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색, 그곳에 가도 없는 무늬 -이승우
별거 삼 개월만에, 강릉으로 내려가 있는 아내를 다시 부른 건 순전히 그 눈에 구멍 뚫린
은빛 고기떼들처럼 내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던 열쇠뭉치 때문이었다.
입주 준비를 끝낸 새 아파트의 잔대금을 치를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쪽에서 먼저 아내를
부르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부를 생각이 아니라 그땐 아예 아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니 서른일곱에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대며 내 이름으로 처음 마련하는 아파트에 대해 어떤 뿌듯함 같은 것을 느꼈던 것도 아니었다. 샷시라든가 오토폰과 같은 부대 시설 비용과 등기 비용까지 포함해 이게 들어갈 돈의 마지막이지, 하면서도 나는 그것이 내 집이라거나 앞으로 내가 들어가 살게 될 집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지난 봄, 잔대금을 제외한 마지막 중도금을 낼 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내와 함께 나란히 자동차를 타고 신사동으로 가 우리가 살게 될 집을 둘러보고 나왔었다. 그때 아파트는 내부공사를 막 시작하고 있었다. 아내는 바깥 공사가 끝나는 5월쯤에 다시 와 보자고 했었다. 그러다 거기 다녀온 다음, 꼭 무엇 때문이다 하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집안 분위기가 이상한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고, 한지붕 아래에서 '적과의 동침' 과도 같은 냉전 단계를 거치면서, 이러다 예정된 수순처럼 끝내 우리가 별거를 하게 된다면, 어차피 아내에게도 살 집이 필요할 것이고 그러면 그것을 아내에게 주어야겠다고 생각해 왔던 터였다.
그냥 말로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배정 받을 아파트의 동과 호수를 추첨하던 날에도 나는 내가 들어가 살 아파트라거나 가족과 함께 들어가 살 아파트를 추첨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아이가 들어가 살 아파트를 추첨하러 가는 기분으로 현장에 갔었다. 일반 분양이라면 분양과 동시에 분양 받는 아파트의 동 호수까지 정해지지만 조합 아파트라 마지막 중도금을 내고도 석 달 후에야 동 호수 추첨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이미 별거를 하고 있었고, 은행알 추첨에서 내가 뽑은 것은 19층 아파트의 12층이었다.
사람들은 로얄층 중에서도 로얄층을 뽑았다고 했다. 그것도 그냥 로얄층이 아니라 추첨 전, 그 시간 수고를 배려해 추첨을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동 호수를 지목해 들어가는 조합 총무가 제일 좋은 곳이라고 찍은 게 같은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는 옆 호였을 만큼 가장 위치 좋고 가장 전망 좋은 동의 로얄층이었다. 내가 살 집이라고 생각했다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만큼 나도 내 행운을 기꺼워하듯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뽑았으면 했던 건 3층이거나 4층, 높아야 5층이었다. 아이야 기분만으로도 당연히 높은 층을 좋아하겠지만 아직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도록 내버려두기엔 마음이 놓이지 않는 여섯 살이었고, 아내 역시 그전부터 너무 높은 층은 방안에 않아서도 그곳이 높은 층이라는 생각만 해도 까닭 없이 불안해지고 베란다에 나가 바깥이라도 내다 볼라치면 어질어질 현기증이 인다고 말했다.
전에 함께 아파트를 둘러보러 왔을 때에도 아내는 당신은 높은 층이 좋겠지요? 난 지금 살고 있는 데처럼 3층이면 딱 좋겠는데, 했었다. 그때 나는 아래를 뽑으면 다행이지만 높은 데를 뽑으면 바꾸지 뭐, 다들 낮은 데보단 높은 데를 좋아하니까, 했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7동 1204호라고 쓰여진 은행알을 들고도 까닭 없이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그것이 내가 살 집이 아니라 아내에게 줄 집이라고 생각했던 때문이었다. 또 그것을 추첨 하던 날, 진작부터 입주일이 나왔는데도 먼저 살던 월계동의 전세 아파트를 내놓지 않고 있었던 것도 아내와 다시 합치거나 내가 새 아파트로 들어갈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그간의 사정이야 어떻든 먼저 별거를 시작해 집을 나온 건 나였다. 월계동에서 사무실이 있는 마포 부근 신수동에 하숙을 정해 나온 것인데, 그때 나는 어느 계간 문예지로부터 반 년도 전에 청탁 받은 전적 전재 장편소설을 마감이 석 달 안으로 다가오도록 아직 한 줄도 시작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당장에 필요한 몇 박스의 책과 내 방에 걸려 있던 몇 가지의 옷, 오래전부터 쓰던 워드프로세서만 자동차에 싣고 집을 나왔다. 집에선, 아니 그런 분위기에선
도저히 작업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때, 집을 나올 때에도 생각했지만, 아직 전업할 처지가 못돼 직장을 다니며 틈틈히 원고를 쓰고, 원고를 보내고, 나가서 술을 마시고, 취한 채로 들어와 자고, 그러면서도 이튿날이면 쓰린 속을 쥐고도 어김없이 직장을 나가야 하고.....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권태였을까,
그런 일상의 일들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으며, 이유 없이,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단지 귀찮고 무미건조하다는 것만으로 내 쪽에서 그러자고 의도한 것도 아닌데 먼저 말수를 줄였고, 그런 나를 아내가 까닭 없이 조심스러워하기 시작했고, 나는 저 여자 왜 저래, 하고 내 스스로도 느끼고 아내도 느낄 만큼 더욱 말을 하지 않았고, 아내도 저 남자 왜 저러지, 하고 말을 하지 않았고, 그러다 밖에서 놀다가 머리가 찢겨 들어온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온 다음 애 간수도 제대로 못하는 여자가 뭘 잘했다고(내가), 당신이 그러니 애가 밖으로만 돌잖아요(아내가), 하고 다시 들 안 볼 사람처럼 대판 싸움을 하고, 냉전의 자연스러운 단계로 귀가 시간을 늦추는 것만큼 주량이 늘고, 내 방에 옷을 걸기 시작했으며, 갈아입을 속옷이며 양말이 이쪽 방문 앞 화분대 위에 화분이 치워진 자리에 놓이기 시작했으며, 서로 꼭 해야 할 말이 있으면 건너기 싫은 다리처럼 아이를 가운데 놓고 누구야 아빠보고, 누구야 엄마보고, 하는 식의 의사전달을 했으며, 그러면서도 한 지붕 아래에서 한솥밥을 먹으면서 때로는 사무실이 아닌 집으로 청탁 오는 원고의 메모를 받아 화분대 위에 놓아 전하기도 하고, 어머니라든가 다른 가족들의 전화가 오면 여기 아무 일 없다는 듯 통화하고 나서 얼굴을 돌린 채 팔만 내밀어 직접 전화기를 건네주기도 하면서 그것이 한 달은 넘게 냉전처럼 시간을 끌고, 어느 쪽에서든 먼저 쉽게 입을 열 수 없는 분위기가 되어버리고, 그러다 이제는 사람보다 그 분위기가 오히려 못 견딜 것처럼 숨막히게 느껴지게 되고, 예전에 청탁 받은 장편소설의 마감이 이제부터라도 죽을 둥 살 둥 매달려도 끝낼지 말지 한 석 달 앞으로 다가오고, 쓰자, 쓰자 하면서도 다시 일주일을 더 그렇게 무겁고 답답한 분위기 속에 소설의 첫줄도 시작 못한 상태에서 사무실 사람들에게까지 사람이 이장해진 것 같다는 소리를 듣다가, 이쯤 되면 서로 그런 말 나오는 게 당연한 순서가 아니겠냐는 심정으로 나 좀 나가 있어야겠다는 예기를 아내에게 하고, 그때쯤 내가 따로 보는 여자가 있어 그러는게 아닌가 아내가 의심을 갖기 시작하고,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면서도 거기에 대해 나는 별다른 변명을 하지 않았고, 왜 그러는지 이율 말해봐요 이율(아내가), 이윤 무슨 이유(내가), 내가 그렇게 싫나요(아내가), 싫고 좋고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이런 상태라면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얘기지(내가), 그러자 무슨 자존심인지 그러고 싶으면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남의 얘기하듯 아내가 말하고, 사무실에서 가까운 신수동에 해방감이거나 탈출과는 거리가 멀게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벗어나지 못할 무덤자리라도 구하러 다니는 기분으로, 그러면서, 오래 가기야 하겠어,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하숙을 구하려 다니고, 그리고 아내가 내다보지도 않는 상태에서 아직도 이마에 그때의 흉터를 가지고 있는 아이의 말대로 아빠 혼자 이사를 했던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내는 집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가까이 언제고 들어갈 친정이 있긴 했지만 그렇게 집을 지키는 일은 너무도 당연해 그런 생각조차 않고 있었다. 아내는 내가 집을 나오고도 한 달을 더 아이와 함께 월계동에 있었다. 그리고 가끔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대놓고 그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거기 나가 있는 데를 정리하고 들어오라는 사인을 보내곤 했다. 어디서 원고 청탁이 왔더란 얘기를 했고, 고료가 들어왔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얘기를 했고, 주차 위반 딱지가 나왔더라는 얘기를 했고, 엄마(친정)가 빨래는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란다는 얘기를 했고, 여전히 내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아이가 아빠를 찾으며 전화를 걸어보라고 떼를 쓴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때에도 나는 집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내가 비운 집을 아내마저 비울거라곤 더더욱 생각하지 않았다. 가끔 친정에 가 전화를 걸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저가 앉은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마지막 통보처럼 전화를 걸어 친정이 아닌 강릉 본가로 아이와 함께
내려가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어머니께서, 그러면 내려와 있으라고 하시니까..... 애한테도 그게 덜 상처를 주는 건지도 모르겠구요..... 그러다 아내는 잠시 후 다시 전화를 걸어 조금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지금 터미널로 나가는데..... 아파트 키..... 경비실에 맡겨놓을게요..... 당신이 여기 들어와 있거나..... 그냥..... 거기 있을거면..... 키라도 찾아가라고요...... 들었어요..... 내 말..... 그럼, 그만 끊을께요, 이제...... 하다가, 당신이..... 끊으세요..... 난..... 난...... 먼저 못..... 끊겠어요,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게 두 달 전의 일이었다.
전화를 받고 나는 아내가 아니라 어머니에게 호되게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일이 거기까지 발전하기 전에도 어머니는 여러 차례 나에게 전화를 해, 니, 에미말고 따로 '보는 여자'가 있어서 그러는게 아니냐고 물었다. 내가 완강하게 아니라고 하면 그때엔 아들의 말을 믿다가 도 다음 번 전화를 할 때엔 또 어김없이 보는 여자를 들고 나왔다. 어머니는 한번도 그러면 에미한테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러는 거냐곤 묻지 않았다. 살을 섞고 살던 부부가 한 지붕 아래에서 따로 방을 쓴다, 그러다 남자가 방을 얻어 집을 나간다. 그러면 그건 남자에게 보는 여자가 있기 때문이다, 아들보다 며느리의 행실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 문제에 대해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확고한 공식이었다.
내가 집을 나오기 전, 자존심 때문에 직접 말을 못 담아 그렇지 아내마저도 내게 보는 여자가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닐까 의심을 갖기 시작했던 것도 이틀이 멀다하고 전화를 해 눈여게 잘 살피봐라, 니 모리게 시애(시앗)를 보고 다니는지, 하는 어머니의 생각이 심어진 때문일 것이었다. 어머니의 생각으로는 보는 여자가 있거나 봤으면 하는 여자가 있지 않고서는 남자가 따로 방을 얻어 나갈 이유가 없었다. 함께 있으면 불편해 할 며느리를 굳이 강릉으로 불러내려 당신 그늘 아래에 두게 하는 것도 그렇게 방을 얻어 나간 아들에선 물론 행여 아들이 보고 있거나 보게 될지 모를 여자에 대해서도 그 자리가 '보는' 것만으로 아무나 데리고 들어와 앉히거나 들어와 앉을 자리가 아니라는 걸 확실히 해 두겠다는 선언적 의미였는지도 몰랐다.
무섭구나, 어머니는, 그리고 당신의 경험은.....
그때, 아내의 전화를 끊고 내가 떠올린 생각은 그것이었다. 어머니의 말대로 남자가 '시애
'를 보면 다른 여자들은 열이면 열 다 그러면 어디 한 번 남의 손에 새끼들을 거둬 봐라, 그래야 당신이 내라는 사람 귀한 줄 알지, 하는 식으로 시위하듯 먼저 짐을 싸 집을 나가거나, 아니면 남자가 데리고 들어온 시애의 머리 끄댕이를 잡고 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동네 우세를 떨어 손 써볼 사이도 없이 남자도 질리고 시애도 질리게 하거나, 아직 그럴 단계가 아니라면 남자 모르게 시애를 찾아가 비슷한 북새를 떨어 제풀에 물러나게 하는 게 그런 일에 대한 공식과도 같은 대응이었다. 텔레비전에서도 그랬고, 책에서도 그랬고, 살아오며 내가 봐왔던 것으로도 그랬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처분만 기다리겠다는 식으로 벙어리 냉가슴 앓듯 했던 것도 아니었다.
지난봄, 아파트의 마지막 중도금을 내고 나서 우리가 살 집을 둘러보러 아이까지 데리고 신사동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길 자동차 안에서 나는 어떤 아련한 추억 속으로 젖어드는 기분으로 아내에게 '수호 엄마' 이야기를 했었다. 갑자기 어머니라든가 그 엄마 생각이 나서가
아니라 이야기의 시작은 단지, 그래, 단지 아파트가 있는 신사동(은평구)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월계동쪽으로 나오는 길의 반대쪽 길이 수색으로 나가는 길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이게 수색 가는 길이구나. 이게..... 반대쪽으로 죽 가면 말이지......"
아파트 앞에서 자동차의 시동을 걸고 통일로 쪽으로 나와 우회전을 해 더 이상 그 길의 반대쪽이 '이게 수색으로 가는 길'이 아니게 될 때까지 불과 5분도 채 안 되는 거리를 달려오는 동안 나는 내 마음속에 '수색' 이라는 말이 주는 그것의 물빛 무늬와도 같은 가벼운 흥분으로 그 말을 대 여섯 번도 더 했다. 이게 수색 가는 길이구나, 이게.....이게 말이지..... 아내는 수색은 왜요, 수색에 누가 있어요, 하고 물었고 나는 아니 그냥. 누가 있을 것 같아서, 하다가 '수호 엄마'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수색에 내 어머니가 아니라 '수호 엄마'가 있다고, 지금도 그곳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내 마음속의 수색엔 그 엄마에 대한 애틋한 기억들이 바람에 일렁이는 물빛 같은 무늬를 이루고 있다고.....
그러자 아내는 수호는 당신 이름이쟎아요, 그럼 당신, 강릉 어머니가 낳으신 아들 아니에요, 하고 물었다.
아니긴, 그런데 이야길 하자면 복잡하다, 자세하게는 모르고 의식의 어떤 비늘처럼 어릴 때의 언뜻언뜻 떠오르는 기억으로 날 낳은 어머니가 아닌데도 집안 사람 누구한테나 '수호 엄마'라고 불리던 여자가 있었다. 그래서 어릴 때 나는 그 엄마가 정말 날 낳은 엄만 줄 알았다, 아버지가 강릉 시내에 나가 큰 상회를 했는데 어머니 몰래 시애를 보았던 거다, 그런데 그 엄마는 우리 집에 들어올 때까지도 자기가 시앤 줄 몰랐다, 나중에 어머니한테 들은 얘긴데 아버지가 그 엄마에게 혼자 산다고 거짓말을 한 거였다. 그때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엔 이미 오 남매의 자식이 있었다, 그 엄마도 아버지가 데리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낌새를 알고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집을 찾아가 데리고 들어왔다, 처음 찾아갔던 날 은 그 엄마가 마당가에 얌전하게 앉아 빨래를 하는 게 도저히 남의 시애처럼 보이지 않아 그냥 돌아왔고 둘쨋날 다시 마음 다져먹고 찾아가 사실 얘기를 하고 데려왔다던가, 그때 나는 상인이(아이)만 했는데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떻게 들어오고 또 들어올 때 어떤 일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집안 식구들 모두 그 엄마를 수호 엄마라고 불렀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그렇게 부르고 아버지 어머니도 그렇게 불렀다, 그러니 나도 당연히 그 엄마가 내 엄만 줄 알았던 거다, 잠도 그 엄마하고 잤다, 나중에 학교에 입학해서도 그 엄마가 늘 데려다줬다,
학부형회의 때에도 그랬다.
지금도 이해가 안 가는 게 속으로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내 기억으로 두 분은 한 번도 싸우거나 큰 소리를 낸 적이 없다, 지금도 어머니는 당신도 잘 했지만 수호 엄마도 잘 했다고 말한다, 형들도 그 엄마를 미워했던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 갔다오니 엄마가 없어졌다. 내 기억으로 아마 1학년 2학기 때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어머니한테 우리 엄마 어디 갔어요, 하고 물으니 어머니 역시 많이 섭섭하고 허전해 하는 얼굴로 느 에미 서울에 니 옷 사로 갔다, 대답해 비로소 그 엄마가 날 두고 떠난 걸 알았다고 아내에게 이야기를 했던 것이었다.
이야기를 하는 중간 아내는 중요한(?) 질문으로 그럼 그때 아버님은 주무실 때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 나이에 나한테 그게 중요한 일이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어머니는 그 일도 현명하게 처리했을 거라고 말했다.
아내는 다시 두 분 사이가 그렇게 좋았다면서 '수호 엄마'라는 분이 왜 가셨는냐고 물었다. 나는 당신 같으면 철든 다음 그 얘길 어머니에게 다시 물을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다만 지금 내 생각으로 그 엄마가 아버지에게서나 집안에서나 스스로 있어야 할 자리를 못 찾아 떠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시애를 싸안은 어머니의 품이 너무 넓으니까.....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식었다기보다는 어머니한테 대항할 힘이 없다고 느낀 것인지도 모르고, 또 그것이 아니라면 어머니가 기품 있는 처신으로 그 엄마를 스스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거나..... 나로선 그때 그 엄마의 집이 수색이었다는 걸 알았던 것도 썩 훗날 어머니가 지나가는 소리처럼 수호에미는 지금 어디서 뭘하고 사는지 몰라, 우리 수호 어릴 때 품에 데리고 안고 자던 정이 있어놔 더러는 많이 보고 싶기도 할낀데..... 그때 떠난 이후로 여직 소식이 한 번 없는 걸 보면 어디 다른 데 팔자를 고치 가 지 속으로 낳은 자식 거느리고 살아 이제 나설 수 없어 그러는지도 모리겠고..... 애초 나서 살긴 서울 곁에 수색인가 어딘가 살았다는기..... 할 때 들은 이야기로였다.
나는 언젠가 시간이 되면 서울로 올라와 아직 한 번 가보지 못한 수색에 가보고 싶다고 했고, 아내도 자기도 그러니 왠지 꼭 한 번 그곳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다음번 5월 올 때요, 그때면 내부공사도 많이 됐을텐데.
그날 신사동에서 월계동으로 돌아오며 아내와 나의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내 마음속에 물빛 무늬처럼 간직되어 있는 그 엄마에 대한 애틋한 기억들과 시애에 대한 어머니의 슬기롭고도 기품 있는 처신을 이야기하며 우리의 5월 수색행을 약속했던 것이었다.
그러다 그 수색행이 이루어지기 전 내가 먼저 짐을 싸들고 집을 나왔고 아내 역시 그런 일의 처리에 대한 어머니의 경험과도 같은 가르침에 따라 그 그늘 아래로 행여 내가 보고 있거나 보게 될지 모를 여자에게 내줄 수 없는 자기 자리를 찾아 들어가버린 것이었다. 경비실이라고는 하지만 아내가 남의 손에 맡긴 아파트의 열쇠는 일주일 후에 찾아왔다.
"많아요. 키가..... 상인이 아버지, 어디 출장 다녀왔어요? 요줌 도통 안보이는 것 같던데."
서랍에서 한 주먹도 넘는 열쇠뭉치를 꺼내주며 나이든 경비원이 말했다, 열쇠는 그것들을 고리에 묶어두지 않으면 한 주먹에 다 쥐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34평 아파트에 웬 키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 다이아몬드 꼴의 가죽장식을 단 아내의 열쇠고리엔 현관 열쇠와 현관 보조 열쇠, 안방 열쇠, 여분으로 맡겨둔 내 자동차 열쇠, 아이의 자전거 열쇠가 매랄려 있었고, 호텔 객실의 열쇠고리와 같이 생긴 투명하고 길다란 플라스틱 막대에 '삼익아파트 107동 305'라고 쓴, 그러나 그것보단 얇고 넓은 예비 열쇠고리엔 그 막대 밑부분에 촘촘이 뚫은 작은 구멍마다에 50원짜리 동전 크기만한 또 하나씩의 열쇠고리를 끼워 왼쪽으로부터 차례로 현관, 현관 보조, 안방, 건너방, 작은방, 보일러실 열쇠가 어느 고리엔 하나씩 어느 고리엔 두 개거나 세 개씩 매달려 있었고, 제일 오른쪽 고리엔 다른 열쇠보다 삐죽 나온 내 자동차 열쇠가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아파트 열쇠의 전부인 것은 아니었다.
내 주머니에 있는 열쇠고리에도 사무실 열쇠와 사무실 보조 열쇠, 사무실 책상 열쇠, 자동차 열쇠말고도 아파트 현관 열쇠 고리엔 안방의 장롱과 옷장, 서랍장 열쇠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집 나간 아내에 대한 짜증처럼 거칠게 자동차 조수석 앞 서랍을 열고 그 속에 던져 넣었다. 그래, 갈 테면 어디 가 봐라. 강릉이 아니라 강릉보다 더한 데가
있다 해도 내가 눈하나 깜짝할 줄 아느냐는 어떤 오기 같은 것이 치밀어오르기도 했다. 나한테도 열쇠가 있는데 굳이 이렇게 예비 열쇠고리뿐 아니라 자기가 쓰던 열쇠까지 맡기고 가는 건 그러니 얼른 하숙을 정리하고 들어와 있으라는 사인일 것이다. 그런다고 내가 니 뜻대로 들어올 줄 아느냐는 심정으로, 처음 올 땐 집안이라도 한 번 둘러보고 가려던 마음을 바꾸어 몇가지 우편물만 집어들고 그냥 그대로 하숙으로 돌아와버린 것이엇다. 그리고 이내 나는 그날 월계동으로 가 받은 열쇠들을 자동차 조수석 서랍에 넣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물론 강릉에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 아내도 전에 서울에 있을 때와는 달리 강릉으로 내려가선 사무실로거나 하숙으로 전화를 하지 않았다. 아내 혼자 생각에서라면 그간 몇 번도 더했을 전화였다. 그래선 니가 진다, 전화하지 마라, 옆에서 어머니가 흔들리는 아내의 마음을
다잡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 일 때문에 전화를 하고 사무실 앞으로 찾아왔던 건 서울에 사는 작은 형이었다.
"나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어디 사는지 가 보자."
형은 그냥 밖에서 저녁이나 하자는 내 청을 끊고 신수동 하숙으로 가 보자고 했다. 아마 엄니가 형님에게 일렀을 것이다. 니가 한 번 가 봐라, 말로는 그래서 그러는 게 아니라지만 곁에 보는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 그날 형과 많은 술을 마셨다. 하숙으로 들어올 때 사 온 술이 바닥나 다시 내가 슈퍼로 나가 맥주 네 병을 더 사왔다.
"그게 권태라는 거다, 이제 조금 있으면 아파트도 마련되겠다, 애도 잘 크고 생활의 여유도 좀 생겼겠다, 그러니 지난 시절의 나는 뭔가 하는 생각도 들고 또 이렇게 사는 게 잘 살고 의미 있게 사는 건가 하는 회의도 오게 되는 거고..... 나도 니 형수하고 그렇지만 부부 사이라는 게 원래 그래. 처음에는 이럴 마음으로 그랬던 게 아니라지만 조금씩 서로 마음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다보면 점점 그 일에 어떤 오기 같은 것도 생기는 거고 그러다 나중엔 사람보다 그런 분위기가 더 못 견디게 싫어지고 거기서 벗어나는 것만이 애초 그런 분위기로 몰고 간 목적처럼 되어버리는 식으로 말이자. 내가 보기에 니가 나와 있는 것도 그래"
"모르겠어요, 상인이 엄마가 강릉 간다니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어머니 참
무서우신 분이구나...... 그리고 수호 엄마 생각도 나고요 그 사람 강릉 간다니까....."
"그 일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다면 무섭기보다는 무서울 만큼 슬기롭고 현명한 쪽이겠지."
"전엔 나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무섭다는 생각만 들어요,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때 수호 엄마 문제를 놓고나 지금 우리 문제를 놓고나, 전에 상인이 엄마하고도 짓고 있는 아파트에 갔다오다 그 얘기를 했는데, 왜 집안 식구 다들 그 엄마를 수호 엄마라고 불렀는지 모르겠어요."
"니는 왜 그랬다고 생각하는데?"
"중학교 땐가 언젠가 아직 다 크지 않았을 때 어머니한테 한 번 그 일을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때 어머니 말로는 니가 그 엄마를 많이 따르니까 그랬다는데, 암만 그래도 그렇지 이해가 잘 안 가요."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모르고 있었구나 너는....."
"뭘요."
"생각해봐라, 그 여자가 들어올 때....."
그 여자? 그 엄마거나 작은 엄마가 아니고 말이지. 나는 낯선 눈빛으로 형의 말머리를 잘랐다.
"여자라고 말하지 말아요, 나한테 그 말 익숙하지 않으니까....."
"그, 그래. 그 엄마가 들어올 때 큰 형님은 중학교 1학년이었고 나는 국민학교 4학년, 니는 여섯 살쯤 됐을 거고, 정혜는 네 살, 은호는 아직 젖먹이였어. 형님과 나는 그 엄마의 아들을 하기엔 너무 컸고, 정혜는 여자고, 은호는 아직 어머니가 데리고 있어야 하고, 그러니까 나이로나 뭐로나 그 엄마의 아들할 사람으로 니가 제일 적당했던 거지."
"내 얘기는 굳이 그렇게 누구 엄마라고 정할 이유가 뭐냐는 거지요. 다른 집들이라고 새엄마가 들어왔다 해서 그 여자한테(이럴 땐 나도 여자다) 먼저 있던 아들 중에 누구 엄마 하라고 안 그러잖아요? 안 봤지만 그것도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가 그렇게 하라고 했겠지요?"
"너는 어머니가 너도 당신 속으로 낳은 자식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는지 모르겠냐?"
"모르겠어요. 시애를 싸안기 위해 너도 한 식구다, 하는 마음으로 그랬다면 그건 진심에서
우러나온 친절이거나 배려가 아니라 그런 포옹력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자기 극복과도 같은 무서움이었겠지요."
"그래, 그걸 자기 극복이랄 수도 있겠지만, 그 엄마한테 당신이 낳은 자식 하나를 그렇게 정해 준 어머니의 속뜻은 그보다 깊고 슬기로웠던 거였지."
"무슨 뜻인데요?"
"널 자식으로 생각하고 아이를 낳지 말라는 말을 그렇게 한 거니까."
그 말을 하며 형은 내 얼굴을 피해 맥주잔을 기울였다.
"그래서 무섭다는 거예요, 어머니는....."
나도 맥주잔을 기울였다.
형은 이야기를 바꾸어 아파트가 언제면 다 완공해 입주할 수 있을 것 같더냐고 물었고, 나는 얼마 안 있으면 완공될 것 같은데 그냥 우리가 이대로 살게 되면 그걸 아내에게 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위자료니 뭐니 하는 그런 생각으로가 아니라 우리의 별거가 아무래도 길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그렇게 전한 것이었다.
그러다 나는 다시 형에게 전에 아내가 내게 물었었던 말을 물어보았다. 그때 아버지는 주무실 때 어떻게 하셨느냐고. 그러나 아내가 묻더란 얘기는 하지 않았다.
"알아요, 나도. 자식으로서 이런 거 묻는 게 여간 불경스러운 생각이 아니라는 거. 알지만, 그것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묻는 거예요. 그때 나는 어려서, 늘 엄마 방에서 자면서도 모를 수 있지만 형님은 나보다 컸으니까 눈치로도 짐작하는 게 있을 거구....."
"그것도 어머니가 알아서 하셨어."
"물론 현명하고 슬기롭게 말이죠?"
"다른 건 몰라도 나는 니가 왜 그걸 기억 못하는지 모르겠다. 저녁밥을 먹고 나면 어머니가 니한테 그랬거든. 수호야 닌 오늘 형들 방에서 자거라 하고, 그럼 그 엄마는 놔두세요, 제가 데리고 자지요, 하고. 넌 늘 그 엄마 방에서 잤던 것 같다고 하는 데, 그 방에서 잔 것
보다 우리 방에서 잔 게 더 많아. 그런 날은 아버지가 그 방에 가 주무셨고. 그럼 넌 엄마 방에서 잘 거라고 징징거리며 떼를 쓰고. 나중에 짐작이지만 그러니 그런 널 보는 어머니 마음도 편하지 않으셨을테고..... 돌아보면 완전히 이조 때 얘기지 뭐. 처신은 그렇게 하셨어도 당신한텐 하루하루가 아픈 경험이었을테고....."
"그럼 그 상대인 수호 엄마는요? 아니, 내 엄마는요?"
"....."
이번엔 형이 낯선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루하루가 장미의 나날이었나요?"
"취했구나 많이....."
"아니, 취하지 않았어요, 아마 하루하루가 지혜롭고 슬기로운 처신에 질식할 것 같은 나날이었겠지요."
"그래도 그 분 떠나실 땐 그렇게 떠나지 않았어."
"몰라요, 난 그것도. 어느 날 학교에 갔다 오니까 아침까지만 해도 달려 있던 앞니를 뺐을
때 느껴지는 꼭 그런 허전함으로 엄마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어머니는 한 손으로는 붙잡고 한 손으로는 등을 밀고했을 테고요."
"그땐 나도 어렸어. 내가 결혼할 때 어머니가 그때 그 분 떠나던 때의 얘기를 하시더라. 들어올 때에도 아버지 모르게 왔지만 갈 때에도 아버지는 다시 안 돌아올 거라는 것도 모르
게 떠났다고....."
"그럼요. 기품 있는 분만 알면 되는 일이니까."
"취해도 그렇게 말하지 마라. 깨어나면 후회해.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가 하고."
"후회는 안 해요, 나는. 큰형님이나 형님한테는 그런 얘기를 해도 나 한텐 한 번도 그 엄
마 떠나던 때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그래, 차마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지, 너한테는."
"어린 시절 나도 그 일의 직접적인 당사자였으니까, 내가 따라서 그 엄마 아들을 하라고 한 게 아니라 어머니의 목적 다른 계산으로 그 엄마 아들을 하라고 했고, 그런데 그 아들은 진짜 모자처럼 정들어버렸고....."
"넌 어머니가 등을 밀었다지만, 그래, 마음속으론 그런 일에 등을 안밀 사람이 없겠지. 처음엔 그분이 떠나기는 하는데 아무도 그게 떠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게 혼자 떠날 생각을 했던 모양이야. 며칠 전부터 서울 집에 있는 옷들을 가져와야겠다고 하더래. 아버지한테도 형님한테 그렇게 얘기해 허락을 받아달라고 하고, 그래서 어머니가 짐작을 하고 아버지 몰래 물으셨대. 필요하면 여기서 해 입으면 되지 자네 꼭 서울에 가서 짐을 가져와야겠느냐고. 그랬더니 그 분이 이제 떠날 때가 되어서 그런다고, 아버지가 싫어진 것도 아니고 수호 니가 싫어진 것도 아니고 형님의 인품을 감당할 수 없어 떠나야겠다고. 니는 그걸 어머니가 등을 밀었던 거라 하지만, 내가 아는 걸로는 그게 아니야. 그때 어머니가 그 얘기를 하실 때, 그보다 몇 달 앞서서도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시더라. 그땐 꼭 서울에 가서 옷을 가져와야겠는가 하시니, 그럼 다음에 가지러 가겠다고 했고. 그러니 아버지는 그런 눈치도 모르고 옷 가지러 가겠다는 사람 옷도 못 가지러 가게 한다고 어머니에게 화를 내시고....."
"그럼 처음엔 붙잡았는데 두 번 째엔 왜 안 붙잡으셨대요?"
"니가 그 엄마에 대해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는 것만큼 나도 그 분에 대해 좋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기품과 교양은 어머니에게만 있었던 게 아니라 그 분도 그 이상의 지혜와 교양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고..... 붙잡으니까 그 분이 그러시더래. 형님이 그러시면 나는 여길 떠나기 위해서라도 수호 동생을 가질 마음을 갖게 될 거라고, 그러면 오히려 지금 보다 쉽게 떠나갈 것 같다고..... 이해하겠냐. 너? 아이가 있으면 오히려 쉽게 떠나질 것 같다는
말..... 빈 마음으로 떠나는 것보다는 정붙이 하나를 데리고 떠나는 게 덜 쓸쓸할 테니까....."
"이해해요...... 두 분 다....."
"떠나려면 몰래 떠나는 방법도 있었겠지. 그렇지만 그렇게 떠나는 건 어머니한테도 그 분한테도 맞지 않았던 거야. 서로에게보다 스스로에게 용납할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르고."
"그래도 어머니는 무서워요. 그 엄마로선 당연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부분도 있었을
테고요."
"그건 어머니도 마찬가지야. 똑 같은 무게로 상처를 받고 있었을 테니까. 아버지가 시내 차부까지 나가 바래다줬다러라. 옷 가지러 가는 줄 알고..... 마지막 보는 거라고 어머니가 아버지를 보내셨던 거지. 니 생각에 다른 사람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 같냐? 중간에 그 분 마음이 바뀌거나 이니면 아버지가 눈치를 채고 도로 데리고 들어올지도 모르는 일인데."
"어머니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어머니 아니냐구요?"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그 분한테서 편지가 왔어. 겉봉엔 아버지 이름을 썼지만, 내용은 형님 보세요, 하고. 나도 봤다, 그건..... 수호 니 얘기를 많이 했던 것 같고..... 어머니는 지금도 그걸 가슴에 담고 계셔. 언젠가 우리 수호 성공하면 찾아올 거라고 했다고..... 지금도 어머니가 가끔 그런 말씀하는 거 너도 들어 알 거야. 우리 수호 글 잘해 신문엘 나고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하니 얼굴 보면 품에 안고 자던 옛정으로 금방 알아볼 거라고......"
"나보다 형님이 좋은 추억 많이 가지고 있네요. 나는 왠지 아프고 쓸쓸한 추억들만 가지고 있는데."
"쓸쓸할게 어딨냐, 이제 와서, 다 어릴 때 일인데."
"아뇨, 형님은 몰라요. 아버지에 대해선 몰라도 어머니에 대해선 내가 평생을 두고도 갚지 못할 마음속으로 빚처럼 담아온 서자 의식(庶子意識)을....."
나는 서서히 오르기 시작하는 취기 속에 조금은 쓸쓸하고 비감한 기분으로 남은 잔을 들어 비웠다. 한 배로 태어난 형제라도 형님은 모른다.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어제의 일보다 더 선명한 기억으로 떠오르는 그 날의 일을. 2학기가 되어선 한동안 데려다주지 않던 학교를 중간 중간 업어가며 데려다주고 나서 그 엄마가 떠났을 때, 아니 학교에서 돌아와 습관처럼 우리 엄만 어디 갔어요, 하자 어머니가 어둡고도 무거운 얼굴로 느 엄마 서울에 니 옷사러 갔다고 했을 때,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그 무엇을 깨닫듯 직감적으로 나는 그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니라 어머니가 내 엄마라는 걸 알았고, 그러면서도 눈물을 쏙 뺄 만큼 한꺼번에 여러 마음으로 밀려오는 그 빈자리의 허전함 속에 어린 마음에도 나는 그 동안 그 엄마 아들 노롯을 해 온 것에 대해 진짜 내 엄마인 어머니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할 부끄러움과도 같은 죄스러움을 느꼈다. 그 엄마가 떠나자 모든 것이 한꺼번에 알아진 것인데 나 혼자 마음속으로는 그 엄마를 기다려도 아버지한테까지도 언제 엄마가 오느냐고 묻지 않았다. 아니, 누구에게도 그 엄마 얘길 입 밖으로 꺼내선 안 된다는 걸 머리가 아닌 어린 가슴의 상처로 안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그것은 내 마음 속 깊은 곳의 빚처럼 남아 성장할 만큼 성장해서도 어머니 앞에선 늘 어떤 의무감과도 같은 죄스러움 내지는 서자 의식을 느끼곤 했다. 형님은 모른다, 그런 내 유년시절의 감당하기 벅찼던 이별과 그 이별이 준 마음의 상처를.....
"서자 의식이라고 했나?"
"왜요?"
"취해도 그런 말 함부로 뱉는 거 아니야."
"형님들한테나 은호한테는 그렇겠지요. 어린 시절 그런 일도 없고 그런 생각을 할 이유도 없으니까. 결혼했을 때, 어머니는 나한테 그런 얘길 안 했어도 상인이 엄마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내가 의붓자식이거나 어디서 낳아온 자식이 아니냐고."
"그때의 일 때문에 널 그렇게 대하거나 생각하는 형제는 없다. 그 소리가 어머니에게도 욕이고 형제들한테도 욕이라는 걸 몰라서 그러는 것도 아닐 테고."
"그럼 금방 시집온 여자가 무얼 안다고 그런 소리를 했겠어요? 다 눈에 보이니까 그랬던 거 아니겠냐구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내 마음속의 생각이 행동으로 그렇게 나타나고 하니까."
"다시는 그런 말하지 마라. 행여라도 들으시면 섭섭해하신다."
"이 소리도 오늘 취하지 않았으면 어머니가 아니라 형님한테도 못했겠지요. 하고 싶어도 도리 때문에 못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 속의 그런 의식 때문에라도 못하는 거구요."
"그건 어머니도 마찬가지 심정일 게다. 니가 그 분에 대한 얘기를 못 묻듯 어머니도 니한테 그 분 얘기를 못하는 거고."
"모르겠어요, 나도 전에 상인이 엄마한테 그 엄마 얘기를 할 땐 나도 어머니를 좋게 얘기했어요, 기품 있고 슬기롭게 처신하셨다고. 그러다 이번에 상인이 엄마를 불러 내리는 걸 보곤 갑자기 어머니가 무서운 분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겉으로 보기엔 기품과 슬기지만 그런 기품과 슬기가 직접 가슴에 와 닿는 그 엄마한텐 그것 하나하나가 얼음과도 같은 벽들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죠."
"너도 그만 자야겠다. 나도 내일 회사 나가자면 일어서야겠고, 그리고 제수씨 일은 잘 생각해서 결정해라. 지금처럼 니 혼자 격해진 감정만으로 처리하지 말고."
형님이 간 다음 나는 취한 손길로 거칠게 워드프로세서의 뚜껑을 열곤 '아내는 강릉에 갔
다.'라고 두드리고 그 아래에 다시 '5월이 오면 함께 수색에 가자던 아내는 8월인 지금 어머니에게 가 있다' 라고 두드렸다. 형님은 어머니가 그 엄마를 두 번씩이나 붙잡은 걸 그 처지에선 베풀기 어려운 따스함으로 해석했지만, 처음부터 그 일은 인정으로 처리하거나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그 엄마가 처음 떠나려던 길을 붙잡은 건 떠나더라도 다시 오지 않을 보다 모진 마음이 준비되었을 때 떠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엄마 역시 그것을 그런 뜻으로 읽었던 것이 아닌지.
그러자 전에 그렇게 떠올리려고 애써도 떠오르지 않던 그 시절의 그림 하나가 떠올랐다. 어머니와 그 엄마가 부엌에서 약을 달이고 있었다. 어머니는 굳은 얼굴이었고 그 엄마는 조금 불안한 듯 난처해하는 얼굴이었다. 어머니는 삼베 보자기에 약을 짜 담았다.
"가지다 드리게."
"형님....."
"자넬 두고 내가 가지가면 그 양반 눈에 자네하고 나하고 시애 싸움하는 것으로밖엔 안보여."
그때 아버지는 일주일을 넘게 마작판에서 들어오지 않았다. 그 엄마가 들어오기 전에도 아버지는 자주 그랬다.
"다른 말하지 말고 노시더라도 몸 걱정하며 노시라고만 얘기하게."
엄마가 자개 쟁반에 하얀 사발을 얹어 들었다.
"수호 에미 따라가 아버지 기신 델 알리줘라. 아버지도 니가 부르고."
정미소 뒷방에 가 내가 아버지를 밖으로 불러냈다. 엄마는 약이 든 사발을 건네며 어머니가 하라고 한 말만 했다.
"철호(큰형)에미가 시키더냐?"
아버지는 사발을 든 얼굴을 찡그렸다.
"형님은 왜요, 제가 당신 여러 날 안 들어와 걱정되니..... 어서 들기나 하셔요."
"다 안다. 한두 해 산 것도 아니고."
아버지는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퀭한 얼굴로, 그러나 내 눈엔 싫은 걸 억지로라도 참고 용케 그것을 비우는구나 싶게 약을 비웠다. 아마 어머니보단 엄마를, 그것도 약을
비우게 하지 못했을 때의 엄마를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엄마가 주머니에서 박하 사탕을 꺼냈다.
"벌받으면서도 입에 단 거 무나. 수호나 줘."
엄마는 그걸 내 입에 까 넣어 주었다.
"밖에서 기다려라. 내 금방 들어갔다 나올 테니."
이후로 아버지는 다시 마작방에 가지 않았다. 그 엄마가 떠난 다음에도 그랬다. 그런 엄니가 지금은 나를 상대로 아내 편에 서서 옆에 있지도 않은 시애 싸움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아내는 이제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해도 수색엔 절대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두드렸다. 강릉에서 가장 먼 거리에 수색이 있었고, 수색에서 가장 먼 거리에 강릉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어느 쪽도 멀리 할 수 없는 곳에 내가 있었고, 신사동아파트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쪽에서 먼저 아내를 부를 생각이 없었다. 전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더니 자꾸만 강릉으로 간 아내가 괘씸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아파트의 잔대금을 내고, 잔대금을 낸 온라인 입금증을 들고 현장사무실로 가 전에 월계동에서 받아왔던 것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을 또 한 뭉치의 열쇠꾸러미를 받아왔다. 집도 넓지 않은데 웬 열쇠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 일일이 세어보니 스물 네 개나 되었다. 현관에서 보일러실까지 여섯 개의 고리마다 세 개씩의 열쇠가 매달려 있었고, 제일 오른쪽에 '기타' 라고 쓴 고리에 그것을 신청한 사람들에게만 주는(샤시도 그렇고 오토폰도 그렇고 조합에서 일괄 신청한) 현관 보조 열쇠가 자그마치 여섯 개나 똑 같은 것들이 징그럽게 매달려 있었다. 나는 자동차 조수석에 넣어두었던 월계동 아파트의 열쇠까지 꺼내와 거의 쉰 개나 되는 것들을 마땅히 둘 데가 없어 가끔 곤로에다 라면을 끓여먹는 냄비에 담아 책상 대용으로 쓰는 식탁(그러니 서랍이 없는 건 당연하고) 위에 올려놓았다. 처음 며칠 동안은 그걸 봐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하숙으로 놀러온 후배가 그게 뭐냐고 물었고, 나는 두 군데 아파트의 열쇤데 놔둘 데가 없어 그렇게 두고 있다고 말했다.
"이야, 그럼 이거 최소한 3억짜리 메뉴 아냐, 이건 책상이라기보단 식탁이고 그 위에 냄비가 있고....."
나는 쓸쓸하게 웃었다. 후배는 월계동 아파트도 전세 아파트가 아니라 내 이름으로 된 아파트이고, 내가 신수동으로 나와있는 것도 순전히 원고 때문인 것을 알고 있었다.
"형수님은 언제 오시는데요?"
후배는 아내가 강릉으로 가 있는 것도 내가 원고 때문에 여기로 나온 다음 갑자기 어머니가 편찮아서인 줄 알고 있었다. 하숙으로 데리고 들어오기 전에 미리 그렇게 말을 해 두었다.
"모르지 뭐. 어머니가 일어나셔야 오든말든 할테니."
"그럼 형이 다시 월계동으로 들어가 있어야겠네. 아니면 거기 짐을 신사동으로 옮겨와 들어가던가."
"쓰던 데서 원고나 마저 끝내고."
그 원고는 마감을 보름 늦추어 이제 마지막 백 매 정도의 분량만 남아 있었다. 마음을 다잡고 쓰면 사나흘 안으로도 끝을 볼 수 있을 만큼 속도감도 붙어 있었다.
"그럼 형, 몇 집 살림을 하는 거요? 월계동에도 집이 있지. 신사동에도 집이 있지, 여기도
있지. 그것만해도 세 집 살림 아니우? 아니지, 형수님 강릉에 가있으니 네 집 살림을 하는 거네 뭐."
아마 후배가 그런 말을 하고 간 다음날부터였을 것이다. 어느 정도 속도감을 붙여 놓았던
글이 도대체 거기서부터 한 줄도 써지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며칠동안, 나오지 않는 변을 보기 위해 애쓰는 사람처럼 책상에 앉아 원고를 잡고 낑낑거렸다. 얼만큼 썼다가 읽어보면 그게 아니어서 날려버리고 다시 썼다간 또 날려버리곤 했다. 꼭 월계동에서 아내와 한창 냉전을 할 때처럼 앞뒤가 콱 막혀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다 나중엔 억지 의무감으로 다시 워드프로세서를 눌러대자 한 줄 한 줄 이어지는 문장 사이의 거리가 처음 썼다가 날려버린 것보
다 더 나빠져 수색에서 강릉 사이만큼이나 멀게 뜨는 것이었다. 한 번 늦춘 마감일이 열흘앞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다음날은 신축아파트의 입주 전 하자를 신고하는 마지막 날이어서 일찍 회사에서 나온다고 해도 거기 갔다오다 보면 또 하루를 그냥 빼먹게 되어 있었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 깊은 절망감으로 책상 한쪽 구석에 놓아둔 열쇠 냄비를 바라보았다. 전에도 느끼고 있었지만 후배가 다시 그것을 상기시켜 주듯 말하고 간 세 집 살림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그것이 더한 걱정으로 다가왔다. 나중엔 원고보다 그게 더 당장의 큰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냥 새 아파트를 아내에게 주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나지, 하는 생각을 해왔던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여길 정리해 다시 월계동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릉 어머니에게 가 있는 아내가 순순히 열쇠를 받아 그곳을 들어갈 것 같진 않았고, 그렇다면 나야 여기에 계속 있으면서 아내의 태도를 관망할 수밖에 없다지만 내 집도 아닌 월계동 집은 들어가 살 것도 아니면서 언제까지고 그렇게 거기에 짐을 놔둔 채 전세로 가지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왜 그 단순한 생각을 이제야 하는지 모를 심정이었다. 나중엔 글 때문이 아니라 열쇠 냄비만 봐도 머릿속이 복잡해져 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냄비는 냄비대로 치우고 열쇠는 책을 빼낸 [서양철학사 상권] 케이스에 담아 다른 책과 함께 구석 자리에 놓아두고 다시 책상에 앉아봤지만 그러나 그러곤 거기서 요지부동이었다.
다음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에도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두 곳 아파트의 열쇠였고,
그것이 이 방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다시 머릿속이 찌근찌근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출근할 때 가방에 신사동 아파트의 열쇠를 챙겨 넣었다.
그날 오후, 나는 서울에 올라온 지 8년만에 처음 수색엘 갔다. 그것도 거기에 가자고 해서
간 게 아니라 신사동 아파트로 가다가 모래내 부근에서 길을 잘못 들어 수색까지 가게 된 것이었다. 정말 그렇게 가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언젠가 거길 가더라도 아주 편한 상태에서 아주 편한 마음으로, 그리고 그 엄마에 대한 애틋한 기억들을 바람에 일렁이는 잔잔한 물빛처럼 하나 하나 떠올리며, 자동차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몰면서 가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날 수색행은 나도 그것이 수색 가는 길인지 모르게 엉겁결에, 이미 들어가 보니 거기가 수색인 것이었다. 아마 사람들은 이야기를 해도 그날 내가 그곳에서 느낀 이게 아닌데 하는 기분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에도 여러 번 그런 경험이 있지만 길을 잘못 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느끼는 당황감 같은 것은 오히려 문젠 아니었다. 왜 하필 잘못 든 길이 수색 가는 길이었는가 하는 것과, 그런 기분과 그런 식으로 수색엘 가고 싶지 않았는데 최악의 상황에서 최악의 방법으로 수색엘 가게 된 것에 대해 나는 우선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 내 자신이, 아니 그런 실수가 벌어지는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건 단순히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도 막상 수색 안을 들어가 느낀 정말 이게 아닌데 하는 느낌에 비하면 지극히 작고도 사소한 것이었다. 아무런 준비없이, 최악의 상황에서 최악의 방법으로 들어간 길이긴 하지만 그전부터 나는 어떤 식으로 들어가든 들어가기만 하면 수색이라는 동네가 온통 물빛 무늬를 이루고 있을 줄 알았다. 최소한 내 눈에 그렇게 보일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러나 그곳엔, 내가 마음속에 아껴두며 그토록 보고자 했전 무늬가 없었다. 물빛 무늬도, 물빛도 아닌 그 어떤 무늬도..... 정말 이것은 아니었다. 아니, 아니고 싶었다. 나는 '수색'이라는 표지판마저 믿을 수 없어 그 아래에 차를 세우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곳이 수색이 맞느냐고 물어보았다. 두 번 물어도 사람들은 맞다고 했다. 나는 자동차를 되돌려 천천히, 처음 그 길을 가게 되었을 때 내가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속도대로 천천히, 수색을 나오며 그 길의 이쪽 저쪽을 살폈다.
그리고 또 다시, 이번엔 꼭 그 무늬 비슷한 거라도 봐야겠다는 심정으로 길을 따라 서울이 끝나고 수색이 끝나는 시계(市界)까지 들어갔다 나왔다. 그러나 그곳 어디에도 무늬는 없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부터 살던 월계동이거나 그 동안 몇 번 가 본 신사동 주변과 마찬가지로 그 곳은 그냥 어떤 특색도 없는 서울 외곽지역 중의 하나였다. 내가 거기에서 꼭 물빛무늬를 봐야 함에도, 아니, 찾아갔을 때 그곳은 나에게 내 마음 속에 있는 것과 똑 같은 무늬를 보여 주어야 함에도.....
아파트의 하자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수색엘 갔다가 나는 그곳에 늦게 들어가 대충 한 번 거실과 방안들만 휘휘 둘러보고 나왔다.
"하자 많지 않아요?"
밖을 나오자 같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하자가 많지요, 하는 얼굴로 물었다.
"별로 없는 것 같던데요."
"다행이네 그럼. 우린 뭐 제대로 된 게 없어요."
하며 그가 보여주는 하자 신고서엔 거의 빈칸이 보이지 않았다. 아내와 함께 온 그는 안방 욕실 수건걸이의 나사가 하나 빠졌다는 것까지 적었다. 처음부터 난 언제 들어가더라도 아내가 들어갈 집인데 큰 하자 없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둘러보았고, 그는 작은 하자라도 꼭 찾아내야겠다는 식으로 둘러본 차이일 것이다. 하긴 나는 욕실에 수건걸이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고 나왔던 것이다.
"참, 이 동 몇 호예요?"
"305호요."
"그때 로얄 층 뽑지 않았어요?"
"12층이었는데 나중에 변경 신청할 때 바꿨어요."
"이런 지금은 5백 더 들어간다 해도 나중에 팔 땐 그게 나은데. 입주는 언제 해요?"
"글쎄요....."
"전세 주실려고?"
나는 못 들은 척하고 입구에 세워둔 자동차의 문을 열었다. 그날에도 원고는 한 줄도 나가지 않았다. 나는 더 애쓰지 않고 다른 날 보다 일찍 자리에 누워 떠오르는 대로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다. 병신도, 암만 그쪽을 처음 가보는 길이어도 그렇지 거기서 우회전을 했어야지, 우회전을. 모르지 또..... 수색이 거기 아니라 어디에 있어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이왕 들여다보는 거 찬찬히 볼 걸 그랬나. 창문틀은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보일러도 옳게 가동해보지 않았는데. 한 번 그래놨으니 다음에 편한 마음으로 가도 더 나은 느낌으로 오지 않을 거야. 그나저나 열쇠를 받아 가시라고 얘기나 해야되는 거 아니야. 하나하나 살펴보면 거기도 하자가 적지 않을 텐데. 징그럽게 웬 열쇠는 저렇게 주렁주렁 매달았는지.
무늬가 없어, 무늬가. 월계동에도 우편물이 꽤 쌓였을 텐데, 그러고 보니 거기 공과금하고
관리비도 두 달 내지 않았고. 열쇠냄비가 뭐야 열쇠냄비가. 그걸 그렇게 담을 데가 있었나. 거기선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회전이라고. 원고 닷새만 더 늦춰 달락 하면 정 주간이 잡아먹으려고 달려들겠지. 해설이 붙는다면 그쪽도 빨리 받아 읽어야 뭘 쓰든 말든 할 테고. 그거야 처음부터 빈 집이니 나둬도 되지만 월계동은 어떻게 하지. 저놈의 열쇠 다 집어 내던질 수 없나. 거기 안 들어간다면(아내가) 나도 언제까지 여기 이러고 있을 수 없는데 말이지, 잘 나가다 왜 안 써지는지 모르겠어. 욕심이었는지도 모르지 무늬가 어디 있다고. 아니면 환상이었거나.....
정 주간의 전화는 다음날 사무실로 왔다. 그는 닷새 후엔 틀림없는 거지, 했다. 나는 틀림없을 거라 했다. 쓰긴 다 썼는데 다시 한번 읽어보고 있는 거라고. 그는 특유의 억양으로 오우케이, 하고 전화를 끊었다. 머릿속에 그 한 냄비 되는 열쇠들이 구멍 뚫린 눈들을 한 고기떼들처럼 잘랑거리며 왔다갔다했다. 거기 들어가 살든 안 살든 일단 정리는 해 둬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사람들이 사무실을 좀 비워주길 기다리다 현관으로 내려가 전화를 했다. 아내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나는 집이 다 지어져서 입주를 하란다 말하고, 처음엔 12층을 뽑았는데 당신과 아이가 살기에 편하게 3층으로 바꾸었다고 말했다. 아내는 요즘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마포라고 대답하고 올라와 들어가든 안 들어가든 열쇠를 받아가라고 했다. 아내는 전화를 받는 중간 잠깐만요, 하고 수화기를 막은 채 어머니와 무슨 이야긴가 나누고 나더니 (말로는 상인이가 자꾸 매달려서요, 했지만) 오늘, 하다가 아니 내일 올라 갈테니 낮에 자기가 들어갈 수 있도록 내가 먼저 월계동에 들어가 아침 출근할 때 경비실에 키를 맡겨달라고 했다.
나는 아내가 올라오겠다는 말을 너무도 선뜻하게 하는 것 같아 의사전달이 잘못된 게 아닌가 싶어 다시 12층을 3층으로 바꾼 건 그 아파트가 내가 들어가 살 아파트가 아니라 당신이 들어가 살 아파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화를 하는 동안에도 눈에 구멍이 뚫린 고기떼들은 여전히 내 머릿속을 짤랑거렸다.
저녁에 나는 그 고기떼들을 편지 한 장과 함께 비닐 봉지에 겹겹이 싸 월계동 아파트의 경비실에 맡기고 돌아왔다. 편지에 나는 원고 마감 때문에 그러니 꼭 필요하고 급한 연락이 있더라도 사무실로든 하숙으로든 닷새 후에 전화를 달라고 썼다. 열쇠를 담았던 냄비도 납작하게 밟아 대문 바깥 쓰레기통에 넣었다. 정말 거짓말처럼 다시 글이 써지기 시작했고 속도감이 붙기 시작했다.
아내는 정확하게 닷새 후 아이와 함께 회사 앞으로 나와 전화를 했다. 아내에겐 의도적으로 소홀한 듯 보이려 노력했다.
"일부러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돼요."
어머니는 아내에게 어떤 가르침과 자신감을 주었던 것일까. 나만큼이나 서먹서먹한 얼굴을 할 줄 알았던 아내는 시작부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떠날 땐 여기 들어와 있거나 그냥 거기 있을 거면 키라도 찾아가라고 전화를 해 난..... 난..... 먼저..... 못..... 끊겠어요, 하던 여자였다.
"원고는 다 넘겼어요?"
"어제."
"당신 몰랐죠? 내가 이런 모습으로 나올지는."
"낯설어."
"나도 낯설어요. 전 같으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못 그랬는데."
"어머니가 시키더나?"
나는 30년 전의 아버지처럼 말했다.
"어머님한테 당신 살아온 얘기 많이 들었어요."
"수호엄마 얘기?"
"예. 당신이 모르는 부분도 많아요. 훌륭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머니가?"
"아뇨. 나는 그분이요. 그리고 어머니두요"
"아프게 살면 훌륭해져. 누구나..... 그렇게 살고 그렇게 이별하면."
"어디 가서 식사해요."
"난 별로 생각이 없어."
"그래도 해요. 앉아서 할 이야기가 있어요."
식당에 가서도 나는 물수건으로 내 손을 닦고 얼굴을 닦고, 아이의 손과 얼굴을 닦아주며
가능한 맞은편에 앉은 아내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주문도 아내가 했다. 나는 물수건을 만지작거리며 아무거나, 했다가 아내가 그런 음식이 어디 있어요, 해서 그럼 당신 하는 걸로, 했다.
"이제 그만해요. 꼭 전에 월계동 식탁에 앉은 것처럼......"
"할 얘기가 뭔데?"
"당신은 우리가 그때 무슨 일이 있었을 때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알아요?"
"모르겠어. 그냥 모든 게 다 귀찮았으니까."
"나도 처음엔 우리가 권태기를 겪나 했는데 강릉 가서 생각하니 그게 아니었어요. 그때 같이 신사동에 갔다오고 나서 바로 그랬어요, 당신은 차안에서 꿈을 꾸는 듯한 얼굴이었고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자동차에서 내리면서부터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다음에 수색에 같이 가자고 했지만 나한테 해선 안 될 얘기를 한 것처럼."
"어머니 얘길 듣고 나니까."
"아뇨, 당신이 당신도 못 느끼는 사이에요. 그 날 저녁 당신이 서재에서 원고를 쓰고 있는데 내가 가만히 뒤로 다가가니까 언제 들어왔냐며 쾅하고 워드프로세서 뚜껑을 닫았고요. 제목만 큰 글씨로 수색 가는 길이라고 쓰고요. 맞지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 당신은 집에서 원고를 잘 못 쓰는 것 같았어요, 나한테 말도 잘 하지 않고요."
"상인아, 이제 수건 좀 거기 그만 놔두지 못하니?"
"뭐라시더냐니까."
"니 생각엔 아범이 왜 그러는 것 같냐고 해 신사동 갔다오던 날 얘기를 했어요. 당신이 차 안에서 한 얘기도 하고 방에 들어갔을 때 얘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어머님이 당신 자랄 때 얘기도 해줬어요, 그래서 자식이지만 미안한 것도 많으시다고....."
"어머니가 나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어서."
"왜 없으시겠어요. 당신도 알면서....."
"지금도 어머닌 나한테 수호엄마가 생겨서 그러는 게 아닌가 생각하시잖아."
"다른 형제들이 그랬다면 덜 그렇게 생각하시겠대요. 그게 다 당신이 자꾸 마음에 밟히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지."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잖아."
"그럼 부부 사이가 냉랭해지면 우선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어요? 당신은 잡지사다 영화사다 하며 여자 전화도 자주 오고. 또 그거 아니어도 뭐 이번엔 그 어머니가 계셨고....."
그러던 사이 식사가 나왔다. 아내와 나는 육개장이었고, 아이는 갈비탕이었다.
"나는 매운 것 싫은데."
"그럼 당신 내가 뭘 시켰는지도 모르고 그거 달라고 했어요?"
"됐어. 먹지 뭐. 그런데 당신 신사동으로 들어갈 거지? 열쇠가 너무 많아서, 냄비는 보기만 해도 징그럽고."
"무슨 얘긴데요?"
"먹기나 해. 그냥 그런 게 있으니가, 아버님 건강하셔?"
"예, 어머님은 올라가라는 말씀 안 하는데 아버님은 내려가던 날부터 올라가라고......"
"당신은 왜 올 마음이 없었고?"
"갈 땐 누가 가고 싶어 갔나요? 아버님은 자꾸 올라가라고 하시는데 어머님이 그렇게 올라가면 다시 내려오게 된다니까 못 왔지. 전화도 하지 말라시고, 이런 얘기까지 하면 안 되는데....."
"그래서 어머님이 무섭다는 거야. 그래서. 보내는 사람 언제 어떻게 보내야 다시 오지 않는지까지 아시는 분이니까. 당신뿐 아니라."
"왜 먹지 않고요. 다른 거 시켜드려요?"
"됐다니까."
"원고 쓰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텐데."
"그것보다 말해봐. 나도 신사동으로 가야할지. 월계동으로 가야할지. 아니면 그대로 마포
에 있어야 할지 결정해야 하니까."
"뭘요?"
"다음에 나하고 수색 갈 수 있겠어?"
"그 소리가 왜 안 나오나 했어요. 지난 봄부터 나는 가슴앓이하고 당신은 수색병 앓고, 그
바람에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생인손 앓으시고..... 그런데, 12층 그냥 놔두지 왜 바꿨어요?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 계단 창문에서 내려다보니까 이쪽 저쪽 양쪽으로 다 확 트이던데, 당신 늘 가고 싶어하는 수색 쪽도 보이는 것 같고."
"거기 가 봤어?"
"그럼요."
아내는 올라와 월계동 아파트도 내놓고, 또 강릉에서 올라올 때 손 없는 날을 골라 이삿날도 잡아왔다고 했다.
"날은 당신이 전화했던 날 어머님이 잡아오셨어요. 9월 7일로. 그날이 당신한텐 제일 좋대요. 동방에서 서방으로 가는 거니까 그것도 당신한텐 아주 좋고요. 꼭 전세를 빼야 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거야 뭐 차차 빼도 되고. 포장이사도 알아봤어요."
"그러다 내가 안 간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
"그럴 리가 있나요."
"그래. 다 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하는 일인데 말이지?"
그날 우리는 거의 반년만에 방을 같이 썼다. 내가 수색엘 다녀온 이야기를 했을 때 아내는 그렇게 가니 그렇지 자기와 함께 가면 무늬가 보일거라며 이사를 하면 이번엔 꼭 함께 그곳으로 가보자고 했다.
그러나 나의 두 번째 수색행은 아내와 함께가 아니라 어머니와 함께였다.
이사를 한 후 일부러 다니러오신 어머니를 모시고 나는 신촌 백화점엘 나갔다. 그리고 오던 길, 수색엘 갔던 것인데 사천교 다리를 건널 때까지만 해도 나는 늘 다니던 대로 모래내길로 접어들려고 우회전 깜빡이를 넣었다가 다리를 거의 다 건너 와선 내 마음속의 무엇이 시켜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게 그대로 직진을 해버렸던 것이다. 예전 수호 엄마가 약쟁반을 들고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도 가기 싫어도 한 번은 그곳엘 가 봐야한다고 생각했다. 남가좌동을 지나고 북가좌동을 지나 불광천에 이를 때까지 나는 제 길을 가는 것처럼 표정을 바꾸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차를 몰았다. 그러다 불광천을 건너면서부터 자동차의 속도를 떨어뜨리고 아이구, 길을 잘못 들었구나, 잘못 들었어, 를 연발하며 창 이쪽 저쪽의 풍경과 옆자리에 앉은 어머니의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여기가 어딘데, 하고 묻기라도 하면 여기가 수색이잖아요, 예전 수호 엄마가 살았다는, 하고 큰소리로 말하면서 그때 어머니의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런 정신도, 아까 거기 다리에서 오른쪽을 가야 하는데 다음 번 다린 줄 알고....."
그래도 어머니는 그럼 여기가 어딘데, 하고 묻지 않았다. 바깥 풍경은 지난번 엉겁결에 왔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와 함께 온 길이라면 최소한의 비극미 정도는 있어줘야 했다. 나는 다시 한 단계 속도를 떨어뜨리면서 연신 이쪽 저쪽 창 밖과 어머니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그러다 수색 시장 앞을 지나면서 어머니의 얼굴이 오히려 처음보다 차라리 차분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조금 더 가다보면 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거기 가서 차를 돌려야겠어요. 길을 잘못 들어가지고....."
"길이야 잘못 들면 바로 찾아가면 되지. 무슨 걱정이겠냐."
저 놀랍고도 무서운.....
말을 안 해 그렇지 어머니는 내가 잘못 들었다는 길이 수색임을 알고 있었다. 오면서 본 여러 군데의 표지판에도 그렇게 써놓았고 도로에도 흰 글씨로 군데군데 큼지막하게 우리가
왔던 길이 수색 가는 길임을 써 놓았다.
나는 수색교를 지나 시계(市界) 가까이 가 자동차를 돌렸다. 그리고 내가 먼저 말하기로 했다.
"어머니는 여기가 어딘 줄 모르지요?"
"와보기는 처음 와 봐도 어딘 줄은 알 것 같다."
"아시겠어요?"
"그래. 전에도 아범 여기 와 봤디나?"
"예, 에미 강릉 내려가고 나서..... 일부러는 아니었고요."
"안다. 말하진 않아도. 에미한테 들은 얘기두 있구. 그러니 니가 얼매나 잘 살아야 것나. 이 에미 저 에미 한 다 받아 가지구....."
나는 다시 엑셀을 밝고 있는 오른쪽 발에 힘을 주었다.
"가시죠, 어머니....."
그러나 그 날에도 나는 그곳에서 무늬를 보지 못했다. 또 다른 기분으로 아내와 함께 가도 그 무늬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오직 내 마음속에서만 아련한 추억으로 일렁이는 그 물빛 무늬..... 나의 수호 엄마.....
이순원(1957- )
강원도 강릉 출생. 강원대 경영학과 졸업. 198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1988년 <문학사상> 신춘문예에 <낮달>이 당선됨.
이 승 우
F는 눈을 뜨고 일어나 앉으며 맨 먼저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그의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시계바늘은 두 시 삼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낮이었다. 목덜미며 어깻죽지가 끈적끈적한 게 여간 불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적어도 두 시간 이상 잠을 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특별하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잠은 속옷처럼 익숙했다. 그는 언제나 잘 수 있었고, 얼마든지 잘 수 있었다.
정작 특별하고 이상한 점은 다른 데 있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보았다.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머릿속은 여전히 얼얼했다. 꿈을 꾼 것인지 아닌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바로 조금 전에 잠에서 깨어났으므로 정황으로 보아 꿈을 꾼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긴했다. 그러나 꿈이라고 말해버리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 선명했다, 는 수준이 아니라, 이건 아예 도무지 꿈 같지가 않았다. 아무리 선명한 꿈이라고 하더라도(어쩌면 선명할수록 더욱)꿈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느리고 있게 마련인 그 특징적인 비현실감이란 게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F는 자신이 혹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어보기도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잦은 잠버릇에 길들여진 그이고 보면 무의식적으로 그런 연상을 할 법도 하지 않은가.......그런 생각이었다. 아닌게아니라 육체는 깨어 있으면서도 의식이 반쯤 잠에 빠져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 또한 확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단정하려고 들면 다른 가능성 쪽이 가만있지를 않았다. 자신이 조금 전에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다는 사실만은 어쨌든 부정할 수 없지 않느냐는 반격 앞에선 마땅히 대응할 것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영락없이 꿈을 꾼 것이었다. 그렇지만, 꿈이라고 단정해버리기에는 또 너무나 아쉬운 구석이 많았다. 그래서 F는, 그 두 가지 가능성의 중간을 택하여 자신이 잠들기 직전에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일이 일어나기 직전부터 그가 조금씩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고 가정하면 꿈인지 현실인지 잘 분간되지 않는 이 현상의 수수께끼는 풀린다. 하지만 그랬을 때는 다른 수수께끼의 돌출을 감당해야 한다.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서 벌어진 그 일이 한숨 자고 일어난 다음에도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되는 상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머릿속이 뒤엉킨 생각들로 북적거렸다. F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창 밖은 나른했다. 투명한 광채를 내며 햇빛들이 출렁이고 있었다. F는 문득 머리가 어질어질해오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한참 후에 떴다. 실눈을 하고 햇빛들에 점령당한 세상을 보았다.
세상은 한없이 막막하고 적막했다. 세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출렁이는 햇빛들에 녹아 없어진 것 같았다. 바람도 먹히고 소리조차 기화되어 사라졌는가. 그 숨막히는 한낮은 역설적으로 평화로웠다. F는 언제나 이 거짓의 평화를 못 견뎌해 왔다. 그는 그 세상의 적막한 평화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깜깜한 절벽을 보았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수족관처럼 나른한 이 한낮의, 거짓의, 위장된 평화의 숨통을 끊어버리고 싶었다. 늘 그랬다. 그것이 그의 오래된 한결같은 욕망이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욕망을 실천에 옮긴 적이 있었다. 한번은 아파트 단지가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또 한번은 자신의 집 건너편에 있는 유리창을 향해 자신이 마시던 커피잔을 던졌다. 그러나 세상은 끄떡하지 않았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사람들은 밖으로 쏟아져 나오지도 않았다. 단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의 집 벽에 매달려 있는 인터폰의 띵똥띵똥 소리를 내며 울렸을 뿐이었다. 관리실에 연결된 인터폰은 기계적인 목소리로 그의 몰상식적인 행동을 경고했다. 다음달 관리비에 그가 깬 건너편 집 유리창 값이 추가될 것이라는 고지도 물론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어느 날 그가 옥상에 올라가 공동 안테나의 선을 모조리 잘라버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은 그의 행동에 대해 철저하게 냉담한 반응을 보임으로써 그의 욕망을 무력화시켰다. 그의 욕망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반세상적인 욕망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이 낮잠이 습관화된 것은 그의 받아들여질 수 없는 욕망이 거푸 좌절을 맛본 사실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는 그 욕망을 세상을 향해 푸는 대신에 자신 속에 담아두는 편을 택하기로 했던 것이다.
F는 목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잘못하다가는 출렁이는 햇빛에 그 자신조차 녹아날 것 같아서 그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 꿈에선지 현실에선지 영 분간되지 않는 일이 다시금 선명하게 떠 올라왔다.
"당신을 초대합니다....."
또렷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어딘지 꾸며낸 것 같은 낭랑함이 느껴졌지만, 발음이나 억양은
정확했다. 전혀 생소하지만은 않았다. 입고 있는 옷이며 몸짓조차도 바로 앞에 사람이 서 있는 것처럼 선명했다. 남자는 흰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까만 구두를 신고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검정 색깔의 긴 연미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 옷차림은 정중하다는 인상과 시대 착오적이라는 인상을 동시에 주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남자의 얼굴만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얼굴 부분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초점이 흐려지는 것이었다. 마치 안개가 가득 덮인 날 유리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것처럼 눈코의 윤곽이 뭉개져 보였다. 나이가 얼마나 되는 지도 잘 분간하기 어려웠다.
"당신을 초대합니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정중했다. 깊숙이 고개를 숙여 절까지 했다. 현실적인가 하면 비현실적이었고, 비현실이라기에는 또 너무 현실에 가까웠다. 그러나 F는 이제 더 이상 그 남자가 자기를 초대한 것이 꿈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런 것을 따지는 일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 순간, 물론 그 뜻하지 않은 초대에 감흥을 받은 영향 탓이 컸겠지만(그는 이제껏 누구에게도 단 한 차례의 초대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의 눈앞에 유일한 현실로 버티고 있는, 태산과도 같은 세상의 나른한 평화에 대한 혐오감이 그의 판단 기능에 심각한 위해를 가했다.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커피잔을 앞집 유리창을 향해 던지거나 공동 안테나를 망가뜨려야 할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그 알 수 없는 파괴 충동의 가열로 그의 얼굴 색은 새파랗게 변했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잠을 자든가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 두 가지의 선택 중에서 그 순간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초대를 받았던 것이다.
F는 입고 있는 옷을 모두 벗고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맨몸에 찬물을 뒤집어썼다. 차가운 물줄기가 온몸을 관통하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그는 샴푸로 머리를 감았다. 그 다음에는 얼굴에 비누 거품을 잔뜩 묻히고 정성스레 면도를 했다. 그는 꽤 오랫동안 면도기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 때문인지 면도날의 귀퉁이에 붉은 녹이 슬어 있는 게 보였다.
그는 개의치 않고 얼굴에 가져갔다. 녹이 슨 면도날은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시간도 오래 걸렸고, 턱밑에 조그만 상처까지 생겼다. 그러나 F는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면도를 마친 F는 몸의 물기를 닦고 목욕탕을 나왔다.
그는 오랫동안 옷장에 처박아두었던, 그래서 나프탈렌 냄새가 짙게 배인 흰 와이셔츠와 감색 양복을 꺼냈다. 넥타이도 골랐다. 붉은 바탕에 색색의 둥근 꽃이 그려진 넥타이였다. 감색 양복이 연미복에 가장 근사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양복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F는 그 옷을 입었다. 머리를 빗어 뒤로 넘기고, 구두를 꺼내 신었다. 그의 구두는 검정 색이었는데, 먼지가 뿌옇게 앉아 있었다. 그는 구둣솔로 정성스럽게 구두를 닦았다. 그의 이마에서는 땀이 송골송골 솟아나려고 했다. 그는 서너 가지 색깔의 줄무늬가 가로 세로로 쳐진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닦고, 아랫입술을 앞으로 내밀어 바람을 만들었다. 현관에 그의 상반신을 비출 수 있는 거울이 걸려 있었다. F는 그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수상한 적막이 수풀처럼 깔린 아파트 단지를 조심조심 벗어났다. 모처럼 만에 성장(盛裝)을 하고 외출을 하는 길이라 그런지 발걸음이 제법 무거웠다. 그의 앞에서, 뒤에서 햇빛은 정신없이 출렁이며 그의 의식을 비틀어댔다.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세상은 이미 외계에서 들이닥친 햇빛의 식민지였다.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숨죽이고 있는 한낮이었다. 그가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간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차도로 이어지는 진입로에 들어설 때까지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 충만한 햇빛만이 유일한 목격자였다. 그러나 햇빛은 어떤 상황이 생겨도, 여하한 경우에도 증언하지 않을 것이었다.
F는 거의 차가 다니지 않는 차도를 가로질러 왕릉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왕과 그의 부인들이 누워 있는 능은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보다 더 넓었다. 왕은 죽어서도 살아 있는 자보다 훨씬 좋은 자리에 훨씬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왕릉의 담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는, 자기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평지도 아니었고, 길도 좋지 않았다. 좁다란 흙 길이 나타났다. 길 양쪽으로 우거진 아카시아나무와 은행나무가 사람의 키 위에서 서로 팔을 뻗어 반대편 나뭇가지와 악수를 하고
있었다. 덕분에 길은 갑자기 어두워지고, 그는 마치 터널 속을 걸어가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터널은 제법 길었다. 어디까지고 이어져 있을 것만 같았다. 나무 그늘 속을 걸어가는 데도 몸에서 땀이 났다. 그는 자주 멈춰 서서 손수건으로 이마와 목의 땀을 훔쳤다.
나무 터널이 끝나자 벌판이 나타났다. 그 앞에 나타난 길은 세 갈래였다. 왕릉의 담을 타고 계속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하나 있고, 산 속으로 들어가는 오른쪽 길이 또 하나였다. 나머지 하나의 길은 벌판을 관통해 있었다. 벌판은 붉은빛을 띠고 누워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 건축물도 세워져 있지 않았고, 아무 농작물도 심어져 있지 않았다. 그곳은 그냥 있었다. 벌거벗은 채 그냥 누워 있었다. 무장을 한 햇빛만이 그 벌판을 산책하고 있었다. F는 땀을 닦고, 숨을 고르고, 벌판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발바닥 밑에서 푸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걸어가자 벌판이 사라지고 호수가 나타났다. 거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단 한 사람과도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다. 더위에 지친 매미가 목청을 늘어지게 뽑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매미 역시 햇빛과 마찬가지로 아무 증언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
햇살은 호수의 수면 위에서도 변함없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F는 뒤를 돌아보았다. 벌판은
그의 뒤로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호수를 껴안고 있는 형국의, 그다지 크지 않은 산이 벌판의 오른쪽에 우뚝했다. 산은 곧게 허리를 펴고 선 나무들로 울창했다. 그 산을 뚫고 길이 열려 있었다. 똑바른 길이었다. 포장도 되어 있었다. 그리고, 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나무문도 하나 세워져 있었다. 그것은 어떤 경계를 표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길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 끝까지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F는 그 나무 문 앞에 멈춰 서서 심호흡을 했다.
F는 처음 이곳까지 걸어왔던 날을 기억한다. 아마도 맞은편 집 유리창에 자신의 커피잔을
던져 유리창을 박살내버린 날이었을 것이다. 그는 되풀이되는 일상의 지겨움 앞에 질려 있었고, 속에다 핵폭탄을 장착하고서도 겉으로는 태연하게 거짓 평화를 시위하는(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 세상의 철면피함에 넌더리를 내고 있던 참이었다.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기를, 예컨대 그 감춰져 있는 핵폭탄이라도 터져서 이 위선으로 가득 찬 세계의 안일한 평화를 깨뜨려주기를 강렬하게 소망하고 있었다. 그의 바람은 너무도 크고 거칠어서 세상이 깨지지 않으면 그 자신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의 의도적인 소란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평화를 깨지 않았다. 인터폰이 걸려왔고, 관리인이 기계적인 음성으로 다음달 관리비에 유리창 값을 청구할 것이라는 사실만을 통보해왔을 뿐이었다. 세상의 노골적인 무관심은 그를 견딜 수 없게 했다.
그렇다고 그날 그가 처음부터 이곳까지 올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때까지 이곳에 와본 적이 없었고, 이런 곳이 있는지도 알지 못했었다. 지난 왕조 시대의 통치자와 그의 부인들이 매장되어 있는 왕릉 주변까지가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몇 번 되지 않았다. 따라
서 그가 그날 여기까지 와서 이 호수와 산,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길과 문을 발견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순전한 우연은, 그러나 또 얼마나 광대한 섭리의 그물을 생각키우는가.
그날, F는 그 길을 따라 울창한 숲 속으로 들어가 볼 생각을 했다. 어떤 계획이나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곳을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그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도 그냥 솟아났다. 생각 없이 발걸음이 움직였다고 하는 쪽이 보다 사실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처음엔 그가 들어서고 있는 길목의 양쪽에 세워져 있는 나무 구조물이 문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반질반질한 표면에 별 모양과 꽃 모양의 무늬가 음각 되어 있는, 그것은 차라리 무슨 조각품처럼 보였다. 그 자리에 서서 오랜 세월을 견딘 듯 귀퉁이마다 각이 무뎌져 있었고, 나무 표면의 색깔도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퍽 오래 전에 만들어진 물건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몇 년 전의 작품이라는 생각을 지나, 몇백 년 전의(가량 저 능에 누워있는 주인이 통치하던 시대의) 산물일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했다. 그것은 모든 오래 된 물건들이 지니고 있게 마련인 알 수 없는 신비감까지를 내 풍기고 있었다. 막연했고, 잠깐 스쳐간 생각에 불과했지만, 그 나무문의 존재는 F에게 어떤 식으로든 상당히 색다른 인상을 주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에 있었을까. 어디에 숨어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까. F가 그 문을 건성으로 살핀 후 안쪽으로 한 발짝 걸음을 내디뎠을 때 불쑥 한 사람이 그의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물어왔었다. 키가 크고 몸이 건장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모자를 쓰고 있었고, 그 때문에 처음엔 얼굴을 볼 수 없었고, 초록색 계통의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언뜻 보아 군인의 차림새를 연상시키는 복장이었는데, 자세도 로봇처럼 딱딱하고 건조해 보였다. 목소리만으로는 여자인지 남자인지를 구별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 길을 따라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F는 손가락으로 산 속을 가리켰다.
"당신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로봇처럼 생긴 사람이 나무처럼 우뚝 선 채로 말했다.
"어째서 안 된다는 겁니까?"
F의 목소리는 자기도 모르게 짜증스러워졌다. 그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F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다소 과장되게 지어 보이고, 그 사람의 말을 무시한 채 한 발짝 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양팔을 벌리고 막았다. F는 자신의 어깨에 닿는 상대의 팔 근육이 강철처럼 단단하다는 걸 눈치채고 움찔했다. F는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눈을 쳐들어야 했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얼굴을 보았지만 여전히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표정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길목에 서 있는 나무 구조물을 눈으로 가리켰다.
"저것은 문입니다. 저 문은 들여보내야 할 사람과 들여보내지 않아야 할 사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문은 사람을 차별합니다.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합니다. 열려 있기만 하는 것은
문이 아니지요. 문이 세워져 있는 것은 들어갈 사람이 있고 들어가지 않아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문이 세워져 있겠습니까? 더구나 여기 이 길에 말입니다."
F는 그 순간에, 그 고색창연한 나무문을 지나 계속 길을 간다는 것에 어떤 비밀스런 뜻이 개입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때문에 그는 그 길을 쉽게 포기해버릴 수가 없었다. 이 길을 계속 걸어가면 무엇이 나오는가. 이곳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그러나 F는 문지기의 무쇠팔과 표정 없는 눈길에 압도당한 자신의 곤궁하고 후줄근한 정신을 보았다. 그는 못내 아쉽고 궁금하다는 눈길을, 야트막한 경사를 이루며 일직선으로 쭉 뻗은 산길 쪽으로 한동안 보내고 있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뭉기적거리며 그곳을 벗어났다.
그날 이후 F는 여러 차례 이곳까지 걸어왔었다. 그가 집을 빠져 나와야 할 일은 너무 많이 일어났다. 그는 왕과 그의 부인들이 누워 있는 능을 지나고, 아카시아와 은행잎이 둥글게 하늘을 덮고 있는 좁고 긴 터널을 지나고, 붉은 흙이 융단처럼 깔린 텅 빈 벌판을 지나 호수에 이르렀다. 그러면 어김없이 산 속을 향해 뻗은 길이 나타나고, 별과 꽃무늬가 음각된 오래 된 나무문이 있고, 문 곁에는 또 언제나 군복 차림의 옷을 입은, 키가 크고 무쇠 같은 팔을 가진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되지 않는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도무지 그 문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지기는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쫓아냈다. 나중에는 그 문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고만 있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집을 나오면 어쩌자는 작정 같은 것도 없이 이곳까지 걸어오곤 했다. 꼭 무엇에 홀린 것만 같았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F의 마음속에서는 문 안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서 버렸다. 어떻게 해서든 한번은 기필코 들어가 보고 싶다는, 그 생각은 불같은 열망이 되었다. 세상을 깨뜨리려는 그의 가당치 않은 욕망은 이제 저 문을 지나 금지된 산길을 걸어 들어가 보려는 욕망으로 대치되었다. 그의 간절한 마음을 헤아렸음일까, 언젠가는 크게 선심이라도 베푸는 듯한 태도로 그 문지기가 '이곳에 들어오려면 초대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해준 적이 있었다. F는 그 초대장을 어디서 누구에게 받아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문지기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이제껏 그자가 문을 지키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 문지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은근히 그자가 앞을 막아서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던 터였다. 그를 초대한, 그 꿈인지 현실인지 잘 분간되지 않는 이야기를 해주면 작자가 믿어줄까,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문지기는 어디로 갔을까....F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빈 문 앞에서 잠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어디에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걸어 들어가 버리려는 마음을 무쇠 같은 작자의 팔 근육과 기계 같은 눈초리가 저지했다. 그 때문에 그는 곧게 뻗어 올라간 야트막한 언덕길을 바라보며 나무 문 곁에 꽤 오래 서 있어야 했다.
길은 자석처럼 사납게 그를 끌어당겼다.
그 길을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그의, 세상을 부수려는 거친 욕망과 맞바꾼, 자석 같은 욕망이 결국 문지기의 근육과 눈초리를 무시하게 했다. 그는, '나는 초대를 받았다.'고 중얼거렸다. '문지기가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가 자리를 비켰기 때문이고, 그가 자리를 비켜준 것은, 나를 들여보내지 않을 이유가 더 이상 없어졌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했다. 나의 행동은 합법이다, 라는 생각은 자신의 불법적인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인지도 모르는 일이긴 했다. 좀더 정확한 표현을 쓰자면, 그는 자신의 행동의 합법성을 보장해줄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았다. 그 문제에 관하여 입장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그 사람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행동을 유보할 수도 없었다.
판단을 뒤에 둔 채 행동에 나서야 하는 그런 상황이란 것이 있는 법이었다. 말하자면 그때 F의 경우가 그랬다. 곧게 뻗은, 크고 울창한 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언덕길을 바삐 올라갔다. 한참 올라가다 뒤를 돌아보니 널브러져 있는 붉은 벌판이 보였다. 산길로 접어드는 입구에 나란히 서 있는 나무문도 보였다. 그 옆에는 아까 보이지 않던 문지기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흡사 나무처럼 우뚝 서서 빈 벌판을 지키고 있었다.
어느 만큼 올라가자 길은 내리막길로 바뀌었고, 노폭도 조금씩 좁아졌다. 나중에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 어디쯤에서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 더 이상 벌판의 붉은빛도 보이지 않았고, 문도, 문지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는 햇살이 기세 좋게 반짝거리는 물밭이 펼쳐져 있었다. 밖에서 볼 때는 호수인 줄 알았는데 강이었던가. 강은 오른쪽 끝을 향해 길게 뻗치다가 산자락을 따라 급히 몸을 꺾고 있었다. 그가 걷는 길은 그 물가 쪽을 향해 열려 있었다. F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무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는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막연한 채로지만, 금지된 작물을 재배하는 큰 농장이거나 으리으리한 별장이라도 숨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무언가 색다른 사태와 조우할 것이라는 희망, 그곳이 없었다면 그가 무엇 때문에 이곳을 그렇게 간절하게 꿈꾸었겠는가, 그는 무언가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일상의, 적막하기 짝이 없는 시궁창에 큰 파장을 일으킬 특별한 돌덩어리를 찾고 있는 참이었다.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를 구경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영혼이라도 내놓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그였다. 그런데 이건 뭔가....그 앞에 펼쳐진 풍경의 단조로움과 평범함이 그의 의욕을 꺾었다. F는 성급하게도 그냥 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길이 닿는 곳까지 내려가 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물가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을 향해 납작 몸을 숙이고 있는 낡은 집을 한 채 발견했다. 그 집은 우묵한 지형 속에 신묘하다고 할 정도로 잘 은폐되어 있어서 아주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전혀 발견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열 길 높이로 치솟은 가지가지 나무들이, 마치 어미 닭이 자신의 날개로 병아리들을 감싸듯 그렇게 완벽하게 그 집을 덮고 있었다. 그 집은 조금도 특이하지 않았다. 특별한 느낌은 그 집을 가리고 있는 지형
에서 말미암았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F는 그 집의 교묘한 위장술에 대해 채 감탄하지도 못했다.
길목을 지키던 문지기와 똑같은 복장을 한, 그러나 그 사람보다는 훨씬 키가 작고, 근육이나 눈길이 한층 부드러워 보이는 한 사람의 안내를 받아야 했다. 이 사람 역시 남자인지 여자인지 잘 분간되지 않았다. 모자를 너무 깊이 눌러써서 얼굴의 반 정도는 보이지도 않았다.
어차피 F는 사태를 찬찬히 헤아려볼 여유가 없었다. 그럴 마음조차 없었다는 쪽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문이 열렸고, F는 엉겁결에 그 문 안으로 들어갔다. 덜컹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자 일순 어둠이 온몸을 덮쳤다. 순식간에 검은 베일을 얼굴에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바늘 구멍만한 빛도 보이지 않았다. 닫힌 문을 더듬어보았다. 견고했고, 손잡이를 찾을 수도 없었다.
F는 손을 휘저으며 한 발을 조심스럽게 앞으로 내밀었다. 마땅히 발이 디뎌질 것이라고 예측한 자리가 뜻밖에도 허공이었다. 사태를 깨닫고 재빨리 발을 거두어들이려 했지만, 아래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린 그의 가벼운 발바닥은 허공에서 춤을 추듯 몇 차례 허우적거렸다. 그리고는 마침내 다른 쪽 발까지 허공의 어둠 속으로 끌려갔다. 아주 짧은 순간에 그의 몸은 중심을 잃고 공중에 던져졌다. 그는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F는 자기 몸이 굉장히 오랫동안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까마득하게 깊은 곳으로, 한없이 먼 곳으로 추락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아마도 스올이거나 과거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하늘이거나 미래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아니면 다른 세계?..... 그리고 암전. 깜깜한 공백. F는 오랫동안 자신의 의식을 가지고 사고하지 못했다.
"여기는 당신을 위한 세계입니다. 우리는 당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습니다."
얼마나 길고 무거운 시간이 그의 의식 위에 덮여 있었을까. 몸이 꿈틀거림과 동시에 그의
정신도 점차 회복되어갔다. F는 눈을 떴다. 그러나 그의 눈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눈을 떴으나 뜨지 않은 것과 매일반이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만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어쩌면 그 소리 때문에 의식을 회복한 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신은 이제부터 미로를 뚫고 지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미로는 길고 복잡합니다. 그리고 곳곳에 방이 있습니다. 그 방들은 당신이 참으로 이 세계에 합당한 인물인지, 그 자격을 테스트할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세계에 들어온
이상 추방이란 없습니다. 이 점을 명심하십시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이 세계에서 추방이란 없습니다. 아무나 들어올 수는 없지만, 들어온 사람을 내쫓는 법 또한 없습니다. 당신은 열 개의 방을 거칠 수도 있고, 단 한 개의 방도 거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어떤 길을 택해 걷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이 운이 좋은 사람이기를 빕니다. 당신은 이미 첫번째 방에 들어와 있습니다. 하지만 운이 나쁘다고 미리부터 의기소침해지진 마십시오. 아직까지 이 검은 방을 경과하지 않고 이 세계로 들어간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서 말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
F는 할 수 있는 대로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큰 방인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다만 상대가 목청껏 말을 할 때 울리는
공기의 파장으로 미루어 공간이 그렇게 크지 않다고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그래서 검은 방이라고 하지 않았소. 내가 어디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는 알려고 할 필요가 없소. 그러나 이 점만은 유념하고 있는 게 좋을 겁니다. 나는 당신을 아주 가까이에서 매우 또렷하게 보고 있습니다."
"여기는 어딥니까? 내가 어디에 온 겁니까?"
"당신이 매우 오고 싶어했던 곳입니다. 아니, 당신이 와야 할 세계입니다. 이곳은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나의 친구들? 나는 친구가 없소."
"모두 다 그렇게 말합니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친구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친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여기 온 겁니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F는 고개를 저었다. 상대방은 잠시 말을 끊었다. 짧은 침묵의 골이 견딜 수 없게 깊고 길어 보였다. 상대방의 표정을 살필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말을 중단한 사실이 몹시 걱정스러웠다. F는 불안때문에 눈알을 휘둥거렸다. 이윽고 이때까지와는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못 알아듣겠습니까? 내 말을...."
F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기묘한 일이지만 처음부터 그 사람의 말들은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말이 이
상하지 않은 것은 상황이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 낯선 사람이 설명해주는 상황을 그가 자연스러운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그 낯선 목소리가 그에게 길고 복잡한 미로를 통과해가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그 점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그 당연한 사실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또 그는 그 사람이 하는 말들 사이의 모순을 지적하지도 않았다. 예컨대 이 세계에 적합한 인물인지를 시험할 것이라고 하면서 추방에 대한 가능성을 일소시키는 그자의 말에 대해 아무 의문도 표시하지 않았다. 그런 의문 따위가 부질없어지는 이상한 경험의 자장 안에 그는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자신이 앞에 한 말을 부정했다.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이해하고 말고요."
"좋습니다. 이제 당신은 내가 내는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방을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여기에 길고 복잡한 미로가 있습니다. 그 길은 누가 왜, 누구를 위해 만든 것입니까?"
F는 생각을 모두었지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문제가 너무 황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꼭 대답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물론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부터 백을 세겠습니다. 그 동안 답을 말하지 않으면 당신은 이 어둠 속에서 하루 낮과 하룻밤을 보내야 합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 방은 밤이고 낮이고 늘 이렇게 깜깜합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겠지만 바닥에는 지네와 같은 다족류의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아닙니다. 벌레들은 밤에만 움직입니다. 당신은 밤과 낮을 구분하지 못하지만, 그러므로 이 방에서 따로 밤이 어디 있느냐고 항의할지 모르지만, 놈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놈들은 밤과 낮, 자기들이 활보해야 할 시간과 조용히 잠이나 자두어야 할 시간을 너무나 똑바르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백을 세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F는 한번 더 백을 세어달라고 요구했다. 검은 방의 주인은 잠깐 동안 생각하는 눈치를 보이더니 F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러나 F는 두 번째 백이 끝났을 때도 정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F는 다시 백을 헤아려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박에 거절당했다.
"당신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벌레들과 이 어둠 속에서 지내야 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어둠이 생각을 명철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그 말을 하고는 목소리가 사라졌다. 어디로 간 것일까. 밖으로 나가는 기척 같은 건 전혀 들리지 않았는데 그자가 방에 있다는 느낌이 갑자기 없어져버렸다. 하지만 F는 이제 그자를
부르지 않았다. 불러서 선처를 부탁한다는 식으로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또 설혹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자가 부탁을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거역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그가 이 방에서 깨달은 첫 번째 교훈이었다.
F는 무릎을 꺾어 세우고 머리를 그 위에 앉았다. 길고 복잡한 미로, 그것을 누가, 왜, 누구를 위해 만들까?.....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엉뚱한 생각들만 엉키고 풀리며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그 상황 속에서도 그는 자기가 왜 이렇게 수상하고 깜깜한 방에 들어앉아 엉뚱한 문제를 받아놓고 끙끙거려야 하는가, 하는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마치 자기가 풀지 않으면 안 되는 당연하고 마땅한 숙제인 양 생각했다. 이 숙제를 풀지 않으면 이 방을 나갈 수 없다. 여기를 나가지 않고는 미로를 벗어날 수 없다. 내 앞에는 이 황당한 수수께끼처럼 난해한 미로가 펼쳐져 있다...... 그런 생각들만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는 눈을 뜨고 있었던가.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눈을 감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가 그 점을 잘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은 그 방이 완벽하게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눈을 뜨든 감든 마찬가지인 상황에선 눈을 뜨고 있거나 감고 있다는 자각증상이 현저하게 둔화되게 마련이었다. 그런 자세로,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그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의 잠을 깨운 것이 무었이었는지 처음에는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친숙하지 않은 이 물감이 온몸 곳곳에서 스멀거린다고만 여겼다. 잠의 결을 따라 의식의 수면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면서 그는 그런 이물감 따위는 상관하지 말기로 작정했다.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나 그는 이내 그럴 수 없는 상황과 만났다. F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뛰어 올랐다. 날카로운 통증이, 예컨데 송곳에 찔린 듯한, 또는 살점이 뜯긴 듯한 예리한 아픔이 그의 발과 허벅지와 팔뚝에 동시 다발적으로 가해졌기 때문이었다. F는 몇 번이고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머리끝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의 의식을 마비 시켰던 두터운 잠이 순식간에 벽을 뚫고 달아나 버렸다.
손으로 몸을 더듬었다. 물컹하고 바삭거리는 것들이 여기저기서 만져진다고 느끼는 순간 그는 다시 외마디 비명을 질러야 했다. 무엇인가 몹시 예리한 것이 그의 손가락을 물어뜯었기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F는 자신의 손가락 가운데 일부의 살점이 뜯겨져나갔다는 사실을 짐작했다. 붉은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으리라는 추측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절망스럽게도 그런 사정은 손가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온몸이 벌레 떼들의 공습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적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숫자가 많았고 가지고 있는 무기도 살벌했다. 그에 비해 F는 혼자였고 그들과 맞설 무기도 없었다.F는 엉겁결에 겉옷을 벗어서 마구 휘둘렀다.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고 정신없이 휘둘렀다. 벌레 떼들이 후드득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벌레들은 이내 전열을 정비해 가지고 돌진해 들어왔다. 그 때문에 F는 계속해서 폴짝폴짝 뛰어야했고, 마구 비명을 질러대야 했고, 자꾸만 겉옷을 휘둘러야 했다. 벌레 떼들의 숫자가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것일까. 아니면 놈들은 죽었다가도 금방 다시 살아나는 무슨 불사의 재주라도 타고난 것일까...... 끝이 없이 달려드는 벌레들의 공격으로 F의 몸은 넝마처럼 찢기었고, 곧 이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탈진 상태에 빠져버렸다. 그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썩은 나무처럼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을 때야 벌레들은 공격을 멈추었다.
그 방은 시간까지도 감금하고 있었다. F를 따라 들러온 시간은 밖으로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은 앞을 향해 똑바로 흐르는 자신의 본성을 잊어버리고 제자리만 한없이 뱅뱅 돌았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공회전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F는 그 방의 주인이 그를 부르는 목소리를 다시 들었다.
"당신은 이제 이곳에서 나가야 합니다."
깜깜하고 단단한 바닥을 네발로 기면서 F는 소리나는 쪽으로 나아갔다.
"지금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검은 방의 주인이 큰소리로 웃었다. 그자의 크고 갑작스런 웃음은 F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기억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자갈밭처럼
덜그럭거리는 소리만 냈다. 그의 생각은 한치 앞으로 나가지를 못했다. 이윽고 웃음을 그친
남자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 수수께끼는 아무도 풀지 못합니다. 적어도 이 검은 방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걸 풀지 못하면 이곳을 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그러나 그렇게 말한 사람은 당신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겁니다. 길들은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합니다. 옆으로 꺽이기도 하고 빙 돌아가기도 하지요. 당신이 동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고 해서 또는 당신이 올라가는 것을 택해 걷기 시작했다고 해서 당신의 목적지가 반드시 동쪽이 되거나 하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이쪽으로 가도 길은 당신을 저쪽으로 데려다 놓고는 합니다, 당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러합니다. 당신은 이미 그 이치를 터득한 줄 알았는데요. 당신은 당신의 삶이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고 느껴왔지요 ? 그래서 세상을 모욕하고 저주하기도 했지요 ? 그러면서도 그 모순이야말로 당신이 견뎌야 할 세상과 삶의 참 얼굴이라고 하는 인식을 수용하는데 주저하는 까닭을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나는 어떤, 보편타당한 원칙이랄까, 말하자면 삶의 틀을 잡아주는 규범 같은 것이......"
검은 방의 주인은 다시 큰소리로 웃었다. F는 그만 스스로 기가 죽어서 거기서 말을 중단
해 버렸다.
"이곳에 잘 왔습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미로를 통해 중심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당신은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서두르십시오."
"지금 나가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나는 몹시 다쳤습니다. 벌레들이 내 몸을 넝마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F는 자기도 모르게 코끝이 매워오는 걸 느꼈다. 알 수 없는 설움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올라오는 듯했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자신이 받은 고통을 환기시키려고 했다.
"자신의 고통을 특별하고 유별난 것인 양 과장하는 태도는 스스로에게는 위안이 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위안까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합니다. 더구나 그 위안은 아주 하찮은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은 이곳에 오기 전에 비단이라고 두르고 있었습니까?"
F는 할말을 찾지 못했다. 무언가 그자의 논리에 대항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의 정신은 한없이 창백했다.
"조금만 여기 이 어둠 속에 머물게 해주십시오. 나는, 지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꼼짝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더구나 밝은 곳에 나갔을 때 내 몰골을 보게 될 일이 정말이지 끔찍하기만 합니다. 부탁입니다. 조금만 이 어둠 속에서 쉬게...."
"당신이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당신은 이방에서 하루를 더 있어야 합니다. 벌레들은 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벌레를....그것만은.....하지만 나는 나가는 문을 모릅니다. 이 방에는 문이 없지 않습니까? 문이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벌레 떼들에게 시달리는 동안 벌써 열고 나갔을 것입니다."
F는 다시금 그 카랑카랑한 웃음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 소리가 너무 싫어서 F는 귀를 막았다. 한쪽 귓불이 떨어져나가고 없다는 걸 그의 너덜너덜한 손가락이 확인해주었다. 그는 얼른 귀에서 손을 떼었다.
"누가 이 방에 문이 없다고 했습니까? 아무도 당신에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아예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당신은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나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때문에 여기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내 말이 틀렸습니까? 물론 당신을 비난하려는 뜻은 조금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니까요. 의심스러우면 지금 당신이 있는 쪽의 벽을 가만히 밀어보십시오. 원한다면 다른 쪽도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손만 갖다대면 벽은 문이 될 것입니다."
F는 시키는 대로 했다. 몸을 바닥에 대고 누운 채로 손을 벽에 갖다대고 조금 힘을 주었다. 그러자 정말로 벽이 열리는 것이었다. F는 조금씩 문이 열리는 정도에 따라 가느다란 실 모양이다가 점차로 폭포나 집채가 되어 쏟아져 들어오는 빛의 세례를 받았다. 그 빛은 아파트 단지와 벌판과 호수 위에서 출렁거리던 햇살과는 어딘지 달라 보였다. 햇살보다는 조금 더 무거워 보였고, 색깔도 탁했다. 그 빛은 자연광이 아닌 것 같았다. 그 빛이 그의 눈을 찔렀다. 그는 통증 때문에 한동안 눈을 뜰 수 없었다.
이윽고 그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을 때 그의 몸은 이미 검은 방을 빠져 나와 있었다. 그는 목소리만 들었던 검은 방의 주인의 얼굴을 끝내 보지 못했다. 그가 본 것은 그의 앞에 뻗어 있는 좁고 길고요란한 길들이었다.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몸이었다. 모처럼 차려 입은 옷들은 걸레나 같았고, 그의 몸은 밤새 다리가 많은 벌레들에게 뜯겨서 너덜너덜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몸을 끌고 자기를 괴롭힌 벌레들처럼 네 발로 기어서 앞으로 나아갔다. 혼란스럽고 경황없는 중에서도 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만은 의심 없이 선명했다. 미로를 벗어나 중심으로....그것만이 그의 길이었다.
길은 길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힘들여 걷긴 하면서도 자신이 지금 옳게 걷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길은 갑자기 막히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한꺼번에 서너 개씩 나타나기도 했다. 무슨 표시 같은 것도 없었다. 여기가 거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았다. 출구가 입구가 되고, 동쪽이 남쪽이 되는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진을 빼는 일이었다. 부지런히 걷는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때의 여지없는 낭패스러움을 어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의 부지런한 보행을 포기할 수 없는 자의 막막함은? F의 입장이 그랬다. 그는 줄곧 혼란스러워하고 끝없이 막막한 심정에 사로잡히면서도 자꾸만 앞으로 나아갔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들어갔던 검은 방을 기웃거린 것도 여러 차례였다. 꽤 멀리 왔다 싶어 은근히 대견해하다가도 여태 그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 일순간에 다리의 힘이 쭉 빠지곤 했다.
시간은 이곳에서도 앞으로 나가지를 못했다. F가 그런 것처럼 시간 역시 미로에 갇혀 어리둥절해할 뿐이었다. 검은 방은 밤낮없이 깜깜했다. 그곳에서 시간이 멈추었기 때문이었다. 미로 속에서는 밤낮없이 환했다. 이곳에서는 또 그것이 시간이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증거였다. F가 헤매고 다닌 시간은, 따라서 측정 불가였다. 그것은 제로일 수도 있고 무한대일 수도 있었다. 몇 개의 밤이 지나고 몇 개의 낮이 사라졌는지 아무도 말할 수 없었다. 어쩌면
단 하나의 밤과 단 하나의 낮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천 개의 낮과 천 개의 밤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그 미로를 거쳐가는 동안 두 개의 방을 경유했다. 하나는 흰 방이었고, 다른 하나는 푸른 방이었다. 흰 방에는 온몸에 하얀색 옷을 걸친 사람이 있었고, 푸른 방에는 온몸이 푸른색으로 치장된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은
안개가 가득한 날 유리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것처럼 눈코의 윤곽이 뭉개져 보였다. 흰 방에서 그는 검은 방에서와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 길고 복잡한 이 미로는 누가, 누구를 위해, 왜 만드는가...... 물론 그는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 푸른 방에서도 그는 흰 방에서와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 그는 거기서도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 그는 흰 방에서 오랫동안
공중에 매달려 있어야 했고, 푸른 방에서는 얼마인지도 모르는 시간동안 물 속에 잠겨 있어야 했다. 그는 방에 들어갈 때마다 그 방의 벽에 문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 버렸고, 따라서 밖으로 도망쳐나갈 궁리를 단 한번도 하지 못했다. 그는 매번 똑같은 일을 당하면서도 마치 처음 경험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몇 번이고 까무러쳤다가 일어나며 답답하고 희망 없는 걸음을 되풀이했다.
거의 녹초가 되어, 정말이지, 이제 더 이상은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그의 앞에 겨우 나타난 미로의 끝을 보았다. 그 끝은 그가 찾은 것이 아니라 나타나준 것이었다. F는 그렇게 생각했다. 몸과 정신을 폐허로 만들어가며 수고하고 노력했지만, 정작 목표에 도달한 것은 그 수고와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다. 물론 그가 애썼기 때문에 여기까지 이르렀다. 그 공로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긴 했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공로가 지겹게 길고 한없이 막막한 그 길을 끝나게 해준 것은 아니었다. 그 끝은 그냥 나타나준 것이었다. 불쑥, 그렇다, 그렇게 불쑥 나타나준 것이었다. F는 그 사실을 또렷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그는 의식을 잃었다.
"편히 쉬십시오. 이곳은 당신의 집입니다."
F의 의식이 혼곤한 잠 속으로부터 빠져 나왔을 때 그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다. 어린아이도 있고, 노인도 있었다. 그들은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의 얼굴 가까이 입을 대고 아주 낮은 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F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몸의 이곳저곳이 삐그덕 거렸다. F는 다시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의 몸에는 희고 깨끗한 옷이 입혀져 있었다. 그는 이곳이 어디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와야 할 곳, 오기로 한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스스로가 자랑스럽기보다 자신이 그런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이 한없이 감격스러웠다. 그는 겨우 입을 열어 먹을 것을 좀 달라고 청했다. 그와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사람이 들고있던 바구니를 내밀었다. 그곳에는 붉은 색과 푸른색의, 크고 작은 음식덩이가 가득 담겨 있었다. F는 그 가운데 붉은 색이 도는 고깃덩이를 집어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맛은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고기를 씹을 힘이 없었다. 곁에 서있던 사람이 붉은 액체가 들어 있는 접시를 내밀었다. 그것은 어떤 동물의 피처럼 보였다. 그는 우선 그걸 받아 마셨다. 그리고 그는 붉은 고기를 채 다 먹기도 전에 다시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의 의식이 잠의 수렁 속으로 완전히 빠져 들어가기 직전에 F는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이 나지막하게 웃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이번에도 사람들을 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난번처럼 그를 둘러싸고 있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다른 일에 열중해 있었다. 수군거리기도 했고, 손을 흔들기도 했고, 둘 셋씩 머리를 맞대고 은밀한 미소를 교환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무겁고 심각했다.
"우리들의 왕을 뽑는 겁니다. 이리 오십시오. 당신도 참여하셔야 합니다."
F는 자기에게 말을 건 사람이 맨 처음 그에게 환영 인사를 건네었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키가 작고 얼굴이 길었다. F는 고맙다는 표시로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물었다.
"왕이오? 왕이 왜 필요합니까?"
"왕이 없으면 사람들이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왕을 필요로 합니다."
F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의 뜻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무슨 질문인가를 더 하려고 했다. 그런 의중이 내비친 걸까, 그 사람은 빙긋 웃으며 "차차 모든 걸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하고 말했다.
"어쩌면 오늘밤에 그 비밀을 알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 사람은 은근한 미소를 남기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잠시 후에 음식이 공급되었다. 음식을 공급하는 사람이 왕이었다. 머리에 금으로 만든 관을 쓴 사람이 한가운데 앉았고, 사람들은 한 명씩 그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면 관을 쓴 왕이 무릎 꿇은 사람의 얼굴을 한차례 쓰다듬은 다음 음식 접시를 건넸다. 무릎 꿇은 사람은 두 번 절하고 물러났다. 왕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 번잡한 절차가 지루하게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대체로 매우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과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긴장들을 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음식 접시를 하나씩 받았다. 왕만 빼놓고 모든 사람이 받았다. F에게도 음식 접시가 주어졌다. 이윽고 금관을 쓴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을 높이 치켜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이 왕관을 새로 뽑힐 우리들의 복된 왕에게 넘길 것입니다. 새로 태어날 왕을 찬양합시다. 헌신과 영광은 그의 것입니다."
왕이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그것을 신호로 사람들은 일제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F도 따라서 접시 위에 놓인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음식 속에 콩알만한 금이 나오면 그가 새로운 왕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가 왕입니다. 당신의 접시를 잘 살피십시오."
언제 왔는지 아까 그 키가 작은 사람이 곁에 앉아 작은 소리로 그렇게 속삭였다.
"그것이 왕을 뽑는 방식입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접시에서 금을 찾는 사람이 왕이 됩니다."
F는 움찔했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자신의 접시에서 금이 발견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니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왕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런 마음이 전혀 없다고야 할 수 없겠지만, 그런 욕망은 아주 미미했다. 그보다 더 큰 것은 두려움이었다. 이 낯선 제도와 방식이 그의 의식을 멈칫거리게 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왕이 된다고 해도 특별히 수행해야 할 일은 거의 없으니까요. 왕은 한 가지 의무와 무한대의 권리를 가집니다. 한 가지 의무 때문에 천 가지의 권리가 허용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곳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왕이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빨리 되고, 어떤 사람은 늦게 됩니다. 차이는 그것뿐이지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제비를 뽑는 이런 식의 선출 방식이라면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누구나 왕이 됩니다. 왜냐하면 왕이 되지 않으면 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왕이 천 개의 권리의 대가로 지게 되어 있는 한 개의 의무란 바로 죽을 의무입니다."
그의 설명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더 질문을 하지 못했다. 한쪽에서 와! 하며 환호성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함성과 함께 한 사람의 몸뚱이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의 접시에서 콩알만한 금이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만세를 부르며 그를 왕의 자리로 인도했다. 그는 몸이 뚱뚱하고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 이제까지 왕관을 쓰고 있던 사람이 무릎을 꿇고 새로운 왕에게 왕관을 바쳤다.
"우리 왕께 영광을! 이제 당신이 우리들의 생명입니다."
왕관을 쓴 새로운 왕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애써 눈물을 삼키면서 새로 왕이 된 뚱보는 두 손을 높이 들어 좌중을 조용하도록 시켰다.
"나는 왕으로서의 첫 번째 직무를 수행한다. 이 사람은 왕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이 사람에게 우리를 위해 사형을 선고한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졸지에 사형수가 되어버린 왕은 무릎을 꿇고 꼼짝하지 않았다. 이윽고 사람들이 달려들어 조금 전까지 왕관을 쓰고 있던 사람을 밖으로 끌고 갔다.
"이제 먹고 즐기라."
새로운 왕이 명령했다. 사람들은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게걸스럽게 음식 접시를 비우기 시작했다. F도 포크를 집어들긴 했지만, 음식을 먹을 기분은 아니었다. 사형이라니. 전(前)왕이 무슨 나쁜 짓을 저질렀을까. 무슨 흉악한 짓을 저질렀기에 왕의 자리를 내놓자마자 사형 선고를 당한다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물었다.
"저 사람이 무슨 파렴치한 짓이라도 저질렀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그럼 왜?"
"당신이 본대롭니다. 그는 왕이었습니다. 그것이 이유입니다."
F는 이번에도 그 사람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설명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 사람은 차차 알게 될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그만이었다.
F를 더욱 의아스럽게 만든 것은 왕을 선출하는 의식이 매일 저녁 반복되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매일매일 새로운 왕이 태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또 괜찮았다. 참으로 F를 충격한 것은 왕을 뽑는 의식이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새로운 왕에 의해 전 왕에 대한 사형이 선고된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특별한 잘못이나 범죄에 대한 혐의 같은 것은 고백되지도 않았고 심문되지도 않았다.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왕이었기 때문이었다. 판결 내용은 언제나 같았다. "이 사람은 왕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이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따라서 왕이 된다는 것은 곧 하루 전에 사형을 선고받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게 슬퍼하거나 놀라워할 건 없습니다. 당신은 하루 전에 사형을 선고받는 사람의 운명의 가혹함에 대해 말하지만, 사실 이 세계에 들어온 순간 우리들은 모두 사형 선고를 받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빠르냐, 늦느냐, 그 차이지요.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이 예정대로지요. 말하자면 운명이란 말입니다."
F의 의문과 놀람은 그곳 사람들의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처음부터 곧잘 말상대를 해줬던, 키가 작고 얼굴이 긴 사람만이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항의의 창구였다. 그 사람만이
F와 비교적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다. F는 왕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왕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죽는다고 응수하고 나섰다. 조금 빨리 죽느냐 늦게 죽느냐의 차이는 별 중요한 게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또 왕이 누리는 천 개의 권리에 대해 강조했다. 단 하루만에 허용된 천 개의 권리가 무슨 소용이냐는 F의 반문은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았다.
"굳이 매일 한 번씩 왕을 새로 바꿔야 할 이유가 있는 겁니까? 물론 나는 왕이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수용할 수 없지만, 많이 양보해서 설혹 그런 관례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내 생각에는 왕이 하루에 한 사람씩 새로 태어나야 할 이유나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모든 결과는 필요의 산물입니다. 하루에 한번씩 왕을 뽑는 것을 왕이 하루에 한사람씩 새로 태어나야할 확실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에 한번씩 왕을 새로 뽑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의문도 당신 스스로 풀게 될 날이 올 겁니다."
F는 불쑥, 정말로 사람을 죽이는 걸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선고만 하고 집행은 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그 의식, 왕관을 벗는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의식은, 하루 동안의 짧은 권세가 이제 그를 완전히 떠났음을 다소 충격적으로 선언하는 상징일 수 있지 않을까. 선언적인 의미 같은 것, 그런 게 아닐까.....그래서 F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을, 정말로 죽이나요? 혹시......."
"그렇지 않으면요?"
"나는, 혹시, 그러니까, 어떤 상징이라든지, 말하자면, 그런 것일 수 있지 않은가 하고......"
그 사람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왕이 일곱 번 바뀌었을 때, F는 그곳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동안 그는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생활했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하루종일 미로를 만들었다. 그것이 유일한 일이었고, 또 놀이었다. 그들은 일을 하듯 놀이를 했고, 놀이를 하듯 일을 했다. 그들은 까닭도 필요도 묻지 않고, 길을 만들었다. 열기 위한 길이 아니라 닫기 위한 길, 떠나기 위한 길이 아니라 가두기 위한 길을 만들었다. 왜 사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대답했다. 길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그러나 그 길은 가기 위한 길이 아니었다.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할 필요도 없었다. 특별한 것은 저녁 시간의 그 왕을 뽑는 의식의 되풀이밖에 없었다. F는 그 각질화 된 일상의 단조로움과 철면피함에 질리기 시작했다. 다른 세계에 대한 욕망이 서서히 그의 가슴을 채워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그곳을 떠나고자 했다. 그의 말을 들은 키 작은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왜요? 안 됩니까?"
"안 될 거야 없지요. 다만 불가능할 뿐입니다."
"무슨 뜻인지요?"
"말 그대로입니다. 가능하지가 않다는 거지요. 당신은 원한다면 언제든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아무도 말리지 않고, 그 일로 벌을 받거나 하지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곳을 빠져나가 다른 세계로 가는 일은, 거듭 말하건대,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당신은 500킬로미터나 되는 미로를 빠져나가야 합니다. 당신도 참여해서 만든 미로입니다. 역사의 시작과 함께 사람들은 미로를 만들어왔습니다. 이 미로야말로 이곳에 사람이 살아왔고, 또 살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물입니다. 미로의 곳곳에는 방이 있는데, 그곳에는 물과 불과 사나운 동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물론 무서운 벌레 떼들도 있습니다. 어떤 벌레는 당신 키보다 더 크지요. 누구도 미로를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에 하나 설혹 미로를 빠져나갔다 하더라도 기뻐하는 너무 이릅니다. 당신이 미로를 빠져나갔다 하더라도 밖으로는 아직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것입니다. 미로를 빠져나간 당신이 있게 될 곳은 바로 지금 당신이 서 있는 발 아래일 것입니다. 땅 밑 말입니다. 미로의 총길이가 500킬로미터라고 했지만 그것은 한번의 실수도 없이 그 뒤죽박죽의 길을 제대로 찾아갔을 때의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적어도 3,000킬로미터 이상을 각오해야 할 겁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길을 찾아낸다면 다행이지만요.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마침내 도달할 곳이 바로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란 말입니다. 거기서부터는 물론 미로는 없습니다. 그 대신 아예 길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아직 길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기서부터는 당신 스스로 길을 만들어서 나가야 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그곳에서부터 당신 혼자서 길을 만들어 다른 세계로 나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당신의 전 생애의 세 배가 걸립니다."
"하지만, 이곳으로 들어올 때는 길이 있었지 않소? 그 길을 타고 가면 될 것이 아니오?"
"잘 생각해보시오. 길이 있었소?"
"있었던 것 같소."
"잘 생각해보시오. 길이 있었소?"
"잘 모르겠소. 나는 단지, 내가 여기에 왔으니까 길이 있을 것 아니냐고, 그래요, 그런 차원의 상식을 말한 겁니다. 그게 당연하지 않아요?"
"그것이 어째서 당연하지요? 오는 길이 있었으니까 가는 길도 있을 것이라는 당신의 기대는 오는 길이 곧 가는 길이라는 아주 평범하고 단순하고 유치하고 소박한 생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견 타당해 보이나 실제로는 전혀 근거가 없는 연상입니다. 더구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인데, 이곳으로 오는 길은 없었습니다. 당신은 이곳으로 오고 싶다는 당신의 그 집요한 의지로 길을 만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나가겠습니다."
"단언하건대 당신은 미로를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오. 당신이 미로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고 엉뚱하게 자신을 가진다면 그건 크게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미로를 만들지만 미로를 알지는 못합니다. 물론 당신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죽음의 한계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그 한계를 벗어나 바깥 세계로 이주하려는 욕망은, 물론 그 역시 자유롭게 시도할 수야 있는 일이지만, 실현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날의 대화는 그렇게 석연치 않게 끝이 났다. 그리고 그와의 대화가 석연치 않았기 때문에 F는 설득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 사람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F는 몇 차례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를 했고, 그 사람의 예언대로 실패했다. 그는 번번이 첫 번째 방에서 쫓겨서 돌아왔다. 그 방에는 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불을 넘을 수 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자기가 만든 미로 속에 갇혀서 길을 찾지 못해 죽는다니.....허망함과 서글픔이 걷잡을 길 없이 밀려왔지만, 요령부득이었다. 유일하게 명쾌한 진리는 이것이었다. 힘써서 미로를 만들다 죽는다. 그 미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가두기 위한 미로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성찰은 너무 늦게 찾아오고, 시효가 지난 성찰은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많은 날들이 지나갔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의 삶을 살았다. 단순하고 평범하게 살았다. 낮에는 미로를 만들었고, 저녁에는 왕을 뽑았다. 이튿날은 또 미로를 만들었고, 그 전날 저녁에 자신이 뽑았던 왕을 사형시켰다.
그리고, 또 상당히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어느 날 저녁 만찬 시간에 그는 자신의 음식 접시에서 콩알만한 크기의 금을 발견했다. 피할 수 없는 시간이 그에게 찾아왔다. 그리하여 그는 왕이 되었다. 그것은 다음날 그가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라는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단 하나의 죽을 의무를 위해 천 개의 권리를 쓸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단 하루 동안. 그 하루 동안 그는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미로를 만드는 작업으로부터 열외 되어 원한다면 음식을 양껏 먹을 수도 있었고, 실컷 잠을 잘 수도 있었다. 열 명의 여자들을 불러 술시중을 들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왕으로 보낸 마지막 하루 동안 한숨도 자지 않았고,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한 명의 여자도 부르지 않았다. 그는 단 한 개의 권리도 쓰지 못했다. 하루는 그렇게 빠르게 지나갔다.
이튿날 저녁, 새로운 왕으로 선출된 사람은 처음부터 곧잘 그의 말상대가 되어주곤 했던 그 키가 작고 얼굴이 길쭉한 사람이었다. F는 그에게 왕관을 건네주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사람이 F에게 선고를 내리기 전에 쓸쓸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면서 나지막하게 물었다.
"깨달았습니까? 하루에 한 명씩의 왕이 필요한 까닭을.....?"
F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언제부턴가 더 이상 그 사실을 궁금해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그 이유를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저들은 내일 나의 살을 먹을 것이다. 나의 살을 뜯어먹고 나가 자기들이 살아 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자기들을 이곳에 영원히 묶어두는 미로를 애써 만들 것이다.....라고 F는 중얼거렸다. 그의 표정 또한 한없이 쓸쓸했다.
이윽고 천둥 같은 선고가 그의 목 위로 떨어졌다.
"이 사람은 왕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이 사람에게 우리를 위해 사형을 선고한다."
이승우
강원 철원 출생. 한국문학 신인상 수상 "에릭직톤의 초상"으로 데뷔. 주요작품 : 연금술사의 춤 ,화 ,당신의 자리, 구평목 씨의 바퀴벌레, 생의 이면 등
무늬 -이승우
별거 삼 개월만에, 강릉으로 내려가 있는 아내를 다시 부른 건 순전히 그 눈에 구멍 뚫린
은빛 고기떼들처럼 내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던 열쇠뭉치 때문이었다.
입주 준비를 끝낸 새 아파트의 잔대금을 치를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쪽에서 먼저 아내를
부르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부를 생각이 아니라 그땐 아예 아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니 서른일곱에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대며 내 이름으로 처음 마련하는 아파트에 대해 어떤 뿌듯함 같은 것을 느꼈던 것도 아니었다. 샷시라든가 오토폰과 같은 부대 시설 비용과 등기 비용까지 포함해 이게 들어갈 돈의 마지막이지, 하면서도 나는 그것이 내 집이라거나 앞으로 내가 들어가 살게 될 집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지난 봄, 잔대금을 제외한 마지막 중도금을 낼 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내와 함께 나란히 자동차를 타고 신사동으로 가 우리가 살게 될 집을 둘러보고 나왔었다. 그때 아파트는 내부공사를 막 시작하고 있었다. 아내는 바깥 공사가 끝나는 5월쯤에 다시 와 보자고 했었다. 그러다 거기 다녀온 다음, 꼭 무엇 때문이다 하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집안 분위기가 이상한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고, 한지붕 아래에서 '적과의 동침' 과도 같은 냉전 단계를 거치면서, 이러다 예정된 수순처럼 끝내 우리가 별거를 하게 된다면, 어차피 아내에게도 살 집이 필요할 것이고 그러면 그것을 아내에게 주어야겠다고 생각해 왔던 터였다.
그냥 말로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배정 받을 아파트의 동과 호수를 추첨하던 날에도 나는 내가 들어가 살 아파트라거나 가족과 함께 들어가 살 아파트를 추첨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아이가 들어가 살 아파트를 추첨하러 가는 기분으로 현장에 갔었다. 일반 분양이라면 분양과 동시에 분양 받는 아파트의 동 호수까지 정해지지만 조합 아파트라 마지막 중도금을 내고도 석 달 후에야 동 호수 추첨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이미 별거를 하고 있었고, 은행알 추첨에서 내가 뽑은 것은 19층 아파트의 12층이었다.
사람들은 로얄층 중에서도 로얄층을 뽑았다고 했다. 그것도 그냥 로얄층이 아니라 추첨 전, 그 시간 수고를 배려해 추첨을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동 호수를 지목해 들어가는 조합 총무가 제일 좋은 곳이라고 찍은 게 같은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는 옆 호였을 만큼 가장 위치 좋고 가장 전망 좋은 동의 로얄층이었다. 내가 살 집이라고 생각했다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만큼 나도 내 행운을 기꺼워하듯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뽑았으면 했던 건 3층이거나 4층, 높아야 5층이었다. 아이야 기분만으로도 당연히 높은 층을 좋아하겠지만 아직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도록 내버려두기엔 마음이 놓이지 않는 여섯 살이었고, 아내 역시 그전부터 너무 높은 층은 방안에 않아서도 그곳이 높은 층이라는 생각만 해도 까닭 없이 불안해지고 베란다에 나가 바깥이라도 내다 볼라치면 어질어질 현기증이 인다고 말했다.
전에 함께 아파트를 둘러보러 왔을 때에도 아내는 당신은 높은 층이 좋겠지요? 난 지금 살고 있는 데처럼 3층이면 딱 좋겠는데, 했었다. 그때 나는 아래를 뽑으면 다행이지만 높은 데를 뽑으면 바꾸지 뭐, 다들 낮은 데보단 높은 데를 좋아하니까, 했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7동 1204호라고 쓰여진 은행알을 들고도 까닭 없이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그것이 내가 살 집이 아니라 아내에게 줄 집이라고 생각했던 때문이었다. 또 그것을 추첨 하던 날, 진작부터 입주일이 나왔는데도 먼저 살던 월계동의 전세 아파트를 내놓지 않고 있었던 것도 아내와 다시 합치거나 내가 새 아파트로 들어갈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그간의 사정이야 어떻든 먼저 별거를 시작해 집을 나온 건 나였다. 월계동에서 사무실이 있는 마포 부근 신수동에 하숙을 정해 나온 것인데, 그때 나는 어느 계간 문예지로부터 반 년도 전에 청탁 받은 전적 전재 장편소설을 마감이 석 달 안으로 다가오도록 아직 한 줄도 시작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당장에 필요한 몇 박스의 책과 내 방에 걸려 있던 몇 가지의 옷, 오래전부터 쓰던 워드프로세서만 자동차에 싣고 집을 나왔다. 집에선, 아니 그런 분위기에선
도저히 작업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때, 집을 나올 때에도 생각했지만, 아직 전업할 처지가 못돼 직장을 다니며 틈틈히 원고를 쓰고, 원고를 보내고, 나가서 술을 마시고, 취한 채로 들어와 자고, 그러면서도 이튿날이면 쓰린 속을 쥐고도 어김없이 직장을 나가야 하고.....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권태였을까,
그런 일상의 일들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으며, 이유 없이,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단지 귀찮고 무미건조하다는 것만으로 내 쪽에서 그러자고 의도한 것도 아닌데 먼저 말수를 줄였고, 그런 나를 아내가 까닭 없이 조심스러워하기 시작했고, 나는 저 여자 왜 저래, 하고 내 스스로도 느끼고 아내도 느낄 만큼 더욱 말을 하지 않았고, 아내도 저 남자 왜 저러지, 하고 말을 하지 않았고, 그러다 밖에서 놀다가 머리가 찢겨 들어온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온 다음 애 간수도 제대로 못하는 여자가 뭘 잘했다고(내가), 당신이 그러니 애가 밖으로만 돌잖아요(아내가), 하고 다시 들 안 볼 사람처럼 대판 싸움을 하고, 냉전의 자연스러운 단계로 귀가 시간을 늦추는 것만큼 주량이 늘고, 내 방에 옷을 걸기 시작했으며, 갈아입을 속옷이며 양말이 이쪽 방문 앞 화분대 위에 화분이 치워진 자리에 놓이기 시작했으며, 서로 꼭 해야 할 말이 있으면 건너기 싫은 다리처럼 아이를 가운데 놓고 누구야 아빠보고, 누구야 엄마보고, 하는 식의 의사전달을 했으며, 그러면서도 한 지붕 아래에서 한솥밥을 먹으면서 때로는 사무실이 아닌 집으로 청탁 오는 원고의 메모를 받아 화분대 위에 놓아 전하기도 하고, 어머니라든가 다른 가족들의 전화가 오면 여기 아무 일 없다는 듯 통화하고 나서 얼굴을 돌린 채 팔만 내밀어 직접 전화기를 건네주기도 하면서 그것이 한 달은 넘게 냉전처럼 시간을 끌고, 어느 쪽에서든 먼저 쉽게 입을 열 수 없는 분위기가 되어버리고, 그러다 이제는 사람보다 그 분위기가 오히려 못 견딜 것처럼 숨막히게 느껴지게 되고, 예전에 청탁 받은 장편소설의 마감이 이제부터라도 죽을 둥 살 둥 매달려도 끝낼지 말지 한 석 달 앞으로 다가오고, 쓰자, 쓰자 하면서도 다시 일주일을 더 그렇게 무겁고 답답한 분위기 속에 소설의 첫줄도 시작 못한 상태에서 사무실 사람들에게까지 사람이 이장해진 것 같다는 소리를 듣다가, 이쯤 되면 서로 그런 말 나오는 게 당연한 순서가 아니겠냐는 심정으로 나 좀 나가 있어야겠다는 예기를 아내에게 하고, 그때쯤 내가 따로 보는 여자가 있어 그러는게 아닌가 아내가 의심을 갖기 시작하고,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면서도 거기에 대해 나는 별다른 변명을 하지 않았고, 왜 그러는지 이율 말해봐요 이율(아내가), 이윤 무슨 이유(내가), 내가 그렇게 싫나요(아내가), 싫고 좋고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이런 상태라면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얘기지(내가), 그러자 무슨 자존심인지 그러고 싶으면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남의 얘기하듯 아내가 말하고, 사무실에서 가까운 신수동에 해방감이거나 탈출과는 거리가 멀게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벗어나지 못할 무덤자리라도 구하러 다니는 기분으로, 그러면서, 오래 가기야 하겠어,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하숙을 구하려 다니고, 그리고 아내가 내다보지도 않는 상태에서 아직도 이마에 그때의 흉터를 가지고 있는 아이의 말대로 아빠 혼자 이사를 했던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내는 집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가까이 언제고 들어갈 친정이 있긴 했지만 그렇게 집을 지키는 일은 너무도 당연해 그런 생각조차 않고 있었다. 아내는 내가 집을 나오고도 한 달을 더 아이와 함께 월계동에 있었다. 그리고 가끔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대놓고 그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거기 나가 있는 데를 정리하고 들어오라는 사인을 보내곤 했다. 어디서 원고 청탁이 왔더란 얘기를 했고, 고료가 들어왔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얘기를 했고, 주차 위반 딱지가 나왔더라는 얘기를 했고, 엄마(친정)가 빨래는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란다는 얘기를 했고, 여전히 내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아이가 아빠를 찾으며 전화를 걸어보라고 떼를 쓴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때에도 나는 집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내가 비운 집을 아내마저 비울거라곤 더더욱 생각하지 않았다. 가끔 친정에 가 전화를 걸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저가 앉은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마지막 통보처럼 전화를 걸어 친정이 아닌 강릉 본가로 아이와 함께
내려가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어머니께서, 그러면 내려와 있으라고 하시니까..... 애한테도 그게 덜 상처를 주는 건지도 모르겠구요..... 그러다 아내는 잠시 후 다시 전화를 걸어 조금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지금 터미널로 나가는데..... 아파트 키..... 경비실에 맡겨놓을게요..... 당신이 여기 들어와 있거나..... 그냥..... 거기 있을거면..... 키라도 찾아가라고요...... 들었어요..... 내 말..... 그럼, 그만 끊을께요, 이제...... 하다가, 당신이..... 끊으세요..... 난..... 난...... 먼저 못..... 끊겠어요,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게 두 달 전의 일이었다.
전화를 받고 나는 아내가 아니라 어머니에게 호되게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일이 거기까지 발전하기 전에도 어머니는 여러 차례 나에게 전화를 해, 니, 에미말고 따로 '보는 여자'가 있어서 그러는게 아니냐고 물었다. 내가 완강하게 아니라고 하면 그때엔 아들의 말을 믿다가 도 다음 번 전화를 할 때엔 또 어김없이 보는 여자를 들고 나왔다. 어머니는 한번도 그러면 에미한테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러는 거냐곤 묻지 않았다. 살을 섞고 살던 부부가 한 지붕 아래에서 따로 방을 쓴다, 그러다 남자가 방을 얻어 집을 나간다. 그러면 그건 남자에게 보는 여자가 있기 때문이다, 아들보다 며느리의 행실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 문제에 대해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확고한 공식이었다.
내가 집을 나오기 전, 자존심 때문에 직접 말을 못 담아 그렇지 아내마저도 내게 보는 여자가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닐까 의심을 갖기 시작했던 것도 이틀이 멀다하고 전화를 해 눈여게 잘 살피봐라, 니 모리게 시애(시앗)를 보고 다니는지, 하는 어머니의 생각이 심어진 때문일 것이었다. 어머니의 생각으로는 보는 여자가 있거나 봤으면 하는 여자가 있지 않고서는 남자가 따로 방을 얻어 나갈 이유가 없었다. 함께 있으면 불편해 할 며느리를 굳이 강릉으로 불러내려 당신 그늘 아래에 두게 하는 것도 그렇게 방을 얻어 나간 아들에선 물론 행여 아들이 보고 있거나 보게 될지 모를 여자에 대해서도 그 자리가 '보는' 것만으로 아무나 데리고 들어와 앉히거나 들어와 앉을 자리가 아니라는 걸 확실히 해 두겠다는 선언적 의미였는지도 몰랐다.
무섭구나, 어머니는, 그리고 당신의 경험은.....
그때, 아내의 전화를 끊고 내가 떠올린 생각은 그것이었다. 어머니의 말대로 남자가 '시애
'를 보면 다른 여자들은 열이면 열 다 그러면 어디 한 번 남의 손에 새끼들을 거둬 봐라, 그래야 당신이 내라는 사람 귀한 줄 알지, 하는 식으로 시위하듯 먼저 짐을 싸 집을 나가거나, 아니면 남자가 데리고 들어온 시애의 머리 끄댕이를 잡고 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동네 우세를 떨어 손 써볼 사이도 없이 남자도 질리고 시애도 질리게 하거나, 아직 그럴 단계가 아니라면 남자 모르게 시애를 찾아가 비슷한 북새를 떨어 제풀에 물러나게 하는 게 그런 일에 대한 공식과도 같은 대응이었다. 텔레비전에서도 그랬고, 책에서도 그랬고, 살아오며 내가 봐왔던 것으로도 그랬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처분만 기다리겠다는 식으로 벙어리 냉가슴 앓듯 했던 것도 아니었다.
지난봄, 아파트의 마지막 중도금을 내고 나서 우리가 살 집을 둘러보러 아이까지 데리고 신사동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길 자동차 안에서 나는 어떤 아련한 추억 속으로 젖어드는 기분으로 아내에게 '수호 엄마' 이야기를 했었다. 갑자기 어머니라든가 그 엄마 생각이 나서가
아니라 이야기의 시작은 단지, 그래, 단지 아파트가 있는 신사동(은평구)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월계동쪽으로 나오는 길의 반대쪽 길이 수색으로 나가는 길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이게 수색 가는 길이구나. 이게..... 반대쪽으로 죽 가면 말이지......"
아파트 앞에서 자동차의 시동을 걸고 통일로 쪽으로 나와 우회전을 해 더 이상 그 길의 반대쪽이 '이게 수색으로 가는 길'이 아니게 될 때까지 불과 5분도 채 안 되는 거리를 달려오는 동안 나는 내 마음속에 '수색' 이라는 말이 주는 그것의 물빛 무늬와도 같은 가벼운 흥분으로 그 말을 대 여섯 번도 더 했다. 이게 수색 가는 길이구나, 이게.....이게 말이지..... 아내는 수색은 왜요, 수색에 누가 있어요, 하고 물었고 나는 아니 그냥. 누가 있을 것 같아서, 하다가 '수호 엄마'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수색에 내 어머니가 아니라 '수호 엄마'가 있다고, 지금도 그곳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내 마음속의 수색엔 그 엄마에 대한 애틋한 기억들이 바람에 일렁이는 물빛 같은 무늬를 이루고 있다고.....
그러자 아내는 수호는 당신 이름이쟎아요, 그럼 당신, 강릉 어머니가 낳으신 아들 아니에요, 하고 물었다.
아니긴, 그런데 이야길 하자면 복잡하다, 자세하게는 모르고 의식의 어떤 비늘처럼 어릴 때의 언뜻언뜻 떠오르는 기억으로 날 낳은 어머니가 아닌데도 집안 사람 누구한테나 '수호 엄마'라고 불리던 여자가 있었다. 그래서 어릴 때 나는 그 엄마가 정말 날 낳은 엄만 줄 알았다, 아버지가 강릉 시내에 나가 큰 상회를 했는데 어머니 몰래 시애를 보았던 거다, 그런데 그 엄마는 우리 집에 들어올 때까지도 자기가 시앤 줄 몰랐다, 나중에 어머니한테 들은 얘긴데 아버지가 그 엄마에게 혼자 산다고 거짓말을 한 거였다. 그때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엔 이미 오 남매의 자식이 있었다, 그 엄마도 아버지가 데리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낌새를 알고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집을 찾아가 데리고 들어왔다, 처음 찾아갔던 날 은 그 엄마가 마당가에 얌전하게 앉아 빨래를 하는 게 도저히 남의 시애처럼 보이지 않아 그냥 돌아왔고 둘쨋날 다시 마음 다져먹고 찾아가 사실 얘기를 하고 데려왔다던가, 그때 나는 상인이(아이)만 했는데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떻게 들어오고 또 들어올 때 어떤 일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집안 식구들 모두 그 엄마를 수호 엄마라고 불렀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그렇게 부르고 아버지 어머니도 그렇게 불렀다, 그러니 나도 당연히 그 엄마가 내 엄만 줄 알았던 거다, 잠도 그 엄마하고 잤다, 나중에 학교에 입학해서도 그 엄마가 늘 데려다줬다,
학부형회의 때에도 그랬다.
지금도 이해가 안 가는 게 속으로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내 기억으로 두 분은 한 번도 싸우거나 큰 소리를 낸 적이 없다, 지금도 어머니는 당신도 잘 했지만 수호 엄마도 잘 했다고 말한다, 형들도 그 엄마를 미워했던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 갔다오니 엄마가 없어졌다. 내 기억으로 아마 1학년 2학기 때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어머니한테 우리 엄마 어디 갔어요, 하고 물으니 어머니 역시 많이 섭섭하고 허전해 하는 얼굴로 느 에미 서울에 니 옷 사로 갔다, 대답해 비로소 그 엄마가 날 두고 떠난 걸 알았다고 아내에게 이야기를 했던 것이었다.
이야기를 하는 중간 아내는 중요한(?) 질문으로 그럼 그때 아버님은 주무실 때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 나이에 나한테 그게 중요한 일이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어머니는 그 일도 현명하게 처리했을 거라고 말했다.
아내는 다시 두 분 사이가 그렇게 좋았다면서 '수호 엄마'라는 분이 왜 가셨는냐고 물었다. 나는 당신 같으면 철든 다음 그 얘길 어머니에게 다시 물을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다만 지금 내 생각으로 그 엄마가 아버지에게서나 집안에서나 스스로 있어야 할 자리를 못 찾아 떠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시애를 싸안은 어머니의 품이 너무 넓으니까.....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식었다기보다는 어머니한테 대항할 힘이 없다고 느낀 것인지도 모르고, 또 그것이 아니라면 어머니가 기품 있는 처신으로 그 엄마를 스스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거나..... 나로선 그때 그 엄마의 집이 수색이었다는 걸 알았던 것도 썩 훗날 어머니가 지나가는 소리처럼 수호에미는 지금 어디서 뭘하고 사는지 몰라, 우리 수호 어릴 때 품에 데리고 안고 자던 정이 있어놔 더러는 많이 보고 싶기도 할낀데..... 그때 떠난 이후로 여직 소식이 한 번 없는 걸 보면 어디 다른 데 팔자를 고치 가 지 속으로 낳은 자식 거느리고 살아 이제 나설 수 없어 그러는지도 모리겠고..... 애초 나서 살긴 서울 곁에 수색인가 어딘가 살았다는기..... 할 때 들은 이야기로였다.
나는 언젠가 시간이 되면 서울로 올라와 아직 한 번 가보지 못한 수색에 가보고 싶다고 했고, 아내도 자기도 그러니 왠지 꼭 한 번 그곳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다음번 5월 올 때요, 그때면 내부공사도 많이 됐을텐데.
그날 신사동에서 월계동으로 돌아오며 아내와 나의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내 마음속에 물빛 무늬처럼 간직되어 있는 그 엄마에 대한 애틋한 기억들과 시애에 대한 어머니의 슬기롭고도 기품 있는 처신을 이야기하며 우리의 5월 수색행을 약속했던 것이었다.
그러다 그 수색행이 이루어지기 전 내가 먼저 짐을 싸들고 집을 나왔고 아내 역시 그런 일의 처리에 대한 어머니의 경험과도 같은 가르침에 따라 그 그늘 아래로 행여 내가 보고 있거나 보게 될지 모를 여자에게 내줄 수 없는 자기 자리를 찾아 들어가버린 것이었다. 경비실이라고는 하지만 아내가 남의 손에 맡긴 아파트의 열쇠는 일주일 후에 찾아왔다.
"많아요. 키가..... 상인이 아버지, 어디 출장 다녀왔어요? 요줌 도통 안보이는 것 같던데."
서랍에서 한 주먹도 넘는 열쇠뭉치를 꺼내주며 나이든 경비원이 말했다, 열쇠는 그것들을 고리에 묶어두지 않으면 한 주먹에 다 쥐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34평 아파트에 웬 키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 다이아몬드 꼴의 가죽장식을 단 아내의 열쇠고리엔 현관 열쇠와 현관 보조 열쇠, 안방 열쇠, 여분으로 맡겨둔 내 자동차 열쇠, 아이의 자전거 열쇠가 매랄려 있었고, 호텔 객실의 열쇠고리와 같이 생긴 투명하고 길다란 플라스틱 막대에 '삼익아파트 107동 305'라고 쓴, 그러나 그것보단 얇고 넓은 예비 열쇠고리엔 그 막대 밑부분에 촘촘이 뚫은 작은 구멍마다에 50원짜리 동전 크기만한 또 하나씩의 열쇠고리를 끼워 왼쪽으로부터 차례로 현관, 현관 보조, 안방, 건너방, 작은방, 보일러실 열쇠가 어느 고리엔 하나씩 어느 고리엔 두 개거나 세 개씩 매달려 있었고, 제일 오른쪽 고리엔 다른 열쇠보다 삐죽 나온 내 자동차 열쇠가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아파트 열쇠의 전부인 것은 아니었다.
내 주머니에 있는 열쇠고리에도 사무실 열쇠와 사무실 보조 열쇠, 사무실 책상 열쇠, 자동차 열쇠말고도 아파트 현관 열쇠 고리엔 안방의 장롱과 옷장, 서랍장 열쇠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집 나간 아내에 대한 짜증처럼 거칠게 자동차 조수석 앞 서랍을 열고 그 속에 던져 넣었다. 그래, 갈 테면 어디 가 봐라. 강릉이 아니라 강릉보다 더한 데가
있다 해도 내가 눈하나 깜짝할 줄 아느냐는 어떤 오기 같은 것이 치밀어오르기도 했다. 나한테도 열쇠가 있는데 굳이 이렇게 예비 열쇠고리뿐 아니라 자기가 쓰던 열쇠까지 맡기고 가는 건 그러니 얼른 하숙을 정리하고 들어와 있으라는 사인일 것이다. 그런다고 내가 니 뜻대로 들어올 줄 아느냐는 심정으로, 처음 올 땐 집안이라도 한 번 둘러보고 가려던 마음을 바꾸어 몇가지 우편물만 집어들고 그냥 그대로 하숙으로 돌아와버린 것이엇다. 그리고 이내 나는 그날 월계동으로 가 받은 열쇠들을 자동차 조수석 서랍에 넣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물론 강릉에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 아내도 전에 서울에 있을 때와는 달리 강릉으로 내려가선 사무실로거나 하숙으로 전화를 하지 않았다. 아내 혼자 생각에서라면 그간 몇 번도 더했을 전화였다. 그래선 니가 진다, 전화하지 마라, 옆에서 어머니가 흔들리는 아내의 마음을
다잡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 일 때문에 전화를 하고 사무실 앞으로 찾아왔던 건 서울에 사는 작은 형이었다.
"나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어디 사는지 가 보자."
형은 그냥 밖에서 저녁이나 하자는 내 청을 끊고 신수동 하숙으로 가 보자고 했다. 아마 엄니가 형님에게 일렀을 것이다. 니가 한 번 가 봐라, 말로는 그래서 그러는 게 아니라지만 곁에 보는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 그날 형과 많은 술을 마셨다. 하숙으로 들어올 때 사 온 술이 바닥나 다시 내가 슈퍼로 나가 맥주 네 병을 더 사왔다.
"그게 권태라는 거다, 이제 조금 있으면 아파트도 마련되겠다, 애도 잘 크고 생활의 여유도 좀 생겼겠다, 그러니 지난 시절의 나는 뭔가 하는 생각도 들고 또 이렇게 사는 게 잘 살고 의미 있게 사는 건가 하는 회의도 오게 되는 거고..... 나도 니 형수하고 그렇지만 부부 사이라는 게 원래 그래. 처음에는 이럴 마음으로 그랬던 게 아니라지만 조금씩 서로 마음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다보면 점점 그 일에 어떤 오기 같은 것도 생기는 거고 그러다 나중엔 사람보다 그런 분위기가 더 못 견디게 싫어지고 거기서 벗어나는 것만이 애초 그런 분위기로 몰고 간 목적처럼 되어버리는 식으로 말이자. 내가 보기에 니가 나와 있는 것도 그래"
"모르겠어요, 상인이 엄마가 강릉 간다니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어머니 참
무서우신 분이구나...... 그리고 수호 엄마 생각도 나고요 그 사람 강릉 간다니까....."
"그 일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다면 무섭기보다는 무서울 만큼 슬기롭고 현명한 쪽이겠지."
"전엔 나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무섭다는 생각만 들어요,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때 수호 엄마 문제를 놓고나 지금 우리 문제를 놓고나, 전에 상인이 엄마하고도 짓고 있는 아파트에 갔다오다 그 얘기를 했는데, 왜 집안 식구 다들 그 엄마를 수호 엄마라고 불렀는지 모르겠어요."
"니는 왜 그랬다고 생각하는데?"
"중학교 땐가 언젠가 아직 다 크지 않았을 때 어머니한테 한 번 그 일을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때 어머니 말로는 니가 그 엄마를 많이 따르니까 그랬다는데, 암만 그래도 그렇지 이해가 잘 안 가요."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모르고 있었구나 너는....."
"뭘요."
"생각해봐라, 그 여자가 들어올 때....."
그 여자? 그 엄마거나 작은 엄마가 아니고 말이지. 나는 낯선 눈빛으로 형의 말머리를 잘랐다.
"여자라고 말하지 말아요, 나한테 그 말 익숙하지 않으니까....."
"그, 그래. 그 엄마가 들어올 때 큰 형님은 중학교 1학년이었고 나는 국민학교 4학년, 니는 여섯 살쯤 됐을 거고, 정혜는 네 살, 은호는 아직 젖먹이였어. 형님과 나는 그 엄마의 아들을 하기엔 너무 컸고, 정혜는 여자고, 은호는 아직 어머니가 데리고 있어야 하고, 그러니까 나이로나 뭐로나 그 엄마의 아들할 사람으로 니가 제일 적당했던 거지."
"내 얘기는 굳이 그렇게 누구 엄마라고 정할 이유가 뭐냐는 거지요. 다른 집들이라고 새엄마가 들어왔다 해서 그 여자한테(이럴 땐 나도 여자다) 먼저 있던 아들 중에 누구 엄마 하라고 안 그러잖아요? 안 봤지만 그것도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가 그렇게 하라고 했겠지요?"
"너는 어머니가 너도 당신 속으로 낳은 자식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는지 모르겠냐?"
"모르겠어요. 시애를 싸안기 위해 너도 한 식구다, 하는 마음으로 그랬다면 그건 진심에서
우러나온 친절이거나 배려가 아니라 그런 포옹력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자기 극복과도 같은 무서움이었겠지요."
"그래, 그걸 자기 극복이랄 수도 있겠지만, 그 엄마한테 당신이 낳은 자식 하나를 그렇게 정해 준 어머니의 속뜻은 그보다 깊고 슬기로웠던 거였지."
"무슨 뜻인데요?"
"널 자식으로 생각하고 아이를 낳지 말라는 말을 그렇게 한 거니까."
그 말을 하며 형은 내 얼굴을 피해 맥주잔을 기울였다.
"그래서 무섭다는 거예요, 어머니는....."
나도 맥주잔을 기울였다.
형은 이야기를 바꾸어 아파트가 언제면 다 완공해 입주할 수 있을 것 같더냐고 물었고, 나는 얼마 안 있으면 완공될 것 같은데 그냥 우리가 이대로 살게 되면 그걸 아내에게 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위자료니 뭐니 하는 그런 생각으로가 아니라 우리의 별거가 아무래도 길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그렇게 전한 것이었다.
그러다 나는 다시 형에게 전에 아내가 내게 물었었던 말을 물어보았다. 그때 아버지는 주무실 때 어떻게 하셨느냐고. 그러나 아내가 묻더란 얘기는 하지 않았다.
"알아요, 나도. 자식으로서 이런 거 묻는 게 여간 불경스러운 생각이 아니라는 거. 알지만, 그것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묻는 거예요. 그때 나는 어려서, 늘 엄마 방에서 자면서도 모를 수 있지만 형님은 나보다 컸으니까 눈치로도 짐작하는 게 있을 거구....."
"그것도 어머니가 알아서 하셨어."
"물론 현명하고 슬기롭게 말이죠?"
"다른 건 몰라도 나는 니가 왜 그걸 기억 못하는지 모르겠다. 저녁밥을 먹고 나면 어머니가 니한테 그랬거든. 수호야 닌 오늘 형들 방에서 자거라 하고, 그럼 그 엄마는 놔두세요, 제가 데리고 자지요, 하고. 넌 늘 그 엄마 방에서 잤던 것 같다고 하는 데, 그 방에서 잔 것
보다 우리 방에서 잔 게 더 많아. 그런 날은 아버지가 그 방에 가 주무셨고. 그럼 넌 엄마 방에서 잘 거라고 징징거리며 떼를 쓰고. 나중에 짐작이지만 그러니 그런 널 보는 어머니 마음도 편하지 않으셨을테고..... 돌아보면 완전히 이조 때 얘기지 뭐. 처신은 그렇게 하셨어도 당신한텐 하루하루가 아픈 경험이었을테고....."
"그럼 그 상대인 수호 엄마는요? 아니, 내 엄마는요?"
"....."
이번엔 형이 낯선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루하루가 장미의 나날이었나요?"
"취했구나 많이....."
"아니, 취하지 않았어요, 아마 하루하루가 지혜롭고 슬기로운 처신에 질식할 것 같은 나날이었겠지요."
"그래도 그 분 떠나실 땐 그렇게 떠나지 않았어."
"몰라요, 난 그것도. 어느 날 학교에 갔다 오니까 아침까지만 해도 달려 있던 앞니를 뺐을
때 느껴지는 꼭 그런 허전함으로 엄마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어머니는 한 손으로는 붙잡고 한 손으로는 등을 밀고했을 테고요."
"그땐 나도 어렸어. 내가 결혼할 때 어머니가 그때 그 분 떠나던 때의 얘기를 하시더라. 들어올 때에도 아버지 모르게 왔지만 갈 때에도 아버지는 다시 안 돌아올 거라는 것도 모르
게 떠났다고....."
"그럼요. 기품 있는 분만 알면 되는 일이니까."
"취해도 그렇게 말하지 마라. 깨어나면 후회해.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가 하고."
"후회는 안 해요, 나는. 큰형님이나 형님한테는 그런 얘기를 해도 나 한텐 한 번도 그 엄
마 떠나던 때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그래, 차마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지, 너한테는."
"어린 시절 나도 그 일의 직접적인 당사자였으니까, 내가 따라서 그 엄마 아들을 하라고 한 게 아니라 어머니의 목적 다른 계산으로 그 엄마 아들을 하라고 했고, 그런데 그 아들은 진짜 모자처럼 정들어버렸고....."
"넌 어머니가 등을 밀었다지만, 그래, 마음속으론 그런 일에 등을 안밀 사람이 없겠지. 처음엔 그분이 떠나기는 하는데 아무도 그게 떠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게 혼자 떠날 생각을 했던 모양이야. 며칠 전부터 서울 집에 있는 옷들을 가져와야겠다고 하더래. 아버지한테도 형님한테 그렇게 얘기해 허락을 받아달라고 하고, 그래서 어머니가 짐작을 하고 아버지 몰래 물으셨대. 필요하면 여기서 해 입으면 되지 자네 꼭 서울에 가서 짐을 가져와야겠느냐고. 그랬더니 그 분이 이제 떠날 때가 되어서 그런다고, 아버지가 싫어진 것도 아니고 수호 니가 싫어진 것도 아니고 형님의 인품을 감당할 수 없어 떠나야겠다고. 니는 그걸 어머니가 등을 밀었던 거라 하지만, 내가 아는 걸로는 그게 아니야. 그때 어머니가 그 얘기를 하실 때, 그보다 몇 달 앞서서도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시더라. 그땐 꼭 서울에 가서 옷을 가져와야겠는가 하시니, 그럼 다음에 가지러 가겠다고 했고. 그러니 아버지는 그런 눈치도 모르고 옷 가지러 가겠다는 사람 옷도 못 가지러 가게 한다고 어머니에게 화를 내시고....."
"그럼 처음엔 붙잡았는데 두 번 째엔 왜 안 붙잡으셨대요?"
"니가 그 엄마에 대해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는 것만큼 나도 그 분에 대해 좋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기품과 교양은 어머니에게만 있었던 게 아니라 그 분도 그 이상의 지혜와 교양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고..... 붙잡으니까 그 분이 그러시더래. 형님이 그러시면 나는 여길 떠나기 위해서라도 수호 동생을 가질 마음을 갖게 될 거라고, 그러면 오히려 지금 보다 쉽게 떠나갈 것 같다고..... 이해하겠냐. 너? 아이가 있으면 오히려 쉽게 떠나질 것 같다는
말..... 빈 마음으로 떠나는 것보다는 정붙이 하나를 데리고 떠나는 게 덜 쓸쓸할 테니까....."
"이해해요...... 두 분 다....."
"떠나려면 몰래 떠나는 방법도 있었겠지. 그렇지만 그렇게 떠나는 건 어머니한테도 그 분한테도 맞지 않았던 거야. 서로에게보다 스스로에게 용납할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르고."
"그래도 어머니는 무서워요. 그 엄마로선 당연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부분도 있었을
테고요."
"그건 어머니도 마찬가지야. 똑 같은 무게로 상처를 받고 있었을 테니까. 아버지가 시내 차부까지 나가 바래다줬다러라. 옷 가지러 가는 줄 알고..... 마지막 보는 거라고 어머니가 아버지를 보내셨던 거지. 니 생각에 다른 사람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 같냐? 중간에 그 분 마음이 바뀌거나 이니면 아버지가 눈치를 채고 도로 데리고 들어올지도 모르는 일인데."
"어머니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어머니 아니냐구요?"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그 분한테서 편지가 왔어. 겉봉엔 아버지 이름을 썼지만, 내용은 형님 보세요, 하고. 나도 봤다, 그건..... 수호 니 얘기를 많이 했던 것 같고..... 어머니는 지금도 그걸 가슴에 담고 계셔. 언젠가 우리 수호 성공하면 찾아올 거라고 했다고..... 지금도 어머니가 가끔 그런 말씀하는 거 너도 들어 알 거야. 우리 수호 글 잘해 신문엘 나고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하니 얼굴 보면 품에 안고 자던 옛정으로 금방 알아볼 거라고......"
"나보다 형님이 좋은 추억 많이 가지고 있네요. 나는 왠지 아프고 쓸쓸한 추억들만 가지고 있는데."
"쓸쓸할게 어딨냐, 이제 와서, 다 어릴 때 일인데."
"아뇨, 형님은 몰라요. 아버지에 대해선 몰라도 어머니에 대해선 내가 평생을 두고도 갚지 못할 마음속으로 빚처럼 담아온 서자 의식(庶子意識)을....."
나는 서서히 오르기 시작하는 취기 속에 조금은 쓸쓸하고 비감한 기분으로 남은 잔을 들어 비웠다. 한 배로 태어난 형제라도 형님은 모른다.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어제의 일보다 더 선명한 기억으로 떠오르는 그 날의 일을. 2학기가 되어선 한동안 데려다주지 않던 학교를 중간 중간 업어가며 데려다주고 나서 그 엄마가 떠났을 때, 아니 학교에서 돌아와 습관처럼 우리 엄만 어디 갔어요, 하자 어머니가 어둡고도 무거운 얼굴로 느 엄마 서울에 니 옷사러 갔다고 했을 때,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그 무엇을 깨닫듯 직감적으로 나는 그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니라 어머니가 내 엄마라는 걸 알았고, 그러면서도 눈물을 쏙 뺄 만큼 한꺼번에 여러 마음으로 밀려오는 그 빈자리의 허전함 속에 어린 마음에도 나는 그 동안 그 엄마 아들 노롯을 해 온 것에 대해 진짜 내 엄마인 어머니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할 부끄러움과도 같은 죄스러움을 느꼈다. 그 엄마가 떠나자 모든 것이 한꺼번에 알아진 것인데 나 혼자 마음속으로는 그 엄마를 기다려도 아버지한테까지도 언제 엄마가 오느냐고 묻지 않았다. 아니, 누구에게도 그 엄마 얘길 입 밖으로 꺼내선 안 된다는 걸 머리가 아닌 어린 가슴의 상처로 안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그것은 내 마음 속 깊은 곳의 빚처럼 남아 성장할 만큼 성장해서도 어머니 앞에선 늘 어떤 의무감과도 같은 죄스러움 내지는 서자 의식을 느끼곤 했다. 형님은 모른다, 그런 내 유년시절의 감당하기 벅찼던 이별과 그 이별이 준 마음의 상처를.....
"서자 의식이라고 했나?"
"왜요?"
"취해도 그런 말 함부로 뱉는 거 아니야."
"형님들한테나 은호한테는 그렇겠지요. 어린 시절 그런 일도 없고 그런 생각을 할 이유도 없으니까. 결혼했을 때, 어머니는 나한테 그런 얘길 안 했어도 상인이 엄마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내가 의붓자식이거나 어디서 낳아온 자식이 아니냐고."
"그때의 일 때문에 널 그렇게 대하거나 생각하는 형제는 없다. 그 소리가 어머니에게도 욕이고 형제들한테도 욕이라는 걸 몰라서 그러는 것도 아닐 테고."
"그럼 금방 시집온 여자가 무얼 안다고 그런 소리를 했겠어요? 다 눈에 보이니까 그랬던 거 아니겠냐구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내 마음속의 생각이 행동으로 그렇게 나타나고 하니까."
"다시는 그런 말하지 마라. 행여라도 들으시면 섭섭해하신다."
"이 소리도 오늘 취하지 않았으면 어머니가 아니라 형님한테도 못했겠지요. 하고 싶어도 도리 때문에 못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 속의 그런 의식 때문에라도 못하는 거구요."
"그건 어머니도 마찬가지 심정일 게다. 니가 그 분에 대한 얘기를 못 묻듯 어머니도 니한테 그 분 얘기를 못하는 거고."
"모르겠어요, 나도 전에 상인이 엄마한테 그 엄마 얘기를 할 땐 나도 어머니를 좋게 얘기했어요, 기품 있고 슬기롭게 처신하셨다고. 그러다 이번에 상인이 엄마를 불러 내리는 걸 보곤 갑자기 어머니가 무서운 분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겉으로 보기엔 기품과 슬기지만 그런 기품과 슬기가 직접 가슴에 와 닿는 그 엄마한텐 그것 하나하나가 얼음과도 같은 벽들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죠."
"너도 그만 자야겠다. 나도 내일 회사 나가자면 일어서야겠고, 그리고 제수씨 일은 잘 생각해서 결정해라. 지금처럼 니 혼자 격해진 감정만으로 처리하지 말고."
형님이 간 다음 나는 취한 손길로 거칠게 워드프로세서의 뚜껑을 열곤 '아내는 강릉에 갔
다.'라고 두드리고 그 아래에 다시 '5월이 오면 함께 수색에 가자던 아내는 8월인 지금 어머니에게 가 있다' 라고 두드렸다. 형님은 어머니가 그 엄마를 두 번씩이나 붙잡은 걸 그 처지에선 베풀기 어려운 따스함으로 해석했지만, 처음부터 그 일은 인정으로 처리하거나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그 엄마가 처음 떠나려던 길을 붙잡은 건 떠나더라도 다시 오지 않을 보다 모진 마음이 준비되었을 때 떠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엄마 역시 그것을 그런 뜻으로 읽었던 것이 아닌지.
그러자 전에 그렇게 떠올리려고 애써도 떠오르지 않던 그 시절의 그림 하나가 떠올랐다. 어머니와 그 엄마가 부엌에서 약을 달이고 있었다. 어머니는 굳은 얼굴이었고 그 엄마는 조금 불안한 듯 난처해하는 얼굴이었다. 어머니는 삼베 보자기에 약을 짜 담았다.
"가지다 드리게."
"형님....."
"자넬 두고 내가 가지가면 그 양반 눈에 자네하고 나하고 시애 싸움하는 것으로밖엔 안보여."
그때 아버지는 일주일을 넘게 마작판에서 들어오지 않았다. 그 엄마가 들어오기 전에도 아버지는 자주 그랬다.
"다른 말하지 말고 노시더라도 몸 걱정하며 노시라고만 얘기하게."
엄마가 자개 쟁반에 하얀 사발을 얹어 들었다.
"수호 에미 따라가 아버지 기신 델 알리줘라. 아버지도 니가 부르고."
정미소 뒷방에 가 내가 아버지를 밖으로 불러냈다. 엄마는 약이 든 사발을 건네며 어머니가 하라고 한 말만 했다.
"철호(큰형)에미가 시키더냐?"
아버지는 사발을 든 얼굴을 찡그렸다.
"형님은 왜요, 제가 당신 여러 날 안 들어와 걱정되니..... 어서 들기나 하셔요."
"다 안다. 한두 해 산 것도 아니고."
아버지는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퀭한 얼굴로, 그러나 내 눈엔 싫은 걸 억지로라도 참고 용케 그것을 비우는구나 싶게 약을 비웠다. 아마 어머니보단 엄마를, 그것도 약을
비우게 하지 못했을 때의 엄마를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엄마가 주머니에서 박하 사탕을 꺼냈다.
"벌받으면서도 입에 단 거 무나. 수호나 줘."
엄마는 그걸 내 입에 까 넣어 주었다.
"밖에서 기다려라. 내 금방 들어갔다 나올 테니."
이후로 아버지는 다시 마작방에 가지 않았다. 그 엄마가 떠난 다음에도 그랬다. 그런 엄니가 지금은 나를 상대로 아내 편에 서서 옆에 있지도 않은 시애 싸움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아내는 이제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해도 수색엔 절대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두드렸다. 강릉에서 가장 먼 거리에 수색이 있었고, 수색에서 가장 먼 거리에 강릉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어느 쪽도 멀리 할 수 없는 곳에 내가 있었고, 신사동아파트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쪽에서 먼저 아내를 부를 생각이 없었다. 전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더니 자꾸만 강릉으로 간 아내가 괘씸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아파트의 잔대금을 내고, 잔대금을 낸 온라인 입금증을 들고 현장사무실로 가 전에 월계동에서 받아왔던 것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을 또 한 뭉치의 열쇠꾸러미를 받아왔다. 집도 넓지 않은데 웬 열쇠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 일일이 세어보니 스물 네 개나 되었다. 현관에서 보일러실까지 여섯 개의 고리마다 세 개씩의 열쇠가 매달려 있었고, 제일 오른쪽에 '기타' 라고 쓴 고리에 그것을 신청한 사람들에게만 주는(샤시도 그렇고 오토폰도 그렇고 조합에서 일괄 신청한) 현관 보조 열쇠가 자그마치 여섯 개나 똑 같은 것들이 징그럽게 매달려 있었다. 나는 자동차 조수석에 넣어두었던 월계동 아파트의 열쇠까지 꺼내와 거의 쉰 개나 되는 것들을 마땅히 둘 데가 없어 가끔 곤로에다 라면을 끓여먹는 냄비에 담아 책상 대용으로 쓰는 식탁(그러니 서랍이 없는 건 당연하고) 위에 올려놓았다. 처음 며칠 동안은 그걸 봐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하숙으로 놀러온 후배가 그게 뭐냐고 물었고, 나는 두 군데 아파트의 열쇤데 놔둘 데가 없어 그렇게 두고 있다고 말했다.
"이야, 그럼 이거 최소한 3억짜리 메뉴 아냐, 이건 책상이라기보단 식탁이고 그 위에 냄비가 있고....."
나는 쓸쓸하게 웃었다. 후배는 월계동 아파트도 전세 아파트가 아니라 내 이름으로 된 아파트이고, 내가 신수동으로 나와있는 것도 순전히 원고 때문인 것을 알고 있었다.
"형수님은 언제 오시는데요?"
후배는 아내가 강릉으로 가 있는 것도 내가 원고 때문에 여기로 나온 다음 갑자기 어머니가 편찮아서인 줄 알고 있었다. 하숙으로 데리고 들어오기 전에 미리 그렇게 말을 해 두었다.
"모르지 뭐. 어머니가 일어나셔야 오든말든 할테니."
"그럼 형이 다시 월계동으로 들어가 있어야겠네. 아니면 거기 짐을 신사동으로 옮겨와 들어가던가."
"쓰던 데서 원고나 마저 끝내고."
그 원고는 마감을 보름 늦추어 이제 마지막 백 매 정도의 분량만 남아 있었다. 마음을 다잡고 쓰면 사나흘 안으로도 끝을 볼 수 있을 만큼 속도감도 붙어 있었다.
"그럼 형, 몇 집 살림을 하는 거요? 월계동에도 집이 있지. 신사동에도 집이 있지, 여기도
있지. 그것만해도 세 집 살림 아니우? 아니지, 형수님 강릉에 가있으니 네 집 살림을 하는 거네 뭐."
아마 후배가 그런 말을 하고 간 다음날부터였을 것이다. 어느 정도 속도감을 붙여 놓았던
글이 도대체 거기서부터 한 줄도 써지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며칠동안, 나오지 않는 변을 보기 위해 애쓰는 사람처럼 책상에 앉아 원고를 잡고 낑낑거렸다. 얼만큼 썼다가 읽어보면 그게 아니어서 날려버리고 다시 썼다간 또 날려버리곤 했다. 꼭 월계동에서 아내와 한창 냉전을 할 때처럼 앞뒤가 콱 막혀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다 나중엔 억지 의무감으로 다시 워드프로세서를 눌러대자 한 줄 한 줄 이어지는 문장 사이의 거리가 처음 썼다가 날려버린 것보
다 더 나빠져 수색에서 강릉 사이만큼이나 멀게 뜨는 것이었다. 한 번 늦춘 마감일이 열흘앞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다음날은 신축아파트의 입주 전 하자를 신고하는 마지막 날이어서 일찍 회사에서 나온다고 해도 거기 갔다오다 보면 또 하루를 그냥 빼먹게 되어 있었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 깊은 절망감으로 책상 한쪽 구석에 놓아둔 열쇠 냄비를 바라보았다. 전에도 느끼고 있었지만 후배가 다시 그것을 상기시켜 주듯 말하고 간 세 집 살림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그것이 더한 걱정으로 다가왔다. 나중엔 원고보다 그게 더 당장의 큰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냥 새 아파트를 아내에게 주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나지, 하는 생각을 해왔던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여길 정리해 다시 월계동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릉 어머니에게 가 있는 아내가 순순히 열쇠를 받아 그곳을 들어갈 것 같진 않았고, 그렇다면 나야 여기에 계속 있으면서 아내의 태도를 관망할 수밖에 없다지만 내 집도 아닌 월계동 집은 들어가 살 것도 아니면서 언제까지고 그렇게 거기에 짐을 놔둔 채 전세로 가지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왜 그 단순한 생각을 이제야 하는지 모를 심정이었다. 나중엔 글 때문이 아니라 열쇠 냄비만 봐도 머릿속이 복잡해져 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냄비는 냄비대로 치우고 열쇠는 책을 빼낸 [서양철학사 상권] 케이스에 담아 다른 책과 함께 구석 자리에 놓아두고 다시 책상에 앉아봤지만 그러나 그러곤 거기서 요지부동이었다.
다음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에도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두 곳 아파트의 열쇠였고,
그것이 이 방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다시 머릿속이 찌근찌근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출근할 때 가방에 신사동 아파트의 열쇠를 챙겨 넣었다.
그날 오후, 나는 서울에 올라온 지 8년만에 처음 수색엘 갔다. 그것도 거기에 가자고 해서
간 게 아니라 신사동 아파트로 가다가 모래내 부근에서 길을 잘못 들어 수색까지 가게 된 것이었다. 정말 그렇게 가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언젠가 거길 가더라도 아주 편한 상태에서 아주 편한 마음으로, 그리고 그 엄마에 대한 애틋한 기억들을 바람에 일렁이는 잔잔한 물빛처럼 하나 하나 떠올리며, 자동차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몰면서 가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날 수색행은 나도 그것이 수색 가는 길인지 모르게 엉겁결에, 이미 들어가 보니 거기가 수색인 것이었다. 아마 사람들은 이야기를 해도 그날 내가 그곳에서 느낀 이게 아닌데 하는 기분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에도 여러 번 그런 경험이 있지만 길을 잘못 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느끼는 당황감 같은 것은 오히려 문젠 아니었다. 왜 하필 잘못 든 길이 수색 가는 길이었는가 하는 것과, 그런 기분과 그런 식으로 수색엘 가고 싶지 않았는데 최악의 상황에서 최악의 방법으로 수색엘 가게 된 것에 대해 나는 우선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 내 자신이, 아니 그런 실수가 벌어지는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건 단순히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도 막상 수색 안을 들어가 느낀 정말 이게 아닌데 하는 느낌에 비하면 지극히 작고도 사소한 것이었다. 아무런 준비없이, 최악의 상황에서 최악의 방법으로 들어간 길이긴 하지만 그전부터 나는 어떤 식으로 들어가든 들어가기만 하면 수색이라는 동네가 온통 물빛 무늬를 이루고 있을 줄 알았다. 최소한 내 눈에 그렇게 보일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러나 그곳엔, 내가 마음속에 아껴두며 그토록 보고자 했전 무늬가 없었다. 물빛 무늬도, 물빛도 아닌 그 어떤 무늬도..... 정말 이것은 아니었다. 아니, 아니고 싶었다. 나는 '수색'이라는 표지판마저 믿을 수 없어 그 아래에 차를 세우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곳이 수색이 맞느냐고 물어보았다. 두 번 물어도 사람들은 맞다고 했다. 나는 자동차를 되돌려 천천히, 처음 그 길을 가게 되었을 때 내가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속도대로 천천히, 수색을 나오며 그 길의 이쪽 저쪽을 살폈다.
그리고 또 다시, 이번엔 꼭 그 무늬 비슷한 거라도 봐야겠다는 심정으로 길을 따라 서울이 끝나고 수색이 끝나는 시계(市界)까지 들어갔다 나왔다. 그러나 그곳 어디에도 무늬는 없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부터 살던 월계동이거나 그 동안 몇 번 가 본 신사동 주변과 마찬가지로 그 곳은 그냥 어떤 특색도 없는 서울 외곽지역 중의 하나였다. 내가 거기에서 꼭 물빛무늬를 봐야 함에도, 아니, 찾아갔을 때 그곳은 나에게 내 마음 속에 있는 것과 똑 같은 무늬를 보여 주어야 함에도.....
아파트의 하자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수색엘 갔다가 나는 그곳에 늦게 들어가 대충 한 번 거실과 방안들만 휘휘 둘러보고 나왔다.
"하자 많지 않아요?"
밖을 나오자 같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하자가 많지요, 하는 얼굴로 물었다.
"별로 없는 것 같던데요."
"다행이네 그럼. 우린 뭐 제대로 된 게 없어요."
하며 그가 보여주는 하자 신고서엔 거의 빈칸이 보이지 않았다. 아내와 함께 온 그는 안방 욕실 수건걸이의 나사가 하나 빠졌다는 것까지 적었다. 처음부터 난 언제 들어가더라도 아내가 들어갈 집인데 큰 하자 없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둘러보았고, 그는 작은 하자라도 꼭 찾아내야겠다는 식으로 둘러본 차이일 것이다. 하긴 나는 욕실에 수건걸이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고 나왔던 것이다.
"참, 이 동 몇 호예요?"
"305호요."
"그때 로얄 층 뽑지 않았어요?"
"12층이었는데 나중에 변경 신청할 때 바꿨어요."
"이런 지금은 5백 더 들어간다 해도 나중에 팔 땐 그게 나은데. 입주는 언제 해요?"
"글쎄요....."
"전세 주실려고?"
나는 못 들은 척하고 입구에 세워둔 자동차의 문을 열었다. 그날에도 원고는 한 줄도 나가지 않았다. 나는 더 애쓰지 않고 다른 날 보다 일찍 자리에 누워 떠오르는 대로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다. 병신도, 암만 그쪽을 처음 가보는 길이어도 그렇지 거기서 우회전을 했어야지, 우회전을. 모르지 또..... 수색이 거기 아니라 어디에 있어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이왕 들여다보는 거 찬찬히 볼 걸 그랬나. 창문틀은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보일러도 옳게 가동해보지 않았는데. 한 번 그래놨으니 다음에 편한 마음으로 가도 더 나은 느낌으로 오지 않을 거야. 그나저나 열쇠를 받아 가시라고 얘기나 해야되는 거 아니야. 하나하나 살펴보면 거기도 하자가 적지 않을 텐데. 징그럽게 웬 열쇠는 저렇게 주렁주렁 매달았는지.
무늬가 없어, 무늬가. 월계동에도 우편물이 꽤 쌓였을 텐데, 그러고 보니 거기 공과금하고
관리비도 두 달 내지 않았고. 열쇠냄비가 뭐야 열쇠냄비가. 그걸 그렇게 담을 데가 있었나. 거기선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회전이라고. 원고 닷새만 더 늦춰 달락 하면 정 주간이 잡아먹으려고 달려들겠지. 해설이 붙는다면 그쪽도 빨리 받아 읽어야 뭘 쓰든 말든 할 테고. 그거야 처음부터 빈 집이니 나둬도 되지만 월계동은 어떻게 하지. 저놈의 열쇠 다 집어 내던질 수 없나. 거기 안 들어간다면(아내가) 나도 언제까지 여기 이러고 있을 수 없는데 말이지, 잘 나가다 왜 안 써지는지 모르겠어. 욕심이었는지도 모르지 무늬가 어디 있다고. 아니면 환상이었거나.....
정 주간의 전화는 다음날 사무실로 왔다. 그는 닷새 후엔 틀림없는 거지, 했다. 나는 틀림없을 거라 했다. 쓰긴 다 썼는데 다시 한번 읽어보고 있는 거라고. 그는 특유의 억양으로 오우케이, 하고 전화를 끊었다. 머릿속에 그 한 냄비 되는 열쇠들이 구멍 뚫린 눈들을 한 고기떼들처럼 잘랑거리며 왔다갔다했다. 거기 들어가 살든 안 살든 일단 정리는 해 둬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사람들이 사무실을 좀 비워주길 기다리다 현관으로 내려가 전화를 했다. 아내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나는 집이 다 지어져서 입주를 하란다 말하고, 처음엔 12층을 뽑았는데 당신과 아이가 살기에 편하게 3층으로 바꾸었다고 말했다. 아내는 요즘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마포라고 대답하고 올라와 들어가든 안 들어가든 열쇠를 받아가라고 했다. 아내는 전화를 받는 중간 잠깐만요, 하고 수화기를 막은 채 어머니와 무슨 이야긴가 나누고 나더니 (말로는 상인이가 자꾸 매달려서요, 했지만) 오늘, 하다가 아니 내일 올라 갈테니 낮에 자기가 들어갈 수 있도록 내가 먼저 월계동에 들어가 아침 출근할 때 경비실에 키를 맡겨달라고 했다.
나는 아내가 올라오겠다는 말을 너무도 선뜻하게 하는 것 같아 의사전달이 잘못된 게 아닌가 싶어 다시 12층을 3층으로 바꾼 건 그 아파트가 내가 들어가 살 아파트가 아니라 당신이 들어가 살 아파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화를 하는 동안에도 눈에 구멍이 뚫린 고기떼들은 여전히 내 머릿속을 짤랑거렸다.
저녁에 나는 그 고기떼들을 편지 한 장과 함께 비닐 봉지에 겹겹이 싸 월계동 아파트의 경비실에 맡기고 돌아왔다. 편지에 나는 원고 마감 때문에 그러니 꼭 필요하고 급한 연락이 있더라도 사무실로든 하숙으로든 닷새 후에 전화를 달라고 썼다. 열쇠를 담았던 냄비도 납작하게 밟아 대문 바깥 쓰레기통에 넣었다. 정말 거짓말처럼 다시 글이 써지기 시작했고 속도감이 붙기 시작했다.
아내는 정확하게 닷새 후 아이와 함께 회사 앞으로 나와 전화를 했다. 아내에겐 의도적으로 소홀한 듯 보이려 노력했다.
"일부러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돼요."
어머니는 아내에게 어떤 가르침과 자신감을 주었던 것일까. 나만큼이나 서먹서먹한 얼굴을 할 줄 알았던 아내는 시작부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떠날 땐 여기 들어와 있거나 그냥 거기 있을 거면 키라도 찾아가라고 전화를 해 난..... 난..... 먼저..... 못..... 끊겠어요, 하던 여자였다.
"원고는 다 넘겼어요?"
"어제."
"당신 몰랐죠? 내가 이런 모습으로 나올지는."
"낯설어."
"나도 낯설어요. 전 같으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못 그랬는데."
"어머니가 시키더나?"
나는 30년 전의 아버지처럼 말했다.
"어머님한테 당신 살아온 얘기 많이 들었어요."
"수호엄마 얘기?"
"예. 당신이 모르는 부분도 많아요. 훌륭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머니가?"
"아뇨. 나는 그분이요. 그리고 어머니두요"
"아프게 살면 훌륭해져. 누구나..... 그렇게 살고 그렇게 이별하면."
"어디 가서 식사해요."
"난 별로 생각이 없어."
"그래도 해요. 앉아서 할 이야기가 있어요."
식당에 가서도 나는 물수건으로 내 손을 닦고 얼굴을 닦고, 아이의 손과 얼굴을 닦아주며
가능한 맞은편에 앉은 아내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주문도 아내가 했다. 나는 물수건을 만지작거리며 아무거나, 했다가 아내가 그런 음식이 어디 있어요, 해서 그럼 당신 하는 걸로, 했다.
"이제 그만해요. 꼭 전에 월계동 식탁에 앉은 것처럼......"
"할 얘기가 뭔데?"
"당신은 우리가 그때 무슨 일이 있었을 때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알아요?"
"모르겠어. 그냥 모든 게 다 귀찮았으니까."
"나도 처음엔 우리가 권태기를 겪나 했는데 강릉 가서 생각하니 그게 아니었어요. 그때 같이 신사동에 갔다오고 나서 바로 그랬어요, 당신은 차안에서 꿈을 꾸는 듯한 얼굴이었고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자동차에서 내리면서부터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다음에 수색에 같이 가자고 했지만 나한테 해선 안 될 얘기를 한 것처럼."
"어머니 얘길 듣고 나니까."
"아뇨, 당신이 당신도 못 느끼는 사이에요. 그 날 저녁 당신이 서재에서 원고를 쓰고 있는데 내가 가만히 뒤로 다가가니까 언제 들어왔냐며 쾅하고 워드프로세서 뚜껑을 닫았고요. 제목만 큰 글씨로 수색 가는 길이라고 쓰고요. 맞지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 당신은 집에서 원고를 잘 못 쓰는 것 같았어요, 나한테 말도 잘 하지 않고요."
"상인아, 이제 수건 좀 거기 그만 놔두지 못하니?"
"뭐라시더냐니까."
"니 생각엔 아범이 왜 그러는 것 같냐고 해 신사동 갔다오던 날 얘기를 했어요. 당신이 차 안에서 한 얘기도 하고 방에 들어갔을 때 얘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어머님이 당신 자랄 때 얘기도 해줬어요, 그래서 자식이지만 미안한 것도 많으시다고....."
"어머니가 나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어서."
"왜 없으시겠어요. 당신도 알면서....."
"지금도 어머닌 나한테 수호엄마가 생겨서 그러는 게 아닌가 생각하시잖아."
"다른 형제들이 그랬다면 덜 그렇게 생각하시겠대요. 그게 다 당신이 자꾸 마음에 밟히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지."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잖아."
"그럼 부부 사이가 냉랭해지면 우선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어요? 당신은 잡지사다 영화사다 하며 여자 전화도 자주 오고. 또 그거 아니어도 뭐 이번엔 그 어머니가 계셨고....."
그러던 사이 식사가 나왔다. 아내와 나는 육개장이었고, 아이는 갈비탕이었다.
"나는 매운 것 싫은데."
"그럼 당신 내가 뭘 시켰는지도 모르고 그거 달라고 했어요?"
"됐어. 먹지 뭐. 그런데 당신 신사동으로 들어갈 거지? 열쇠가 너무 많아서, 냄비는 보기만 해도 징그럽고."
"무슨 얘긴데요?"
"먹기나 해. 그냥 그런 게 있으니가, 아버님 건강하셔?"
"예, 어머님은 올라가라는 말씀 안 하는데 아버님은 내려가던 날부터 올라가라고......"
"당신은 왜 올 마음이 없었고?"
"갈 땐 누가 가고 싶어 갔나요? 아버님은 자꾸 올라가라고 하시는데 어머님이 그렇게 올라가면 다시 내려오게 된다니까 못 왔지. 전화도 하지 말라시고, 이런 얘기까지 하면 안 되는데....."
"그래서 어머님이 무섭다는 거야. 그래서. 보내는 사람 언제 어떻게 보내야 다시 오지 않는지까지 아시는 분이니까. 당신뿐 아니라."
"왜 먹지 않고요. 다른 거 시켜드려요?"
"됐다니까."
"원고 쓰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텐데."
"그것보다 말해봐. 나도 신사동으로 가야할지. 월계동으로 가야할지. 아니면 그대로 마포
에 있어야 할지 결정해야 하니까."
"뭘요?"
"다음에 나하고 수색 갈 수 있겠어?"
"그 소리가 왜 안 나오나 했어요. 지난 봄부터 나는 가슴앓이하고 당신은 수색병 앓고, 그
바람에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생인손 앓으시고..... 그런데, 12층 그냥 놔두지 왜 바꿨어요?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 계단 창문에서 내려다보니까 이쪽 저쪽 양쪽으로 다 확 트이던데, 당신 늘 가고 싶어하는 수색 쪽도 보이는 것 같고."
"거기 가 봤어?"
"그럼요."
아내는 올라와 월계동 아파트도 내놓고, 또 강릉에서 올라올 때 손 없는 날을 골라 이삿날도 잡아왔다고 했다.
"날은 당신이 전화했던 날 어머님이 잡아오셨어요. 9월 7일로. 그날이 당신한텐 제일 좋대요. 동방에서 서방으로 가는 거니까 그것도 당신한텐 아주 좋고요. 꼭 전세를 빼야 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거야 뭐 차차 빼도 되고. 포장이사도 알아봤어요."
"그러다 내가 안 간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
"그럴 리가 있나요."
"그래. 다 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하는 일인데 말이지?"
그날 우리는 거의 반년만에 방을 같이 썼다. 내가 수색엘 다녀온 이야기를 했을 때 아내는 그렇게 가니 그렇지 자기와 함께 가면 무늬가 보일거라며 이사를 하면 이번엔 꼭 함께 그곳으로 가보자고 했다.
그러나 나의 두 번째 수색행은 아내와 함께가 아니라 어머니와 함께였다.
이사를 한 후 일부러 다니러오신 어머니를 모시고 나는 신촌 백화점엘 나갔다. 그리고 오던 길, 수색엘 갔던 것인데 사천교 다리를 건널 때까지만 해도 나는 늘 다니던 대로 모래내길로 접어들려고 우회전 깜빡이를 넣었다가 다리를 거의 다 건너 와선 내 마음속의 무엇이 시켜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게 그대로 직진을 해버렸던 것이다. 예전 수호 엄마가 약쟁반을 들고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도 가기 싫어도 한 번은 그곳엘 가 봐야한다고 생각했다. 남가좌동을 지나고 북가좌동을 지나 불광천에 이를 때까지 나는 제 길을 가는 것처럼 표정을 바꾸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차를 몰았다. 그러다 불광천을 건너면서부터 자동차의 속도를 떨어뜨리고 아이구, 길을 잘못 들었구나, 잘못 들었어, 를 연발하며 창 이쪽 저쪽의 풍경과 옆자리에 앉은 어머니의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여기가 어딘데, 하고 묻기라도 하면 여기가 수색이잖아요, 예전 수호 엄마가 살았다는, 하고 큰소리로 말하면서 그때 어머니의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런 정신도, 아까 거기 다리에서 오른쪽을 가야 하는데 다음 번 다린 줄 알고....."
그래도 어머니는 그럼 여기가 어딘데, 하고 묻지 않았다. 바깥 풍경은 지난번 엉겁결에 왔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와 함께 온 길이라면 최소한의 비극미 정도는 있어줘야 했다. 나는 다시 한 단계 속도를 떨어뜨리면서 연신 이쪽 저쪽 창 밖과 어머니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그러다 수색 시장 앞을 지나면서 어머니의 얼굴이 오히려 처음보다 차라리 차분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조금 더 가다보면 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거기 가서 차를 돌려야겠어요. 길을 잘못 들어가지고....."
"길이야 잘못 들면 바로 찾아가면 되지. 무슨 걱정이겠냐."
저 놀랍고도 무서운.....
말을 안 해 그렇지 어머니는 내가 잘못 들었다는 길이 수색임을 알고 있었다. 오면서 본 여러 군데의 표지판에도 그렇게 써놓았고 도로에도 흰 글씨로 군데군데 큼지막하게 우리가
왔던 길이 수색 가는 길임을 써 놓았다.
나는 수색교를 지나 시계(市界) 가까이 가 자동차를 돌렸다. 그리고 내가 먼저 말하기로 했다.
"어머니는 여기가 어딘 줄 모르지요?"
"와보기는 처음 와 봐도 어딘 줄은 알 것 같다."
"아시겠어요?"
"그래. 전에도 아범 여기 와 봤디나?"
"예, 에미 강릉 내려가고 나서..... 일부러는 아니었고요."
"안다. 말하진 않아도. 에미한테 들은 얘기두 있구. 그러니 니가 얼매나 잘 살아야 것나. 이 에미 저 에미 한 다 받아 가지구....."
나는 다시 엑셀을 밝고 있는 오른쪽 발에 힘을 주었다.
"가시죠, 어머니....."
그러나 그 날에도 나는 그곳에서 무늬를 보지 못했다. 또 다른 기분으로 아내와 함께 가도 그 무늬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오직 내 마음속에서만 아련한 추억으로 일렁이는 그 물빛 무늬..... 나의 수호 엄마.....
이순원(1957- )
강원도 강릉 출생. 강원대 경영학과 졸업. 198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1988년 <문학사상> 신춘문예에 <낮달>이 당선됨.
이 승 우
F는 눈을 뜨고 일어나 앉으며 맨 먼저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그의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시계바늘은 두 시 삼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낮이었다. 목덜미며 어깻죽지가 끈적끈적한 게 여간 불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적어도 두 시간 이상 잠을 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특별하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잠은 속옷처럼 익숙했다. 그는 언제나 잘 수 있었고, 얼마든지 잘 수 있었다.
정작 특별하고 이상한 점은 다른 데 있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보았다.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머릿속은 여전히 얼얼했다. 꿈을 꾼 것인지 아닌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바로 조금 전에 잠에서 깨어났으므로 정황으로 보아 꿈을 꾼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긴했다. 그러나 꿈이라고 말해버리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 선명했다, 는 수준이 아니라, 이건 아예 도무지 꿈 같지가 않았다. 아무리 선명한 꿈이라고 하더라도(어쩌면 선명할수록 더욱)꿈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느리고 있게 마련인 그 특징적인 비현실감이란 게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F는 자신이 혹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어보기도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잦은 잠버릇에 길들여진 그이고 보면 무의식적으로 그런 연상을 할 법도 하지 않은가.......그런 생각이었다. 아닌게아니라 육체는 깨어 있으면서도 의식이 반쯤 잠에 빠져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 또한 확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단정하려고 들면 다른 가능성 쪽이 가만있지를 않았다. 자신이 조금 전에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다는 사실만은 어쨌든 부정할 수 없지 않느냐는 반격 앞에선 마땅히 대응할 것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영락없이 꿈을 꾼 것이었다. 그렇지만, 꿈이라고 단정해버리기에는 또 너무나 아쉬운 구석이 많았다. 그래서 F는, 그 두 가지 가능성의 중간을 택하여 자신이 잠들기 직전에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일이 일어나기 직전부터 그가 조금씩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고 가정하면 꿈인지 현실인지 잘 분간되지 않는 이 현상의 수수께끼는 풀린다. 하지만 그랬을 때는 다른 수수께끼의 돌출을 감당해야 한다.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서 벌어진 그 일이 한숨 자고 일어난 다음에도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되는 상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머릿속이 뒤엉킨 생각들로 북적거렸다. F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창 밖은 나른했다. 투명한 광채를 내며 햇빛들이 출렁이고 있었다. F는 문득 머리가 어질어질해오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한참 후에 떴다. 실눈을 하고 햇빛들에 점령당한 세상을 보았다.
세상은 한없이 막막하고 적막했다. 세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출렁이는 햇빛들에 녹아 없어진 것 같았다. 바람도 먹히고 소리조차 기화되어 사라졌는가. 그 숨막히는 한낮은 역설적으로 평화로웠다. F는 언제나 이 거짓의 평화를 못 견뎌해 왔다. 그는 그 세상의 적막한 평화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깜깜한 절벽을 보았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수족관처럼 나른한 이 한낮의, 거짓의, 위장된 평화의 숨통을 끊어버리고 싶었다. 늘 그랬다. 그것이 그의 오래된 한결같은 욕망이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욕망을 실천에 옮긴 적이 있었다. 한번은 아파트 단지가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또 한번은 자신의 집 건너편에 있는 유리창을 향해 자신이 마시던 커피잔을 던졌다. 그러나 세상은 끄떡하지 않았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사람들은 밖으로 쏟아져 나오지도 않았다. 단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의 집 벽에 매달려 있는 인터폰의 띵똥띵똥 소리를 내며 울렸을 뿐이었다. 관리실에 연결된 인터폰은 기계적인 목소리로 그의 몰상식적인 행동을 경고했다. 다음달 관리비에 그가 깬 건너편 집 유리창 값이 추가될 것이라는 고지도 물론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어느 날 그가 옥상에 올라가 공동 안테나의 선을 모조리 잘라버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은 그의 행동에 대해 철저하게 냉담한 반응을 보임으로써 그의 욕망을 무력화시켰다. 그의 욕망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반세상적인 욕망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이 낮잠이 습관화된 것은 그의 받아들여질 수 없는 욕망이 거푸 좌절을 맛본 사실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는 그 욕망을 세상을 향해 푸는 대신에 자신 속에 담아두는 편을 택하기로 했던 것이다.
F는 목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잘못하다가는 출렁이는 햇빛에 그 자신조차 녹아날 것 같아서 그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 꿈에선지 현실에선지 영 분간되지 않는 일이 다시금 선명하게 떠 올라왔다.
"당신을 초대합니다....."
또렷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어딘지 꾸며낸 것 같은 낭랑함이 느껴졌지만, 발음이나 억양은
정확했다. 전혀 생소하지만은 않았다. 입고 있는 옷이며 몸짓조차도 바로 앞에 사람이 서 있는 것처럼 선명했다. 남자는 흰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까만 구두를 신고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검정 색깔의 긴 연미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 옷차림은 정중하다는 인상과 시대 착오적이라는 인상을 동시에 주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남자의 얼굴만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얼굴 부분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초점이 흐려지는 것이었다. 마치 안개가 가득 덮인 날 유리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것처럼 눈코의 윤곽이 뭉개져 보였다. 나이가 얼마나 되는 지도 잘 분간하기 어려웠다.
"당신을 초대합니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정중했다. 깊숙이 고개를 숙여 절까지 했다. 현실적인가 하면 비현실적이었고, 비현실이라기에는 또 너무 현실에 가까웠다. 그러나 F는 이제 더 이상 그 남자가 자기를 초대한 것이 꿈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런 것을 따지는 일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 순간, 물론 그 뜻하지 않은 초대에 감흥을 받은 영향 탓이 컸겠지만(그는 이제껏 누구에게도 단 한 차례의 초대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의 눈앞에 유일한 현실로 버티고 있는, 태산과도 같은 세상의 나른한 평화에 대한 혐오감이 그의 판단 기능에 심각한 위해를 가했다.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커피잔을 앞집 유리창을 향해 던지거나 공동 안테나를 망가뜨려야 할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그 알 수 없는 파괴 충동의 가열로 그의 얼굴 색은 새파랗게 변했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잠을 자든가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 두 가지의 선택 중에서 그 순간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초대를 받았던 것이다.
F는 입고 있는 옷을 모두 벗고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맨몸에 찬물을 뒤집어썼다. 차가운 물줄기가 온몸을 관통하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그는 샴푸로 머리를 감았다. 그 다음에는 얼굴에 비누 거품을 잔뜩 묻히고 정성스레 면도를 했다. 그는 꽤 오랫동안 면도기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 때문인지 면도날의 귀퉁이에 붉은 녹이 슬어 있는 게 보였다.
그는 개의치 않고 얼굴에 가져갔다. 녹이 슨 면도날은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시간도 오래 걸렸고, 턱밑에 조그만 상처까지 생겼다. 그러나 F는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면도를 마친 F는 몸의 물기를 닦고 목욕탕을 나왔다.
그는 오랫동안 옷장에 처박아두었던, 그래서 나프탈렌 냄새가 짙게 배인 흰 와이셔츠와 감색 양복을 꺼냈다. 넥타이도 골랐다. 붉은 바탕에 색색의 둥근 꽃이 그려진 넥타이였다. 감색 양복이 연미복에 가장 근사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양복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F는 그 옷을 입었다. 머리를 빗어 뒤로 넘기고, 구두를 꺼내 신었다. 그의 구두는 검정 색이었는데, 먼지가 뿌옇게 앉아 있었다. 그는 구둣솔로 정성스럽게 구두를 닦았다. 그의 이마에서는 땀이 송골송골 솟아나려고 했다. 그는 서너 가지 색깔의 줄무늬가 가로 세로로 쳐진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닦고, 아랫입술을 앞으로 내밀어 바람을 만들었다. 현관에 그의 상반신을 비출 수 있는 거울이 걸려 있었다. F는 그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수상한 적막이 수풀처럼 깔린 아파트 단지를 조심조심 벗어났다. 모처럼 만에 성장(盛裝)을 하고 외출을 하는 길이라 그런지 발걸음이 제법 무거웠다. 그의 앞에서, 뒤에서 햇빛은 정신없이 출렁이며 그의 의식을 비틀어댔다.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세상은 이미 외계에서 들이닥친 햇빛의 식민지였다.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숨죽이고 있는 한낮이었다. 그가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간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차도로 이어지는 진입로에 들어설 때까지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 충만한 햇빛만이 유일한 목격자였다. 그러나 햇빛은 어떤 상황이 생겨도, 여하한 경우에도 증언하지 않을 것이었다.
F는 거의 차가 다니지 않는 차도를 가로질러 왕릉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왕과 그의 부인들이 누워 있는 능은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보다 더 넓었다. 왕은 죽어서도 살아 있는 자보다 훨씬 좋은 자리에 훨씬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왕릉의 담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는, 자기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평지도 아니었고, 길도 좋지 않았다. 좁다란 흙 길이 나타났다. 길 양쪽으로 우거진 아카시아나무와 은행나무가 사람의 키 위에서 서로 팔을 뻗어 반대편 나뭇가지와 악수를 하고
있었다. 덕분에 길은 갑자기 어두워지고, 그는 마치 터널 속을 걸어가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터널은 제법 길었다. 어디까지고 이어져 있을 것만 같았다. 나무 그늘 속을 걸어가는 데도 몸에서 땀이 났다. 그는 자주 멈춰 서서 손수건으로 이마와 목의 땀을 훔쳤다.
나무 터널이 끝나자 벌판이 나타났다. 그 앞에 나타난 길은 세 갈래였다. 왕릉의 담을 타고 계속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하나 있고, 산 속으로 들어가는 오른쪽 길이 또 하나였다. 나머지 하나의 길은 벌판을 관통해 있었다. 벌판은 붉은빛을 띠고 누워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 건축물도 세워져 있지 않았고, 아무 농작물도 심어져 있지 않았다. 그곳은 그냥 있었다. 벌거벗은 채 그냥 누워 있었다. 무장을 한 햇빛만이 그 벌판을 산책하고 있었다. F는 땀을 닦고, 숨을 고르고, 벌판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발바닥 밑에서 푸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걸어가자 벌판이 사라지고 호수가 나타났다. 거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단 한 사람과도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다. 더위에 지친 매미가 목청을 늘어지게 뽑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매미 역시 햇빛과 마찬가지로 아무 증언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
햇살은 호수의 수면 위에서도 변함없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F는 뒤를 돌아보았다. 벌판은
그의 뒤로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호수를 껴안고 있는 형국의, 그다지 크지 않은 산이 벌판의 오른쪽에 우뚝했다. 산은 곧게 허리를 펴고 선 나무들로 울창했다. 그 산을 뚫고 길이 열려 있었다. 똑바른 길이었다. 포장도 되어 있었다. 그리고, 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나무문도 하나 세워져 있었다. 그것은 어떤 경계를 표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길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 끝까지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F는 그 나무 문 앞에 멈춰 서서 심호흡을 했다.
F는 처음 이곳까지 걸어왔던 날을 기억한다. 아마도 맞은편 집 유리창에 자신의 커피잔을
던져 유리창을 박살내버린 날이었을 것이다. 그는 되풀이되는 일상의 지겨움 앞에 질려 있었고, 속에다 핵폭탄을 장착하고서도 겉으로는 태연하게 거짓 평화를 시위하는(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 세상의 철면피함에 넌더리를 내고 있던 참이었다.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기를, 예컨대 그 감춰져 있는 핵폭탄이라도 터져서 이 위선으로 가득 찬 세계의 안일한 평화를 깨뜨려주기를 강렬하게 소망하고 있었다. 그의 바람은 너무도 크고 거칠어서 세상이 깨지지 않으면 그 자신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의 의도적인 소란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평화를 깨지 않았다. 인터폰이 걸려왔고, 관리인이 기계적인 음성으로 다음달 관리비에 유리창 값을 청구할 것이라는 사실만을 통보해왔을 뿐이었다. 세상의 노골적인 무관심은 그를 견딜 수 없게 했다.
그렇다고 그날 그가 처음부터 이곳까지 올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때까지 이곳에 와본 적이 없었고, 이런 곳이 있는지도 알지 못했었다. 지난 왕조 시대의 통치자와 그의 부인들이 매장되어 있는 왕릉 주변까지가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몇 번 되지 않았다. 따라
서 그가 그날 여기까지 와서 이 호수와 산,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길과 문을 발견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순전한 우연은, 그러나 또 얼마나 광대한 섭리의 그물을 생각키우는가.
그날, F는 그 길을 따라 울창한 숲 속으로 들어가 볼 생각을 했다. 어떤 계획이나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곳을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그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도 그냥 솟아났다. 생각 없이 발걸음이 움직였다고 하는 쪽이 보다 사실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처음엔 그가 들어서고 있는 길목의 양쪽에 세워져 있는 나무 구조물이 문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반질반질한 표면에 별 모양과 꽃 모양의 무늬가 음각 되어 있는, 그것은 차라리 무슨 조각품처럼 보였다. 그 자리에 서서 오랜 세월을 견딘 듯 귀퉁이마다 각이 무뎌져 있었고, 나무 표면의 색깔도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퍽 오래 전에 만들어진 물건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몇 년 전의 작품이라는 생각을 지나, 몇백 년 전의(가량 저 능에 누워있는 주인이 통치하던 시대의) 산물일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했다. 그것은 모든 오래 된 물건들이 지니고 있게 마련인 알 수 없는 신비감까지를 내 풍기고 있었다. 막연했고, 잠깐 스쳐간 생각에 불과했지만, 그 나무문의 존재는 F에게 어떤 식으로든 상당히 색다른 인상을 주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에 있었을까. 어디에 숨어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까. F가 그 문을 건성으로 살핀 후 안쪽으로 한 발짝 걸음을 내디뎠을 때 불쑥 한 사람이 그의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물어왔었다. 키가 크고 몸이 건장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모자를 쓰고 있었고, 그 때문에 처음엔 얼굴을 볼 수 없었고, 초록색 계통의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언뜻 보아 군인의 차림새를 연상시키는 복장이었는데, 자세도 로봇처럼 딱딱하고 건조해 보였다. 목소리만으로는 여자인지 남자인지를 구별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 길을 따라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F는 손가락으로 산 속을 가리켰다.
"당신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로봇처럼 생긴 사람이 나무처럼 우뚝 선 채로 말했다.
"어째서 안 된다는 겁니까?"
F의 목소리는 자기도 모르게 짜증스러워졌다. 그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F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다소 과장되게 지어 보이고, 그 사람의 말을 무시한 채 한 발짝 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양팔을 벌리고 막았다. F는 자신의 어깨에 닿는 상대의 팔 근육이 강철처럼 단단하다는 걸 눈치채고 움찔했다. F는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눈을 쳐들어야 했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얼굴을 보았지만 여전히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표정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길목에 서 있는 나무 구조물을 눈으로 가리켰다.
"저것은 문입니다. 저 문은 들여보내야 할 사람과 들여보내지 않아야 할 사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문은 사람을 차별합니다.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합니다. 열려 있기만 하는 것은
문이 아니지요. 문이 세워져 있는 것은 들어갈 사람이 있고 들어가지 않아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문이 세워져 있겠습니까? 더구나 여기 이 길에 말입니다."
F는 그 순간에, 그 고색창연한 나무문을 지나 계속 길을 간다는 것에 어떤 비밀스런 뜻이 개입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때문에 그는 그 길을 쉽게 포기해버릴 수가 없었다. 이 길을 계속 걸어가면 무엇이 나오는가. 이곳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그러나 F는 문지기의 무쇠팔과 표정 없는 눈길에 압도당한 자신의 곤궁하고 후줄근한 정신을 보았다. 그는 못내 아쉽고 궁금하다는 눈길을, 야트막한 경사를 이루며 일직선으로 쭉 뻗은 산길 쪽으로 한동안 보내고 있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뭉기적거리며 그곳을 벗어났다.
그날 이후 F는 여러 차례 이곳까지 걸어왔었다. 그가 집을 빠져 나와야 할 일은 너무 많이 일어났다. 그는 왕과 그의 부인들이 누워 있는 능을 지나고, 아카시아와 은행잎이 둥글게 하늘을 덮고 있는 좁고 긴 터널을 지나고, 붉은 흙이 융단처럼 깔린 텅 빈 벌판을 지나 호수에 이르렀다. 그러면 어김없이 산 속을 향해 뻗은 길이 나타나고, 별과 꽃무늬가 음각된 오래 된 나무문이 있고, 문 곁에는 또 언제나 군복 차림의 옷을 입은, 키가 크고 무쇠 같은 팔을 가진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되지 않는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도무지 그 문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지기는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쫓아냈다. 나중에는 그 문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고만 있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집을 나오면 어쩌자는 작정 같은 것도 없이 이곳까지 걸어오곤 했다. 꼭 무엇에 홀린 것만 같았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F의 마음속에서는 문 안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서 버렸다. 어떻게 해서든 한번은 기필코 들어가 보고 싶다는, 그 생각은 불같은 열망이 되었다. 세상을 깨뜨리려는 그의 가당치 않은 욕망은 이제 저 문을 지나 금지된 산길을 걸어 들어가 보려는 욕망으로 대치되었다. 그의 간절한 마음을 헤아렸음일까, 언젠가는 크게 선심이라도 베푸는 듯한 태도로 그 문지기가 '이곳에 들어오려면 초대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해준 적이 있었다. F는 그 초대장을 어디서 누구에게 받아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문지기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이제껏 그자가 문을 지키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 문지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은근히 그자가 앞을 막아서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던 터였다. 그를 초대한, 그 꿈인지 현실인지 잘 분간되지 않는 이야기를 해주면 작자가 믿어줄까,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문지기는 어디로 갔을까....F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빈 문 앞에서 잠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어디에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걸어 들어가 버리려는 마음을 무쇠 같은 작자의 팔 근육과 기계 같은 눈초리가 저지했다. 그 때문에 그는 곧게 뻗어 올라간 야트막한 언덕길을 바라보며 나무 문 곁에 꽤 오래 서 있어야 했다.
길은 자석처럼 사납게 그를 끌어당겼다.
그 길을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그의, 세상을 부수려는 거친 욕망과 맞바꾼, 자석 같은 욕망이 결국 문지기의 근육과 눈초리를 무시하게 했다. 그는, '나는 초대를 받았다.'고 중얼거렸다. '문지기가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가 자리를 비켰기 때문이고, 그가 자리를 비켜준 것은, 나를 들여보내지 않을 이유가 더 이상 없어졌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했다. 나의 행동은 합법이다, 라는 생각은 자신의 불법적인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인지도 모르는 일이긴 했다. 좀더 정확한 표현을 쓰자면, 그는 자신의 행동의 합법성을 보장해줄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았다. 그 문제에 관하여 입장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그 사람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행동을 유보할 수도 없었다.
판단을 뒤에 둔 채 행동에 나서야 하는 그런 상황이란 것이 있는 법이었다. 말하자면 그때 F의 경우가 그랬다. 곧게 뻗은, 크고 울창한 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언덕길을 바삐 올라갔다. 한참 올라가다 뒤를 돌아보니 널브러져 있는 붉은 벌판이 보였다. 산길로 접어드는 입구에 나란히 서 있는 나무문도 보였다. 그 옆에는 아까 보이지 않던 문지기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흡사 나무처럼 우뚝 서서 빈 벌판을 지키고 있었다.
어느 만큼 올라가자 길은 내리막길로 바뀌었고, 노폭도 조금씩 좁아졌다. 나중에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 어디쯤에서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 더 이상 벌판의 붉은빛도 보이지 않았고, 문도, 문지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는 햇살이 기세 좋게 반짝거리는 물밭이 펼쳐져 있었다. 밖에서 볼 때는 호수인 줄 알았는데 강이었던가. 강은 오른쪽 끝을 향해 길게 뻗치다가 산자락을 따라 급히 몸을 꺾고 있었다. 그가 걷는 길은 그 물가 쪽을 향해 열려 있었다. F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무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는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막연한 채로지만, 금지된 작물을 재배하는 큰 농장이거나 으리으리한 별장이라도 숨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무언가 색다른 사태와 조우할 것이라는 희망, 그곳이 없었다면 그가 무엇 때문에 이곳을 그렇게 간절하게 꿈꾸었겠는가, 그는 무언가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일상의, 적막하기 짝이 없는 시궁창에 큰 파장을 일으킬 특별한 돌덩어리를 찾고 있는 참이었다.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를 구경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영혼이라도 내놓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그였다. 그런데 이건 뭔가....그 앞에 펼쳐진 풍경의 단조로움과 평범함이 그의 의욕을 꺾었다. F는 성급하게도 그냥 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길이 닿는 곳까지 내려가 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물가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을 향해 납작 몸을 숙이고 있는 낡은 집을 한 채 발견했다. 그 집은 우묵한 지형 속에 신묘하다고 할 정도로 잘 은폐되어 있어서 아주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전혀 발견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열 길 높이로 치솟은 가지가지 나무들이, 마치 어미 닭이 자신의 날개로 병아리들을 감싸듯 그렇게 완벽하게 그 집을 덮고 있었다. 그 집은 조금도 특이하지 않았다. 특별한 느낌은 그 집을 가리고 있는 지형
에서 말미암았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F는 그 집의 교묘한 위장술에 대해 채 감탄하지도 못했다.
길목을 지키던 문지기와 똑같은 복장을 한, 그러나 그 사람보다는 훨씬 키가 작고, 근육이나 눈길이 한층 부드러워 보이는 한 사람의 안내를 받아야 했다. 이 사람 역시 남자인지 여자인지 잘 분간되지 않았다. 모자를 너무 깊이 눌러써서 얼굴의 반 정도는 보이지도 않았다.
어차피 F는 사태를 찬찬히 헤아려볼 여유가 없었다. 그럴 마음조차 없었다는 쪽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문이 열렸고, F는 엉겁결에 그 문 안으로 들어갔다. 덜컹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자 일순 어둠이 온몸을 덮쳤다. 순식간에 검은 베일을 얼굴에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바늘 구멍만한 빛도 보이지 않았다. 닫힌 문을 더듬어보았다. 견고했고, 손잡이를 찾을 수도 없었다.
F는 손을 휘저으며 한 발을 조심스럽게 앞으로 내밀었다. 마땅히 발이 디뎌질 것이라고 예측한 자리가 뜻밖에도 허공이었다. 사태를 깨닫고 재빨리 발을 거두어들이려 했지만, 아래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린 그의 가벼운 발바닥은 허공에서 춤을 추듯 몇 차례 허우적거렸다. 그리고는 마침내 다른 쪽 발까지 허공의 어둠 속으로 끌려갔다. 아주 짧은 순간에 그의 몸은 중심을 잃고 공중에 던져졌다. 그는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F는 자기 몸이 굉장히 오랫동안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까마득하게 깊은 곳으로, 한없이 먼 곳으로 추락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아마도 스올이거나 과거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하늘이거나 미래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아니면 다른 세계?..... 그리고 암전. 깜깜한 공백. F는 오랫동안 자신의 의식을 가지고 사고하지 못했다.
"여기는 당신을 위한 세계입니다. 우리는 당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습니다."
얼마나 길고 무거운 시간이 그의 의식 위에 덮여 있었을까. 몸이 꿈틀거림과 동시에 그의
정신도 점차 회복되어갔다. F는 눈을 떴다. 그러나 그의 눈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눈을 떴으나 뜨지 않은 것과 매일반이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만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어쩌면 그 소리 때문에 의식을 회복한 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신은 이제부터 미로를 뚫고 지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미로는 길고 복잡합니다. 그리고 곳곳에 방이 있습니다. 그 방들은 당신이 참으로 이 세계에 합당한 인물인지, 그 자격을 테스트할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세계에 들어온
이상 추방이란 없습니다. 이 점을 명심하십시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이 세계에서 추방이란 없습니다. 아무나 들어올 수는 없지만, 들어온 사람을 내쫓는 법 또한 없습니다. 당신은 열 개의 방을 거칠 수도 있고, 단 한 개의 방도 거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어떤 길을 택해 걷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이 운이 좋은 사람이기를 빕니다. 당신은 이미 첫번째 방에 들어와 있습니다. 하지만 운이 나쁘다고 미리부터 의기소침해지진 마십시오. 아직까지 이 검은 방을 경과하지 않고 이 세계로 들어간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서 말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
F는 할 수 있는 대로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큰 방인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다만 상대가 목청껏 말을 할 때 울리는
공기의 파장으로 미루어 공간이 그렇게 크지 않다고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그래서 검은 방이라고 하지 않았소. 내가 어디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는 알려고 할 필요가 없소. 그러나 이 점만은 유념하고 있는 게 좋을 겁니다. 나는 당신을 아주 가까이에서 매우 또렷하게 보고 있습니다."
"여기는 어딥니까? 내가 어디에 온 겁니까?"
"당신이 매우 오고 싶어했던 곳입니다. 아니, 당신이 와야 할 세계입니다. 이곳은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나의 친구들? 나는 친구가 없소."
"모두 다 그렇게 말합니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친구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친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여기 온 겁니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F는 고개를 저었다. 상대방은 잠시 말을 끊었다. 짧은 침묵의 골이 견딜 수 없게 깊고 길어 보였다. 상대방의 표정을 살필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말을 중단한 사실이 몹시 걱정스러웠다. F는 불안때문에 눈알을 휘둥거렸다. 이윽고 이때까지와는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못 알아듣겠습니까? 내 말을...."
F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기묘한 일이지만 처음부터 그 사람의 말들은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말이 이
상하지 않은 것은 상황이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 낯선 사람이 설명해주는 상황을 그가 자연스러운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그 낯선 목소리가 그에게 길고 복잡한 미로를 통과해가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그 점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그 당연한 사실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또 그는 그 사람이 하는 말들 사이의 모순을 지적하지도 않았다. 예컨대 이 세계에 적합한 인물인지를 시험할 것이라고 하면서 추방에 대한 가능성을 일소시키는 그자의 말에 대해 아무 의문도 표시하지 않았다. 그런 의문 따위가 부질없어지는 이상한 경험의 자장 안에 그는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자신이 앞에 한 말을 부정했다.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이해하고 말고요."
"좋습니다. 이제 당신은 내가 내는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방을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여기에 길고 복잡한 미로가 있습니다. 그 길은 누가 왜, 누구를 위해 만든 것입니까?"
F는 생각을 모두었지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문제가 너무 황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꼭 대답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물론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부터 백을 세겠습니다. 그 동안 답을 말하지 않으면 당신은 이 어둠 속에서 하루 낮과 하룻밤을 보내야 합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 방은 밤이고 낮이고 늘 이렇게 깜깜합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겠지만 바닥에는 지네와 같은 다족류의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아닙니다. 벌레들은 밤에만 움직입니다. 당신은 밤과 낮을 구분하지 못하지만, 그러므로 이 방에서 따로 밤이 어디 있느냐고 항의할지 모르지만, 놈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놈들은 밤과 낮, 자기들이 활보해야 할 시간과 조용히 잠이나 자두어야 할 시간을 너무나 똑바르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백을 세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F는 한번 더 백을 세어달라고 요구했다. 검은 방의 주인은 잠깐 동안 생각하는 눈치를 보이더니 F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러나 F는 두 번째 백이 끝났을 때도 정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F는 다시 백을 헤아려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박에 거절당했다.
"당신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벌레들과 이 어둠 속에서 지내야 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어둠이 생각을 명철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그 말을 하고는 목소리가 사라졌다. 어디로 간 것일까. 밖으로 나가는 기척 같은 건 전혀 들리지 않았는데 그자가 방에 있다는 느낌이 갑자기 없어져버렸다. 하지만 F는 이제 그자를
부르지 않았다. 불러서 선처를 부탁한다는 식으로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또 설혹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자가 부탁을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거역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그가 이 방에서 깨달은 첫 번째 교훈이었다.
F는 무릎을 꺾어 세우고 머리를 그 위에 앉았다. 길고 복잡한 미로, 그것을 누가, 왜, 누구를 위해 만들까?.....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엉뚱한 생각들만 엉키고 풀리며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그 상황 속에서도 그는 자기가 왜 이렇게 수상하고 깜깜한 방에 들어앉아 엉뚱한 문제를 받아놓고 끙끙거려야 하는가, 하는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마치 자기가 풀지 않으면 안 되는 당연하고 마땅한 숙제인 양 생각했다. 이 숙제를 풀지 않으면 이 방을 나갈 수 없다. 여기를 나가지 않고는 미로를 벗어날 수 없다. 내 앞에는 이 황당한 수수께끼처럼 난해한 미로가 펼쳐져 있다...... 그런 생각들만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는 눈을 뜨고 있었던가.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눈을 감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가 그 점을 잘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은 그 방이 완벽하게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눈을 뜨든 감든 마찬가지인 상황에선 눈을 뜨고 있거나 감고 있다는 자각증상이 현저하게 둔화되게 마련이었다. 그런 자세로,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그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의 잠을 깨운 것이 무었이었는지 처음에는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친숙하지 않은 이 물감이 온몸 곳곳에서 스멀거린다고만 여겼다. 잠의 결을 따라 의식의 수면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면서 그는 그런 이물감 따위는 상관하지 말기로 작정했다.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나 그는 이내 그럴 수 없는 상황과 만났다. F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뛰어 올랐다. 날카로운 통증이, 예컨데 송곳에 찔린 듯한, 또는 살점이 뜯긴 듯한 예리한 아픔이 그의 발과 허벅지와 팔뚝에 동시 다발적으로 가해졌기 때문이었다. F는 몇 번이고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머리끝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의 의식을 마비 시켰던 두터운 잠이 순식간에 벽을 뚫고 달아나 버렸다.
손으로 몸을 더듬었다. 물컹하고 바삭거리는 것들이 여기저기서 만져진다고 느끼는 순간 그는 다시 외마디 비명을 질러야 했다. 무엇인가 몹시 예리한 것이 그의 손가락을 물어뜯었기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F는 자신의 손가락 가운데 일부의 살점이 뜯겨져나갔다는 사실을 짐작했다. 붉은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으리라는 추측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절망스럽게도 그런 사정은 손가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온몸이 벌레 떼들의 공습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적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숫자가 많았고 가지고 있는 무기도 살벌했다. 그에 비해 F는 혼자였고 그들과 맞설 무기도 없었다.F는 엉겁결에 겉옷을 벗어서 마구 휘둘렀다.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고 정신없이 휘둘렀다. 벌레 떼들이 후드득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벌레들은 이내 전열을 정비해 가지고 돌진해 들어왔다. 그 때문에 F는 계속해서 폴짝폴짝 뛰어야했고, 마구 비명을 질러대야 했고, 자꾸만 겉옷을 휘둘러야 했다. 벌레 떼들의 숫자가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것일까. 아니면 놈들은 죽었다가도 금방 다시 살아나는 무슨 불사의 재주라도 타고난 것일까...... 끝이 없이 달려드는 벌레들의 공격으로 F의 몸은 넝마처럼 찢기었고, 곧 이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탈진 상태에 빠져버렸다. 그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썩은 나무처럼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을 때야 벌레들은 공격을 멈추었다.
그 방은 시간까지도 감금하고 있었다. F를 따라 들러온 시간은 밖으로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은 앞을 향해 똑바로 흐르는 자신의 본성을 잊어버리고 제자리만 한없이 뱅뱅 돌았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공회전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F는 그 방의 주인이 그를 부르는 목소리를 다시 들었다.
"당신은 이제 이곳에서 나가야 합니다."
깜깜하고 단단한 바닥을 네발로 기면서 F는 소리나는 쪽으로 나아갔다.
"지금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검은 방의 주인이 큰소리로 웃었다. 그자의 크고 갑작스런 웃음은 F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기억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자갈밭처럼
덜그럭거리는 소리만 냈다. 그의 생각은 한치 앞으로 나가지를 못했다. 이윽고 웃음을 그친
남자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 수수께끼는 아무도 풀지 못합니다. 적어도 이 검은 방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걸 풀지 못하면 이곳을 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그러나 그렇게 말한 사람은 당신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겁니다. 길들은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합니다. 옆으로 꺽이기도 하고 빙 돌아가기도 하지요. 당신이 동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고 해서 또는 당신이 올라가는 것을 택해 걷기 시작했다고 해서 당신의 목적지가 반드시 동쪽이 되거나 하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이쪽으로 가도 길은 당신을 저쪽으로 데려다 놓고는 합니다, 당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러합니다. 당신은 이미 그 이치를 터득한 줄 알았는데요. 당신은 당신의 삶이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고 느껴왔지요 ? 그래서 세상을 모욕하고 저주하기도 했지요 ? 그러면서도 그 모순이야말로 당신이 견뎌야 할 세상과 삶의 참 얼굴이라고 하는 인식을 수용하는데 주저하는 까닭을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나는 어떤, 보편타당한 원칙이랄까, 말하자면 삶의 틀을 잡아주는 규범 같은 것이......"
검은 방의 주인은 다시 큰소리로 웃었다. F는 그만 스스로 기가 죽어서 거기서 말을 중단
해 버렸다.
"이곳에 잘 왔습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미로를 통해 중심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당신은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서두르십시오."
"지금 나가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나는 몹시 다쳤습니다. 벌레들이 내 몸을 넝마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F는 자기도 모르게 코끝이 매워오는 걸 느꼈다. 알 수 없는 설움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올라오는 듯했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자신이 받은 고통을 환기시키려고 했다.
"자신의 고통을 특별하고 유별난 것인 양 과장하는 태도는 스스로에게는 위안이 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위안까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합니다. 더구나 그 위안은 아주 하찮은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은 이곳에 오기 전에 비단이라고 두르고 있었습니까?"
F는 할말을 찾지 못했다. 무언가 그자의 논리에 대항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의 정신은 한없이 창백했다.
"조금만 여기 이 어둠 속에 머물게 해주십시오. 나는, 지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꼼짝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더구나 밝은 곳에 나갔을 때 내 몰골을 보게 될 일이 정말이지 끔찍하기만 합니다. 부탁입니다. 조금만 이 어둠 속에서 쉬게...."
"당신이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당신은 이방에서 하루를 더 있어야 합니다. 벌레들은 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벌레를....그것만은.....하지만 나는 나가는 문을 모릅니다. 이 방에는 문이 없지 않습니까? 문이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벌레 떼들에게 시달리는 동안 벌써 열고 나갔을 것입니다."
F는 다시금 그 카랑카랑한 웃음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 소리가 너무 싫어서 F는 귀를 막았다. 한쪽 귓불이 떨어져나가고 없다는 걸 그의 너덜너덜한 손가락이 확인해주었다. 그는 얼른 귀에서 손을 떼었다.
"누가 이 방에 문이 없다고 했습니까? 아무도 당신에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아예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당신은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나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때문에 여기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내 말이 틀렸습니까? 물론 당신을 비난하려는 뜻은 조금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니까요. 의심스러우면 지금 당신이 있는 쪽의 벽을 가만히 밀어보십시오. 원한다면 다른 쪽도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손만 갖다대면 벽은 문이 될 것입니다."
F는 시키는 대로 했다. 몸을 바닥에 대고 누운 채로 손을 벽에 갖다대고 조금 힘을 주었다. 그러자 정말로 벽이 열리는 것이었다. F는 조금씩 문이 열리는 정도에 따라 가느다란 실 모양이다가 점차로 폭포나 집채가 되어 쏟아져 들어오는 빛의 세례를 받았다. 그 빛은 아파트 단지와 벌판과 호수 위에서 출렁거리던 햇살과는 어딘지 달라 보였다. 햇살보다는 조금 더 무거워 보였고, 색깔도 탁했다. 그 빛은 자연광이 아닌 것 같았다. 그 빛이 그의 눈을 찔렀다. 그는 통증 때문에 한동안 눈을 뜰 수 없었다.
이윽고 그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을 때 그의 몸은 이미 검은 방을 빠져 나와 있었다. 그는 목소리만 들었던 검은 방의 주인의 얼굴을 끝내 보지 못했다. 그가 본 것은 그의 앞에 뻗어 있는 좁고 길고요란한 길들이었다.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몸이었다. 모처럼 차려 입은 옷들은 걸레나 같았고, 그의 몸은 밤새 다리가 많은 벌레들에게 뜯겨서 너덜너덜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몸을 끌고 자기를 괴롭힌 벌레들처럼 네 발로 기어서 앞으로 나아갔다. 혼란스럽고 경황없는 중에서도 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만은 의심 없이 선명했다. 미로를 벗어나 중심으로....그것만이 그의 길이었다.
길은 길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힘들여 걷긴 하면서도 자신이 지금 옳게 걷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길은 갑자기 막히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한꺼번에 서너 개씩 나타나기도 했다. 무슨 표시 같은 것도 없었다. 여기가 거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았다. 출구가 입구가 되고, 동쪽이 남쪽이 되는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진을 빼는 일이었다. 부지런히 걷는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때의 여지없는 낭패스러움을 어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의 부지런한 보행을 포기할 수 없는 자의 막막함은? F의 입장이 그랬다. 그는 줄곧 혼란스러워하고 끝없이 막막한 심정에 사로잡히면서도 자꾸만 앞으로 나아갔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들어갔던 검은 방을 기웃거린 것도 여러 차례였다. 꽤 멀리 왔다 싶어 은근히 대견해하다가도 여태 그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 일순간에 다리의 힘이 쭉 빠지곤 했다.
시간은 이곳에서도 앞으로 나가지를 못했다. F가 그런 것처럼 시간 역시 미로에 갇혀 어리둥절해할 뿐이었다. 검은 방은 밤낮없이 깜깜했다. 그곳에서 시간이 멈추었기 때문이었다. 미로 속에서는 밤낮없이 환했다. 이곳에서는 또 그것이 시간이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증거였다. F가 헤매고 다닌 시간은, 따라서 측정 불가였다. 그것은 제로일 수도 있고 무한대일 수도 있었다. 몇 개의 밤이 지나고 몇 개의 낮이 사라졌는지 아무도 말할 수 없었다. 어쩌면
단 하나의 밤과 단 하나의 낮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천 개의 낮과 천 개의 밤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그 미로를 거쳐가는 동안 두 개의 방을 경유했다. 하나는 흰 방이었고, 다른 하나는 푸른 방이었다. 흰 방에는 온몸에 하얀색 옷을 걸친 사람이 있었고, 푸른 방에는 온몸이 푸른색으로 치장된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은
안개가 가득한 날 유리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것처럼 눈코의 윤곽이 뭉개져 보였다. 흰 방에서 그는 검은 방에서와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 길고 복잡한 이 미로는 누가, 누구를 위해, 왜 만드는가...... 물론 그는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 푸른 방에서도 그는 흰 방에서와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 그는 거기서도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 그는 흰 방에서 오랫동안
공중에 매달려 있어야 했고, 푸른 방에서는 얼마인지도 모르는 시간동안 물 속에 잠겨 있어야 했다. 그는 방에 들어갈 때마다 그 방의 벽에 문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 버렸고, 따라서 밖으로 도망쳐나갈 궁리를 단 한번도 하지 못했다. 그는 매번 똑같은 일을 당하면서도 마치 처음 경험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몇 번이고 까무러쳤다가 일어나며 답답하고 희망 없는 걸음을 되풀이했다.
거의 녹초가 되어, 정말이지, 이제 더 이상은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그의 앞에 겨우 나타난 미로의 끝을 보았다. 그 끝은 그가 찾은 것이 아니라 나타나준 것이었다. F는 그렇게 생각했다. 몸과 정신을 폐허로 만들어가며 수고하고 노력했지만, 정작 목표에 도달한 것은 그 수고와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다. 물론 그가 애썼기 때문에 여기까지 이르렀다. 그 공로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긴 했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공로가 지겹게 길고 한없이 막막한 그 길을 끝나게 해준 것은 아니었다. 그 끝은 그냥 나타나준 것이었다. 불쑥, 그렇다, 그렇게 불쑥 나타나준 것이었다. F는 그 사실을 또렷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그는 의식을 잃었다.
"편히 쉬십시오. 이곳은 당신의 집입니다."
F의 의식이 혼곤한 잠 속으로부터 빠져 나왔을 때 그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다. 어린아이도 있고, 노인도 있었다. 그들은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의 얼굴 가까이 입을 대고 아주 낮은 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F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몸의 이곳저곳이 삐그덕 거렸다. F는 다시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의 몸에는 희고 깨끗한 옷이 입혀져 있었다. 그는 이곳이 어디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와야 할 곳, 오기로 한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스스로가 자랑스럽기보다 자신이 그런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이 한없이 감격스러웠다. 그는 겨우 입을 열어 먹을 것을 좀 달라고 청했다. 그와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사람이 들고있던 바구니를 내밀었다. 그곳에는 붉은 색과 푸른색의, 크고 작은 음식덩이가 가득 담겨 있었다. F는 그 가운데 붉은 색이 도는 고깃덩이를 집어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맛은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고기를 씹을 힘이 없었다. 곁에 서있던 사람이 붉은 액체가 들어 있는 접시를 내밀었다. 그것은 어떤 동물의 피처럼 보였다. 그는 우선 그걸 받아 마셨다. 그리고 그는 붉은 고기를 채 다 먹기도 전에 다시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의 의식이 잠의 수렁 속으로 완전히 빠져 들어가기 직전에 F는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이 나지막하게 웃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이번에도 사람들을 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난번처럼 그를 둘러싸고 있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다른 일에 열중해 있었다. 수군거리기도 했고, 손을 흔들기도 했고, 둘 셋씩 머리를 맞대고 은밀한 미소를 교환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무겁고 심각했다.
"우리들의 왕을 뽑는 겁니다. 이리 오십시오. 당신도 참여하셔야 합니다."
F는 자기에게 말을 건 사람이 맨 처음 그에게 환영 인사를 건네었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키가 작고 얼굴이 길었다. F는 고맙다는 표시로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물었다.
"왕이오? 왕이 왜 필요합니까?"
"왕이 없으면 사람들이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왕을 필요로 합니다."
F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의 뜻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무슨 질문인가를 더 하려고 했다. 그런 의중이 내비친 걸까, 그 사람은 빙긋 웃으며 "차차 모든 걸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하고 말했다.
"어쩌면 오늘밤에 그 비밀을 알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 사람은 은근한 미소를 남기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잠시 후에 음식이 공급되었다. 음식을 공급하는 사람이 왕이었다. 머리에 금으로 만든 관을 쓴 사람이 한가운데 앉았고, 사람들은 한 명씩 그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면 관을 쓴 왕이 무릎 꿇은 사람의 얼굴을 한차례 쓰다듬은 다음 음식 접시를 건넸다. 무릎 꿇은 사람은 두 번 절하고 물러났다. 왕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 번잡한 절차가 지루하게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대체로 매우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과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긴장들을 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음식 접시를 하나씩 받았다. 왕만 빼놓고 모든 사람이 받았다. F에게도 음식 접시가 주어졌다. 이윽고 금관을 쓴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을 높이 치켜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이 왕관을 새로 뽑힐 우리들의 복된 왕에게 넘길 것입니다. 새로 태어날 왕을 찬양합시다. 헌신과 영광은 그의 것입니다."
왕이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그것을 신호로 사람들은 일제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F도 따라서 접시 위에 놓인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음식 속에 콩알만한 금이 나오면 그가 새로운 왕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가 왕입니다. 당신의 접시를 잘 살피십시오."
언제 왔는지 아까 그 키가 작은 사람이 곁에 앉아 작은 소리로 그렇게 속삭였다.
"그것이 왕을 뽑는 방식입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접시에서 금을 찾는 사람이 왕이 됩니다."
F는 움찔했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자신의 접시에서 금이 발견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니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왕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런 마음이 전혀 없다고야 할 수 없겠지만, 그런 욕망은 아주 미미했다. 그보다 더 큰 것은 두려움이었다. 이 낯선 제도와 방식이 그의 의식을 멈칫거리게 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왕이 된다고 해도 특별히 수행해야 할 일은 거의 없으니까요. 왕은 한 가지 의무와 무한대의 권리를 가집니다. 한 가지 의무 때문에 천 가지의 권리가 허용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곳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왕이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빨리 되고, 어떤 사람은 늦게 됩니다. 차이는 그것뿐이지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제비를 뽑는 이런 식의 선출 방식이라면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누구나 왕이 됩니다. 왜냐하면 왕이 되지 않으면 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왕이 천 개의 권리의 대가로 지게 되어 있는 한 개의 의무란 바로 죽을 의무입니다."
그의 설명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더 질문을 하지 못했다. 한쪽에서 와! 하며 환호성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함성과 함께 한 사람의 몸뚱이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의 접시에서 콩알만한 금이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만세를 부르며 그를 왕의 자리로 인도했다. 그는 몸이 뚱뚱하고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 이제까지 왕관을 쓰고 있던 사람이 무릎을 꿇고 새로운 왕에게 왕관을 바쳤다.
"우리 왕께 영광을! 이제 당신이 우리들의 생명입니다."
왕관을 쓴 새로운 왕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애써 눈물을 삼키면서 새로 왕이 된 뚱보는 두 손을 높이 들어 좌중을 조용하도록 시켰다.
"나는 왕으로서의 첫 번째 직무를 수행한다. 이 사람은 왕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이 사람에게 우리를 위해 사형을 선고한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졸지에 사형수가 되어버린 왕은 무릎을 꿇고 꼼짝하지 않았다. 이윽고 사람들이 달려들어 조금 전까지 왕관을 쓰고 있던 사람을 밖으로 끌고 갔다.
"이제 먹고 즐기라."
새로운 왕이 명령했다. 사람들은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게걸스럽게 음식 접시를 비우기 시작했다. F도 포크를 집어들긴 했지만, 음식을 먹을 기분은 아니었다. 사형이라니. 전(前)왕이 무슨 나쁜 짓을 저질렀을까. 무슨 흉악한 짓을 저질렀기에 왕의 자리를 내놓자마자 사형 선고를 당한다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물었다.
"저 사람이 무슨 파렴치한 짓이라도 저질렀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그럼 왜?"
"당신이 본대롭니다. 그는 왕이었습니다. 그것이 이유입니다."
F는 이번에도 그 사람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설명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 사람은 차차 알게 될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그만이었다.
F를 더욱 의아스럽게 만든 것은 왕을 선출하는 의식이 매일 저녁 반복되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매일매일 새로운 왕이 태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또 괜찮았다. 참으로 F를 충격한 것은 왕을 뽑는 의식이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새로운 왕에 의해 전 왕에 대한 사형이 선고된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특별한 잘못이나 범죄에 대한 혐의 같은 것은 고백되지도 않았고 심문되지도 않았다.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왕이었기 때문이었다. 판결 내용은 언제나 같았다. "이 사람은 왕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이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따라서 왕이 된다는 것은 곧 하루 전에 사형을 선고받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게 슬퍼하거나 놀라워할 건 없습니다. 당신은 하루 전에 사형을 선고받는 사람의 운명의 가혹함에 대해 말하지만, 사실 이 세계에 들어온 순간 우리들은 모두 사형 선고를 받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빠르냐, 늦느냐, 그 차이지요.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이 예정대로지요. 말하자면 운명이란 말입니다."
F의 의문과 놀람은 그곳 사람들의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처음부터 곧잘 말상대를 해줬던, 키가 작고 얼굴이 긴 사람만이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항의의 창구였다. 그 사람만이
F와 비교적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다. F는 왕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왕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죽는다고 응수하고 나섰다. 조금 빨리 죽느냐 늦게 죽느냐의 차이는 별 중요한 게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또 왕이 누리는 천 개의 권리에 대해 강조했다. 단 하루만에 허용된 천 개의 권리가 무슨 소용이냐는 F의 반문은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았다.
"굳이 매일 한 번씩 왕을 새로 바꿔야 할 이유가 있는 겁니까? 물론 나는 왕이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수용할 수 없지만, 많이 양보해서 설혹 그런 관례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내 생각에는 왕이 하루에 한 사람씩 새로 태어나야 할 이유나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모든 결과는 필요의 산물입니다. 하루에 한번씩 왕을 뽑는 것을 왕이 하루에 한사람씩 새로 태어나야할 확실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에 한번씩 왕을 새로 뽑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의문도 당신 스스로 풀게 될 날이 올 겁니다."
F는 불쑥, 정말로 사람을 죽이는 걸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선고만 하고 집행은 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그 의식, 왕관을 벗는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의식은, 하루 동안의 짧은 권세가 이제 그를 완전히 떠났음을 다소 충격적으로 선언하는 상징일 수 있지 않을까. 선언적인 의미 같은 것, 그런 게 아닐까.....그래서 F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을, 정말로 죽이나요? 혹시......."
"그렇지 않으면요?"
"나는, 혹시, 그러니까, 어떤 상징이라든지, 말하자면, 그런 것일 수 있지 않은가 하고......"
그 사람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왕이 일곱 번 바뀌었을 때, F는 그곳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동안 그는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생활했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하루종일 미로를 만들었다. 그것이 유일한 일이었고, 또 놀이었다. 그들은 일을 하듯 놀이를 했고, 놀이를 하듯 일을 했다. 그들은 까닭도 필요도 묻지 않고, 길을 만들었다. 열기 위한 길이 아니라 닫기 위한 길, 떠나기 위한 길이 아니라 가두기 위한 길을 만들었다. 왜 사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대답했다. 길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그러나 그 길은 가기 위한 길이 아니었다.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할 필요도 없었다. 특별한 것은 저녁 시간의 그 왕을 뽑는 의식의 되풀이밖에 없었다. F는 그 각질화 된 일상의 단조로움과 철면피함에 질리기 시작했다. 다른 세계에 대한 욕망이 서서히 그의 가슴을 채워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그곳을 떠나고자 했다. 그의 말을 들은 키 작은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왜요? 안 됩니까?"
"안 될 거야 없지요. 다만 불가능할 뿐입니다."
"무슨 뜻인지요?"
"말 그대로입니다. 가능하지가 않다는 거지요. 당신은 원한다면 언제든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아무도 말리지 않고, 그 일로 벌을 받거나 하지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곳을 빠져나가 다른 세계로 가는 일은, 거듭 말하건대,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당신은 500킬로미터나 되는 미로를 빠져나가야 합니다. 당신도 참여해서 만든 미로입니다. 역사의 시작과 함께 사람들은 미로를 만들어왔습니다. 이 미로야말로 이곳에 사람이 살아왔고, 또 살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물입니다. 미로의 곳곳에는 방이 있는데, 그곳에는 물과 불과 사나운 동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물론 무서운 벌레 떼들도 있습니다. 어떤 벌레는 당신 키보다 더 크지요. 누구도 미로를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에 하나 설혹 미로를 빠져나갔다 하더라도 기뻐하는 너무 이릅니다. 당신이 미로를 빠져나갔다 하더라도 밖으로는 아직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것입니다. 미로를 빠져나간 당신이 있게 될 곳은 바로 지금 당신이 서 있는 발 아래일 것입니다. 땅 밑 말입니다. 미로의 총길이가 500킬로미터라고 했지만 그것은 한번의 실수도 없이 그 뒤죽박죽의 길을 제대로 찾아갔을 때의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적어도 3,000킬로미터 이상을 각오해야 할 겁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길을 찾아낸다면 다행이지만요.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마침내 도달할 곳이 바로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란 말입니다. 거기서부터는 물론 미로는 없습니다. 그 대신 아예 길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아직 길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기서부터는 당신 스스로 길을 만들어서 나가야 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그곳에서부터 당신 혼자서 길을 만들어 다른 세계로 나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당신의 전 생애의 세 배가 걸립니다."
"하지만, 이곳으로 들어올 때는 길이 있었지 않소? 그 길을 타고 가면 될 것이 아니오?"
"잘 생각해보시오. 길이 있었소?"
"있었던 것 같소."
"잘 생각해보시오. 길이 있었소?"
"잘 모르겠소. 나는 단지, 내가 여기에 왔으니까 길이 있을 것 아니냐고, 그래요, 그런 차원의 상식을 말한 겁니다. 그게 당연하지 않아요?"
"그것이 어째서 당연하지요? 오는 길이 있었으니까 가는 길도 있을 것이라는 당신의 기대는 오는 길이 곧 가는 길이라는 아주 평범하고 단순하고 유치하고 소박한 생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견 타당해 보이나 실제로는 전혀 근거가 없는 연상입니다. 더구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인데, 이곳으로 오는 길은 없었습니다. 당신은 이곳으로 오고 싶다는 당신의 그 집요한 의지로 길을 만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나가겠습니다."
"단언하건대 당신은 미로를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오. 당신이 미로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고 엉뚱하게 자신을 가진다면 그건 크게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미로를 만들지만 미로를 알지는 못합니다. 물론 당신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죽음의 한계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그 한계를 벗어나 바깥 세계로 이주하려는 욕망은, 물론 그 역시 자유롭게 시도할 수야 있는 일이지만, 실현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날의 대화는 그렇게 석연치 않게 끝이 났다. 그리고 그와의 대화가 석연치 않았기 때문에 F는 설득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 사람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F는 몇 차례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를 했고, 그 사람의 예언대로 실패했다. 그는 번번이 첫 번째 방에서 쫓겨서 돌아왔다. 그 방에는 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불을 넘을 수 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자기가 만든 미로 속에 갇혀서 길을 찾지 못해 죽는다니.....허망함과 서글픔이 걷잡을 길 없이 밀려왔지만, 요령부득이었다. 유일하게 명쾌한 진리는 이것이었다. 힘써서 미로를 만들다 죽는다. 그 미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가두기 위한 미로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성찰은 너무 늦게 찾아오고, 시효가 지난 성찰은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많은 날들이 지나갔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의 삶을 살았다. 단순하고 평범하게 살았다. 낮에는 미로를 만들었고, 저녁에는 왕을 뽑았다. 이튿날은 또 미로를 만들었고, 그 전날 저녁에 자신이 뽑았던 왕을 사형시켰다.
그리고, 또 상당히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어느 날 저녁 만찬 시간에 그는 자신의 음식 접시에서 콩알만한 크기의 금을 발견했다. 피할 수 없는 시간이 그에게 찾아왔다. 그리하여 그는 왕이 되었다. 그것은 다음날 그가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라는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단 하나의 죽을 의무를 위해 천 개의 권리를 쓸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단 하루 동안. 그 하루 동안 그는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미로를 만드는 작업으로부터 열외 되어 원한다면 음식을 양껏 먹을 수도 있었고, 실컷 잠을 잘 수도 있었다. 열 명의 여자들을 불러 술시중을 들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왕으로 보낸 마지막 하루 동안 한숨도 자지 않았고,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한 명의 여자도 부르지 않았다. 그는 단 한 개의 권리도 쓰지 못했다. 하루는 그렇게 빠르게 지나갔다.
이튿날 저녁, 새로운 왕으로 선출된 사람은 처음부터 곧잘 그의 말상대가 되어주곤 했던 그 키가 작고 얼굴이 길쭉한 사람이었다. F는 그에게 왕관을 건네주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사람이 F에게 선고를 내리기 전에 쓸쓸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면서 나지막하게 물었다.
"깨달았습니까? 하루에 한 명씩의 왕이 필요한 까닭을.....?"
F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언제부턴가 더 이상 그 사실을 궁금해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그 이유를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저들은 내일 나의 살을 먹을 것이다. 나의 살을 뜯어먹고 나가 자기들이 살아 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자기들을 이곳에 영원히 묶어두는 미로를 애써 만들 것이다.....라고 F는 중얼거렸다. 그의 표정 또한 한없이 쓸쓸했다.
이윽고 천둥 같은 선고가 그의 목 위로 떨어졌다.
"이 사람은 왕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이 사람에게 우리를 위해 사형을 선고한다."
이승우
강원 철원 출생. 한국문학 신인상 수상 "에릭직톤의 초상"으로 데뷔. 주요작품 : 연금술사의 춤 ,화 ,당신의 자리, 구평목 씨의 바퀴벌레, 생의 이면 등
수색, 그곳에 가도 없는
무늬 -이승우
별거 삼 개월만에, 강릉으로 내려가 있는 아내를 다시 부른 건 순전히 그 눈에 구멍 뚫린
은빛 고기떼들처럼 내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던 열쇠뭉치 때문이었다.
입주 준비를 끝낸 새 아파트의 잔대금을 치를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쪽에서 먼저 아내를
부르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부를 생각이 아니라 그땐 아예 아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니 서른일곱에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대며 내 이름으로 처음 마련하는 아파트에 대해 어떤 뿌듯함 같은 것을 느꼈던 것도 아니었다. 샷시라든가 오토폰과 같은 부대 시설 비용과 등기 비용까지 포함해 이게 들어갈 돈의 마지막이지, 하면서도 나는 그것이 내 집이라거나 앞으로 내가 들어가 살게 될 집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지난 봄, 잔대금을 제외한 마지막 중도금을 낼 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내와 함께 나란히 자동차를 타고 신사동으로 가 우리가 살게 될 집을 둘러보고 나왔었다. 그때 아파트는 내부공사를 막 시작하고 있었다. 아내는 바깥 공사가 끝나는 5월쯤에 다시 와 보자고 했었다. 그러다 거기 다녀온 다음, 꼭 무엇 때문이다 하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집안 분위기가 이상한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고, 한지붕 아래에서 '적과의 동침' 과도 같은 냉전 단계를 거치면서, 이러다 예정된 수순처럼 끝내 우리가 별거를 하게 된다면, 어차피 아내에게도 살 집이 필요할 것이고 그러면 그것을 아내에게 주어야겠다고 생각해 왔던 터였다.
그냥 말로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배정 받을 아파트의 동과 호수를 추첨하던 날에도 나는 내가 들어가 살 아파트라거나 가족과 함께 들어가 살 아파트를 추첨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아이가 들어가 살 아파트를 추첨하러 가는 기분으로 현장에 갔었다. 일반 분양이라면 분양과 동시에 분양 받는 아파트의 동 호수까지 정해지지만 조합 아파트라 마지막 중도금을 내고도 석 달 후에야 동 호수 추첨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이미 별거를 하고 있었고, 은행알 추첨에서 내가 뽑은 것은 19층 아파트의 12층이었다.
사람들은 로얄층 중에서도 로얄층을 뽑았다고 했다. 그것도 그냥 로얄층이 아니라 추첨 전, 그 시간 수고를 배려해 추첨을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동 호수를 지목해 들어가는 조합 총무가 제일 좋은 곳이라고 찍은 게 같은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는 옆 호였을 만큼 가장 위치 좋고 가장 전망 좋은 동의 로얄층이었다. 내가 살 집이라고 생각했다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만큼 나도 내 행운을 기꺼워하듯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뽑았으면 했던 건 3층이거나 4층, 높아야 5층이었다. 아이야 기분만으로도 당연히 높은 층을 좋아하겠지만 아직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도록 내버려두기엔 마음이 놓이지 않는 여섯 살이었고, 아내 역시 그전부터 너무 높은 층은 방안에 않아서도 그곳이 높은 층이라는 생각만 해도 까닭 없이 불안해지고 베란다에 나가 바깥이라도 내다 볼라치면 어질어질 현기증이 인다고 말했다.
전에 함께 아파트를 둘러보러 왔을 때에도 아내는 당신은 높은 층이 좋겠지요? 난 지금 살고 있는 데처럼 3층이면 딱 좋겠는데, 했었다. 그때 나는 아래를 뽑으면 다행이지만 높은 데를 뽑으면 바꾸지 뭐, 다들 낮은 데보단 높은 데를 좋아하니까, 했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7동 1204호라고 쓰여진 은행알을 들고도 까닭 없이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그것이 내가 살 집이 아니라 아내에게 줄 집이라고 생각했던 때문이었다. 또 그것을 추첨 하던 날, 진작부터 입주일이 나왔는데도 먼저 살던 월계동의 전세 아파트를 내놓지 않고 있었던 것도 아내와 다시 합치거나 내가 새 아파트로 들어갈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그간의 사정이야 어떻든 먼저 별거를 시작해 집을 나온 건 나였다. 월계동에서 사무실이 있는 마포 부근 신수동에 하숙을 정해 나온 것인데, 그때 나는 어느 계간 문예지로부터 반 년도 전에 청탁 받은 전적 전재 장편소설을 마감이 석 달 안으로 다가오도록 아직 한 줄도 시작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당장에 필요한 몇 박스의 책과 내 방에 걸려 있던 몇 가지의 옷, 오래전부터 쓰던 워드프로세서만 자동차에 싣고 집을 나왔다. 집에선, 아니 그런 분위기에선
도저히 작업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때, 집을 나올 때에도 생각했지만, 아직 전업할 처지가 못돼 직장을 다니며 틈틈히 원고를 쓰고, 원고를 보내고, 나가서 술을 마시고, 취한 채로 들어와 자고, 그러면서도 이튿날이면 쓰린 속을 쥐고도 어김없이 직장을 나가야 하고.....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권태였을까,
그런 일상의 일들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으며, 이유 없이,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단지 귀찮고 무미건조하다는 것만으로 내 쪽에서 그러자고 의도한 것도 아닌데 먼저 말수를 줄였고, 그런 나를 아내가 까닭 없이 조심스러워하기 시작했고, 나는 저 여자 왜 저래, 하고 내 스스로도 느끼고 아내도 느낄 만큼 더욱 말을 하지 않았고, 아내도 저 남자 왜 저러지, 하고 말을 하지 않았고, 그러다 밖에서 놀다가 머리가 찢겨 들어온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온 다음 애 간수도 제대로 못하는 여자가 뭘 잘했다고(내가), 당신이 그러니 애가 밖으로만 돌잖아요(아내가), 하고 다시 들 안 볼 사람처럼 대판 싸움을 하고, 냉전의 자연스러운 단계로 귀가 시간을 늦추는 것만큼 주량이 늘고, 내 방에 옷을 걸기 시작했으며, 갈아입을 속옷이며 양말이 이쪽 방문 앞 화분대 위에 화분이 치워진 자리에 놓이기 시작했으며, 서로 꼭 해야 할 말이 있으면 건너기 싫은 다리처럼 아이를 가운데 놓고 누구야 아빠보고, 누구야 엄마보고, 하는 식의 의사전달을 했으며, 그러면서도 한 지붕 아래에서 한솥밥을 먹으면서 때로는 사무실이 아닌 집으로 청탁 오는 원고의 메모를 받아 화분대 위에 놓아 전하기도 하고, 어머니라든가 다른 가족들의 전화가 오면 여기 아무 일 없다는 듯 통화하고 나서 얼굴을 돌린 채 팔만 내밀어 직접 전화기를 건네주기도 하면서 그것이 한 달은 넘게 냉전처럼 시간을 끌고, 어느 쪽에서든 먼저 쉽게 입을 열 수 없는 분위기가 되어버리고, 그러다 이제는 사람보다 그 분위기가 오히려 못 견딜 것처럼 숨막히게 느껴지게 되고, 예전에 청탁 받은 장편소설의 마감이 이제부터라도 죽을 둥 살 둥 매달려도 끝낼지 말지 한 석 달 앞으로 다가오고, 쓰자, 쓰자 하면서도 다시 일주일을 더 그렇게 무겁고 답답한 분위기 속에 소설의 첫줄도 시작 못한 상태에서 사무실 사람들에게까지 사람이 이장해진 것 같다는 소리를 듣다가, 이쯤 되면 서로 그런 말 나오는 게 당연한 순서가 아니겠냐는 심정으로 나 좀 나가 있어야겠다는 예기를 아내에게 하고, 그때쯤 내가 따로 보는 여자가 있어 그러는게 아닌가 아내가 의심을 갖기 시작하고,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면서도 거기에 대해 나는 별다른 변명을 하지 않았고, 왜 그러는지 이율 말해봐요 이율(아내가), 이윤 무슨 이유(내가), 내가 그렇게 싫나요(아내가), 싫고 좋고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이런 상태라면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얘기지(내가), 그러자 무슨 자존심인지 그러고 싶으면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남의 얘기하듯 아내가 말하고, 사무실에서 가까운 신수동에 해방감이거나 탈출과는 거리가 멀게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벗어나지 못할 무덤자리라도 구하러 다니는 기분으로, 그러면서, 오래 가기야 하겠어,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하숙을 구하려 다니고, 그리고 아내가 내다보지도 않는 상태에서 아직도 이마에 그때의 흉터를 가지고 있는 아이의 말대로 아빠 혼자 이사를 했던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내는 집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가까이 언제고 들어갈 친정이 있긴 했지만 그렇게 집을 지키는 일은 너무도 당연해 그런 생각조차 않고 있었다. 아내는 내가 집을 나오고도 한 달을 더 아이와 함께 월계동에 있었다. 그리고 가끔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대놓고 그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거기 나가 있는 데를 정리하고 들어오라는 사인을 보내곤 했다. 어디서 원고 청탁이 왔더란 얘기를 했고, 고료가 들어왔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얘기를 했고, 주차 위반 딱지가 나왔더라는 얘기를 했고, 엄마(친정)가 빨래는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란다는 얘기를 했고, 여전히 내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아이가 아빠를 찾으며 전화를 걸어보라고 떼를 쓴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때에도 나는 집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내가 비운 집을 아내마저 비울거라곤 더더욱 생각하지 않았다. 가끔 친정에 가 전화를 걸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저가 앉은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마지막 통보처럼 전화를 걸어 친정이 아닌 강릉 본가로 아이와 함께
내려가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어머니께서, 그러면 내려와 있으라고 하시니까..... 애한테도 그게 덜 상처를 주는 건지도 모르겠구요..... 그러다 아내는 잠시 후 다시 전화를 걸어 조금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지금 터미널로 나가는데..... 아파트 키..... 경비실에 맡겨놓을게요..... 당신이 여기 들어와 있거나..... 그냥..... 거기 있을거면..... 키라도 찾아가라고요...... 들었어요..... 내 말..... 그럼, 그만 끊을께요, 이제...... 하다가, 당신이..... 끊으세요..... 난..... 난...... 먼저 못..... 끊겠어요,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게 두 달 전의 일이었다.
전화를 받고 나는 아내가 아니라 어머니에게 호되게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일이 거기까지 발전하기 전에도 어머니는 여러 차례 나에게 전화를 해, 니, 에미말고 따로 '보는 여자'가 있어서 그러는게 아니냐고 물었다. 내가 완강하게 아니라고 하면 그때엔 아들의 말을 믿다가 도 다음 번 전화를 할 때엔 또 어김없이 보는 여자를 들고 나왔다. 어머니는 한번도 그러면 에미한테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러는 거냐곤 묻지 않았다. 살을 섞고 살던 부부가 한 지붕 아래에서 따로 방을 쓴다, 그러다 남자가 방을 얻어 집을 나간다. 그러면 그건 남자에게 보는 여자가 있기 때문이다, 아들보다 며느리의 행실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 문제에 대해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확고한 공식이었다.
내가 집을 나오기 전, 자존심 때문에 직접 말을 못 담아 그렇지 아내마저도 내게 보는 여자가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닐까 의심을 갖기 시작했던 것도 이틀이 멀다하고 전화를 해 눈여게 잘 살피봐라, 니 모리게 시애(시앗)를 보고 다니는지, 하는 어머니의 생각이 심어진 때문일 것이었다. 어머니의 생각으로는 보는 여자가 있거나 봤으면 하는 여자가 있지 않고서는 남자가 따로 방을 얻어 나갈 이유가 없었다. 함께 있으면 불편해 할 며느리를 굳이 강릉으로 불러내려 당신 그늘 아래에 두게 하는 것도 그렇게 방을 얻어 나간 아들에선 물론 행여 아들이 보고 있거나 보게 될지 모를 여자에 대해서도 그 자리가 '보는' 것만으로 아무나 데리고 들어와 앉히거나 들어와 앉을 자리가 아니라는 걸 확실히 해 두겠다는 선언적 의미였는지도 몰랐다.
무섭구나, 어머니는, 그리고 당신의 경험은.....
그때, 아내의 전화를 끊고 내가 떠올린 생각은 그것이었다. 어머니의 말대로 남자가 '시애
'를 보면 다른 여자들은 열이면 열 다 그러면 어디 한 번 남의 손에 새끼들을 거둬 봐라, 그래야 당신이 내라는 사람 귀한 줄 알지, 하는 식으로 시위하듯 먼저 짐을 싸 집을 나가거나, 아니면 남자가 데리고 들어온 시애의 머리 끄댕이를 잡고 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동네 우세를 떨어 손 써볼 사이도 없이 남자도 질리고 시애도 질리게 하거나, 아직 그럴 단계가 아니라면 남자 모르게 시애를 찾아가 비슷한 북새를 떨어 제풀에 물러나게 하는 게 그런 일에 대한 공식과도 같은 대응이었다. 텔레비전에서도 그랬고, 책에서도 그랬고, 살아오며 내가 봐왔던 것으로도 그랬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처분만 기다리겠다는 식으로 벙어리 냉가슴 앓듯 했던 것도 아니었다.
지난봄, 아파트의 마지막 중도금을 내고 나서 우리가 살 집을 둘러보러 아이까지 데리고 신사동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길 자동차 안에서 나는 어떤 아련한 추억 속으로 젖어드는 기분으로 아내에게 '수호 엄마' 이야기를 했었다. 갑자기 어머니라든가 그 엄마 생각이 나서가
아니라 이야기의 시작은 단지, 그래, 단지 아파트가 있는 신사동(은평구)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월계동쪽으로 나오는 길의 반대쪽 길이 수색으로 나가는 길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이게 수색 가는 길이구나. 이게..... 반대쪽으로 죽 가면 말이지......"
아파트 앞에서 자동차의 시동을 걸고 통일로 쪽으로 나와 우회전을 해 더 이상 그 길의 반대쪽이 '이게 수색으로 가는 길'이 아니게 될 때까지 불과 5분도 채 안 되는 거리를 달려오는 동안 나는 내 마음속에 '수색' 이라는 말이 주는 그것의 물빛 무늬와도 같은 가벼운 흥분으로 그 말을 대 여섯 번도 더 했다. 이게 수색 가는 길이구나, 이게.....이게 말이지..... 아내는 수색은 왜요, 수색에 누가 있어요, 하고 물었고 나는 아니 그냥. 누가 있을 것 같아서, 하다가 '수호 엄마'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수색에 내 어머니가 아니라 '수호 엄마'가 있다고, 지금도 그곳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내 마음속의 수색엔 그 엄마에 대한 애틋한 기억들이 바람에 일렁이는 물빛 같은 무늬를 이루고 있다고.....
그러자 아내는 수호는 당신 이름이쟎아요, 그럼 당신, 강릉 어머니가 낳으신 아들 아니에요, 하고 물었다.
아니긴, 그런데 이야길 하자면 복잡하다, 자세하게는 모르고 의식의 어떤 비늘처럼 어릴 때의 언뜻언뜻 떠오르는 기억으로 날 낳은 어머니가 아닌데도 집안 사람 누구한테나 '수호 엄마'라고 불리던 여자가 있었다. 그래서 어릴 때 나는 그 엄마가 정말 날 낳은 엄만 줄 알았다, 아버지가 강릉 시내에 나가 큰 상회를 했는데 어머니 몰래 시애를 보았던 거다, 그런데 그 엄마는 우리 집에 들어올 때까지도 자기가 시앤 줄 몰랐다, 나중에 어머니한테 들은 얘긴데 아버지가 그 엄마에게 혼자 산다고 거짓말을 한 거였다. 그때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엔 이미 오 남매의 자식이 있었다, 그 엄마도 아버지가 데리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낌새를 알고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집을 찾아가 데리고 들어왔다, 처음 찾아갔던 날 은 그 엄마가 마당가에 얌전하게 앉아 빨래를 하는 게 도저히 남의 시애처럼 보이지 않아 그냥 돌아왔고 둘쨋날 다시 마음 다져먹고 찾아가 사실 얘기를 하고 데려왔다던가, 그때 나는 상인이(아이)만 했는데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떻게 들어오고 또 들어올 때 어떤 일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집안 식구들 모두 그 엄마를 수호 엄마라고 불렀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그렇게 부르고 아버지 어머니도 그렇게 불렀다, 그러니 나도 당연히 그 엄마가 내 엄만 줄 알았던 거다, 잠도 그 엄마하고 잤다, 나중에 학교에 입학해서도 그 엄마가 늘 데려다줬다,
학부형회의 때에도 그랬다.
지금도 이해가 안 가는 게 속으로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내 기억으로 두 분은 한 번도 싸우거나 큰 소리를 낸 적이 없다, 지금도 어머니는 당신도 잘 했지만 수호 엄마도 잘 했다고 말한다, 형들도 그 엄마를 미워했던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 갔다오니 엄마가 없어졌다. 내 기억으로 아마 1학년 2학기 때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어머니한테 우리 엄마 어디 갔어요, 하고 물으니 어머니 역시 많이 섭섭하고 허전해 하는 얼굴로 느 에미 서울에 니 옷 사로 갔다, 대답해 비로소 그 엄마가 날 두고 떠난 걸 알았다고 아내에게 이야기를 했던 것이었다.
이야기를 하는 중간 아내는 중요한(?) 질문으로 그럼 그때 아버님은 주무실 때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 나이에 나한테 그게 중요한 일이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어머니는 그 일도 현명하게 처리했을 거라고 말했다.
아내는 다시 두 분 사이가 그렇게 좋았다면서 '수호 엄마'라는 분이 왜 가셨는냐고 물었다. 나는 당신 같으면 철든 다음 그 얘길 어머니에게 다시 물을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다만 지금 내 생각으로 그 엄마가 아버지에게서나 집안에서나 스스로 있어야 할 자리를 못 찾아 떠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시애를 싸안은 어머니의 품이 너무 넓으니까.....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식었다기보다는 어머니한테 대항할 힘이 없다고 느낀 것인지도 모르고, 또 그것이 아니라면 어머니가 기품 있는 처신으로 그 엄마를 스스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거나..... 나로선 그때 그 엄마의 집이 수색이었다는 걸 알았던 것도 썩 훗날 어머니가 지나가는 소리처럼 수호에미는 지금 어디서 뭘하고 사는지 몰라, 우리 수호 어릴 때 품에 데리고 안고 자던 정이 있어놔 더러는 많이 보고 싶기도 할낀데..... 그때 떠난 이후로 여직 소식이 한 번 없는 걸 보면 어디 다른 데 팔자를 고치 가 지 속으로 낳은 자식 거느리고 살아 이제 나설 수 없어 그러는지도 모리겠고..... 애초 나서 살긴 서울 곁에 수색인가 어딘가 살았다는기..... 할 때 들은 이야기로였다.
나는 언젠가 시간이 되면 서울로 올라와 아직 한 번 가보지 못한 수색에 가보고 싶다고 했고, 아내도 자기도 그러니 왠지 꼭 한 번 그곳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다음번 5월 올 때요, 그때면 내부공사도 많이 됐을텐데.
그날 신사동에서 월계동으로 돌아오며 아내와 나의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내 마음속에 물빛 무늬처럼 간직되어 있는 그 엄마에 대한 애틋한 기억들과 시애에 대한 어머니의 슬기롭고도 기품 있는 처신을 이야기하며 우리의 5월 수색행을 약속했던 것이었다.
그러다 그 수색행이 이루어지기 전 내가 먼저 짐을 싸들고 집을 나왔고 아내 역시 그런 일의 처리에 대한 어머니의 경험과도 같은 가르침에 따라 그 그늘 아래로 행여 내가 보고 있거나 보게 될지 모를 여자에게 내줄 수 없는 자기 자리를 찾아 들어가버린 것이었다. 경비실이라고는 하지만 아내가 남의 손에 맡긴 아파트의 열쇠는 일주일 후에 찾아왔다.
"많아요. 키가..... 상인이 아버지, 어디 출장 다녀왔어요? 요줌 도통 안보이는 것 같던데."
서랍에서 한 주먹도 넘는 열쇠뭉치를 꺼내주며 나이든 경비원이 말했다, 열쇠는 그것들을 고리에 묶어두지 않으면 한 주먹에 다 쥐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34평 아파트에 웬 키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 다이아몬드 꼴의 가죽장식을 단 아내의 열쇠고리엔 현관 열쇠와 현관 보조 열쇠, 안방 열쇠, 여분으로 맡겨둔 내 자동차 열쇠, 아이의 자전거 열쇠가 매랄려 있었고, 호텔 객실의 열쇠고리와 같이 생긴 투명하고 길다란 플라스틱 막대에 '삼익아파트 107동 305'라고 쓴, 그러나 그것보단 얇고 넓은 예비 열쇠고리엔 그 막대 밑부분에 촘촘이 뚫은 작은 구멍마다에 50원짜리 동전 크기만한 또 하나씩의 열쇠고리를 끼워 왼쪽으로부터 차례로 현관, 현관 보조, 안방, 건너방, 작은방, 보일러실 열쇠가 어느 고리엔 하나씩 어느 고리엔 두 개거나 세 개씩 매달려 있었고, 제일 오른쪽 고리엔 다른 열쇠보다 삐죽 나온 내 자동차 열쇠가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아파트 열쇠의 전부인 것은 아니었다.
내 주머니에 있는 열쇠고리에도 사무실 열쇠와 사무실 보조 열쇠, 사무실 책상 열쇠, 자동차 열쇠말고도 아파트 현관 열쇠 고리엔 안방의 장롱과 옷장, 서랍장 열쇠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집 나간 아내에 대한 짜증처럼 거칠게 자동차 조수석 앞 서랍을 열고 그 속에 던져 넣었다. 그래, 갈 테면 어디 가 봐라. 강릉이 아니라 강릉보다 더한 데가
있다 해도 내가 눈하나 깜짝할 줄 아느냐는 어떤 오기 같은 것이 치밀어오르기도 했다. 나한테도 열쇠가 있는데 굳이 이렇게 예비 열쇠고리뿐 아니라 자기가 쓰던 열쇠까지 맡기고 가는 건 그러니 얼른 하숙을 정리하고 들어와 있으라는 사인일 것이다. 그런다고 내가 니 뜻대로 들어올 줄 아느냐는 심정으로, 처음 올 땐 집안이라도 한 번 둘러보고 가려던 마음을 바꾸어 몇가지 우편물만 집어들고 그냥 그대로 하숙으로 돌아와버린 것이엇다. 그리고 이내 나는 그날 월계동으로 가 받은 열쇠들을 자동차 조수석 서랍에 넣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물론 강릉에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 아내도 전에 서울에 있을 때와는 달리 강릉으로 내려가선 사무실로거나 하숙으로 전화를 하지 않았다. 아내 혼자 생각에서라면 그간 몇 번도 더했을 전화였다. 그래선 니가 진다, 전화하지 마라, 옆에서 어머니가 흔들리는 아내의 마음을
다잡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 일 때문에 전화를 하고 사무실 앞으로 찾아왔던 건 서울에 사는 작은 형이었다.
"나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어디 사는지 가 보자."
형은 그냥 밖에서 저녁이나 하자는 내 청을 끊고 신수동 하숙으로 가 보자고 했다. 아마 엄니가 형님에게 일렀을 것이다. 니가 한 번 가 봐라, 말로는 그래서 그러는 게 아니라지만 곁에 보는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 그날 형과 많은 술을 마셨다. 하숙으로 들어올 때 사 온 술이 바닥나 다시 내가 슈퍼로 나가 맥주 네 병을 더 사왔다.
"그게 권태라는 거다, 이제 조금 있으면 아파트도 마련되겠다, 애도 잘 크고 생활의 여유도 좀 생겼겠다, 그러니 지난 시절의 나는 뭔가 하는 생각도 들고 또 이렇게 사는 게 잘 살고 의미 있게 사는 건가 하는 회의도 오게 되는 거고..... 나도 니 형수하고 그렇지만 부부 사이라는 게 원래 그래. 처음에는 이럴 마음으로 그랬던 게 아니라지만 조금씩 서로 마음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다보면 점점 그 일에 어떤 오기 같은 것도 생기는 거고 그러다 나중엔 사람보다 그런 분위기가 더 못 견디게 싫어지고 거기서 벗어나는 것만이 애초 그런 분위기로 몰고 간 목적처럼 되어버리는 식으로 말이자. 내가 보기에 니가 나와 있는 것도 그래"
"모르겠어요, 상인이 엄마가 강릉 간다니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어머니 참
무서우신 분이구나...... 그리고 수호 엄마 생각도 나고요 그 사람 강릉 간다니까....."
"그 일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다면 무섭기보다는 무서울 만큼 슬기롭고 현명한 쪽이겠지."
"전엔 나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무섭다는 생각만 들어요,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때 수호 엄마 문제를 놓고나 지금 우리 문제를 놓고나, 전에 상인이 엄마하고도 짓고 있는 아파트에 갔다오다 그 얘기를 했는데, 왜 집안 식구 다들 그 엄마를 수호 엄마라고 불렀는지 모르겠어요."
"니는 왜 그랬다고 생각하는데?"
"중학교 땐가 언젠가 아직 다 크지 않았을 때 어머니한테 한 번 그 일을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때 어머니 말로는 니가 그 엄마를 많이 따르니까 그랬다는데, 암만 그래도 그렇지 이해가 잘 안 가요."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모르고 있었구나 너는....."
"뭘요."
"생각해봐라, 그 여자가 들어올 때....."
그 여자? 그 엄마거나 작은 엄마가 아니고 말이지. 나는 낯선 눈빛으로 형의 말머리를 잘랐다.
"여자라고 말하지 말아요, 나한테 그 말 익숙하지 않으니까....."
"그, 그래. 그 엄마가 들어올 때 큰 형님은 중학교 1학년이었고 나는 국민학교 4학년, 니는 여섯 살쯤 됐을 거고, 정혜는 네 살, 은호는 아직 젖먹이였어. 형님과 나는 그 엄마의 아들을 하기엔 너무 컸고, 정혜는 여자고, 은호는 아직 어머니가 데리고 있어야 하고, 그러니까 나이로나 뭐로나 그 엄마의 아들할 사람으로 니가 제일 적당했던 거지."
"내 얘기는 굳이 그렇게 누구 엄마라고 정할 이유가 뭐냐는 거지요. 다른 집들이라고 새엄마가 들어왔다 해서 그 여자한테(이럴 땐 나도 여자다) 먼저 있던 아들 중에 누구 엄마 하라고 안 그러잖아요? 안 봤지만 그것도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가 그렇게 하라고 했겠지요?"
"너는 어머니가 너도 당신 속으로 낳은 자식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는지 모르겠냐?"
"모르겠어요. 시애를 싸안기 위해 너도 한 식구다, 하는 마음으로 그랬다면 그건 진심에서
우러나온 친절이거나 배려가 아니라 그런 포옹력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자기 극복과도 같은 무서움이었겠지요."
"그래, 그걸 자기 극복이랄 수도 있겠지만, 그 엄마한테 당신이 낳은 자식 하나를 그렇게 정해 준 어머니의 속뜻은 그보다 깊고 슬기로웠던 거였지."
"무슨 뜻인데요?"
"널 자식으로 생각하고 아이를 낳지 말라는 말을 그렇게 한 거니까."
그 말을 하며 형은 내 얼굴을 피해 맥주잔을 기울였다.
"그래서 무섭다는 거예요, 어머니는....."
나도 맥주잔을 기울였다.
형은 이야기를 바꾸어 아파트가 언제면 다 완공해 입주할 수 있을 것 같더냐고 물었고, 나는 얼마 안 있으면 완공될 것 같은데 그냥 우리가 이대로 살게 되면 그걸 아내에게 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위자료니 뭐니 하는 그런 생각으로가 아니라 우리의 별거가 아무래도 길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그렇게 전한 것이었다.
그러다 나는 다시 형에게 전에 아내가 내게 물었었던 말을 물어보았다. 그때 아버지는 주무실 때 어떻게 하셨느냐고. 그러나 아내가 묻더란 얘기는 하지 않았다.
"알아요, 나도. 자식으로서 이런 거 묻는 게 여간 불경스러운 생각이 아니라는 거. 알지만, 그것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묻는 거예요. 그때 나는 어려서, 늘 엄마 방에서 자면서도 모를 수 있지만 형님은 나보다 컸으니까 눈치로도 짐작하는 게 있을 거구....."
"그것도 어머니가 알아서 하셨어."
"물론 현명하고 슬기롭게 말이죠?"
"다른 건 몰라도 나는 니가 왜 그걸 기억 못하는지 모르겠다. 저녁밥을 먹고 나면 어머니가 니한테 그랬거든. 수호야 닌 오늘 형들 방에서 자거라 하고, 그럼 그 엄마는 놔두세요, 제가 데리고 자지요, 하고. 넌 늘 그 엄마 방에서 잤던 것 같다고 하는 데, 그 방에서 잔 것
보다 우리 방에서 잔 게 더 많아. 그런 날은 아버지가 그 방에 가 주무셨고. 그럼 넌 엄마 방에서 잘 거라고 징징거리며 떼를 쓰고. 나중에 짐작이지만 그러니 그런 널 보는 어머니 마음도 편하지 않으셨을테고..... 돌아보면 완전히 이조 때 얘기지 뭐. 처신은 그렇게 하셨어도 당신한텐 하루하루가 아픈 경험이었을테고....."
"그럼 그 상대인 수호 엄마는요? 아니, 내 엄마는요?"
"....."
이번엔 형이 낯선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루하루가 장미의 나날이었나요?"
"취했구나 많이....."
"아니, 취하지 않았어요, 아마 하루하루가 지혜롭고 슬기로운 처신에 질식할 것 같은 나날이었겠지요."
"그래도 그 분 떠나실 땐 그렇게 떠나지 않았어."
"몰라요, 난 그것도. 어느 날 학교에 갔다 오니까 아침까지만 해도 달려 있던 앞니를 뺐을
때 느껴지는 꼭 그런 허전함으로 엄마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어머니는 한 손으로는 붙잡고 한 손으로는 등을 밀고했을 테고요."
"그땐 나도 어렸어. 내가 결혼할 때 어머니가 그때 그 분 떠나던 때의 얘기를 하시더라. 들어올 때에도 아버지 모르게 왔지만 갈 때에도 아버지는 다시 안 돌아올 거라는 것도 모르
게 떠났다고....."
"그럼요. 기품 있는 분만 알면 되는 일이니까."
"취해도 그렇게 말하지 마라. 깨어나면 후회해.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가 하고."
"후회는 안 해요, 나는. 큰형님이나 형님한테는 그런 얘기를 해도 나 한텐 한 번도 그 엄
마 떠나던 때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그래, 차마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지, 너한테는."
"어린 시절 나도 그 일의 직접적인 당사자였으니까, 내가 따라서 그 엄마 아들을 하라고 한 게 아니라 어머니의 목적 다른 계산으로 그 엄마 아들을 하라고 했고, 그런데 그 아들은 진짜 모자처럼 정들어버렸고....."
"넌 어머니가 등을 밀었다지만, 그래, 마음속으론 그런 일에 등을 안밀 사람이 없겠지. 처음엔 그분이 떠나기는 하는데 아무도 그게 떠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게 혼자 떠날 생각을 했던 모양이야. 며칠 전부터 서울 집에 있는 옷들을 가져와야겠다고 하더래. 아버지한테도 형님한테 그렇게 얘기해 허락을 받아달라고 하고, 그래서 어머니가 짐작을 하고 아버지 몰래 물으셨대. 필요하면 여기서 해 입으면 되지 자네 꼭 서울에 가서 짐을 가져와야겠느냐고. 그랬더니 그 분이 이제 떠날 때가 되어서 그런다고, 아버지가 싫어진 것도 아니고 수호 니가 싫어진 것도 아니고 형님의 인품을 감당할 수 없어 떠나야겠다고. 니는 그걸 어머니가 등을 밀었던 거라 하지만, 내가 아는 걸로는 그게 아니야. 그때 어머니가 그 얘기를 하실 때, 그보다 몇 달 앞서서도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시더라. 그땐 꼭 서울에 가서 옷을 가져와야겠는가 하시니, 그럼 다음에 가지러 가겠다고 했고. 그러니 아버지는 그런 눈치도 모르고 옷 가지러 가겠다는 사람 옷도 못 가지러 가게 한다고 어머니에게 화를 내시고....."
"그럼 처음엔 붙잡았는데 두 번 째엔 왜 안 붙잡으셨대요?"
"니가 그 엄마에 대해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는 것만큼 나도 그 분에 대해 좋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기품과 교양은 어머니에게만 있었던 게 아니라 그 분도 그 이상의 지혜와 교양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고..... 붙잡으니까 그 분이 그러시더래. 형님이 그러시면 나는 여길 떠나기 위해서라도 수호 동생을 가질 마음을 갖게 될 거라고, 그러면 오히려 지금 보다 쉽게 떠나갈 것 같다고..... 이해하겠냐. 너? 아이가 있으면 오히려 쉽게 떠나질 것 같다는
말..... 빈 마음으로 떠나는 것보다는 정붙이 하나를 데리고 떠나는 게 덜 쓸쓸할 테니까....."
"이해해요...... 두 분 다....."
"떠나려면 몰래 떠나는 방법도 있었겠지. 그렇지만 그렇게 떠나는 건 어머니한테도 그 분한테도 맞지 않았던 거야. 서로에게보다 스스로에게 용납할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르고."
"그래도 어머니는 무서워요. 그 엄마로선 당연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부분도 있었을
테고요."
"그건 어머니도 마찬가지야. 똑 같은 무게로 상처를 받고 있었을 테니까. 아버지가 시내 차부까지 나가 바래다줬다러라. 옷 가지러 가는 줄 알고..... 마지막 보는 거라고 어머니가 아버지를 보내셨던 거지. 니 생각에 다른 사람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 같냐? 중간에 그 분 마음이 바뀌거나 이니면 아버지가 눈치를 채고 도로 데리고 들어올지도 모르는 일인데."
"어머니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어머니 아니냐구요?"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그 분한테서 편지가 왔어. 겉봉엔 아버지 이름을 썼지만, 내용은 형님 보세요, 하고. 나도 봤다, 그건..... 수호 니 얘기를 많이 했던 것 같고..... 어머니는 지금도 그걸 가슴에 담고 계셔. 언젠가 우리 수호 성공하면 찾아올 거라고 했다고..... 지금도 어머니가 가끔 그런 말씀하는 거 너도 들어 알 거야. 우리 수호 글 잘해 신문엘 나고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하니 얼굴 보면 품에 안고 자던 옛정으로 금방 알아볼 거라고......"
"나보다 형님이 좋은 추억 많이 가지고 있네요. 나는 왠지 아프고 쓸쓸한 추억들만 가지고 있는데."
"쓸쓸할게 어딨냐, 이제 와서, 다 어릴 때 일인데."
"아뇨, 형님은 몰라요. 아버지에 대해선 몰라도 어머니에 대해선 내가 평생을 두고도 갚지 못할 마음속으로 빚처럼 담아온 서자 의식(庶子意識)을....."
나는 서서히 오르기 시작하는 취기 속에 조금은 쓸쓸하고 비감한 기분으로 남은 잔을 들어 비웠다. 한 배로 태어난 형제라도 형님은 모른다.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어제의 일보다 더 선명한 기억으로 떠오르는 그 날의 일을. 2학기가 되어선 한동안 데려다주지 않던 학교를 중간 중간 업어가며 데려다주고 나서 그 엄마가 떠났을 때, 아니 학교에서 돌아와 습관처럼 우리 엄만 어디 갔어요, 하자 어머니가 어둡고도 무거운 얼굴로 느 엄마 서울에 니 옷사러 갔다고 했을 때,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그 무엇을 깨닫듯 직감적으로 나는 그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니라 어머니가 내 엄마라는 걸 알았고, 그러면서도 눈물을 쏙 뺄 만큼 한꺼번에 여러 마음으로 밀려오는 그 빈자리의 허전함 속에 어린 마음에도 나는 그 동안 그 엄마 아들 노롯을 해 온 것에 대해 진짜 내 엄마인 어머니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할 부끄러움과도 같은 죄스러움을 느꼈다. 그 엄마가 떠나자 모든 것이 한꺼번에 알아진 것인데 나 혼자 마음속으로는 그 엄마를 기다려도 아버지한테까지도 언제 엄마가 오느냐고 묻지 않았다. 아니, 누구에게도 그 엄마 얘길 입 밖으로 꺼내선 안 된다는 걸 머리가 아닌 어린 가슴의 상처로 안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그것은 내 마음 속 깊은 곳의 빚처럼 남아 성장할 만큼 성장해서도 어머니 앞에선 늘 어떤 의무감과도 같은 죄스러움 내지는 서자 의식을 느끼곤 했다. 형님은 모른다, 그런 내 유년시절의 감당하기 벅찼던 이별과 그 이별이 준 마음의 상처를.....
"서자 의식이라고 했나?"
"왜요?"
"취해도 그런 말 함부로 뱉는 거 아니야."
"형님들한테나 은호한테는 그렇겠지요. 어린 시절 그런 일도 없고 그런 생각을 할 이유도 없으니까. 결혼했을 때, 어머니는 나한테 그런 얘길 안 했어도 상인이 엄마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내가 의붓자식이거나 어디서 낳아온 자식이 아니냐고."
"그때의 일 때문에 널 그렇게 대하거나 생각하는 형제는 없다. 그 소리가 어머니에게도 욕이고 형제들한테도 욕이라는 걸 몰라서 그러는 것도 아닐 테고."
"그럼 금방 시집온 여자가 무얼 안다고 그런 소리를 했겠어요? 다 눈에 보이니까 그랬던 거 아니겠냐구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내 마음속의 생각이 행동으로 그렇게 나타나고 하니까."
"다시는 그런 말하지 마라. 행여라도 들으시면 섭섭해하신다."
"이 소리도 오늘 취하지 않았으면 어머니가 아니라 형님한테도 못했겠지요. 하고 싶어도 도리 때문에 못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 속의 그런 의식 때문에라도 못하는 거구요."
"그건 어머니도 마찬가지 심정일 게다. 니가 그 분에 대한 얘기를 못 묻듯 어머니도 니한테 그 분 얘기를 못하는 거고."
"모르겠어요, 나도 전에 상인이 엄마한테 그 엄마 얘기를 할 땐 나도 어머니를 좋게 얘기했어요, 기품 있고 슬기롭게 처신하셨다고. 그러다 이번에 상인이 엄마를 불러 내리는 걸 보곤 갑자기 어머니가 무서운 분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겉으로 보기엔 기품과 슬기지만 그런 기품과 슬기가 직접 가슴에 와 닿는 그 엄마한텐 그것 하나하나가 얼음과도 같은 벽들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죠."
"너도 그만 자야겠다. 나도 내일 회사 나가자면 일어서야겠고, 그리고 제수씨 일은 잘 생각해서 결정해라. 지금처럼 니 혼자 격해진 감정만으로 처리하지 말고."
형님이 간 다음 나는 취한 손길로 거칠게 워드프로세서의 뚜껑을 열곤 '아내는 강릉에 갔
다.'라고 두드리고 그 아래에 다시 '5월이 오면 함께 수색에 가자던 아내는 8월인 지금 어머니에게 가 있다' 라고 두드렸다. 형님은 어머니가 그 엄마를 두 번씩이나 붙잡은 걸 그 처지에선 베풀기 어려운 따스함으로 해석했지만, 처음부터 그 일은 인정으로 처리하거나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그 엄마가 처음 떠나려던 길을 붙잡은 건 떠나더라도 다시 오지 않을 보다 모진 마음이 준비되었을 때 떠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엄마 역시 그것을 그런 뜻으로 읽었던 것이 아닌지.
그러자 전에 그렇게 떠올리려고 애써도 떠오르지 않던 그 시절의 그림 하나가 떠올랐다. 어머니와 그 엄마가 부엌에서 약을 달이고 있었다. 어머니는 굳은 얼굴이었고 그 엄마는 조금 불안한 듯 난처해하는 얼굴이었다. 어머니는 삼베 보자기에 약을 짜 담았다.
"가지다 드리게."
"형님....."
"자넬 두고 내가 가지가면 그 양반 눈에 자네하고 나하고 시애 싸움하는 것으로밖엔 안보여."
그때 아버지는 일주일을 넘게 마작판에서 들어오지 않았다. 그 엄마가 들어오기 전에도 아버지는 자주 그랬다.
"다른 말하지 말고 노시더라도 몸 걱정하며 노시라고만 얘기하게."
엄마가 자개 쟁반에 하얀 사발을 얹어 들었다.
"수호 에미 따라가 아버지 기신 델 알리줘라. 아버지도 니가 부르고."
정미소 뒷방에 가 내가 아버지를 밖으로 불러냈다. 엄마는 약이 든 사발을 건네며 어머니가 하라고 한 말만 했다.
"철호(큰형)에미가 시키더냐?"
아버지는 사발을 든 얼굴을 찡그렸다.
"형님은 왜요, 제가 당신 여러 날 안 들어와 걱정되니..... 어서 들기나 하셔요."
"다 안다. 한두 해 산 것도 아니고."
아버지는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퀭한 얼굴로, 그러나 내 눈엔 싫은 걸 억지로라도 참고 용케 그것을 비우는구나 싶게 약을 비웠다. 아마 어머니보단 엄마를, 그것도 약을
비우게 하지 못했을 때의 엄마를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엄마가 주머니에서 박하 사탕을 꺼냈다.
"벌받으면서도 입에 단 거 무나. 수호나 줘."
엄마는 그걸 내 입에 까 넣어 주었다.
"밖에서 기다려라. 내 금방 들어갔다 나올 테니."
이후로 아버지는 다시 마작방에 가지 않았다. 그 엄마가 떠난 다음에도 그랬다. 그런 엄니가 지금은 나를 상대로 아내 편에 서서 옆에 있지도 않은 시애 싸움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아내는 이제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해도 수색엔 절대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두드렸다. 강릉에서 가장 먼 거리에 수색이 있었고, 수색에서 가장 먼 거리에 강릉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어느 쪽도 멀리 할 수 없는 곳에 내가 있었고, 신사동아파트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쪽에서 먼저 아내를 부를 생각이 없었다. 전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더니 자꾸만 강릉으로 간 아내가 괘씸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아파트의 잔대금을 내고, 잔대금을 낸 온라인 입금증을 들고 현장사무실로 가 전에 월계동에서 받아왔던 것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을 또 한 뭉치의 열쇠꾸러미를 받아왔다. 집도 넓지 않은데 웬 열쇠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 일일이 세어보니 스물 네 개나 되었다. 현관에서 보일러실까지 여섯 개의 고리마다 세 개씩의 열쇠가 매달려 있었고, 제일 오른쪽에 '기타' 라고 쓴 고리에 그것을 신청한 사람들에게만 주는(샤시도 그렇고 오토폰도 그렇고 조합에서 일괄 신청한) 현관 보조 열쇠가 자그마치 여섯 개나 똑 같은 것들이 징그럽게 매달려 있었다. 나는 자동차 조수석에 넣어두었던 월계동 아파트의 열쇠까지 꺼내와 거의 쉰 개나 되는 것들을 마땅히 둘 데가 없어 가끔 곤로에다 라면을 끓여먹는 냄비에 담아 책상 대용으로 쓰는 식탁(그러니 서랍이 없는 건 당연하고) 위에 올려놓았다. 처음 며칠 동안은 그걸 봐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하숙으로 놀러온 후배가 그게 뭐냐고 물었고, 나는 두 군데 아파트의 열쇤데 놔둘 데가 없어 그렇게 두고 있다고 말했다.
"이야, 그럼 이거 최소한 3억짜리 메뉴 아냐, 이건 책상이라기보단 식탁이고 그 위에 냄비가 있고....."
나는 쓸쓸하게 웃었다. 후배는 월계동 아파트도 전세 아파트가 아니라 내 이름으로 된 아파트이고, 내가 신수동으로 나와있는 것도 순전히 원고 때문인 것을 알고 있었다.
"형수님은 언제 오시는데요?"
후배는 아내가 강릉으로 가 있는 것도 내가 원고 때문에 여기로 나온 다음 갑자기 어머니가 편찮아서인 줄 알고 있었다. 하숙으로 데리고 들어오기 전에 미리 그렇게 말을 해 두었다.
"모르지 뭐. 어머니가 일어나셔야 오든말든 할테니."
"그럼 형이 다시 월계동으로 들어가 있어야겠네. 아니면 거기 짐을 신사동으로 옮겨와 들어가던가."
"쓰던 데서 원고나 마저 끝내고."
그 원고는 마감을 보름 늦추어 이제 마지막 백 매 정도의 분량만 남아 있었다. 마음을 다잡고 쓰면 사나흘 안으로도 끝을 볼 수 있을 만큼 속도감도 붙어 있었다.
"그럼 형, 몇 집 살림을 하는 거요? 월계동에도 집이 있지. 신사동에도 집이 있지, 여기도
있지. 그것만해도 세 집 살림 아니우? 아니지, 형수님 강릉에 가있으니 네 집 살림을 하는 거네 뭐."
아마 후배가 그런 말을 하고 간 다음날부터였을 것이다. 어느 정도 속도감을 붙여 놓았던
글이 도대체 거기서부터 한 줄도 써지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며칠동안, 나오지 않는 변을 보기 위해 애쓰는 사람처럼 책상에 앉아 원고를 잡고 낑낑거렸다. 얼만큼 썼다가 읽어보면 그게 아니어서 날려버리고 다시 썼다간 또 날려버리곤 했다. 꼭 월계동에서 아내와 한창 냉전을 할 때처럼 앞뒤가 콱 막혀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다 나중엔 억지 의무감으로 다시 워드프로세서를 눌러대자 한 줄 한 줄 이어지는 문장 사이의 거리가 처음 썼다가 날려버린 것보
다 더 나빠져 수색에서 강릉 사이만큼이나 멀게 뜨는 것이었다. 한 번 늦춘 마감일이 열흘앞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다음날은 신축아파트의 입주 전 하자를 신고하는 마지막 날이어서 일찍 회사에서 나온다고 해도 거기 갔다오다 보면 또 하루를 그냥 빼먹게 되어 있었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 깊은 절망감으로 책상 한쪽 구석에 놓아둔 열쇠 냄비를 바라보았다. 전에도 느끼고 있었지만 후배가 다시 그것을 상기시켜 주듯 말하고 간 세 집 살림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그것이 더한 걱정으로 다가왔다. 나중엔 원고보다 그게 더 당장의 큰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냥 새 아파트를 아내에게 주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나지, 하는 생각을 해왔던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여길 정리해 다시 월계동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릉 어머니에게 가 있는 아내가 순순히 열쇠를 받아 그곳을 들어갈 것 같진 않았고, 그렇다면 나야 여기에 계속 있으면서 아내의 태도를 관망할 수밖에 없다지만 내 집도 아닌 월계동 집은 들어가 살 것도 아니면서 언제까지고 그렇게 거기에 짐을 놔둔 채 전세로 가지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왜 그 단순한 생각을 이제야 하는지 모를 심정이었다. 나중엔 글 때문이 아니라 열쇠 냄비만 봐도 머릿속이 복잡해져 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냄비는 냄비대로 치우고 열쇠는 책을 빼낸 [서양철학사 상권] 케이스에 담아 다른 책과 함께 구석 자리에 놓아두고 다시 책상에 앉아봤지만 그러나 그러곤 거기서 요지부동이었다.
다음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에도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두 곳 아파트의 열쇠였고,
그것이 이 방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다시 머릿속이 찌근찌근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출근할 때 가방에 신사동 아파트의 열쇠를 챙겨 넣었다.
그날 오후, 나는 서울에 올라온 지 8년만에 처음 수색엘 갔다. 그것도 거기에 가자고 해서
간 게 아니라 신사동 아파트로 가다가 모래내 부근에서 길을 잘못 들어 수색까지 가게 된 것이었다. 정말 그렇게 가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언젠가 거길 가더라도 아주 편한 상태에서 아주 편한 마음으로, 그리고 그 엄마에 대한 애틋한 기억들을 바람에 일렁이는 잔잔한 물빛처럼 하나 하나 떠올리며, 자동차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몰면서 가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날 수색행은 나도 그것이 수색 가는 길인지 모르게 엉겁결에, 이미 들어가 보니 거기가 수색인 것이었다. 아마 사람들은 이야기를 해도 그날 내가 그곳에서 느낀 이게 아닌데 하는 기분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에도 여러 번 그런 경험이 있지만 길을 잘못 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느끼는 당황감 같은 것은 오히려 문젠 아니었다. 왜 하필 잘못 든 길이 수색 가는 길이었는가 하는 것과, 그런 기분과 그런 식으로 수색엘 가고 싶지 않았는데 최악의 상황에서 최악의 방법으로 수색엘 가게 된 것에 대해 나는 우선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 내 자신이, 아니 그런 실수가 벌어지는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건 단순히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도 막상 수색 안을 들어가 느낀 정말 이게 아닌데 하는 느낌에 비하면 지극히 작고도 사소한 것이었다. 아무런 준비없이, 최악의 상황에서 최악의 방법으로 들어간 길이긴 하지만 그전부터 나는 어떤 식으로 들어가든 들어가기만 하면 수색이라는 동네가 온통 물빛 무늬를 이루고 있을 줄 알았다. 최소한 내 눈에 그렇게 보일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러나 그곳엔, 내가 마음속에 아껴두며 그토록 보고자 했전 무늬가 없었다. 물빛 무늬도, 물빛도 아닌 그 어떤 무늬도..... 정말 이것은 아니었다. 아니, 아니고 싶었다. 나는 '수색'이라는 표지판마저 믿을 수 없어 그 아래에 차를 세우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곳이 수색이 맞느냐고 물어보았다. 두 번 물어도 사람들은 맞다고 했다. 나는 자동차를 되돌려 천천히, 처음 그 길을 가게 되었을 때 내가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속도대로 천천히, 수색을 나오며 그 길의 이쪽 저쪽을 살폈다.
그리고 또 다시, 이번엔 꼭 그 무늬 비슷한 거라도 봐야겠다는 심정으로 길을 따라 서울이 끝나고 수색이 끝나는 시계(市界)까지 들어갔다 나왔다. 그러나 그곳 어디에도 무늬는 없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부터 살던 월계동이거나 그 동안 몇 번 가 본 신사동 주변과 마찬가지로 그 곳은 그냥 어떤 특색도 없는 서울 외곽지역 중의 하나였다. 내가 거기에서 꼭 물빛무늬를 봐야 함에도, 아니, 찾아갔을 때 그곳은 나에게 내 마음 속에 있는 것과 똑 같은 무늬를 보여 주어야 함에도.....
아파트의 하자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수색엘 갔다가 나는 그곳에 늦게 들어가 대충 한 번 거실과 방안들만 휘휘 둘러보고 나왔다.
"하자 많지 않아요?"
밖을 나오자 같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하자가 많지요, 하는 얼굴로 물었다.
"별로 없는 것 같던데요."
"다행이네 그럼. 우린 뭐 제대로 된 게 없어요."
하며 그가 보여주는 하자 신고서엔 거의 빈칸이 보이지 않았다. 아내와 함께 온 그는 안방 욕실 수건걸이의 나사가 하나 빠졌다는 것까지 적었다. 처음부터 난 언제 들어가더라도 아내가 들어갈 집인데 큰 하자 없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둘러보았고, 그는 작은 하자라도 꼭 찾아내야겠다는 식으로 둘러본 차이일 것이다. 하긴 나는 욕실에 수건걸이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고 나왔던 것이다.
"참, 이 동 몇 호예요?"
"305호요."
"그때 로얄 층 뽑지 않았어요?"
"12층이었는데 나중에 변경 신청할 때 바꿨어요."
"이런 지금은 5백 더 들어간다 해도 나중에 팔 땐 그게 나은데. 입주는 언제 해요?"
"글쎄요....."
"전세 주실려고?"
나는 못 들은 척하고 입구에 세워둔 자동차의 문을 열었다. 그날에도 원고는 한 줄도 나가지 않았다. 나는 더 애쓰지 않고 다른 날 보다 일찍 자리에 누워 떠오르는 대로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다. 병신도, 암만 그쪽을 처음 가보는 길이어도 그렇지 거기서 우회전을 했어야지, 우회전을. 모르지 또..... 수색이 거기 아니라 어디에 있어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이왕 들여다보는 거 찬찬히 볼 걸 그랬나. 창문틀은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보일러도 옳게 가동해보지 않았는데. 한 번 그래놨으니 다음에 편한 마음으로 가도 더 나은 느낌으로 오지 않을 거야. 그나저나 열쇠를 받아 가시라고 얘기나 해야되는 거 아니야. 하나하나 살펴보면 거기도 하자가 적지 않을 텐데. 징그럽게 웬 열쇠는 저렇게 주렁주렁 매달았는지.
무늬가 없어, 무늬가. 월계동에도 우편물이 꽤 쌓였을 텐데, 그러고 보니 거기 공과금하고
관리비도 두 달 내지 않았고. 열쇠냄비가 뭐야 열쇠냄비가. 그걸 그렇게 담을 데가 있었나. 거기선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회전이라고. 원고 닷새만 더 늦춰 달락 하면 정 주간이 잡아먹으려고 달려들겠지. 해설이 붙는다면 그쪽도 빨리 받아 읽어야 뭘 쓰든 말든 할 테고. 그거야 처음부터 빈 집이니 나둬도 되지만 월계동은 어떻게 하지. 저놈의 열쇠 다 집어 내던질 수 없나. 거기 안 들어간다면(아내가) 나도 언제까지 여기 이러고 있을 수 없는데 말이지, 잘 나가다 왜 안 써지는지 모르겠어. 욕심이었는지도 모르지 무늬가 어디 있다고. 아니면 환상이었거나.....
정 주간의 전화는 다음날 사무실로 왔다. 그는 닷새 후엔 틀림없는 거지, 했다. 나는 틀림없을 거라 했다. 쓰긴 다 썼는데 다시 한번 읽어보고 있는 거라고. 그는 특유의 억양으로 오우케이, 하고 전화를 끊었다. 머릿속에 그 한 냄비 되는 열쇠들이 구멍 뚫린 눈들을 한 고기떼들처럼 잘랑거리며 왔다갔다했다. 거기 들어가 살든 안 살든 일단 정리는 해 둬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사람들이 사무실을 좀 비워주길 기다리다 현관으로 내려가 전화를 했다. 아내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나는 집이 다 지어져서 입주를 하란다 말하고, 처음엔 12층을 뽑았는데 당신과 아이가 살기에 편하게 3층으로 바꾸었다고 말했다. 아내는 요즘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마포라고 대답하고 올라와 들어가든 안 들어가든 열쇠를 받아가라고 했다. 아내는 전화를 받는 중간 잠깐만요, 하고 수화기를 막은 채 어머니와 무슨 이야긴가 나누고 나더니 (말로는 상인이가 자꾸 매달려서요, 했지만) 오늘, 하다가 아니 내일 올라 갈테니 낮에 자기가 들어갈 수 있도록 내가 먼저 월계동에 들어가 아침 출근할 때 경비실에 키를 맡겨달라고 했다.
나는 아내가 올라오겠다는 말을 너무도 선뜻하게 하는 것 같아 의사전달이 잘못된 게 아닌가 싶어 다시 12층을 3층으로 바꾼 건 그 아파트가 내가 들어가 살 아파트가 아니라 당신이 들어가 살 아파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화를 하는 동안에도 눈에 구멍이 뚫린 고기떼들은 여전히 내 머릿속을 짤랑거렸다.
저녁에 나는 그 고기떼들을 편지 한 장과 함께 비닐 봉지에 겹겹이 싸 월계동 아파트의 경비실에 맡기고 돌아왔다. 편지에 나는 원고 마감 때문에 그러니 꼭 필요하고 급한 연락이 있더라도 사무실로든 하숙으로든 닷새 후에 전화를 달라고 썼다. 열쇠를 담았던 냄비도 납작하게 밟아 대문 바깥 쓰레기통에 넣었다. 정말 거짓말처럼 다시 글이 써지기 시작했고 속도감이 붙기 시작했다.
아내는 정확하게 닷새 후 아이와 함께 회사 앞으로 나와 전화를 했다. 아내에겐 의도적으로 소홀한 듯 보이려 노력했다.
"일부러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돼요."
어머니는 아내에게 어떤 가르침과 자신감을 주었던 것일까. 나만큼이나 서먹서먹한 얼굴을 할 줄 알았던 아내는 시작부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떠날 땐 여기 들어와 있거나 그냥 거기 있을 거면 키라도 찾아가라고 전화를 해 난..... 난..... 먼저..... 못..... 끊겠어요, 하던 여자였다.
"원고는 다 넘겼어요?"
"어제."
"당신 몰랐죠? 내가 이런 모습으로 나올지는."
"낯설어."
"나도 낯설어요. 전 같으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못 그랬는데."
"어머니가 시키더나?"
나는 30년 전의 아버지처럼 말했다.
"어머님한테 당신 살아온 얘기 많이 들었어요."
"수호엄마 얘기?"
"예. 당신이 모르는 부분도 많아요. 훌륭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머니가?"
"아뇨. 나는 그분이요. 그리고 어머니두요"
"아프게 살면 훌륭해져. 누구나..... 그렇게 살고 그렇게 이별하면."
"어디 가서 식사해요."
"난 별로 생각이 없어."
"그래도 해요. 앉아서 할 이야기가 있어요."
식당에 가서도 나는 물수건으로 내 손을 닦고 얼굴을 닦고, 아이의 손과 얼굴을 닦아주며
가능한 맞은편에 앉은 아내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주문도 아내가 했다. 나는 물수건을 만지작거리며 아무거나, 했다가 아내가 그런 음식이 어디 있어요, 해서 그럼 당신 하는 걸로, 했다.
"이제 그만해요. 꼭 전에 월계동 식탁에 앉은 것처럼......"
"할 얘기가 뭔데?"
"당신은 우리가 그때 무슨 일이 있었을 때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알아요?"
"모르겠어. 그냥 모든 게 다 귀찮았으니까."
"나도 처음엔 우리가 권태기를 겪나 했는데 강릉 가서 생각하니 그게 아니었어요. 그때 같이 신사동에 갔다오고 나서 바로 그랬어요, 당신은 차안에서 꿈을 꾸는 듯한 얼굴이었고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자동차에서 내리면서부터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다음에 수색에 같이 가자고 했지만 나한테 해선 안 될 얘기를 한 것처럼."
"어머니 얘길 듣고 나니까."
"아뇨, 당신이 당신도 못 느끼는 사이에요. 그 날 저녁 당신이 서재에서 원고를 쓰고 있는데 내가 가만히 뒤로 다가가니까 언제 들어왔냐며 쾅하고 워드프로세서 뚜껑을 닫았고요. 제목만 큰 글씨로 수색 가는 길이라고 쓰고요. 맞지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 당신은 집에서 원고를 잘 못 쓰는 것 같았어요, 나한테 말도 잘 하지 않고요."
"상인아, 이제 수건 좀 거기 그만 놔두지 못하니?"
"뭐라시더냐니까."
"니 생각엔 아범이 왜 그러는 것 같냐고 해 신사동 갔다오던 날 얘기를 했어요. 당신이 차 안에서 한 얘기도 하고 방에 들어갔을 때 얘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어머님이 당신 자랄 때 얘기도 해줬어요, 그래서 자식이지만 미안한 것도 많으시다고....."
"어머니가 나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어서."
"왜 없으시겠어요. 당신도 알면서....."
"지금도 어머닌 나한테 수호엄마가 생겨서 그러는 게 아닌가 생각하시잖아."
"다른 형제들이 그랬다면 덜 그렇게 생각하시겠대요. 그게 다 당신이 자꾸 마음에 밟히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지."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잖아."
"그럼 부부 사이가 냉랭해지면 우선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어요? 당신은 잡지사다 영화사다 하며 여자 전화도 자주 오고. 또 그거 아니어도 뭐 이번엔 그 어머니가 계셨고....."
그러던 사이 식사가 나왔다. 아내와 나는 육개장이었고, 아이는 갈비탕이었다.
"나는 매운 것 싫은데."
"그럼 당신 내가 뭘 시켰는지도 모르고 그거 달라고 했어요?"
"됐어. 먹지 뭐. 그런데 당신 신사동으로 들어갈 거지? 열쇠가 너무 많아서, 냄비는 보기만 해도 징그럽고."
"무슨 얘긴데요?"
"먹기나 해. 그냥 그런 게 있으니가, 아버님 건강하셔?"
"예, 어머님은 올라가라는 말씀 안 하는데 아버님은 내려가던 날부터 올라가라고......"
"당신은 왜 올 마음이 없었고?"
"갈 땐 누가 가고 싶어 갔나요? 아버님은 자꾸 올라가라고 하시는데 어머님이 그렇게 올라가면 다시 내려오게 된다니까 못 왔지. 전화도 하지 말라시고, 이런 얘기까지 하면 안 되는데....."
"그래서 어머님이 무섭다는 거야. 그래서. 보내는 사람 언제 어떻게 보내야 다시 오지 않는지까지 아시는 분이니까. 당신뿐 아니라."
"왜 먹지 않고요. 다른 거 시켜드려요?"
"됐다니까."
"원고 쓰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텐데."
"그것보다 말해봐. 나도 신사동으로 가야할지. 월계동으로 가야할지. 아니면 그대로 마포
에 있어야 할지 결정해야 하니까."
"뭘요?"
"다음에 나하고 수색 갈 수 있겠어?"
"그 소리가 왜 안 나오나 했어요. 지난 봄부터 나는 가슴앓이하고 당신은 수색병 앓고, 그
바람에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생인손 앓으시고..... 그런데, 12층 그냥 놔두지 왜 바꿨어요?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 계단 창문에서 내려다보니까 이쪽 저쪽 양쪽으로 다 확 트이던데, 당신 늘 가고 싶어하는 수색 쪽도 보이는 것 같고."
"거기 가 봤어?"
"그럼요."
아내는 올라와 월계동 아파트도 내놓고, 또 강릉에서 올라올 때 손 없는 날을 골라 이삿날도 잡아왔다고 했다.
"날은 당신이 전화했던 날 어머님이 잡아오셨어요. 9월 7일로. 그날이 당신한텐 제일 좋대요. 동방에서 서방으로 가는 거니까 그것도 당신한텐 아주 좋고요. 꼭 전세를 빼야 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거야 뭐 차차 빼도 되고. 포장이사도 알아봤어요."
"그러다 내가 안 간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
"그럴 리가 있나요."
"그래. 다 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하는 일인데 말이지?"
그날 우리는 거의 반년만에 방을 같이 썼다. 내가 수색엘 다녀온 이야기를 했을 때 아내는 그렇게 가니 그렇지 자기와 함께 가면 무늬가 보일거라며 이사를 하면 이번엔 꼭 함께 그곳으로 가보자고 했다.
그러나 나의 두 번째 수색행은 아내와 함께가 아니라 어머니와 함께였다.
이사를 한 후 일부러 다니러오신 어머니를 모시고 나는 신촌 백화점엘 나갔다. 그리고 오던 길, 수색엘 갔던 것인데 사천교 다리를 건널 때까지만 해도 나는 늘 다니던 대로 모래내길로 접어들려고 우회전 깜빡이를 넣었다가 다리를 거의 다 건너 와선 내 마음속의 무엇이 시켜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게 그대로 직진을 해버렸던 것이다. 예전 수호 엄마가 약쟁반을 들고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도 가기 싫어도 한 번은 그곳엘 가 봐야한다고 생각했다. 남가좌동을 지나고 북가좌동을 지나 불광천에 이를 때까지 나는 제 길을 가는 것처럼 표정을 바꾸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차를 몰았다. 그러다 불광천을 건너면서부터 자동차의 속도를 떨어뜨리고 아이구, 길을 잘못 들었구나, 잘못 들었어, 를 연발하며 창 이쪽 저쪽의 풍경과 옆자리에 앉은 어머니의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여기가 어딘데, 하고 묻기라도 하면 여기가 수색이잖아요, 예전 수호 엄마가 살았다는, 하고 큰소리로 말하면서 그때 어머니의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런 정신도, 아까 거기 다리에서 오른쪽을 가야 하는데 다음 번 다린 줄 알고....."
그래도 어머니는 그럼 여기가 어딘데, 하고 묻지 않았다. 바깥 풍경은 지난번 엉겁결에 왔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와 함께 온 길이라면 최소한의 비극미 정도는 있어줘야 했다. 나는 다시 한 단계 속도를 떨어뜨리면서 연신 이쪽 저쪽 창 밖과 어머니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그러다 수색 시장 앞을 지나면서 어머니의 얼굴이 오히려 처음보다 차라리 차분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조금 더 가다보면 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거기 가서 차를 돌려야겠어요. 길을 잘못 들어가지고....."
"길이야 잘못 들면 바로 찾아가면 되지. 무슨 걱정이겠냐."
저 놀랍고도 무서운.....
말을 안 해 그렇지 어머니는 내가 잘못 들었다는 길이 수색임을 알고 있었다. 오면서 본 여러 군데의 표지판에도 그렇게 써놓았고 도로에도 흰 글씨로 군데군데 큼지막하게 우리가
왔던 길이 수색 가는 길임을 써 놓았다.
나는 수색교를 지나 시계(市界) 가까이 가 자동차를 돌렸다. 그리고 내가 먼저 말하기로 했다.
"어머니는 여기가 어딘 줄 모르지요?"
"와보기는 처음 와 봐도 어딘 줄은 알 것 같다."
"아시겠어요?"
"그래. 전에도 아범 여기 와 봤디나?"
"예, 에미 강릉 내려가고 나서..... 일부러는 아니었고요."
"안다. 말하진 않아도. 에미한테 들은 얘기두 있구. 그러니 니가 얼매나 잘 살아야 것나. 이 에미 저 에미 한 다 받아 가지구....."
나는 다시 엑셀을 밝고 있는 오른쪽 발에 힘을 주었다.
"가시죠, 어머니....."
그러나 그 날에도 나는 그곳에서 무늬를 보지 못했다. 또 다른 기분으로 아내와 함께 가도 그 무늬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오직 내 마음속에서만 아련한 추억으로 일렁이는 그 물빛 무늬..... 나의 수호 엄마.....
이순원(1957- )
강원도 강릉 출생. 강원대 경영학과 졸업. 198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1988년 <문학사상> 신춘문예에 <낮달>이 당선됨.
이 승 우
F는 눈을 뜨고 일어나 앉으며 맨 먼저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그의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시계바늘은 두 시 삼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낮이었다. 목덜미며 어깻죽지가 끈적끈적한 게 여간 불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적어도 두 시간 이상 잠을 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특별하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잠은 속옷처럼 익숙했다. 그는 언제나 잘 수 있었고, 얼마든지 잘 수 있었다.
정작 특별하고 이상한 점은 다른 데 있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보았다.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머릿속은 여전히 얼얼했다. 꿈을 꾼 것인지 아닌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바로 조금 전에 잠에서 깨어났으므로 정황으로 보아 꿈을 꾼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긴했다. 그러나 꿈이라고 말해버리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 선명했다, 는 수준이 아니라, 이건 아예 도무지 꿈 같지가 않았다. 아무리 선명한 꿈이라고 하더라도(어쩌면 선명할수록 더욱)꿈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느리고 있게 마련인 그 특징적인 비현실감이란 게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F는 자신이 혹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어보기도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잦은 잠버릇에 길들여진 그이고 보면 무의식적으로 그런 연상을 할 법도 하지 않은가.......그런 생각이었다. 아닌게아니라 육체는 깨어 있으면서도 의식이 반쯤 잠에 빠져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 또한 확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단정하려고 들면 다른 가능성 쪽이 가만있지를 않았다. 자신이 조금 전에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다는 사실만은 어쨌든 부정할 수 없지 않느냐는 반격 앞에선 마땅히 대응할 것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영락없이 꿈을 꾼 것이었다. 그렇지만, 꿈이라고 단정해버리기에는 또 너무나 아쉬운 구석이 많았다. 그래서 F는, 그 두 가지 가능성의 중간을 택하여 자신이 잠들기 직전에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일이 일어나기 직전부터 그가 조금씩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고 가정하면 꿈인지 현실인지 잘 분간되지 않는 이 현상의 수수께끼는 풀린다. 하지만 그랬을 때는 다른 수수께끼의 돌출을 감당해야 한다.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서 벌어진 그 일이 한숨 자고 일어난 다음에도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되는 상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머릿속이 뒤엉킨 생각들로 북적거렸다. F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창 밖은 나른했다. 투명한 광채를 내며 햇빛들이 출렁이고 있었다. F는 문득 머리가 어질어질해오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한참 후에 떴다. 실눈을 하고 햇빛들에 점령당한 세상을 보았다.
세상은 한없이 막막하고 적막했다. 세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출렁이는 햇빛들에 녹아 없어진 것 같았다. 바람도 먹히고 소리조차 기화되어 사라졌는가. 그 숨막히는 한낮은 역설적으로 평화로웠다. F는 언제나 이 거짓의 평화를 못 견뎌해 왔다. 그는 그 세상의 적막한 평화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깜깜한 절벽을 보았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수족관처럼 나른한 이 한낮의, 거짓의, 위장된 평화의 숨통을 끊어버리고 싶었다. 늘 그랬다. 그것이 그의 오래된 한결같은 욕망이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욕망을 실천에 옮긴 적이 있었다. 한번은 아파트 단지가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또 한번은 자신의 집 건너편에 있는 유리창을 향해 자신이 마시던 커피잔을 던졌다. 그러나 세상은 끄떡하지 않았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사람들은 밖으로 쏟아져 나오지도 않았다. 단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의 집 벽에 매달려 있는 인터폰의 띵똥띵똥 소리를 내며 울렸을 뿐이었다. 관리실에 연결된 인터폰은 기계적인 목소리로 그의 몰상식적인 행동을 경고했다. 다음달 관리비에 그가 깬 건너편 집 유리창 값이 추가될 것이라는 고지도 물론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어느 날 그가 옥상에 올라가 공동 안테나의 선을 모조리 잘라버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은 그의 행동에 대해 철저하게 냉담한 반응을 보임으로써 그의 욕망을 무력화시켰다. 그의 욕망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반세상적인 욕망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이 낮잠이 습관화된 것은 그의 받아들여질 수 없는 욕망이 거푸 좌절을 맛본 사실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는 그 욕망을 세상을 향해 푸는 대신에 자신 속에 담아두는 편을 택하기로 했던 것이다.
F는 목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잘못하다가는 출렁이는 햇빛에 그 자신조차 녹아날 것 같아서 그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 꿈에선지 현실에선지 영 분간되지 않는 일이 다시금 선명하게 떠 올라왔다.
"당신을 초대합니다....."
또렷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어딘지 꾸며낸 것 같은 낭랑함이 느껴졌지만, 발음이나 억양은
정확했다. 전혀 생소하지만은 않았다. 입고 있는 옷이며 몸짓조차도 바로 앞에 사람이 서 있는 것처럼 선명했다. 남자는 흰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까만 구두를 신고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검정 색깔의 긴 연미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 옷차림은 정중하다는 인상과 시대 착오적이라는 인상을 동시에 주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남자의 얼굴만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얼굴 부분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초점이 흐려지는 것이었다. 마치 안개가 가득 덮인 날 유리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것처럼 눈코의 윤곽이 뭉개져 보였다. 나이가 얼마나 되는 지도 잘 분간하기 어려웠다.
"당신을 초대합니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정중했다. 깊숙이 고개를 숙여 절까지 했다. 현실적인가 하면 비현실적이었고, 비현실이라기에는 또 너무 현실에 가까웠다. 그러나 F는 이제 더 이상 그 남자가 자기를 초대한 것이 꿈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런 것을 따지는 일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 순간, 물론 그 뜻하지 않은 초대에 감흥을 받은 영향 탓이 컸겠지만(그는 이제껏 누구에게도 단 한 차례의 초대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의 눈앞에 유일한 현실로 버티고 있는, 태산과도 같은 세상의 나른한 평화에 대한 혐오감이 그의 판단 기능에 심각한 위해를 가했다.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커피잔을 앞집 유리창을 향해 던지거나 공동 안테나를 망가뜨려야 할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그 알 수 없는 파괴 충동의 가열로 그의 얼굴 색은 새파랗게 변했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잠을 자든가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 두 가지의 선택 중에서 그 순간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초대를 받았던 것이다.
F는 입고 있는 옷을 모두 벗고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맨몸에 찬물을 뒤집어썼다. 차가운 물줄기가 온몸을 관통하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그는 샴푸로 머리를 감았다. 그 다음에는 얼굴에 비누 거품을 잔뜩 묻히고 정성스레 면도를 했다. 그는 꽤 오랫동안 면도기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 때문인지 면도날의 귀퉁이에 붉은 녹이 슬어 있는 게 보였다.
그는 개의치 않고 얼굴에 가져갔다. 녹이 슨 면도날은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시간도 오래 걸렸고, 턱밑에 조그만 상처까지 생겼다. 그러나 F는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면도를 마친 F는 몸의 물기를 닦고 목욕탕을 나왔다.
그는 오랫동안 옷장에 처박아두었던, 그래서 나프탈렌 냄새가 짙게 배인 흰 와이셔츠와 감색 양복을 꺼냈다. 넥타이도 골랐다. 붉은 바탕에 색색의 둥근 꽃이 그려진 넥타이였다. 감색 양복이 연미복에 가장 근사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양복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F는 그 옷을 입었다. 머리를 빗어 뒤로 넘기고, 구두를 꺼내 신었다. 그의 구두는 검정 색이었는데, 먼지가 뿌옇게 앉아 있었다. 그는 구둣솔로 정성스럽게 구두를 닦았다. 그의 이마에서는 땀이 송골송골 솟아나려고 했다. 그는 서너 가지 색깔의 줄무늬가 가로 세로로 쳐진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닦고, 아랫입술을 앞으로 내밀어 바람을 만들었다. 현관에 그의 상반신을 비출 수 있는 거울이 걸려 있었다. F는 그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수상한 적막이 수풀처럼 깔린 아파트 단지를 조심조심 벗어났다. 모처럼 만에 성장(盛裝)을 하고 외출을 하는 길이라 그런지 발걸음이 제법 무거웠다. 그의 앞에서, 뒤에서 햇빛은 정신없이 출렁이며 그의 의식을 비틀어댔다.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세상은 이미 외계에서 들이닥친 햇빛의 식민지였다.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숨죽이고 있는 한낮이었다. 그가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간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차도로 이어지는 진입로에 들어설 때까지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 충만한 햇빛만이 유일한 목격자였다. 그러나 햇빛은 어떤 상황이 생겨도, 여하한 경우에도 증언하지 않을 것이었다.
F는 거의 차가 다니지 않는 차도를 가로질러 왕릉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왕과 그의 부인들이 누워 있는 능은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보다 더 넓었다. 왕은 죽어서도 살아 있는 자보다 훨씬 좋은 자리에 훨씬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왕릉의 담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는, 자기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평지도 아니었고, 길도 좋지 않았다. 좁다란 흙 길이 나타났다. 길 양쪽으로 우거진 아카시아나무와 은행나무가 사람의 키 위에서 서로 팔을 뻗어 반대편 나뭇가지와 악수를 하고
있었다. 덕분에 길은 갑자기 어두워지고, 그는 마치 터널 속을 걸어가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터널은 제법 길었다. 어디까지고 이어져 있을 것만 같았다. 나무 그늘 속을 걸어가는 데도 몸에서 땀이 났다. 그는 자주 멈춰 서서 손수건으로 이마와 목의 땀을 훔쳤다.
나무 터널이 끝나자 벌판이 나타났다. 그 앞에 나타난 길은 세 갈래였다. 왕릉의 담을 타고 계속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하나 있고, 산 속으로 들어가는 오른쪽 길이 또 하나였다. 나머지 하나의 길은 벌판을 관통해 있었다. 벌판은 붉은빛을 띠고 누워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 건축물도 세워져 있지 않았고, 아무 농작물도 심어져 있지 않았다. 그곳은 그냥 있었다. 벌거벗은 채 그냥 누워 있었다. 무장을 한 햇빛만이 그 벌판을 산책하고 있었다. F는 땀을 닦고, 숨을 고르고, 벌판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발바닥 밑에서 푸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걸어가자 벌판이 사라지고 호수가 나타났다. 거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단 한 사람과도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다. 더위에 지친 매미가 목청을 늘어지게 뽑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매미 역시 햇빛과 마찬가지로 아무 증언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
햇살은 호수의 수면 위에서도 변함없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F는 뒤를 돌아보았다. 벌판은
그의 뒤로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호수를 껴안고 있는 형국의, 그다지 크지 않은 산이 벌판의 오른쪽에 우뚝했다. 산은 곧게 허리를 펴고 선 나무들로 울창했다. 그 산을 뚫고 길이 열려 있었다. 똑바른 길이었다. 포장도 되어 있었다. 그리고, 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나무문도 하나 세워져 있었다. 그것은 어떤 경계를 표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길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 끝까지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F는 그 나무 문 앞에 멈춰 서서 심호흡을 했다.
F는 처음 이곳까지 걸어왔던 날을 기억한다. 아마도 맞은편 집 유리창에 자신의 커피잔을
던져 유리창을 박살내버린 날이었을 것이다. 그는 되풀이되는 일상의 지겨움 앞에 질려 있었고, 속에다 핵폭탄을 장착하고서도 겉으로는 태연하게 거짓 평화를 시위하는(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 세상의 철면피함에 넌더리를 내고 있던 참이었다.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기를, 예컨대 그 감춰져 있는 핵폭탄이라도 터져서 이 위선으로 가득 찬 세계의 안일한 평화를 깨뜨려주기를 강렬하게 소망하고 있었다. 그의 바람은 너무도 크고 거칠어서 세상이 깨지지 않으면 그 자신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의 의도적인 소란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평화를 깨지 않았다. 인터폰이 걸려왔고, 관리인이 기계적인 음성으로 다음달 관리비에 유리창 값을 청구할 것이라는 사실만을 통보해왔을 뿐이었다. 세상의 노골적인 무관심은 그를 견딜 수 없게 했다.
그렇다고 그날 그가 처음부터 이곳까지 올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때까지 이곳에 와본 적이 없었고, 이런 곳이 있는지도 알지 못했었다. 지난 왕조 시대의 통치자와 그의 부인들이 매장되어 있는 왕릉 주변까지가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몇 번 되지 않았다. 따라
서 그가 그날 여기까지 와서 이 호수와 산,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길과 문을 발견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순전한 우연은, 그러나 또 얼마나 광대한 섭리의 그물을 생각키우는가.
그날, F는 그 길을 따라 울창한 숲 속으로 들어가 볼 생각을 했다. 어떤 계획이나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곳을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그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도 그냥 솟아났다. 생각 없이 발걸음이 움직였다고 하는 쪽이 보다 사실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처음엔 그가 들어서고 있는 길목의 양쪽에 세워져 있는 나무 구조물이 문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반질반질한 표면에 별 모양과 꽃 모양의 무늬가 음각 되어 있는, 그것은 차라리 무슨 조각품처럼 보였다. 그 자리에 서서 오랜 세월을 견딘 듯 귀퉁이마다 각이 무뎌져 있었고, 나무 표면의 색깔도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퍽 오래 전에 만들어진 물건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몇 년 전의 작품이라는 생각을 지나, 몇백 년 전의(가량 저 능에 누워있는 주인이 통치하던 시대의) 산물일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했다. 그것은 모든 오래 된 물건들이 지니고 있게 마련인 알 수 없는 신비감까지를 내 풍기고 있었다. 막연했고, 잠깐 스쳐간 생각에 불과했지만, 그 나무문의 존재는 F에게 어떤 식으로든 상당히 색다른 인상을 주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에 있었을까. 어디에 숨어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까. F가 그 문을 건성으로 살핀 후 안쪽으로 한 발짝 걸음을 내디뎠을 때 불쑥 한 사람이 그의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물어왔었다. 키가 크고 몸이 건장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모자를 쓰고 있었고, 그 때문에 처음엔 얼굴을 볼 수 없었고, 초록색 계통의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언뜻 보아 군인의 차림새를 연상시키는 복장이었는데, 자세도 로봇처럼 딱딱하고 건조해 보였다. 목소리만으로는 여자인지 남자인지를 구별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 길을 따라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F는 손가락으로 산 속을 가리켰다.
"당신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로봇처럼 생긴 사람이 나무처럼 우뚝 선 채로 말했다.
"어째서 안 된다는 겁니까?"
F의 목소리는 자기도 모르게 짜증스러워졌다. 그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F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다소 과장되게 지어 보이고, 그 사람의 말을 무시한 채 한 발짝 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양팔을 벌리고 막았다. F는 자신의 어깨에 닿는 상대의 팔 근육이 강철처럼 단단하다는 걸 눈치채고 움찔했다. F는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눈을 쳐들어야 했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얼굴을 보았지만 여전히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표정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길목에 서 있는 나무 구조물을 눈으로 가리켰다.
"저것은 문입니다. 저 문은 들여보내야 할 사람과 들여보내지 않아야 할 사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문은 사람을 차별합니다.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합니다. 열려 있기만 하는 것은
문이 아니지요. 문이 세워져 있는 것은 들어갈 사람이 있고 들어가지 않아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문이 세워져 있겠습니까? 더구나 여기 이 길에 말입니다."
F는 그 순간에, 그 고색창연한 나무문을 지나 계속 길을 간다는 것에 어떤 비밀스런 뜻이 개입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때문에 그는 그 길을 쉽게 포기해버릴 수가 없었다. 이 길을 계속 걸어가면 무엇이 나오는가. 이곳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그러나 F는 문지기의 무쇠팔과 표정 없는 눈길에 압도당한 자신의 곤궁하고 후줄근한 정신을 보았다. 그는 못내 아쉽고 궁금하다는 눈길을, 야트막한 경사를 이루며 일직선으로 쭉 뻗은 산길 쪽으로 한동안 보내고 있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뭉기적거리며 그곳을 벗어났다.
그날 이후 F는 여러 차례 이곳까지 걸어왔었다. 그가 집을 빠져 나와야 할 일은 너무 많이 일어났다. 그는 왕과 그의 부인들이 누워 있는 능을 지나고, 아카시아와 은행잎이 둥글게 하늘을 덮고 있는 좁고 긴 터널을 지나고, 붉은 흙이 융단처럼 깔린 텅 빈 벌판을 지나 호수에 이르렀다. 그러면 어김없이 산 속을 향해 뻗은 길이 나타나고, 별과 꽃무늬가 음각된 오래 된 나무문이 있고, 문 곁에는 또 언제나 군복 차림의 옷을 입은, 키가 크고 무쇠 같은 팔을 가진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되지 않는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도무지 그 문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지기는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쫓아냈다. 나중에는 그 문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고만 있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집을 나오면 어쩌자는 작정 같은 것도 없이 이곳까지 걸어오곤 했다. 꼭 무엇에 홀린 것만 같았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F의 마음속에서는 문 안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서 버렸다. 어떻게 해서든 한번은 기필코 들어가 보고 싶다는, 그 생각은 불같은 열망이 되었다. 세상을 깨뜨리려는 그의 가당치 않은 욕망은 이제 저 문을 지나 금지된 산길을 걸어 들어가 보려는 욕망으로 대치되었다. 그의 간절한 마음을 헤아렸음일까, 언젠가는 크게 선심이라도 베푸는 듯한 태도로 그 문지기가 '이곳에 들어오려면 초대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해준 적이 있었다. F는 그 초대장을 어디서 누구에게 받아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문지기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이제껏 그자가 문을 지키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 문지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은근히 그자가 앞을 막아서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던 터였다. 그를 초대한, 그 꿈인지 현실인지 잘 분간되지 않는 이야기를 해주면 작자가 믿어줄까,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문지기는 어디로 갔을까....F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빈 문 앞에서 잠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어디에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걸어 들어가 버리려는 마음을 무쇠 같은 작자의 팔 근육과 기계 같은 눈초리가 저지했다. 그 때문에 그는 곧게 뻗어 올라간 야트막한 언덕길을 바라보며 나무 문 곁에 꽤 오래 서 있어야 했다.
길은 자석처럼 사납게 그를 끌어당겼다.
그 길을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그의, 세상을 부수려는 거친 욕망과 맞바꾼, 자석 같은 욕망이 결국 문지기의 근육과 눈초리를 무시하게 했다. 그는, '나는 초대를 받았다.'고 중얼거렸다. '문지기가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가 자리를 비켰기 때문이고, 그가 자리를 비켜준 것은, 나를 들여보내지 않을 이유가 더 이상 없어졌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했다. 나의 행동은 합법이다, 라는 생각은 자신의 불법적인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인지도 모르는 일이긴 했다. 좀더 정확한 표현을 쓰자면, 그는 자신의 행동의 합법성을 보장해줄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았다. 그 문제에 관하여 입장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그 사람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행동을 유보할 수도 없었다.
판단을 뒤에 둔 채 행동에 나서야 하는 그런 상황이란 것이 있는 법이었다. 말하자면 그때 F의 경우가 그랬다. 곧게 뻗은, 크고 울창한 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언덕길을 바삐 올라갔다. 한참 올라가다 뒤를 돌아보니 널브러져 있는 붉은 벌판이 보였다. 산길로 접어드는 입구에 나란히 서 있는 나무문도 보였다. 그 옆에는 아까 보이지 않던 문지기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흡사 나무처럼 우뚝 서서 빈 벌판을 지키고 있었다.
어느 만큼 올라가자 길은 내리막길로 바뀌었고, 노폭도 조금씩 좁아졌다. 나중에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 어디쯤에서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 더 이상 벌판의 붉은빛도 보이지 않았고, 문도, 문지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는 햇살이 기세 좋게 반짝거리는 물밭이 펼쳐져 있었다. 밖에서 볼 때는 호수인 줄 알았는데 강이었던가. 강은 오른쪽 끝을 향해 길게 뻗치다가 산자락을 따라 급히 몸을 꺾고 있었다. 그가 걷는 길은 그 물가 쪽을 향해 열려 있었다. F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무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는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막연한 채로지만, 금지된 작물을 재배하는 큰 농장이거나 으리으리한 별장이라도 숨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무언가 색다른 사태와 조우할 것이라는 희망, 그곳이 없었다면 그가 무엇 때문에 이곳을 그렇게 간절하게 꿈꾸었겠는가, 그는 무언가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일상의, 적막하기 짝이 없는 시궁창에 큰 파장을 일으킬 특별한 돌덩어리를 찾고 있는 참이었다.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를 구경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영혼이라도 내놓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그였다. 그런데 이건 뭔가....그 앞에 펼쳐진 풍경의 단조로움과 평범함이 그의 의욕을 꺾었다. F는 성급하게도 그냥 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길이 닿는 곳까지 내려가 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물가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을 향해 납작 몸을 숙이고 있는 낡은 집을 한 채 발견했다. 그 집은 우묵한 지형 속에 신묘하다고 할 정도로 잘 은폐되어 있어서 아주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전혀 발견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열 길 높이로 치솟은 가지가지 나무들이, 마치 어미 닭이 자신의 날개로 병아리들을 감싸듯 그렇게 완벽하게 그 집을 덮고 있었다. 그 집은 조금도 특이하지 않았다. 특별한 느낌은 그 집을 가리고 있는 지형
에서 말미암았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F는 그 집의 교묘한 위장술에 대해 채 감탄하지도 못했다.
길목을 지키던 문지기와 똑같은 복장을 한, 그러나 그 사람보다는 훨씬 키가 작고, 근육이나 눈길이 한층 부드러워 보이는 한 사람의 안내를 받아야 했다. 이 사람 역시 남자인지 여자인지 잘 분간되지 않았다. 모자를 너무 깊이 눌러써서 얼굴의 반 정도는 보이지도 않았다.
어차피 F는 사태를 찬찬히 헤아려볼 여유가 없었다. 그럴 마음조차 없었다는 쪽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문이 열렸고, F는 엉겁결에 그 문 안으로 들어갔다. 덜컹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자 일순 어둠이 온몸을 덮쳤다. 순식간에 검은 베일을 얼굴에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바늘 구멍만한 빛도 보이지 않았다. 닫힌 문을 더듬어보았다. 견고했고, 손잡이를 찾을 수도 없었다.
F는 손을 휘저으며 한 발을 조심스럽게 앞으로 내밀었다. 마땅히 발이 디뎌질 것이라고 예측한 자리가 뜻밖에도 허공이었다. 사태를 깨닫고 재빨리 발을 거두어들이려 했지만, 아래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린 그의 가벼운 발바닥은 허공에서 춤을 추듯 몇 차례 허우적거렸다. 그리고는 마침내 다른 쪽 발까지 허공의 어둠 속으로 끌려갔다. 아주 짧은 순간에 그의 몸은 중심을 잃고 공중에 던져졌다. 그는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F는 자기 몸이 굉장히 오랫동안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까마득하게 깊은 곳으로, 한없이 먼 곳으로 추락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아마도 스올이거나 과거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하늘이거나 미래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아니면 다른 세계?..... 그리고 암전. 깜깜한 공백. F는 오랫동안 자신의 의식을 가지고 사고하지 못했다.
"여기는 당신을 위한 세계입니다. 우리는 당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습니다."
얼마나 길고 무거운 시간이 그의 의식 위에 덮여 있었을까. 몸이 꿈틀거림과 동시에 그의
정신도 점차 회복되어갔다. F는 눈을 떴다. 그러나 그의 눈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눈을 떴으나 뜨지 않은 것과 매일반이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만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어쩌면 그 소리 때문에 의식을 회복한 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신은 이제부터 미로를 뚫고 지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미로는 길고 복잡합니다. 그리고 곳곳에 방이 있습니다. 그 방들은 당신이 참으로 이 세계에 합당한 인물인지, 그 자격을 테스트할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세계에 들어온
이상 추방이란 없습니다. 이 점을 명심하십시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이 세계에서 추방이란 없습니다. 아무나 들어올 수는 없지만, 들어온 사람을 내쫓는 법 또한 없습니다. 당신은 열 개의 방을 거칠 수도 있고, 단 한 개의 방도 거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어떤 길을 택해 걷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이 운이 좋은 사람이기를 빕니다. 당신은 이미 첫번째 방에 들어와 있습니다. 하지만 운이 나쁘다고 미리부터 의기소침해지진 마십시오. 아직까지 이 검은 방을 경과하지 않고 이 세계로 들어간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서 말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
F는 할 수 있는 대로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큰 방인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다만 상대가 목청껏 말을 할 때 울리는
공기의 파장으로 미루어 공간이 그렇게 크지 않다고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그래서 검은 방이라고 하지 않았소. 내가 어디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는 알려고 할 필요가 없소. 그러나 이 점만은 유념하고 있는 게 좋을 겁니다. 나는 당신을 아주 가까이에서 매우 또렷하게 보고 있습니다."
"여기는 어딥니까? 내가 어디에 온 겁니까?"
"당신이 매우 오고 싶어했던 곳입니다. 아니, 당신이 와야 할 세계입니다. 이곳은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나의 친구들? 나는 친구가 없소."
"모두 다 그렇게 말합니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친구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친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여기 온 겁니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F는 고개를 저었다. 상대방은 잠시 말을 끊었다. 짧은 침묵의 골이 견딜 수 없게 깊고 길어 보였다. 상대방의 표정을 살필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말을 중단한 사실이 몹시 걱정스러웠다. F는 불안때문에 눈알을 휘둥거렸다. 이윽고 이때까지와는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못 알아듣겠습니까? 내 말을...."
F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기묘한 일이지만 처음부터 그 사람의 말들은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말이 이
상하지 않은 것은 상황이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 낯선 사람이 설명해주는 상황을 그가 자연스러운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그 낯선 목소리가 그에게 길고 복잡한 미로를 통과해가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그 점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그 당연한 사실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또 그는 그 사람이 하는 말들 사이의 모순을 지적하지도 않았다. 예컨대 이 세계에 적합한 인물인지를 시험할 것이라고 하면서 추방에 대한 가능성을 일소시키는 그자의 말에 대해 아무 의문도 표시하지 않았다. 그런 의문 따위가 부질없어지는 이상한 경험의 자장 안에 그는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자신이 앞에 한 말을 부정했다.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이해하고 말고요."
"좋습니다. 이제 당신은 내가 내는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방을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여기에 길고 복잡한 미로가 있습니다. 그 길은 누가 왜, 누구를 위해 만든 것입니까?"
F는 생각을 모두었지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문제가 너무 황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꼭 대답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물론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부터 백을 세겠습니다. 그 동안 답을 말하지 않으면 당신은 이 어둠 속에서 하루 낮과 하룻밤을 보내야 합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 방은 밤이고 낮이고 늘 이렇게 깜깜합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겠지만 바닥에는 지네와 같은 다족류의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아닙니다. 벌레들은 밤에만 움직입니다. 당신은 밤과 낮을 구분하지 못하지만, 그러므로 이 방에서 따로 밤이 어디 있느냐고 항의할지 모르지만, 놈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놈들은 밤과 낮, 자기들이 활보해야 할 시간과 조용히 잠이나 자두어야 할 시간을 너무나 똑바르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백을 세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F는 한번 더 백을 세어달라고 요구했다. 검은 방의 주인은 잠깐 동안 생각하는 눈치를 보이더니 F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러나 F는 두 번째 백이 끝났을 때도 정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F는 다시 백을 헤아려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박에 거절당했다.
"당신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벌레들과 이 어둠 속에서 지내야 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어둠이 생각을 명철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그 말을 하고는 목소리가 사라졌다. 어디로 간 것일까. 밖으로 나가는 기척 같은 건 전혀 들리지 않았는데 그자가 방에 있다는 느낌이 갑자기 없어져버렸다. 하지만 F는 이제 그자를
부르지 않았다. 불러서 선처를 부탁한다는 식으로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또 설혹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자가 부탁을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거역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그가 이 방에서 깨달은 첫 번째 교훈이었다.
F는 무릎을 꺾어 세우고 머리를 그 위에 앉았다. 길고 복잡한 미로, 그것을 누가, 왜, 누구를 위해 만들까?.....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엉뚱한 생각들만 엉키고 풀리며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그 상황 속에서도 그는 자기가 왜 이렇게 수상하고 깜깜한 방에 들어앉아 엉뚱한 문제를 받아놓고 끙끙거려야 하는가, 하는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마치 자기가 풀지 않으면 안 되는 당연하고 마땅한 숙제인 양 생각했다. 이 숙제를 풀지 않으면 이 방을 나갈 수 없다. 여기를 나가지 않고는 미로를 벗어날 수 없다. 내 앞에는 이 황당한 수수께끼처럼 난해한 미로가 펼쳐져 있다...... 그런 생각들만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는 눈을 뜨고 있었던가.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눈을 감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가 그 점을 잘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은 그 방이 완벽하게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눈을 뜨든 감든 마찬가지인 상황에선 눈을 뜨고 있거나 감고 있다는 자각증상이 현저하게 둔화되게 마련이었다. 그런 자세로,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그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의 잠을 깨운 것이 무었이었는지 처음에는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친숙하지 않은 이 물감이 온몸 곳곳에서 스멀거린다고만 여겼다. 잠의 결을 따라 의식의 수면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면서 그는 그런 이물감 따위는 상관하지 말기로 작정했다.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나 그는 이내 그럴 수 없는 상황과 만났다. F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뛰어 올랐다. 날카로운 통증이, 예컨데 송곳에 찔린 듯한, 또는 살점이 뜯긴 듯한 예리한 아픔이 그의 발과 허벅지와 팔뚝에 동시 다발적으로 가해졌기 때문이었다. F는 몇 번이고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머리끝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의 의식을 마비 시켰던 두터운 잠이 순식간에 벽을 뚫고 달아나 버렸다.
손으로 몸을 더듬었다. 물컹하고 바삭거리는 것들이 여기저기서 만져진다고 느끼는 순간 그는 다시 외마디 비명을 질러야 했다. 무엇인가 몹시 예리한 것이 그의 손가락을 물어뜯었기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F는 자신의 손가락 가운데 일부의 살점이 뜯겨져나갔다는 사실을 짐작했다. 붉은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으리라는 추측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절망스럽게도 그런 사정은 손가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온몸이 벌레 떼들의 공습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적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숫자가 많았고 가지고 있는 무기도 살벌했다. 그에 비해 F는 혼자였고 그들과 맞설 무기도 없었다.F는 엉겁결에 겉옷을 벗어서 마구 휘둘렀다.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고 정신없이 휘둘렀다. 벌레 떼들이 후드득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벌레들은 이내 전열을 정비해 가지고 돌진해 들어왔다. 그 때문에 F는 계속해서 폴짝폴짝 뛰어야했고, 마구 비명을 질러대야 했고, 자꾸만 겉옷을 휘둘러야 했다. 벌레 떼들의 숫자가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것일까. 아니면 놈들은 죽었다가도 금방 다시 살아나는 무슨 불사의 재주라도 타고난 것일까...... 끝이 없이 달려드는 벌레들의 공격으로 F의 몸은 넝마처럼 찢기었고, 곧 이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탈진 상태에 빠져버렸다. 그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썩은 나무처럼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을 때야 벌레들은 공격을 멈추었다.
그 방은 시간까지도 감금하고 있었다. F를 따라 들러온 시간은 밖으로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은 앞을 향해 똑바로 흐르는 자신의 본성을 잊어버리고 제자리만 한없이 뱅뱅 돌았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공회전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F는 그 방의 주인이 그를 부르는 목소리를 다시 들었다.
"당신은 이제 이곳에서 나가야 합니다."
깜깜하고 단단한 바닥을 네발로 기면서 F는 소리나는 쪽으로 나아갔다.
"지금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검은 방의 주인이 큰소리로 웃었다. 그자의 크고 갑작스런 웃음은 F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기억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자갈밭처럼
덜그럭거리는 소리만 냈다. 그의 생각은 한치 앞으로 나가지를 못했다. 이윽고 웃음을 그친
남자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 수수께끼는 아무도 풀지 못합니다. 적어도 이 검은 방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걸 풀지 못하면 이곳을 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그러나 그렇게 말한 사람은 당신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겁니다. 길들은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합니다. 옆으로 꺽이기도 하고 빙 돌아가기도 하지요. 당신이 동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고 해서 또는 당신이 올라가는 것을 택해 걷기 시작했다고 해서 당신의 목적지가 반드시 동쪽이 되거나 하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이쪽으로 가도 길은 당신을 저쪽으로 데려다 놓고는 합니다, 당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러합니다. 당신은 이미 그 이치를 터득한 줄 알았는데요. 당신은 당신의 삶이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고 느껴왔지요 ? 그래서 세상을 모욕하고 저주하기도 했지요 ? 그러면서도 그 모순이야말로 당신이 견뎌야 할 세상과 삶의 참 얼굴이라고 하는 인식을 수용하는데 주저하는 까닭을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나는 어떤, 보편타당한 원칙이랄까, 말하자면 삶의 틀을 잡아주는 규범 같은 것이......"
검은 방의 주인은 다시 큰소리로 웃었다. F는 그만 스스로 기가 죽어서 거기서 말을 중단
해 버렸다.
"이곳에 잘 왔습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미로를 통해 중심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당신은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서두르십시오."
"지금 나가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나는 몹시 다쳤습니다. 벌레들이 내 몸을 넝마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F는 자기도 모르게 코끝이 매워오는 걸 느꼈다. 알 수 없는 설움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올라오는 듯했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자신이 받은 고통을 환기시키려고 했다.
"자신의 고통을 특별하고 유별난 것인 양 과장하는 태도는 스스로에게는 위안이 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위안까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합니다. 더구나 그 위안은 아주 하찮은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은 이곳에 오기 전에 비단이라고 두르고 있었습니까?"
F는 할말을 찾지 못했다. 무언가 그자의 논리에 대항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의 정신은 한없이 창백했다.
"조금만 여기 이 어둠 속에 머물게 해주십시오. 나는, 지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꼼짝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더구나 밝은 곳에 나갔을 때 내 몰골을 보게 될 일이 정말이지 끔찍하기만 합니다. 부탁입니다. 조금만 이 어둠 속에서 쉬게...."
"당신이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당신은 이방에서 하루를 더 있어야 합니다. 벌레들은 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벌레를....그것만은.....하지만 나는 나가는 문을 모릅니다. 이 방에는 문이 없지 않습니까? 문이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벌레 떼들에게 시달리는 동안 벌써 열고 나갔을 것입니다."
F는 다시금 그 카랑카랑한 웃음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 소리가 너무 싫어서 F는 귀를 막았다. 한쪽 귓불이 떨어져나가고 없다는 걸 그의 너덜너덜한 손가락이 확인해주었다. 그는 얼른 귀에서 손을 떼었다.
"누가 이 방에 문이 없다고 했습니까? 아무도 당신에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아예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당신은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나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때문에 여기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내 말이 틀렸습니까? 물론 당신을 비난하려는 뜻은 조금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니까요. 의심스러우면 지금 당신이 있는 쪽의 벽을 가만히 밀어보십시오. 원한다면 다른 쪽도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손만 갖다대면 벽은 문이 될 것입니다."
F는 시키는 대로 했다. 몸을 바닥에 대고 누운 채로 손을 벽에 갖다대고 조금 힘을 주었다. 그러자 정말로 벽이 열리는 것이었다. F는 조금씩 문이 열리는 정도에 따라 가느다란 실 모양이다가 점차로 폭포나 집채가 되어 쏟아져 들어오는 빛의 세례를 받았다. 그 빛은 아파트 단지와 벌판과 호수 위에서 출렁거리던 햇살과는 어딘지 달라 보였다. 햇살보다는 조금 더 무거워 보였고, 색깔도 탁했다. 그 빛은 자연광이 아닌 것 같았다. 그 빛이 그의 눈을 찔렀다. 그는 통증 때문에 한동안 눈을 뜰 수 없었다.
이윽고 그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을 때 그의 몸은 이미 검은 방을 빠져 나와 있었다. 그는 목소리만 들었던 검은 방의 주인의 얼굴을 끝내 보지 못했다. 그가 본 것은 그의 앞에 뻗어 있는 좁고 길고요란한 길들이었다.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몸이었다. 모처럼 차려 입은 옷들은 걸레나 같았고, 그의 몸은 밤새 다리가 많은 벌레들에게 뜯겨서 너덜너덜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몸을 끌고 자기를 괴롭힌 벌레들처럼 네 발로 기어서 앞으로 나아갔다. 혼란스럽고 경황없는 중에서도 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만은 의심 없이 선명했다. 미로를 벗어나 중심으로....그것만이 그의 길이었다.
길은 길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힘들여 걷긴 하면서도 자신이 지금 옳게 걷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길은 갑자기 막히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한꺼번에 서너 개씩 나타나기도 했다. 무슨 표시 같은 것도 없었다. 여기가 거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았다. 출구가 입구가 되고, 동쪽이 남쪽이 되는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진을 빼는 일이었다. 부지런히 걷는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때의 여지없는 낭패스러움을 어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의 부지런한 보행을 포기할 수 없는 자의 막막함은? F의 입장이 그랬다. 그는 줄곧 혼란스러워하고 끝없이 막막한 심정에 사로잡히면서도 자꾸만 앞으로 나아갔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들어갔던 검은 방을 기웃거린 것도 여러 차례였다. 꽤 멀리 왔다 싶어 은근히 대견해하다가도 여태 그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 일순간에 다리의 힘이 쭉 빠지곤 했다.
시간은 이곳에서도 앞으로 나가지를 못했다. F가 그런 것처럼 시간 역시 미로에 갇혀 어리둥절해할 뿐이었다. 검은 방은 밤낮없이 깜깜했다. 그곳에서 시간이 멈추었기 때문이었다. 미로 속에서는 밤낮없이 환했다. 이곳에서는 또 그것이 시간이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증거였다. F가 헤매고 다닌 시간은, 따라서 측정 불가였다. 그것은 제로일 수도 있고 무한대일 수도 있었다. 몇 개의 밤이 지나고 몇 개의 낮이 사라졌는지 아무도 말할 수 없었다. 어쩌면
단 하나의 밤과 단 하나의 낮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천 개의 낮과 천 개의 밤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그 미로를 거쳐가는 동안 두 개의 방을 경유했다. 하나는 흰 방이었고, 다른 하나는 푸른 방이었다. 흰 방에는 온몸에 하얀색 옷을 걸친 사람이 있었고, 푸른 방에는 온몸이 푸른색으로 치장된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은
안개가 가득한 날 유리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것처럼 눈코의 윤곽이 뭉개져 보였다. 흰 방에서 그는 검은 방에서와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 길고 복잡한 이 미로는 누가, 누구를 위해, 왜 만드는가...... 물론 그는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 푸른 방에서도 그는 흰 방에서와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 그는 거기서도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 그는 흰 방에서 오랫동안
공중에 매달려 있어야 했고, 푸른 방에서는 얼마인지도 모르는 시간동안 물 속에 잠겨 있어야 했다. 그는 방에 들어갈 때마다 그 방의 벽에 문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 버렸고, 따라서 밖으로 도망쳐나갈 궁리를 단 한번도 하지 못했다. 그는 매번 똑같은 일을 당하면서도 마치 처음 경험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몇 번이고 까무러쳤다가 일어나며 답답하고 희망 없는 걸음을 되풀이했다.
거의 녹초가 되어, 정말이지, 이제 더 이상은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그의 앞에 겨우 나타난 미로의 끝을 보았다. 그 끝은 그가 찾은 것이 아니라 나타나준 것이었다. F는 그렇게 생각했다. 몸과 정신을 폐허로 만들어가며 수고하고 노력했지만, 정작 목표에 도달한 것은 그 수고와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다. 물론 그가 애썼기 때문에 여기까지 이르렀다. 그 공로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긴 했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공로가 지겹게 길고 한없이 막막한 그 길을 끝나게 해준 것은 아니었다. 그 끝은 그냥 나타나준 것이었다. 불쑥, 그렇다, 그렇게 불쑥 나타나준 것이었다. F는 그 사실을 또렷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그는 의식을 잃었다.
"편히 쉬십시오. 이곳은 당신의 집입니다."
F의 의식이 혼곤한 잠 속으로부터 빠져 나왔을 때 그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다. 어린아이도 있고, 노인도 있었다. 그들은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의 얼굴 가까이 입을 대고 아주 낮은 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F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몸의 이곳저곳이 삐그덕 거렸다. F는 다시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의 몸에는 희고 깨끗한 옷이 입혀져 있었다. 그는 이곳이 어디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와야 할 곳, 오기로 한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스스로가 자랑스럽기보다 자신이 그런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이 한없이 감격스러웠다. 그는 겨우 입을 열어 먹을 것을 좀 달라고 청했다. 그와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사람이 들고있던 바구니를 내밀었다. 그곳에는 붉은 색과 푸른색의, 크고 작은 음식덩이가 가득 담겨 있었다. F는 그 가운데 붉은 색이 도는 고깃덩이를 집어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맛은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고기를 씹을 힘이 없었다. 곁에 서있던 사람이 붉은 액체가 들어 있는 접시를 내밀었다. 그것은 어떤 동물의 피처럼 보였다. 그는 우선 그걸 받아 마셨다. 그리고 그는 붉은 고기를 채 다 먹기도 전에 다시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의 의식이 잠의 수렁 속으로 완전히 빠져 들어가기 직전에 F는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이 나지막하게 웃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이번에도 사람들을 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난번처럼 그를 둘러싸고 있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다른 일에 열중해 있었다. 수군거리기도 했고, 손을 흔들기도 했고, 둘 셋씩 머리를 맞대고 은밀한 미소를 교환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무겁고 심각했다.
"우리들의 왕을 뽑는 겁니다. 이리 오십시오. 당신도 참여하셔야 합니다."
F는 자기에게 말을 건 사람이 맨 처음 그에게 환영 인사를 건네었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키가 작고 얼굴이 길었다. F는 고맙다는 표시로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물었다.
"왕이오? 왕이 왜 필요합니까?"
"왕이 없으면 사람들이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왕을 필요로 합니다."
F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의 뜻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무슨 질문인가를 더 하려고 했다. 그런 의중이 내비친 걸까, 그 사람은 빙긋 웃으며 "차차 모든 걸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하고 말했다.
"어쩌면 오늘밤에 그 비밀을 알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 사람은 은근한 미소를 남기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잠시 후에 음식이 공급되었다. 음식을 공급하는 사람이 왕이었다. 머리에 금으로 만든 관을 쓴 사람이 한가운데 앉았고, 사람들은 한 명씩 그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면 관을 쓴 왕이 무릎 꿇은 사람의 얼굴을 한차례 쓰다듬은 다음 음식 접시를 건넸다. 무릎 꿇은 사람은 두 번 절하고 물러났다. 왕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 번잡한 절차가 지루하게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대체로 매우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과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긴장들을 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음식 접시를 하나씩 받았다. 왕만 빼놓고 모든 사람이 받았다. F에게도 음식 접시가 주어졌다. 이윽고 금관을 쓴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을 높이 치켜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이 왕관을 새로 뽑힐 우리들의 복된 왕에게 넘길 것입니다. 새로 태어날 왕을 찬양합시다. 헌신과 영광은 그의 것입니다."
왕이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그것을 신호로 사람들은 일제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F도 따라서 접시 위에 놓인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음식 속에 콩알만한 금이 나오면 그가 새로운 왕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가 왕입니다. 당신의 접시를 잘 살피십시오."
언제 왔는지 아까 그 키가 작은 사람이 곁에 앉아 작은 소리로 그렇게 속삭였다.
"그것이 왕을 뽑는 방식입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접시에서 금을 찾는 사람이 왕이 됩니다."
F는 움찔했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자신의 접시에서 금이 발견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니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왕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런 마음이 전혀 없다고야 할 수 없겠지만, 그런 욕망은 아주 미미했다. 그보다 더 큰 것은 두려움이었다. 이 낯선 제도와 방식이 그의 의식을 멈칫거리게 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왕이 된다고 해도 특별히 수행해야 할 일은 거의 없으니까요. 왕은 한 가지 의무와 무한대의 권리를 가집니다. 한 가지 의무 때문에 천 가지의 권리가 허용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곳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왕이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빨리 되고, 어떤 사람은 늦게 됩니다. 차이는 그것뿐이지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제비를 뽑는 이런 식의 선출 방식이라면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누구나 왕이 됩니다. 왜냐하면 왕이 되지 않으면 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왕이 천 개의 권리의 대가로 지게 되어 있는 한 개의 의무란 바로 죽을 의무입니다."
그의 설명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더 질문을 하지 못했다. 한쪽에서 와! 하며 환호성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함성과 함께 한 사람의 몸뚱이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의 접시에서 콩알만한 금이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만세를 부르며 그를 왕의 자리로 인도했다. 그는 몸이 뚱뚱하고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 이제까지 왕관을 쓰고 있던 사람이 무릎을 꿇고 새로운 왕에게 왕관을 바쳤다.
"우리 왕께 영광을! 이제 당신이 우리들의 생명입니다."
왕관을 쓴 새로운 왕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애써 눈물을 삼키면서 새로 왕이 된 뚱보는 두 손을 높이 들어 좌중을 조용하도록 시켰다.
"나는 왕으로서의 첫 번째 직무를 수행한다. 이 사람은 왕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이 사람에게 우리를 위해 사형을 선고한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졸지에 사형수가 되어버린 왕은 무릎을 꿇고 꼼짝하지 않았다. 이윽고 사람들이 달려들어 조금 전까지 왕관을 쓰고 있던 사람을 밖으로 끌고 갔다.
"이제 먹고 즐기라."
새로운 왕이 명령했다. 사람들은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게걸스럽게 음식 접시를 비우기 시작했다. F도 포크를 집어들긴 했지만, 음식을 먹을 기분은 아니었다. 사형이라니. 전(前)왕이 무슨 나쁜 짓을 저질렀을까. 무슨 흉악한 짓을 저질렀기에 왕의 자리를 내놓자마자 사형 선고를 당한다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물었다.
"저 사람이 무슨 파렴치한 짓이라도 저질렀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그럼 왜?"
"당신이 본대롭니다. 그는 왕이었습니다. 그것이 이유입니다."
F는 이번에도 그 사람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설명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 사람은 차차 알게 될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그만이었다.
F를 더욱 의아스럽게 만든 것은 왕을 선출하는 의식이 매일 저녁 반복되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매일매일 새로운 왕이 태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또 괜찮았다. 참으로 F를 충격한 것은 왕을 뽑는 의식이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새로운 왕에 의해 전 왕에 대한 사형이 선고된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특별한 잘못이나 범죄에 대한 혐의 같은 것은 고백되지도 않았고 심문되지도 않았다.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왕이었기 때문이었다. 판결 내용은 언제나 같았다. "이 사람은 왕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이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따라서 왕이 된다는 것은 곧 하루 전에 사형을 선고받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게 슬퍼하거나 놀라워할 건 없습니다. 당신은 하루 전에 사형을 선고받는 사람의 운명의 가혹함에 대해 말하지만, 사실 이 세계에 들어온 순간 우리들은 모두 사형 선고를 받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빠르냐, 늦느냐, 그 차이지요.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이 예정대로지요. 말하자면 운명이란 말입니다."
F의 의문과 놀람은 그곳 사람들의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처음부터 곧잘 말상대를 해줬던, 키가 작고 얼굴이 긴 사람만이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항의의 창구였다. 그 사람만이
F와 비교적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다. F는 왕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왕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죽는다고 응수하고 나섰다. 조금 빨리 죽느냐 늦게 죽느냐의 차이는 별 중요한 게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또 왕이 누리는 천 개의 권리에 대해 강조했다. 단 하루만에 허용된 천 개의 권리가 무슨 소용이냐는 F의 반문은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았다.
"굳이 매일 한 번씩 왕을 새로 바꿔야 할 이유가 있는 겁니까? 물론 나는 왕이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수용할 수 없지만, 많이 양보해서 설혹 그런 관례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내 생각에는 왕이 하루에 한 사람씩 새로 태어나야 할 이유나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모든 결과는 필요의 산물입니다. 하루에 한번씩 왕을 뽑는 것을 왕이 하루에 한사람씩 새로 태어나야할 확실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에 한번씩 왕을 새로 뽑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의문도 당신 스스로 풀게 될 날이 올 겁니다."
F는 불쑥, 정말로 사람을 죽이는 걸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선고만 하고 집행은 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그 의식, 왕관을 벗는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의식은, 하루 동안의 짧은 권세가 이제 그를 완전히 떠났음을 다소 충격적으로 선언하는 상징일 수 있지 않을까. 선언적인 의미 같은 것, 그런 게 아닐까.....그래서 F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을, 정말로 죽이나요? 혹시......."
"그렇지 않으면요?"
"나는, 혹시, 그러니까, 어떤 상징이라든지, 말하자면, 그런 것일 수 있지 않은가 하고......"
그 사람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왕이 일곱 번 바뀌었을 때, F는 그곳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동안 그는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생활했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하루종일 미로를 만들었다. 그것이 유일한 일이었고, 또 놀이었다. 그들은 일을 하듯 놀이를 했고, 놀이를 하듯 일을 했다. 그들은 까닭도 필요도 묻지 않고, 길을 만들었다. 열기 위한 길이 아니라 닫기 위한 길, 떠나기 위한 길이 아니라 가두기 위한 길을 만들었다. 왜 사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대답했다. 길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그러나 그 길은 가기 위한 길이 아니었다.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할 필요도 없었다. 특별한 것은 저녁 시간의 그 왕을 뽑는 의식의 되풀이밖에 없었다. F는 그 각질화 된 일상의 단조로움과 철면피함에 질리기 시작했다. 다른 세계에 대한 욕망이 서서히 그의 가슴을 채워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그곳을 떠나고자 했다. 그의 말을 들은 키 작은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왜요? 안 됩니까?"
"안 될 거야 없지요. 다만 불가능할 뿐입니다."
"무슨 뜻인지요?"
"말 그대로입니다. 가능하지가 않다는 거지요. 당신은 원한다면 언제든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아무도 말리지 않고, 그 일로 벌을 받거나 하지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곳을 빠져나가 다른 세계로 가는 일은, 거듭 말하건대,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당신은 500킬로미터나 되는 미로를 빠져나가야 합니다. 당신도 참여해서 만든 미로입니다. 역사의 시작과 함께 사람들은 미로를 만들어왔습니다. 이 미로야말로 이곳에 사람이 살아왔고, 또 살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물입니다. 미로의 곳곳에는 방이 있는데, 그곳에는 물과 불과 사나운 동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물론 무서운 벌레 떼들도 있습니다. 어떤 벌레는 당신 키보다 더 크지요. 누구도 미로를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에 하나 설혹 미로를 빠져나갔다 하더라도 기뻐하는 너무 이릅니다. 당신이 미로를 빠져나갔다 하더라도 밖으로는 아직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것입니다. 미로를 빠져나간 당신이 있게 될 곳은 바로 지금 당신이 서 있는 발 아래일 것입니다. 땅 밑 말입니다. 미로의 총길이가 500킬로미터라고 했지만 그것은 한번의 실수도 없이 그 뒤죽박죽의 길을 제대로 찾아갔을 때의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적어도 3,000킬로미터 이상을 각오해야 할 겁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길을 찾아낸다면 다행이지만요.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마침내 도달할 곳이 바로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란 말입니다. 거기서부터는 물론 미로는 없습니다. 그 대신 아예 길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아직 길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기서부터는 당신 스스로 길을 만들어서 나가야 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그곳에서부터 당신 혼자서 길을 만들어 다른 세계로 나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당신의 전 생애의 세 배가 걸립니다."
"하지만, 이곳으로 들어올 때는 길이 있었지 않소? 그 길을 타고 가면 될 것이 아니오?"
"잘 생각해보시오. 길이 있었소?"
"있었던 것 같소."
"잘 생각해보시오. 길이 있었소?"
"잘 모르겠소. 나는 단지, 내가 여기에 왔으니까 길이 있을 것 아니냐고, 그래요, 그런 차원의 상식을 말한 겁니다. 그게 당연하지 않아요?"
"그것이 어째서 당연하지요? 오는 길이 있었으니까 가는 길도 있을 것이라는 당신의 기대는 오는 길이 곧 가는 길이라는 아주 평범하고 단순하고 유치하고 소박한 생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견 타당해 보이나 실제로는 전혀 근거가 없는 연상입니다. 더구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인데, 이곳으로 오는 길은 없었습니다. 당신은 이곳으로 오고 싶다는 당신의 그 집요한 의지로 길을 만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나가겠습니다."
"단언하건대 당신은 미로를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오. 당신이 미로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고 엉뚱하게 자신을 가진다면 그건 크게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미로를 만들지만 미로를 알지는 못합니다. 물론 당신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죽음의 한계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그 한계를 벗어나 바깥 세계로 이주하려는 욕망은, 물론 그 역시 자유롭게 시도할 수야 있는 일이지만, 실현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날의 대화는 그렇게 석연치 않게 끝이 났다. 그리고 그와의 대화가 석연치 않았기 때문에 F는 설득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 사람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F는 몇 차례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를 했고, 그 사람의 예언대로 실패했다. 그는 번번이 첫 번째 방에서 쫓겨서 돌아왔다. 그 방에는 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불을 넘을 수 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자기가 만든 미로 속에 갇혀서 길을 찾지 못해 죽는다니.....허망함과 서글픔이 걷잡을 길 없이 밀려왔지만, 요령부득이었다. 유일하게 명쾌한 진리는 이것이었다. 힘써서 미로를 만들다 죽는다. 그 미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가두기 위한 미로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성찰은 너무 늦게 찾아오고, 시효가 지난 성찰은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많은 날들이 지나갔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의 삶을 살았다. 단순하고 평범하게 살았다. 낮에는 미로를 만들었고, 저녁에는 왕을 뽑았다. 이튿날은 또 미로를 만들었고, 그 전날 저녁에 자신이 뽑았던 왕을 사형시켰다.
그리고, 또 상당히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어느 날 저녁 만찬 시간에 그는 자신의 음식 접시에서 콩알만한 크기의 금을 발견했다. 피할 수 없는 시간이 그에게 찾아왔다. 그리하여 그는 왕이 되었다. 그것은 다음날 그가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라는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단 하나의 죽을 의무를 위해 천 개의 권리를 쓸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단 하루 동안. 그 하루 동안 그는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미로를 만드는 작업으로부터 열외 되어 원한다면 음식을 양껏 먹을 수도 있었고, 실컷 잠을 잘 수도 있었다. 열 명의 여자들을 불러 술시중을 들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왕으로 보낸 마지막 하루 동안 한숨도 자지 않았고,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한 명의 여자도 부르지 않았다. 그는 단 한 개의 권리도 쓰지 못했다. 하루는 그렇게 빠르게 지나갔다.
이튿날 저녁, 새로운 왕으로 선출된 사람은 처음부터 곧잘 그의 말상대가 되어주곤 했던 그 키가 작고 얼굴이 길쭉한 사람이었다. F는 그에게 왕관을 건네주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사람이 F에게 선고를 내리기 전에 쓸쓸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면서 나지막하게 물었다.
"깨달았습니까? 하루에 한 명씩의 왕이 필요한 까닭을.....?"
F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언제부턴가 더 이상 그 사실을 궁금해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그 이유를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저들은 내일 나의 살을 먹을 것이다. 나의 살을 뜯어먹고 나가 자기들이 살아 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자기들을 이곳에 영원히 묶어두는 미로를 애써 만들 것이다.....라고 F는 중얼거렸다. 그의 표정 또한 한없이 쓸쓸했다.
이윽고 천둥 같은 선고가 그의 목 위로 떨어졌다.
"이 사람은 왕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이 사람에게 우리를 위해 사형을 선고한다."
이승우
강원 철원 출생. 한국문학 신인상 수상 "에릭직톤의 초상"으로 데뷔. 주요작품 : 연금술사의 춤 ,화 ,당신의 자리, 구평목 씨의 바퀴벌레, 생의 이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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