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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단편소설2

88. 한잔의 커피

by 자한형 2022.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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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 의 커 피 -한말숙

빗소리에 혜영은 잠이 깨었다. 커튼이 훤하다. 날이 새었나보다. 침대 서랍에서 팔목 시계를 꺼내었다. 아홉 시 반이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하며 그녀는 귀에 시계를 갖다댄다. 시계가 잠을 자나 해서다. 시계는 정확히 똑딱이며 가고 있다. 혜영은 침대에서 일어나서 커튼을 걷었다. 창 밖은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다. 요즈음은 줄곧 비다.

혜영은 잠옷 채로 부엌에 가서 포코레이터에 커피를 넣고, 세수를 하고 화장대에 앉았다. 간단한 화장이 끝날 때까지 십분 남짓 걸린다. 이 무렵부터 커피가 끓기 시작하여 그 향기가 침실 겸 서재 겸 거실의 이 방까지 은은히 흐르기 시작한다. 커피에는 입이 까다롭기도 하지만, 마시는 것 중에는 커피를 가장 좋아하기 때문에 혜영은 8천 원이나 하는 커트글라스로 된 포코레이터를 쓰다가 아무래도 맛이 신통치 않아, 드립 커피로 해보았다가, 프로판 가스를 사용해서 주전자 같은 포코레이터도 써보곤 했는데 역시 5인용 전기 포코레이터가 가장 나은 것 같아 그것을 쓰고 있다. 물을 여분 있게 붓고, 그라인드 커피를 테이블 스푼으로 꼭 두 숟갈 넣어서 끓였다가, 마실 때에 인스턴트 커피를 티 스푼으로 하나 넣고 크림을 약간 쳐서 은은한 다갈색이 되었을 때 마시면 별미다. 오래 끓이면 많은 물이 졸아서 7온스들이 컵 한잔에 알맞게 부어지는 셈이다. 어떻든 찻물은 끓여질수록 차맛을 발휘한다. 혜영은 밖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셨을 때는 끓이는 법을 물어보는데, 청기와 장수의 욕심들인지 선뜻 가르쳐주는 찻집이 드물고, 그보다도 지금 보아서 혜영이 끓이는 것보다 맛있는 커피를 파는 데는 없다.

차맛은 그 담기는 그릇에도 판이하게 좌우된다. 그래서 혜영은 아침에는 보통 7온스들이 하얗고 투박한, 손잡이도 없는 원통형 잔이고, 낮이나 밤에는 데커레이션이 화려하고 섬세한 데미타스로 하든가, 산뜻한 주홍빛 찻잔을 사용한다. 반드시 주홍빛만일 수 없고, 올리브빛과 은행빛깔 찻잔도 쓰지만, 데미타스 외에는 무늬 있는 잔은 일체 쓰지 않는다. 언제부터 아침저녁으로 찻잔을 구별하게 되었는지 그녀 스스로도 확실치 않으나, 아파트로 온 후부터 그런 습관이 들어버린 것 같다. 투박한 횐 잔은 양도 많이 들지만, 직선적이고 건전한 기분을 풍겨 출근하는 아침 기분에 맞고, 화려하고 섬세한 데미타스는 부드러운 감각을 일게 하고, 산뜻한 무늬 없는 단색 잔은 기분을 맑게 가라앉혀 주어서 취침 전에 마시기에 아주 좋다. 혜영은 백화점이나 시장의 그릇 파는 데를 곧잘 들르는데, 좀 나은 찻잔이 나왔나 보기 위해서다. 외래품 판금 후로는 눈에 드는 것이 없어서 경제적으로 생각할 때 다행이기도 하다. 쓰던 것에 싫증이 나지 않더라도, 좋은 것이 있으면 꼭 사야만 성이 가시기 때문이다.

토스터에 식빵 두 쪽을 넣고, 휴대용 냉장고에서 치즈를 꺼내서 접시에 담고 계란 하나를 반숙하는 사이, 커피의 향기는 한층 훈훈히 혜영을 감싸준다.

도어 하나 사이의 부엌이지만 거기서 먹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녀는 노르스름하게 구워진 빵과 치즈와 커피 포트와 하얀 찻잔을 쟁반에 담아서 거실의 티 테이블에 올려놓고 시계를 보았다. 열시 십분 전이다. 약속한 열시 반까지 충분히 닿아 갈 것 같다.

윤선생이 이별의 선물로 준 연한 물빛 레이스 원피스에 자수정 브로치를 다니까 갑자기 로맨틱해진 것 같다. 불란서제 실크 레이스인데 꽃무늬로 된 데는 손으로 짜서 붙인 거라나 해서 특히 고급이고, 감이 감이니만치 바느질도 일류 양장점에서 일일이 손으로 흠질을 해서 만들어선지 몸에 감기는 맛이 부드럽고 감미롭기까지 하다. 혜영은 거울 속에서 혼자서 웃었다. 로맨틱이 라든가 감미로운 따위 분위기는 그녀와는 거리가 먼 듯해서다.

<포플린 노우타이칼라 블라우스에 타이트 스커트가 내 옷은 내 옷이야.>

혜영은 속으로 말하며, 월급봉투에서 5천 원을 세어 핸드백에 넣었다. 틈나는 대로 서점을 둘러볼 셈이었다. 거울 앞에서 우비를 걸치는데 거울 속의 자신이 딴사람 같다. 옷 하나로 저렇게도 달라지는가 여기며 기분 전환도 될 겸 가끔 이런 옷도 입을 만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언제나 고등학교 선생이라는 노동자 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 우산을 들고 나가려는데 전화가 온다.

혜영이지? 윤선생이 어저께 미국으로 갔다며 ? 나는 올 가을에는 그사람과 결혼이 되 는 줄 알았지!

어머니는 왜 놓쳤느냐는 듯이 사뭇 원통한 말투다.

누가 결혼한다고 했었나요? 어머니두 참. 그보다 어머니 건강은 어떠세요?

어머니는 좋은 기회라 여겼는지,

혈압이 높은데다 허리까지 아프니 암만해도 얼마 못 가겠어.

혜영은 그 말을 묵살하고,

아버지도 오빠도 언니도 아이들도 별일 없지요? 방학했으니 한번 가겠어요.

전화를 끊으려니까,

얘 얘, 김치는 떨어지지 않았니 ?

하며 어머니는 다급하게 소리친다. 혜영이 결혼하도록 반 위협으로 아프다고 푸념은 했으나 그것이 안 통하는 줄 알자 김치 걱정이다. 김치는 떨어졌으나 혜영은,

아직도 멀었어요. 혼자 먹는 걸요.

했다. 혜영은 자립한다면서 늘 부모한테 폐만 끼치는 것이 꺼림칙했다. 아파트세도 아버지가 반을 도와주셨다. 혜영은 그것을 갚기 위해서 아무도 모르게 매월 조금씩 정기예금을 하고 있다. 월급과 영어 개인교수와, 가끔 선배나 대학의 스승이 노나주는 영문 번역 따위를 해서 들어오는 원고료로 생활은 충분히 할 수 있었으나, 김치나, 빨래 같은 것은 어머니가 해다 주고 계신 것이다, 얼마 전부터 빨래는 혜영이 스스로 하고 있지만 김치도 앞으로는 어머니의 신세를 지지 않을 생각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가려는데 또 벨이 울린다. 정희다.

혜영아, 이번은 꼭 해. 돈 많고 사람 착실하면 되잖니 ? 결혼해보아, 내 몸 아껴주고 돈 넉넉한 남편이 제일이다.

정희는 음성은 젊은데 말투는 어머니 같다. 결혼하면 저렇게 지레 늙어버리는 걸까 ?

그래 고마와. 알았어.

정희가 소개한 미스터 김은 오늘 6시에 만날 예정이었다. 맞선 보고 이번이 두 번째 만나는 것인데 완곡히 거절해버릴 생각이다.

혜영은 밖으로 나오자 택시를 잡았다. 합승이나 버스로는 30분까지 닿아 갈 것 같지 않았다. 거의 8년만에 만나는 미스터 박이다. 근간 모 여성과 약혼을 하니까 마지막이라고 여기고 한번만 만나달라고 한다. 약혼하고는 다른 여성과는 만나지 않겠노라고 마음먹은 모양인가 본데 우직하다고 할까 순박하다고 할까. 어떻든 혜영은 그런 미스터 박이 싫지는 않다. 학생 때 혜영을, K호텔의 그릴에서 놀랄 만큼 호화로운 점심을 대접한 일이 있었다. 아무 이유도 아니고, 전날 밤 꿈에 혜영을 보았는데 그녀의 용모나 언행이 하도 마음에 들어 잠을 깨니 마치 이상경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스터 박은 그 후 혜영에게 추근추근히 군 일도 없고, 서로가 여느 때처럼 공부만 하다가 졸업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이라고 만나달라는 데에 조금도 어색한 느낌이 없다.

쏟아지는 비는 멎었으나 하늘은 역시 검게 찌푸리고 있다. 동쪽 어딘가에서 소나기가 내리고 있는지 하늘이 새까맣다. 택시의 미터기가 짤깍 소리를 낸다. 5원이 올랐다.

미스터 박을 만나 요즈음 대인기라는 스파이영화를 보고, 3시에는 경숙의 결혼식에 가고, 거기서 서용을 만나 서점과 테파트에서 쇼핑하고, 6시에는 미스터 김을 만나고------방학 첫날인 어저께부터 줄곧 쉬지를 못하고 있다. 어저께는 윤선생 배웅하러 김포까지 택시로 달렸다. 대나무가 쪼개지는 소리를 내며 비가 무섭게 쏟아졌는데도 비행기는 유연히 떴다. 현대문명이 예까지 왔는가 하고 혜영은 새삼스레 감탄했었다. 몇 년을 꾸준히 만나온 윤선생이었으나, 결국 헤어지는 순간까지 악수 한번 안하고 말았다. 윤선생도 가족들과 따로, 혜영하고만 택시에 타서 비행장까지 갔으니, 그쪽 가족이나 혜영의 어머니가 애인끼리려니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직 애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혜영은 윤선생이 좋았고, 윤선생도 혜영을 좋아하고 있는 줄 아나, 연애라면 적어도 <죽음의 승리>의 입보리타나 죠르지오의 사랑과 같은, 아니면 <백치>의 나스타샤나 로고진의 사랑이 라든가 <부활>의 카츄샤의 사랑 정도가 아니면 연애라고 생각할 수 없는 혜영이었다. 그런 인물들의 연애감정을 아직 그녀는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윤선생이 값진 선물도 가끔 하고 데이트도 늘 혜영과 하고, 혜영이 결혼하는 날은 먹지 못하는 술에 흠뻑 취해 있을 거라는 따위, 어찌 보면 사랑의 고백 같은 말도 하나, 결혼이라는 말을 한 일이 없으니, 혜영이 넘겨짚고 한발을 더 내디딜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친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혜영의 친구들은 콧대가 서로 높으니 무엇이 되겠느냐는 둥, 혜영이 너무 세어서 퇴짜 맞을까보아 남자들이 그녀의 주위를 빙빙 돌고만 만다느니,

제아무리 잘나도 나이가 나인걸 뭐.

팔자가 센 탓이야.

하며 흥도 보고 딱하게 여기기도 했다.

극장 가까이의 다방이어선지 시간이 이른데도 자리가 거의 차 있다. 미스터 박이 가운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학생 때 모습 그대로다. 달라졌다면 살이 좀 더 쪘다 할까.

미스 리, 그냥 그대로세요. 조금도 안 변하셨습니다.

미스터 박이 반가움을 온몸에 감추지 못하고 손을 내밀었다. 혜영도 얼른 악수를 노났다. 그리고 아차 미스터 박은 악수를 청할 만큼 달라졌구나 생각하며 속으로 웃고, 또 그녀 스스로도 윤선생과는 한번도 악수를 안하며 딴사람들과는 예사로 그럴 수 있는 점에 생각이 미쳤다. 역시 윤선생이 좋은가보았다.

1회째인데도 영화관 밖은 관객들로 북적대고 있다. 벌써 두 달 계속하는 것으로 보아 인기가 대단하기는 한 모양이다. 미스터 박이 암표를 사두어서 그들은 곧장 관내로 들어갔다. 계속하는 우천으로 가뜩이나 습기가 많은데, 바람기 하나 없이 밀폐한 극장 안은 냉방장치가 피부에 불쾌했다.

화면은 드릴의 연속으로 죽느냐 죽이느냐의 긴장이 계속되고. 애석하게도 제 2주인공이 악한의 총에 쓰러지는데 주인공은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고 있다. 만화의 연속같아 혜영은 지리해 진다. 좌우를 돌아보니 스크린의 빛을 받은 얼굴들이 모두 눈을 똑바로 뜨고 열중하고 있다.

<나는 왜 열중 못하는지 ? 그래서 연애도 못하나봐.>

혜영는 속으로 생각했다. 영화는 결국 해피 엔드로 끝났다. 해피 엔드는 기분에 부담을 주지 않아 좋다.

극장에서 나오자 그들은 서로 보고 정답게 웃었다. 어느 쪽도 영화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1250분이다.

세 시까지 시간이 있다고 하셨지요? 점심 같이 해주시겠어요?

혜영은 그러겠노라고 하고 우산을 펴들었다.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한길가에 나오자 까만 세단이 그들 앞에 미끄러지며 선다. 운전수가 내리더니 정중히 문을 연다. 미스터 박의 자가용인가 보았다. 혜영에게는 뜻밖이었다.

차가 잔잔히 달리는데 창 밖은 금방 폭우로 변한다. 경숙의 결혼식이니까 3시부터는 비가 멎었으면 하고 혜영은 생각하고 있었다. 웨딩드레스에 빗방울이 떨어지면 어떡하나, 식장도 좋은 데가 아니고 조그만 교회라는데

경숙은 대학은 다르나 중학이 혜영과 같고 같은 학교의 무용선생이었다. 연애 끝에 하는 결혼이 아니고 그냥 해본다고 했다. 살다 싫으면 그만둘 작정이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되뇌이고 있었다. 어떻든 올드 미스 생활이 싫증이 나서 결혼해 보노라고 한다. 신랑감도 역시 남자 고등과의 선생에 불과하고, 교외에 후생주택 하나는 가지고 있을 정도의 재력이며 생김새나 체격, 모두 두루 합쳐서 65점밖에 안 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낙제점을 면하고 겨우 5점을 딴 셈이다. 호화롭게 결혼식을 올릴 처지도 아닐뿐더러 기분도 나지 않아 방학을 이용해서 간단히 식을 해치운다는 이유로, 하필 덥고 비오기 쉬운 한여름 날에 식일을 정한 것이다. 그렇게 성실치 않은 마음으로 무엇하러 결혼하느냐고 정색을 하면 그냥 해본다는 지론으로 그녀는 여전 태연하다.

차가 K호텔 앞을 지났다. 미스터 박이,

저기 기억하세요 ?

한다. 대학생 때 혜영을 꿈에 보았다고 점심 대접을 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터 박의 얼굴에 어린아이 같은 웃음이 퍼졌다. 혜영이도 티없이 기분이 맑아진다.

지금은 은행이 되었답니다. 증축하고… 」

참 그렇다지요.

변화가 빠르지요 ?

그들은 다시 웃고 있었다. 혜영은 잠시 학생 때로 되돌아간 것 같다. 빗발이 조금 조용해졌다. 차가 K호텔 앞에서 멎었다.

요즈음은 여기 그릴의 음식이 제일 좋다고들 해서요.

미스터 박이 한마디 하며 내린다. 신장개업이라고 신문광고에 크게 났던 것을 혜영도 본 일이 있다.

아침에는 토스트, 점심은 학교 근처의 국수, 저녁에는 혜영이 스스로 하는 밥이니까 반찬도 힘들여 만들지 못한다. 그런 입에는 이처럼 맛있는 프라이드 치킨은 처음일 수밖에 없다. 어쩌다가 윤선생의 대접으로 일류 양식점에서 먹은 일은 있으나 그 맛이 이만하려면 어림도 없다. 아마도 기름 따위 재료가 월등 좋은 모양이다. 그래선지 테이블이 거의 메워져 있다.

미스터 박은 무얼 하세요?

혜영이 아까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미스터 박은 거북한 듯이 한참 만에,

취직자리도 없고 해서 아버지 일이나 거들어드리고 있읍니다.

아버지는 무얼 하시는데요 ?

혜영은 공연히 묻는구나 했다. 거기까진 알 필요는 없는 것이다.

A물산입니다.

혜영은 속으로 놀랐으나,

하고 덤덤히 넘겨버렸다. A물산이라면 너무도 유명한 재벌이다. 데이트가 끝나니까 210분이다.

미스 리,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

「…?

약혼자가 대구서 교편을 잡고 있어서요. 약혼선물을 좀 골라주셨으면 합니다.

혜영은 무엇인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러지요.

했다. 다이아몬드반지 등 귀금속을 산다는 것이다. 생각하면 이상할 것은 없다. 친구로서 좋다 그르다 하고 말로 도와주지 못할 것은 없지 않은가. 그들은 혜영의 어머니의 단골로 곧장 가기로 했다. 귀금속은 단골이 아니면 물건이나 가격이나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곳에 다녀보아서 여러 가지를 보는 것이 좋은데 경숙의 결혼식에 닿아 가려면 시간이 없기도 했다.

비는 멎었으나 하늘은 또 쏟아질 것같다.

둘째 번 카운터의 비취빛이 혜영의 눈을 사로잡는다. 그녀는 단골은 아니나 거기서 발을 멈추고 두터운 유리 속을 들여다보았다. 다이아몬드사파이아루비오팔가아넷아레끼산토파즈터마린자수정비취호박진주등속이 인공보석과 함께 갖가지 세팅으로 눈부시다. 얼핏 보기에 찬란하나 자세히 보니까 비취는 깨끗치 않고, 다이아몬드는 세팅이 세련되지 못하고, 대지의 어머니의 마음의 핏방울이라는 사랑의 상징인 루비도 다만 흐릿한 분홍빛이다. 오팔은 여러 가지 빛이 점을 뿌린 듯 얼룩져서 혜영의 취미에는 맞지 않는다.

다음 진열장도 거의 비슷하나 옥가락지가 좋은 것이 있다. 신록빛이다. 아마도 속옥인가보다. 그러나 가락지는 손가락에 맞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비취에 그만한 빛이 있으면 얼마나 좋아?>

혜영은 속으로 말했다. 다음 진열장 쪽으로 옮겨가는데 미스터 박이.

시간 괜찮으신가요?

한다. 혜영은 깜짝 놀라 미스터 박을 돌아다보고 눈을 깜박이다가 한번 미소했다.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것이 우스웠다. 240분이다. 20분 남짓 보석에 열중한 셈이다.

<역시 나는 여자는 여자인가 봐.>

뜀질이 빨라, 아무도 이기지 못하는 여신이 있었는데 어느 날 경주에서 한 가지 아이디어를 짜낸 남신이, 뛰는 길에 황금을 뿌렸더니, 그것을 줍느라고 그 여신은 그만 지고 말았다는 희랍의 신화 이래로 황금에 매혹되지 않는 여자는 없는 모양이었다. 혜영은 다시 속으로 웃었다.

<아름다움에 열중한 것이지, 그 값어치에 열중할 리야 없지그렇게 꼬치꼬치 따지고 있으니까 남들 말대로 남성들이 주위를 돌리고 마는 게지.>

웬만한 일에 열중할 수 없기 때문에 20분이나 마음이 끌린 자신에 대해서 혜영은 그냥 웃고만 넘길 수 없었던지 이러쿵저러쿵 혼잣말을 했다.

단골로 가며 찻잔이 있는 진열장에 곁눈질을 보냈다. 눈에 뜨이는 것이 없다. 단골에는 스퀘어로 된 다이아몬드가 마음에 들었다. 데커레이션이 산뜻하다. 1캐럿 2부다. 38만원이나 한다. 미스터 박도 그것이 좋다고 한다. 다른 집에는 없는 에머랄드가 있다. 8미리쯤의 정사각형 에머랄드에 언저리가 작은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있다. 36만원이다. 에머랄드는 맑은 날의 깊은 바다빛 같다고 하지만 정말로 아름답다. 조금 더 컸으면 좋겠으나 작은 대로 또 깜찍한 맛이 한층 사랑스럽다. 혜영은 그것도 추천하고 싶은데 예산이 어떨까 해서,

저것도 좋지요.

했다. 미스터 박은,

사지요.

한다. 모두 74만원이데 아직도 넉넉한 표정이다. 혜영은 어디까지 가야 손을 드나 싶어 15만 원 짜리 천연진주를 가리켰다.

사지요. 백만 원까지 할랬는데 예산이 조금 넘어도 좋습니다.

<백만 원? 집 한 채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한테는 이런 부자가 안 걸려. 역시 돈과는 인연이 없는 팔자야 !>

그러나 그다지 마음 아픈 일은 아니다.

미스 리 브로치가 참 좋았어요. 자수정으로 세트를 사지요.

미스터 박이 혜영의 우비의 가슴께를 보며 말한다. 아까 점심 먹을 때에 눈여겨 보았던 모양이다. 자수정은 너무 짙은 것은 숫제 검은빛이 나서 나쁘고, 너무 엷은 것은 유리 같다. 고상한 감을 줄 만한 보라빛은 8각으로 커팅한 것이 브로치만도 25천 원이다. 크기는 가로가 3센티. 세로가 1. 5센티 정도이나 은장으로 된 데커레이션이 한복에도 양복에도 어울릴 것 같다. 목걸이는 자수정이 큰 것 작은 것이 모두 아흡 개로 된 것이 9만원이다. 이것은 세팅이 백금이라 비싸다고 한다. 모두 백만 5천 원인데 5천 원을 혜영이 겨우 깎았다.

주인이 반지 셋을 혜영의 손가락에 끼우려고 한다. 사이즈를 맞춰보려는 것이다. 혜영은 얼른 손을 비켰다. 남의 약혼반지를 끼어볼 생각은 없었다.

모두 선물할 거예요. 본인이 와서 고쳐달라면 잘해주세요.

혜영의 말에 주인은,

나는 미스 리가 약혼하신다고? 그런데 언제 국수 먹일려고 그래요?

결혼한 사람은 노처녀에게 이런 말을 할 때에 약간의 우월감을 갖는 모양이었다. 혜영은 웃기만 한다. 처음 몇 번 들었을 때는 불쾌했는데 이제는 밝게 웃어 넘긴다. 결혼해서 파경을 겪은 사람이나, 경제적으로 갖은 고생을 하는 사람도 역시 결혼했다는 사실만으로 우월감이나 안도감 같은 것을 갖는 것을 보면, 혜영은 마치 입학하기 힘든 대학에 시험을 쳐서 불합격한 사람이 응시했다는 사실만으로 우월감이나 안도감을 갖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은 기분이 된다.

쇼핑이 끝나자 그들은 급히 차에 올랐다. 35분 전이다. 차는 번잡한 을지로를 피해서 남산 뒷길로 들어서자 스피드를 낸다. 아무래도 10분 안팎은 늦을 것 같다. 청첩장에 식장 약도가 있어서 M교회는 이내 찾을 수 있었다. 약도 때문에 다른 청첩장처럼 화려하거나 산뜻한 것은 못되나 이렇게 다급할 때는 여간 편리하지 않다. 결국은 역시 빈틈이 없는 여자였다. 경숙은 크리스찬은 아니나 신랑이 이 교회에 몇 번 나온 일이 있다는 이유로 잘되었다고 대뜸 식장으로 정한 것이다.

차에서 내리자 열댓층 가량의 계단 위에 교회 대문이 있었다. 소나기라도 심하게 왔으면 긴 웨딩드레스는 아무래도 젖고 말았을 것이다. 계단은 시멘트로 되어 있으나 흙물방울이 튀지 않을 리가 없다. 경숙은 결혼에 너무 성의가 없어하고 생각하며 혜영은 급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식장 입구에서 사람들이 손에 답례용 상자 비슷한 것을 들고 나오고 있다. 혜영은 얼른 시계를 보았다. 316분이다. 설마 식이 끝난 것은 아니려니 하고 식장으로 달려가니까 식은 이미 끝나고 신랑 신부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혜영은 조금 멍해지는 머리를 가다듬으며 플래시가 터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경숙에게로 갔다.

늦어서 미안하다. 정말 예쁘구나.

하는 말도 어쩐지 건성 공중에 뜬다.

네가 결혼선물로 준 인형,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게 놔두었어.

경숙의 음성은 또랑또랑하다. 혜영이 늦은 것을 책하는 티도 없다.

제 친구 이혜영 선생이예요.

신랑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부끄러워할 것 없어요 !

경숙은 놀리는 투로 신랑에게 눈을 흘긴다. 흘기는 눈매에 애교가 넘치고 있다. 신랑은 결코 경숙이가 말하던 대로 65점 짜리가 아니었다. 늠름한 태도며, 체격이나 생김새나, 아무리 깎아 보아도 80점은 넉넉히 받을 자다. 경숙이 너무나 행복하게 보여 혜영은 속으로 당황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색시라는 게 저렇게도 부끄러움이 없으니 참…」

경숙의 어머니가 한쪽에서 한숨을 쉬고 있다. 경숙은 축하객에게 둘러싸여 이따금씩 소리를 내며 웃고 있다.

합승 정거장까지 걸어나오며 서용은 줄곧 투덜대었다. 신랑 못났다고 그렇게 야단이더니 저보다는 백 배나 낫지 뭐니. 누가 새치기해 갈까봐 그랬나? 목사가 주례를 하는데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아멘>까지 2, 선물교환이 번개처럼 끝나고, 2의 남경자가 피아노 반주까지 모두 3분쯤 축가라고 빽빽거리고 그만이야. 손님도 노인네 이빨 빠진 것처럼 (예배의자가 텅텅 비어 있었던 모양이다) 청하구선저 혼자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있어. 답례도 30원 짜리 세수 수건이야. 빛깔도 시퍼렇고(서용은 어느 사이에 뜯어보았는지 그것까지 알고 있다) 결혼식 비용 안 들이려고 미리부터 신랑이 어떻다는 둥 그냥 결혼해 본다느니 하고 연막을 친 거야. 갠 순 깍쟁이야. 남의 기분은 망쳐놓고 저 혼자만 좋아 야단이야. 그렇게 엉터리로 식을 하려면 사람을 왜 오랜대 ? 서용은 계속 혼자 말하며 흥흥하고 멸시하듯 콧숨까지 내쉰다. 꽤나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매사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서용으로는 당연한 불만일 게다. 그러나 남의 결혼식이 화려치 않다고 불평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혜영은 웨딩드레스까지 세미새크의 외출용 원피스와 다름없이 무릎까지 오게 만들어 입은 경숙을 생각하니, 그 철저한 실제주의에 새삼 놀랐다.

웨딩드레스는 한번 입고 쓸모가 없어서 일생 농 속에 넣어두거나, 그것을 칵테일이나 외출용으로 개조하느라고 따로 비용을 들여야 하는데, 경숙은 그런 것을 계산에 넣어 애초부터 외출용으로 만들어버린 모양이다.

합승이 세종로에 을 때까지 가랑비는 멎었다 뿌렸다 한다. 백화점에 가서 수영복을 사겠다는 서용을 수영복 고르려면 시간이 걸리고 책은 금방 살 테니까 서점 먼저 들르자고 혜영이 우겨서 그들은 서점으로 먼저 가기로 했다.

천장까지 닿은 책장을 세밀히 살펴보아도 싱의 희곡집은 보이지 않았다. 점원더러 물으니까,

싱요? ? ?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싱이 누군지 모르는 모양이다. 그는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카운터로 가더니 장부 같은 것을 들춰보고,

하하, 나갔습니다. 주문하시지요.

한다, 며칠이나 걸릴지 하니까,

글쎄요, 삼 주일 잡으실까요?

한다. 방학 동안에 읽을까 했는데 3주일은 너무 길다. 혜영은 다음 서점으로 갔다. 서용은 혜영을 재촉하듯이 우두커니 서만 있더니 미술부 책장 앞에 서서 화집이랑 미술서적을 들춰보고 있다. 이 집에도 싱의 희곡집은 없다. 혜영은 세종로 일대의 서점은 빠짐없이 들를 양으로 다음 집으로 가려니까. 서용이 콧소리 섞인 음성으로,

!

한다. SKIRA판의 모던 페인팅을 보이며,

전부터 사고 싶었는데 없었거든? 지금 놓치면 또 언제 만날지 몰라.

한다. 혜영이,

사지 그래 ?

하니까,

이걸 사면 수영복은 못 사.

하며 서용은 울상이 된다. 혜영은 이때를 놓칠세라 하고,

수영복 까짓것 사면무엇 하니? 그것도 5천 원은 주어야 하지? 비싼 것 사도 쓸모가 없어. 내년이면 유행이 바뀌지. 게다가 지금처럼 비가 와서는 올해는 바다 구경도 틀렸지 뭐.

그녀는 어떻든 화집을 사게끔 하느라고 말이 길어진다. 수영복보다 화집을 더 평가해서가 아니라 서용은 쇼핑에 까다로와 옷 한가지를 사려면, 그 선택에 망설여서 몇 시간을 소비하고 겨우 하나 고르더라도 백화점 문밖에 채 나오기도 전에 공연히 이걸 샀어, 그것으로 할 것을 ! 하고 후회하는 것은 물론, 당장이 아니면 다음날에라도 기어이 바꾸고 말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바꾸어도 상관없는데 따라갔던 혜영을 증인 겸 빽(?)으로 삼으려는지 꼭 동반해달라고 조르기 때문에 서용이 쇼핑한다면 혜영은 말리느라고 은근히 애를 썼다.

돈 모자라면 빌려주께.

혜영은 이쯤까지 나간다.

, 집에 가면 있어. 그렇지만 오늘 꼭 수영복 살려고 했거든.

오늘만 날이니, 내일 사지 그래. 오늘은 이걸 사.

서용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화집은 3백대 184백원이나 한다. 혜영이 4년 전에 샀을 때는 35백원이었다. 그녀는 아파트의 책장에 가득 꽂힌 화집이며 외서를 머릿속에 그리며,

<나는 부자구나 !>

하고 흐뭇해진다. 서용은 혜영에게서 3천 원을 빌려서 모던 페인팅을 샀다. 사고도 임프레셔니스트니, 차이니즈 페인팅 등의 화집을 들추어보느라고 여념이 없다. 미술전공이니 당연한 일이다. 미스터 김을 만나기까지 한 시간이나 있고, 명동까지 가는 시간을 15분쯤 치더라도 앞으로 40분은 여유가 있었다. 혜영도 서용이 페이지를 넘기는 대로 그림을 보고 있다가 문득 싱의 희곡집 살 것이 생각나서 서용을 재촉해서 다음 서점으로 옮겨갔다. 거기에도 싱 것은 없다. 두 집이나 더 들러서 겨우 찾았으나 천6백 원이나 한다. 두고 보느니보다 읽기 위한 것이니까, 페이퍼백의 포켓북이면 되는데 제본 때문에 공연히 비싸다. 그러나 페이퍼백으로 된 것은 없으니 하는 수없이 그것을 샀다.

갖고 싶었던 것을 구하고 나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혜영은 신간이나 혹시 읽고 싶은 것이 없나 하고 책장을 두루 살펴보았다. 서용이,

, 가자 그만 !

한다. 다섯 시 반이다. 다방에 먼저 갈 생각은 없어 혜영은,

기왕 왔으니 조금 더 보고…」

했다. 서용은 기어코 나가자고 팔을 끈다. 서점 밖으로 나오자 그녀는,

아무래도 수영복은 보아두기 라도 해야겠어.

한다. 따라가자는 말이다.

사지도 않을 걸 보기만 해서 무엇 해.

보고 또 보고 해야 막상 샀을 때 후회가 없어.

혜영은,

사실은 누굴 만나기로 해서…」

했다. 합승이건 버스건 타는 거라는 것은 엄두도 못 내게 붐빈다. 하필 러시아워다. 한 정거장이니 그들은 걷기로 했다.

좋은 사람?

아니 전번에 내 친구가 저희네 시댁 사람이라고 소개했는데…」

맞선 본 거니?

아니 그냥 점심 먹자고 해서 나가니까 그 사람이 있지 않아? 줄곧 나를 관찰하는 걸 보 니까 그쪽에서는 맞선보러 나온 것이겠지.

기분 나쁘다 얘, 이쪽 의사도 안 묻고…」

기분 좋지는 않지만 그런 데까지 기분 쓸 것은 없을 것같아.

, 애초부터 딱지 놓았구나…」

그런 셈인데 오늘 또 우물쩍하다가 시간약속을 해버렸어. 그만두고 너나 따라가야겠다.

싫어. 싫어, 가보아. 두 번 보면 좋아지는 수도 있고 또 남자들을 많이 알아두면 쓸모가 있는 거다.

혜영은 서용의 말에 웃었다.

웃을 게 아니야, 나도 이년 전에 맞선된 사람이 있었는데, 글쎄 내 동생 유학갈 때 잘 써 먹었어. 요는 거절할 때 매끈하게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웬수 산다. 그러니까 약속했으면 가야 해.

이 사람은 유학할 때 쓸모 있게 보이지는 않아.

얘는 꼭 유학할 때뿐이니? 직업이 무언데 ?

제지공장 사장이래. 나이도 젊은데 말야.

잘됐어. 취직 부탁하기 알맞지 않니?…」

누구 취직?

얘가 왜 이렇게 맥혔어. 그래 아무나 네가 보아줄 만한 사람 없니? 친척이나 친구의 남 편이나…」

혜영은 또 한번 웃었다. 서용이 자그마한 데까지 주의가 가는 것이 참밀 여자다와 귀엽고, 당장 누구의 취직 부탁이라도 하듯이 심각해지는 말투가 우습다. 소공동 가까이 오니 혜영은 조금 피로해진다. 오버슈즈를 신어 발이 무겁고, 우산도 들은 데다가 아침부터 계속 서 있은 셈이니까 그럴 법도 하다. 마음도 안 내키는데 몸까지 피로하니 미스터 김을 만날 생각이 점점 희박해져 감을 어쩔 수가 없다.

네 말 참 옳은데 어떻게 하면 매끈하게 거절하는 거냐?

유학 간다고 해. 나는 그림 그리니까 빠리로 가게 되었다고 말하지.

서용은 까르르 웃었다. 그 말을 했을 때의 상대편의 표정이 생각나는 모양이다.

대개는 두말도 않고 물러서지만 기다리겠다는 사람도 있어.

「…」

그런 사람 치고 반년이 못 가서 결혼하더라 얘!

서용은 아랫입술을 오므라뜨리며 멸시하듯이 흥 ! 하고 콧숨을 내쉰다. 서용은 쓸모가 있을 듯하면 일단 맞선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맞벌이해야 할 자리는 싫고(고추장된장 속에 손 집어넣는 것이 싫어서 직장을 갖는다면 모르되 결혼해서까지 직업을 갖는 것은 남보기에 창피하고, 제가 번 돈을 제공할 만큼 좋은 남자도 없으니 이런 자리는 싫고) 살기 넉넉해도, 형제가 많아서 이리저리 신경을 쓸 자리는 절대로 싫고, 그렇다고 어디의 말뼈다귄지 모르게 교육 없는 집 아들은 싫고……서용은 싫은 조건만 내세운다.

혼자 사는 게 제일 속 편해. 가사선생 보아. 아이 가져서 배가 동산만 해 가지고……얼굴에는 기미가 꽉 끼고 남편은 쥐꼬리만치 버는 주제에 고기 반찬 아니면 밥 안 먹는다지?

혜영도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런 처지라면 왜 결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가사선생은 결혼하고 2년 동안 새로 만든 옷이라고는 양단저고리 하나밖에 없다. 많지도 않은 월급은 살림살이에 몽땅 들어갔다. 남편은 술 잘 마시고 외박도 잦다고 한다. 그녀는 학교에서 일하고 집에 가서는 빨래하고 부엌일 돌보느라 종일 쉴 사이가 없었다. 그만한 희생도 아깝지 않을 만큼 남편을 사랑하느냐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그런데도 가끔 혜영이를 보고, 어서 결혼해야지 나이 먹는다고 제법 동정하는 말투다. 서용은 그럴 때마다,

귀 코가 다 맥혀 !

하고 그녀 뒤에서 야단스럽게 제 가슴을 두들겼다. 혜영도 가사선생보다는,

결혼해서 좋은 것은, 비 오고 바람 불 때 혼자 자면 무서운데 옆에 누가 자니까 아무렇 지도 않거든. 문소리가 나도 전에는 도둑이나 아닌가 하고 떨었는데 인제는 쿨쿨 자지 뭐. 좋은 것은 그것뿐이야.

하고 말하는 음악선생이 훨씬 좋았다.

혜영은 결혼 무용론자도 아치고 서용처럼 조건이 나빠 안 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쩐지 결혼할 염이 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친구는 윤선생이 마음을 사로잡고 있어서 그렇다고 하나 혜영은 그것을 수긍할 수는 없었다. 결혼하고 싶을 만큼 좋은 남성을 아직 못 만났을 뿐이다. 윤선생은 보고 있으면 그 진실성이나 젠틀맨십이나 지성이나 취미나 외양이나 나무랄 데가 없어 좋았다. 그러나 헤어지고 나면 그녀의 마음에 꽉 채워지지 못한 것같은 아쉬움이 있었다. 젠틀맨십을 지키느라고 윤선생이 적극성이 없는 탓인지도 모른다.

미도파까지 오자 혜영은,

너하고 수영복 보기로 했다.

하고 결심한 듯이 말했다. 서용이 고개를 쌀쌀 흔들며,

글쎄 내 말 들어. 매끈하게 안 하면 웬수 산다. 가서 미국 가게 되었다고 은근히 말해. 글쎄 내 말대로 하라니까.

한다.

정말 만나고 싶지 않아.

서용은,

내 말대로 안하면 수영복 나도 안 볼 테다.

하고 화를 낸다. 혜영은 고소하며 서용과 헤어져서 찻길을 건너갔다.

명동 입구로 발을 옮기다가 그녀는 갑자기 오른편으로 휙 돌아섰다. 아파트로 가는 합승을 타려는 것이다. 아무래도 미스터 심을 만날 기분이 나지 않았다. 합승은 오는 것마다 만원이고 어쩌다가 자리 하나쯤 있으면 기다리던 이들이 왈칵 몰려가기 때문에 도저히 탈 엄두도 낼 수 없다. 그녀는 천천히 기다릴 양으로 아예 멍하니 서 있었다.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닐우산 파는 아이들이 소리를 치며 다니고, 사람들이 우산을 받으니까 정거장은 한층 붐비는 것 같다. 합승은 잇달아 와서 멎었다 가고, 어떤 것은 멎지도 않고 그냥 질주한다. 혜영은,

미스 리!

하고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1주일 전에 다방에서 우연히 만난 최학구씨다. 반짝이는 그의 눈에 반가움이 불길처럼 내솟고 있다. 그는 가까운 과자점으로 그녀를 덮어놓고 밀어 넣는다. 자리에 앉자 아이스크림을 시키고,

미스 리, 얼마나 만날려고 애썼는지요 !

하고 한숨을 내쉰다.

동창회 명부를 보고 학교에 나가시는 줄 알았지요. 학교에 전화를 하니 할 때마다 수업 중이고, 나가시고할수없어서 엽서를 내었는데 안 받으셨습니까?

받기는 했으나 혜영은 그가 지정한 날짜를 깜빡 잊고 있었다. 학구는 혜영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아랑>에서 두 시간을 기다려도 안 오셔서 그저께는 학교로 갔더니 방학이라고 하지 않아요? 주소록을 보아서 겨우 전화번호를 알았는데 어저께 오전에 아파트로 갔더니 외출중 이시고, 밤에는 거기 전화가 고장이고, 오늘은 아침부터 전화를 했는데 내리 통화중이에요. 그 아파트 교환대는 어떻게 된 모양이지요?

학구는 단숨에 그간에 지낸 일을 쏟아놓더니 전화 얘기를 하며 사뭇 화를 낸다. 1주일 전에 서용이와 저녁을 먹고 다방에서 차를 마시는데 학구가 불쑥 인사를 건네어왔었다. 과는 다르나 대학의 2년 선배였다. 그의 훌륭한 체격이나 남성다운 생김새가 남달리 눈에 뜨이는 타입이었다. 콤파스가 긴 탓도 있겠으나 허리를 조금 굽혀 성큼성큼 걷는 양이 마치 꼬랑이라도 잡을 듯이 공격적인 인상을 주었다. 학교 때는 한번도 말을 노나본 일이 없으니까 혜영과는 초면인 셈인데도 그는 졸업하자 미국에 유학갔었다는 등 박사학위를 못 땄으나 여기서 이태쯤 지내다가 다시 가서 학위논문을 낼 생각이라느니, 지금은 모교에서 시간강사로 있다는 말까지 했다. 그리고 혜영의 이름을 확인하고 친구들과 같이 왔으니 하는 수없이 그냥 간다고 하며 아무도 붙들지도 않는데도 혼자 미안한 얼굴로 일어섰다. 문학강의를 같이 들은 일이 더러 있어서 혜영의 얼굴만은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폭포처럼 일초의 여유도 없이 쏟아져 나오던 말이 잠시 뚝 끊어졌다. 의자를 좀더 테이블 가까이로 당기기 위해서였다.

미스 리 ! 지금부터 저와 저녁식사를 같이하시고, 조용한 데서 쥬스라도 마시고, 그리고 아파트로 가십시오. 괜찮지요?

학구는 혜영이 대답할 사이도 주지 않고,

!

하며 혜영을 앞세운다. 그녀는 거절할 겨를도 없이 그의 앞을 걸어 과자점을 나왔다.

빗줄기가 아까보다 세차졌다. 645분이다.

양식으로 하실까요?

혜영은 점심에 양식을 먹었기 때문에,

중국요리가 좋아요.

했다.

잘됐습니다. 차이나호텔이라는 데에 가보셨습니까?

말만 들었어요.

그러면 거기 한번 가보십시다 !

그는 빗속을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차이나호텔은 합승으로 한 정거장 거리에 있었고 택시나 합승을 탈 것은 애초 염도 낼 수 없는 러시아워였다.

음식은 특별히 맛있지는 않았으나 그릇이 다른 중국요리점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사면에 선신이 그려진 중국의 가마 모양의 조그만 전기스탠드가 테이블 가운데 놓여 있을 뿐 아무런 조명도 없어서 사방이 어둡다. 그 희미한 불빛 속에서도 학구의 눈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다.

저는 이렇게 어두운 데서 밥 먹는 것 질색입니다.

학구가 화난 듯이 큰 소리로 성급히 말한다.

차나 술을 마시는 것은 기분이니까 기분 내느라고 어두워도 좋으나 밥 먹는데 깜깜하니 소화가 안돼요.

혜영은 동감이었으나 잠자코 있었다. 찬성하면 기운이 나서 더욱 투덜댈 것 같고, 반대하면 그의 설에 동의하게끔 어디까지나 설득할 기세여서다. 소화가 안 된다고 하면서도 학구는 혜영보다 더 맛있게 먹고 있다.

그릴에서 나오자 그들은 8층의 스카이라운지로 갔다. 창 밖은 폭우가 뽀얗게 쏟아지고 있다. 어두운 불빛 속에서 테이블마다 오손 도손 얘기소리가 났다. 혜영은 <엔젤스키스>를 시키고, 학구는 <맨해턴>을 주문했다. 연분홍에 우유 빛을 섞은 듯한 아름다운 <엔젤스키스>가 이내 날라져 왔다. 그들은 서로의 칵테일을 한 모금씩 마셨다.

미스 리 !

학구가 힘찬 저음으로 한번 부르고 잠시 침묵한다. 그 침묵은 앞으로 도도히 흘러나올 구변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미스 리!

학구는 한번 더 혜영을 부르자 잇달아 굵직한 음성을 쏟아놓는다.

저와 결혼해주세요. 저는 미혼이고, 연애 같은 것도 진짜로 해본 일이 없습니다. 미국 있을 때 애인을 구하느라고 혈안이 되었지만 허탕치고 귀국해서도 애써 돌아다녔지만 없었어요. 중매결혼이라고 해서 색시의 사진도 열장이 넘는데 마음에 안 들어요. 마음에도 없는 색시를 만나보아 무엇하겠어요? 미스 리를 보았을 때 저는 펄쩍 뛰고 싶을 만치 좋았습니 다. 미스 리, 저는 미스 리의 환경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전에 결혼한 일이 있으시더라도 현재 결혼만 안 하시고 계시다면 저는 좋습니다. 저의 집은 돈은 없고, 아버지는 Y은행의 전무고 어머니가 계시고, 시집간 누이가 하나, 대학 다니는 남동생이 하나 있어요. 부자는 아니지만 우리가 결혼하면 살 집은 가회동에 벌써 사두었습니다. 지금 전세 놓아 있지요. 제가 너무 수선을 피워 어리둥절하시겠지만 서로의 부모님께서 찾아보시게 해도 좋고.

학구의 커다란 두 손이 갑자기 테이블 위를 미끄러져 왔다. 마치 혜영의 손을 꽉 움켜쥘 것 같다. 그러나 그 손은 도중에서 급정거를 하고 <맨해턴>의 글라스를 왈칵 잡아 쥔다. 누군가가 피아노로 <쿨재즈>를 조용히 치고 있다. 이렇게 유치할이만치 솔직한 구혼은 미국의 <서부의 사나이>()인지 ? 설마! 혜영의 얼굴이 뜨거워지더니 그 열기가 차차로 전신에 퍼진다. 미약하나마 알콜이 들어간 탓도 있겠으나 학구의 정력적인 음성과 꾸밈없이 구혼하는 말이 혜영의 몸 속에 질풍처럼 내닫고 있기 때문이리라.

<, 이 사람이 좋아지겠어 !>

하고 혜영은 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종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가,

최선생님, 이제 가시지요. 저는 좀 피로합니다.

했다. 910분이다.

내일 또 만나주시지요?

하며 학구는 일어설 기색도 안 보인다.

피로하지 않으면 나오겠어요.

혜영은 일어섰다. 학구도 하는 수없이 선다.

택시를 잡는 데 20분이나 걸렸다. 세찬 빗발이 창유리를 마구 후려치는 속을 차는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 참 재수가 좋았어요. 한길에서 우연히 만날 줄이야 ! 하하하.

학구는 큰 소리로 말하고 정말 즐거운 듯이 거리낌없이 웃는다. 학구는 대체로 망설임이라는 것은 없는 사람 같았다. 떼를 쓰지 않으면 명령조다. 대학 교단에서 의젓이 강의를 하고 있는 모습은 아무래도 상상하기 힘들다.

차는 순식간에 아파트에 다다랐다. 학구가 먼저 껑충 뛰어내렸다.

미스 리, 저를 거절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좋아서 죽겠는걸요 !그것을 말했을 뿐입니다. 내일 또 만나지요. 밤에라도 전화하겠습니다. !

그는 큼직한 손을 벌리며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내놓는 혜영의 손을 으스러지도록 쥐었다 놓고, 기다리는 택시로 뛰어올랐다.

방에 들어가자 혜영은 커튼을 쳤다. 포코레이터에 커피를 넣고, 목욕실에 가서 샤워를 했다. 수도물이 미지근해서 무더운 날씨에 몸 씻기 꼭 알맞다. 화장대에 앉아 로션을 바르고 있을 무렵 커피의 향기는 점점 짙어지며 온 방을 감돈다. 혜영은 쟁반에 올리브빛 찻잔과 커피 포트와 크림 포트를 놓아 티테이블에 가져왔다. 그녀는 싱의 회곡집을 가방에서 꺼내어 겉장을 열다가 도로 책상에 갖다놓고, 티 테이블로 와서 커피를 찻잔에 따르고 크림을 쳤다. 커피는 향기로운 김이 섬세한 곡선을 그리며 천천이 퍼져 올라간다. 방안은 한없이 고요하다. 커튼 밖의 빗소리가 한층 기분을 고요하게 가라앉힌다.

<책은 나중에 보자.>

하고 그녀는 커피의 향기 속에서 생각한다. 그녀에게는 이 시간이 아무도 무엇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결혼한 여성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절대 그녀만의 시간이다. 머릿속에 티만한 잡념도 없다.

커피는 뜨거워서 아직 마실 수 없었다. 그녀는 커피의 향기를 맡으며 그 김이 좌우로 유유히 흩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1010분이다. 갑자기 전화의 벨이 울린다. 한 번 두 번 세 번열한 번열다섯 번. 잠시 멎었다. 최학구씬가? 혜영은 얼핏 생각하며 일어서서 수화기를 얼른 들어 책상 위에 살그머니 놓았다. 이제 다시는 벨이 울리지 못할 것이었다. 그것이 누구에게서 걸려오는 전화이건 그녀는 이 행복한 시간을 침범 당하기는 싫었다.

티 테이블로 와서 혜영은 올리브빛 찻잔을 들어 커피를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한말숙(韓末淑)

 

1931년 생. 소설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1957년 현대문학에 신화의 단애로 추천을 완료했다. 1960년 소설집 신화의 단애를 발간했고 1964년 흔적으로 현대문학 신인상을 수상했다. 1968년 신과의 약속으로 제 1회 창작문학상을 수상하고 1977년 소설집 [잃어버린 머플러]를 발간했다. 1986[모색시대]를 발간한 뒤 이후 작품활동을 쉬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어떤 죽음> <노파와 고양이> <장마> <결혼전야> 등이 있다.

 

윤리적인 문제가 실존적인 존재와 생존의 문제에 앞설수 없다는 전후 소설의 전형적인 세계관을 담고 있는 작품을 주로 썼다. 작품세계의 특징은 여성이 사회적으로 억압된 상황을 일탈하는 방식이 윤리적으로 자유분방한 여성상의 창조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성과 성 윤리라는 일차적인 도덕이 가부장적인 억압의 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음을 직시하는 점이 장점이지만 반면 성적이고 관능적인 것을 원초적인 자유로움의 근원으로 강조하는 점에서 사회성과 역사성을 상실할 소지가 있다는 단점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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