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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단편소설2

51. 4월의 끝

by 자한형 2022.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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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四月)의 끝 -한수산

 

"참 싱싱해 뵈죠?”

다방 안으로 들어와 앉는 등산복 차림의 여자들을 보면서 형수는 말했다. 밖에는 문득 새 옷을 갈아입고 싶게 만드는 사월의 오후가 화사하게 가로수 위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 중의 한 여자를 어디서 본 듯했다. 그때 저쪽에서도 나를 보았는지, 어머 선생님 안녕하세요,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선생님이라니,,,,,,어떻게 되는 거예요?”

형수의 물음에 나는 웃었다.

"전에 그러니까 일 학년 때 저 여자의 동생을 가르친 적이 있어요. 내게도 별 호칭이 다 있군요."

나는 또 웃었다. 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나의 대명사 때문은 아니었다. 영문과생인 나는 선배의 소개로 국민학교 6학년 여자애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영리하면서도 엉뚱한 데가 있어서 나를 당황하게 하던 애였다. 하루는 쉬는 사이에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음악이 끝나자 (두통 치통 생리통에 사리돈 한 알)하는 약 선전이 들렸다. 아이가 연필을 깎다말고, 선생님 전 두통 치통은 알겠는데 생리통은 뭔지 모르겠어요, 하고 말했다. 나는 혼자 죄스러워져서, 언니한테 물어 봐, 그건 언니가 더 잘 아니까- 해 버렸던 것이다. 직무유기(職務遺棄)는 내 목을 잘랐다. 이 착한 아이는 생리통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절망해 버렸고 나는 아래층에서 들리는, 뭐 그따위 가정 교사가 다 있어, 하는 여자의 커다란 목소리에 몸을 떨었다. 결국 나는 일차적인 성징(性徵)도 느낄 수 없는 후임 여학생의 밋밋한 가슴에서 OX를 겹쳐 놓은 것 같은 국립 서울대학교의 배지가 빛나는 것을 보면서 하야(下野)해야만 했다, 그 집을 빠져 나오며 저 여자는 아마도 가슴의 배지처럼 모든 문제에 선명하게 OX를 그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남자가 생리통 때문에 일자릴 잃다니 .

혼자 웃고 있는 내가 형수는 또 우스운가 보다. 공연히 웃는다. 우리는 차를 시켰다.

"갑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지네요. "

형수는 지친 듯 서른 한 살의 나이를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창 밖에서는 십육 층의 대학 병원이 우리를 찾으며 기웃거리고 있었다.

......이십 오일 날 오십시오. 초기 단계인 것 같습니다만 일단 결과가 나오는 것을 봐야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겠습니다, 밖에는 소리 없이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코너로 돌아오는 권투 선수처럼 그녀를 둘러싸고 나왔다.

겨우 두 발을 들고 다니는 것으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위하면서 구더기의 탈바꿈도 도마뱀의 자절도 배우지 못한 우리들, 우리들은 무엇을 아는가. 한 여자의 과오가 만든 부끄러움을 알 뿐이다.

나는 내설악 가까운 지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 깎아 세운 듯한 산 밑으로 강물이 흐르고, 맞은 편에 논과 밭이 소복한 초가집을 에워싸고 있는 작은 마을. 거기에도 전쟁의 상처는 있었다. 폭격 당한 국민학교나 강변의 웅덩이에 쌓여 있는 포탄에서는 아직 화약 냄새가 풍겼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지뢰를 밟고 온 몸이 해어져 들려오는 사람들의 피를 우리는 보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쉽고도 은밀하게 그 폐허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밤이면 부서진 학교 건물에 숨으며 숨바꼭질을 했고, 포탄을 몰래 숨겨다 놓고 신기한 듯 바라보곤 했었다.

그때, 형이 학교엘 가 버리면 회앓이를 하는 배를 쓸면서 동무도 없이 한낮을 보내야만 했던 나에게 누나가 하나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일을 하러 나가면 집을 지키느라 학교엘 못 가곤 하던 누나였다. 얼굴이 노랗게 들떠서 양지 쪽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내 배를 쓸어 내리며 누나는 어느 날 이 모든 자연이 신비로 싸여 있음을 속삭였던 것이다.

봄이어서 포근한 햇살이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누나의 따스한 손에 배를 내맡긴 채 앞산을 바라보았다. 아지랭이 속으로 진달래가 한창이었다.

"너 저 산에 봉우리가 몇 개니?”

"하나 둘 셋. 셋이야 셋."

"그럼 골짜기는?”

"다섯인가,,,,,,아냐 둘이지? 그지?

"그래 둘이야. 그 중에 오른쪽 거가 양짓골이고 왼쪽 거가 음짓골이야."

나는 무슨 얘긴지 알 수가 없었다.

"양짓골은 우리 동네 이름인데,,,,,,"

"그래. 바로 저 골이 우리 동네 골짜기란 말야. 윗 것은 음짓말거고.”

나는 누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누나는 속삭이듯 말했다.

"저 골짜기에서 여우라 울면 남자가 죽고 돌이 구르면 여자가 죽는대.”

"정말?”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그래. 전에 지뢰 밟고 죽은 사람 봤지? 그 사람이 죽던 날 밤에 음짓골에서 여우가 밤새도록 울었대. 그 사람이 음짓말에 산대."

나는 앞산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것은 진달래가 아름답게 물든 산은 아니었다. 골짜기마다 돌이 구르고 여우가 울며 달려올 것만 같았다.

그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형을 붙들고 앞산을 바라보라고 했다. 저건 음짓골이고 저건 양짓골이래. 돌이 구르면 여자가 죽는대.

"너 또 거시가 목구멍으로 올라온 모양이구나. 빙신 새끼."

형은 방으로 들어가면서 밥 줘, 하고 소리쳤다. 목구멍으로까지 회충이 올라와서 그때마다 까무러치곤 하던 나를 두고 한 말이었다.

형이 방으로 들어가자 나는 심한 부끄러움으로 눈물이 나왔다. 그것은 목으로 회충이 올라왔느냐는 모욕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다방 음악이 영화 주제가를 노래하고 있다. 오랜 친구여, 어둠이여. 내 그대를 보러 다시 왔지. 사람들은 말없이 이야기하고 소리 없이 들었지. 내 말은 침묵 속으로 빗방울처럼 떨어지네---

노래를 들으며 우리는 차를 마셨다. 형수는 왼손으로 나는 오른손으로. 거기에 그녀의 결벽성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오른손으로 찻잔을 들기 때문에 다방 찻잔에는 그 쪽으로만 묻어 있는 사람들의 입술 자국을 보는 듯해서 왼손으로 찻잔을 잡는다는 그녀다. 이러한 여자가 어떻게 형과 결혼을 했을까. 형에게도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결벽함이 있은 것일까.

누나와 함께 강에 나간 적이 있었지. 잔잔한 강물 위로 산이 거꾸로 비쳐 있었다. 우리는 바위 위로 올라갔다. 누나는 말했다. 나 목욕하는 동안 넌 여기 있어. 그리고 누나는 나를 바위 위에 뉘었다. 너 일어나면 안 된다. . 나 지금 옷 벗는단 말야. 누나의 목소리가 바위 밑에서 들렸다. 나는 하늘에 떠 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누나가 옷으로 앞을 가린 채 내 옆에 몸을 굽힌다. 너 여기 가만히 누워 있어, 옷이 날아갈까 봐 내 옷을 네 옷깃에 핀침으로 꽂아놓고 갈 테니. 나는 돌아서서 내려가는 누나의 앙상한 어깨와 팔죽지를 보았다. 앞산에서 솔잎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쏴아 하고 들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돌이 구르면 여자가 죽고 여우가 울면 남자가 죽겠지. 양짓말에서, 음짓말에서--- 나는 슬며시 일어났다. 강물에 비친 산 속에 누나의 나신(裸身)이 박혀 있었다.

나는 말했다. 누나 나 간다. 그때 누나는 고개를 돌리는가 하자 엄마. 하고 소리치며 강물에 몸을 잠갔다. 그리곤 얘얘얘 옷 가져와,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_

나는 믿었었다, 열 네 살의 누나가 벗은 몸으로 옷을 가져가기 위해서 뛰어 올 것이라고. 그러나 누나는 달려오지 않았다. 반짝거리는 모랫길을 따갑게 밟으며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누나의 옷이 허리에서 펄럭일 때 나는 더욱 무서웠다.

누나가 돌아온 것은 저녁 무렵 형이 옷을 내다 준 후였다. 열에 들떠 앓아 누운 누나에게 나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에는 나는 너무 어렸다.

전후(前後)의 식량난 속에서 누나는 그렇게 누웠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눈물을 흘리며 맞은 몇 대의 침이 그녀가 받은 치료의 전부였다.

그날 혼자 돌아와야 했던 소년은 신비와 오해의 줄을 풀어 누나의 얼굴 같은 연을 날리며 성장해 버렸다. 날아가 버린 연을 생각하듯 부끄러움이 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다방의 음악은 사월을 노래하고 있다. 사월이 가면 타야 할 사람. 오월이 오면 울어야 할 사람.

"형수님. 사월이 가면 무엇이 올까요?”

"글쎄요. 군사 혁명이 오겠죠."

형수는 정치적이다.

"사월이 가면 마지막 토요일인 가정의 날이 오겠죠.”

나는 참 가정직이다. 미혼, 성실남, 배우자 구함.

"아버지가 가면?”

헝수의 말에

"어머니가 오겠죠. 아니지, 생명 보험금 탄 돈이 오겠죠."

라고 나는 대답한다.

"그럴까요? 아들이 오는 거겠죠."

형수는 종교적이다. 한 세대는 가고 다시 한 세대가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이십오 일, 그날이 다가와서 우리는 다시 링 위에 올라선 그녀를 보았었지. 수술을 하셔야겠습니다. 그러나 의사로서 책임 없는 말같이 들리시겠지만 자신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최선은 다해 보겠습니다. 오늘이라도 입원을 하시죠. 하얀 가운이 일어섰다. 아녜요, 내일 하겠어요, 아니 모레,,,,,,우리는 KO 당한 선수를 탈의실로 데려가듯 그녀를 둘러싸고 나왔다. 갑자기 햇살이 한없는 무게를 가지고 우리들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나는 다방 카운터 위에 있는 달력을 본다. 거기엔 삼십이라고 까맣게 써 있다. 사월이 가면 윤 사월이 올 수도 있겠지. 한 세대가 가면 한 세대가--- 누나가 죽은 그 시골에 나는 몇 해 전에 다시 내려가 볼 수가 있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장지로 가는 영구차 위에서 나는 우연히 관 바로 옆에 앉게 되었다. 차가 움직이면서 나는 이상한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래된 간장 냄새와 생선 썩는 냄새가 혼합된 것 같은 악취였다. 장의사가 없는 시골이라 우리가 탄 차는 트럭을 세낸 것이었으므로 처음엔 생선 냄새거니 했다. 털거덕거리는 길을 한 시간 가량 달려야 했는데 냄새는 점점 심해졌다. 코를 막고도 어쩐다는 도리가 없어서 바람 부는 쪽으로 얼굴을 내밀고 숨을 들이 쉰 다음 다시 코를 잡곤 하였다. 그런데 옆에 앉아 있던 왕고모 할머니인가 하는 분이 내 어깨를 치셨다. 아이구 얘야 큰일났구나. 나는 그분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관 한쪽 귀퉁이가 보랏빛으로 젖어 있었다. 나는 그제야 이 냄새가 무슨 냄새인지 알 수가 있었다. 여름철이라 이런 일이 나면 큰일이라고들 하시며 부랴부랴 삼일 장을 치렀던 것인데 이미 시체가 썩고 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장지에 닿을 때까지 노판 물이 올라오도록 계속 토해야 했다. 차에서 영구를 내려 묘혈(墓穴)로 향할 땐 썩은 물은 흐를 정도가 되었다. 산제(山祭)를 지내자 매장이 시작되었다. 관 뚜껑을 열자 모두들 고개를 돌렸다. 시커멓게 쌕은 머리 부분에서 흘러나온 불그죽죽한 물은 관 한쪽 귀퉁이에 흥건히 괴어 있었다. 누구 하나 시체를 관에서 끌어 내려는 사람이 없었다. 바람이 불어서 냄새가 자기에게 날아오면 사람들은 코를 쥐 고자리를 옮길 뿐이었다. 결국 아버지가 팔을 걷으며 시체를 관에서 들어내려 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상주(喪主)는 그러는 게 아니네, 하면서 앞으로 나섰다. 그가 머리 부분을 들자 다른 사람들이 다리며 허리를 들었다. 검붉은 물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흰 두루마기 자락에 떨어져 검은 자국을 남겼다.

화톳불을 피우고 관을 뜯어서 그 위에 얹었다. 피익피익하며 관에 불이 붙었다. 그러나 쌕은 물에 젖은 곳은 타질 않고 연기만 심하게 피어올랐다.

나는 허청대며 산을 내려왔다. 인간의 마지막이 이것인가 하는 허망함이 그냥 가슴에 덮쳐 와서 나는 더 그 자리를 지켜 설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은 시간을 전지해 버린 애정의 얼굴이 아니었을까.

언젠가 내가 좋아하는 영시(英詩) 교수님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교수님은 첫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 날 밤에 산모가 잠이 들자 서재로 나와 아이를 키울 생각을 하면서 잠을 못 이루었다고 한다. 그런데 며칠 전 다섯 살이 된 이 아이가 아빠, 왜 우리 집은 마당이 기찻길 같애? 하더라는 것이었다. 정원이 없이 다닥다닥 붙여 지어 놓은 저 많은 서울의 집들 가운데 하나인 교수님댁의 마당도 폭이 한 발 정도 되는 긴 직사각형 꼴이었다. 그것마저도 시멘트로 발라 버려서 이 아이는 줄넘기를 하는 것이 마당에서 할 수 있는 전부였다고 한다.

교수님은 조금 쓸쓸한 얼굴로 아이에게 흙을 만지며 놀 수 있게 해 주어야하겠다는 것이 이제는 어떤 신앙처럼 돼 버린다고 말씀하셨다. 교수님의 이러한 애 정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구역질을 하며 산을 내려와야 했던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 할아버지와 나에게도 방학 때면 서로 어울려 둘이 다 가운데를 덜렁거리며 낚시를 하고 맹자(孟子) 진심장구(盡心章句)를 놓고 밤 가는 줄 모르던 애정은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날개를 파득이며 내려와 앉는 그런 애정이.

"늦어지나 보죠?

내 말에 형수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레지가 찻잔을 날라갔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는데 종이가 집혔다. 학교를 나을 때 받아 넣은 어느 극단의 공연 안내 팜플렛이었다. 아래의 할인권을 가지신 분에게는 일백 원을 할인해 드립니다. 요금은 삼백 원이었다. 예술을 할인해 드 립니다. 사월을 할인해 드립니다. 나는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뭐 예요?(盡心)

"삼 할 할인한 세익스퍼어."

형수는 웃었다. 형수는 웃고 싶은가 보다.

"삼 할 할인한 연극은 어떨까요?(盡心)

연극의 삼대요소는 희곡 배우 관객이라 했었지. 거기서 삼 할 할인하면

"아마 손님이 없겠죠."

"삼 살 할인한 인생은 어떨까요?(盡心)

"() () () ()라니까 그 가운데서 하나가 없겠죠."

나는 면접시험을 치는 학생같이 대답한다. 틀림없이 합격이겠지.

"그럴까요? 태어나야 인생이 있는 거니까 늙고 병들고 죽는 것 가운데서 하나가 할인되지 않을까요?

나는 불합격이다. 죽음은 인생의 삼할 정도일까. 나는 형수에게서 죽음을 할인해 누고 싶다.

그때 열 대여섯 정도의 여자애가 다가와서 들고 있던 나무 상자를 열어 보이며 말했다.

"하나 사세요."

목각(木刻) 인형들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한복을 입은 노인. 가야금을 뜯는 여자 같은 것이 보였다.

"안 사."

여자애가 뚜껑을 닫으며 돌아서는데 갑자기 형수는 그 아이를 불러 세웠다. 그 모습은 (이 순간이여 영원하라)고 감격하는 파우스트 박사를 떠오르게 했다. 목각이여 영원하라.

". 그거 하나 보자. 아니, 웅 그거 말야."

형수가 지금 무엇에건 관심을 가져 주었다는 것이 고맙다. 돈을 치르자 아이는 돌아갔다. 형수는 손아귀에 쥐면 머리 부분이 주먹 밖으로 나오는 작은 천하대장군을 탁자 위에 놓았다.

"장승에 관한 얘기 아세요?(盡心)

형수는 말했다, 나는 그녀가 민속학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러 다니던 대학원 시절에 남해안 지방에서 걸린 피부병이 지금까지도 완치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의 권위를 인정해야 할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여기는 쓸개골입니다) 하는 환영 아치는 아닌가요?(盡心)

언제였던가. 헝수는 무가(巫歌)를 수집하러 다니던 중 가장 우스꽝스러웠던 마을 이름이 (쓸개골)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하필이면 쓸개골이람, 쓸개 바진 사람만 살았나 하고 생각하면 우습다. 언어의 분위기가 만드는 웃음이다.

요즈음 젊은이에게도 청운의 꿈이라는 게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가끔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입술이 갈라터진 법대생들을 볼 때면, 그들에게는 어쩌면 청운의 춤이라는 것이 있을 듯했다.

(주여, 저희는 값 없나이다. 주여 저희는 값 없나이다.)라거나 (나는 차라리 고요한 바다 밑바닥을 어기적거리는 한 쌍의 엉성한 게 다리나 되었을 것을) 하고 엘리어트를 중얼거리기나 하는 나는 그런 꿈이라는 것을 생각만 해도 꿈 같아지곤 하지만, (합격의 알프스를 넘어라. 그러면 거기 모든 것이 있다)는 식으로 시간을 세어 가는 법대생들에게는 어쩌면 청운의 꿈이라는 것이 무령왕릉 정도로나마 고이 간직돼 있으리라 믿고 싶었다.

학기말 시험 때였다. 나는 도서관에서 빈 자리를 찾아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법대생들의 전용인 칸막이를 한 열람실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조명이 잘 안 된 침침한 칸막이 열람석에 앉아 나는 꼭 통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 얘들은 이렇게 스스로를 통 속에 갇히우면서 훗날 사람들을 감옥에 처넣을 공부를 하는구나. 책상 벽에는 낙서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그 중엔 (낡은 정치의 시녀(侍女)가 되겠느냐?)고 씌어 있었다. 나는 또 그 청운의 꿈이라는 것을 보는 듯했다. 그때 나는 구석에 씌어진 작은 글씨를 보았다. (아 밥 먹기가 싫어졌다.)부끄러운 듯이 숨어 있는 이 볼펜글씨를 본 순간 어쩌나 웃음이 나왔던지 시험공부고 뭐고 정신이 없어서 책가방을 들고 겨우 열람실을 빠져나왔다. (청운의 꿈)이라는 말과 (밥 먹기가 싫어졌다)는 말이 악수를 하고는 자 시작, 하는 구령과 함께 열심히 내 겨드랑을 간질이는 것이었다.

쓸개골이라는 말에 형수는 웃으며

"이 천하대장군이나 지하여장군이 원래는 마을 어귀에서 길목을 지키며 악귀(惡鬼)를 쫓는 것이었죠, 그런데 후에 성() 샤머니즘으로 변태 됐어요. 그 과정에 재미있는 것이 많아요."

형수는 자기가 잘 아는 이런 얘기를 들려줌으로써 늦어지고 있는 사람을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에서 초점을 조금 당겨 놓으려는 것일까. 나는 북을 울렸다.

"어떤 것인데요?(盡心)

"장승에 대한 설화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개가 근친상간(近親相姦)을 소재로 하고 있지요."

형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깊은 산에 살던 홀아비 아버지는 나이 든 딸을 불러 정욕을 호소했다. 딸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인륜(人倫)에서 그럴 수는 없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아버지의 그 애절함에 괴로워하였다. 만약 아버지가 개 같은 짐승이라면 인륜 때문에 괴로워하진 않아도 되리라. 딸은 아버지가 마루 밑에 들어가 개 시늉을 하며 세 번 짖으면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딸의 제의를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마루 밑에 들어가 개 시늉을 하며 세 번 짖었다. 그 동안에 딸은 뒤뜰에 목을 매어 죽었다.

"이 아버지를 후세에 길이 저주하고자 길가에 장승을 세워놓고 지나가는 사람마을 침을 뱉는다는 거예요. 어떤 마을에서는 장승에 개털을 붙여 두는 곳도 있어요."

"개의 울음이 인륜을 부정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군요?(盡心)

"그래요, 그래서 이 장승들이 일제 초기까지만 해도 성범죄에 대한 형구(形具)가 되었지요. 죄인을 장승에 붙들어 매고 마을 사람들이 매를 때렸으니까요."

나는 탁자 위의 천하대장군을 내려다보았다. , 그대 너무나 인간적인 아버지여.

"그것이 다시 성범죄의 악덕을 저주하는 내용으로 변용되었군요?(盡心)

"그래요. 근친상간(近親相姦)이 부덕이 되지 않던 시대에서 죄악이 되는 시대로 접어들 때 생겨난 샤마니즘이죠. 거기에는 인간 본연의 실존과 모럴이라는 허구가 대결하는 간국적인 성관념이 있는 것 같아요."

더우기 성범죄의 형구가 되고 있는 장승이고 보면 그것이 한국의 에로티시즘의 도표로서 어떤 뜻을 가지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다방의 소음을 잊고, 우리가 기다리는 시간을 잊고, 그리고 선택도 없이 다가와 있는 하나의 사실까지도 잊고 잠잠히 가라앉아가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제도나 모럴이 주는 허구의 시대에서 다시 원시적인 실존으로 되돌아가리라는 생각은 안 가지세요?(盡心)

"본질을 허구로 금지해 온 것이 결국은 문명의 작업이었으니까......이미 문명에 대한 회의가 점차 일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겠지요."

형수는 잠시 탁자 위에 놓인 목각에 눈을 모았다. 그리곤 내 얼굴을 깊이 건너다보면서 말했다.

"인간은 약해요. 문명이란 것도 실은 인간의 능력이 가지는 어떤 한계들을 넘어서려는 노력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것을 다시 깨뜨릴 정도로 우리들이 강하냐 하는 데는 의문이 가요. 설화나 무가를 수집하러 다니다 보면 인간의 연약하기만 한 숨결 같은 것을 대하고 막막해질 때 가 있어요."

형수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에게서 강한 생명 의식을 때때로 느껴온 것도 결국은 민속설화를 수집하러 다니면서 얻어진 그녀의 일부였던가. 약하다고 생가하기에 그것을 딛고 일어서려는 원시적인 의지였던가. 형수는 지금 약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렇다. 저 어둠 속에서 생활의 가지를 꺾으며 뿌리를 흔드는 보이지 않는 손을 나는 느끼지 않았던가. 연약한 본능을 웃는 소리를.

겨울이었다,

집에서는 파티를 열기로 되어 있었다. 무신론자만 들어찬 우리 집에서 어떻게 해서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리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폴로 십일 호가 달 착륙을 하는 날이 공휴일이 되는 이 동방예의지국 탓이거나, 비틀거리는 서울 탓이거나, 파티 추진위원장의 중임을 맡은 누이동생의 공로이리라. 어쨌든 우리는 파티를 준비했고 엄선을 다한 열두 명의 초대객으로부더 초청수락의 전화까지 받아 놓았다. 이십사 일 저녁이 서서히 다가왔다.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서 승리한 정치가처럼 두 손을 흔들며, 신나게 놀아 주겠다는 결의를 퍼득이며 초대객들은 빠짐 없이 대문을 넘어섰다. 파티는 막이 올랐다. 우리는 제 일부를 시작했다. 일부는 저녁식사였다. 한국 사람 아니 이럴 때는 조선 사람이라고 해야 실감이 난다. 우리들 조선사람에게 있어서야 식사를 빼면 잔치가 되지 않으니까. 우리는 동서양 요리가 융화를 이룬 국적 불명의 식탁에서 열심히 지껄이고 먹고 먹었다. 식사가 무르익어 갈 때,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든 동생이 오빠 전화, 여자야, 했다. 나는 전화를 바꿨다. 전 상희 친구 됩니다, 여기 병원인데요, 빨리 좀 오셨으면 합니다. 무슨 일인데요? 오시면 아실 거예요, 전 지금 바쁩니다. 바쁘시다고요? , 내일 가보겠습니다.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어, 여자가 언성을 높이는가 하자 전화가 탁 끊겼다.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그때 다시 벨이 울렸다. 내가 받았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빨리 와 주세요. 지금 상희가--- 말 끝이 흐려졌다. 뭐 이런 계집애가 다 있어, 라고 말하려던 나였는데 곧 가겠습니다, 하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상회. 일 년째 병원에 있는 아이였다. 초급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나가던, 팝송을 기막히게 잘 부르던 아이였다. 수원에 집을 둔 그녀와 내가 만난 것은 처음부터 우연이었다. 사내놈들 다섯이서 수원에 딸기를 먹으러 간 적이 있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둘씩 둘씩 앉고 남은 내 옆에 앉음으로써 알게 된 여자. 삼십 년대 식의 만남이었다. 둘은 그럭저럭 이야기를 시작했다. (톰 존스)를 싫어한다는 데 동의했고 (헨리 탠시니)를 좋아한다는 데 합의했다. 저녁놀이 물든 창 밖으로는 새로 마련된 주택 단지에서 집 짓는 일이 한창이었다. 상희가 말했다. 서양의 건축은 밑에서부터 벽돌을 쌓아올려 마지막에 지붕을 만드는데 우리의 초가집들은 지붕을 만들고 벽을 바르거든요. 전 집에 오르내릴 때면 저것들을 보면서 어떤 생활의 도식(圖式)을 생각하곤 해요. 하늘을 생각하고 사는 것과 땅을 생각하고 사는,,,,,,

여자가 생각이라는 것을 하다니, 서울 바닥을 기어다니는 여자들--- 옷을 입고 눈썹을 붙이기 위해서 사는 것만 같은 그들과 다를 게 없는 상회가 생활의 도식이라는 기묘한 말을 했을 때 나는 즐거웠다. 그 즐거움은 서울에서 내릴 때는 딸기가 남겨 준 신선한 용기의 후원을 받으며 나에게 상희의 손을 잡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상희의 비교론에 다시는 속지 않았다. 다만 동석했었다는 고마운 섭리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만나고 쓰러졌고, 서로에게 준 상처를 보면서 이것이 사랑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택시를 내려 병원으로, 병실로 나는 들어서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나는 상희가 나를 보고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 큰 눈을 뜨고 양 팔에 주사를 맞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 상희.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잘못이었다. 전화를 받은 것도, 달려온 것도, 상희의 눈 뜬 모습을 본 것도 다 잘못이었다. 마지막 우연이 오고 있었다.

상희는 눈을 뜬 것이 아니었다. 동공이 움직이질 않았다,

죽는구나, 하는 아찔함이 머리를 배렸다. 나는 그녀 앞에 앉았다, 순간순간 상희의 검은 눈동자는 조금씩 위로 움직여 눈꺼풀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그녀를 바라보면서 검은 자위가 눈꺼풀에 잠겨 가는 것과 같은 속도로 나는 자리를 옮겨 앉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초생달만큼 검은 자위를 남긴 채 그녀는 박자 없는 호흡을 시작했다. 턱을 쳐들며 숨을 쉬곤 겨우 내뿜었다. 그 간격이 점점 길어지고 호흡을 계속할수록 상희의 머리는 뒤로 젖혀졌다. 마침내 으......하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숨을 들이쉬었다. 그 후의 정적은 그대로 영원이었다. 나는 상희가 호흡을 계속하기를 기다리며 아마 하느님, 하고 입 속으로 중얼거린 것 같다. 그러나 그녀는 하얗게 눈을 뒤집은 채 움직일 줄 몰랐다.

그때, 바로 그때, 상희가 갑자기 그녀의 손을 쥔 내 손을 힘 줄어 잡았던 것이다. 나는 머리카락이 하나하나 런치며 온 몸에 소름이 끼쳐 그녀를 잡았던 손을 벌레라도 뿌리치듯 흔들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상희가 내 손을 잡은 것이 아니었다. 우드득하고 뼈가 튕겨지는 소리를 내면서 그녀의 팔이 서서히 틀어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다시는 상희가 있는 쪽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린 채 가족들의 울음이 터지는 병실을 나왔다.

긴 복도를 걸었다. 불빛이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나선 층계를 내려갔다. 언젠가 밤에 하산(下山)을 하다가 어둠 속에서 안기며. 내게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들려준 여자. 나도 그때 사랑한다고 말했던가. 병동 정문에 켜진 수은등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끝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나는 문득 파티를 생각했다. 웃음소리. 그것은 환한 불빛 속에서 들려오는 어둠이었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진실에서 고개를 돌려가면서 언제까지 살아야 하나. 불빛 속을 헤매다가 나는 때때로 가슴 저 밑바닥에 울려 놓고 간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형수님, 제 첫사랑 얘기할까요?(盡心)

나도 시계의 초점에 매달린다. 어느새 형수는 웃는 얼굴이 되어 있다.

"버스에서 알게 된 여자였죠. 두 번째 만나던 날 영활보고 나서 차를 마셨죠, 여자가 말없이 앉아 있더니, 누굴 사랑해 봤어요? 하데요. 전연 못 해 봤다고 대답했죠. 그랬더니 자기도 연앨 못 했대요. 얼마를 그렇게 앉아 있더니 여자가, 우린 안 되겠군요, 첫 사랑은 헤어지는 거래요, 하더군요."

"착한 여자네요, 그만큼 순수하기도 어렵지 않아요?(盡心)

"순수가 아니 라 실수죠. 흐흐흐."

"아니 ,,,,,,무슨 웃음이 그래요."

나는 형수의 순수라는 말에서 숨겨진 음모를 보았다. 또 흐흐흐 하고 웃었다.

영시(英詩) 교수님은 첫아기를 안고 아내와 함께 병원을 나을 때, 담요에 싸인 아기의 무게를 느낄 수 없어서 자기가 빈 담요를 안고 있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듯이 몇 번이고 담요 자락을 헤치고 아기를 보았다고 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교수님은 흐흐흐 하고 웃으셨다. 나는 그 웃음 때문에 하하하 웃고 말았지만, 그때 교수님의 표정에서 아, 이 분은 순수가 무엇인지 알고 계시는구나,,,,,,하는 감동을 느꼈었다.

누나가 죽은 살 밤에 나는 몰래 집을 빠져 나왔다. 달이 뜨지 않은 캄캄한 밤이었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길을 더듬거리며 갯가로 나왔다.

모래 위에 앉아서 나는 기다렸다. 차가운 바람이 목덜미로 허리로 기어 들어서 몸을 굽혀 양 손으로 무릎을 안았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모래가 날아와 얼굴을 때리고 앞산에선 가랑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서걱거리며 발자국처럼 다가왔다. 추위로 어금니가 딱딱거리고 온몸이 굳어질 때까지 나는 그렇게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등불을 들고 내려오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 어둠 속에서 등불은 한여름 밤의 반딧불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다가왔다. 밤이 깊어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아버지는 이마를 짚어주며 물었다. 강가엔 왜 나갔었니?

"돌이 구르는 것을 보려구요."

그것은 내가 마지막으로 말한 순수가 아니었을까. 나는 때때로 순수라는 것을 생각하며 흐흐흐 웃어버린다.

"쓴가 봐요."

"?"

"담배 말예요."

", 네에."

나는 담배를 껐다.

"담배를 두 곽씩 가지고 다니는 친구가 있어요."

그놈은 언제나 두 종류의 담배를 가지고 다닌다. 하나는 최고급으로 하나는 최하급으로. 둘 다 구하기 쉽지 않은 담배다. 담배 하나를 달라고 하면 그놈은 언제나 최하담배를 꺼내 준다. 그리곤 자기는 유유히 최고급으로 꺼내 문다. 이놈이 집에 가서 저 혼자 있을 때 둘 중에서 어느 것을 피울지 생각하면 재미있다.

"글쎄요. 혹시 두 가지를 번갈아 피우진 않을까요?(盡心)

헝수는 말하면서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입가에 졌던 주름이 엷게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나는 보았다. 왜 이렇게 늦어질까. 아침에 형은 분명히 약속하지 않았던가. 병원 건너 다방에서 기다리라고.

형수는 고개를 들고 목각을 집어 나에게로 내밀었다.

", 선물."

……(盡心)

"받아두세요. "

나는 그것을 받았다. 형수는 조금 흐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고마와요. 절 즐겁게 해 주려고 애쓰신 거 잘 알아요."

나는 어금니를 힘주어 물었다.

"전 아마 죽겠죠. 그러나 살고 싶어요. 현대 의학이라는 힘이 나를 다시 살게 해 주기를 간절히,,,,,,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과학문명이라는 것에 이렇게 모든 것을 걸기는 처음이에요."

, 그래. 우리는 좀 전에 문명을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인간의 어떤 본질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클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러나.

"생각했어요. 죽음은 무엇일까- 다시 생명이 주어진다면 더 열심히 살겠다는 아픔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아주 삭막한 하나의 사실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살아서 나오지 못할 병원으로 가면서 손톱 발톱까지 깨끗이 깎고 내의를 갈아입도록 인간을 약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결국 죽음인가 봐요."

이제 그녀는 다 말했다. 지금부터의 시간을 어떻게 지내야 하나. 위로를 해야 할 순서가 온 것인가.

"지금 이렇게 앉아 있으면서 제 한쪽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있어요. 만약 형님이 오지 않는다면 입원을 내일로 미를 수도 있을 거라는---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오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형님이 끝내 오지 않는다면 저는 그것만으로도 저 병원엘 들어가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그날 입원을 안 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까맣게 먹물이 스며드는 집안에서 오히려 웃음을 만들며 며칠을 지낸 그녀. 형이 없이 입원을 해도 될 것을 이렇게 기다리는 것도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어 보겠다는 생각에서였던가.

"우리 여길 나갑시다."

그리로 나는 계속하려 했다. 내일 입원을 합시다. 아니면 형이 오지 못할 곳으로 갑시다.

그 때. 그녀가 일어섰다.

", 나가요. 저 혼자 입원을 하겠어요."

형수는 가만히 웃었다. 훗날 누가 천사의 미소를 보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보았다고 대답하리라.

우리들은 다방을 나왔다. 사월 마지막 날의 바람이 우리를 감싸고 새로 피어난 나뭇잎을 흔들며 지나갔다. 나는 천하대장군을 들고 서서 대학병원이 유리창마다 햇빛을 받고 반짝거 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횡단 보도를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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