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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단편소설2

45. 초식

by 자한형 2022.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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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식(草食) 이제하

 

세 번 째 출마를 위해 부친이 채식(菜食)을 시작하자 미구에, 우리 집은 예의 그 선거 참모들로 또 붐비기 시작하였다. 삼촌, 숙모, 외할머니, 그리고 오촌 당숙들과 그들이 이끌고 온 친척의 친척들이 그 사람들로서 과연 진짜 참모들이라고 할 만했으며, 집 안팎에서 부친의 선거전의 승패에 충정으로 관심을 갖는다거나(어리석게도) 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 같은 것을 곧이곧대로 신봉하고 있는 것도 그들뿐이었던 것이다. 장학금으로 내가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을 때, 그들 중에서는 비교적 식견이 높고 총명한 외삼촌마저 정색을 하

고 정좌(正坐) 하면서,

"그렇다믄, 니는 그럼 문교부하고 바로 직통이제?"

라고 물어 왔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여튼 그랬다, 그들은 나의 부친이 반 년 쯤의 채식으로 그 번듯한 이마가 바야흐로 소슬해질 무렵에 한꺼번에 집에 들이닥쳐서는 있는 것 없는 것 죄 먹어 치우고, 갓 도배한 씀바귀 무늬의 벽지 귀퉁이에 '인사(人事) 무정(無情)'이니 '침묵(沈黙)은 금()'이니 하는 따위 낙서를 새겨 넣고,

"서광삼 무표!"

하는 라디오의 개표중계를 들으며 대들보가 떠나가라 통곡을 해대고, 그리고는 부친의 유일한 유세 도구인 자전거 한 대마저 기어이 망가뜨려 놓고야 제가끔의 시골로 뿔뿔이 흩어져 갔던 것이다. 첫 번 째도 물론, 두 번 째 출마 때도 그랬다. 전과가 없고, 어찌어찌 자격을 갖추고, 호기 있게 자신만 있으면 누구나 선량(善良)에 입후보할 수 있던 때의 얘기다.

그들은 내 방을 길길이 차지하고 누워서는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등 '날아가는 방귀 잡고 시비하는 내 아들놈'이라는 등 상스런 욕지거리들을 낄낄대며 떠들었고, 선거 결과의 예상을 놓고 높은 소리로 다투었다. 서 광삼의 당선은 틀림없으며, 이번에야 설마 3위 이상 은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골찌로부터 세 번째라는 얘긴데 그들의 몰염치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렇게만이라도 되어 준다면 성적은 과히 나쁜 편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첫번은 6명 중에서 두 번째로, 둘 째 번은 8명 중에서 첫 번째로, 부친은 꼬리로부터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던 것이다.

"서 광삼무표!, ,,,,"

하는 첫 개표 중계 때의 그여 어나운서의 맹맹한 비음(鼻音)이 아직도 내 귀에 쟁쟁하다.

그것은 내가 소학 4년 때의 일이었으며, 등받이를 떼어버린 얼음 운반용 자전거에 도시락 두 개와 '서 광삼 기호 1'이란 깃발 하나를 매달고 부친은 첫 유세에 나섰던 것이다. 텅 빈 부두의 바람받이 창고 앞 공터 저쪽을 향하여 천 3백 년 전의 이 태백 같은 목소리로 부친은 시국의 절박함을 부르짖었다.

 

"어려운 시대요!

더러운 시대요, 여러분!

 

핸드볼을 하던 노동자의 새까만 아이들 몇이 동작을 멈추고 골똘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더니 두 손으로 쌍욕을 해 보이고 히들거리며 곧 도망치기 시작했는데, 어째서 부친이 이런 보잘것없는 자식들을 첫 청중으로 택했는지는 너무나 명약관화했다. 부친은 자신이 속해 있으면서 그렇게나 미워하던 한 세계가 멀지않아 붕괴하리라는 희미한 예감의 공포 앞에, 오로지 떨고 있었던 것이다. 체면 불구하고 부친이 출마했던 것은 아마 그 때문인 듯하다. 그 멸망이 상말로 시계 무엇처럼 점차 느려져서, 설령 일곱 번이고 여덟 번이고 재출마 해야 하는 그런 기우가 설마 부친에게 눈꼽만큼이나 있었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부친의 유일한 이해자는 숙당 조 문제 선생이었다. 조 선생은 중학교 한문 선생으로, 두루미처럼 버쩍 말라서 시()의 언덕 바지에 살고 있었는데 그 양반의 말을 빌어 보면, 부친의 망발(출마)은 단지 젊었을 때 글깨나 좀 읽었다는 탓일 따름이고, 모든 난점은 '흐르는 세월'이 심판해 준다는 것이다.

세월도 세월이려니와 선량에 대한 부친의 이런 엉뚱한 꿈이라든가 이를테면 그 준비라고 할 수 있는 '채식' 같은 기묘한 방법은, 지금 곰곰 생각해 보니 훨씬 거슬러 올라가서 구약 -다니엘서- 에서부터 그 연유가 비롯한 성싶다. '채식'에 관한 것뿐 아니라 흉흉한 난세(亂世)의 여러 조짐에 대해 그 책은 괴상한 꿈 얘기라든가 기괴한 짐승들을 무수히 등장시켜 공갈을 치고 있는데, '그 이()는 철()이요, 발톱은 놋()이며, 먹고 부스러뜨리고 나머지는 발로 밟았으며,,,,,,' 하는 끔찍한 귀절까지 있는 것이다. 학대받는 어느 민족의 이중 삼중

의 설움의 메시지다. 하지만 부친이 정말 -다니엘서- 를 독파했는지는 장담할 수가 없다.

부친은 홀로 무언가 유일한 것을 믿고 있는 듯하기는 했으나, 외할머니와 모친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반발 때문에 평생 절이나 교회 문턱을 피했고, 어쩌다 집안에 종교적인 물건 - 이를테면 부적이라든가 찬송, 성경책이라든가 지등(紙燈) 따위가 보이기라도 하면 부리나케 그것을 어디엔가 감추어 버리곤 했으므로, 설마 당신이 밤에 몰래 숨어서 (다니엘)을 읽어 치웠으리라고는 상상이 되지를 않는다. 하지만 (다니엘)의 그것과 똑같은 어이없는 절규가 허기와 오기와 무청중에 지친 부친의 유세장에서 번번이 흘러나오는 것을 나는 들었던 것이다,

 

"나를 사자 아가리에 처넣어 보시오! 펄펄 끓는 불 속에 나를 확 던져보시오! 내한테 어디 평생 풀만 먹여보시오! 끄덕도 안 할 것이오, 나는 여러분!”

 

그렇다. 얼음이다. 만상이 타는 듯한 열화에 기갈 들려 오직 한 개의 통풍구멍만을 찾아 허덕이는 한여름 대낮 같은 때 홀로 자전거 등받이에 서늘한 수정과 같은 거창한 물건을 싣고 달리면서 부친의 꿈은, 빼도 박도 못하게 그 결정체 속으로 스며들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나 출마할란다,,,,,,"

하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을 때의 그의 그 계면쩍은 웃음, 우는 듯한 눈, 가족들의 경악에 찬 힐난의 시선에 이윽고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던 입술이 그것을 증명한다. 부친은 별식으로 모처럼 놓인 도미구이 접시를 한 옆으로 슬그머니 밀어 놓고 허탈한 얼굴로 시금치 접시로 젓가락을 가져갔다. 그것이 신호였다. 누이와 나는4년마다 오는 부친의 그 구닥다리 같은 홍역을 고 치르게 되나 부다 하고, 부지중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우리들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서 광삼 무표''서 광삼 3'니 하는 이웃이나 학교 동료들의 조석간의 인사가 아니다. 그것은 선거 소동이 끝날 때마다 전 시()의 오욕에 찬 익살맞은 조롱을 우리 집 위에만 폭삭 뒤집어씌우고도, 진실로 늠름하고 의연히 고고해서 참으로 아름답기까지 해 보이는 부친의 배짱에 있었다. 어쩐지 부친은, 봄 장마가 깨진 아스팔트 틈서리의 흙탕물을 튀기는 을씨년스런 한밤중에도 청명한 구름 속을 혼자 걷고 있는 듯했으며, 고독감에 몸을 떨며 내가 뒷간에 홀로 움치고 앉아 있을 때에도 그는 갓 벌어진 무슨 커다란 꽃봉오리 속에 의젓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듯했던 것이다. 서너 달의 채식으로 부친의 얼굴은 불그레해졌으며, 반백의 머리는 갈기처럼 이마 곁으로 비끼우고, 눈알은 비길 데 없이 반짝였다. 이 사람의 직업이 얼음 도매 운반인이라고 어떻게 믿으며, 도대체 누가, 미친 듯이 헐떡이는 기적(汽笛)속에 귀성객들을 상대로 부친이 새벽마다 역으로 유세를 달려 나가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모친의 태도는 애매했다. 권사(勸士)라면 교회에서는 꽤 중진이었음에도 당신의 지아비가 시대의 공기(公器)로 자처하고 나섬에 있어 의기양양해지기는커녕, 두루뭉수리로 주눅이 들어 버렸던 것 같다.

아침 일찍 자전거를 밀고 나서는 부자(父子)와 울상으로 그것을 눈흘기는 누이 틈에 서서, 모친은 난처한 표정으로 막연히 팔을 들어 올려 몇 번 흔들었다. (예수를 믿느니 똥을 믿어라, 고 외할머니는 모친의 은밀한 권유가 있을 때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 부처를 믿느니 똥을 믿어라, 는 것과 이 말은 흡사하지만, 외할머니로서는 아마 모친의 이런 애매한 태도가 못마땅하셨던 게다, 부처고 예수고 똥이고 부친은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것으로 좋았다. 일요일이었고, 딴은 높게 하늘은 개어 있었으며, 우중우중 따라 나서다 부친의 부릅뜬 눈에 찔끔해서 동구 밖에 서 버린 그 모든 친척 참모들의 선망 어린 전송을 받으며 우리는 출발했다. 달려라, 서 광삼! 자전거 튜브에 감기는 이 좋은 날씨, 이 무진장의 청공. 의원이여, 의원이여, 뽕잡은 국회의원이여, 그대9 이마를 감돌며 그대 귓바퀴에 속삭여 뭣 꼴리게 하는 이 한량없고 자비로운 미풍(微風)의 똥구멍이 피아노든, 올빼미든, 무더기 표든, 호박씨를 까든 개의치 말고 달려라. 서 광삼!

부친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으며, 할 수 있는 한 힘껏, 멀리멀리 부친은 달아났다. 부친은 열심히 페달을 저었고, '기호 1'의 깃발이 찢어지는 듯했고, 매달린 두 개의 도시락이 요분질을 하며 백여 개로 변해 속도에 구역질이 난 내 눈앞에 묵시처럼 아득히 떠올라왔다.

부친이 멈춘 곳은 끝에서 끝까지 벌거벗고 통째 노출되어 거의 완벽한 한 바다의 끄트머리였고, 거기서 우리는 내려서 망연히 물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몇 시간이고 우리는 경치를 감상했으며, 또 다시 물을 들여보았다.

썰물 뒤의 그 바다는 바위 틈서리에 도망치지 못한 해삼 새끼들을 몇 마리고 매달고 있었다. 그 기묘한 생물들은 우리가 건드리자 있는 힘을 다하여 돌 바닥에 붙어 보는 것이었으나 이내 툭툭 떨어져서, 자기는 아주 죽었다는 시늉을 번번이 하곤 했으므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놈 참, 굉장하구나."

하고 부친이 말했다.

"이놈들 참, 굉장하군 그래---”

그가 힌트를 얻은 것은 거기서 부터였을까? 세 번 네 번 낙선해도 결코 굴하지 않는다는 듯한 역력한 결의로 부친의 얼굴은 수축해서 어둡게 굳어 있었다. 부친은 그런 새끼 해삼 몇 마리를 바위 귀퉁이에 늘어놓고, 고개를 꼬고 그것이 풀인지 고기인지를 곰곰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런 다음 우리는 도시락을 까 먹었고, 다시 물을 들여다보았고, 머저리 같은 해삼들을 도로 바다에 처넣어 버렸으며, 그제서야 결연히 일어나 오염된 누리의 한복판을 향해 부친은 천천히 걸어 나갔던 것이다.

등록의 까다로움, 무소속의 굴욕, 사꾸라의 모략, 도야지 같은 관리 나부랑이들의 추잡, 유세기간 동안에 일어난 그 많은 하찮은 사건들을 어떻게 일일이 열거하랴. 그대들이 겪고 느낀 바 그대로다.

틈만 나면, 아니 필사적으로 틈을 붙들기만 하면 젖 먹던 힘을 다해 부친은 바다로 도망쳤다. 한 고장에서 50여 년을 살아 온 부친으로서는 물이야말로 '서 광삼 무표'의 깃발과 곤욕스런 자존심을 함께 씻어 주는 유일한 신()이었으며, 칠전팔기의 총기와 그것을 다짐까지 해 주는 커다란 손이었던 것이다. 일과를 끝내고 볼이 빠져서 등() 어른거리는 혼가를 터벅터벅 걸어서 돌아올 그때, 어느 누가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을 사람이 있으랴. 하찮은 미미한 사건, 예컨대 자동차의 급격한 회전 마찰음이라든가 기름기 도는 너무 밝은 불빛을 보고도 그대는, 문득 나라의 경륜과 그 운명을 절감하고 전율한다. 마찬가지로, 모빌 기름투성이 해면(海面)의 끈끈한 말 없음에서 침묵(沈黙) 불요(不要)의 결론을 끌어내고 개적인 자존심을 압살하고도 오히려 넘치는 창창한 논리를 부친이 거기서 계시받았다고 한들, 그것이 어째서 파렴치한 사유가 되겠는가.

몇 번째나 마찬가지였지만 고비로 접어들자 선거의 양상은 아연 비료를 뿌린 듯이 가열해지고, 그리고 똥물을 뒤집어씌운 듯이 더러워졌다. 헤아릴 수도 없는 협잡, 수많은 중상모략, 그리고 테러들을 낱낱이 고발할 의무를 나는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짐승 - 이라고 어느 누가 짖어대도 신은 노여워하지 않으리라. 그들은 한마디로 씹어 놓은 똥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후보가 12명이나 됐다. 날뛰는 주객전도의 광란 속에서 멀지 않아 합동유세의 날이 오고 거기서 일어난 뜻밖의 작은 사건 - 부친의 최씨와의 해후 - 으로 이 양양하던 입후보자는 허리가 반으로 접혀, 드디어는 백 팔십 도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기묘한 사태가 벌어지고야 만다.

보따리 장수 최씨의 합동 유세장에서의 난동은, 돌아서 그랬다고 모두들 그렇게 말들은 하고 있지만 그럴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던 것 같다. 멍게니 해삼이니 미더덕이니 하는 이 지방 특산물을 경매로 넘길 때. 어시장의 브로커들은 갈퀴로 그것들의 등을 득득득 긁어서 (그러면 그것들은 웃음이 나을 지경으로 오줌들을 직직 갈긴다) 산더미처럼 부풀리는데, 최씨가 옷 보따리를 그렇게 부풀려 놓고 나의 부친을 유혹했던 것이다.

합동유세 전에 어떻게 해서든 안심되는 한 표를 확보해 둘 양으로 미소를 띠고 그 앞에 섰던 부친은, 죽마고우를 발견하자 찔끔해서 표정이 굳어졌다. 최씨로서는 설마 부친이 이런 데까지 와서 한 표를 구걸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진짜요, 진짜! 진짜 구제품이요, 임금님도 꺼내 입고 둥실둥실 춤을 추는 자, 진짜,,,, ,"

계면쩍어서인지, 최씨는 실제로 둥실둥실 춤을 추며 부친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부친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자리를 떴다. 얼마를 부리나케 걸어가던 부친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반드시 최씨의 물건을 하나 사주어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헤어질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거 얼마?"

하고 도로 쏠아온 부친이 그렇게 묻자, 최씨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여기 있는 모든 물건은 구제품이 아니며 가짜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부친은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 물건들은 틀림없이 괜찮은 구제품이며 쓸 만한 것들이라고, 딱딱한 소리로 최씨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최씨는 길길이 뛰며 거짓말이라고 부정했다. 부친은 완전히 기분이 상해서 밭은 기침소리를 내고 홱 돌아섰다. 삽시간에 빙 둘러섰던 그 많은 구경꾼의 어느 누가 최씨의 뻔한 거짓말을 곧이들었겠는가, 최씨는 부친으로부터 모욕을 받았던 것이다.

합동 유세장에서 돌팔매 한 개가 날아와 부친 곁에 앉아 있던 입후보자의 따귀를 정통으로 잘못 갈기고,

"맞았다!"

고 그가 울부짖었을 때, 나는 천만다행이라는 느낌이 우선 들었다. 그냥 내버려두었으면 부친의 입에서는 또 사자 아가리니, 풀무불이니, 풀만 처먹여서니 하는 따위 소리만 쏟아져 나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친의 한결같은 연설에 나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다 큰 학생이 언제까지나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도 우스꽝스럽다.

부친은 벌떡 일어서서 범인을 찾으려고 광장 사방을 무섭게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느릿느릿 연단을 내려와서, 갑자기 펄쩍 뛰어오르더니 한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최씨와 부친의 달음박질 시합은, 그 통에 떡시루를 뒤엎고 생선 함지박이 박살난 그 모든 장사 아낙네들이 더 잘 안다. 두 사람은 창고 틈을 꿰고 몇 바퀴나 부두를 뱅뱅 돌았으며, 드디어 어느 폐창 귀퉁이에 덜퍽 주저들 앉아서 모든 것이 결판나는 마지막 심지를 뽑았던 것이다.

이놈아, 고년이 고년이 고년이,,,,”

하고 헐떡이며 최씨가 떠들었다.

"죽기 전에 뭐라고 한 줄 아니?"

두들기고 얻어맞아서 부풀어올라 두루뭉치가 된 얼굴을 기울이고 부친은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친은 중얼거렸다.

뭐라고 하데? 그래, 그년이?"

당신이, 당신이---,당신뿐이라고---”

부친처럼 역시 떡이 돼서, 최씨는 손가락으로 무수히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계속 떠들었다.

당신뿐이라고....., 내한테는---, 이 최 치달뿐이라고! 당신뿐이라고,,,,,,"

입후보자는 의심쩍은 눈치였다.

"자세히 말해"

하고 부친이 말했다.

"고년이 뭐라고?"

둘은 여자 얘기를 하고 있는 듯했으며, 젊어서는 숙적의 라이벌이었던 것 같았다.

말 말겠어"

하고 허덕이며 최씨가 말했는데, 별안간 그는 셔츠 웃저고리를 찢어 열고 가슴의 상처를 부친에게 내보였다. 앙상한 그의 가슴팍 한복판에 교통표지판처럼 비스듬히 가로 달리던 두 줄기 남색의 깊은 그 흠집이, 여자의 손톱자국인지 무엇이었던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것을 본 순간, 부친은 녹아 버렸던 것이다. 부친은 박박 이를 갈았으며 고개를 떨군 그를 홀로 남겨 둔 채 보따리 장수는 비틀거리며 유유히 사라져 갔던 것이다.

부친이 채식을 그만둔 것은 그 이후부터다. 돌아오는 길에 부친은 가장 그럴싸하게 당신의 얼굴이 크게 찍힌 선거벽보를 북 찢어 구겨서 잡담 제하고 그것을 길가에 던져 버렸는데, 무슨 변화와 동요가 부친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마는, 채식을 폐하자 기뻐 날뛸 것은 물론 그 친척 참모들이다. 순대국이거나 날치 가자미 같은 것이 상 위에 올라오면 그것은 깜짝할 새에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계면쩍다기보다 더러운 광경이었다. 부친은 글썽글썽 해진 눈으로 가족들의 그런 왕성한 식욕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고기를 보니께 속이 꼬리꼬리하다는 등 하는 친척들의그 파렴치. 잘 썰어서--- 천천히---, 하고 주의를 소근거리는 모친의 낭만. 누이의 부어 터진 얼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부친은 광 속에 자전거를 처박아 둔 채 옴씬을 안 했다.

얼음 운반은 물론 여전히 내가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부친은 62세였다. 보름 남짓을 앞에 둔 선거일이 빨리빨리 지나갔다. 서 광삼 무표, 서 광삼 무표, 서 광삼 무표---

그 동안에 단 하루만, 부친은 밖에를 나갔을 뿐이다.

"너 나하고 좀 나가자"

고 부친이 말했을 때, 또 발작이 시작되나 부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자전거를 끌고 나오자 부친은 그만두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들이 터벅터벅 걸어서 찾아간 곳은, 시가에서도 훨씬 떨어진 변두리 언덕 뒤에 숨듯이 하고 뎅그마니 서 있던 도살장(屠殺場)이었다. 그 일대는 분지처럼 지대가 낮아서 잡초와 잡석과 황토가 작은 벌판을 이루고 개흙바람에 눕고 있었으며, 잿빛의 긴 콘크리트 담으로 도수장은 네모지게, 철통같이 에워싸여 있었다.

그 무렵 부친의 심경에 도사리고 있던 민족과 시국에 대한 비전이 겨우 이 정도의 황량한 풍경이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밖으로 보이는 것이라곤 올빼미 눈 같은 동그란 두 개의 창문 외에는, 감기든 코처럼 사방이 막힌 도수장 건물에서 부친은 도대체 무엇을 끌어내려고 했던 것일까? '서 장삼 기호 3'의 플래카드 광목을 품에서 꺼내더니, 부친은 그것을 어깨에 두르고 건물로 다가갔다. 부친은 문을 두들겼다. 정문의 빗장이 빠지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주인을 찾는다고 부친이 말했다. 내가 그 사람이라고, 내가 주인이라고 그가 말했다.

부친은 절을 하고, 무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열변을 토하는 부친 앞에서 쾅 하고 철문은 닫혀 버렸다,,,,,

언덕자지로 돌아오자 부친은 잡초를 한줌 훑어서 입에 넣고 그것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무연히 눈앞의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긴 하되 부친으로서는, 정육점의 고기를 거덜내는 그 모든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 비결은, 거기서 총 덩어리가 흘러나오는 이 도수장의 주인을 구워삶는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한식경이 지난 뒤에 부친은 다시 담 밑으로 다가가서 그것을 두들겼으나, 이번에는 열리는가 하자 문은 닫혀 버렸다. 부친은 두말 않고 돌아서서 나더러 가자는 눈짓을 했다,

 

60, 4, 19가 터졌을 때에도 부친의 가슴속에는 네 번 째 출마에의 결의가 여전히 싹트고 있었으리라고 상상된다. 부친 같은 유의 사람은, 아무리 엄청난 기쁨이나 재난 팥은 것이 코 앞에 들이닥쳐도 쉽게 동요해서 곧이곧대로 그것을 받아들일 성격이 아니다. 거대한 민중의 의거가 거의 성공해 갈 무렵에, 데모대의 맨 앞장에 서서 경찰서장의 따귀를 갈기러 달려간 사람이 나의 부친이라고 하는 시민들의 풍문은,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

나는 그 사람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숙당 조 문제 선생이다. 조 선생은 자기 집 앞길에서 데모대에 빨려 들어서 경찰서까지 밀려 가 서장의 따귀를 후려갈기기는 했으나, 그 길로 낚시질을 갔던 것이다. 한문을 가르치던 그로서는 단 한번의 따귀로 그 모든 진상을 파악하고, 맥이 빠져서 흥미를 잃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기쁨은 의연히 민중의 것임도 틀림없었다. 4천 몇 년만에 찾아온 거의 온전한 축제(祝祭) 그것을 두고 도대체 어느 놈이 왈가왈부할 수 있으랴.

부친은 의심쩍은 듯이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나흘이 지났을 때 드디어 부친은 그 거창한 기쁨의 덩어리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듯했다. 하루가 더 지난 어느 날 저녁답에, 이윽고 부친은 나를 불러서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들뜬 군중들이 악마구리 끓듯하는 시가지의 잡답을 뚫고, 흐린 지붕들 틈으로 눈을 쏘며 오르내리던 해안선도 이제는 보이지 않게 되어서, 발끝에 붉은 먼지가 일고 아직도 영영 꺼죽하니 말라붙은 잡초 더미들이 드문드문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에야 나는, 우리들이 걷고 있는 길이 3년 전의 그 도수장으로 통하는 길임을 깨달았다. 나는 부친을 만류하고 싶었다. 설사 도살장 주인이 아무리 부친과 똑같은 양과 비중의 기쁨에 젖어 있다고 한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또 그것은 몹시 어색한 상봉일 듯싶었던 것이다. 아주 드러누워 말라 붙어서 변색된 을씨년스런 들을 눈여겨보지도 않고 백발을 휘날리며 부친은 곧장 건물 앞으로 걸어가 문을 두들겼다. 부친으로서는 이미 각오가 돼 있었을 것이다.

철문이 열리고 주인이 나오자 부친은 무어라고 인사를 했고, 곧 품에서 큼직한 광목 한 폭을 꺼내 그것을 땅에 펴고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내가 달려갔을 때는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오만상을 찡그리며 두 번 세 번 실패한 끝에 부친은 드디어 손가락 하나를 물어 끊고 그것을 땅에 갖다 댔다. 부친은 떨면서 광목 위에 천천히 풀초()자를 쓰기 시작했다.

그 황폐한 건물 주인이 그때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던지는 기억에 없다. 무슨 소리를 웅얼거렸는지, 기묘한 제스처를 하며 어디엔가 대고 침을 뱉은 것 같기도 한데, 그런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내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은 고수머리로 높이 깎아 올려 있던 그의 밤톨 같은 머리통과 유난히 눈에 띄던, 상식 이상으로 큰 매디진 두 손 뿐이다. 그 손을 옆으로 들썩할 때 부지중 나는 긴장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어딘가 웃고 있는 듯한 틀림없는 인상을 내가 받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부친이 초()자를 들어 보이자, 그는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곧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친은 만족한 듯이 닫힌 문 쪽으로 무언가 손짓 같은 것을 했고, 광목을 구겨 쥐고 돌아서자 어떠냐는 식의 웃음을 내게 띠어 보였다.

그 뒤부터는 틈만 나면 부친은 가끔 그 먼 도수장을 찾아가 건물 주위를 배회했다. 대개 저녁답이었는데, 문을 두들기려고도 하지 않고 멀리서 곰곰이 바라보기만 하다가 돌아오는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아예 그 근방에서 생각을 돌리고 바로 돌아서는 때도 있다. 어쨌든 부친은 그 부근의 돌과 흙과 풀들을 몹시 좋아했던 것 같다. 멀찍이서 서성거린다고는 하지만, 그리로 드나드는 사람들이나 무슨 단말마의 비명 같은 것을 들을 수 있었다는 건 아니다. 어찌된 셈인지 그곳을 다니기 시작한 이래, 우리는 한 마리의 소도 거기서 구경하지를 못했다. 시중 상점에 기세 좋게 깔린 그 숱한 편육들은 그럼 밤이나 깊은 새벽에만 은밀하게 재빨리 처리된다는 것인가.

"남의 업()을 엿본다는 건 좋지 않아,,,,, "

하고, 부친은 필시 그리로 드나들었을 트럭의 타이어자국을 눈여겨보면서, 당신도 역력한 궁금증의 기색을 얼굴에 떠올리며 내게 말했다.

"짐승을 잡는 사람은 걸 부끄러워할지도 모른다--- 포수도 마찬가지야."

천만의 말씀이다. 알록달록한 새나 노루를 우정 날리고 애꾸눈으로 그것을 쏘는 진짜 도살자인 포수와 소를 죽이는 사람과는 엄연히 다르다. 소를 찌를 때, 그 사람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고리로 쐐기처럼 단단히 짐승과 연결되고, 죽어 가는 한 생명의 큰 눈을 끝까지 지키며, 주객이 뒤바뀐 검붉은, 정결한 피로 그 손을 적신다. 소는 제 살과 뼈가 철저히 발라질 때까지 철저히, 소리도 없이 운다, 그렇다면, 밤을 지새워 그것을 껴안고 견디는 역사(歷史)야말로 바로 소가 돌아갈 영원한 집이리라. 그 사람의 손이 너무 크다거나 희랍인처럼 미남이 아니라거나 하는 따위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요는 허리와 팔다리의 근육이 문제다,,,,, 나는 다니엘이나 삼손 같은 한 용자(勇者)의 모습을 어느새 마음속에서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4.19의 여파로 집안에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외할머니와 모친의 불타와 예수와의 싸움, 모친과 누이의 반찬 싸움, 당숙과 시동생의, 고모와 이모의, 삼촌과 조카와 다시 외할머니의 (90세가 넘었으면서도 외할머니는 어이없게도 너무나 정정하셨다)-

그 모든 분쟁은 모두 4-19가 탓이다. 그들은 민중의 봉기를 새로운 선거대목으로 착각하고 있었으며, 석 달이 넘도록 시골로 돌아 갈 염을 않고 있었던 것이다. 도배한 장판과 벽지는 새로 더러워지고 부엌은 파리들로 들끓었으며, 자전거는 아주 망가져 버렸다. 무엇이 민생들을 불러모으는가? 무슨 고기가 그들의 창자를 굶주리게 하는가? 도대체 모처럼 정결하게 타오르던 불꽃에 누가 재를 뒤집어씌우는가? 그들이 돌아가자 우리는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전전긍긍했다. 부친은 노쇠해 있었다.

615,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그 사나흘 뒤 한낮에, 갑자기 요란스럽게 두들겨지기 시작한 대문 소리에 질겁해서 부지중 식구들이 대항의 태세를 갖춘 것은 전혀 우리들 탓이 아니다. 병역 의무에 뛰어 들고 싶으면서도 군사 혁명 때문에 나는 그것을 망설이고 있었으며,

나로서는 누구나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는 그 사실이, 대단치 않게 생각되고 있었던 것이다.

고리를 따자 대문 밖에 한 무리의 군중과 도수장 주인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정말로 우리는 놀랐다, 그 사람은 긴장으로 번쩍이는 이마를 들고, 길을 열어 소 한 마리를 부친에게 보였다. 부친은 들고 있던 몽둥이를 슬그머니 치우고, 그 낯익은 사내의 두 손을 잡았다.

극적인 상봉에는, 그러나 언제나 일말의 불안이 스며 있다. 부친은 의심쩍은 듯이 도수장 주인의 아래위를 찬찬히 훑어보고 있었다. 마치 언젠가 결의(決意) 직후에 전장에 떠나 보냈다가 오랜 고초 끝에 돌아온 동생이, 그때 그 동생이 틀림없는가 하고 음미하듯이.

"혁명이요, 서 선생! 혁명입니다! 서 광삼 선생.”

우리들이 다시 굳은 것은, 처음으로 들어보는 그의 거침없는 목소리의 경이 때문이지 그 들뜬 혁명 예찬 때문이 절대로 아니다. 부친은 곧 얼굴을 풀고,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군중들은 태반이 동네 사람들이었고 더러 낯선 얼굴들도 보였으나. 하긴 큰 황소 한 마리를 기꺼이 던져 도수장 주인이 잔치를 베풀겠다는데 일일이 그런 것을 가릴 계제는 못 되었다.

축연(祝宴)은 한길 건너편, 옛 공민학교 자리였던 운동장에서 베풀어졌다. 어디서 나왔는지 가마솥이 걸리고, 남비가 동원되고, 술이 날라지고, 포를 뜰 칼과 피를 받을 바께쓰가 정돈되고, 그리고 물이 끓여졌다. 그 갑작스런 소동의 기괴함은, 이런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를 않는다. 무언가 그 속에 있었다. 꼬집어 낼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진저리 나는 그 무언가가,,,,,, 도수장 주인은 알고 있었을까? 아마 어렴풋이,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찬탄하는 군중에 에워싸여 운동장까지 걸어 내려올 때의 그의 그 물 먹은 솜 같은 침묵. 가쁜 숨을 가라앉히려고 미미하게 오르내리던 어깨. 버티듯이 느려지던 걸음걸이, 단지 피할 수 없었다는 것뿐이다.

붕괴가 임박했을 때 그 멸망을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어느 누구보다도 건물 자체이다. 무엇을 망설이는가. 준비가 끝나 이윽고 도수장 주인은 뜰 한복판에, 군중으로 둘러 쳐진 담 한복판에 섰다. 사람들이 소를 밀고 들어와 몇 겹이고 그 뿔을 헝겊으로 동여맸고, 서너 명의 장정이 벌거벗은 허리로 짐승의 사지(四肢)를 끼고 버팀목 역할을 자원했다. 큰 도끼가 날라져서 주인의 손에 힘있게 쥐어졌다. 우리는 숨을 죽였다.

어둠 속에서 홀로 짐승을 죽이는 일과 명명(明明) 백일하(白日下)의 천()의 시선 속에서 그것을 찌르는 것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를 나는 모른다. 저것은 구식(求食)이다. 어딘가 틀려 먹었다---고 부지중 속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외치면서도, 우리는 그 솜씨의 정확함에 감탄했다. ,,,,,,도끼는 짐승의 정수리 한복판으로 녹아 들어갔다. 한 번,,,,,, 다시 한번,,,,,, 훌릉한 도살자는 결코 두 번을 내리치지 않는 법이다. 그것은, 우리들 내장(內臟) 속의 천성적인 도살자가 그렇게 절규하고 명령하는 바다. 쉽게 쓰러지지 않는 짐승을 향하여 관중의 전심전령이 질타(叱咤)하고 발을 굴렀다. 표를 뺏기지 마라, 왜 땀을 흘리느냐, 방해하는 놈은 죽여라! 죽여라! ,,,,,그리고 드디어 짐승이 조용히 무릎을 꿇고, 한 무더기 피와 함께 무너졌던 그가 뒤틀린, 입을 퍽 벌린 표정으로 천천히 일어나서 어느 허공을 향해 섰을 때, 우리는 당연한 듯이 쓰디쓴 환멸을 느꼈다.

 

5월 달이거나 그 어느 때고 남쪽의 작은 항도(港都)를 기차로 지나면서, 아직 춥기도 하고 잠자기도 담배 피우기도 귀찮아져서, 불현듯 마음속의 사람에게 한 표나 던져 볼까 하는 의문이 일거든, 유권자여, 유권자여, 이미 유명을 달리한 나의 부친의, 그렇게도 도저한 믿음이었던 유권자여, 그런 망상을 떨쳐 버리고 그냥 귀를 기울이라.

그대가 매일같이 신물나게 듣는 그 우국지정의 똑같은 연설이 거기서도 들려 오고, 새삼 차창 밖을 내다보지 않더라도, 아무 데서나 자고 아무 데서나 먹으며 일 년 열 두 달을 공중에 대고 떠들어대기만 하는 한 사나이가 돌다 선 채 역 앞 광장에 버티고서 있음을 느낄 것이다. 도수장 주인인 그 사내는 우리 시()의 명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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