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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단편소설2

21. 타임레코더

by 자한형 2022.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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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임 레 코 더

-윤흥길

 

여섯 시---좀더 정확히 따져서 오후 여섯 시 이십오 분 정각---소리가 들렸다---그는 멋대가리 없이 시커멓고 그저 우중충하게만 생겨먹은 그놈의 기계 안쪽에서 마치 소슬바람에 날린 모래알 서너 개가 한꺼번에 유리창에 부딪혀 내는 것과 비슷한 음향을 들었다.

'6 25'

진행중인 시간의 어느 한 점이 기계의 안쪽에 부착된 동그라미 종이판 위에 흔적을 남기고 지나가는 소리였다. 바늘 끝으로 점자를 찍어놓은 듯 어김없이 숫자가 기록되었을 것이다. 뭐 별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었다. 대한민국 역사와 유관한 날짜가 그의 맨 첫 번째 순찰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기왕이면 이미 널리 알려진 세자릿수를 택하고 싶은 평범한 의도에서였다.

국어 담당 말석 교사 오석태는 기계의 뒷면 구멍에 꽂았던 기다란 열쇠를 도로 뽑아들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목숨이 성성한 생물인 양 째깍째깍 잠시의 쉬임도 없이 소리를 토하는 그놈의 기계뭉치를 그는 째지게 흘겨보았다.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층층시하에서 그러잖아도 주눅이 들고 오갈이 들어 줄방귀 참는 새댁처럼 영 얼굴색이 노래지는 판국이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도시락 크기만도 못한 그놈의 요물단지가 또 하나의 때리는 시어미인지 혹은 또 하나의 말리는 시누이인지로 숙직을 맡은 남자 교직원들 머리 위에 새롭게 군림하게 된 것이었다.

"이봐, 김씨!"

기계를 향하던 분노가 예정된 순서인 양 자연스럽게 인간 쪽으로 돌려졌다. 그러나 항상 인간 이하로 취급해온 사십 고개의 사환 앞에서 석태는 눈을 한껏 부라려 불량을 떨었다.

"잘 봐! 나중에 가서 이러니저러니 뒷소리 말구 지금부터 순찰 돌러 나가는 걸 똑똑히 봐두란 말씀이야!"

숙직실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라면을 끓이던 김씨는 그저 웃어만 보였다.

그의 멀겋게 풀린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불현듯 양쪽 집게손가락을 갈고리처럼 오그려 후벼대고 싶은 충동이 솟구치곤 했다. 보면 볼수록 정나미가 확확 물러앉는 작자였다. 생긴 모양은 제법 수더분한 듯해도 실상은 개개풀린 눈동자 뒤에 번쩍이는 교활을 탄환처럼 장전해놓은 채 항상 상대방의 허점을 노리는 위인이었다. 교내에서는 누구나 다 아는 비밀이었다. 재단 이사장이 교직원들의 근무 동태를 효과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이중 삼중으로 쳐놓은 치밀한 그물망의 굵은 벼릿줄에 상당하는 몫의 밀대 노릇을 김씨가 톡톡히 해내고 있다는 사실쯤 심지어는 학생들까지도 훤히 알았다. 권고 사직이나 파면도 감수할 각오만 되어 있으면 김씨의 정체를 몸소 확인해보는 건 여반장이었다. 누구든지 김씨 앞에서 재단측이나 학교 당국을 겨냥하고 불평 몇 마디만 늘어놓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그는 이튿날 직원 조회가 끝나기 무섭게 깔축없이 교장실로 호출 당하게 마련이었다. 하지 말라면 하지 말라더라는 말까지 알뜰하게 담아다 까바친다는 김씨와 한날 숙직에 걸린 것이 석태는 되놈하고 겸상을 받은 만큼이나 재수 없게 느껴졌다.

"국어선생님, 오늘 숙직이세요?"

복도에서 한 떼의 학생들과 마주쳤다.

특별 활동을 마치고 하교하는 합창부원들이었다. 그 애들만 하교하고 나면 넓디넓은 학교 안엔 당직을 맡은 두 사람만 호젓이 남게 된다. 호말만한 계집애들 옆을 지나치면서 총각선생 오석태는 짐짓 험상을 꾸며 보였다. 여학교 선생으로서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위엄이 없다고 교장으로부터 주의를 받은 적이 있다. 학생들 앞에서 말을 함부로 쏟는 험구벽이 벌써 교장의 눈밖에 나버린 것이다. 하지만 없는 위엄을 내세우려고 꾸민 험상은 아니었다. 그토록 발랄하고 청순한 듯이 보이는 학생들 가운데도 자신의 일거일동을 감시하는 세모꼴의 눈이 숨어 있다는 걸 깨달은 뒤로는 가급적이면 공적인 일 외에는 애들을 상대하지 말자는 주의였다. 학생들 세계에까지 그물망이 퍼져 학생회 간부들 몇몇을 고정 제보원으로 이용하거나 인기 투표 따위를 시키는 등등으로 교사 개개인에 관한 실력의 정도와 소위 그 통속적인 인기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물론 명분이야 그럴싸했다. 신설 학교를 단시일내 명문교로 발전시키자면 무엇보다 단결이 중요하고, 사소한 불평불만은 그 단결을 저해하는 으뜸의 요인이고, 그렇기 때문에 교세가 본궤도에 오르기까지의 일정 기간은 부득불 변칙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다 좋다. 단결해서 나쁠 게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사장의 의도가 백 번 옳다고 가정해도 그가 기대하는 만큼의 성과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단결이 배라면 부작용은 배꼽이어서 결과적으로 교사와 교사,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생과 학생 사이에 불신과 반목의 싹만을 까맣게 심어놓았다. 자기 실력에 자신을 못 갖는 약심장들이 영향력 있는 학생들에게 아부하는 기현상을 목격하면서 석태는 처사의 부당함을 몇 번이나 항의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권고 사직 아니면 파면 형식을 빈 자살 행위에 선뜻 뛰어들 결심이 덜 굳어 그저 꾹 참아 나오는 중이었다. 아뭏거나 석태는 군대에서 제대한 뒤 어렵게 붙잡은 교직에서 멋모르고 무제한의 사랑을 쏟았던 제자들로부터 시나브로 배신의 쓴맛을 느낄 적마다 몸살이라도 앓듯 밥맛을 잡치곤 하다가 요즘은 그것도 만성이 되어버렸다.

시가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배기에 우뚝 선 학교 옥상에는 오염되지 않은 신선한 공기가 있고, 인근 숲에서 바람에 묻어오는 아카시아의 짙은 향기도 곁들여 있었다. 곧 달마저 솟을 모양이었다. 일단 초저녁 어스름에 잠기는 듯하던 남한산성 동녘의 고만고만한 산봉우리들이 부챗살처럼 위로 뻗치기 시작하는 노르무레한 배광 속에서 서서히 실루엣으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하루의 번잡을 죄다 감당해내고 이제 겨우 휴식을 취하려는 성남(城南) 시가가 눈 아래 질펀히 누워 있었다. 굴곡이 심한 시가지를 한 꺼풀 두텁게 덮은 어둠의 막 갈피갈피에 사금처럼 박힌 무수한 불빛들이 낮 동안이면 속절없이 드러나게 마련인 그 안스런 영세성과 날림으로 급조된 불규칙의 냄새를 아주 영악스럽게 호도하고 있었다.

옥상에 서서 주변을 조망하는 것으로 그는 첫 번째 순찰을 때워버렸다. 모든 것이 다 이상 없었다. 아니, 이상 없을 성싶었다. 정말 이상 유무를 확인하려면 동편 변소에서 백여 미터나 떨어진 골짜기 묘포장까지 직접 내려가든지, 아니면 적어도 달빛이 훤해지는 시각까지 기다리는 수고가 필요하다. 갈아 끼운 지 며칠 안 된다는 플래시라이트지만 묘포장까지 불빛이 미치기엔 턱도 없었다. 그는 유행가를 불렀다. 음정이야 맞건 말건 무턱대고 우람찬 목소리로 한바탕 시들어지게 '고향무정'을 불러 제쳤다. 지금쯤 교사 바깥 어디만큼에 잠복해 있을지도 모르는 도둑에게 주는 경고였다. 거기에 합세하듯 먼 어느 숲에서 때 이른 부엉이 울음이 들려왔다.

사실 순찰이래야 별게 아니다. 도둑이 노릴 만한 물건이 있다면 이층 가사실에 있는 자봉침 열 대와 삼층 과학실에 있는 실험기구 몇 점, 또 사 층 음악실의 피아노가 전부였다. 그건 문단속만 잘하고 숙직실에 들어앉아 있노라면 저절로 지켜지는 셈이다. 그런데 탈은 언제나 건물 밖에서 일어났다. 이사장은 혐의를 전적으로 인근 빈민촌 주민들에 두어 인간의 쓰레기라고 터놓고 그네들을 비방하고 다녔다. 백 평 남짓 비탈 돌밭을 일궈 정성 들여 가꾼 각종 묘목들이 기계충에 먹힌 머릿자국처럼 밤사이에 보기 흉하게 뽑혀져나간다. 뿐만이 아니다. 우물 속에 매달아둔 두레박이 사흘이 멀다 하고 없어진다. 학교 안내판과 푯말도 심심찮게 수난을 겪고, 놋쇠로 된 학교 간판은 신학년도에 들어서만도 벌써 두 번째나 갈아 달았다. 심지어는 가건물로 지은 구내 매점 한쪽 판자벽이 홀랑 뜯겨져 달아나고, 안에 쟁여놓은 빵이야 콜라야가 상자째 도둑맞는 판이다. 제아무리 눈에 버팀개를 하고 지킨다고 지켜도 야음을 틈탄 좀도둑들의 극성을 막아낼 장사가 없었다. 없어지는 학교 재산이 자기 신체의 일부분이나 되는 듯 지극한 통증을 느끼는 노랑이 이사장으로서는 묘목 한 그루 판자 한쪽과 인간 쓰레기의 수족 하나하나를 일 대 일로 맞바꾸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이사장이란 사람이 전교생을 모은 운동장 조회 단상에 난데없이 뛰어올라 아무개 교사를 파면시키겠다고 망발을 토하게 만든 중대 사건이 발생했다. 기분파 체육교사 고 선생이 숙직 중 충직하기 이를 데 없는 김씨를 무슨 수로 꼬셨는지 좌우간 소주 두 병을 나눠 마시고는 둘이서 나우 취해버렸다. 거의 같은 시간에 곯아떨어졌으나 일찍 깬 것은 그래도 김씨가 먼저였고, 그에 의해서 서무실 캐비닛 속의 앰프 시설을 뜯다 만 흔적이 뒤늦게 발견되었다. 김씨가 일찍 잠이 깨어 설치는 서슬에 도둑이 혼비백산 꽁무니를 뺀 것인지 어쩐지 그 속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잃은 물건이 없는 게 천만 다행이었다. 그런데도 진도개처럼 충직무쌍한 김씨는 이튿날 이사장과 교장 앞에서 고 선생의 유혹에 빠져 직분을 망각하고 놀아나게 된 전말을 상세히 보고하면서 하염없이 낙루를 했다. 비록 죽어 마땅한 대죄를 범하긴 했으나 과거의 적공을 참작하여 너그러이 용서해줄 것을 끈끈한 목소리로 길게 읍소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사장의 분노는 그만 극에 다다라 교직원 앞에서나 학생들 앞에서 망발을 서슴지 않게 되었다. 또 선생들은 선생들대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소위 육영 사업에 몸바쳤다는 양반이 애들 듣는 데서 그 따위로 교권을 짓밟아놓으면 우린 앞으로 무슨 낯짝을 들고 제자들을 대하라는 거야."

"제에길, 선생질 보따리 싸든지 달리 무슨 방도를 차려야지 서글퍼서 이놈의 짓 어디 해먹겠나!"

끼리끼리 모여 이사장의 월권 행위와 몰지각한 폭언을 성토하는 것이었다. 물론 때와 장소를 가려 고 선생의 발등에 떨어진 불똥이 자기한테는 직접 옮지 않을 범위 안에서 적당히 성량을 조절하며 내는 불만이었다. 아무래도 유야무야 사그라질 문제는 아닌 듯싶었다. 소문이 새끼를 치고 가지를 벌려 별의별 억측과 구설이 교내외를 종횡으로 휘젓고 돌았다. 모든 일이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기에 혈안이 된 김씨의 어리석은 두뇌에서 꾸며진 일장의 연극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김씨 자신에 과연 얼마만한 이득이 있었는지 그 점은 계산하기 곤란하다. 그러나 선생들은 그런 소문을 곧이곧 믿어버렸다. 평소에 미운살이 박힌 기분파 고 선생을 손쉽게 제거하기 위한 고등 술책으로 이사장과 교장이 김씨와 단단히 짜고 파놓은 함정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 소문 역시 선생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였다. 사태가 심상치 않은 지경에 이르자 이사장과 인척 관계에 있는 교장이 수습을 맡고 나섰다. 선생들은 어르고 뭣 먹이는 교장의 능수에 쉽게 말려들었다. 항상 약자가 피 보게 마련이라는 체념 아래 선생 편에서 먼저 양보하기로 했다. 자세를 가다듬어 직무에 충실할 것을 굳게굳게 다짐하는 교직원 일동의 결의와 이사장의 자비를 서로 주고받는 교환 형식으로 사건은 나흘만에 겨우 일단락 지어졌다. 그러나 선생들에 대한 이사장의 불신은 여전해서 당직자 근무 수칙에 새로운 조목들이 추가로 명시되었다. 예를 들자면---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도난을 사전에 예방할 것(宿자 숙직이 아니에요, 잠 한 소곰 안 자고 밤새도록 지킬 宿자 숙직이라는 걸 명심허시오), 그래도 도난 사고가 발생할 시에는 당직자가 책임지고 변상할 것(내 살 아픈 걸 따끔허게 경험해봐야만 남의 살 아픈 줄도 알게 됩니다. 쌔고쌘 흙덩어리를 파서 학교를 거저 지은 게 아니란 말예요) 등등으로. 아울러 서무주사를 시켜 변상물 가격명세표를 작성해서 교무실에 회람을 돌리게 했다. 예를 들자면---2년생 히말라야삼목 1본에 얼마, 직경 1센티 나이롱 두레박줄 미터 당 얼마, 하는 식으로. 그리고 이사장이 취한 마지막 조처는 자신을 대리하여 선생들의 당직 근무를 독려 감시할 파수꾼 역할로 타임 레코더라는 이름의 야릇한 물건을 주문해서 제꺽 들여놓은 것이다. 그것의 맨 첫 번째 사용자가 된 사람이 다름 아닌 오석태였다.

숙직실 맨바닥에 찌그러진 양재기 서너 개가 아무렇게나 늘어 놓여 있었다. 사십 고개의 홀아비 사환 김씨가 호락질로 저녁을 드는 참이었다. 막 들어서는 석태를 보더니 그는 까닭 없이 당황하여 나머지 식사를 무지하게 서두르기 시작했다. 라면 멀국이 담긴 남비에 보리가 많이 놓인 밥덩이를 달팍 쏟은 다음 숟가락으로 두어 바퀴 휘젓고는 그대로 입안에 들이부었다.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태도였다. 고깃비늘만큼이나 굵게 빻아진 고춧가루가 듬성듬성 섞인 허연 김치 깍두기가 반찬의 전부인 조악한 식사를 석태는 잠시 눈여겨보았다. 놀랄 만한 충성에 대한 보수치고는 그의 입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도 험해서 측은한 생각마저 들었다. 매끼 그런 종류의 음식물을 소화시키면서 다시 기운을 차려 선생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것으로 그는 어미 없는 다섯 자녀를 굶기지 않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맡은 직책에 여간만 만족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만족의 기준은 언제나 어린것들을 굶기지 않고 헐벗기지 않는 그 선이었다. 정액의 급료가 약속된 일자리에 근무할 수 있는 요행을 안겨다준 신에게 자신이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가를 그는 이따금 사람들 앞에서 진지하게 피력하곤 했다. 그가 생각하기엔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사환이란 직업이었다. 원래 착실한 소작인이었던 그는 어느 날 모내기 쉴참의 피곤한 논둑에서 계시를 받듯 갑자기 깨달은 바 있어 개미 쳇바퀴 돌 듯하는 자신의 팔자를 하루아침에 뜯어고칠 엄청난 뜻을 품고 당장 시골 살림을 청산하여 서울로 솔가해 왔다. 답십리에 무허가 판잣집을 세워 우선 식구들을 들여앉히고는 짧은 밑천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그것이 실패하자 다음 번엔 손에 익힌 뾰죽한 기술도 없이 그저 타고난 힘만을 팔아먹는 고달픈 생활로 주저앉고 말았다. 남의 집 고용살이를 여러 군데 전전하는 동안 마누라를 산후별증으로 잃고 애초 이농할 당시에 안았던 요란한 꿈은 차츰 빛이 바래 흔적조차 안 남게 되었다. 오만가지 잡일을 골고루 겪은 끝에 서울에서의 생활이 결코 시골보다 나을 게 없음을 뒤늦게 깨우쳤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엎친 데 덮쳐 판잣집마저 철거를 당했다. 그리고는 다른 철거민들과 함께 지난날의 성남---그러니까 초창기의 광주단지로 재차 이주를 했다. 막일에 종사하던 그를 운명의 신이 어느 날 학교 신축 공사장으로 인도해주었다. 거기서 그는 타고난 힘과 성실성이 이사장의 눈에 들어 교사의 완공과 동시에 사환 겸 잡역부로 취직되었다. 전에 하던 막일에 비하면 거저먹기로 수월하고 신사적이면서 수입은 장래의 계획이란 것이 가능할 만큼 일정했다. 누가 뭐라든 그것은 명실상부한 월급장이였고, 무엇보다 자라나는 어린것들 보기에 의젓한 느낌이어서 더 이상 출세는 바라고 싶지도 않았다. 그 당시 자기는 확실히 물에 빠진 사람이었고 학교 취직자리는 어쩌다 우연히 손에 잡힌 지푸라기였다고 회고하는 김씨를 석태는 언젠가 본 기억이 있다.

마지막 한 숟갈을 입에 가득 문 채로 김씨는 주섬주섬 그릇들을 챙겼다.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허둥지둥 숙직실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오랜만에 석태는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김씨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자식새끼들 먹여 살리는 세상의 모든 어버이들은 위대하다. 그리고 신들린 듯이 자기 일에 열중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름답고 행복하다. 김씨를 절대로 미워하지 말고 가능한 한 사랑해보자. 석태는 하숙집 아주머니가 같은 동네 사는 학생 편에 보내온 보따리를 풀었다. 찬합을 꺼내놓으면서 설령 김씨가 자기 없는 새 반찬을 웬만큼 축냈다 해도 묵인해주기로 작정했다. 어차피 다 못 먹고 늘 남겨 보내는 반찬이었다.

저녁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복도 한끝이 별안간 소란스러워졌다. 이제까지 적막에 잠겨 있던 건물 내부는 순식간에 거대한 공명통으로 변하여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산울림처럼 사면 벽을 쳤다. 아닌 밤중에 징징 우는 어린애의 소리는 흡사 항아리 안에서 터져 나오는 통곡처럼 확성되어 몹시 괴이쩍게 들렸다. 석태는 먹다 만 것들을 숙직실 웃목으로 가만히 밀어놓았다. 그리고 소란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김씨가 그 소란의 와중에 휩쓸려 있는 눈치여서 자기까지 덩달아 날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울고 있는 애들은 적어도 두 명이거나 그 이상이었다. 복도바닥에 넘어져 궁둥방아를 찧거나 데굴데굴 구르는 소리가 잇달아 울리고, 그럴 때마다 음색이 각각 다른 비명들이 번차례로 들렸다. 그런데도 김씨의 말소리는 단 한마디고 안 났다. 그러나 침묵 가운데서 김씨는 무언의 폭력으로 끌려가지 않겠다고 떼거리 쓰는 애들을 솜씨 있게 연행해오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니나다를까, 석태의 지레짐작에 대한 긍정의 대꾸인 양 숙직실로 면한 복도 문이 벌컥 열리면서 만만한 짐짝 같은 두 개의 조그만 몸뚱이가 한꺼번에 투둑 부려졌다.

"모가지를 비틀어 죽일 종자들!"

비로소 김씨의 잇새에서 착 가라앉은 소리가 새났다. 뒤이어 모가지를 비틀어 죽일 만한 범죄의 증거물이 숙직실 방바닥에 쏟아져 굴렀다. 한 움큼의 호두알이었고 더러는 은행도 섞여 있었다. 손바닥을 툭툭 털면서 김씨는 재차 뇌까리는 것이었다.

"모가지를 싹싹 비틀어 죽일 종자들 같으니!"

껍질이 거무끄름히 변색한 점으로 미루어 은행은 알맹이 속까지 몹시 상했을 터이나 호두알만은 뻘건 황토 가루가 몽글게 입혀 있을 뿐 우선 겉보기엔 멀쩡했다. 지난 식목일에 학생들 손으로 심은 거니까 땅 속에 묻혀 지낸 지 벌써 오래인 묘목 씨앗이었다. 석태는 고개를 팍 숙인 채 웃목에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은 두 아이를 딱하게 내려다보았다. 왼쪽 놈이 오른쪽 놈보다 앉은키가 눈에 띄게 크고 여물어 보였다. 왼쪽 놈은 귀 밑에서 입언저리까지 싸잡아 갈긴 커다란 손바닥 자국이 아직도 선명했고, 오른쪽 꼬마는 터진 아랫입술에서 빨갛게 배어나는 피를 연신 웃입술로 덮어 빨아내고 있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김씨의 손끝이 우악살스러웠던 모양이다.

"이 녀석들 아주 나쁜 짓을 했구나."

석태는 장승처럼 문 앞을 막아 선 김씨와 애들을 번갈아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자 오른쪽 꼬마의 수그렸던 머리통이 번쩍 들렸다.

"나는 증말 안 혔유. 종순이가 자꼬만 가자고 혀서 따러왔는디 저만침 떨어져서 나는 내둥 귀경만 허고 있었유. 종순이한티 물어봐유. 그짓말 아녀라우, 증말……"

"나도 안 팠어요. 철호가 파서 나눠주길래……"

"요 쥐새끼 같은 놈들이 그래도 바로 안 대고!"

꼬마의 말은 큰놈이 가로막고 큰놈의 말은 김씨가 가로막았다. 김씨는 두 놈의 귀를 한쪽씩 나누어 잡더니 꽝 소리나게 박치기를 시켰다.

"아고머니 나 죽네, 나 죽겄네! 나 좀 살려줘유. 증말로 나는 안 혔어라우. 선생님, 나 좀 살려줘유, 선생님!"

큰놈은 꿇어앉은 자세대로 쫄쫄 눈물만 짜는데 꼬마는 엄살이 아주 대단했다. 두 팔로 머리통을 감싸 몸뚱이를 축구공만하게 말아 붙이고는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금방 숨 넘는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박치기를 놓는 김씨를 보는 순간 석태는 오장이 확 뒤집히는 걸 느꼈으나 심한 농담이라도 거는 것 같은 꼬마의 지나친 엄살에 자칫 미소를 흘릴 뻔했다.

"철호가 누구지?"

종순이란 이름의 큰놈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종순이는 대답을 하려다가 옆의 꼬마를 힐끔 곁눈질하고는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렸다.

"네 이름이 뭐지?"

이번엔 꼬마에게 물었다. 언제 울었냐는 듯이 발딱 일어나 앉으며 꼬마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철영이, 강철영이라우."

"그럼 철호는 네 형쯤 되겠구나?"

"………"

"어째 내 짐작이 틀렸나?"

석태를 쳐다보는 꼬마의 두 눈은 잔뜩 겁에 질려 비정상에 가깝게 크고 거인증의 징후와도 같이 유난히 솟아 보였다. 꽁무니를 뺀 다른 공범자와 형제간이라는 사실이 제 죄값에 불리하게 작용할지 어떨지를 눈치 빠르게 계산해보는 중인 듯 그 커다란 눈알의 움직임이 잠시 기민해졌다. 결론이 나쁘게 내려진 모양, 꼬마는 다시 고개를 떨구며 끝내 대답을 회피해버렸다. 사태의 변화 때문에 웃입술이 쉬는 동안 아랫입술의 상처에서는 새로운 피가 빨갛게 배어나오고 있었다. 깨끗이 세수라도 시키고 추저분하게 자란 머리털을 다듬어놓는다면 규모 있는 집 자식처럼 조화를 갖출 귀인성스런 얼굴이었다. 국민학교 이학년 정도나 됐을까. 전라도 아니면 충청도 어느 고을에서 이사온 지 얼마 안 되는 시골뜨기가 분명한데 무척 총기 있게 생겼다. 만약 제대로 학교에 다닌다면 지난 학년말엔 우등상을 받아 가난한 부모를 기쁘게 했을지도 모른다.

"좋아, 대답 안 해도 난 보면 다 알아. 하지만, 바른말을 해야 용서해준다."

석태는 타임 레코더에 달린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두번째 순찰 시간으로 예정해놓았던 일곱시 십칠분이 머지 않았다.

"철영이 너 칠월 십칠일이 무슨 날인지 알아?"

아까부터 석태의 하는 양이 심히 못마땅하여 퉁퉁 부어 있던 김씨가 무섭게 노려보았다. 이 무슨 가당찮은 개수작이냐고 힐난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는 마땅히 심각해야 할 사태가 건방진 애송이 숙직교사에 의해 장난스런 분위기로 타락하고 도둑을, 그것도 한꺼번에 둘씩이나 붙잡은 자신의 공로가 한낱 웃음거리로 변질될까봐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았다.

"오선생, 파출소로 전화 걸어서 얼른 순경을 부르는 게 좋을 게요."

"제헌절!"

"옳지, 그 녀석 똑똑하다. 그럼 너 구구단도 문제없이 외겠구나?"

"이이는 사, 이삼은육, 이사 팔……"

순경 얘기가 나오는 바람에 꼬마는 다급해졌다. 되도록이면 김씨 쪽은 외면하면서 희망을 온통 석태에게만 건 듯 시키는 대로 제꺽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다.

"말로만 해야 소용없어요. 어서 경찰에 넘겨버립시다."

"……이구 십팔, 삼일은 삼, 삼이는 육, 삼삼은 구, 삼사 십이……"

꼬마는 더욱더 목청을 높였다. 힘든 노래를 부를 때처럼 새빨개진 얼굴을 한껏 뒤로 잦혀 천장을 향하고 눈을 질끈 감아 붙이고 아직도 피가 안 그친 입을 제비주둥이마냥 딱딱 벌려가며 새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기어코 어른들의 용서를 받아낼 요량으로 아주 결사적이었다. 그 눈물겨운 노력이 제대로 석태에게 전달되었다.

"……사칠은 이십팔, 사팔 삼십이, 사구 삼십육……"

"됐어 됐어, 이제 그만해도 돼."

내친 김에 구단까지 내리 욀 작정인 꼬마를 제지시켰다. 아무 것도 아닌 일 같으나 사실은 여러모로 복잡성을 내포한 이 사건을 뒤탈 없이 처리하기 위해서는 김씨의 체면도 생각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서슬이 퍼렇게 훈계를 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제법 똘똘하군. 틀림없이 우등생일 거야. 그런데 왜 그런 짓을 했지? 어쩌다 그런 나쁜 짓을 저질렀냐 말야!"

"츰에는 그런 짓 헐라고 안 혔어라우. 그런디…… 깨구리를 잡으러 나왔는디 꿩이……"

"? 꿩이 어쨌다고?"

"꿩이…… 땅을 막 파는디 은행이랑 추자랑 뒤벼져서 그걸 봉게로 배가 고파서……"

배가 고팠단다. 그래서 놓친 꿩 대신 땅속의 그걸 캤단다. 여태껏 곁에 꿇어앉아 잠자코만 있던 큰놈이 머리를 푹 수그렸다. 녀석의 무릎 바로 옆에 미처 치우지 못한 도시락서껀이 보기 흉하게 흩어져 있었다. 녀석의 내리깐 시선이 먹다 남긴 달걀부침 위에서 잠시 방황하는 걸 석태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배가 고팠다……

"뭐라고?"

꼬마의 변명은 김씨의 분격을 샀다.

"배가 고팠다고?"

김씨는 방바닥에 널브러진 것들을 되는 대로 쓸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래 배고파서 이 썩은 걸 먹겠다고 학교 묘포장을 망쳐놔?"

썩은 흙투성이 호두와 은행을 양손에 갈라 쥐더니 김씨는 느닷없이 아이들한테 달려들었다.

"아나, 처먹어라! 배지가 터지게 처먹고 피똥이나 누어라! 어서 처먹어, 이 주리를 댈 놈들아!"

"무슨 짓이오, 김씨!"

하고 석태가 소리쳤다.

"그만두지 못하겠소?"

석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씨는 손에 쥔 걸 강제로 아이들의 입안에 틀어넣으려 했다.

"실컷 처먹고…… 배지가 뺑뺑하게 처먹고……"

한달음에 십릿길은 달려온 사람처럼 김씨는 무섭게 숨을 헐떡였다. 아이들은 불에 덴 듯이 기급을 해서 울음을 터뜨렸다. 요리조리 머리를 틀어 피하는 아이들의 입에 기어코 썩은 열매를 틀어넣으려고 김씨는 번갈아가며 군밤을 먹여댔다. 참다못해 석태가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에 김씨를 향했던 일말의 동정은 이제 그의 마음속에서 흔적도 없이 스러져버렸다. 그는 김씨의 팔을 낚아 있는 힘을 다해서 손목을 꺾었다. 마침내 손안의 것들이 방바닥으로 쏟아져 내리자 김씨를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당신도 자식이 있다지? 아들딸 도합 다섯이나 두었다지? 둘째나 셋째가 아마 저애들만큼 자랐을걸?"

김씨가 그를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그도 지지 않고 그 눈을 맞받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기는 양쪽이 매일반이었다. 처음 김씨를 알게 된 이래 그와 같은 자세로 눈싸움을 하면서 내내 오늘날까지 지내온 듯한 기분이었다.

"빨리 순경을 부르시오!"

하고 김씨가 이를 가는 소리로 웅얼거렸다.

"경찰은 필요 없어!"

"알아서 하시오. 나중에 후회할걸요."

"걱정 마. 오늘 저녁 당직 책임자는 나야. 그만한 일쯤 책임질 배짱은 나도 있어. 그리고 그런 식의 협박은 적어도 내 앞에선 안 통해."

"어디 두고 봅시다!"

여전한 협박을 남기면서 김씨는 숙직실을 나갔다. 복도 저편으로 멀어지는 성난 발소리를 들으며 석태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결코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나 어쨌든 일은 해결된 셈이다. 이젠 아이들을 적당히 돌려보내는 일이 남았다. 어느 겨를엔지 아이들의 울음은 그쳐 있었다.

"네놈들 집이 어디냐?"

큰놈이 좀 머뭇거리다가 멋쩍은 듯이 간신히 입을 놀렸다.

"달나라요."

아아, 달나라…… 집이 달나라에 있고 거기서 거주한단다. 녀석의 태도로 보아 거짓말이 아닌 듯했다. 그처럼 한바탕 야단법석을 떨고 난 분위기에서는 충분히 농담으로 들릴 수도 있는 대꾸였다. 그러나 그는 웃지 않았다. 웃음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네다. 달나라만이 아니라 그 맞은편 언덕엔 별나라도 있다. 어떤 데서 유래된 지명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지명에서 풍기는 만큼 그렇게 아름답고 신비한 동화의 마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별나라보다 달나라가 오히려 더 높다. 웬만한 등산 코스 푼수는 되게 지대가 높아서 땅값이 거저 안 줄 정도로 헐하고, 그래서 주민의 대부분이 성남으로 이주한 이후 한 번 더 실패의 쓴맛을 경험하고 또 다시 살림의 규모를 줄인 사람들이다. 어느 짓궂은 친구가 자조(自嘲)와 자위(自慰)가 반반으로 섞인 유머의 센스를 발휘하여 붙인 지명쯤으로 석태는 믿고 있었다. 적당히 훈계해서 돌려보내는 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달나라에 산다는 그 아이들한테 무슨 일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좋을지 석태는 실로 난감했다. 사환이 거의 공공연히 선생을 협박할 수 있는 이놈의 학교 생리를 저것들이 이해할까, 제 놈들을 풀어주는 작은 일에 한 숙직 교사의 모가지가 오락가락하는 위험이 따른다는 걸 저것들이 이해할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사장이 저희네 이웃을 가리켜 인간 쓰레기라고 부르는 그 이유를 저것들이 과연 이해할까……

"일어서!"

석태는 아이들을 상대로 더 이상 긴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우향우!"

너무 어리둥절해서 일관동작이 되지 못하는 아이들의 등을 향해 석태는 떠다밀 듯한 소리로 명령했다.

"앞으로 가!"

비로소 석태의 의도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갑작스런 은혜를 입은 사람이 대개 그러하듯 아이들은 잠깐의 망설거림으로 인사를 닦고 나서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는 걸음아 날 살려라고 냅다 뛰어 달아나 버렸다. 어른들의 변덕스런 마음이 한 번 더 재주를 넘기 전에 한껏 멀찍이 도망쳐놓고 보자는 속셈이었으리라. 아이들이 자취를 감추자 석태는 숙직실 바닥에 흩어진 그대로의 도시락 반찬들을 우두커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빛이 창으로 비쳐들어 전등을 껐는데도 숙직실은 환했다. 타임 레코더에 달린 시계가 잠시도 쉬지 않고 째깍거렸다. 두꺼운 시멘트벽 건너 저쪽 교무실에서는 무엇을 하는지 마룻바닥을 걷는 김씨의 발소리가 무척 신경을 자극했다. 김씨와는 아직 화해하지 않았다. 그가 불침번을 서는 동안 좀 자둘 필요가 있다. 눈에다 버팀개를 하고 밤을 꼬바기 밝히라는 이사장의 엄명이 있지만 그래도 내일의 수업을 위해서는 한숨 자야 된다. 그러고 나서 새벽 한시에 불침번을 교대하도록 애초에 김씨와 약속이 되어 있다. 그런데 영 잠이 오질 않았다. 석태는 홀아비 냄새가 찌든 이부자리 위에서 수없이 몸을 뒤치락거렸다.

"어이 김씨!"

대답이 없다.

"나허고 순번을 바꿀까?"

김씨의 발소리가 뚝 그치더니 이윽고 다시 이어졌다.

"내가 불침번을 설 테니까 먼저 들어와서 자!"

그래도 대답이 없다.

"넨장맞을, 이젠 귀까지 먹었나?"

석태는 심통 사납게 외쳤다.

"어이 김씨, 내가 도둑놈을 풀어줬다는 얘기 누구한테도 하지 마!"

저쪽의 반응을 살핀 다음 또 외쳤다.

"그리고 내일 아침 교장실에 들어가서 보고해. 누구한테도 얘기하지 말라고 그러더라고."

뭔가 꽝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교무실에서 들렸다.

"당신을 고발하려 했어. 미성년자 학대 혐의로, 특수폭행죄로 당신을 경찰에 넘기고 싶었어."

석태는 오랜만에 기분 좋게 껄껄 웃었다.

"여덟 시 십오 분이 지났어. 나가서 순찰 돌도록 해."

공허하게 울리는 자기 목소리의 반향을 상대로 석태는 줄창 씨부려대고 있었다. 그렇다고 잠이 올 리 만무했다.

무료한 시간이 지질히 흐르고, 그러다가 드디어 불침번을 교대할 시간이 왔다. 마지막 순찰을 끝내고 들어온 김씨가 이불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말없이 드러누웠다. 석태 또한 아무 말 없이 타임 레코더를 옆구리에 낀 채 숙직실을 나와버렸다. 그는 교무실 자기 책상 서랍에서 학습지도안, 참고서를 꺼내어 응접용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이처럼 답답하고 지루한 시간과 겨루는 덴 다음 주 지도안이라도 미리 작성해두는 게 상책이지 싶었다. 그는 탁자를 끌어당겨 책들을 펴놓고 일을 시작했다.

만년필이 탁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멀리 가 있던 시계의 초침 소리가 껑충 도약이라도 하듯이 귓가로 확 다가들었다. 한 차례 비볐다가 뜬 그의 눈에 비친 타임 레코더는 네 시가 훨씬 지난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깜빡 존 정도가 아니라 아주 세상 모르게 쿨쿨 곯아떨어졌던 것이다. 덕분에 한시와 네 시 사이의 순찰기록에 커다란 공백이 생겼다. 낭패였다. 전 같으면 숙직일지에 적당히 가짜 시간을 적어 넣는 것으로 끝나지만 그놈의 타임 레코더란 괴물이 등장한 지금은 일단 지나가 버린 시간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는 플래시를 집어들고 부랴부랴 순찰에 나섰다.

교사내부터 먼저 둘러볼 요량으로 이층 층계를 오르다가 갑작스럽게 다급한 요의(尿意)를 느껴 바깥 변소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방뇨를 마치고 그는 천천히 우물 있는 곳으로 자갈길을 내려갔다. 두레박은 그간 별고 없이 튼튼한 나일론 줄에 매달려 있었다. 새벽이라지만 밖은 아직도 어두운 편이었고, 서녘으로 많이 치우친 달이 주검의 옷과도 같은 희붐한 잔광을 잠든 모든 것 위에 싸늘하게 던지고 있었다. 멀리 골짜기 아래 묘포장이 내려다보였다. 언덕의 그늘자락에 가려 노출이 불량한 네가티브 필름처럼 보였으나 그래도 크고 작은 나무들이 이루는 검은 톱니의 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묘포장을 바라보던 그는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긴장을 느꼈다.

뭔가 움직이는 물체가 눈에 띈 것 같았다. 무의식중에 플래시를 비추려다 불빛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그는 주춤했다. 어둠에 눈이 익기를 기다려 그는 분명히 움직이는 물체가 있고 그것이 사람임을 확인했다. 오라지게 말썽도 붙는 날이다. 그는 비탈을 뛰어내려 겁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면서 그는 요란한 발소리를 듣고 제발 몸을 피해달라고 상대방에게 빌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그가 바투 다가섰을 때까지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묘목 사이에 허리를 굽혀 열심히 삽질을 하는 희읍스름한 몸뚱이 둘레를 플래시의 둥근 광망이 포위하자 그제서야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펴는 것이었다. 흰 저고리에 흰 치마---혹은 연회색이나 황색 계통일지도 모른다---여자였다. 뜻밖에도 부인티가 완연한 젊은 여자였고 밤도둑치고는 무척이나 서투른 복장이었다. 여자의 조붓한 턱이 아래로 처지면서 가늘디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아……"

병든 거위처럼 여자는 새벽이슬에 흠씬 젖어 있었다. 석태는 우묵 꺼진 눈자위를 스치는 여자의 절망과 수치를 읽고 플래시를 꺼버렸다.

"피치 못할 사정이…… 죄짓는 줄 알면서도 피치 못할 사정 땜에……"

"당신 혹시 강철영이 엄마 아니오?"

저도 모르게 엉뚱한 소리를 하고 나서 석태는 여자의 얼굴에 떠오르는 의아스런 표정으로 그 엉뚱함의 정도를 깨달았다. 그는 자기 자신에 버럭 화를 내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다시 삽을 잡으시오!"

뿌리째 뽑힌 묘목 무더기가 눈에 띄었다. 어림짐작에 부피가 작고 가벼운 개량종 밤나무와 어린 향나무가 대부분인 듯했다.

"피치 못할 사정 땜에……"

하고 꼭 같은 말이 여자의 입에서 여리게 반복되었다. 뜻 모를 입엣말을 웅얼거리면서 픽 주저앉는 걸 보고 석태는 틀림없이 실신해버린 거라고 생각했다. 여자가 땅바닥에 반듯이 누워 축축이 젖은 치맛자락을 머리 위로 뒤집어쓰는 걸 보고도 그는 그것이 전연 다른 의미를 내포한 행동인 줄을 몰랐다.

"용서해주세요. 제발 파출소에 끌고 가지는 말아주세요. 용서만 해주신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어요. 그만한 값어치는 꼭 치르겠어요."

얼굴을 가린 치마 밑에서 여자의 용기가 수치심을 딛고 일어서는 모양, 보이지 않는 입에서 말이 제법 술술 나왔다. 그리고 말과 함께 가지런하던 가랑이 사이가 느릿느릿 벌어졌다. 비로소 석태는 여자의 말뜻을 옳게 새길 수 있었다. 여자는 딴에 열심히 육감적인 내용을 얘기하는 중이었지만 어둠 속에 허옇게 드러난 두 다리는 참담할 정도로 허약해 보였다. 별안간 비통에 가까운 감정이 석태의 뇌리를 쳤다. 꼭 배반당한 기분이었다. 여자의 손에 삽자루를 잡혀 파낸 묘목을 도로 묻게 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돌려보낼 작정이었던 것이다.

"난 또 어떤 놈인가 했더니 계집이로구먼."

어둠 속에서 슬그머니 나타나는 김씨를 보며 석태는 절망을 느꼈다. 김씨는 손에 든 몽둥이로 자기 오른쪽 다리를 가볍게 툭툭 치면서 여자의 아랫도리에 흘끔흘끔 곁눈질을 보냈다. 언제 뒤따라 나왔는지 가까운 곳에 숨어서 여자의 말을 엿들은 눈치였다.

"오선생, 염려 말고 들어가시오. 뒷일은 내가 다 처리할 테니까."

그토록 완강이 화해를 거부하던 김씨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 번들번들 빛나며 목마른 협상을 청해오고 있었다. 석태는 김씨의 웃는 얼굴을 겨냥하고 힘껏 주먹을 날렸다.

"여자를 데리고 와. 오다가 딴 생각 먹으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

땅바닥에 벌렁 나자빠진 김씨한테 으름장을 놓은 다음 뒤도 안 돌아보고 숙직실로 돌아왔다.

관할 파출소에 전화를 걸어 대충 사건을 설명했다. 손이 모자라니까 자기네 대신 학교에서 사람을 시켜 연행해오라는 전갈이 왔다. 석태는 아주 잽싸게 사무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했다.

"김씨, 저 아래 파출소까지 데려다주고 와야겠어."

김씨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여자의 한쪽 팔을 끼려 했다. 그러자 여지껏 길든 짐승처럼 양순하던 여자의 눈이 표독스럽게 변하면서 김씨의 손을 홱 뿌리쳐버렸다.

"놔라, ! 이 개 같은 놈들아! 내 발로 얼마든지 걸어갈 테니 그 더러운 손 다치지 마라, 이놈들아!"

어디서 그런 악발이 솟는지 놀라우리만큼 당당한 기세로 앞장서 걷는 여자의 뒤를 잠시 멍해서 서 있던 김씨가 허둥지둥 병신스런 걸음걸이로 따라나섰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언덕길로 내려가는 그들의 모습이 교무실 유리창에 비쳤다.

새벽의 고요를 가르는 초침 소리가 째깍째깍 울렸다. 몇 시간 후면 자신의 한시에서 네시 사이의 근무 태만을 명백히 입증할 타임 레코더란 이름의 괴물이 탁자 위에서 숨쉬는 소리였다. 순간, 석태는 그걸 번쩍 들어 시멘트벽에다 태질을 치고 말았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유리가 깨지고 시계 바늘과 나사못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사장을 대리한 고성능의 감시자요 충직한 하수인으로 대단하게 알았던 그 괴물을 단 일격에 박살낸 것이 하도 신통해서 그는 거의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뜨리자 아직은 공해에 오염되지 않은 신선한 공기와 함께 만월에 가까운 하얀 새벽달이 쏟아져 들어왔다. 너무도 피곤해서 나머지 시간 잠이나 더 자두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꾸는 꿈속에서 달은 한 닢의 백통전 같은 모습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누가 알랴, 계수나무 옥토끼 대신 혹시 '50' '한국은행'이란 글자들이 위아래로 나란히 양각되어 있을지---그런 공상이 대고 우습게 느껴져 말석 국어교사 오석태는 미친놈처럼 혼자서 웃고 또 웃었다.

 

(文學思想, 19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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