀랄만한 사내의 힘.

아이, 아이.

프로라는 겨우 이 소리를 했을 뿐 저항은커녕 무엇이 어떻게 되는 판인지 알 수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별똥같이 휙 지나가고는 다음은 아까보다도 더 한층 암흑이다. 첫째로 사지의 맥이 풀려 몸이 말을 안 듣는 것이다. 사람의 정신에도 에어-포켓같은 것이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집 문간을 들어설 때에는 프로라는 보통 때의 프로라였다. 그는 우선 부엌으로 가서 맑은 냉수를 떠 양치질을 왈가락 왈가락 했다. 이번에야말로 비록 무슨 무엇은 없었다 해도 김대진에게 정말 미안한 것 같아서 몸 속, 마음속까지 씻어 낼 듯이 야단스레 하는 것이다. 방 문 앞에 와서도 프로라는 잠깐 머뭇거렸다. 죄를 지은 죄인인 양 고개를 숙이고 가만가만 미닫이를 연다. 그러나 이것은 또 웬일일까. 질투의 불길에 바작바작 몸을 태우며 전등 밑에 도사리고 앉았어야 할 김대진은 십분 밖에 안 되는 그 동안에 잠이 들었을 리도 없는데 벌써 이불을 덮고 눈을 감고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것이다. 안심했다느니 보다도 차라리 무슨 까닭으로 양치질을 한 것인지 너무도 싱겁다는 듯이 프로라의 입가에는 빙그레 웃음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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