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단편소설2

20. 타인의 생애

by 자한형 2022. 3. 3.
728x90

타인(他人)의 생애(生涯)

유재용

 

어느 날. 국내 최대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한성일보의 사회면 아래쪽 광고란에 쓴 색다른 구인광고가 한 건 실려 있었다.

 

사람을 구함. 17세에서 19세 사이의 남자로서 소아마비로 인해 한쪽 다리가 완전불구된 자에 한함. 인원은 O. 신체적 조건에 합당한 일거리를 제공하며 보수는 침식제공에 뭘 3만원을 지급함. 희망자는 자필 이력서 한 통과 명함판 크기의 전신 사진 한 장을 동봉해서 광화문 우체국 사서함 O00호로 OO일까지 보낼 것. 서류심사 후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개별 통지하겠음.

 

요즘의 신문광고란이라는 데가 묘한 위력과 이상한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원 기사는 대강대강 제목만 훑어보면서 오히려 광고는 미주알고주알 캐내며 다 읽어 내려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신문광고 속에 오락과 휴식이 있고 지혜와 진리가 있고 복음(福音)과 구원이 있고 빛이 있고 모든 곳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박 형석도 그런 사람 축에 끼어 있었다. 그는 날마다 신문광고 속을 미친 듯 헤매다녔다. 그 속에 그를 부르는 손짓과 그를 찾는 목소리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기를 일 년여. 그것은 오랜 방법이었고, 끈질긴 기다림이었다. 그는 참으로 지칠 줄을 몰랐다. 지치고 싶어도 지칠 수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형석이 그 광고를 놓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군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다시 얻기 힘든 기회였다. 가슴이 뛰었다. 그는 어머니의 그 변변치 못한 장사밑천에서 돈을 뜯어내어. 서둘러 사진을 찍고, 이력서 용지를 샀다.

박 형석. 18세의 남성. 왼쪽 다리가 소아마비로 완전불구임. 본적은 강원도 춘성군. 현주소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미아동. 가족은 어머니와 여동생 셋 합해서 다섯 식구. 리어카 행상을 하던 아버지는 형석의 나이 16세인 중학교 3학년 때 별세함. 따라서 형석의 학력은 중학교 3학연 중퇴임.

학교 성적은 우수했고, 성격은 퍽 온순하고 내성적임. 신체적 조건 때문에 쉽사리 감상에 흐르는 경향이 있음. 현재의 생계는 어머니의 리어카 행상으로 근근히 유지됨. 그는 항상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연민과 죄의식으로 우울해 있고 자신의 장래문제로 초조해하고 있음. 장래 희망은 조그마한 시계 수리점을 자기의 힘으로 경영하는 것이고, 당장의 소원은 시계 기술을 배우는 것임.

형석은 시계 기술이야말로 그에게 생업을 제공해 줄 가장 적합한 직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계 기술을 배우려면 시계 수리점에 사동(使童)으로 들어가 기술자의 제자가 되거나. 시계 기술학원에 다니는 길밖에 없었다. 하지만 생면부지의 불구소년을 사동으로 써 줄 시계 수리점은 애초에 존재하지를 않았고, 그러니 천상 시계 기술학원에 다니는 방법밖에 없는데 그것이 또한 형석으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한 달에 몇천 원씩 하는 수업료를 어떻게 마련해볼 도리가 없었다.

형석은 이력서와 사진을 보내고 나서 하루하루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맞고 보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해주소서. 이 기회를 붙잡게 해주소서. 1 그 일거리라는 것이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붙어 있을 만큼 계속해서 생기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2, 3년만이라도 그 일을 붙잡고 있을 수만 있다면 한밑천 모을 수가 있지 않은가. 아니 단 두서너 달 동안만 일을 한대도 시계 기술학원에 다닐 학비를 마련할 수는 있을 것이었다. 제발 이 기회를 붙잡게 해주소서.

일 주일만에 통지가 왔다. 그것은 서류심사 결과의 통지라기보다는 차라리 야유회에의 초대장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했다.

 

함께 이야기도 나눌 겸, 공기 맑고 경치 수려한 교외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하루를 보내고자 하오니 부디 참석하셔서 하루를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날짜와 시판과 모여서 출발하는 장소가 명기되어 있었다.

형석은 기뻐해야 할지 어떨지 알 수가 없었다. 형석으로서는 그 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가름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형석은 지정된 날 깨끗한 옷을 차려입고 집합장소에 나갔다. 그곳에는 그 나이 또래의 소아마비 희생자들이 열 명쯤 나와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쪽 다리가 완전히 쓸모 없는 물건이 되어버려서 다리 대신 목발을 짚고 서 있었다. 그들은 한군데 모여 서 있기가 싫은 듯 따로따로 흩어져 서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한군데 모여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형석도 그들과는 떨어져 자리를 잡고 섰다.

조금 있으려니까 매끈한 검은색 세단이 한 대 굴러와 멈췄다. 세단은 신사 세 사람을 내려놓고는 어디론지 다시 굴러가 버렸다. 신사 한 사람이 목발 짚은 소년들을 불러모았다.

"여러분, 이렇게 나와줘서 고마와요. 그러면 목적지로 곧 출발하겠어요."

신사는 미소 떤 얼굴로 소년들을 둘러보고 나서 팔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그러자 그것이 신호이기라도 한 듯 빈 버스 한 대가 굴러와 멎었다. 목발의 소년들은 신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버스에 올랐고 버스는 곧 출발했다. 버스에는 목발의 소년 열 명, 신사 세 명, 그리고 운전수와 차장 합해서 열 다섯 사람이 타고 있었고, 콜라 상자를 포함한 꽤 많은 짐이 실려 있었다. 사람들은 각기 좌석 하나씩을 통째로 차지하고 앉았지만 버스 안은 텅텅 빈 듯했다. 하지만 소년들은 잔뜩 긴장해 있어서 버스 안이 텅 비어 있는 것 같다는 느낌도 갖지 못했다. 소년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지금 시험을 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수험장으로 가고 있는 도중일 것이었다. 아니 버스 안에서 시험은 시작될지 모른다.

신사 세 사람은 소년들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올 것이고 그것은 곧 시험 문제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을 잘해야 한다. 그것은 시험답안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헌데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가까이 달리는 동안 신사 세 사람이 소년들에게 물은 것이라고는 오직 이름 한 가지뿐이었다. 신사들은 소년들의 이름 이외에는 더 알고 싶은 것이 없는 듯했다.

이름을 묻고 난 후 신사들은 목적지에 도착해서 벌일 재미있는 놀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상품과 선물이 많이 마련되어 있고 먹을 것이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러고는 화제는 자연스럽게 여행 이야기로 옮겨졌고 곁들여서 세계 여러 나라의 진기한 풍속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졌다. 그것뿐이었다. 소년들은 긴장해서 신경을 뾰족하게 갈아세우고 있었지만 풀어야 할 시험 문제 같은 것은 아무 데도 없었다. 목적지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였다. 신사들은 소년들을 울창한 숲과 맑은 개울물과 푹신한 잔디밭, 그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놀고 실컷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을 뿐이었다.

시험문제 같은 것은 아무 데도 없었다. 마치 불우 소년들을 위로하기 위해 마련한 순수한 야유회 같았다. 소년들은 차츰 긴장을 풀고 즐겁게 뛰놀았다. 그러고는 상품과 선물을 한 아름씩 안고는 귀로에 올랐다. 하지만 소년들의 마음속에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가시지를 않았다.

신사들은 끝내 소년들에게 제공하겠다던 일거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을 안 했던 것이다.

형석이 최종합격 통지서를 받은 것은 야유회에 다녀온 후 이틀이 지나서였다.

<여러 가지로 검토한 끝에 우리는 우리가 구하는 인물로서 박 형석군이 적합하다고 생 각했습니다.>

통지서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야유회도 시험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날 세 사람의 신사는 이력서와 사진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무엇을 야유회를 통해 살펴보았을 것이다. 어쨌든 형석은 기뻤다. 그는 선택된 것이다.

별안간 세상이 밝아진 것 같았다. 밝아진 세상에는 아름다운 색채들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 어머니, 저 취직했어요! 인계는 저두 돈을 벌게 됐어요! 사람구실을 하게 됐대두요! - 이렇게 끝없이 외치고 싶었다.

 

직장으로 나가게 된 첫날 아침 야유회가 있던 날 보았던 검은 세단이 형석이를 데리러 왔다, 골목이 좁아 형석이 사는 집 앞까지 들어오지 못하고 차는 골목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부터는 직장에서 먹고 자면서 일하게 될 것이었다. 형석은 골목을 걸어나오면서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너절한 셋방 구석을 떠나게 된 것이 섭섭해서가 아니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자주 볼 수가 없게 되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도 걸음은 가벼웠다.

검은 세단은 형석을 현 인철씨의 살림집으로 실어갔다. 대궐 같은 집이었다

형석은 처음에는 그 집이 무슨 회사의 건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트럭이라도 드나들 수 있을 만큼 큰 철대문하며 바로 문 안쪽에 수위실처럼 자리잡은 이층 건물하며 잘 꾸며진 넓은 정원 건너에 우뚝 솟은 콘크리트의 삼층 건물은 개인의 살림집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 형석은 바로 문 안쪽에 자리잡은 이층 건물로 안내되었다.

대청마루 같은 널찍한 마루에서 야유회에 함께 갔던 세 사람의 신사와 또 한 부인이 형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 신사 중의 한 사람이 이 큰 집의 주인인 현 인철씨였고, 그 부인은 현 인철씨의 아내였다. 나머지 두 신사는 주 갑돈씨와 곽 영훈씨로 소개되었는데, 아마도 이 집에서 일을 봐주고 있는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너는 이백 대 일의 경쟁에서 뽑힌 사람이야. 이백 명이 몰려온 가운데서 너 혼자만이 뽑혔단 말이야, 주 갑돈씨와 곽 영훈씨 두 분이 너를 잘 지도해주실 것이니 열심히 하도록 해라."

현 인철씨가 형석의 어깨를 투덕거리며 말했다. 형석이 하메 될 일이란 도대체 어떤 일일까. 하지만 그는 묻지 않았다.

무엇이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성심 성의를 다해 일하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

"사장님, 그러면 우선 분장을 시켜볼까요?"

주 갑돈씨가 현 인철씨에게 공손히 물었다.

"어디 한번 그럴듯하게 꾸며보시오. 하지만 닮은 데가 많아서 분장이랄 것까지두 없겠구만. 어쨌든 수고를 좀 해주시오. "

현 인철씨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정말 많이 닳았어. 키나 몸집두 아주 비슷한걸."

현 인철씨 부인도 남편을 따라 나가며 말했다.

첫날, 주인과의 첫 대면은 이렇게 끝났다. 그것은 간략한 의식이랄 수도 있을 것이었다. 가령 취업식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헌데 그 자리에서 오고간 말들이 형석의 귓가를 맴돌며 의아스러움을 안겨주었다.

분장을 시킨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그리고 누구를 닳았다는 것일까. 그럴수록 형석은 그가 하게 될 일이 궁금해졌다. 그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일은 아닐까. 그 방면으로는 그의 소질이 전혀 없는 그런 종류의 일은 아닐까.

하지만 형석은 잠자코 기다려볼 수밖에 없었다.

현 인철씨 대외가 밖으로 나가자 주 갑돈씨와 곽 영훈씨는 형석을 데리고 한방으로 들어갔다. 두 간쯤 되는 크기의 방이었는데 가구라고는 큼직한 책상과 거기 딸린 의자, 그리고 전신을 비춰볼 수 있을 만큼 큰 거울이 책상 옆 벽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주 갑돈씨는 의자를 거을 앞에 옮겨놓고, 형석을 의자에 앉힌 다음 이발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횐 보자기를 형석의 목에 둘렀다, 그러고는 책상 서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들고. 사진과 형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18세쯤 되었을 소년의 상반신 사진이었는데, 노타이 셔츠를 입고 머리를 기른 소년은 사진 속에서 애수 어린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윽고 주 갑돈씨는 빗과 가위를 한 손에 하나씩 나누어 들고 형석의 머리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 갑돈씨에게서 사진을 옮겨 받은 곽 영훈씨가 책상 위에 걸터앉으며 입을 열었다.

"이건 사장님 막내 동생의 사진이야. 이름은 현 석철이라구 하구. 사장님의 부모님은 슬하에 오 남매를 두었는데 맨 맏이 사장님이시구 맨 끝이 이 사진에 있는 석철이야. 고등학교를 졸업하구 얼마 있다가 찍은 사진인데 그러니까 석철이가 열여덟 살 때지."

석철은 어려서 소아마비에 걸려 형석처럼 왼쪽 다리가 완전히 불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부모님은 굉장한 부자로서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는데, 오직 막내아들의 일로 해서 늘 마음이 무거워 있었다고 했다. 그러던 중 석철의 나이 열다섯 살 때, 오십여 세의 젊은 나이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홀로 된 어머니는 자기도 언제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다면서 큰아드님과 자리를 같이할 때마다 석철의 장래를 간곡하게 부탁하곤 했다. 따님들에게도 그러한 부탁을 빼놓지 않았다.

"얘들아, 너희들 석철이를 불쌍하게 생각해야 한다. 내 나이 이제 오십이지만 언제 죽을지 몰라. 나라구 해서 내일 당장 죽지 말라는 법 있니? 내가 죽구나면 우리 석철이는 고아나 다름없게 된다. 그러니까 너희들 지금은 석철이를 동생으로 생각하더라두 내가 죽은 다음에는 동생이 아니라 친자식처럼 여기구 돌봐줘야 해. 석철이는 몸뚱이가 저러니 나이가 백 살이라두 어린애나 다름없느니라. 석철은 몸은 그랬지만 어려서부터 퍽 총명해서 국민학교를 일년 앞서 들어갔고, 열여덟 살에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헌데 불운하게도 그가 지망하는 대학교 입학에 실패를 해서 재수를 하고 있었다.

석철은 온순하고 내성적이어서 평소에 별 말이 없었다. 자기 육체에 대해서 고민하는 내색도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학교에 다녀와서는 자기 방에 들어가 박혀 책을 보거나 홀로 조용히 정원을 산책하는 것이 그의 생활이었다.

석철은 대학입시에 실패한 데 대해서도 별로 실망하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고. 그는 학원에 다니면서 전과 다름없이 조용하고 평온한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신록이 퍼져 나가던 늦은 봄의 어느 일요일, 역시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재수를 하고 있던 몇몇 고등학교 동창생들과 함께 교외로 바람을 쐬러 간다면서 집을 나간 석철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북한강가에 자리잡은 그들은 삼십 미터 바위절벽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소변을 보아야겠다면서 몸을 일으킨 석철이 걸음을 옮겨 몇 발자국 절벽가로 다가서는가 하자 돌연 몸이 기우뚱하더니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튿날 강물 속에서 석철이의 시체를 건져 올렸지만 석철은 죽어서나마 집으로는 돌아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간단하게 장례식을 치른 후 곧바로 선산으로 옮겨져 묻힌 것이다.

처음 석철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기절해 쓰러졌다. 의사가 달려와 응급치료를 하는 등 집안이 또 한번 벌컥 뒤집혀졌다. 얼마 후 어머니는 깨어났지만. 마치 중병이라도 치르고 난 듯 정신과 육체가 함께 쇠진해 있었다. 잠깐 동안에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만큼 변화는 크고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어머니는 석철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일어나 앉을 기력도 없었던 것이다.

큰아들인 현 인철씨와 시집간 딸들이 어머니 곁을 지키며 밤낮으로 위로와 간호를 했다. 그들좌 정성은 참으로 지극했다. 음식 공양에서 대소변 처리에 이르기까지 자기들이 몸소 하곤 했다. 어머니는 차츰 기력을 회복해 갔다. 일어나 앉을 수 있게 되었고 오래지 않아 서서 기동할 수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어머니는 반쯤 혼이 나간 사람 같았다. 무엇을 하다가도 깜박 잊은 듯 동작을 멈추고는 초점 릴은 시선을 멍하니 허공에 보내는가 하면 때없이 눈물이 볼을 타고 내리면서,

"석철이는 내가 죽였어. 이 에미가 죽인 거야."

하고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당치도 않은 말씀이냐고 아들 딸들이 질색을 해서 항의하면. 어머니는 조용히 그러나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젓곤 했다. 우선 석철이 발을 헛디뎌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것은 다리 하나를 못 쓰기 때문이었는데, 석철이의 다리 하나가 병신이 된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인 자기의 부주의와 불성실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석철이가 죽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가 석철이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석철이 가엾고 불쌍하게 여겨질 때마다, 석철이의 장래가 염려스러울 때마다 문득 문득 자기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느낌이 일어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저 불쌍한 것을 남겨두고 어떻게 눈을 감을 수 있을까 하는 근심과 함께 자기도 모르게 차라리 석철이 죽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떠올려보곤 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자기의 그런 생각이 모이고 모여 살이 되어 석철을 북한강가로 끌어내어 갔고.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린 것이라고 했다.

아들과 딸들은 어머니의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을 뽑아버리려고 갖은 애를 다 써보았지만, 그런 생각은 의외로 깊숙이 뿌리를 박고 있는 모양이어서 아무런 효력도 나타내지 못했다. 아들과 딸들은 이 문제를 시간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시간만이 어머니의 상처를 아물게 해줄 것이었다. 아들과 딸들은 서두르지 않고 어머니의 몸을 돌보기에만 힘썼다. 시간은 흘러갔고, 어머니의 몸은 차츰 더 건강을 회복해갔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어머니의 건강은 더욱 충실해진 것 같았다. 내가 석철이를 죽였다는 그 중얼거림도 어머니의 팁에 오르지 않게 되었다. 아들과 딸들을 비롯해 주위 사람들은 마음을 놓기 시작했다. 한데 화창한 어느 봄날의 오후였다.

석철이가 죽은 지도 벌써 일년이나 된 터인데 어머니는 돌연 석철이를 기다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는 그날 오전과 이른 오후를 평상시와 다름없이 보냈다. 그러다가 오후 네 시쯤 낮잠에 들어갔는데, 시쯤 낮잠에서 깨어난 어머니는 마루로 나와 벽시계를 쳐다보더니 석철이가 돌아왔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

옆에 있던 며느리가 의아해서 물었다.

"석철이 돌아올 때가 됐는대."

어머니는 천연스럽게 말했다.

"어머니, 꿈꾸셨어요?"

며느리가 다시 물었다.

"석철이는 게를 좋아해. 시장에 사람보내서 물 좋은 게 몇 마리 사다가 된장 풀어 끓이라구 일러라."

며느리의 물음은 묵살한 채 어머니가 말했다. 며느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기가 게를 사오겠다면서 부랴부랴 집을 나온 며느리는 남편과 시누이들에게 전화를 했다. 모두들 근심에 잠겨 어머니 곁으로 모여들었다. 어머니는 아들과 딸들을 분명히 알아보았다. 기억도 뚜렷하고 말도 조리가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이상한 점이라고는 아무 데도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석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학원에 간 석철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어머니는 석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어처구니없고 기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아들과 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별안간 뜻밖의 일을 당해 어리둥절해 있는 모습들이었다. 기껏 며칠 더 두고보자는 결론을 끌어냈을 뿐이었다. 이튿날도 어머니는 오후 다섯 시가 되자 석철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 이튿날도, 또 그 이튿날도 오후 다섯 시가 되자 어머니는 석철을 기다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다른 모든 면에서는 어머니의 의식은 현실을 분명히 딛고 서 있었지만. 석철에 관한 한 어머니의 생각은 완강하게 과거로 물러가 있었다.

석철은 엄연히 살아 있었고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석철을 기다리는 동안,

"너희들 석철이를 불쌍하게 여기고 보살펴줘야 한다."

이렇게 아들이나 딸들에게 당부를 하기도 했다. 아들과 딸들은 석철이 죽었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일깨워주려고 여러 가지로 암시를 주곤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따위 암시는 도무지 무감각했다. 석철이 살아 있다는 생각은 어머니의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불가침의 성역이 되어 있었다.

아들과 딸들은 어머니.를 병원에 입원시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어머니는 석철의 일 이외에는 사이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으므로 이름난 정신병원을 피하고 정신과 의사의 개인병원을 택하기로 했다. 그 병원에서는 내과와 소아과도 함께 진료하고 있었으므로 어머니를 속이기에 적당했다. 어머니의 몸이 퍽 쇠약해졌으니 시설 좋고 조용한 개인병원에서 얼마 동안 휴양겸 치료를 해보자고 설득을 해서 어머니를 입원시킬 수가 있었다,

어머니는 거기서 사 개월이나 머물렀다. 그 동안 병원측에서도 환자의 보호자측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머릿속에 석철이 죽었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석철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은 더욱 간절하고 애절해졌을 뿐이었다. 이제는 앉아서 석철을 기다리기만 하지 않고 석철을 찾아오라고 했다. 석철이 길을 잃고 거리를 방황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어서 사람을 풀어서 석철을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는 어머니의 모습은 눈물겨운 데가 있었다.

현 인철씨는 어머니를 퇴원시켰다. 그러고는 어머니에게 석철이를 만들어 드리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내가 너한테 이런 이야기를 이렇듯 자레하게 들려주는 것은 사장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남의 이야기 듣듯 하지 말구 잘 기억해둬야 한다. 이건 앞으로 네가 맡은 일을 잘하기 위해서 꼭 알아둘 필요가 있는 이야기란 말이야."

곽 영훈씨는 그의 긴 이야기를 이렇게 마쳤다. 마침 주 갑돈씨의 머리 손질도 mx나가고 있었다. 주 갑돈씨는 곽 영훈씨의 손에서 다시 사진을 받아

들고, 사진과 형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때요, 곽형? 이만하면 되잖았나 싶은데."

주 갑돈씨가 가위와 빗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사장님 말씀마따나 워낙 닮아 있기도 했지만, 그렇게 머리 모양을 고쳐 놓고 보니 영락없는 석철인데 그래 ? 모두들 깜짝 놀라겠는걸."

곽 영훈씨는 감동한 듯 거울을 통해 형석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은 형석의 목에서 보자기를 풀어내고 머리칼을 털어낸 다음 옷 한 벌을 가져다가 형석에게 주면서 입어보라고 했다. 곤색 바지와 흰 바탕에 푸른 줄무늬가 있는 소매 긴 노타이 셔츠였다. 형석은 시키는 대로 옷을 갈아입었다. 갈아입은 옷은 보기 좋게 형석의 몸에 들어맞았나.

"석철이 옷이 꼭 맞는데 그래? 맞춰 입은 것처럼 꼭 맞아."

주 갑돈씨와 곽 영훈씨는 신기한 듯 말했다.

오후 두시경 현 인철씨가 다시 와서 형석의 모습을 보고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잘 됐구만."

현 인철씨는 인색한 칭찬 한마디를 주 갑돈씨 앞에 던져놓고는 형석에게로 몇 발자국 다가섰다.

"너는 지금부터 박 형석이 아니구 현 석철이 되는 거다. 너두 이야기를 대강 들어서 짐작은 하겠지만 현 석철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네가 할 일이야. 물론 별안간 당하는 일이라 어리둥절한 줄 안다. 그러니까 며칠 동안 석철이가 되는 연습을 해라. 주 갑돈씨와 곽영훈씨가 잘 지도해줄 것이니 별 어려움은 없을 거다. 열심히 노력해셔 되도록 빨리 몸에 익히도록 해라."

". 그럼 훈련을 시작하자."

현 인철씨가 나가기가 바쁘게 곽 영훈씨가 말했다. 형석은 근심이 되었다. 그에게 맡겨진 일을 잘해낼 수가 있을까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이미 일년 반 전에 죽어 지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생시의 모습과 생활을 재현하는 일이었다. 전혀 접촉이 없었고, 이름마저 모르던 어떤 타인으로 변신하는 일이었다. 그나마 단 며칠 동안의 연습이나 훈련으로 그 일이 가능할 수 있을는지.

형석은 근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곽 영훈씨는 형석을 데리고 또 한 방으로 들어갔다. 먼젓번의 방과 별 다름이 없는데 침대가 하나 더 놓여 있었다. 곽 영훈씨는 책상 앞 의자에 형석을 앉혔다.

"제가 그 일을 잘해낼 수가 있을까요?"

형석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물었다.

"해낼 수 있구말구. 너는 얼굴 생김새나 몸집 크기만 가지구두 벌써 그 일을 반 이상 해전거나 다름없어. 우리는 처음 사람을 구할 적에 너처럼 석철이하구 얼굴이 아주 닮은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었어. 그저 비슷한 얼굴을 찾아내서는 데려다갈 꾸밀 생각이었지. 우리는 너를 만났기 때문에 수고를 반이나 던 셈이야. 나머지 반은 말하자면 네 정신을 꾸미는 일인데. 그 일이라면 걱정할 것 없이 나한테 맡기면 돼. 너는 내가 시키는 대루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나로 말하면 석철이가 국민학교 사 학년이었을 때부터. 중학교률 졸업할 때까지 석철의 가정 교사 노릇을 했어. 석철이가 지니구 있는 작구 큰 습관이나 잘 짓는 표정, 말투나 동작, 취미나 좋아하는 음식 같은 건 물론이구. 좀 보태서 석철이가 하루에 눈을 몇 번이나 깜짝거리나 하는 것까지 알구 있을 정도야. 주 갑돈씨가 머리 손질을 해 가지고 네 얼굴을 석철이 얼굴과 똑같이 만들어놓은 것처럼 나두 네 말투나 몸짓이나 태도 같은 것들을 석철이와 똑같게 만들어놓을 자신이 있어. 그러니까 너는 나를 믿구 내가 시키는 대로만 열심히 하면 돼."

곽 영훈씨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선생님, 그럼 잘 가르쳐 주십시오."

형석은 여전히 근심스럽고 마음이 놓이지 알아 애원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사장님 말씀대루 너는 오늘부터 현 석철이야. 너는 너 자신을 박 형석이 아니구 현 석철이라구 생각해야 돼. 네가 현 석철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기 위한 첫걸음은 바루 네가 너 자신을 현 석철이라구 생각하는 일이야. 그러면 우선 그것부터 훈련하자. "

곽 영훈씨는 백지와 만년필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나는 현 석철이다. 나는 현 석철이다. 이렇게 백지 위에 쓰면서 소리내어 읽으라곤 했다. 형석은 시키는 대로 백지 위에 (나는 현 석철이다.)를 정성껏 쓰면서 소리내어 읽고 또 쓰면서 소리내어 읽곤 했다.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쉰 번, 백 번, 읽으며 쓰기 몇백 번인지 모른다. 십육절 백지를 안팎으로 빼곡하게 써서 세 장을 채우고 나자,

"고만!"

하고 곽 영훈씨가 말했다.

", 그럼 이번에는 이름을 부를테니 대답해."

"현 석철!"

곽 영훈씨가 불렀다.

"."

형석은 대답했다.

"현 석철."

"."

"현 석철,"

","

"석철이. "

."

"석철이. "

"."

현 석철. . 현 석철. . 석철이. . 석철이. . 현 석철. . 석철 네---

"다음은 내가 부를테니 받아 써라. 이름은 현 석철. 195347일생, 본적은 경기도 수원시 매산동 00번지, 현주소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당동 00번지. A국민학교와 B중학교와 C고등학교를 졸업함. 아버지 이름은 현 종국. 1911927일생. 아버지 현 종국씨는 구성기업의 자본주로서 회사 사장으로 계시다가 1967년 석철이 나이 15세 되는 해 1019일에 뇌일혈로 별세함. 묘지는 금곡에 있는 선산에 있음. 어머니의 이름은 지 선덕. 1916115, 충청남도 공주에서 출생. 어머니의 친정붙이로는 어머니의 여동생 한 분이 부산에서 살고 있음. 형님 현 인철씨, 193763일생, D중고등학교와 E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에 유학해 F대학에서 4년간 경영학을 전공하고 돌아옴. 현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구성기업 사장으로 있음. 형수의 이름은 장 인애,,,,,, 큰누님의 이름은 현 옥철--- 둘째 누님--- 셋째 누님-,,,,, 다 받아 썼지? 지금까지 네가 받아 쓴 것은 현 석철의 가족상황, 그러니까 바로 너의 가족 상황이다. 외어라. 네 이름과 나이를 외듯 외어."

형석은 열심히 외었다. 별로 어려운 것 같지는 않았다. 가족들의 생년월일을 외기가 좀 까따로운 듯했지만 그것도 연대를 나이로 바꿔 외니까 기억하기가 쉬웠다, 십 분쯤 외려니까 다 외을 수가 있었다. 곽 영훈씨는 말없이 방안을 거닐고 있었다. 형석은 계속해서 외고 또 외었다.

"다 외었나?"

곽 영훈씨가 물었다.

". 외었습니다."

형석이 대답했다.

"어디 외어봐."

곽 영훈씨가 말했다. 형석은 쭈욱 외어 보였다.

"좋아. 그러면 다음으로 넘어가자."

곽 영훈씨는 도톰한 앨범을 세 권이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번에는 형석은 잠자코 보고 듣기만 하면 되었다. 곽 영훈씨는 앨범을 들치면서 그 속에 있는 사진들을 하나하나 형석에게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석철의 부모님이 결혼을 했을 때부터 석철이 대학 입학시험에 실패해서 학원에 다니며 재수를 할 때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찍은 연대기적 가족사진이었다. 곽 영훈씨는 사진 속에 인물들을 가리키며 설명해 주었고,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일화를 이야기해 주었다. 앨범 세 권을 다 보고 나니 밤이 되어 있었다. 형석은 주 갑돈씨와 곽 영혼씨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잠시 쉰 후 다시 복습을 했다.

"나는 현 석철이다."

를 소리내어 읽으며 쓰는 일.

"현 석철."

"."

"석철이."

"."

이름 부르고 대답하는 것, 가족상황 외는 것, 그리고 앨범 보며 설명 듣는 일이었다. 첫 날은 이것으로 일과가 끝났다. 형석은 머리가 멍했다. 곽 영훈씨는 그만 자라고 했다. 하지만 형석은 자진해서 복습을 한번 더 하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푹신한 침대였다.

형석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잠자리나 바뀌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일 일이 염려되어서인지 좀체로 잠이 오지 않았다,

훈련은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되었다. 저녁을 먹을 때까지는 첫날 했던 것과 똑같은 과정을 몇 번씩이고 되풀이하는 것이었고, 저녁을 먹고 나서 잘 때까지는 석철의 일과라든가 습관, 표정, 음성. 말투, 태도 같은 것을 듣고 연습하곤 했다. 형석은 석철이 말수가 적고 잘 웃지도 않는다는 것,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반말을 한다는 것, 오후 한 시경 집을 나가 학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다섯 시 사이에 집에 돌아온다는 것. 학과공부 이외에도 늘 책을 읽고 있었고. 혼자 생각에 잠길 때는 아랫입술을 쑥 내밀고는 보통 때보다 자주 눈을 깜박거린다는 것. 정원에 나와 거닐거나 벤치에 앉아 있을 때 즐겨 (메기의 추억) (스와니 강) (망향) 같은 곡을 휘파람으로 분다는 것 등등을 알았다. 그리고 형석은 곽 영훈씨의 지도를 받으며 거울 앞에서 석철이 잘 짓는 표정들을 열심히 지어보았고. 석철의 조용한 음성과 어리광이 약간 섞인 듯한 말투를 애써 흉내내어 보았고. (메기의 추억) (스와니 강) 같은 곡을 휘파람으로 불어보곤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오후 다섯 시쯤 형석은 이층 창문을 통해 정원에 나와 있는 석철의 어머니 지 선덕 여사를 보았다. 지 선덕 여사는 중키에 보통 몸매였고, 새까만 머리칼. 우유빛깔의 갸름한 얼굴에다가 새하얀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정신착란을 일으킨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조금도 흐트러진 구석이 없는 단정한 모습이었다. 침착하고 엄숙한 분위기마저 풍기고 있었다, 지 선덕 여사는 대문을 향하고 그림처럼 멈춰 서 있었는데. 지금 석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너는 석철이로 변해서 저분 앞에 모습을 나타내게 되는 거야."

곽 영훈씨가 귓가에서 조용히 말해주었다.

그 밤. 지 선덕 여사가 잠들기를 기다려 형석은 곽 영훈씨의 안내를 받아 삼층 본채의 건물 속으로 살며시 스며들어갔다.

형석은 이렇게 으리으리한 집안은 생전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가 석철이 되어 쓰게 될 석철의 방에 들어갔을 때 형석은 정신이 얼얼해질 지경이었다,

세 간쯤 되어 보이는 정방형의 방안에는 고급의 침대와, 책상. 책이 가득 들어찬 책장. 자개박이 옷장. 철제 캐비닛 그리고 텔레비젼과 전축과 녹음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방안이 얼마나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있는지. 이것이 주인 없는 방이라는 생각을 도저히 가질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더우기 벽 옷걸이에 걸려 있는 서너 가지 옷이라든지 침대 머리맡에 놓인 과일과 과자가 담긴 접시라든지 싱싱한 꽃을 꽂고 전축 위에 놓인 꽃병 같은 것은 마치 이 방의 주인이 금방이라도 방안으로 들어올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형석은 마치 동화 속의 궁전에 들어가 왕자님의 방을 몰래 엿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튿날도 또 이튿날도 지 선덕 여사가 잠들기를 기다려 형석은 곽 영훈씨와 함께 삼층 본왜 속으로 살며시 스며들어가곤 챘다. 석철의 방에도 익숙해지고 집안 구조도 살펴보기 위해서 였다. 그것은 형석으로 하여금 석철이 역할을 빈틈없이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혼련의 하나였다.

드디어 형석이 이 집에 온 지 열하루 째 되는 날. 형석은 석철이로 변해 어머니인 지 선덕 여사 앞에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 주 갑돈씨가 다시 한번 정성껏 머리손질을 한 따음 오후 네 시 반쯤 형석은 곽 영훈씨와 함께 살짝 집밖으로 빠져나갔다. 다섯 시가 지난 후에 학원에서 돌아오는 것처럼 가장해서 집안으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곽 영훈씨는 형석을 제과점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여러 가지로 주의를 주었다. 될 수 있는 대로 말을 하지 말라는 것. 차에서 내리는 대로 주저 말고 석철의 방으로 들어가라는 것, 만일에 어제는 왜 안 들어왔느냐고 지 선덕 여사가 물으면 큰누나네 집에서 잤다고 대답하라는 것 등등이었다. 하지만 형석의 근심은 그런 것들보다는 자기가 석철이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과연 자기가 틀림없는 석철이로서 받아들여질 수가 있을 것인가.

다섯 시 반쯤 형석은 곽 영훈씨와 함께 검은색 자가용 세단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차는 곧 집 앞에 이르러 클랙슨을 울렸다. 육중한 철문이 열리고 차는 집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정원 한가운데서 지 선덕 여사가 새하얀 한복을 입고 이쪽을 향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옆으로 몇 발자국 떨어져 현 인철씨와 그 부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형석의 심장이 멈출 듯 뛰었다.

형석은 한순간이었지만 눈을 지그시 감았다.. 차가 멎었다, 곽 영훈씨가 먼저 내려 형석을 부축해 차 밖으로 내려놓았다.

"이제 오니? 배 고프지?"

지 선덕 여사가 애정이 담긴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형석이 힐끗 바라보니 지 선덕 여사는 애정과 연민이 담뿍 서린 시선으로 형석의 얼굴과 몸을 쓰다듬고 있었다. 형석은 대답 없이 목발을 옮겨놓았다. 몇 걸음 옳기다가 현 인철씨의 얼굴을 쓸쩍 쳐다보니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머님 걱정하시는데 선생을 초청해다가 집에서 공부를 하지 그래."

현 인철씨가 형석의 등뒤에 대고 말했다. 형석은 거침없이 현관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갔다. 석철의 방에 들어서 안락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으려니까 곽 영훈씨가 책가방을 들고 뒤쫓아 들어왔다.

"됐다. 됐어."

곽 영훈씨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함박 피어 있었다.

지 선덕 여사의 생각 속에 하나의 기억이 살아나 들락거리며 지 선덕 여사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은 형석이 이 집에 오고 나서 여섯 달이 지났을 때였다.

해가 바뀌고 겨울이 물러가고 봄기운이 감도는 삼월 말의 어느 오후였다. 지 선덕 여사는 지난해 봄 어느 오후에 돌연 석철을 기다리기 시작한 것처럼 이번에도 돌연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석철이가 강물에 빠져죽었다는 소식이 왔으니 어서 가서 석철의 주검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석철의 눈을 자기 손으로 감겨줘야 한다고 했다. 그 시간에 마침 형석은 집에 없었다. 그 무렵 석철은 다시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학원에 다니며 재수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형석은 지 선덕 여사가 새로운 발작을 일으킨 시간에 곽 영훈씨와 함께 자가용 세단에 몸을 싣고 학원에서 돌아오는 것처럼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지 선덕 여사가 새로운 발작을 일으켰다는 소식은 문 앞에서 귓속말로 곽 영훈씨에게 전해졌다. 형석은 영문도 모르는 채 그 자리에서 즉시 문간의 이층 별채로 거처가 옮겨졌다. 현 인철씨나 그 부인의 생각으로는 형석의 역할은 이것으로서 끝난 것같이 여겨졌다. 하지만 어머니 지 선덕 여사의 증세를 좀더 지켜보는 동안 형석을 이층 별채에 대기시켜두기로 했다,

어느 날 또 갑자기 어머니는 석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게 될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하지만 지 선덕 여사는 새로 떠오른 생각에 몰두해 들어갔다. 석철이 강물에 빠져죽었다는 소식이 왔으니 어서 그리로 가야 한다고 했다, 석철의 한 맺힌 눈을 어미의 손으로 쓸어 감겨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생각은 날이 갈수록 구르는 눈덩이처럼 커져갔고 무시무시한 집념으로 변해갔다. 지 선덕 여사는 자기 손으로 뭉친 생각에 마음이 얻어맞아 굉장한 타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음식도 안 들고 잠도 안 자고 쾡해진 눈에서 눈물을 주르르 쏟으며.

"불쌍한 내 자식아. 불쌍한 내 자식아. 한 맺힌 네 눈을 이 에미 손으로 고이 쓸어 감겨주마."

이렇게 넋두리하듯 울부짖는 것이었다. 오직 하나 남은 소원이란 석철의 시체를 안아보고, 자기 손으로 석철의 감지 못하고 죽은 눈을 감겨주는 것이라는 듯했다.

어느 날 현 인철씨는 곽 영훈씨를 불러 앞에 앉혔다.

"어머님이 저러시니 이 일을 어떻게 하지?"

현 인철씨는 혼잣말하듯 오직 이 말 한마디를 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튿날 곽 영훈씨는 바람을 쐬러 가자면서 형석을 데리고 집을 나갔다. 그들은 택시를 불러 타고 서울을 벗어났다.

"너는 이제 모든 것이 거의 석철이와 다름없게 되었어. 물론 거의라는 말은 완전하다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얘기다. 너는 나에게는 말하자면 예술작품이나 다름없어. 타는 너를 거의가 아니라 완전한 작품, 완전한 석철이루 만들어 놓구 말 테다."

택시 안에서 곽 영훈씨가 형석에게 한 말이었다.

그날 오후 형석은 북한강가의 바위 절벽에서 발을 헛디며 강물에 떨어져 죽었다. 형석의 시체는 이튿날 오전에 인양되었는데, 급히 달려온 지 선덕 여사가 형석의 시체를 부등켜안고 곽 영훈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울부짖고 있었다. 현 인철씨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현 인철씨는 효자였다.

잠시 후 현 인철씨는 생각난 듯 곽 영훈씨에게 지시했다.

"내일쯤 월급 육개 월분 적금한 것과 조의금 백만 원을 박 형석의 본가에 가지구 가서 심심한 조의를 표하도록 하시오."

 

'현대단편소설2' 카테고리의 다른 글

22. 태양의 유산  (0) 2022.03.03
21. 타임레코더  (0) 2022.03.03
19. 치정  (0) 2022.03.03
18. 창랑정기  (0) 2022.03.03
16. 제식훈련약사  (0) 2022.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