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람들-최일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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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외 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두 시 이십 분이 조금 지나서였다. 오늘사말로 회사에 좀 바쁜 일이 있어서, 여느 토요일보다 조금 늦게 사를 나온 후 단골로 다니는 중국집에 들러 후다닥 짜장면을 먹어치우곤 이내 택시를 몰았다. 그랬는데도 같이 여행을 떠나기로 한 일행은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곳에 모이기로 한 시간이 두 시 반이니까 약속한 시간까지는 7, 8분이 남았으므로 그럴 법도 한 일이지만, 그래도 일행 네 사람 중 나밖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소 의외이다 싶었다.
흔히 몇 사람이 다방이든 거리든 어디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해 놓고 막상 현장에 닿았을 때 다만 한 사람이라도 먼저 와 있는 사람을 만나면 모를까, 자기가 맨 먼저 와 있을 때는 내가 시간을 잘못 안 것이 아닐까, 내가 장소를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싶은 때가 있는데, 지금의 내가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물론 그만그만한 장소에, 비슷비슷한 이름으로 이마를 맞대고 있는 번화가의 다방이 아니라, 서울에도 몇 군데 없는 시외 버스의 터미널이고 그만큼 단단히 약속한 터이어서 설마 일이 틀어질 리는 없겠지 하면서도 혹시 한두 사람이 갑작스런 사정으로 못 나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객적은 걱정이 잠깐 스치기도 하였다.
나는 한쪽 구석에 물러서서 짐을 발 밑에 놓고 담배를 한 대 꼬나 물었다. 짐이랬자 주먹만한 룩색이었는데 그 속에는 그 동안 피울 담배 몇 갑과 갈아 신을 양말 따위 간단한 잡동사니가 몇 가지 들어 있을 뿐이었다. 우리 일행의 이번 여행이 3박 4일을 잡고 있으므로 사실은 짐이 좀 클 만도 한데 이처럼 달랑하게 손가방 같은 걸 들고 나선 데는 까닭이 있었다. 당일치기라면 모를까 그래도 3박 4일쯤 되는 여행이고 보면 갈아 입을 옷이니 세면도구니 가다 오다 읽을 책이니 잡지니 해서, 못해도 적어도 작은 보스턴백 정도는 들어야 제격일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또 단 하룻밤을 자고 오는 여행이라도 이런 옷가지라든가 세면도구 외에 트랜지스터 라디오니 카메라니 심지어는 간장약, 소화제, 헤어로션까지 마치 평소에 자기가 집에서 쓰던 소도구들을 그대로 목적지에 옮겨 놓듯, 잔뜩 배가 부른 가방을 들고 나서야 길을 떠나는 실감을 얻는 수도 있고 보면 더욱 그랬다. 요컨대 집을 나선다는 것은 우선 마음도 마음이지만 옷치장이라든가 손에 드는 가방 하나에도 신경을 써서, 자 이제부터 나는 어딘가 길을 떠나는 사람이라는 티를 내고, 길 가는 사람도 그 사람의 그런 옷치장이나 손에 든 백, 그리고 하다못해 어딘지 조금은 들뜬 것 같은 표정에서, 아 저 사람은 어딘가를 가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은연중에 느낄 수도 있게끔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하기야 장삿속이나 잦은 출장 같은 일로 여행이 몸에 밴 사람들은 새삼스럽게 어디를 간다든가 온다는 일에 이골이 나서 그냥 맨몸으로도 후딱후딱 볼일을 보고 다니고, 고속버스 정류장이나 서울역에 턱 내려도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좌석버스에서 금방 내린 사람처럼 맨숭맨숭할 수가 있겠는데 그런 사람들은 워낙 숙달된 사람이니까 그렇다 치고, 맨날 직장과 집 사이, 그러니까 불광동에서 시청 앞, 아니면 수유동에서 종로까지만 왔다갔다하던 사람이 어쩌다가 몇 년만에 2백 리나 3백 리쯤 나갔다 온다고 치면 벌써 갈 때 올 때 차에 오르고 내리는 폼 자체가 다르고, 나는 지금부터 2백 리 길을 떠납네, 나는 지금부터 3백 리 길을 떠납네 하고 얼굴에 씌어지는 수가 많다. 그러니까 복닥거리는 서울바닥에서만 아웅다웅 살아오던 우리 네 사람이 거짓말 같게도 십 년 이쪽저쪽 하는 사이 거의 한 번도 서울을 크게 벗어나 보지 못하다가 이제 모처럼 먼 여행을 떠나는 마당에서는 각기 큼지막한 백들을 하나씩 들고 나서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나머지 세 사람도 와보면 알겠지만 모두 나처럼 극히 간단히, 되도록이면 그냥 빈손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어쩌면 내가 들고 나온 룩색이 그 중 큰 짐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기에는 까닭이 있었다.
오늘, 같이 여행을 떠나기로 한 네 사람은 고등 학교 동기 동창생들인데다가 고향도 엇비슷하고 나이도 고만고만했다. 흔한 말로 죽마고우나 다름이 없는 처지였다. 고등 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후 대학은 서로 달랐지만 넷이 모두 형편들이 시원치 않아서 어렵게 대학을 마쳤다는 점에서는 또 모두가 일치했다. 지금 국영 기업체의 비서실장으로 있는 김성달은 내리 4년을 가정 교사로 학비를 벌었을 뿐 아니라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년 반은 더 가정 교사 노릇을 했다. 고등 학교 교사인 윤경수는 그 무렵 한참 붐을 이루었던 태권도 도장 사범의 조수 노릇을 하면서 학비를 벌었고, 을지로에서 TV가게를 벌이고 있는 최진철은 닥치는 대로, 가령 밤이면 길바닥에서 가스등을 켜 놓고 싸구려 책을 판다든가, 그것도 시원치 않으면 심지어 사설 댄스 강습소에서 유한마담들에게 춤을 가르치면서 돈을 번다든가 해서 겨우겨우 대학 과정을 마친 처지였다.
시내 복판은 아니지만 그래도 왕십리에 건축 설계 사무소를 차리고 있는 나도 그 무렵은 예외 없이 형편없는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사글세방을 하나 얻어서 학생을 모아 가르쳐 보기도 하고, 프린트 가게의 임시 고용원으로 필경(筆耕)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까 대학을 4년만에 제대로 마친 건 김성달이뿐, 나머지 셋은 5년이나 6년 만에 마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간혹 서로 어울렸고 대학을 졸업하고 각기 자리를 잡아가고 결혼을 하면서 한동안 왕래가 뜸하다가, 한 7, 8년 전부터 다시 자주 교우를 가졌다. 우리끼리 교우를 가질 뿐만 아니라 안식구들까지 섞인 모임을 갖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술집이나 음식점에서 간단히 저녁을 들거나 술을 마시는 게 고작이었고, 끽해야 당일치기로 교외에 나갔을 뿐, 이번처럼 넷이서 제법 먼 여행을 떠난다든가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런 일이란 대개 그렇듯이 우리들의 이번 여행도 극히 우연한 기회에 우연한 발설(發說)로 이루어졌다. 어느 날 저녁 우리 넷은 자주 드나드는 생맥주집에 모여 5백cc짜리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넷 중에 큰돈을 잡았다든가 하는 사람은 없어도 이따금 맥주집에 드나들 정도의 여유랄까 그런저런 형편쯤은 되는 우리는 그 날도 보통 삼십대 후반에 접어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 예를 들면 그전에는 일주일에 세 번 네 번도 너끈했는데, 요즘은 그것이 잘 서지가 않아서 일주일에 두 번을 채우기도 힘들다든가, 이대로 가다가는 내년 봄엔 인플레가 더욱 심화될 것이라든가, 정부의 연료정책이 틀려먹었다든가, 요즈음 신촌 쪽에 재미있는 술집이 많이 생겼다든가 하는 따위, 두서없는 너스레를 주고받았었다. 그러다가 판이 어느 정도 식어 간다 싶을 무렵인데 TV상회를 하는 최진철이 불쑥 밑도끝도없이 한 마디 했다.
"언제 날을 잡아서 우리끼리 여행이나 한번 갔다 오면 어떨까?"
마침 화제가 시들해서 별다른 의도도 없이 한 말인 것 같았는데 의외로 윤경수나 김성달이도 금방 동의를 하고 나섰다.
"그거 좋지. 맨날 서울바닥에서 비비적거리고 살다 보니까 고단해 죽겠어. 계절이 어떻게 바뀌는지도 모르겠고 말야. "
"사실 그러고 보니까 우리끼리 이렇게 만나면서도 한번도 여행을 해본 적이 없군 그래. 지금쯤 시골은 좋을 거야. 추수도 끝났것다, 뜨뜻한 아랫목에 지지고 앉아서 동동주라도 한잔 마시면, 아 그 기분 서울 사람들은 모를걸."
얘기의 방향이 좀 엉뚱하다 싶었지만 나 자신도 그것이 굳이 싫은 것은 아니었고 가능하다면 언젠가 그런 기회를 만들어 보자고 말했다. 그랬는데 최진철이는 이런 일은 기왕 얘기가 나왔을 때 아주 결정을 보고 말아야지 차일피일하다가는 흐지부지되고 마는 법이라고 우습게 다그치는 바람에 오늘의 모임까지 발전하고 만 것이다.
그날 밤 내친 걸음에 날짜까지 정해 놓고 나머지 몇 가지 원칙까지 세웠다. 우선 목적지를 미리 정하지 말고 어느 날 어느 시 버스 터미널에 모여서 가장 멀리 가는 버스를 집어타고 갈 것, 짐은 일체 갖지 말고 되도록 빈몸으로 갈 것 등이었는데, 그것은 이번 우리의 여행이 도시의 문명이나 잡답(雜沓) 등을 피해서 다만 며칠이라도 깊숙이 자연의 품에 안기러 가는 것이므로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쓰던 잡동사니들을 끌고 가지 말자는 의도에서였다. 누군가가 그러나 최소한도 치약, 칫솔 따위는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고 하자, 제안자인 최진철이 시골에 가면 왜 돌소금이라는 게 있지 않느냐, 그걸로 닦아야 그런 곳에 간 기분이 나는 법이라고 우겼다.
"그래 좋았어. 비록 우리들의 고향은 아니라도 좋아. 고향과 엇비슷한 데로 가서 우리를 키워 준 고향 같은 무드 속에 며칠 묻혔다 오는 거야. 알고 보면 우리들 넷이 모두 산골 촌놈들 아니니? 먹고 사느라고 너무 오래 그런 정경과 등을 지고 살아왔어. "
비서실장으로 있는 김성달이 마침내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바람에 넷은 이구동성으로 그러자 그러자 하고 손뼉을 치고 말았다. 김성달의 말마따나 넷은 한결같이 산골 출신이고 그런 속에서 뼈가 굵었는데 어쩌다가 서울서 부산하게 살다 보니 십 년 이쪽저쪽 고향에 다녀온 녀석이 없는 것도 퍽 우연한 일치였다. 공교롭게도 넷이 다 부모를 모셔 온다든가, 생활의 그루터기를 서울로 옮겨 온다든가 해서, 이미 고향에는 피차 아무 근거가 없는 탓이기도 했겠지만, 어쨌든 그만한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거의 고향과 인연을 끊고 살아온 것은 지방 출신으로서는 좀 희귀한 일이었다.
물론 이런 연줄 저런 연줄로 고향에서 올라오는 사람들과 인연을 맺어 오고 있는 동안 그쪽 소식을 풍문으로 들어 오고 있는 터이긴 해도 그것은 이미 어디까지나 풍문일 뿐 우리들의 생활과는 별로 직접적으로 닿는 데가 없었다. 앞에서도 잠깐 얘기했듯이 우리들의 이번 여행은 극히 우연한 기회에 극히 우연한 동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알고 보면 그것은 우리가 무슨 큰 벼슬을 했다거나 큰 돈을 모은 후 걸어온 길을 여유 있게 돌아보는 몸짓에서라기보다는 이제는 피차 그런대로 서울바닥에서 자리를 잡고 잠시 숨을 돌려보는 고갯마루에 서서 한번 생활에 휴지부(休止符)를 찍어 보는 그런 포즈에서였다고 보는 것이 옳은지도 몰랐다.
내가 담배를 막 비벼 끄고 버스 시간표를 보러 가려는데, 고등 학교 교사인 윤경수가 내 어깨를 툭 치면서 앞을 막았다.
"내가 제일착인 줄 알았는데 네가 먼저 와 있었구나. "
"아냐 나도 금방 왔어. "
우리는 동시에 버스 터미널의 대형 시계를 쳐다보다가 피차의 옷매무새를 보고 싱긋 웃었다. 나는 구두에 잠바만 걸친 데 비해, 윤경수는 농구화에 헌팅캡 비슷한 걸 쓰고 있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국영 기업체의 비서실장으로 있는 김성달과 을지로에서 TV상을 하고 있는 최진철이 택시로 들이닥친 것은 윤경수가 온 지 채 2분도 안 된 후였다. 김성달은 빈손이었고 최진철은 아이들 신발 주머니 같은 걸 어깨에 메고 있었는데 둘 다 등산모를 쓰고 신발도 농구화를 꿰고 있었다. 아무도 넥타이를 맨 사람은 없었다. 누가 보아도 마침 토요일 오후이기도 해서 잠깐 교외라도 다녀올 사람들로 보였지, 적어도 3박 4일이라는 꽤 거창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 같이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이런 서로의 모습을 보고 약간 의미 있는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에는 며칠 동안의 서울 탈출이라는, 우리만이 아는 조그마한 음모를 재확인하는 뜻 외에도, 피차간에 낯익은 넥타이 차림 때와는 다른 용모나 분위기를 읽어내고 웃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흔히 허구헌 날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 일을 하던 동료들이 어느 날 야유회를 나갈 때 평소와는 다른 피차의 옷차림에서 어떤 싱싱한 경이감(驚異感)을 느끼는 때가 있는데, 지금의 우리가 그와 비슷한 것이었다. 특히 처녀 여직원들의 간편하고 약간은 화려한 옷차림이 그런 날 아침은 전혀 딴 사람으로 어필해 오는 것인데, 그런 젊은 여자가 끼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금의 우리는 또 우리대로 다방이나 음식점 아니면 맥주홀에서 만날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참으로 오랜만에 어느 산골로 여행을 떠난다는 다소 들뜬 분위기가 가세한 탓도 있겠는데 그것 말고도 등산모자나 농구화, 그리고 잠바 스타일은 피차의 용모에 낯선 이질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였다.
이미 두 시가 넘었는데도 먼 곳으로 떠나는 버스는 많았다. 우리 사이에는 어느 쪽으로 떠날 것인가를 놓고 한동안 의견이 오갔으나, 아무튼 목적지의 지명만으로는 잘 분간이 안 가도 요금이 비싼 데가 서울서 제일 먼 곳일 것이므로 덮어놓고 요금이 많은 데로 하자는 데 낙착을 보았다.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버스 안은 제법 붐볐다. 우리 일행은 용케 뒤쪽에 자리를 잡을 수가 있었다. 우리가 탄 버스의 종착지는 강원도와 충청도의 경계쯤 되는 어느 읍 소재지였는데 서울서 근 네 시간 가까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물론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은 그 읍이 아니고 우선 거기까지 갔다가 오늘 안으로 되도록 더 깊이, 어디가 될지는 몰라도 더 깊숙이 들어가기로 합의가 되어 있었다. 버스는 직행이었다. 버스가 아직 서을 시내를 벗어나기도 전에 일행은 비교적 높은 톤으로 떠들어 댔다.
우리의 앞길에 대한 미지의 설레임 같은 것도 있었지만 우선은 넷이서 아무 탈없이 이렇게 3박 4일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여정을 시작한 데 대한 다행함 같은 것도 섞여 있었다. 사실 서울서 살다 보면 어느 날 몇 시에 어느 다방에 모이자고 하는데도 꼭 한 사람쯤은 빠지거나, 일요일 하루 교외에 나가자고 해도 꼭 한두 사람은 그 날 마침 집에 일이 있다든가 회사나 가게 일로 부득이 빠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수가 많아서 같이 만난다는 일이 도무지 수월치 않았다. 그랬는데 하루도 아니고 나흘 동안이나 서울을 비는 일에 이처럼 쉽게 합치한 것은 퍽 희한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침 토요일과 일요일이 겹쳐서 생으로 쉬는 날은 이틀뿐이었지만, 그 이틀도 여간해서는 빠지기 힘든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당장 무엇이 어떻게 되는 일도 아니요, 더더군다나 돈이 생기는 일도 아닌 터에 각자 먹고 살기에 바쁜 사람들이 이처럼 한가한 일에 괜히 신경을 곤두세운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이 서울 살림이었다.
"야 멀쩡한 놈이 갑자기 아프다고 할 수도 없고 혼났다. 교감이 집에 무슨 중요한 일이 있느냐고 그러기에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좀 복잡한 일이 생겼다고 사정사정했지 뭐. "
윤경수가 호들갑을 떨자 김성달이나 최진철이도 너만 그런 줄 아느냐고, 자기들은 더했다고 수선을 떨었다.
"말 마라. 사장한테 겨우 후라이를 쳐서 휴가를 얻고 나니깐 이번엔 여편네가 잔뜩 의심을 하지 않겠니? 출장은 느닷없이 무슨 출장이냐 이거야. 그걸 둘러대느라고 혼났다. 겨우 빠져 나왔어. "
"제기. 너희들은 그래도 말만 잘하면 되지. 나는 직접 수입에 지장이 있다구. 점원에게 맡겨 놓기는 했지만 그게 어디 내가 있는 것하고 같겠니? "
나도 사정은 비슷했지만 그래도 그날그날 상사의 눈치를 보면서 벌어먹는 처지는 아니어서 조금 나은 편이었다. 그래도 밀린 일을 해치우느라고 이틀을 야근으로 때려치워야 했다.
버스 안 사람들은 그런 우리들을 힐끔힐끔 뒤돌아봤다.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대충 짐작이 가겠지만 시외 버스의 손님은 시외 버스를 탔대서가 아니라 첫눈에도 그럴 법한 태도가 눈에 띄는 법이다. 생김새가 어떻다든가, 옷차림이 어떻다든가 하는 뜻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선 자리에 앉으면 지금부터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꼼짝없이 먼길을 시달려야 한다는 인고(忍苦)의 자세를 취한다. 앉자마자 눈을 감거나, 앉자마자 심호흡을 하는 것 같은 그런 몸짓에서, 서울 속에 끼어 들지 못하고 가장자리만 스치면서 왔다갔다하는 시외 버스 손님임을 알게 한다. 물론 철 지난 벨벳 치마라든가 빛 바랜 중절모, 그리고 짐이라고 든 시멘트 푸대나 라면 상자, 아니면 지퍼가 고장난 가방에서도 알 수 있지만, 당장은 그런 몸짓으로 하여 흔해 빠진 '쌍문리'라든가, '용암리' 따위 그런 동네의 주민임을 알게 한다. 그런 '쌍문리'와 '용암리' 출신의 아가씨가 아무리 잘 차려 입고 서울을 왔다 가더라도 그런 몸짓은 어디에선가 배어 나오게 마련이다. 이것이 시외 버스 손님이 고속 버스 손님과 다른 소이(所以)이다.
이런 버스 안의 손님들이 그렇게 힐끔힐끔 쳐다보거나 말거나 우리 일행은 쉴 새 없이 지껄여 댔다. 마침 버스 창 밖으론 누런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참 좋다. 황금의 파도가 넘실거리는구나. 그런데 늬네들 어렸을 때 논에서 새 보던 기억나니? 학교만 갔다 오면 어찌나 새 보러 나가라고 몰아세우던지. "
김성달이가 창 밖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윤경수, 최진철이 그게 말이냐고 하듯이 이내 받았다.
"말도 마라. 땡볕 속에 이리저리 댕기면서 휘여휘여 몇 번 소리지르고 나면 목이 콱 막히지 않디? 깡통 달아맨 줄을 흔들면 참새란 놈들이 멀리나 달아나? 한 2미터쯤 올라갔다가는 도로 내려앉지. 새들도 한두 번은 속아 주지만 그 다음엔 다 안다 이거지. 그런데 한동안 없던 새들이 요즘 수렵 금지령 덕으로 다시 극성이라고 신문에 났던데? "
"그런데 그렇게 참새를 쫓을 것만도 아니라더군. 새들이 빨아먹는 양도 많기야 하지만 고놈들이 벌레들을 잡아 주기 때문에 플러스 마이너스 따지고 보면 플러스 쪽이 더 많대. 그건 그렇고, 벼가 막 패기 시작할 무렵의 그 냄새도 구수해서 좋아. "
"좋지, 그런데 냄새 중에 못 맡을 건 초여름 밤꽃 냄새야. 이건 꼭 바로 그 냄새라니까. 히히히. "
"그래 맞았어. 정액(精液) 냄새허고 너무나 왔다야. 히히히. "
이미 삼십대도 후반기에 들어선 우리들은 마치 소풍가는 아이들처럼 시시덕거리며 어렸을 때의 추억들을 더듬었다. 사람들은 어느 기간 동안 열심히 달릴 때는 뒤를 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하다가 어느 만큼 가서 조금 쉬엄쉬엄 가도 되겠다 싶을 땐 천천히 자기가 돌아온 길을 되돌아보고, 지금까지 온 길이 어려운 길이었으면 어려운 길인 만큼, 되레 그 상황을 아름답게 되씹어 보는 습성이 있다. 지금의 우리가 그랬다. 온 길보다는 앞으로 갈 이 더 멀고 바쁠 것이 뻔한 노릇이긴 해도, 죽어라고 뛰다 보니 어느새 대학을 나온 지도 십 년이 후딱 지나 있고 조금 숨을 쉴 만하니까 지금까지 왔던 길, 그 중에서도 우리들의 뼈와 살을 굳히는 데 중요한 대목을 이루는 고향을 돌아보게 된 것이다. 다소 유행가 가락 같은 분위기가 이맘때쯤 해서 우리를 갑자기 찾아온 것은 그러니까 그럴 법도 한 일이고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처음 여행 이야기가 나오고 날짜가 결정되는 마당에서도 우리는 한동안 어렸을 때 먹던 입맛을 되살렸었다.
"지금쯤 시골에 가면 우거지국이 맛있을 때야. 우거지에다가 뜨물이나 된장을 풀고, 풋고추를 듬성듬성 썰어 넣어 먹으면 기막히지. 간혹 여편네한테도 시켜 보는데 영 옛날 맛이 안 나더군. "
"그것도 좋지만 간갈치나 간고등어 있지? 그것도 장날이나 서는 날이라야 한 토막 얻어 걸리는데 말야. 그것 한 토막이면 밥 한 그릇 다 먹는다구. 더구나 여자들한테는 살 토막이 차례나 가니? 우리 어머니는 대가리 차지지. 그런데 그 대갈통을 바싹 구워 가지고 뼈째 아삭아삭 씹어 먹으면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어. 그 좋은 걸 서울서는 버리고 먹는단 말야. 어쩌다가 그게 먹고 싶을 때가 있는데 마누라한테도 차마 창피해서 고등어 대가리 구워 오라고는 못하겠어. "
"난 국민 학교 다닐 때 벤또 반찬에 새우젓만 싸 가지고 다녔다구. 우그러 터진 벤또 한쪽에다 간장 종지 있지, 거기다가 새우젓만 담아 가지곤 밥 속에 쿡 박아 가지고 다니는데 그렇게 꿀맛일 수가 없었어. 그런데 요즘은 새우젓만 봐도 냄새가 나거든. 그리고 그런 건 흙냄새 물씬 나는 초가집에서 먹어야 제 맛이 나지, 텔레비전을 보면서 먹는 밥상에는 안 어울려. "
우리는 그날 밤, 의외에도 풀떼죽이 얼마나 맛있으며, 호박떡이 얼마나 기찬 것인가를 얘기했다. 그뿐 아니라 호박잎 쌈이 얼마나 구미를 돋우는 것이며, 고춧잎 버무린 것이 얼마나 입맛 당기는 반찬인가를 얘기했다. 빈속에 술을 마시면 위장을 버린다고 불고기 2인분씩을 먹은 후 마른 안주에 생맥주를 마시며 그런 얘기를 한 것이다. 말하자면 번지르하게 서울바닥을 싸다니기는 해도 옛날 입맛이나 그런 정황을 어느 구석엔가에 지니고 있는 촌놈 근성을, 내력을 아는 우리끼리 실컷 주고받은 셈인데, 자기들은 어쨌거나 이제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 멀찌가니 서서 한가히 풍경화를 그리고 있는 것 같은 언짢음이 없지도 않았다. 아무튼 우리들의 이런 이야기는 막판에 가서 김성달의 얘기로 한층 절정을 이루었었다.
"난 커피 좀 안 먹고 살았으면 좋겠어. 내 직업이 그런 탓도 있지만 하루에 커피를 몇 잔 마시는 줄 알어? 못 마셔도 7, 8잔은 마신다구. 죽을 지경이야. 이번에 여행 가서는 다만 며칠이라도 커피라든가 이런 것 안 마시고 살았으면 좋겠다. "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두들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는 가서 우거지국, 간갈치나 간고등어, 새우젓, 풀떼죽, 호박잎으로 오래 잃었던 자연의 미각을 되찾고, 단 공기와 그런저런 정경에 몸을 담자고 맹세하였다. 다만 우리가 자란 고향으로 가자는 축과 어디고 그런 시골은 있으므로 구태여 고향이라고 못박을 것 없이 전혀 딴 데로 가 보자고 하는 축이 있었는데 결국은 후자로 결정을 보았다. 거기에는 또 우리 나름의 약간의 계산이 있었다. 그것은 고향 쪽으로 갔을 경우, 아직도 남아 있는 이런 저런 관계에 얽매이다 보면 우리가 당초에 기도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삐져 나갈지도 모르니까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 보자는 것이었고 마침내는 모두가 이에 동의하고 나섰다.
우리가 탄 버스가 K읍에 다다른 것은 저녁 여섯 시가 다 되어서였다. 여름 해와 달리 거리는 벌써 어둑어둑했다. 거의 네 시간 가까이 먼짓길을 달려왔기 때문에 모두 적당히 피로해 있기는 해도 가 보는 데까지 더 가자는 데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마침 이곳에서 백 리쯤 떨어진 S리로 가는 막차가 곧 떠나려는 참이어서 일행은 두말 없이 후딱 올라탔다. 처음 타고 온 버스보다도 이 버스는 형편없이 낡았고 길도 더 험한지 차체가 심히 기우뚱거리는 데다가 차창 밖마저 어두워져서 우리는 이제 아무도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차츰 우리들의 종착지가 가까와옴에 따라 약간의 설레임 같은, 전혀 낯선 마을에 대한 호기심은 더해 갔다. 따지고 보면 우리들의 출발 자체가 너무 무계획하고 당돌한 것이어서 앞으로 부닥뜨릴 사태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고개를 쳐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런 불안에 도전해 보고 싶은 충동이 고개를 쳐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얼마를 더 달렸을까―버스는 마침내 멈추고 우리는 십여 명도 안 되는 다른 승객들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우리들이 내리는 것과 함께 7, 8명의 다른 승객들이 K읍으로 되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동네는 밤눈에도 전후좌우가 산에 가려진 산골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런지 차에서 내리자 오싹한 냉기가 온몸을 엄습해 왔다. 오다가 차 속에서 들은 얘기지만 이 동네까지 들어오는 버스편은 하루 아침 한 번 저녁에 두 번 해서 세 번뿐이라고 했다.
"자, 오긴 왔는데 이제부터 어떡헌다. 보아하니 여인숙도 있는 것 같지 않고…… "
김성달이 다소 낭패한 얼굴로 말했다. 얼핏 보아도 20호쯤 되어 보이는 마을엔 여인숙 같은 게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아닌게아니라 다소 막막하기는 했다. 윤경수나 최진철이도 지금까지의 흥분에 비해서는 좀 동뜨게 심란한 눈치였다. 그러나 최진철이는 곧 이런 국면을 얼른 모면이라도 하고야 말겠다는 듯이 활기 있게 외쳤다.
"아따 여인숙은 무슨 여인숙이야. 여기만 해도 버스가 들어오는 마을이니까 안 돼. 다음 마을까지 더 가 가지고 덮어놓고 이장집을 찾아가서 사정해 보는 수밖에 더 있어? "
우리는 마치 무엇에 들린 사람처럼 밤길을 십 리는 더 걸었고, 그래서 외딴 마을에 이르렀다. 마을에 들어선 우리는 마침 옆을 지나가던 농부(農婦)에게 이장댁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 여자는 얼른 대답을 않고 우리 일행을 이리저리 뜯어보더니 군에서라도 나온 사람인갑다 싶었던지 마지못해, 그러나 비교적 자세히 이장댁을 일러 주었다. 이장은 마침 집에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우리를 퍽 경계하면서 어디서 왔느냐, 무슨 일로 왔느냐 꼬치꼬치 물었다. 김성달이가 나서서 자기의 명함을 내보이며 우리의 뜻을 전하자 이장은 그래도 납득이 잘 안 가는 듯, 아니면 세상엔 별 미친놈들도 다 있다는 듯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이번엔 최진철이가 나서서 사례는 후히 할 테니 이장님이 주선해서 방 하나만 한 사흘 내주면 된다고 우리는 결코 미친놈도 수상한 놈도 아니라면서 자기 소개는 물론, 나와 윤경수의 직업까지도 소개하자 이장은 비로소 마음을 좀 놓은 듯, 그러면 자기 집 방을 하나 치워 줄테니 우선 하룻밤 묵고 차츰 또 알아보자고 마지못해 응낙을 해주었다. 우리는 크게 한숨을 쉬고 우선 저녁밥을 부탁하였다. 이장이 밥이야 그런대로 되겠지만 찬이 마땅찮다고 뒷걸음질을 치자 우리는 먹던 김치나 우거지국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노라고 진심으로 당부하였다. 우리는 그런 당부를 하면서도 어쩌다가 이런 꼴을 사서 당하는가에 대해 우스운 생각이 들기도 하였으나 아무도 그런 내색을 한다거나 짜증스런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우리는 돌아갈 아늑한 보금자리가 있고 기껏 고생해 봤자 3, 4일간인데 그걸 못 참겠는가 하는 여유에서 오는 일종의 즐거움을 동반하고 있었다.
우리들이 대충 손발을 씻고 호롱불 밑에서 이리저리 퍼져 있을 때 저녁상이 들어왔다. 과연 밥상은 김치와 우거지국 그리고 무말랭이 버무린 것뿐이었는데, 우리는 반주로 들어온 막걸리와 함께 허겁지겁 처넣었다.
"바로 이거야. 우리가 십여 년 전에 먹었던 맛이 바로 이거야. 서울서도 가끔 시래기국을 끓여 먹는데 영 맛이 나야 말이지. 매사는 무드가 중요해. 이 토장국 하나만으로도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지 않니? 쓰러져 가는 초가지붕 일에서 말이다. "
반드시 허세만이 아닌 것 같은 최진철의 말에 나머지 세 사람도 그렇고 말고, 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상을 물린 다음에도 우리는 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어렸을 적 고향에서 지내던 이야기로 밤이 깊어 가는 줄 몰랐다.
"경수 너 나무하러 다니던 생각나니? 그때가 국민 학교 오륙 학년 때였는데 그땐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나무를 한 짐씩 지고 다녔지. "
"그래. 학교만 파했다 하면 산으로 몰아세웠지. 그때는 그게 그렇게 지긋지긋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런대로 재미있었어. "
김성달과 윤경수는 나무하러 다니던 얘기를 주고받았다. 나에게도 그런 경험은 있다. 주로 삭정이나 풀나무를 하러 다녔는데, 정 할 게 없으면 고사목(枯死木)으로 베어 낸 소나무의 그루터기를 도끼로 찍어 관솔을 따기도 했다.
"왜 우리 고등 학교 다닐 때 학선리에서 H여고 다니던 기집애 있지? 이름이 미옥이던가 뭐던가. 고게 이젠 중년 부인이 되었더라. 요전에 서울서 만났어. 아주 모른 체하더군. "
최진철의 말에 김성달이 모로 누워 있다가 고개를 돌리며 말을 받았다.
"맞어. 있었지. 나도 한 번 봤는데 아주 팍 늙었더라. "
우리는 그 외에도 많은 얘기를 했다. 주로 고향에서 자랄 때의 사연들이었지만 결국 우리들은 촌놈이라는 것, 언젠가는 다시 농촌에 묻혀 살고 싶다는 뜻의 얘기들이었다. 네 사람은 서로 성격은 달랐지만 공통의 경험을 가졌다는 점에서 얘기는 술술 풀려 나갔고, 거짓말 같게도 십여 년만에 재현해 보는 청소년 시절의 분위기로 하여 쉽게 마음들이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이 남폿불이 주는 무드 어때? 좋지? 그전엔 미처 몰랐는데 말야. 이런게 좋다구. "
윤경수의 이런 말에 나머지 세 사람은 금방 동의를 표하고 나설 만큼 우리는 어느 한구석이 붕 떠 있었다. 그것이 괜한 허세만은 아닌 것은 누군가가 이런 소중한 기회를 오래오래 잊지 말자고 유행가 가락 같은, 소년 같은 여린 감상을 말했을 때 모두가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짓던 것으로도 알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일부러 주인집에 부탁해서 돌소금으로 이를 닦았다. 소금은 입안에서 이리저리 몰리기만 할 뿐 여간해서 이가 잘 닦아지지 않았으나 우리는 애써 옛날 시골에서 이런 굵은 소금으로 이를 닦던 일을 생각하면서 소금 묻은 이를 벌린 채 히죽히죽 웃어댔다. 이장이 찬이 없다면서 정말로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들여온 밥상은 아닌게아니라 간단했다. 시퍼런 무청김치에 깍두기와 무국이 전부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이런 걸 맛보기 위해서 일부러 여기까지 왔노라고, 조금도 그런 생각 마시라고 되레 미안해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무국은 멸치가 몇 마리 들어 있고, 소금으로 간을 본 국물에 고춧가루만 뿌린 것이었다. 윤경수가 먼저 국물을 떠먹더니 갑자기 무릎을 쳤다.
"야 이거다. 옛날 맛이다. 맛나니(화학 조미료)를 안 쳤어. 집에서는 그렇게 맛나니를 치지 말라고 해도 말을 안 듣는단 말야. 또 혀가 그렇게 단련이 되었는지 그걸 안 치면 미심심하고 말야. 그런데 여기서는 비로소 순수한 제 맛이 나는군. "
"그렇군. 그러고 보면 우리들의 미각이 그 동안 얼마나 잡스럽게 변했는가를 알 수 있지. 누가 들으면 그까짓 입맛 하나 가지고 뭐 그리 대단치도 않게 후라이를 까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흥, 그게 다 촌에서 살아 본 사람이 아니면 이 맛 모르지. 가을 무의 이 시원한 맛. "
우리는 희멀건 무국 한 대접씩을 놓고 입에 침이 마르게 감격해 했다. 그것은 다분히 어떤 분위기에 애써 자기를 함몰시키고, 거기에서 자기 나름의 기쁨을 얻으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가세된 것 같기도 했으나 꼭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우리는 아무리 돈을 준다고는 하지만 생판 알지도 못하는 껄렁한 손님을 넷이나 자기 집에 재워 주고 먹여 주는 인심이 도시 같으면 어림이나 있겠느냐고 고마와하면서 종일 그 집에서 뒹굴기도 하고 산책을 나가기도 하였다. 낮에는 또 그런 반찬에 옥수수로 빚었다는 노란 막걸리가 들어왔다. 짐작하겠지만 우리들은 또 한바탕 너스레를 떨면서 배가 띵하도록 마셔 대었다. 이날 저녁에도 우리는 아침과 비슷한 밥상과 옥수수술을 받았다. 주인은 이번에도 찬이 변변치 않다고 노상 같은 말을 했으나, 우리는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이런 걸 맛보기 위해서 일부러 여기까지 왔노라고 조금도 그런 생각 마시라고, 되레 미안해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우리는 아침이나 어젯밤처럼 그렇게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마지못해 국물을 몇 숟갈 떠넣었을 분 모두 입에 당기지 않는 것 같았다. 우선 나부터도 그랬다. 간밤부터 마신 막걸리가 쉰 냄새와 함께 목구멍에 괴어 오르고, 돌소금으로 이를 닦다가 생채기가 난 잇몸이 이따금 아렸다. 간밤에는 못 느꼈는데 남폿불에서는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한옆으로 쌓아 놓은 이부자리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리 넓지 않은 들판에 섰을 때는 그렇게도 속이 시원했는데, 이틀째가 되면서부터는 들판은 그냥 들판일 뿐 별다른 감흥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산천이 마음 속에 있을 때는 그렇게 좋았는데 막상 그 속에 파묻혀 보니까 갑갑하기만 하다고 윤경수도 말했다. 그는 더 말은 안 했지만 서울서 떠나올 때의 마음과는 달리 누가 자기의 생활을 이런 곳으로 끌어내릴까봐 겁을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는 주인집에서 빌어 온 화투로 섰다를 했으나 별로 신명이 나지는 않았다. 하루에 커피를 7, 8잔씩은 마셔서 지긋지긋하다던 김성달이가 화투짝을 던지며 벌렁 나자빠졌다.
"커피 한 잔만 했으면 좋겠는데. "
"그러게 말이다. ……오늘 밤 텔레비전에서 쇼를 하는데 놓쳤군. "
"쇼뿐야? 프로 레슬링도 있다구. "
윤경수와 최진철이도 덩달아 화투를 팽개치고 길게 가로누우며 말했다. 우리들의 마음은 너무 일찍이 너무 허무하게 무너져 가고 있었다. 처음 여행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그저께까지 내리 우리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몰아세웠던 힘이 이렇게 쉽게 허물어지는 데 대해서 자기 혐오 비슷한 감정이 있었으나 당장 눈앞에서 겪는 일들은 우리들의 얄팍한 감상(感傷)을 그렇게 덧없는 것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일상(日常)에 묻혀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던 회향(回鄕)에의 의지가 어느 날 갑자기 고개를 쳐들어 신나게 달려왔으나 가슴 속에 간직해 왔던 그 낯익고 신선한 경이(驚異)를 즐기기에는 우리는 너무 소시민적인 안일(安逸)에 젖어 있었음을 확인한 꼴이 되고 말았다. 사실 우리는 이번에 길을 떠나면서, 우리는 우리가 자란 그런 두메에 언젠가는 내려가자, 그런 꼬투리를 만들기 위해서 이번에 내려가면 그럴 만한 야산이라도 추렴해서 사 두는 게 어떻겠느냐는, 진담 반 타산 반의 약속까지 하고 온 터였으나 막상 현지에 와서는 아무도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일들이 단순히 자고 먹는 것의 불편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고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지금까지 우리들이 쌓아 온 생활과의 위화감이랄까 하는 데서 오는 것이기도 했지만 아무튼 불과 이틀 밤을 보내면서 우리는 벌써 서울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히야시 맥주 딱 한 병만 먹었으면 좋겠다. "
"난 술 마시고 오면 꼭 밥 대신 냉장고에서 우유 한 병 꺼내 마시고 자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기분이야. "
김성달과 최진철은 내리 막걸리만 마셨더니 신트림이 난다면서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처음에도 얘기했듯이 우리들의 예정은 3박 4일이었으니까, 당초의 계획대로라면 이틀 후에야 떠나야 하는데, 아무도 말은 안 했지만 다음날은 서울로 올라갈 예정으로 있었다. 그런데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우리는 다음날 첫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조금 늦잠을 잔 게 탈이었는데, 잠에서 깨어 S리까지 왔을 때는 첫차가 이미 떠난 뒤였다. 버스가 아침에 떠난다는 것만 알았지 그렇게 일찍 출발할 줄은 미처 몰랐었다. 차 시간을 알아 두지 않은 게 잘못이었다.
우리는 낭패한 심정으로 서로 쳐다보다가 집안에 죽치고 앉아 있기도 답답하니 오후 차가 떠날 때까지 동네 앞산이나 올라가는 데까지 올라갔다 오자고 했다. 그 산은 꽤 높은 산이었는데 계곡이 퍽 깊어 보였고 동네 사람 말이 중간쯤에 조그마한 폭포가 하나 있으며 그 근처에는 화전민이 몇 가구 있으므로 쉬었다 오기에 무방할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별로 흥이 안 나는 대로 스적스적 산으로 기어올랐다. 일행은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다가 나중에는 더워서 웃옷들을 벗었다. 윤경수와 김성달은 그만한 등행에도 벌써 얼굴이 새빨개졌다가 하얘졌다가 했는데 그때마다 파란 정맥이 얼굴에 드러나 보였다. 그들에게서는 이미 초동(樵童) 시절의 노루새끼 같은 잽싼 동작이 없고 창백한 월급쟁이의 허우적거림 같은 것만 보였다. 나나 최진철이도 마찬가지였다. 화전민촌에 닿은 건 산에 오른 지 약 30분이 지나서였다.
우리는 일단 폭포에 들렀다가 세 채가 있는 초가집 중 맨 가장자리 집에 들어가 좀 쉬어가자고 말했다. 우리들이 손바닥만한 마루에 걸터앉아 막 담배 한 대를 사르고 있는데 안방에서 웬 여자가 문을 확 열어 젖혔다. 그 여자를 보는 순간 우리는 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산골의 그만그만한 여자가 아니라 그 여자는 한눈으로도 도시의 술집 여자 같은 냄새를 풍겼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그 방안에는 비슷한 여자가 둘이 더 있었고, 그들은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눈 화장을 파랗게 하고 손톱에는 시뻘건 매니큐어를 하고 있었다.
"흥 귀한 손님들 오셨군. 어디서들 오셨소. 웬만하면 들어와서 같이 한잔 합시다 그려. "
처음에 문을 연 여자가 취한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자 방안에 있던 여자들도 한 마디씩 거들고 나섰다.
"심심한데 잘 됐지 머. 들어오라면 들어오지 뭘 꾸물거리셔? "
"씨팔, 싫다면 놔둬. 한 코 주겠대도 마다시니. "
우리가 어이가 없어 당장은 대꾸를 못하고 있자, 이집 주인인 듯싶은 노인네가 얼른 우리를 가로막고 나섰다.
"요 산 위에 미군 통신 부대가 와 있는데 그 사람들 상대하는 색시들이라우. 취했으니 상대 마십쇼. "
그 말을 듣고 최진철이가 무어라고 응수하려고 하는 걸 우리는 얼른 그를 끌어당기며 자리를 일어섰다.
"놀랬다 놀랬어. 이런 심심산천에 와서 양색시를 구경하다니. "
"기가 막히군. 이런 줄은 또 누가 알았나. "
우리는 서둘러 산을 내려오면서 한마디씩 했다. 너무 엉뚱한 곳에서 너무 엉뚱한 여자들을 만난 데서 오는 당혹감이나 희한함이 없지도 않았으나 그것은 곧 재미있는 일로 둔갑을 하고 두고 온 도시를 떠오르게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길로 산을 내려와 버스를 탔다.
서울로 오는 버스 속에서 우리는 너무 말이 없었다. 그까짓 3박 4일을 제대로 채우지도 못하고 하루를 앞당겨 온다든가 하는 것보다도 달라진 환경 속에 다만 며칠을 견디어 내지 못하고 도망하듯 그 마을을 떠나온 데 대한 부끄러움 같은 것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무교동이나 종로바닥에서 맥주를 마시며 산촌(山村)의 정경을 얘기하던 자신들이 얼마나 얄팍하고, 배부른 여담(餘談)이었던가를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는데 그러나 우리는 그런 한편으로 숨이 칵칵 막히는 지점에서 쉽게 빠져 나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 안도감을 느끼는 자신들을 발견하고 있었다. 우리는 밤늦게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그길로 다방에 들러서 커피를 마시고 다시 무교동으로 나가 5백cc짜리 생맥주를 단 한 번에 꺾어 단숨에 들이켰다.
"이제 살 것 같군. "
우리는 동시에 이런 말을 뇌까리고 그전에 그랬던 것처럼 떠들고 웃곤 하였다. 초가을, 이 서울 동네에서 풍기는 술 냄새, 여자 냄새, 고기 냄새, 하수도 냄새에 자기를 휩쓸어 넣었을 때 비로소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헤헤거리며 지껄여 댔다.
"우린 이제 별수 없이 서울 사람 됐는갑다. "
한참 만에 윤경수가 퍽 힘없이 얘기하자 김성달이나 최진철이도, 그래 그런 모양이야 하고 동의를 했다. 술집을 나오자 우리는 아이들에게 줄 요량으로 각기 과자봉지 하나씩을 사 들고 불광동으로, 미아동으로, 중곡동으로 뿔뿔이 헤어졌다. 서로 잘 가라고, 또 만나자고 손을 흔들 때 나는 이놈들아, 우리들이야말로 촌놈이라고, 형편없는 촌놈이라고 속으로 몇 번씩이나 되뇌었다. 동시에 우리들의 등골뼈 밑으로 7, 8센티미터쯤 자란 속물(俗物)의 꼬리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걸 의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