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도가 죽었다-최수철
그날 나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름을 밝히고 싶니 않은 한 친구를 만나기 위해 한낮의 햇살이 서서히 발끝을 오무리기 시작하는 무렵에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약 네 시간 가량 떨어진 한 도시에 도착했었다. 나는 나의 이름은 물론 그 도시의 이름조차 밝히고 싶지 않다. 그것은 고유명사가 선입관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고상한 거부반응 때문이 아니라, 뭐랄까, 홍도라는 단 하나의 고유명사, 마치 무한한 포용력을 지니고 있어서 모성애를 느끼게 하는 듯한 그 이름 속에서 다른 모든 이름들이 굳이 자기를 드러낼 필요도 없이 충분히 편안한 숨을 내쉬고 또 들이마실 수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밤늦게 술이 꽤 취한 상태에서 그의 주거지로 찾아들었다. 그곳은 중심가를 조금 비껴서 서 있는 신축 4충 건물 속의 당구장이었다. 우리가 무거운 발걸음을 무수히 들어올려서 마침내 3층에 이르르자 당구장이 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육중한 철문이 우리를 막아섰다. 취기로 인해 흔들리는 듯이 보이는 철문을 내가 곽 붙잡고 있는 사이에 그가 간신히 열쇠를 꽃아 문을 열었다.
창문들은 모두 닫혀 있었지만 커튼은 모두 걷힌 채로였다. 그런 탓인지 밖에서 들어오는 어슴푸레하고 창백한 빛은 신선해 보였지만, 실내의 공기는 답답할 정도로 텁텁했고 습기가 없으면서도 후덥지근한 기운이 피부에 느껴졌다. 실내의 푸르스름한 어둠은 일종의 마분지와 같아서 푸석푸석한 두께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마분지가 흔히 유리 그릇을 넣는 상자 속에서 완충제 역할을 해주듯이 실내에 자욱한 이 어둠은 앞으로 그와 내가 부딪치게 되더라도 덜 요란한 소리가 나게 해줄 것이었다.
홍도가 죽었다.
그는 우선 카운터 앞의 형광등을 켜고 가까운 당구대 위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구두를 벗어서 멀리 집어던졌다. 그러고는 실내화를 신지 않은 양말 바람으로 큐들이 들어 있는 유리문을 열었다. 나는 그가 자주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로 주단이나 싸구려 양탄자, 혹은 잔디밭 위를 걸어다니면서 발바닥의 외설적인 감촉을 즐기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구두를 벗고 고무로 된 실내화까지 얌전히 신은 후에 가방을 카운터 안쪽 구석으로 깊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우선 창문들을 모두 열어 젖히고 나서 큐를 골라 들고 초크를 칠했다. 그가 공들을 꺼내와서 탁자 위에 떨어뜨렸다. 공들은 그의 손에서 떨어지며 얻은 힘만큼 굴러가다가 이내 멈추었다. 하얀 공 두개만이 내 앞으로 굴러왔고 빨간 공 두개는 당구대의 옆에 붙어버렸다. 둔중하게 구르는 공들을 보자 약간의 피로와 술기운으로 머리가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손을 뻗어 당구대 위의 형광등을 켜고서 먼저 몸을 굽히고 큐를 휘둘러서 함부로 공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가 당구대를 따라 돌며 내 곁에까지 왔을 때 나는 그를 밀어내고 굳이 무엇을 겨냥하지 않은 상태에서 힘껏 공을 쳐댔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순서도 언 이, 공의 색깔을 구분하지도 않고, 그리고 공이 미처 멈추기도 전에 큐질을 했다. 공들은 당장이라도 깨져버릴 듯이 비명을 지르면서 서로 충돌하거나, 당구대의 벽에 부딪쳐 퍽퍽 소리를 일으키며 힘에 밀린 쪽으로 곤두박질쳤다.
우리들은 분주하게 당구대 주위를 돌며 각기 공을 치다가 급기야. 물론 장난으로서였지만. 상대방에게 유를 휘둘러댈 정도로 흥분이 고조되었다.
홍도가 죽었다.
그때 그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고서 멍하니 당구공들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나는 웃몸을 일으키고 큐끝으로 당구대를 딱딱 두들기며 그에게 무슨 일인지 대답하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그는 대답 없이 다시 큐를 들고 공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술에 취해서 맥빠진 듯이 흐느적거리며 움직이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 역시 주정을 부리듯 멍청하게 서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내 속으로 들어와서 요란스럽게 문을 닫고는 신도 벗지 않고 길게 누워버린 것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 나는 그놈이 하는 양을 지켜보려고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당구대 위에서는 여전히 큐의 끝과 공, 공과 당구대의 벽, 공과 공이 부딪히는 소리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나는 그 소리를 듣는다기보다는 오히려 시각적으로 더 느끼고 있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약간의 빛을 반사시키면서 반질거리고 있는 스테인레스 주전자가 옆에서부터 나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나는 몸을 돌려」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의 어떤 불유쾌한 반질거림과 뻔뻔스런 반짝거림뿐만 아니라 바로 그 시각에 그곳에 있음으로 해서 그것은 나를 거북하게 만들었다. 내가 어깨와 몸을 조금씩 비틀었지만 그것은 무모하게도 나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나의 시선은 그 단단한 쇳덩어리를 움켜쥐고 한 겹씩 벗겨내기 시작했다 한데 은박지 같은 엷은 피부를 몇 겹 벗겨내지도 않아서 그 덩어리의 표면에 실핏줄이 내비치는 연한 살점이 나타나더니 이내 그것마저 떨어져나가고 검붉은 핏덩어리가, 어둠 속에서 발광체처 럼 솟아올랐다. 그러나 눈을 한번 감았다 뜨자 그 연약한 빛의 무늬도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에는 점액질의 시커먼 어둠이 두 주먹쯤의 크기로, 가슴을 후려치는 듯한 덜컹 소리를 내며 들어앉았다.
딱딱 하는 타음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었다. 홍,홍,도,흥,도,가,흥,도,가,죽,홍,도,가,죽,었,홍,도,가,죽,었,다.
그가 큐의 손잡이 쪽을 바닥에 대고 그 위에 턱을 괴고서 그냥 서 있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큐 끝으로 나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쳐봐. 이젠 네가 쳐보라구.」
그의 큐 끝은 내게 충격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와이샤쓰 위에 파란색 원형의 무늬를 여기저기에 찍어놓았다. 그것도 그가 즐기는 장난 중의 하나였다. 나는 유를 들어 그의 큐를 쳐내고는 몸을 숙여서 내 앞의 빨간 공으로 그의 앞쪽에 놓여 있는 흰 공을 정면으로 맞추었다. 그의 흰 공이 당구대 위를 한바퀴 돌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가 앞쪽에 멈추어 서 있는, 내가 방금 쳤던 붉은 공을 내 쪽으로 세게 쳤다. 공은 당구대의 벽에 맞고 내 몸 위로 튀어 오를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느끼게 할 정도로 난폭하게 튕겨져서 굴러왔다. 하지만 나는 그가 설마 그런 장난을 하랴 하는 마음에 옆으로 피하지 않았고, 이미 몸을 움직이기에는 너무 늦었기 때문에 퍼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공은 밖으로 튀어나오는 대신 당구대 위를 겅중거리며 누비다가 다시 내 앞에 와서 멈추어 섰다,
나는 한동안 공을 바라보다가 큐 끝으로 공을 툭툭 쳐서 적당한 자리를 잡은 후에 그의 앞쪽에 몰려 있는 공들을 향해 세게 밀어 쳤다. 그러나 나의 공이 미처 목표물에 맞기 전에 그의 큐가 굴러가던 공을 쳐냈다. 발간 공은 높이 튀어 오르더니 결국 당구대 밖으로 떨어져서 어두운 구석으로 굴러갔다. 바닥에 부딪쳤을 때 났던 묵직한 타음이 잠시 바닥과 공기를 흔들었다.
나는 공이 굴러간 쪽에서 눈을 떼고 그에게 낮게 그러나 심상치 않은 어조를 스스로 의식하면서 물었다.
「취했나?」
그는 내 눈을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몸을 숙여서 횐 공을 멀리 쳐 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당구대 위로 던져서 공을 정지시켰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뒤쪽의 당구대에 몸을 기댔다. 큐로 칙서 공들을 한쪽으로 모으며 내가 말했다.
「술 한잔 더 할 테야?」
「방을 한번 찾아봐, 남은 술이 좀 있을 거다.」
나는 한쪽 벽에 붙어 있는 문을 열고 벽을 더듬어 불을 켰다. 방 안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옷장은 물론 책상서랍과 깔린 채로 있는 이부자리까지 들쳐보았지만 술병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방 안에서 소리쳤다.
「어디 있는지 못 찾겠는데.」
「그럼 그만둬. 술은 무슨 술이야. 그냥 이리 나와.」
그는 나를 우롱해놓고는 당구대 위에 올라가서 당구공을 머리에 베고 벌렁 누워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머리를 악간 들어 한 손으로 뒷머리를 받치고는 나를 바라보면서 입술을 조금 움직였다,
「홍도가.」
「홍도가 뭐?」
그가 다시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뭐긴 뭐야. 죽었단 얘기지.」
「그래, 그래. 홍도가 죽었다구, 그 말 아냐?」
나른 그의 옆에 나란히 길게 누워 있는 큐를 집어들고 손잡이 쪽으로 고의 아랫배를 쿡쿡 찔렀다. 그가 갑자기 큐를 나꿔채며 말했다.
「누가 전화했는지 알아?」
나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홍도가 전화했다 그거지?」
「그래, 맞아. 홍도가 했지.」
「그런데 홍도는 죽었다, 그거 아냐?」
「그럼, 홍도는 죽었지. 」
「홍도는 전화하기 바로 전에 죽었구, 그렇지?」
「그렇지, 바로 전이지.」
나는 순간 꺼내려던 말을 멈추었다.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서 화급한 약속을 머리에 떠올린 듯한 표정이 그의 눈과 미간에 체크무늬처럼 촘촘하게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눈의 시선은 바이스처럼 천정에 매달려 조금씩 진동하고 있는 형광등을 강하게 죄고 있었다. 나는 그의 표정을 의식하지 않는 투를 가장하기 위해 큐의 손잡이를 눈 가까이로 가져다대고 큐대가 곧은가를 살피기 시작했다.
비록 그가 자신만의 속생각으로 표정을 바꾸는 경우라 하더라도 나는 끝이 아주 -족한 펜으로 은박지 위에 그의 얼굴의 긴장되거나 수축된 부분을 그려나갈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나는 몸을 결박하는 듯한 졸음밖에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여전히 나는 한쪽 눈을 감고 손에 든 큐와 그의 표정을 넘겨보면서 그의 옆에 무심하게 걸터앉아 있었다.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쓰러지고 창 밖의 눈발이 가늘어지듯이 그의 눈 속에서 조금씩 꿈이 멈추어 가고 있었다.
형광등 불빛이 기름처럼 발라져서 어둠이 주욱주욱 미끄러져 떨어지고 있는 희끄무레한 맞은편 벽 위에 -당구대에 앉지 마시오-라고 씌어진 문구가 눈에 띄었다. 내가 잠깐 방심한 사이에 그는 한쪽 팔로 몸을 받치고 삼분의 일쯤 일어나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당구대의 쇠판 위에 앉아 있는 한 마리의 파리에게 퍼부어지고 있었다. 소리라거나 조금의 기척도 없었는데 그 파리는 곧 원을 그리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나는 그의 시선의 힘이 파리의 눈을 부시게 했거나 정수리에 모진 타격을 입힌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그는 콧바람 소리를 내며 그 자세 그대로 한쪽 손을 뻗고 양쪽 다리를 들어올려서 양말의 끝 부분을 한쪽씩 잡아당겼다, 푸른색 양말을 벗어난 두발이 밭에서 갓 뽑혀 나온 무우처럼 신선하게 빛났다. 그는 감촉을 즐기려는 듯이 당구대의 부드러운 천에 발바닥을 몇 번 비벼댔다. 그러고는 손끝에 매달려 있는 양말을 뭉쳐 들고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카운터 쪽으로 힘껏 던졌다. 양말뭉치는 날아가다가 목표에 못 미치고 흐트러져 떨어졌다. 한쪽은 간신히 턱을 카운터의 탁자에 걸쳤고 다른 한쪽은 그 옆의 휴지통에 반쯤 빠져버렸다.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리면서 중얼거렸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러나 내가 볼 때는 약한 불빛 탓인지 얼굴이 상기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고, 단지 피부 깊숙이에 도사리고 있던 검은 병색(病色)이 그가 술을 마시기만 하면 땀샘들 주변에서 조금씩 배회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당구대에서 내려서서 어깨를 건들거리며 세면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앉아 있던 나는 몸을 일으켜서 한 손은 주머니에 찌른 채 다른 한 손으로만 큐를 잡고 공을 치기 시작했다. 그때 느닷없이 뒤쪽에서 그가 소리를 질렀다.
「이런 씨팔 놈의.」
나는 가능한 한 천천히, 서두르는 기색 없이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어떤 일이 생겼다 해도 내가 무관심하는 편이 오히려 그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른쪽 발바닥을 양탄자가 깔린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비벼대고 있었다.
「어떤 개자식이 이런 데다가 가래침을.」
그는 숫제 발로 바닥을 걷어차고 있었다. 나는 다시 여유로이 뒤로 돌아서서 공을 치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만 큐를 잡고 치니까 역시 조준이 잘 안된 공들이 때로 큐 끝에 픽픽 밀리면서 옆으로 흩어졌다.
그때 갑자기 층계를 뛰어올라오는 다급한 발자국소리가 건물의 내장을 훑어 올리듯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1층 , 2층을 뛰어올라 3층에 있는 당구장의 철문 앞을 지날 때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더 위쪽으로 올라가서 갑자기 멈추어 버렸다.
세면대 쪽에서는 그가 푸푸거리며 세수를 하는 소리가 수도 물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그러나 발자국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바로 위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시커멓게 오염이 된 낮은 강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그 속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예를 들어 내가 그 속을 들여다보며 어떤 것을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하면 곧 그 속에 잠겨서 썩어가고 있는 그 어떤 것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아무 것도 없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이, 이거.」
나는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가 냉장고에서 꺼내서 내게 던진 요구르트 통이 나의 시선을 이미 반쯤이나 꺾어 들어서 날아오고 있었다. 나는 몸을 옆으로 굽히면서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고 다행히 그것은 손바닥 아래쪽에 주둥이 부분이 잡혔다. 갑작스런 차가움이 손톱 밑까지 번져나갔다.
나는 통의 덮개를 벗겨내고 단숨에 마셔버렸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힐끗 그를 보니까 그는 아직 천천히 유산균 음료를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어이, 이거.」
나는 빈 요구르트 통의 무게를 감안하여 그것이 그에게까지 날아갈 수 있을 정도로 팔에 힘을 주어서 던졌다. 그러나 힘은 적당했는지 몰라도 그것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서 구석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마시기를 끝내고는 천천히 내가 던진 요구르트 통을, 발로는 나의 그것을 밟아 부수고는 둘을 집어서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때 막 돌아서려 하던 그가 가래가 끓어오르는 듯한 신음소리 같은 것을 뱉어 냈다. 그것은 마치 팥이나 콩을 맷돌에 집어넣고 돌리면 낟알들이 가루가 되어 나오듯이, 그의 머 리 속으로부터 입안으로 떨어져 내리거나 그의 뱃속에서 솟구쳐 오른 고통의 응어리가 그의 이빨에 부서지고 갈려서 몇 마디 말로 흘러나오는 듯했다
「도대체가, 이걸 또 붙여놓았군, 또. 며칠 비워놓았더니------」
그는 중얼거리면서 손을 뻗어 벽에 길게 붙어 있던 종이판을 떼어냈다. -300이하 맛세이 금지-라는 구절이 씌어져 있었던 걸로 기억되는 그 종이는 그의 손에서 여러 조각으로 해체되었다. 그는 몇 개의 형광등에 불을 더 켜고 주위의 벽들과 기둥들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활기를 떤 그의 시선은 어둠 속에서 막 벽 속으로 숨어들고 있는, 흰 색의 직육면체 바탕에 여섯 자에서 열 자 가량의 글자가 적혀 있는 일종의 표어들을 찾아서 선회를 하기 시작했다. 실내의 불을 모두 끄더라도 충분히 그것들의 위치를 분간해낼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 그의 끈끈한 시각에 몇 개가 더 날파리처럼 걸려들었다. -당구대에 앉지 마시오-가 단번에 뜯겨 나가고, -취중 경기 금지-가 구겨져서 휴지통에 던져졌다.
그는 벽에 붙은 거미줄을 걷어내듯이 이쪽 벽에서 저쪽 벽으로 그리고 기둥을 더듬으며 실내를 한바퀴 돌고 있었다. 그가 다소 급한 숨소리 사이에서 중얼거리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것들 때문에 도대체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있나?」
-300이하 맛세이 금지-가 몇 장 더 그의 손에 구겨졌고 내가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던 것들도 몇 장이 찢겨졌다,
나는 큐를 당구대 위에 던져놓고 그 옆의 소파 위에 앉았다. 두 팔을 등받이 위쪽에 얹고 상체를 뒤로 누이자마자 졸음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고 급작스럽게 온몸으로 밀려들었다. 나는 거의 눈을 뻔히 뜬 상태로 죽음을 당하듯이 수면 상태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그의 행동들을 하나도 배지 않고 모두 바라보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병 속에 잡아넣은 개미나 혹은 바퀴벌레처럼 절망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차츰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가 잊혀지고 대신 그가 이리 저리로 몸을 움직이는 모습만이 눈에 어른거리면서 살아남았기 때문에 그의 몸은 말하자면 최면술사가 최면을 걸 때 눈앞에 쳐들고 흔들어대는 시계라거나 어떤 물건처럼 단조로운 반복을 계속하는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나는 내가 눈을 뜨고 있긴 하지만 잠의 수면(水面)이 천천히 무릎과 아랫배를 거쳐서 이제 거의 목젖 부분에 이르렀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가늘게 내리뜬 뻣뻣한 눈꺼풀 사이로, 그리고 검고 가는 속 눈썹의 강철 창살들 사이로 내다보이는 당구장 안의 모습과 그의 움직임은 마치 딱딱한 빵 껍질 위에 부어진 케첩 같다고나 할까, 아니면 그와는 전혀 달리 말해서 그 두 존재가 삼투 현상을 일으키면서 각자의 부분들을 자유로이 교환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고나 할까, 어쨌든 바깥은 온통 시럽 속에 빠져서 침수해가고 있는 꼴이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잠에 빠지고 있다는 증거인 동시에 아직 잠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하지만 물론 나의 망막은 바깥의 상(像)을 받아들이고 있고, 또한 그 망막 뒤에는 왕성한 세포 분열을 거듭하는 잠의 덩어리가 딱딱한 돌멩이처럼 틀어박혀 있음이 사실이었지만, 나의 의식이 깨어 있건 잠이 들었건 상관없이 내 속에는 그를 주시하고 있는 또 다른 시각(視覺)이 있는 모양이었다. 왜냐하면 나의 심한 졸음에도 불구하고, 반대편 구석을 벗어나서 내 쪽으로 다가오는 그의 모습이 비록 인간적인 형태를 제대로 갖추지는 못했어도 머리끝에서부터 녹아 내려서 급기야는 하얀 맨발, 바닥에서 약 30센티쯤 떠올라서 아메바처럼 움직이고 있는 하얀 두 발, 차라리 하얀 두 개의 덩어리로만 남아서 나의 시선 속에 훌륭히 포착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횐 두 덩어리는 희미하게 빛을 풍기고 있었는데, 마치 나의 시선의 빛으로부터 얻은 인광(燐光)을 발하고 있는 듯했다. 그것들은 바닥에 직접 닿지는 않고 있어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 깔린 양탄자의 자지러질 듯한 감촉을 전해 받으며 표피 깊숙한 곳에서부터 파상형의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두 손으로 붙잡아서 약간의 힘을 주면 그것들은 공기의 감미로운 진동이나, 혹은 섭씨 30도 가량의 따뜻함과 약간의 말랑거림을 손바닥에 남겨놓고 색(色)도 향(香)도 없이 허공으로 꺼져 버릴 것이었다.
마침내 그 하냔 빛 덩어리가 내 앞에 멈추어 섰다. 무언가 묻어서 검게 더럽혀진 부분과 유난히 매끄럽게 반짝이는 발톱부분을 유심히 살펴보려 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아직 미숙한 나의 제3의 시각으로는 그 형태도 분명히 구별할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파들거리는 인광을 바라보며 막연한 관능적 인 쾌감을 몸으로 느끼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 하얀 덩어리가 갑작스럽게 확산하더니 내 눈앞에 번쩍이는 빛을 일으켰고, 곧 이어 그 빛은 뺨의 통증으로 확인되었다. 놀라서 눈을 번쩍 치뜨는 순간에 음침한 주문 같은 그의 목소리가 껄끄러운 미꾸라지가 되어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졸고 있는 거야? 눈 안 감고 자는 버릇은 아직 여전하구나.」
나는 그 자세 그대로 그를 올려다보았는데 그건 마치 내가 화가 나서 그를 노려보고 있는 듯한 형국이었다.
「어이구, 화가 나셨나. 졸음 섞인 눈으로 노려보시네,」
내가 끙 소리를 내며 자세를 약간 바로잡자 그는 맞은편 당구대 위에 올라앉아서 오른쪽 발에 힘을 -고 앞뒤로 천천히 흔들면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유난히 긴 발가락들을 가진 하얀 발이 눈앞에서 건들거리는 모양을 바라보면서 나는 현기증이 잠시 머리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좀더 몸을 바로 했다. 의자에 밀착된 등에 불유쾌한 감자이 불에 녹아 내리는 고무처럼 들러붙었다.
그때 다시 층계 쪽에서 발자국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이란에는 4층에서부터 서두르지 않고 또박또박 내려오는 차분한 소리였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건 차츰 여자의 하이힐이 내는 소리임이 분명해졌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던 소리는 당구장의 문 앞쯤이라 짐작할 수 있는 곳에서 멈추었다. 나는 출입문을 힐끔 바라보고는 당구대에 앉아서 고개를 떨구고 계속 다리를 흔들고 있는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너무도 무심해서 내가 들은 발자국소리가 환청이었다 하는 의혹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잔기침소리가 들렸다 싶었을 때 문이 안으로 밀리면서 한 여인의 모습이 반투명의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내가 목을 빼고서 그쪽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제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불빛 밑으로 들어서자 순간 노란색 계통의 빛이 그녀의 얼굴과 온몸에 흘러내리다가 눈 주위의 검은색과 입술이 붉은 색에 압도되면서 전체적인 윤곽이 그어졌다.
그가 당구대에서 내려서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식통 하난 알아줘야겠군.」
사실 그녀는 문을 연 후 아주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발을 움직였기 때문에 이미 카운터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술에 꽤 취해 있다는 것과 그녀의 얼굴 어딘가의 심상치 않은 구석을 발견했다, 그녀의 창백한 표정 자체는 둘째 치고라도 물기가 뺨에서부터 턱까지 번들거리고 있었고 눈 주위에 시커멓게 번진 마스카라 자국이 눈물줄기를 따라서 밑으로 죽죽 그어져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잠시 쉬었다가 술 한 잔하러 내려가려던 참이었는데 무슨 일이라도? ,,,,,,」
「아니, 심각한 일은 아녜요. 그저 술이 취했구. 지치구, 피곤해요.」
그녀는 물기가 촉촉히 젖은 목소리로 대충대충 발음하고는 그의 상체에 몸을 기댔다. 그가 그녀를 받아 안으며 말했다,
「쉬어야겠어. 푹 쉬고 나면 다 좋아질 거야. 」
「그래요, 쉬고 나면 다 제대로 될 거예요.」
그는 여자를 조심스레 끌고서 방으로 들어갔다가 약 일 분쯤 지나서 혼자서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유영하듯이, 미끄러지듯이 실내를 한바퀴 돌며 불들을 하나씩 껐다. 실내의 구석들은 어둠 속에 잠겨들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은 불이라곤 내 앞의 당구대 위에서 빛나고 있는 형광등뿐이었다. 실내에는 저절로 귀에 들리지 않는 멍한 울림이 이쪽 벽에서 저쪽 벽으로, 천장에서 바닥으로. 바닥에서 천장으로 끊임없이 부딪치면서 진동하는 암울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가 담배를 문 입으로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그 말뜻을 새기기보다는 그가 입을 움직임에 따라 끄덕거리는 담배 끝을 흥미 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담배연기를 내 얼굴에 정면으로 불어댔고 나는 눈을 깜박이면서 연기를 고스란히 받아 썼다.
이제 술기운은 거의 증발되어버리고 온몸이 푸석푸석한 솜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남은 거라곤 편두통과 피로와 다시 술을 마시고 싶은 극심한 갈증뿐이었다.
나는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를 뽑아내어 입에 물었다. 내가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서 끄자 그는 새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또다시 돼지고기를 훈제하듯이 내 얼굴에 연기를 뿜어냈다. 바로 그 담배연기 때문에 나는 하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했던 말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 전화 말이야. 어떻게 된 거야?」
그는 흔들리는 자신의 발 끝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대답 대신 다른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작년 이맘때 우리가 저쪽으로 함 팔러 갔던 일 아직 기억하나?」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로 그날이었지, 홍도와 내가,,,,,,」
「그날? 그 빗속에서?」
「그래, 그 빗속에서.」
「그러니까 그때 그 친구는,,,,,,」
「맞아, 그게 그렇게 된 거야.」
우리는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이번에도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홍도를 마지막으로 본 건, 얼마 전에 서울 근교의 한 유원지에서였지. 개천이 흐르고, 낮은 산들이 늘어서 있고, 딸기 포도 뭐 그런 것들이 있는 곳이었어. 그인고 터무니없이 크고 요란하게 써 붙인 모 유원지라는 간판하구. 어때. 흥미 있나?」
그는 대답 대신 손짓으로 계속하라는 시늉을 했다.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있는 건 아니구, 고저 이것저것 늘어놓자면------그래 홍도는 한 남자하구 포도나무 그늘 아래의 탁자에 앉아 있었어. 한 손에는 베이지 색 모자를 들고서 만지작거리고 있었지. 파단 색 리본이 매여 있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여름에 여자들이 흔히 쓰는 챙 넓은 그런 모자 말이야. 다른 쪽 손은 옆의 남자에게 맡기고 있더구만. 나하고 인사를 나누는 동안에도 내내 그 손을 잡고 있었지, 아마. 홍도는 얼굴이 꽤 탄 것 같았어. 아, 그래. 탁자 위에는 포도하구 맥주가 두 병, 글래스가 두 개 놓여 있었어. 나두 별걸 다 기억하구 있네. 」
그때 그가 흔들던 발을 멈추면서 말했다.
「아니, 틀렸어. 맥주 한 병하구 콜라 한 병이었어.」
나는 하마터면 그의 발을 잡아당길 뻔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애?」
「그래, 홍도가 손을 잡고 있던 남자의 얼굴도 똑똑히 보아두었지, 하지만 기억하기가 어려운 낯선 얼굴이 아니어서 다행이었어.」
그는 담뱃갑을 꺼내서 한 대를 입에 빼어 물고는 갑 째로 내게 넘겨주었다. 우리는 담배가 거의 반 이상 타들어 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담배를 끄면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직도 그 얼굴을 기억하나?」
「아니, 이젠 잊어버렸어. 게다가 지금은 그런 게 문제가 아니야. 우린 그저 모자와 맥주와 리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야.」
내가 한쪽 손을 쳐들며 말했다.
「아, 좋아. 그러니까 나보고 얘기를 계속하라, 내게서 어떤 말이 나올까 궁금하다, 이거지 ? 말하겠어. 그날 홍도는 대단히 아름답게 보였어. 사랑을 느낄 정도였지. 잠깐 그녀가 모자를 쓴 모습을 보았는데 멋지게 어울리더군. 날씨도 기가 막히게 좋았지. 너 말이야, 기가 막히다는 말처럼 기가 막힌 말이 있다고 생각해, 응? 어쨌든 그 여잔 참 괜찮은 사람이었어. 간혹 불안해하는 듯한 면만 빼어버리면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그런 타입이었지, 너는 네가 나보다 그 여잘 훨씬 더 잘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물론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반드시 많은 시간적 공간적 유대가 이해를 보장해주는 건 아니야. 그건 그렇다고 치고, 하긴 이런 건 하등 쓸모 없는 얘기인지도 모르고. 또 사실 내가 우연히 그곳에 가게 된 것 자체만 해도 그렇지만, 어쨌든 우리의 입장으로는---」
「오늘만은 제발 그 단서 좀 떼구 말해라. 피곤하다.」
나는 불빛을 등지고 앉아 있는 그의 표정을 살필 수가 없었다. 입술 움직이는 것이 간신히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그의 공격을 앉아서만 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무언가 그에게 덜미를 잡혔다는 기분이 들어 필요 이상으로 높은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나는 나 자신은 물론, 적에 대해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을 개시한 셈이었다.
「단서를 떼라구? 이런 제기랄. 너한테서 배운 이 좋은 습관을 이젠 네가 나보고 떼어버리라구 말하는 거야? 그런 말이 도대체가, 아니 이건 도대체가, 하나 둘도 아니고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처럼 지독하고 변화무쌍한 꼬리표를 사타구니에, 겨드랑에, 온몸에다 달고 다니는 네가 나한테 말이야. 물론 이런 경우에는 그건 용기도 신중함도 아무 것도 아니겠지. 내가 또 옆으로 빠지고 있다고 말하려는 거야? 피곤해 ? 그렇지. 피곤하겠지. 푹 쉬고 나면 다 잘될 테지.」
말을 마치면서 나는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안면근육이 이루는 고랑 속으로 스며들면서 더욱 어두워지는 것을 보았다. 그 어둠의 농도는 그 정도만큼 내게 대한 일종의 경고일 수도 있었고 조금 달리 말하면 거리감일 수도 있었으나, 나는 그의 말을 받아들여서 일단은 그것을 피로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 나는 그와 타협을 꾀해야 할 것이었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굳이 이런 기회를 통해 우리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할 타협 같은 것이 남아 있었나?」
나는 여자의 허벅다리를 더듬으려고 슬며시 내뻗던 손이 거절된 듯한 무안감을 느꼈다. 내가 무어라고 응수하기 전에 그가 내처 말을 계속했다.
「나는 지금 그저 모자와 맥주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을 뿐이라니까. 한 남자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지 않아. 우리 손이 닿을 수 있는 것은 따로 있어.」
결과적으로 나 혼자 또 한번 지나치게 멀리 나가버린 셈이 되었다. 그가 따라오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달려나가다가 돌아보니 그는 저 멀리 출발점에 돌처럼 주저앉아 있는 상황이었다. 돌아서서 그의 옆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며 땅바닥에 의미 없는 낙서를 그어나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었다.
한동안 멈춰 있던 그의 발이 다시 느린 템포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깐동안의 충돌이 있은 후에 나의 자존심은 지푸라기를 쑤셔 넣은 박제가 되어버렸지만 불쾌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가 다시 말을 시작했을 때. 나는 심지어 나른한 안온함에 젖어들었다.
「너나 나나 피차 마찬가지고 다른 일도 다 그렇지만, 이 마당에서 변명 따위를 하려든다는 건 내몰아놓고 쫓아가는 꼴이 랄까, 말하자면 전후관계를 혼동하는 짓일 뿐이야.」
말하자면 그와 나 사이에는 한쪽 배에서 다른 쪽 배에 힘을 가할 때 생기는 한 작용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은 꼭 서로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워지는 경우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시각이 얼마나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손목을 들고 시계를 들여다보는 귀찮은 행위를 수행할 정도로 그 궁금증이 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발은 여전히 시계추처럼 어느 한 쪽에도 머무르지 않고 집요하게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꼼짝도 않고 앉아 있는 나의 몸에 또다시 졸음이 마비감처럼 죄어들었다. 감정의 완벽한 공백 상태에서 나는 마치 백짓장처럼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어떤 소리들이 폭포소리처럼 크게 울리다가 때로는 완전히 귓전에서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내일 날씨는 치가 막히게 좋을 것이었다. 나는 곤충 바늘에 찔려 표본이 된 나비처럼 소파의 등받이에 붙박힌 채 손가락 하나 하나에 따끔거리면서 파고드는 죽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눈을 완전히 감고 있지는 않았다. 따라서 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었고, 또한 모든 것을 꿈꿀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내가 진실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컷을 느낄 수 있었다. 여지껏 내게 찾아왔던 죽음은 항상 여기까지 뿐이었다. 죽음은 그 색도 향도 형태도 모든 것이 가물거리는 이 상태를 한번도 넘어서지를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성실하게 애를 쓴다면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맛볼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온몸의 세포들이 쭈글쭈글하게 노화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리 세포분열을 왕성히 하고 신진대사를 활발히 해도 나는 그보다 더 빨리 죽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나는 영원 속으로 흡수되어 흔적도 없이 소화될 것이었다. 하다못해 나의 머리카락 따위가 배설되는 영광도 없을 것이었다. 온몸에 차츰 사물과 같은 정적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신경을 왼손의 검지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조금씩 손가락 끝을 움직여보았지만 그것조차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발가락을 조금씩 꼼지락거려서 신경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다섯 개의 발가락에 가늘게 걸린 힘을 발바닥 쪽으로 천천히 오무리자 발이 조금씩 안으로 당겨졌다.
창 밖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의 감각과 의식이 그 성능과 감도에 있어서 자꾸 떨어져 내리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나는 흔히 쓰이는 말의 의미대로 잠에 들 수는 없었다. 대신 나는 꿈을 꾸기로 했다. 이제부터 다소 음침한 꿈을 꾸기 시작할 것이었다, 그 꿈은 나의 곽 막힌 속이 심리적으로 배설을 하도록 도와줄 것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당구대를 잡고 겨우 자리에서 일어서서 결리는 등뼈 위케 올라섰다. 일어선 채로 잠시 환해진 주위를 돌아보다가 붉은 색 담요를 어깨에 걸치고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창문턱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아직 확연하게 밝아지지 못한 시선 속에 고스란히 들어와 앉아 있는 그 물체는 분명히 한 마리의 고양이였다. 나는 미동도 삼가한 채 그 동물을 바라보았다. 돔은 조금 머리를 비틀고 입을 벌리려는 듯하다가 이내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마주 바라보았다. 놈은 담요를 뒤집어쓴 나의 몰골이 자기들과 비슷하게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밤 동안 파란 불꽃을 튕겼을 동그란 두 눈은 새벽이 되어서인지 연한 갈색으로 되돌아와서 멍청하게 나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나면 그 눈은 어둠 속의 야성을 잃고 이제는 낮의 지성을 얻기 시작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었다. 놈의 꼬리가 공중으로 곧게 치켜졌다가 곧 창 밖으로 늘어뜨려졌다. 나는 조금 흐느적거리며 바닥을 미끄러져서 놈에게 다가갔다. 놈의 목 뒤 쪽 털이 잠시 곤두섰다가 가라앉았다. 놈은 내가 술이 취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의 손바닥이 머리에서 등 쪽으로 꼬리까지 쓰다듬어 내리자 놈은 몸을 바닥에 납작 붙였다. 털이 감촉이 기가 막혔다. 하긴 손바닥으로 느끼는 감각이 내가 놈을 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전부였다. 놈은 기분이 좋은지 밖으로 내려진 꼬리를 조금씩 끌어올렸다. 꼬리가 흔들거리면서 그 끝이 내 눈 높이까지 올라왔다. 꼬리는 좌우상하로 움직이면서 내 눈을 혼미하게 했다. 나는 놈이 나를 얕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손을 멈추었다가 갑자기 손가락 끝을 오므려서 놈의 목덜미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건 거울을 바라보다가 그 차갑고 매끄러운 면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보는 것과 다를 것이 하등 없는 단순한 행동이었다. 순간 놈은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몸을 솟구쳐서 나의 손아귀를 빠져나가, 그럴 줄 미리 알고 있었노라고 중얼거리고는 밖으로 뛰어내렸다.
발톱 세례를 받은 나의 손등에 길다란 상처가 났고 핏방울들이 그 선을 따라 송글송글 맺혔다. 그때 말로 할 수 없는 황홀감이 느닷없이 온몸에 아우성치며 빽빽하게 들이찼다가 순식간에 허벅지 아래쪽으로 빠져 달아났다. 그러자 마음 속 깊이 드리워진 심지가 뽑혀나간 듯이 몸에서 맥이 빠지고 담요가 어깨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홍도가 죽었다.
잠의 무게가 담요처럼 바닥에 털썩 떨어지는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내가 거짓 잠에 빠져 있었던 시간은 약 5분 정도였을 것이었다. 이제 그의 발은 희미한 발광체 같던 눈부심도 완전히 잃어버리고 익사체의 그것처럼 푸르딩딩한 색을 띠고서 죽어 가는 곤충의 다리마디처럼 간혹 가다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내 눈앞에서 무한한 변신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대리석의 조형미를 갖춘 원추형이 되었다가, 아직 발바닥에 남아 있는 양탄자의 기억 탓인지 순식간에 짧고 보드라운 털로 뒤덮여버렸다. 그러나 털은 구속이었다. 구속은 벗어버려야 했다. 이번에는 동전이 짤랑거리는 쇠 저금통이, 그러고는 곧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어떤 해저동물이 앞에 나타났다,
나는 냄새를 맡기 위해 거기에 코를 가져다댔다. 그러나 그의 발가락이 코끝을 스쳤기 때문에 섬뜩한 차가움이 좀 전의 어떤 냄새에 대한 기척을 지워버렸다. 놈을 가두어놓아야 했다. 서랍에 처넣고 다이얼 식 자물쇠를 하나 채워놓아야 했다.
나는 지붕에서 기왓장을 들어내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팔을 뻗어 그 발을 잡았다. 그때 내가 흘낏 올려다본 그의 표정은 지문처럼 복잡한 온몸의 신경이 갑작스런 자극을 받아서 회오리바람처럼 온통 얼굴 위로 솟구쳐 올라 콧구멍이나 귓구멍, 혹은 입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나의 돌발적인 행동에 대한 후회감이 덮쳐왔지만 이미 팔에 가해진 힘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의 발부터 시작해서 온몸이 아무런 저항 없이 내 위로 무너져 내렸다. 그의 어깨와 나의 입술이 세게 부딪쳤고 그의 머리는 뒤쪽 벽을 들이받으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이 모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나는 그의 몸을 얼싸안은 채 곧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찝찝한 맛이 입안에 번졌다.
우리는 옆으로 서로를 껴안은 채 누워 있었다. 그는 잠이 든 듯이, 아니면 죽어버린 듯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이마를 몇 번 부비다가 곧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 상태로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상태로 죽,을,수,있,을,것,같,았,다.
최수철(1954- )
강원도 춘천 출생. 서울대 불문과 졸업. 198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맹점>이 당선되어 등단. 그는 주체성으로 위장된 획일적 세계를 해부하는 작가 의식을 보여 준다.
주요 작품으로는 <공중 누각>, <화두>, <기록>, <화석>,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하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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