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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단편소설2

93. 회선

by 자한형 2022.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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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선(回船) -한수산

 

3년 전 여행길에서였다. 남해(南海)에서 밤배를 함께 탔던 남자

가 있었다. 그는 그날 저녁, 머리를 감고 양말을 곱게 빨아 널고 잠을 잤다. 고리고 다음날 그는 투신(投身)했다.

 

1

 

한눈으로는 다 바라볼 수 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어두운 하늘 아래 어두운 안개 그리고 어두운 수면이었다. 그것은 너무 넓고 너무 짙고 그리고 너무 깊었다. 나는 비로소 남루해지는 것 같았다.

방파제 이쪽의 바다는 암갈색이었다. 거기에는 푸른빛이 없었다. 부두가 물 위에 떠서 흘러가는 것처럼 멀어지고 있었다. 배는 천천히 먼 바다로 선수(船首)를 돌렸다. 나는 갑판 위에 서서 멀어지는 땅을 바라보았다. 내 눈이 바라보고 있는 육지의 소리들은 아직도 귀에 가득했다.

청도와 나 사이에 낀 안개 속으로 다시 빗발이 뿌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깨가 젖는 것을 느꼈다. 내 머리칼과 어깨가 조금씩 무거워졌다.

다섯 시에 출항하는 아라도행 승선권을 소지하신 분은 차례차례 승선하시기 바랍니다. 웅웅거리던 대합실의 소음이 배의 기관소리와 함께 머릿속에서 아직도 여음을 남기고 있었다. 여객터미널의 대합실 천정은 드높았다. 모든 소리들이 거기 부딪쳐 웅웅거려서 천정은 하나의 공명기 역할을 하고 있었다. 먹을 것을 사던 아이들. 옆 의자에 앓은 사람의 껌 씹던소리, 한 아이를 업은 채 서 있는 또 한 아이에게 무어라 계속 욕지거리를 해대고 있던 아낙네, 동료를 떠나보내기 위해 전송을 나온 미장원 아가씨의 슬리퍼 소리. 차 타는 법을 되풀이해 들려주고 있는 아들과 어머니, 택시는 비싸니께 버스를 타부러, 요금은 육백 원인디 고놈만 완전히 타고 가.

귀를 가득히 메워오는 소음만큼이나 대합실 안에는 많은 것을 써 붙여 놓고 있었다. 휴게실. 매점. 토산품점. 일반점. 수하물 보관소. 신사 화장실. 숙녀 화장실. 여행장병 안내소. 헌병부두파견대. 자수하여 광명찾자. 청도항 종합안내소. 교통안내, 숙박안내. 선박안내. 관광안내. 승선자외 출입금지. 농무기 여객선 안전운항 특별강조기간. (청도) 관광안내도. 그 많은 글자와 소음이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었다. 부두에 나와 선 사람들이 우산을 펴드는 것이 바라보였다.

유리그릇에 넣은 정교한 무늬가 비쳐 보이는 것 같은 물결 위로 아득히 빗방울이 떨어졌다. 터미널 벽에 내 걸린 현수막에선, -안전수송 봉사교통, 사해로 약진하는 해운항만-이라는 푸른 글자가 비에 젖고 있었다. 청도항 입항창고 뒤쪽에서 무엇을 태우는지 연기가 피어올랐다. 대합실에서의 오랜 기다림이 내 귀에 길들여 놓은 소음을 깨면서 길게 기적이 울렸다,

부두 왼편으로 섬이 바라보였다. 그것은 모자를 거꾸로 띄워놓은 것 같은 작은 섬이었다. 바다위로 솟아오른 섬의 밑 부분은 유난히 흰빛을 띈 돌이 단애(斷崖)를 이루고 있었고 그 위에 나무들이 천막처럼 뒤덮여 있었다. 내가 배가 떠나기를 기다리며 청도에서 바라본 섬이었다. 안개가 그 섬의 윗부분에 닻줄처럼 내려와 있는 것이 바라보였다. 갑판에 나와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선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청도항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고 갑판에 나와 선 사람들의 숫자도 줄어들었다. 멀어져 가는 청도를 바라보면서 비로소 나는 용서받아야 할 것이 그 부두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머물 곳이 아니며 나에게는 떠나갈 곳이 있다는 것 그 하나 때문에 나는 얼마나 청도에게 용서받아야 할 짓들을 했던가. 내가 청도를 미워해야 할 아무 까닭도 청도에는 없었다. 그것은 다만 내 결정의 탓이었고 여로 때문이었다, 내가 청도까지에서 그만 이 여행을 끝내기로 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은밀하게 화합할 수 있었으리라.

이 여름에 나는 저울대 위에 아무 것도 올려놓지 않았다. 한쪽에 내가 앉고 다른 한쪽에 여름이 올라앉았을 때 저울의 눈금은 텅 비어 있는 시간의 무료를 가리키며 멈춰 있었다. 우리는 수평을 유지했고, 나에게는 이 여름에 해야 할 아무런 의무가 없었다.

그 여름은 나에게 있어 뱀의 허리와 같았다. 뱀에게서 허리를 찾는다면 어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숫자에는 선험적으로 약한 내 친구는,

"머리와 꼬리를 뺀 부분이 허리가 아닐까?”

라고 말했지만. 그렇다면 어디까지를 꼬리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막연한 것이었다. 그는 입장료가 삼백 칠십 원인 티켓을 두 장 살 때 아예 천 원 짜리를 내고 거스름돈의 계산을 포기해 버리는 친구였기에 그렇게 말했다 해도, 대답은 나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때 나에게 찾아와 있던 여름도 마찬가지였다. 길고 지루하고 또한 무료했다. 대학 이 학년의 여름방학이라는 게 뱀의 허리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느새 적당하다는 말의 그 편함에 많이 길들여져 있었고, 내 나이에 찾아올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새롭다라는 수식어가 필요한 것은 이내 끝났다고 믿었다. 우리 또래들의 연애에는 많이 지쳐 있었고, 무엇이 되어 보기 위해 목표를 만든다는 것에도 기진해 있었다.

나는 내 여름 방학이, 어디서부터가 허리인지 알 수 없는 나날이 시작되면서 매일 누워서 보냈다. 아침에는 늦잠을 잤고, 낮에는 목욕탕 욕조에 찬물을 받아놓고 한 두 번 거기 들어가 누워 있는 것으로 소일했다,

() 속 같은 그 욕조의 적요 속에서 나는 살갗에 와 닿는 차가운 물의 감촉을 즐겼다. 그리고 저녁에는 모기장 속에서 덧없이 뒤척였다. 모든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끝나고, 라디오의 심야방송까지 끝나면,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 방송이 단 한 소절의 음악도 방송하는 일이 없이 떠들어대기 만하는 소리를 켜놓은 채 잠이 들었다. 내 안에는 그 어떤 햇빛이나 바람도, 떠나고 돌아오는 것도, 침묵의 두꺼운 껍질에 감싸인 씨앗도, 향기롭게 익어가며 여름 햇빛 속에 물이 들 과일도 없었다.

나는 아마 일주일쯤 그 달력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달이 바뀌며, 지난달을 찢어내고 난 달력에는 어떤 섬의 바닷가 풍경 사진이 실려 있었다. 검은 암벽이 솟아 있고, 풍란(風蘭)이 향기를 뿜으며 무리 지어 피어있고, 바닷물이 부서지고 있는 절벽 밑에서부터 새들이 날아오르고 있는 사진이었다. 나는 그 사진이 통속적이라는 것 이외의 아무런 느낌도 없이 그것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갔다.

그 사진 속의 풍경은, 조잡스런 액자에 넣어져 어느 중국음식점 벽에 파리똥이 닥지닥지 붙어서 걸려 있거나, 김장철보다도 바르게 거리에 나타나 건물 벽에 새해 달력을 늘어놓고 있는 달력장수의 노점에서나, 술회사의 상표가 붙은 관광안내 포스터 같은 데서 너무도 많이 보아온 풍경이었다. 며칠은 그랬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달력 속의 풍경 속에서 들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등에서 흐르는 땀이 눅눅하게 내 셔츠를 적시고 있던 오후였다. 무어라 이름할 수 없는 새의 울음소리가 그 달력의 풍경 속에서 들려왔고, 파도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그리고 나는 풍란의 향기를 전해 오는 바람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들은 차츰 나의 긴 여름의 허리를 일으켜 게우고 꿈틀거리게 했다. 나는 일어나서 달력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사진 밑에 아주 작은 활자로 찍혀진 설명문을 보았다. 서남단의 섬, 아라도 그때 나는 달력 속의 섬이 파도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새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서점에서 찾아본 (한국의 비경)이나 (어디든지 떠납니다, 여행가이드)같은 어떤 책에도 (아라도)는 나와 있지 않았다. 어디에서 기차를 타고, 어디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지는 내 수첩 맨 뒤에 붙어 있는 지도 중(남부지방)이라고 씌어진 한 페이지밖에는 없었다. 굵은 줄로 활처럼 휘어진 뱃길 하나가 (청도)에서 그 섬을 연결해 주고 있었다.

훗날에 가서야 안 일이지만, 그때의 내 출발이 고립을 통해서 비로소 사람들은 자유워진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임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어떻게 알 수가 있었으랴. 섬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음으로 해서, 그 단절과 고립을 통해서 원초적인 자유를 획득한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나는 떠났다. 내가 준비한 륙색에는 배와 항해에 관한 책 두 권이 넣어져 있었다. 배도 바다도 섬도 처음인 나는 범어로 된 뜻모를 불경을 읽듯이 그것들을 읽으며 밤 기차에 올랐다. 침대칸의 아래층에 꼬부리고 누워서, 나는 차창의 블라인드를 한 뼘쯤 올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차갑게 빛나는 선로와 플랫폼의 기둥들과 만월이 가까운 달빛이 비쳐 주고 있는 야산을 나는 바라보았다. 이상한 행복이 흰빛의 당구공처럼 굴러와 나를 때리고 지나가곤 했다.

차창 밖의 어떤 역이나 마을들도 내가 내려야 할 곳이 아니라는 것이 나는 기뻤다. 밤에는 멀리 갈수록 좋다-,고 나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기차가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어떤 도시에 나를 내려놓기를 바라면서 잠이 들었다. 내가 잠에서 깨었을 때 밖은 밝아 있었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아라도)에 대해 물은 것은 기차를 내려 버스로 갈아타야 했던 역에서였다. 역 안내원은 밖의 날씨만큼이나 습기진 얼굴을 하면서 대뜸 물었다.

", 거 뭐냐. 소똥을 가지고 술을 땐다는 그 섬 말이오?"

"글쎄요.”

"청도까지 가 보쇼. 거기서 배가 있다는 것 같든데. 청도 가는 기차는 없수.”

(청도)엘 가는 기차가 없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청도)는 자욱한 안개와 빗발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담배 한 대를 피워 물면서 나는 비를 피해 안으로 들어섰다. 갑판에는 이제 빗물이 흐르고 있었다.

"불을 좀 빌릴까요?"

그 소리에 옆을 돌아볼 때까지 나는 거기 누군가가 서 있는 줄 몰랐었다. 턱에 수염이 가득한 남자는 마흔이 훨씬 넘어 보였다. 성냥이나 라이터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게 당연해 뵈는 얼굴의 남자였다. 나는 내가 피우던 꽁초가 다 된 담배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나보다 키가 컸다.

그가 담배를 나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아라도)까지 가죠?"

".”

나는 내 담배를 손가락으로 튕겨서 갑판 저 너머 바다로 버렸다.

"선생님도 (아라도)까지 가십니까?"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비로소 나는 그 남자도 (아라도)가 초행일 것이라는 생가을 했다. 우리는 (청도)를 떠나 (아라도)까지 갈 뿐 어디에도 기항(촌쟌)하지 않는 배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물었다.

"가긴 갈까요?”

"가야지요.”

"그쪽이 태풍권이라지 않아요.”

"벗어났겠죠. 벗어났으니까 이 배가 출항한 거 아뇨.”

우리는 처음 찾아가는 사람들인데도 하나는 너무 조심스러웠고 하나는 너무 태연했다. 이제는 안개 속으로 사라져간 글씨, (농무기 여객선 안전운항 특별 강조기간)이라고 써 있던 현수막을 떠올리며 나는 중얼거렸다.

"안개는 점점 심해지는군요. 바다로 나올수록,,,,,,"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는 이제 선실을 찾아들어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나는 물었다.

"혹시 아시는가 모르겠습니다.”

"?”

"(청도) 말입니다. 청도는 분명 섬이 아닌데도 왜 섬 도()자가 지명(地名)에 붙어 있을까요?

"옛날엔 섬이었는지도 모르죠.”

"옛날엔.”

"어디서 떠다니다가 육지에 와 붙어버렸는지 누가 알겠소.”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웃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국회의원 입후보자의 선거벽보 사진처럼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나는 옷을 수가 없었다. 그는 (청도)가 어딘가를 떠다니다가 육지에 붙어버렸다고 정말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바다를 등지고 식당으로 가 늦은 점심을 먹었다.

 

2

 

선실 통로의 벽은 힁색이었다. 나는 내 방으로 가기 위해 승선권을 꺼내 보았다. 2등 선실. A-3이 내 방 번호였다. 여객 터미널의 매표원은 그것이 일곱 사람이 함께 자는 방이라고 가르쳐 주었었다.

계단을 내려가 선실 쪽으로 돌아섰을 때 나는 통로 저쪽을 메우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좁은 통로를 막아서서 무어라 큰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흰옷을 입은 안내원이 보였고, 그 옆에 선 땅딸막한 키의 사내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말이 그 말 아니여. 아무리 그래도 이럴 수는 없잖냐 말여. 젊은 양반도 생각 좀 해봐.”

"그러니까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기다리는 거야 뭐가 어렵나.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건지 그게 문제지.”

"손님, 그럼 손님께서는 이게 무슨 특등실이라도 되는 줄 알고 타셨단 말입니까? 일곱 사람이 타는 덴 줄 아셨을 거 아녜요.”

"알았지, 알았지만 이거야 어디 눕고 뻗고가 있어야 말이지. 내 마누라를 좀 보라구, 자네 눈엔 내 마누라 몸이 보이지도 많는가 말여.”

안내원은 옆의 여자를 보지 않았다. 나는 두 사람 저쪽에 서 있는 여자를 보기 위해 고개를 기웃거렸다. 거기에는, 혼자 걷기에도 통로가 비좁을 정도로 배가 부른 아낙네가 벽을 짚고 서 있었다.

A-3호실을 찾아갔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사내의 불평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A-3호길 앞에 가 서자 흰옷의 안내원은 나에게 물었다

"뭡니까?”

나는 주머니에서 승선권을 꺼내 보였다.

"A-3, 이리로 들어가세요.”

나는 그가 문을 열어주는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그 자기에 멈춰 섰다. 안에는 이미 다른 승객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양말 꼬랑내가 훅 코를 스쳐갔다. 어느새 베개를 베고 길게 누운 사람이 하나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이 방안에 앉아 있다가 나를 쳐다보았다. 모두가 남자였다. 나는 안으로 들어서며 선반에 배낭부터 얹었다, 같은 선실의 동행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땅딸막한 사내에게 안내원이 물었다.

"김천득씨가 손님 이세요?”

"그럼 나지. 그게 내 푠데 천득이가 나 말고 누구겠어.”

"알았습니다. 그럼, 아저씨는 여기 3호실에 그냥 계시고 아주머닌 날 따라오세요.”

"어쩔려구?”

김천득이라는 사내의 목소리가 더 높아지며 물었다

"아주머닌 여자 분들만 있는 방으로 바꿔드릴 테니까 그렇게 아십쇼.”

"아니 이봐.”

김씨가 안내원의 횐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나는 요방에서 자고 내 마누란 다른 방으로 간다 그 말이여, 얘간즉슨?”

". 하는 수 없잖습니까."

"어따, 뭔 놈의 배가 요 모양이란다냐. 아니 그러니까, 배는 같은 밴데도 따로 떨어져서 가라 그 말이구먼. 허어 참, 배도 배나름이구먼. 부부 생이별시키는 배도 다 있었네 그랴.”

"아유 그래유. 당신은 그냥 거기 기슈. 난 여자들만 있는 데로 갈 테닝까.”

"알았어, 알었다구 "

좁은 방에, 그것도 다들 남자뿐인 방에 만삭의 아내를 눕힐 수 없어서 김씨가 선원을 잡고 사정을 했던가 보았다. 안내원을 따라 맨 끝 쪽의 선실로 가는 아내를 바라보며 김씨가 혀를 찼다.

"아니, 저 사람 저거 멀미약을 먹기는 했다만 고생할 건 번한 이친데--- 하아따 그것 참 일 돼가는 거 정말 궂네 궂어.”

멀건히 아내의 뒤뚱거리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김씨가 소리쳤다.

"이봐. 순덕 엄마. 이건 자네가 가져가야지.”

김씨가 내흔든 것은 (속리산 관광)이라고 색이 바랜 글씨가 써 있는 낡은 수건이었다.

"멀미약 먹었는데유, ."

"아따 그래도 준비는 해야지, 유비무환이라는 말도 못 들었든가.”

수건을 아내에게 들려주고 나서 아내가 들어간 방을 멀건히 바라보다가 김씨는 돌아섰다. A-3호 선실로 돌아온 그는 반쯤 열려 있는 문을 당기고 들어가며 말했다.

"아이구, 선생님들. 같이들 신세 한번 궂게 생갔소. 나도 이방 사람인 모양이군유.”

흘깃 그를 쳐다보았을 뿐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수선스레 방으로 들어서긴 쟀으나 어느 쪽으로 자리를 잡아야 할지 몰라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김씨는 가운데를 끈으로 질끈 묶은 가방을 선반에 올려놓고 나서 창 밖의 바다를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바다도 넓긴 넓다마는 그눔의 배도 크긴 크네. 이게 바로 철선(鐵船)이라 그 말인데, 어따 그눔의 거,,,,,."

한쪽 구석에 주질러 앉은 그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김씨가 물었다.

"난 김이라고 합니다만서두, 선생들은 어디까지 가슈?”

앉아 있던 젊은이가 김씨에게 눈인사를 건넸을 뿐, 다들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술이 취해 벽을 향해 누워 있던 사내가 웅얼웅얼 말했다.

"(청도)까지 갑니다.”

"? (청도)? 지금 마악 떠났으문서 무신 (청도)(청도)?”

"갔다가 올 거니까 (청도)까지 간달 밖에요. 이 배에 (아라도) 가는 사람 말고 누구 딴사람 탄 줄 아슈."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김씨의 코에서 담배 연기가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헌데 나 말씀 좀 물어봅시다.”

들은 척도 안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김씨가 무릎을 당겨놓으 며 말했다.

"거 내 듣자 하니까 그 섬에서 요새 공사를 크게 한나고 허든데, 아시나 모르겠소?”

"노동판 찾아가슈?”

넥타이를 맨 젊은이가 물었다. 그의 말투가 약간 거슬렸던지 김씨가 움찔하면서 웅얼거렸다

"뭐 판이랄 거까지야 있겠소만, 배운 게 노동일밖에 없으니까요. 선생은 성함이 뉘슈?”

"나 송태홉니다.”

"난 김천득이올시다. 근데 저 ,,,,,, 선생은 성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김씨가 그때까지 창 밖을 대다보고만 앉았던 남자에게 물었다. 비와 안개에 휩싸인 갑판 쪽만 내다보고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수염이 꺼멓게 얼굴을 덮고 있는, 그는 바로 내게 담뱃불을 빌렸던 갑판의 남자였다, 그는 김씨를 바라보는 것도. 그렇다고 벽을 바라보는 것도 아닌, 이상스레 노란빛을 떤 눈동자를 초점 없이 돌리더니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팔목이 부러져서 건들거리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나 말이오?”

김씨가 턱을 매만지며 어색한 웃음을 띠었다.

"나 장이오.”

". 장사장님.”

불쑥 김씨가 그에게 사장님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순간, 그는 김씨를 그의 노란 눈으로 말없이 쏘아보았다. 옆자리의 태호가 안주머니를 부스럭거리더니 황급히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명함 한 장을 꺼내어 장의 얼굴 밑으로 들이밀었다.

"인사나 나누시죠. 전 이런 사람입니다. 송태호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태호가 그에게 먼저 명함을 내밀며 인사를 청하고. 김씨는 사장님이라는 호칭을 붙이게 하는 무엇인가가 장씨에게는 있었다. 장씨가 명함을 받았다.

"명함 있으시면 저도 하다 주시죠.”

태호가 머리를 굽실거렸다. 장씨가 말했다.

"명함이 없습니다.”

그가 손에 든 태호의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깨알 같은 글씨들이 적혀 있었는데 그 중 몇 개는 까만 볼펜으로 지워져 있기도 했다

"조기(早起) 축구도 하쇼?”

", 네에. 운동을 좋아해서요.”

"회장이시군요."

", ."

그뿐, 장씨는 다시 몸을 돌려 앉았다.

김씨가 코를 킁킁거렸다. 고는 벽을 향해 누워 있는 사내의 몸 쪽에다 대고 코를 킁킁거리다가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의 손이 겪어온 오랜 노역을 말해 주듯 거칠고 큰 손이었다.

"육지에서 한잔 허시구 바다에서 취하셨구랴, 거 냄새 좋습니다. 킁킁.”

누웠던 사내가 부시럭거리며 일어났다. 그는 붉게 핏발이 선 눈을 미간을 찌푸려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

"잠은 다 잤군.”

"왜 일어나구 그러슈.”

"아저씨 때문에 어디 누원들 있겠습니까.”

"아 지가 뭐랬게유? 한방에 앉아서 가는 것두 다 인연인데, 서로 이름자라두 알고나 가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그랬던 거지유. , 누우슈. 더 자구랴, 난 김천득이라고 합니다.”

"듣고 있었수. 나 최씨요. 선생질합니다.”

"선생질이라뇨?”

"학교선생 몰라요?”

"아하, 최 선생님이시구만. 그러고 보니까, 저기는 장 사장님, 여기는 송 선생, 이쪽은 최 선생님, 나는 김가,,,,,, 그것 참 각성받이가 다모였군요. 허허.”

"술 한잔 하시겠소?"

최 선생이 물었다. 김씨는 반쯤 태우고 불을 끈 담배꽁초를 조물락거리며 어깨를 흔들었다.

"하이고 술이란 게 그게 그렇습디다. 한잔 얻어먹었으면 한잔 갚아야 허는 것이고 그래서 술이 좋다는 것인데, 지가 선상님헌테서 술을 얻어먹는 거야 맛있게 먹겠지만 갚을 길이 없겠구만유. 배부른 마누라 데리고 일거리 찾아 나서는 눔이 무신 돈이 있어야지유.”

"이 양반이 이거 노동을 했다면서 웬 말은 이렇게 좋나 모르겠네. 입 가지고 노동허셨수? 갑시다, 한잔 하게.”

최 선생이 바지를 털며 일어섰다. 김씨는 장 사장과 태호를 번갈아 보았다.

"허긴--- 술이라두 먹으면 뱃멀미는 덜 난다고 허긴 허더구만.”

술을 얻어먹으러 가는 것이 자기이면서도 김씨는 두 사람에게 미적거리며 덧붙였다.

"선생님들은 그냥 앉아 계실랍니까? 술도 음식이라는데 이거 나만 혼자 먹기 미안해서 --- 그럼, 댕겨오겠습니다. 어이구 육실을 헐 놈의 비, 이러다가 배에 비나 새지 않을라나 모르겠군. , 가시지요.”

그들이 마악 문을 나서려 할 때였다, 최 선생님은 이미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문이 열렸다. 아주 천천히, 바람에 펄럭이던 천조각이 날아가듯이 문이 열리고 얼굴을 들이민 것은 여자였다.

껌을 질겅거리며, 한 손에 양장점 이름이 적힌 커다란 종이가방을 들고 있는 여자는 눈가에 푸른 아이새도우를 바르고 있어서 큰 눈이 더 커 보였다.

"아씨들 전부 이 방 손님이이요?”

"그런데, 아까씬 뭐요?”

"같이 가게 생겼네요. 실례해요.”

여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몸보다 먼저 향수 냄새가 안으로 들어왔다. 김씨는 입을 벌리며 엉거주춤 일어섰고, 최 선생은 코끝을 왼손으로 매만졌다. 장 사장은 흘깃 뒤를 돌아보았을 뿐 여전히 갑판 저편을 내다보고 있었다. 태호의 눈길이 부산하게 여자의 얼굴과 몸을 훑어내리는 사이 그의 입이 조금씩 위로 찢어져 올라갔다. 종이가방을 들고 안으로 올라서며 여자가 중얼거렸다.

"날샜군. 이럴 줄 알았다니까.”

한눈에 직업이 드러나 보이는 여자였다. 태호가 몸을 엉거주춤 일으키며 물었다.

"이쪽으로, 이쪽브로 앉으시죠.”

"고마워요.”

종이가방을 벽에 기대놓으며. 여자가 치마로 무릎을 감싸고 앉았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한 계단 내려가고. 그녀는 한 계단 올라앉은 것 같았다.

"나 송태호라고 합니다, 아라도까지 가십니까?"

"."

"실례지만 고향이 어디세요?”

"이 아저씨 좀 봐. 초면에 주민등록부터 보자네.”

"여기 이 방엔 다 남자들뿐이라서, 좀 힘으실 거 같애서.”

"아뇨.”

"불편하지 않겠느냐 그런 얘기올시다.”

"아아니요. 남자가 왜 불편해요.”

"집이 서울이쇼?"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짧게 대답했다

"."

"무교동에 사시겠군.”

여자가 태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비슷해요. 번지수가 조금 틀려서 그렇지 ,,,, 출퇴근은 같이 해요.”

"출퇴근이라노?”

"모르시겠어요? 난 또 뭘 좀 아시나 싶어서. 아저씨 같은 사람들 퇴근할 때 같이 택시합승해서 나는 출근한다. 이거예요, 그러니 출퇴근 같이 하는 거 아녜요?”

그때 문 앞에 서 있던 최 선생이 불쑥 끼어 들었다.

"한잔 안 하시겠소, 아가씨?”

여자가 아주 바르게 껌을 씹기 시작했다.

"같이 갑시다. 뭐하면 이리로 술을 사 가지고 와도 좋고.”

여자가 더욱 빨리 껌을 씹어댔다. 딸깍딸깍 소리를 내면서.

"아저씨, 바다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되셨어요?”

"? 우리가 지금 바다 위에 떠 있는 거 아닙니까?”

"눈알 보니까 물이 가도 한참 가셨는데 뭘 그러셔.”

태호가 키득키득 웃었다. 김씨가, 갑시다 가요 하듯이 최 선생을 밀며 밖으로 나갔다. 여자가 중얼거렸다.

"쐬주 냄새깨나 맡게 생겼군.”

벽에 등을 기대는 여자에게 태호가 말했다.

"그럼 나랑 맥주나 한잔 합시다.”

그때 문이 열리고 안내원이 안에다 대고 말했다.

"강 윤자씨, 이 방에 그냥 계시겠어요? 사무장님께 방 옮겨달라고 하셨다면서요?”

"됐어요. 여기 있을께요. 할머니들 냄새에, 애 밴 여자에 거긴 더 못 있겠데요.”

"알았습니다.”

안내원이 돌아가고 나자 태호가 말했다.

"아하, 미스 강이시군.”

그리곤 어느 쪽으로 자리를 잡아야 할지 몰라서 어정정하게 서 있는 내게 태호가 말했다.

"앉으쇼. 우리 뭐 이제 다 한 식구 아뇨. 이 양반,,,,,, 젊은 사람이 수줍어 하기는.”

방을 나갔던 장 사장이 양말을 빨아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나도 발을 씻어야겠다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반 옆 옷걸이에 양말을 널어놓는 장사장을 보면서 윤자가 종알거렸다.

"가지가지로군.”

 

3

 

매점 옆에 붙어 있는 식당으로 돌아오며 최 선생은 끄윽끄윽 트림을 했다. 그는 식당에 와 김씨와 마주앉으며, 화장실이 온통 토한 사람들의 오물로 발을 들여놓을 틈이 없더라는 말을 했다.

소주병을 들어 반쯤 비어 있는 자신의 잔을 채우고 나서 그는 내 잔에도 술을 따랐다.

"드쇼.”

나는 잔을 들어 푸른 빛깔의 소주를 마셨다. 최선생이 소주에 연두빛으로 된 위장약을 탔기 때문에 소주는 풀빛을 띠고 있었다. 위장에 퍼렇게 물이 드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깐, 아저씨는 거길 일자리를 찾아서 간다 그 말씀이신데, 거 괜한 생각이슈.”

"왜요? 공사가 크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무슨 공사랍니까?”

"여관을 짓는다고 해서 가는 건데, 거기 내가 성남 살때 알던 친구 하나가 이미 들어가 있지 않소. 그 사람이 편지를 하지 않었겠냐 말씀이오. 가만 있자,”

김씨가 주머니를 여기저기 뒤적거렸다.

"내가 조씨가 보낸 편지를 어디다 뒀드라. 가만 있어 봐라, 가지고 오질 않았나.”

"알았수, 알았어. 거 뭐 보나마나.”

"아니지요, 보나마나라니요. 보자, 이게 어디로 갔는고.”

주머니에서 종이들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던 김씨가 여전히 뒷주머니 앞주머니를 뒤지며 말했다.

"거기가 관광지로 개발이 된다 헙디다. 그래서 여관이 들어선다는 얘기죠. 허긴 요새 촌에서두 그렇지만 어디 관광 한 번 안 가본 사람 있습디까. 친목으루다가 가고 계루다가 가고 그러잖아요. 섬이니까 자재값 비싸고. 일당 비싸고, 일은 헐만 허다는 얘기든데--- 에라 차비 버리는 셈치고 나서자. 언제는 월급 받고 살었냐 그 생각으루다가 나섰지요.”

"노동이라.”

최 선생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

"여기 저기 많이 돌아다니셨겠수.”

"그야 뭐. 스물 일곱에 고향 떠나 이때까진데 말함 입에서 단내나지요.”

"기술은 좋으슈?”

"밥 먹고 자식 기르니까 없달 수도 없지만, 다이루 붙이는 기술이야 나도 남만 못지는 않지요.”

"허어, 그러니까 해외기술자십니다, 그려.”

"예에?”

최 선생이 술잔을 홀짝 들어 마셨다.

"안 그렇습니까, 바다 건너 일하러 가니까 해외기술자, 맞지요. 어디 중동엘 가야만 해욉니까?”

"그런 소리 마슈. 내 중동 소리만 들어도 식은땀이 나는 사람이올시다.”

김씨는 주머니를 뒤지던 손길을 멈췄다.

"으응, 예편네가 가지고 간 가방에 있었구만. 이놈의 정신이 그만 까마구 괴기를 삶아먹 어놔서.”

"부인도 같이 타셨수?”

", 여자들만 있는 칸이 있다기에 거기로 보냈지요. 산달이 가까와놔서 ,,,,,,"

탁자 위의 물건들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김씨가 히죽이 웃었다.

그는 자신의 지갑을 열면서 최 선생에게 몸을 기울였다.

"이거 한번 보시겠수?”

"뭡니까?

"우리 아들이오.”

지갑 속에서 김씨가 사진 하나를 꺼내 최 선생에게 내밀었다. 천연색 사진 속에선 무슨 상패 같은 것을 턱밑까지 들어올린 소년이 겁먹은 듯이 굳어 있었다. 최 선생이 사진을 받아들었다,

"공부도 잘합니다. 국민학교 사 학년인데, 그게 뭔 줄 아슈? 웅변대회엘 나가서 이등 상 탄 겁니다.”

"그래요?”

"암요. 이 녀석은 애비 같지는 않지요. 공부 잘허고, 웅변대회 이등상도 받고 내 정말 사실 말이지 이놈 하나 보고 삽니다. 이놈은 펜대 잡고 료마이 입고 살 겁니다. 그래야죠. 사실 안 그렇습니까, 나처럼 팔자가 오그라들어서야 안 되죠. 그럼요, 이놈은 그냥 다이루 바닥마냥 좌악, 그럼요 좌악 펴져야지요.”

김씨에게 사진을 돌려주며 최선생이 물었다.

"그래 아들은 어디 있수?”

"지 큰아부지헌테요. 못 데리고 왔지요, 데려올 수가 있나요, 핵교 댕겨야 허는데 ,,,,, 가서 일자리가 확실할랑가 그것도 사실은 잘 모르는 거고. 어쩌겠소, 지 큰아부지헌테 맡기면서, 자리잡는 대로 데려가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선생은 거길 가 보셨수? 아라도) 말입니다.”

"그 빌어먹을 데를 내가 뭐 하러 갑니까, 거기 보내는 놈은 사표 쓰라는 거나 똑같은 덴데. 나도 처음 갑니다.”

"그러시구만, 헌데 말씀이오 학교엘 나가신다니까 내 하나 묻겠는데 거 바닷바람이라는 게 몸에 그렇게 좋다면서요?”

"그래요? 바닷바람이 무슨 몸에 보약이라도 된답니까?"

"에이, 선생두 무슨 얘긴고 허니, 천식 같은 거 뭐 그런 기침병 있지 않수. 그런 병에 좋답디다. 얘길 들어 보니.”

"글쎄요. 모르는 소리요 난. 그런데 그건 왜 물으슈? 댁이 천식이라두 합니까?”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서도,,, 하여튼 그런 소리를 들어서.”

우리 예펜네가 가슴이 좀 안좋아요.”

최 선생이 뒤를 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봐, 여기 소주 하나 줘. 달걀도 있음 하나 주고.”

"달걀은 없는데요. 매점에 있는데 사다 드려요?”

"내가 사오지, 빌어먹을.”

최 선생은 일어나서 탁자 사이를 걸어나갔다. 소주병 속에는 푸른 술이 한 잔쯤 남아 있었다. 매점에 가서 달걀을 사온 최 선생이 컵을 하나 달라고 했을 때도 나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몰랐다. 그는 가져온 컵에 반 넘게 소주를 따랐다. 그리곤 탁자 모서리에 부딪쳐 껍질을 깬 달걀을 두 손으로 들어올렸다. 그의 두 손이 허공에서 몇 번 움직이는가하자 달걀 노른자는 컵 속의 술로 떨어졌다. 껍질에 남은 흰자를 후루룩 마시는 그를 우리는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것은 마술사의 손에서 끊임없이 솟아 나오는 카드를 보는 것 만큼이나 빠른 솜씨였다. 최 선생은 나무젓가락을 들어 컵 속의 소주와 달걀을 휘저었다. 소주와 달걀이 뒤섞여 주스같이 노랗게 되었다.

", 드십시다.”

그가 컵을 들어올렸다.

, 그건 맛이 어떻습니까?”

"좋죠. 어때요? 한번 드셔 볼랍니까?”

", 아닙니다.”

최 선생은 무엇인가를 술에다 타는 것을 즐겨서 나름대로 소주를 마시는 방법들은 익혀 가지고 있나 보았다. 그는 포란 빛깔의 소주를 마치 주스라도 되는 듯이 또 꿀걱꿀꺽 마셨다.

"난 아마 못 나올 겁니다. 이제 섬엘 가면 거기 귀신이 될 겁니다.”

앞에 놓인 푸른색과 노란색의 잔을 나란히 모으면서 최 선생이 갑자기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아마 난 못 나을 겁니다.”

"무슨 사연이 있으신가요?”

"사연은 빌어먹을.”

최 선생이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술을 끊지 않는 이상, 내가 술을 끊지 않으면 그놈들은 날 섬에 처박아 둘 거란 말이오. 언제까지라도.”

"누가요?

"누군 누구요. 교육청에서 발령 내는 놈들이지. 해볼 테면 해보라지 난 술이 없이는 못 삽니다. 내가 술도 안 마시고 어떻게 삽니까.”

"암요, 술이야 존 거지요.”

김씨가 더듬거렸다.

"맞죠? 김 선생. 술은 좋은 겁니다. 그 좋은 술을 못 먹게 한다 이거예요. 뭔데? 자기들이 뭔데 술을 먹어라 말아라 야단이냐 이거야.”

최 선생이 주정을 하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탁자를 씌우고 있는 식닥보는 비닐이었고 거기엔 커다랗게 해바라기가 그려져 있었다. 끊임없이 배의 기관소리가 틀려왔다.

땅 저 밑에서 물이 끓고 있는 것 같았다. 쿠렁쿠렁하는 그 소리는 이곳이 땅이 아니며, 이 배는 지금 가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푸른빛 소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술 때문에, 오로지 술 먹는 거 하나 때문에 쫓겨가는 놈이 나올시다. 좋다 이겁니다. 나를 보내겠다면, 나도 가준다 이거예요. 나 큰소리치고 이 배를 탔습니다. 봐라. 나도 보여 준다 이거예요. 술 끊으면 될 거 아니냐, 나도 큰소리치고 배를 탔다 이겁니다. 니들이 날 섬 학교로 쫓은 이유가 술이라면, 좋다, 나도 술 끊으마. 아시겠소. 내가 섬에 가서 딱 내리는 순간, 정말 딱소리 한번 나게 술 끊는다 이거니까---, . 아직은 듭시다. 흐흐.”

그가 술술을 일그러뜨리며 낸 마지막 말이 어찌나 은밀하고 습기가 차 있었던지 우리는 마치 무슨 모의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김씨가 차츰 어거지를 펴기 시작한 것도 그 때쯤부터였다.

"거 선생님이 그렇게 술을 마셔서 되시겠소?”

"왜요? 뭐가 안 됩니까. 내가 술을 마신다고 애들을 안 가르칩니까, 근무를 안 합니까?”

"그래도 그렇지, 여보. 교사란 지역사회의 지도층이고 또 뭐냐 타에 모범이 되는 사람이 술을 그렇게 마셔서야. 그건 또 뭐요, 소주에 달걀 을 타다니. 달걀이야 후라이를 해 먹는 거지 소주에 타먹는 거냔 말요?”

"이 양반이 지금 요리강습을 하시나, 왜 이래.”

"말은 바르게 헙시다. 당신 그러니까 술 너무 먹어서 쫓겨가는 거구만 그래. 거 뭐냐, 좌천. 좌천되는 거로구만. 당신 중독이슈?”

"뭐 안 됩니까. 중독이면.”

"손도 떨리고 뭐 그러는 거 아노?"

"왜 그렇다면 고쳐 주겠소?”

"이 사람이 이거 안 되겠구만, 여보슈, 내 학부형의 입장에서 한 마디 하겠는데, 당신 그게 뭐요. 선생이면 선생이지 알콜 중독이라니 .....”

"이 새끼가 이거.”

불쑥 소리를 높이며 최 선생이 술 컵을 집어들었다. 노란 술이 흔들리며 탁자에 떨어졌다.

"선생, 술버릇이 나쁘시구만.”

"너 한번 맞아 볼래?

그들을 뜯어말리기 위해 일어서던 나는 식당 입구에 와 막아서는 그림자를 언뜻 보았다. 만삭이 된 김씨의 아내였다.

"아저씨, 저기 아주머니 오셨는데요.”

김씨가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당신 어째 나왔어?”

"나 좀 봐유.”

배가 너무 나와서인지 아니면 몸을 뒤로 발딱 젖힌 것인지 알수 없는 자세로 김씨의 부인은 어기적어기적 식당을 나갔다. 김씨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누라를 따라 식당 밖으로 사라졌다. 최 선생이 의자에 앉으며 내뱉았다.

"별놈 다 보겠네. 막일꾼 놈이 어디다 대고,,. 그냥 바닷속에다 내팽개쳐 버릴랬더니. 저게 김씨 마누라요?”

", 그런가 보더군요.”

식당의 의자들은 견고하게 쇠고리로 바닥에 매어져 있었다. 큰 파도에 대비해서 의자가 쏠려다니는 것을 막기 위해서일 게 분명한 그것을, 나는 노예의 발에 묶인 사슬처럼 내려다보았다. 최 선생이 내 잔에 푸른 소주를 따랐다.

"(아라도)는 처음이시라고 하셨죠?”

"얘기야 많이 들었지.”

"아름답다면서요?”

"이봐, 젊은 친구.”

그가 내 어깨를 쳤다.

"아름답다는 게 뭐요?”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완숙한 조화, 구름에 빗기며 떨아지는 저녁 해, 청결함, 새벽 산에 감도는 구름들, 내가 처음 사랑했던 여자의 작고 흰 손, 나는 천천히 담배를 집어들었다.

"글쎄요. 보기 좋은 것이겠죠.”

"보기 좋은 거라---- 맞았어. 좋은 거 그게 바로 아름다운 거요. 그렇담 말인데,-,,,, 그 섬에 술이 있다면 거긴 아름다운 델 거요.”

"술은 끊으신다고 방금 그러셨잖아요.”

갑자기 최 선생이 얼굴을 숙였다. 목이 꺾여지는 것같이. 그는 말했다.

"그래야지 -----, 술을 끊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놈의 섬에서 한 발짝도 나오질 못할 테니까. 평생을 섬에서 사는 것보다는 술을 끊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어떻소, 당신 생각은?"

 

4

 

나는 아무 것도 꿈꾸지 않았다. (아라도)가 단 하나의 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섬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아라도)는 그 많은 섬들 전부를 말하는 것이라고 해도 아무 것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배의 기관소리와 좌우로 흔들리는 배의 롤링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나는 싸만 거기에서 해가 지는 것을 볼 작정이었다. 그리고, 새가 날아오르는 것을, 풍란의 향기를, 햇빛이 반점을 이루며 숲에서 너울거리는 것을, 모래를 (모살)이라고 말한다는 사투리를 듣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다만 그것들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었다.

이젠 많이 어두워진 밖을 내다보았다. 갑판에 켜놓은 불빛 속으로 빗발이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

"비가 와서 다행입니다.”

이제는 창을 등지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장 사장이 말했다. 태풍 때문에 출항을 못하고 묶여 있던 지난 사흘을 생각할 때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요?”

"배를 처음 타 보시나 보군? 학생은.”

". 그렇습니다.”

"밤에는 죽는 사람이 많으니까. 흐흐.”

"죽다니요?”

"흔히 그런 일이 있다고 합디다. 특히 달빛이 밝은 밤에 잔물결만 있는 바다를, 그것도 롤링이 전연 없는 배를 타고 갈 때면 바다로 뛰어드는 사람이 있다고 합디다. 그런 사람을 보면 대개 유서도 없다드군.”

"충동 때문인가요?”

나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모르지. 하여튼 이 (청도) (아라도)간 뱃길엔 해마다 그런 일이 있다니까. 그런 걸1보면 사람은 꼭 준비해서 죽는 것만은 아닌가 보오.”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다는 죽음처럼 은빛으로 잔잔할 것이다. 달빛은 납처럼 그 위에 깔리고, 배는 섬이 되어 흘러가는 바다 위에 떠 있을 것이다. 아무 것도 보이지는 않으리라. 배의 이물 어느 곳에 앉아서 그 누군가가 느꼈을 황홀한 갈증, 그 죽음에의 목마름. 달빛의 속삭임. 그의 전신에서 강간범의 욕정처럼 꿈틀거리며 일어서는 유흑, 폭풍주의보가 사흘씩이나 묶어두었던 이 뱃길이 그런 밤을 뚫고 열리지 않은 것에 대하여 나는 조금은 쓸쓸했다.

최 선생은 식당에서 김씨와 술을 마시고 있을 것이다. 재떨이를 앞으로 당겨 놓으며 장 사장이 물었다.

"섬에는 무슨 일이 있어서 가오?”

"글쎄요. 그냥--- 출발해 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내가 한 (출발)이라는 말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떠난다는 말이 가지는 의미 속에는 한 공간으로부터 나간다는 뜻이 강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가고 있는 목적지를 힘주어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부끄러움이 나에게 중얼거리게 했다.

"방학이니까요.”

"출발---, 좋은 얘기요, 좋은 시절이고. 부럽소 학생이.”

이제는 창을 등지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장 사장이 말했다. 태풍 때문에 출항을 못하고 묶여 있던 지난 사흘을 생각할 때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출발---, 좋은 얘기요, 좋은 시절이고. 부럽소 학생이.”

"아 아닙니다.”

"허긴--- 나도 출발이오. 학생 같은 출발은 아니지만.”

그때, 일찌감치 벽 쪽으로 자리를 잡고 누워 있던 송 태호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사장님께선 무슨 사업 일로 거길 가십니까?”

"글쎄---”

장 사장은 태호를 흘깃 보고 나서 나를 향해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배나 하나 사서 부릴까도 싶고, 거기선 흑염소를 방목한다니까 그거라도 할지.”

"아니, 하시던 사업은 어쩌시구요?”

"무슨 사업?”

"사장님이시면 하시던 업체가 있지 않겠어요.”

"누가 그럽디까, 내가 사장이라고.”

"아니, 그게---”

장 사장이 수염이 꺼칠한 턱을 쓸었다. 그는 손에 들고만 앉아 있던 담배를 들어 필터 쪽을 몇 탄 손바닥에 부딪쳤다. 그가 입에 담배를 물자 태호가 재빨리 라이터를 켜 그의 턱밑에 들이댔다. 연기를 뱉아내는 장 사장을 지켜보다가 태호가 물었다.

"흑시 사장님, 이거 이런 얘길 한다고 욕하진 마십시오. 혹시 말씀인데요,,,,,, 부도 같은 거 내고 숨으러 가시는 건 아니십니까?"

"이 사람, 말리기 힘든 사람이구먼.”

", 아닙니다. 사실은 저도 그래 본 경험이 있어서,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말씀입니다.”

"미안해 헐 건 없소. 당신이 그렇게 봤다면 본 거고,,,,, 그래 송형은 무슨 일로 가시오?”

", 그게 이렇습니다.”

말을 시켜 주기를 기다렸던 사람 같았다. 그는 런닝셔츠 자락을 흔들어 바람을 내면서 나와 장 사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가 일반유흥업소를 좀 했었습니다. 돈도 꽤 벌어 봤죠. 그래서 아는 얘긴데, 이 선원들 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이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배 타고 나갔다가 들어오면 돈 쓰는 데는 따로 있습니다. (삼도)(을미도) 그리고 (가해도) 같은 데 있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데가 그래도 좀 큰 섬이라는 (영산도) 쪽이에요. 그 사람들이 왜 거기 와서 술을 먹느냐, 이걸 생각해 본 겁니다. 그건 술이 없어서가 아녜요. 색시가 없거든요. 바다엔 나갔다 왔는데 무슨 재미가 없다 이겁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건데, 이 손님들을 받자 이겁니다. 현지에서 받는 거죠.”

"술장사를 하실라구?”

"그게 뭐 딱 술장사라고 이름 붙일 건 없고요, 몇 개 섬에다가 술집을 내는 겁니다. 서울서---”

잠시 말을 끊고, 태호는 미스 강을 흘깃 바라보았다. 태호가 누웠던 반대편 벽에 그는 등을 보이고 누워 있었다.

"다 아시겠지만, 서울 가서 제대로 빠진 아가씨들로 데려다가 놓는 겁니다. 안주보고 술 먹는다지만 사실 안주가 따로 있습니까? 색시들 이상 가는 안주가 없죠. 그래 가지고 손님들을 싸악 땡기는 거죠. (영산도)까지 나갈 필요가 뭐 있겠어요. 그런데 이게 그렇습니다. 바닥이 좁으니까 색시애들 이거 소문이 빨리 나서 오래 두면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한 세 군데 섬에다 분점을 내고 색시들을 돌리는 거예요, 여기 애들은 저기로 보내고 저기 애들은 또 이쪽으로 보내고,,,,- 두 달에 한 번씩만 그렇게 회전시킨단 말씀예요. 운동할 때 코트 체인지 하는 거나 똑같죠. 손님은 정해져 있으니까, 아가씨들을 갈아댄다 이겁니다.”

"아주 큰 사업이시구만.”

장 사장이 재떨이에 담배를 껐다. 태호가 황급히 재떨이 위의 장 사장 손을 잡았다.

"아이구 아이구 불을 끄실라면 절 주시죠. 무슨 담배를 그렇게 끝만 끄슬리다가 마십니까?”

장 사장이 꺼버린 담배를 아깝다는 듯이 만져보고 나서 태호는 입맛을 다셨다.

"담배 없으쇼? 이걸 피구랴.”

", 아닙니다. 아닙니다.”

장 사장이 내밀어 주는 담뱃갑애서 태호는 한 개비를 꺼내들었다.

"그럼 한대만 실례하겠습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태호의 뒤 벽에는 그의 웃옷이 걸려 있었다. 그의 셔츠 주머니에 들어 있는 담배가 어렴풋이 비쳐 보였다.

"그런데 말씀입니다. 두 달에 한 번씩만 교대를 시킬 경우 업소가 셋이라 하면 육 개월 아닙니까. 맞죠? 육 개월만 되면 그 애들은 정년 퇴직시키는 겁니다. 다른 애들을 또 데려오는 거죠.”

"그건 또 왜?”

"안 남아나거든요.”

"아가씨들이?”

"예에, 색시들 몸이 안 남아난다 그 말씀이죠. 육 개월만 밤낮 술 먹고 뛰면 그 애들 다 갑니다. 위장이 빵꾸가 나도 나고 밑이 해져도 해진단 말씀이죠. 살림 차리는 년도 있을 테고.”

태호는 어느새 두 개의 분점을 가진 술집 셋의 주인이라도 된 듯한 투였다. 장 사장은 눈을 껌벅거리며 앉아 있었다. 나는 최 선생과 태호 사이에 자를 대고 금을 그어 보았다.

최 선생은 술을 끊을까. 아마 그는 섬을 나오기보다는 술을 마실 것 같았다. 태호의 술집에서 두 달마다 갈아드는 색시들과 어울려 그는 마시고 또 마시리라. 그렇게 해서 그는 육지로 나갈 것을 잊고, 술을 끊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이 쫓겨왔다는 울분을 잊고, 살아갈 것이다. 뱃길이기에 있을 수 있는, 부두에 내려서면서 구두가 흙을 밟는 순간이면 사라져 버릴 밤바다 위에 뜬 무지개, 이것은 그런 이야기일 수 있으리라.

"형씨, 돈 벌고 싶소?”

장 사장의 목소리에 나는 태호와 최 선생 사이에 그어놓았던 금을 지웠다.

"돈이오? 돈 벌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나요?”

"돈을 벌면 뭐하고 싶소? 뭘 하려고 벌겠다는 거요?”

"사장님도, 아씨 돈이라는 거야 있으면 있을수록 목에 팍 힘이 서고, 세상을 끝발로 누르는 건데,,,,,, 뭘 하다니요? 쓸 곳이 없을까 봐 돈을 안 법니까?”

태호가 담배를 빠끔거렸다. 미스 강이 일어나 앉은 것은 그때였다,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그녀는 태호에게 말했다.

"아저씨. 나부터 취직 좀 시켜 주세요.”

우리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미스 강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잠시나마 우리는 미스 강이 거기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태호는 어느새--- 술집의 주인이라도 된 듯이 물었다.

"아가씨가? 정말이야?”

"네에. 내가 왜 비싼 밥 먹고 헛소릴 해요.”

"생각해 봅시다.”

정말 생각해 보기라도 하겠다는 투로 태호는 윤자의 몸을 흘끔거렸다.

"나도 돈 좀 벌어 봅시다. 그래야, 갈 때는 이렇게 배타고 기차 타고 가지만, 서울 올라갈 땐 비행기 타고 갈 거 아녜요.”

"제 발로 걸어왔으니 선금 땡겨 달라는 얘기는 안 하겠군.”

"아저씨 말 한번 고상하게 하셔.”

"미안해.”

"싸래기 반 톨만 먹었나, 말끝마다 반말이야.”

장 사장이 둘 사이를 맡고 나섰다.

"어허, 어허 이러지들은 말어. 한쪽은 취직됐겠다 한쪽은 종업원 구했겠다 일은 알 돼 가는구만 그래. 그 사업, 성공하겄소, 젊은 양반.”

장 사장의 말에 우리는 실없이 웃었다. 태호는 윤자를 보며 마땅찮은 얼굴을 했고, 그녀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기가 막혀서 ,,,,,, 별꼴이야.”

장 사장은 비닐 베개 위에 올려놓았던 태호의 명함을 집어들었다.

"하여튼, 이 명함은 이제 쓸 데가 없어졌구랴. 사업 시작은 벌써 새로 한 거니까.”

그는 태호의 명함을 네 조각으로 찢어서 재떨이에 버렸다. 윤자가 태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담배 한 가치만 얻어요.”

"능력 없음 끊어.”

"어쭈. 좋와요. 그럼 좀 땡깁시다. 월급에서 까기로 하고 담배 한 개비만 땡기자는데 그것도 안 되겠수?”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윤자에게 내밀었다. 내 얼굴을 힐끔 보고 나서 윤자는 핏빛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으로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내게서 성냥을 건네 받으며 윤자가 말했다.

"고마와요.”

윤자는 내가 건네 준 성냥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성냥을 돌려주고 난 윤자는 내 쪽으로 길게 연기를 뱉아냈다.

"뭐하는 분이에요? 학생? 그럴 줄 알았어요. 손을 보니 알겠더군요.”

나는 무릎 위에 놓았던 손을 오므려 주먹을 쥐었다. 그때 매호가 껄끔거리는 목소리로 내뱉았다,

"그러니까, 우리 같은 고졸(高卒)은 사람으로 안 뵌다 이거냐. 시방 니가?”

 

5

 

"아니, 아가씨 이거 내가 술 먹었다고 하는 얘기가 아니우. 이 방에 남자만 몇 명인지 아시우?”

"저도 눈 있어요.”

"옳지, 그런데도 이 방에서 자겠다 그 말이오?”

김씨가 셔츠의 단추를 풀어헤친 채 물었다. 윤자는 김씨를 빤히 쳐다 보았다.

"내 돈 내고 내가 탄 배에서 내가 자겠다는데 왜 그렇게 말이 많아요. 별꼴이네 참.”

"이보쇼, 난 아가씨 생각해서 그러는 거요.”

"남의 사정 봐주다가 애 밴답디다. 누가 내 사정 봐 달랬어요.”

"좋수. 좋다 이거요. 젠장헐 거 나도 모르겠다.”

김씨가 훌훌 웃옷을 벗었다. 그때에야 우리는 보았다. 김씨의 런닝셔츠 등허리에는 손바닥만한 구멍이 나 있었다. 김씨는 베개를 두 개 집어서 선실 바닥에 포개 놓았다.

"이거야 원 바지를 벗고 잘 수가 있나. 에이구 모르겠다.”

김씨는 베개 위에 머리를 박으며 길게 누웠다.

"이 배라는 게 이제 보니 아주 순 쌍놈 맹그는 곳이네. 하이고 나 이거야 원 여자 하나에 남자 다섯이 자지를 않나.”

태호가 느릿느릿 말했다.

"주무십쇼, 아저씨. 그런다고 저 아가씨가 방을 옮길 것도 아니고.”

나는 신문을 접어들고 광고를 읽어 내려갔다. 배를 탈 때 사가지고 올라온 신문이었다. 위쪽의 기사는 이미 다 읽어 버린 지 오래였다. 동일, 동수, 동국 호상(護喪) 이민호 그것은 굵

은 흑선이 둘러쳐진 신문 부고였다.

"선생이라던 이 사람은 술만 먹고 잠은 안 잘 건가. 잠자리들을 해야지.”

"척척 누우면 되죠. 하룻밤 잠 못 잔다고 무슨 일 나겠습니까?”

태호가 뭉싯뭉싯 윤자 쪽으로 다가가 길게 다리를 뻗으며 말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신의 잠자리를 그쪽으로 잡은 모양이었다. 김씨가 푸우 푸우 입김을 내불며 말했다.

"하룻밤이라니요. 우리 같은 사람은 잠이 보약인데, 아이구. 그나저나 이거 어디 어지러워서 잠을 자겠나,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 이거야말로 어느 놈이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드는 꼴일세.”

김씨가 몸을 꼬부리고 누웠다. 배의 흔들림이 한결 심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신문을 접어 옆으로 밀쳐놓았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장 사장은 눈을 감고 있었다.

"누가 문을 두드리잖아.”

태호가 출입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문 두드리는 소피가 났다.

"문이 잠겼군요.”

내가 일어나며 말했다. 문을 따러 가는 사이 눈을 감고 있던 김씨가 중얼거렸다.

"술중독 걸린 양반이 이제야 오나 보군.”

내가 문을 열었다. 바람이 혹 쏟아져 들어왔다. 문 옆에는 최 선생이 아닌 김씨 마누라가 서 있었다, 통로의 한쪽에 등을 기대고 다른 한 쪽을 짚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던 김씨 마누라가 머리들 들었다.

"우러 쥔 양반 좀---”

나는 선실 바닥에 누워 있는 김씨를 불렀다.

"김씨 아저씨. 부인께서 오셨는데요.”

김씨가 고개를 쳐들었다.

"이리 나와 보세요.”

김씨가 일어나 앉은 사이, 문 옆으로 비켜선 내 앞을 막으며 김씨 마누라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얼굴이 흙빛이었다.

"좀 나와 봐유, 순덕이 아부지유.”

"아니 또 왜 그래?”

김씨가 런닝셔츠 자락을 허리춤으로 집어넣으며 일어났다. 김씨 마누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난닝구 좀 갈아입으라구 그래두 통 귓등으로만 듣더니, 꼴 좋수.”

"왜 그러는 게여? 내 난닝구 검사 나왔어?”

만삭의 아내를 방안의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가로막듯 나서며 김씨가 신발을 찾아 신었다.

"좀 잡아 줘야지유. 나 혼자서는 원,,,,,,"

"똥물까지 게워 놓구선 또 뭐가 올라올 게 있다구 그런대.”

"등이라두 좀 펑펑 두들겨 줘 봐유.”

"원 이거야. 아따, 비싼 거 먹어 놓구선 다 게우기는,,,, 젠장.”

"내가 언제 먹는댔수? 먹어야 멀미두 덜한다면서 당신이 먹어라 먹어라 해 놓구선.”

문을 닫으며 김씨가 밖으로 나갔다. 그때 나는, 이 방에 있는 우리들은 모두가 각자이고 혼자이지만 김씨만이 둘이며 함께이구나 싸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황에도 남편의 구멍 뚫린 런닝셔츠를 난감해 하는 김씨 마누라가 밉지 않았다.

커튼을 치지 않은 창 밖으로는 불빛 속으로 갑판 위에 쏟아지고 있는 빗발이 바라보였다. 사선(斜線)으로 떨어지고 있는 빗발이 바람의 속도를 느끼게 했다. 밤바다에서 바라보는 빗발이 차갑게 가슴으로 흘러들었다.

이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어쩌면 다 함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무심하게 했다. 땅에서는 다들 각자였지만, 그리고 다시 땅으로 내려설 때 또한 제 각각일 사람들이지만---. 나는 문득 서울을 떠난 열차 안에서 바라보던, 그 한 뼘의 공간이 보여준 들판을 떠올렸다. 그 기차 안에서 침대칸의 우리는 모두가 다 각자였다. 말없이 잠이 들었고, 하나씩 내렸었다.

장사장의 눈감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폐허 같은, 오래 버려둔 공터 같은 그의 얼굴은 천정의 불빛에 그늘이 져서 눈이 더욱 깊이 들어가보였다. 오래 알아왔던 사람처럼, 그의 얼굴이 느껴졌다. 김씨가 돌아온 것은 시간이 꽤 지나서였다. 으스스 몸을 떨며 안으로 들어선 김씨의 머리칼이 젖어 둘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젖은 런넝셔츠가 몸에 달라붙어 나이답지 않게 완강한 가슴의 근육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윤자를 흘끔거리며, 문을 향해 돌아서서 옷을 갈아입었다. 벗은 런닝셔츠의 물을 짜들고 안으로 들어오며 김씨는 얼굴의 빗물을 닦았다,

"비가 많이 옵니까?"

"말도 못하게 오는데요. 바람도 지랄같구.”

태호가 씨부렁거렸다.

"갔다던 태풍이 도로 오나.”

김씨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멀건히 천정을 쳐다보고 있던 김씨에게 태호가 물었다.

"부인이 산달이 가까우셨습니다.”

". 그렇게 됐수. 씨가 좋와 그런지 밭이 걸어서 그런지 ,,,,,내가 손()은 참 흔합니다.”

"원 아저씨두, 테레비라도 하나 사시지요.”

"테레비종이오?”

"네에. 테레비도 하나 안 사시고, 그저 밤이면 그것만을 재미로 아시니까 그렇죠.”

"난 또 뭔 소리라구, 에이 이 사람. 말이 난 김에 얘긴데, 내가 이거 보건소에 가서 부랄을 까지 않았겠소. 그런데---”

말을 하다 말고 김씨는 윤자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색시는 주무시우. 이거 남자끼리 얘기니까, 허긴 뭐 요새는 젊은 색시들이 더 잘 아는 거지만.”

김씨를 쏘아보고 싸서 윤자는 자리에 누웠다. 벽을 향해 꼬부리고 누운 그녀의 등은 새우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팔로 무릎을 감싸고 앉았다.

"정판수술인가 뭔가를 했는데, 애가 생겼더라 이 말이오. 이란인가 저란인가 간다구 사기에 걸려 가지구서는 일도 안 나가고 집구석에 있을 땐 데,--아니, 부랄은 깠는데 애가 생겼으니 이거야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그렇다구 내 예펜네가 어디 가서 남의 씨 받아올 위인이나 되느냐 허면 그것두 못 되는 건 내가 더 잘 아는 노릇이고. 어쩌어찌 하다가 알아 봤드니. 그런 수도 있다는 게 의사양반 얘깁디다. 더러 그런 일이 있다는군요. 그러니 어쩝니까, 이것두 복이다 생각하고 기르는 중 아니오.”

"이란은 왜 못 가셨는데요?”

"말도 마슈. 빚만 지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기지. 유령회산가 뭔가에 걸렸으니 어디 가서 사정얘기 해봤자 나만 챙피죠. , 세상에서 사기꾼이란 놈들이 다 난놈들 아니오. 그러고 보면, 내 평생에 사기 두 번 당하고,,,,,, 섬까지 가는 꼴이 안 됐소.”

김씨가 부시럭부시럭 일어났다. 그는 나에게 물었다.

"성냥개비 있으쇼?”

나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불 여기 있습니다.”

"성냥개비 말이오. 귀가 가려워서 ,,,,,, 아까 보니 어디 성냥이 있든데.”

나는 장 사장이 담배와 함께 놓아둔 성냥을 집어 그에게 건넸다, 성냥을 받아든 그가 중얼거렸다.

"떡 본 김에 고사 지낸다구,,,,,, 어디 한 대 꾸어 볼까.”

그는 담배를 퍼워 물고 나서, 귀를 후비기 시작했다.

"공업단진가 뭔가 들어서는 바람에 논 마지기나마 가지고 있던 걸 안 팔 수가 없게 된 게 사단은 사단이었는데, 그 돈 가지고 잘만 굴렸으면야 이 꼴이야 됐겠수. 그걸로 장갑공장을 했는데 동업하던 박가란 자가 홀라당 알만 빼먹고 내빼버렸지 뭐요. 목 장갑 있지 않수. 식장에서 끼는 거 그런 게 아니구 목 장갑 말유, 그걸 짜는 공장이었는데,,,,,, 첨엔 좀 벌기도 했지요. 그래 저래 하다 보니, 집 한 칸 있던 게 전세집 되고 그게 또 부엌 하나에 방 하나가 되더니, 나중엔 남들 연탄이나 쌓는 지하실 신세가 됩디다. 젠장,,,,,, 거 재떨이나 좀 주슈"

나는 김씨 앞으로 재떨이를 밀어놓았다.

"하다하다 안 되길래, 나도 남들 따라서 산동네에 가서 뚝딱 지어버리지 않았겠소. 너나 없이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뿐인 동네라 고까운 꼴은 안 와서 좋습디다. 그럭저럭 몇 년 가서 수도물도 먹고 전깃불도 켜고 산다 했더니, 웬걸, 이번엔 싹 헐어 버리고 아파트를 짓는다고 불문곡직 하루는 와서 때려 부숩디다. 입주권인가 뭔가 딱지는 하나 주는데, 그거야 눈 가리고 아웅이지 언 눔이 아파트 들어갈 돈이 있었음 거기 와서 살았겠수. 통장 반장이 먼저 나서서 파슈 파슈 하길래 딱지를 팔았지요. 자가용 타고들 와서 사 가는데, 그 사정이야 누군 모릅니까, 돈 많은 사모님들이 그걸 사서 돼지라도 기를라나 부다 하며 팔았지요.”

모기 하나가 귓가를 맴돌며 지나갔다. 누군가가 갑판 바닥에 게워대는 소리가 우억우억 들렸다.

"몸 하나 가지고 벌어먹긴 했소만,,,,,, 거 이상한 거는, 공사가 끝나고 나면 거기가 영 내가 살 데는 아니란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지하철도 팠고, 호텔도 지었죠. 학교 공사장에서도 일을 해봤고 병원 건물, 빌딩,,,,,, 안 해 본 일이 없는데, 거 이상해요. 공사가 한창일 때는 내 집 같이 드나들던 덴데도 일 끝나서 빌딩이 올라가 버리면, 아이구 이놈의 데도 내 살 데는 아니지 싶은 게 정나미가 딱 떨어집디다. 허기사, 뭘 짓든 그게 나라고 무슨 상판이겠소. 호텔을 짓고 지하철을 팠으면 그게 내 호텔이고 내 지하철입니까. 준공식하고, 테프 끊고, 테레비에 나오고 할 때는 벌써 우린 거기 없드라 그거지요. 허기사 책임자들이야 다르겠지만서두. 책임자들이야 모르지, 그 사람들이야 책임이 있으니까 책임만큼 일하겠지만서두 우린 다르거든. 돈 만큼만 일하는 거요. 주는 만큼, 받는 만큼 일허고, 그게 농토하고 다른 겁디다. 논 갈고 밭 가는 거야 허면 헐수록 이게 내 땅이다 싶어서 맘이 절절헌데, 이놈의 공사판은 세빠지게 일을 해도 공사만 끝나면 정이 붙기는커녕 다신 못 갈 데가 되더란 말이오. 객지 타관이 그래서 다들 춥다는 건지---”

김씨가 발을 쭈욱 뻗었다.

"섬이라. 거기 가서 얼마나 있을라나 모르겠소만 암튼 이젠 고향가기는 틀렸는 거 겉소.”

"고향이 어디신데요?”

나는 아마 그에게 무엇인가 위안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고향이 그들에게 있어, 이농(離農) 도시 노동자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다. 추석의 성묘행렬이나 구정(舊正) 열차는 바로 그들이 고향을 떠나오며 들고 나논 끈 하나를 아직도 놓고 있지 않다는 뜻으로 나는 받아들였었다. 그들의 집은, 그들의 옷은 그리고 그들의 그윽한 비밀과 마지막 자유는 언제나 고향에 있는 것이다. 껍질은 두고 몸통만 빠져나온 달팽이 같이, 여리디 여린 맨살로 떠도는 그들이 껍질을 두고 온 곳, 그곳이 바로 그들의 고향이라고 나는 이해했었다.

"고향이 멀리 있으세요?”

나는 김씨가 뱉아낸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퍼져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학생. 갈 수 없으면 그게 먼 거요.”

김씨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고향이 가까우면 뭘 허겠소. 갈 수가 없으면 그게 세상에서 젤 먼데 요. 아시겠소, 학생?”

나는 방바닥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6

 

김씨는 잠이 들어 있었다. 그가 잠결에 입맛을 다시며 중얼대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앉아 있는 사람이 이제 없었다. 윤자 옆에는 태호가 누웠고, 장 사장은 갑판 쪽 벽 밑에서 배를 깔고 엎드려 있었다.

누구든 그 시간에 잠들지 않고 있었다면, 김씨가 입맛을 다셔대는 그 풍요한 식탁 때문에 고통스러웠으리라. 선실은 어두웠다. 배의 기관소리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천정의 불을 끈 어둠속으로 갑판을 비추고 있는 불빛이 커튼 사이를 비집고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한 가닥 뻗어 있는 먼 길, 쓸쓸함, 두 시 반 열차를 기다리는 대합실, 잊혀진 줄 알았던 추억 하나, 덧없었던 사랑의 어느 구석, 그런 것들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푸른 야광침이 내 손목 위에서 열두 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선실 밖을 오가고 있는 발소리를 들었다.

그것이 방을 찾는 최 선생의 발소리였음을 안 것은 조금 후였다. 벌컥 문이 열렸고, 통로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불빛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최 선생은 방안으로 쏠려 들어왔다. 어이쿠 하며 내지른 소리는 최 선생의 발에 가슴이 밟힌 김씨의 비명이었다.

"뭐야 이거?”

", 노둑이야.”

"불 켜, 불 켜라구.”

씨근덕거리는 숨소리, 퍽퍽 가슴팍 어딘가에 날아가 박히는 것 같은 주먹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다. 쏟아져 내려온 형광등 불빛이 선실 안을 내장처럼 까뒤집었다.

벽 한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붙어 있는 윤자, 코를 움켜 쥔 태호, 김씨의 손은 최 선생의 머리를 틀어쥐고 있었다. 누워 있는 것은 장 사장 혼자였다.

"당신 이거 왜 이래?”

"아이구 코야.”

"넌 뭐야.”

윤자가 눈이 부신 듯 미간을 찌푸렸다.

"미친다니까 미쳐.”

최 선생이 몸을 털며, 일어서려고 비척거렸다.

"놓쇼 이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아닌 밤중에 절구질인가--- 곤히 자는 놈 작신작신 밟아놓고서 미안허다는 말도 없네 그랴.”

"이봐.”

최 선생이 손을 들어 허공을 찔렀다. 술이 취해 엉망이었다.

사람이 방에다가 불을 켜놓아야지, 이거 깜깜하게 불을 끄고 뭐허는 짓들이야.”

"한 잔 빨았군. 드셔도 많이 드셨어.”

윤자가 종알거리고 나서 등을 보이며 누웠다.

당신들 전부 뭐야? 엉 뭐하는 사람들이냐 이거야. 죽고 싶어? 도대체가 말이야, 뭐냐 이거야 내 말은.”

"슨거연설 허슈? 지금.”

내 말은, 당신들이 어느 땐데 자고 있느냐 이거야. 우리가 지금 이 마당에서 경제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이게 지금 잠을 자서는 안 된다는 것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도 생각하는 바가 많다 이거요.”

"이 양반이 오밤중에 사람 깨워 놓고 반상회 허자네 젠장.”

김씨가 자리에 누웠다. 그는 하품을 했다.

"당신, 당신 지금 뭐라 그랬어. 할말 있음 일어나서 말하라구.”

"어이."

태호가 아직도 코를 매만지며 최 선생을 불렀다.

"당신 좀 너무하는 거 같애.”

"너무하다니. 지금 이 마당에서 너무하다니.”

". 사람 잠 좀 자자.”

"당신 잘 거야? 자겠다 이말이야?”

"그래. 해골 좀 굴려야겠다.”

", 자라구 그럭. 잘 놈은 자고, 갈 놈은 가고, 할 놈은 하고?

팔을 내흔들며 떠들고 있던 최 선생이 허공에 손을 쳐든 채 말했다.

"? 저건 뭐야.”

그의 눈길이 조그맣게 꼬부린 윤자의 등에 가 얹혔다

"이봐. 이봐. 네꾸다이 맸던 친구. 당신 자겠다구 했지? 이족으로 와서 자라구. 이쪽 말야 이쪽. 거기선 내가 잘 테니까.”

"이거 뭐 저런 게 다 있어."

태호의 음성에서 쇳소리가 났다. 그의 작은 눈이 살기로 깜박이는 것을 나는 보았다.

"니가 뭔데 사람을 일어나라 말아라 허는 거야?”

"이 친구 이거 안 되겠구만. 당신 지금 이 국민총화와 자연보호의 입장에서 이렇게 비판적으로 나오기야?"

최 선생이 부득부득 김씨를 타고 넘어가 윤자 옆으로 다가갔다. 태호의 주먹이 닿는 데까지만 오면 최 선생을 후려칠 자세였다. 순간, 오히려 뒤로 나자빠진 것은 태호였다. 최 선생이 그의 가슴팍을 머리로 받으며 내리 덥쳤던 것이다.

"아유, 정말 왜들 이래요.”

윤자가 소리를 지르며 발딱 몸을 일으켰다. 장 사장이 최 선생의 등덜미를 잡아 일으킨 것도 그때였다. 그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최 선생의 어깻죽지를 움켜쥐었다. 그의 팔뚝에선 혈관이 피가 튈 듯이 꿈틀거렸다.

"당신, 저쪽에 가서 자.”

장 사장이 내 옆을 눈으로 가리켰다. 그와 눈이 마주친 최 선생이 이제까지와는 아주 다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 자겠습니다. 미안함다, 술 끊겠습니다. 미안함다.”

"가라니까.”

", . 가겠습니다. 미안함다.”

김씨의 발을 타넘어서 최 선생은 내 옆으로 왔다.

그는 장 사장을 보았다.

"미안함다.”

그리곤 태호에게 말했다.

"낼 만납시다.”

고개를 돌리던 그는 내 팔을 툭 쳤다.

"어이, 한 잔 해야지. 낼 한 잔 하자구.”

최 선생은 희죽 웃고 나서 엎어지듯 자리에 누웠다. 나는 그의 머리맡에 베개를 놓아주었다. 그는 눕는 것과 거의 함께 잠기 들었다. 갑자기 우리들의 선실이 십여 미터쯤 밑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상한 적막감이 방안을 감쌌다. 내가 말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시더군요.”

김씨 목소리가 웅얼웅얼 새어나왔다.

"맞네. 맞어. 약 타서 먹구 달걀 노른자 타서 먹구, 게다가 또 맥주는 술 깨기 위해 먹는다나.”

아무도 없는 출입문 쪽을, 거기 마치 누가 서 있기라도 탄 듯이 쏘아보고 있는 장 사장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들으라는 듯이 내가 말했다. 나도 모르게 마치 최 선생이 내 동행이라도 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술 때문에, 그래서, 아마 섬으로 발령을 받아 쫓겨가는 모양이에요.”

장 사장은 천천히 시선을 거두고, 자리에 누웠다. 김씨가 일어나 앉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태호와 나도 담배를 꺼냈다. 윤자가 말했다.

"저도 하나 주실래요?”

우리는 말없이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태호가 최 선생을 보며 이를 갈았다.

"나도 술장사 몇 년에 손님도 별사람 다 치러 봤지만, 저런 거 저거 아주 제일 골치예요. 술 팔아 주는 거 하나도 고맙지 않아요. 저만 술처먹음 뭘 합니까, 다른 손님을 다 쫓는데.”

"술장살 허셨음 재미 좀 보셨겠수.”

"재미 봤죠. 돈도 만져 봤고, 그때, 그냥 꽉 쥐고 놓질 말아야 하는 건데.”

"? 실패허셨수?”

"뭐 실패라면 실패고,,,,,, 암튼 참 그전 돈벌기가 이렇게 쉽나 했었으니까 말하면 뭐합니까. 매일 밤 베개 옆에 돈 자루를 놓고 끌어안고 잤으니까요.”

"경기 좋을 때구랴.”

"왜놈들이 관광이다 뭐다 해서 막 쏟아져 들어올 때죠. 끝내줍디다. 그때 관광업계에서 돈 번 사람 많지요. 주다야싸를 했는데---”

"? 주 뭐요?”

"주다야싸. 주간 다방 야간 싸롱 말입니다. 관광기생 애들하고 손을 잡고 모자를 씌우는데, 일본애들한테 바가지를 씌운다 그거예요, 참 장사 한번 잘 됩디다. 단체 관광객 중에서도 (맨발의 청춘)은 안 되고주로 (황혼의 부르스)를 잡는 거예요. 젊은애들은 맨발의 청춘이라고 부르고, 늙수그레한 쪽이 황혼의 부르슨데, 손님은 관광 기생 애들이 물고 오거든요. 기생파티 끝내고 호텔 갈 때까지 시간이 한두 시간 비거든요, 이때 장사하는 거죠. 거 무식한 친구들, 정종을 사발로 먹는 애들도 있어요. 걔네들도 죽자고 고생하다가 한번 놀자고 오는 건데 돈 잘 씁디다. 그래도 일본보다는 싸다 이거예요. 그리고 또 우리 아가씨 걔들 쫘악 쫘악 빠지지 않았습니까.”

"거 일본관광객 중에는 노무자들도 많다면서요? 젠장, 우리야 원.”

"별거 다 있죠. 푸줏간 조합 팀, 쌀가게 주인들, 무슨 무슨 구락부,,,, 하여튼 손을 보면 일들을 해서 굳은 살이 박히고 엉망인 친구들 많아요. 재미있는 건 얘들이 왔다 가면서 제 파트너한테 양주나 화장품 같은 걸 선물로 준단 말입니다. 그걸 여자애들이 들고 우리한테 와요. 그럼 또 그 술을 우리가 사 주죠. 물론 싸게 사는 거죠, 그랬다가 다음 번에 오는 일본 애들한테 먹이는 거예요, 그 술을. 그땐 참 일본애들 돈 자알 썼습니다. 요새야 별 볼일 없어요. 그 애들도 까져 가지고 돈 안 써요. 한국이 어떤지 안다 이거죠, 그때 그냥 왕창 잡아야 하는 건데, 누가 알았습니까.”

"허허. 존 시절 다 보냈다는 얘기요?”

"또 시작하는 거죠.”

김씨가 하품을 했다.

"술장사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술 팔아 가지고는 안 돼요.”

"술장사가 술을 안 팔면?”

"웬만한 건물 있으면 딱 잡아 가지고 디리 고치는 겁니다. 돈 좀 들여 가지고 반짝 소리 나게 실내장식을 하는 거예요. 그리곤 애들 잘 빠진 걸로 갖다 놓고 손님을 끌어 땡긴단 말입니다. 한 동안은 북적북적하죠. 그때예요, 그때 그냥 다른 생각할 거 없이 눈 딱 감고 권리금 팍 얹어서 파는 거예요. 장사는 현상유지만 하면 되니까 서비스 팍팍 하고. 목돈은 권리금에서 건진다 이겁니다.”

"사장님? 잠은 안 자고 밤새도록 입으로 장사만 하실 거예요?”

윤자였다. 언제 누웠는지 윤자는 천정을 향해 반듯이 누워 있었다. 태호가 손바빡을 좌악 펴서 윤자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

"에이그, 이걸 그냥.”

김씨가 누우며 최 선생을 들여다보았다.

"아주 푹 퍼졌구만. 이 사람 코골기 전에 얼른 자야지. 에이그, 난 코고는 사람 옆에선 못 자겠드라.”

"불 끌까요?”

나는 일어서서 입구로 갔다. 김씨가 그 풍요한 식탁을 차리기 전에 나도 자고 싶었지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스위치를 내려 방의 불을 껐다. 밖으로 나왔다. 선실내의 후덥지근한 공기에서 풀려나며 나는 갑판 쪽에서 들어오는 차고 습기찬 바람을 들이마셨다. 통로를 나와 삼등 선실 쪽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매점은 문을 닫고 있었다.

갑판으로 향하는 문에는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나는 문가로 가서 바다를 내다보았다.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바다는 냄새로 느껴졌다.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밖에 나가면 안 됩니다.”

돌아보니. 붉은 황토 빛 스즈끼 복을 입은 선원이었다. 나는 문가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선실로 들어가게요. 위험합니다.”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쇠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서 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흰 벽돌 사이로 쏟아져 들어온 바람이 휘몰릴 뿐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3등 선실 계단 쪽으로 누군가가 토해 놓은 오물이 보였다. 출입긍지. 통제구역, 당기지 마시오. 관계자 외는 출입을 금함. 이곳 저곳에 붉은 색으로 써 붙인 글자들이 뚜벅뚜벅 발소리를 내며 달려나올 것 같았다.

바다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불빛이 배의 좌현을 비치고있을 뿐이었다. 냄새로 다가와 있는 바다가, 배의 흔들림으로만 느껴지는 바다가 거기 있었다. (청도)에서 바라보던 사흘 동안의 바다. 미기의 사흘이 보여 주던 바다. 그것은 자궁 같았다. 이 세상의 모든 사라지는 것들과 새로 태어나는 것들의 자궁 같았다. 때로는 무덤이기도 했던 바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죽음과 패배가 거기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바다였다. 햇빛 속에서 반짝이고. 긴 날개를 가진 새들이 물을 차고 오르고, 어선의 옆구리를 간지르듯이 물결을 띄워보내고, 파도를 뒤집어 옥색으로 빛내며 해안을 핥는 바다는 아니었다.

그때 나는, 사람의 핏속에 있는 염분의 농도와 바다의 그것이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쥐어짜면 거의가 물인 우리들의 육체. 우리들이 만드는 모든 일이 흘러가는 것이어서만은 아니라 해도, 우리는 왜 행복과 죽음이라는 빛과 그늘을 바다에서 함께 보는 것일까. 흘러서 물이 되는 우리들. 그러나 바다는 남는다. 흐르는 것은 강일 뿐, 바다는 언제나 남는다.

거기에 있다.

"어이, 청년.”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붉은 스즈끼의 선원일 것이다. 나는 돌아섰다.

"당신 왜 들어가라는데 말 안 들어? 위험하니까 하는 얘기야.”

내가 아닌, 그는 다른 무엇엔가 화가 난 얼굴이었다. 나는 그것이 악천후이기보다는 바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담배를 선실 바닥에 밟아끄고 나는 계단을 올라갔다

 

7

 

", 너 이 손치우지 못해.”

방안은 캄캄했다. 다들 잠이 든 시간이었다. 윤자의 목소리가 칼처럼 이어지며 어두운 선실을 찢어내려갔다

"이게 어딜 만지는 거야 지금 야, 너 좀 일어나?”

윤자가 불을 켰다. 나는 눈을 감은 채 태호를 잡아 흔드는 윤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게 정말 웃기고 있어. 어쭈,,,,,, 그렇게 잠이 깊이 드셨었어?”

"불은 왜 켜고,,,, 이러슈.”

"몰라서 묻니?”

부스럭거리며 태호가 일어났다.

"어이, 살살 좀 얘기하자구, 응 살살,,,,,”

"웃기고 자빠졌네. 너 정말 왜 이래? 내가 몰르는 줄 아니. 히프를 건드릴 때도 내 모른 척했다. 자다가 그런 수도 있다고 접어줬다 이거야. 그런데도,,,,,, 이게 어디다가 손을 집어넣어?

"내가? 내가 아가씰 만졌단 말야? 무슨 소리야, 난 잤다구.”

"잤어? 주무셨어? 그러셨구만. 난 병신인 줄 아니? 자긴커녕 숨소리만 새액새액거리면서 보시락거리던 게 뭐라구? 주무셨어? , 남자면 좀 남자답게 놀아.”

"그래. 안 잤다 왜?”

"뭐 이딴 남자가 다 있어.”

"너 말 막하기야? 그래서,,,,,, 좀 만지면 안 되냐, 뭐 닳기라두 하냐? 별게 다 같은 배에 타 가지고 사람 속을 긁네. 여자면 좀 챙피한 줄을 알아라.”

찰싹하는 소리가 들렸다. 윤자의 손이 나가 태호의 어딘가를 때렸나보았다.

"어어어, 너 정말 뵈는 게 없어---"

이어서 퍽퍽하는 소리가 두 번 들렸다. 이번엔 태호가 윤자를 치는 것 같았다.

"니가 뭔데 사람 치니? 어디, 쳐 봐라, 쳐 봐.”

나보다 먼저 일어난 건 김씨였다. 그는 태호의 어깨를 잡아뒤로 밀어 놓으며 말했다.

"이 사람들아. 내외간도 아니면서 왜들 자다 말고 쌈이여 쌀이=

"저게 먼저 파리채를 올려붙이잖아요.”

"어허, 이 사람.”

태호가 뒤로 물러앉은 만큼 앞으로 다가가면서, 윤자가 그의 턱밑에 손가락을 치받쳤다.

", 너 뭐 하는 새끼야? 이게 어디서 굴러먹던 게 실실 까고 있어.”

윤자의 음성에 눈물이 내비치고 있었다.

"어이구 이걸 그냥.”

"그래? 어디 또 쳐봐라. 매맞고 가만있을 사람 있는 줄 아니? 돈 많으면 어디 한번 쳐 봐. 죽여줍쇼 해도 뭐한 판에 나 참 티꺼워서.”

최 선생은 푸륵푸르륵 입술을 물며 자고 있었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은 발 들여놓을 틈이 없었다. 물을 뿌려 닦아내기는 했지만 아직도 여기저기 토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세면장의 수도꼭지 위에도 누군가가 토해 놓은 국수 가닥이 걸려 있었다. 나는 갑판으로 난 문가에 서서 오줌을 누웠다.

안으로 들어오던 나는 선실 입구에 기대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장 사장을 보았다. 바람이 담뱃불에서 불티를 날리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몸을 돌리며 등뒤에서 말했다.

"학생, 술 한 잔 하겠소?"

나는 시계를 보았다. 두 시가 넘어 있었다.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매점이랑 식당도 다 문을 닫았습니다.”

"술은 나한테 있어.”

"그럼 한 잔 주시겠어요.”

"기다리슈.”

선실로 들어갔다 나온 장사장 손에는 누런 종이 봉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가 내 손을 끌었다.

"이리 오슈.”

우리는 길게 좌우의 선실 사이로 난 통로를 빠져 나갔다. 선수(船首)쪽으로 나아가던 장 사장이 밖으로 난 문을 열었다, 바람이 훅 가슴을 막았다. 좨 넓은 공간이 거기 있었다. 지붕이 있는 선수 쪽 갑판이었다. 다리를 갑판 바닥에 부착시킨 철제 벤치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어서, 맑은 날 거기 앉아서 바라보는 바다는 어떨까 생각하게 했다. 장씨가 술과 오징어포를 담아 가지고 온 봉지를 찢어 내게 건네주었다. 철제 벤치에는 빗물이 번들거렸다. 우리는 종이를 깔고 벤치에 앉아 술을 마셨다.

배가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한 사람이 잔을 받을 때면 다른 사람은 술병을 들고 기다렸다.

"괜찮을까요, 방에서들?”

"그 아가씨가 송씬가 하는 사람한테야 어디 지겠습디까.”

내가 잔을 건넸다.

"멀미를 안하시네요.”

"멀미가 날까 봐, 술을 먹는 거요, 어째 뒷골이 무지륵한게 영 안 좋군.”

우리가 서너 잔쯤 술을 돌리고 났을 때였다. 장 사장이 내 팔꿈치를 치며 말했다.

"봤소?”

"? 뭘요?”

"저기로 내려가는 사람.”

"아니오.”

나는 그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현등(舷燈)이 비쳐주고 있는 배 앞머리 쪽으로 통로의 입구가 동굴같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누가 그리로 갔습니까?”

"우리 방의 미스 강인가 하는 그 아가씨 같애. 분명히 여자였어.”

"저긴 어딘데요?”

"밑으로 내려가면 화물 싣는 데지. 이걸 좀 잡고 있게나 내가 가보고 올 테니까.”

"조심하십쇼.”

잔과 술병을 양손에 들고 나는 화물칸 입구로 걸어가는 장 사장을 바라보았다. 컴컴한 입구에 서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그의 뒷모습을 마스트 등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의 몸이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면서,

"누구요? 거기?”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장 사장이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온 것은 바로였다.

"무슨 일입니까?

내 말에 장 사장이 대답을 할 필요는 없었다. 어둠 가득한 입구에서 뒤따라 걸어나온 것은 윤자였다. 팔꿈치를 앞가슴에 모으며 윤자가 몸을 떨었다.

"아유, 사람을 그렇게 놀래게 하는 게 어딨어요.”

"난들 알았나. 미안허우.”

"하마터면 밑으로 떨어질 뻔했잖아요. 아유, 놀래라=

"아니, 화장실은 놔두고 그 껌껌한 데서 일을 볼 건 뭔고.”

"저 아저씨 정말, 미쳤나 봐.”

윤자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갑판으로 나가는 문은 모두 잠겼고 화장실은 엉망이어서 겨우 찾아낸 곳을 장 사장이 따라갔던 모양이었다.

"아저씨들이야말로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옴머, 무슨 술 인심이 그래요. 여기 나와서 두 분이만 드시다니요.”

"생각 있음 같이 앉지 그래. 싸움은 다 끝났나?”

나는 내가 깔고 앉았던 자리를 윤자에게 내주며 말했다.

"그쪽은 젖었어요. 내 술은 아니지만 한 잔 받으시죠

장 사장이 비워놓고 갔던 종이컵을 윤자에게 내밀며 내가 술을 따랐다. 윤자는, 고마워요라고 조그맣게 말하며 술잔을 받았다. 몸을 떨며 잔을 비운 그녀가 장 사장에게 잔을 돌렸다. 나란히 앉아서 우리는 어둠과 바람과 안개를 지켜보며 술을 마셨다. 이따금 천정에서 빗방울이 떨어져 목덜미를 선득하게 했다.

"아가씬 섬엔 뭐하러 가?”

"결혼하러요.”

"결혼? 모를 일이군, 섬에서 육지로 시집을 나온다는 말이야 들었지만, 결혼을 하러 섬으로 들어간다니.”

". 그렇게 됐어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바람이 윤자의 머리칼을 날리며 지나갔다. 현등이 희미하게 그녀의 얼굴을 비켜주고 있었다.

"남자를 하나 사귀었걸랑요. 그런데 그 남자 말이 제가 좋대요. 거짓말은 아닌 거 같고요.”

"그 남자가 (아라도)에 사나 보군.”

". 잘 아시네요.”

윤자가 내게 술잔을 건넸다.

"어떻게 된 일인가 하믄요, 그 남자가 교통사고를 당했거든요, 다리랑 막 다쳤는데 병원에 몇 달 있었나 봐요. 근데 마침 제가 있던, 집이 바로 그 병원 옆이었어요.”

"환자가 술을 먹으러 다녔단 말인가?”

"아 아니에요, 아저씬. 몸은 거지반 다 나아서 퇴원을 해도 되는데 보상금이랑 그런 문제가 해결이 안 돼서 병원에 그냥 눌러 있을 때거든요. 사귀어 보니까 참 순한 남자데요. 기술도 좋나 봐요. 전파사를 하는데, 내 전축도 첨 살 때보다도 더 소리가 잘 나게 고쳐 주고 그랬어요. 약보다도 몸을 추스려야 할 때니까, 뭘 잘 먹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이따금 닭도 사다가 고아주고 그랬어요. 그냥 그랬거든요. 그런데 이 남자가 퇴원을 해서 가더니 편질했는데, 결혼하자는 거예요. 그전에는 뭐 그런 얘기는 없었거든요. 내가 안 오면 자기가 육지로 나오겠대요, 끝까지 따라다닐 거라나요. 그래도 뭐 웃긴다 싶었는데,,, 이 남자가 요전에 온 편지에 뭐랬는지 알아요? (아라도)에는 이별이 많대요. 거기 붙박아 사는 사람은 늘 있던 사람들이고 새로 왔던 사람은 다 떠난대요. 이별이 많다는 섬--- 그 얘길 들으니까 가고 싶잖아요. 왔다간 떠나고 또 떠나는 그런 섬에서 나는 떠나지 말고 살자. 그러면 어떨까 생각하니까 갑자기 가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짐을 챙겼어요.”

"잘 되면--- 우린 섬에서도 더러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군. 한 잔 더 하겠소?”

이번에는 장 사장이 윤자에게 잔을 건넸다. 술을 받으며 윤자가 말했다.

"그런데 있죠, 그 남자가 다리를 약간 절어요. 교통사고 때문에.”

"어떻겠소. 다리가 문제요, 마음을 저는 사람도 있는데.”

"옴머. 아저씬 정말 철학자 같으셔.”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장 사장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별이 많은 섬 ,,,,, (아라도).거기뿐이겠소, 섬에는 어디나 이별만 많지. 좋은 섬이라더군요. 봄이면 섬 전체를 휘덮으며 노란 불이 타듯이 유채 꽃이 핀다니까. 계절 따라 불빛도 다르고 가을이면 또 억새가 온통 하얗게 날려서 섬 전체가 갑자기 늙어버린 것 같다드군"

"희귀식물도 많다면서요?”

나는 내 달력 속의 풍란을 떠올렸다.

"식물뿐이겠소. 여름이면 수만 마리의 나비가 온 섬을 뒤덮으며 날아 오른답디다. 뷰월이면, 모든 밭에서 보리 짚을 태우는데 그 연기가 섬을 휩싸서 배를 타고 가던 사람들은 구름이 한 무더기 바다에 내려와 있는 줄 알고 놀란다드군.”

"거길 가 보면 마치 섬이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 같대요.”

"어디서 날아왔는지 겨울이면 까마귀가 또 온 섬을 덮어서, 암벽인 줄 알고 다가가 보면 까마귀 떼라드군요.”

"그곳 사람들에게는 솟아 있는 건 전부 남성이고 구멍 뚫린 거나 움푹 파인 건 전부 여성이어서, 그런 곳마다 제사를 지낸다니까...... 그뿐이겠소. 섬 주변에 늘 안개가 심하고 암초가 많아서 배가 접안하기가 힘들어서도 그렇겠지만 바다에다 굿을 하는 게 연중 끊이질 않는다

는군.”

", 있지요. 거기선 백정을 피쟁이라고 부른대요. 어쩜 글쎄 환쟁이 옹기쟁이 하듯이 피라는 말에다 쟁이를 붙였나 몰라요.”

술이 끝났다. 우리는 일어섰다. 안개가 짙어지고 있었다. 장 사장이 말했다.

"이게 벌써 (아라도)의 안개는 아닌가 모르겠군.”

앞서 가던 윤자가 물었다.

"아저씬 정말 거길 살러 가게요?”

"그렇다니까.”

윤자의 굽 높은 신발이 통로바닥을 찍듯이 발소리를 냈다.

"미스 강은 그렇게 높은 구두를 신고도 넘어지지 않어?”

"칠 년 동안 카바레에서 비볐지만 그런 실수는 없었어요.”

 

8

 

잠이 깨었을 때 밖은 이미 밝아 있었다. 반쯤 젖혀진 커튼 저편에서 들어오고 있는 흐린 빛을 나는 보았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장 사장은 보이지 않았다. 창틀에 놓아두던 그의 담배도 성냥도 보이지 않았다. 김씨는 무좀이 번진 발가락 사이를 후비며 앉아 있었고, 최 선생과 태호는 아직 자고 있었다. 나는 선실을 나왔다. 통로로 안개가 새어들고 있었다.

갑판으로 나서려다가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하 하는 탄식이 내 마음속에서 둔중하게 북을 올렸다. 해무(海霧)였다. 엄청난 안개가 배를 둘러싸고 있었다. 갑판의 몇 미터 앞 난간이 희미하게 바라보였다. 그것은 마씨 연필로 샜던 글씨를 지워버리고 남은 자국 같았다.

안개는 솜으로 배 전체를 감싸버리듯 뒤덮여 있었다. 바다도, 바다 저편의 그 무엇도 배의 이물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문 저편은 다만 안개 뿐이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나는 문득 이 안개가, 이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내내 나를 감싸고 있던 어떤 두려움이 형상화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랬다. 나는 공포 속에 있었다. 낯선 공간으로 떠난다는 데 대한 공포와, 섬으로 나의 등을 밀어낸 저 육지의 나날에 대한 공포, 그리고 내가 다시 그 곳에 돌아갔을 때 그것이 섬이든 아니면 육지든 나를 감쌀 절망이라는 공포-, 나는 그것들 속에 있었던 것이다. 휘몰리는 안개의 숲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내가 혼자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장 사장이든 김씨든--- 누군가가 있을 선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 안개 속에서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그것은 가라앉았던 물체가 물위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알아보기가 더욱 늦었다. 선원이었다. 그의 얼굴에 안개가 느적느적 달라붙어 있는 벗 같았다. 안으로 들어서는 그에게 나는 물었다.

"얼마나 남았읍니 까?(아라도)까지는,,,,.”

그가 잠깐 내 얼굴을 마주보았다. 나는 그가 앞가슴에 매단 명찰에서 (사무장 김호익)이라고 새겨 있는 것을 보았다.

"모르셨습니까?”

"배를 처음 타 봐서 ,,,,,,"

"방금 전에도 방송을 해 드렸는데 ,,,,,, 우린 지금 (청도)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아니,,,,,,"

나는 망연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개 때문에 접안이 불가능합니다. 근해에는 정박할 데도 없고, 여름철엔 이따금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아라도)엔 못 간다는 얘기군요.”

그가 싱긋 웃었다.

"갔다가 기상이 호전되는 대로 다시 와야죠. 들어가 쉬십시오, 느긋하게.”

안으로 들어오며 나는 그의 말을 되씹어보았다. (청도)로 돌아간다는 것도 안개가 걷히길 기다려 다시 온다는 것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느긋하게 쉬라는 그의 말에 수긍할 수는 없었다. 선실로 돌아왔지만 장 사장은 보이지 않았다. 윤자가 일어나 머리를 빗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아내를 부축하고 방으로 데려다 주는 김씨가 통로 끝에 보였다.

그는 내 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이놈의 배가 가자는 섬에는 안 가고 (청도)로 도로 간다면서?”

"갔다가 다시 온답니다. 느긋하게, 쉬랍니다.”

"지금 자네는 누구 복장을 긁자는 건가? 사람이 살고 봐야 헐 거 아녀. 태풍불어 못 떠나, 안개 때문에 돌아가,,,,,, 이러다가 인부 다 써 버리고, 공사 다 끝나 버리면 어쩌자는 거여. 우리 마누라는 배 위에서 애 낳게 생기지 않았냔 말여, 애나 낳겠어? 에미가 먼저 죽을 판인데. 없는 놈 노자 돈도 좀 생각을 해줘야지, 무슨 우라질 천기(天氣)가 이렇대여.”

김씨 눈에서 번득이는 것이 있었다. 그의 눈가에 물기가 잡히는 겻을 나는 보았다.

"어떻게 되겠죠,,,,,,"

"도대체 누구 죽는 끌을 볼라구들 이런대. 이래 가지구 이거 사람 살겠나 말여.”

삼등 선실로 내려가는 계단 옆의 세면대에서는 청년 하나가 머리를 감고 있었다. 이 바다에서, 안개 속에서 접안도 못하고 돌아가는 배 안에서 머리를 감고 있는 사내에게서 나는 모욕감을 느꼈다. 삼등 선실에서는 잠에서 깨어난 누에처럼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매점에서 빵을 사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거기에도 장 사장은 없었다. 오늘 아침에 우리가 잃어버린 섬에 대해서, 그 섬을 앗아간 안개에 대해서 나는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싶었다

장 사장을 찾은 것은 식당에서였다. 배의 이물 쪽 창가에 앉아 그는 아침을 먹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 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창 밖 저편은 안개에 가려져서 창호지를 바른 듯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가 앞에 놓고 앉아 있는 국수 그릇과 병 바닥에서 찰랑거리고 있는 이 홉들이 소주병을 보았다.

"들으셨어요? 배가 (청도)로 가고 있답니다.”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한참 동안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소주를.”

"해장일세.”

그는 잔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

"자네도 아침 먹어야지. 우동 밖에 안 된다는군.”

나는 주방 쪽에다 대고 우동을 시켰다. 담배를 피워물던 장 사장이 중얼거렸다.

"못 견디겠군.”

비로소 나는 그의 얼굴에 어려 있는 참담함을 보았다. 코밑과 턱을 덮고 있는 수염은 상처 같았다.

"자넨 아마 모를 걸세. 어젯밤에 김씨라는 그 사람이 그랬지, 자기는 돈 만큼만 일한다고. 일당 주는 만큼만 일했지 책임을 져서 일을 한 건 아니라고 한 말, 자네도 생각날 걸세. 그러나 우기 같은 사람은 달라. 이 세상에 자기가 책임질 게 없다고 느낄 때 자유를 느끼는 게 아니라 얼마나 불안하고 절망스러운지 자네는 모를 걸세.”

나는 마지막 남은 술을 그의 잔에 따랐다.

"자네도 날 사장이라고 부르더군. 내가 무슨 사장인가? 물론 자네만은 아냐, 술집엘 가도 은행엘 가도 날 사장님이라고는 부른다네, 돈이 있으니까. 그러나 나는 그 사()라는 게 없네. 회사가 없어. 책임질 게 없다는 얘기야. 왜냐구? 난 은행이자만으로 십 년 가까이 살았네. 이자만 따먹으면서, 소위 돈벌이라는 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말일게. 은행에 전화 하나만 하면 지점장이 나와서 점심사고 술 사지, 골프도 치고. 그게 뭔 줄 아나? 난 쓸모가 없어진 거라네. 은행 지점장하고 단골 술집 빼놓고 나라는 인간은 아무 데도 쓸모가 없어진 걸세, 그게 십 년 세월이라면--- 자네는 이제 와서라도 뭔가 유용(有用)해지겠다는 생각을 한 나를 이해할 수 있겠나? 섬에 가서 흑염소라도 키우면서 뭔가 쓸모 있는 인간이 되어 보겠다고 생각한 건, 이건 내 진실이었네. 엄격하게 말하게. 결코 늙은이의 감상이 아니었다네.”

식당 종업원이 우동을 가져다 놓고 갔다. 단무지 한 접시도. 나는 안개를 내다보았다. 상식이란 늘 그렇다. 그리고 그 상식으로 남을 이해한 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무책임이 있을 뿐이다. 내 무책임이 말했다.

"그 돈으로 무슨 사업을 하시지 그러세요. 왜 하필 흑염소여야 하나요?”

"십 년이야. 아무 것도 안하고 산 게 십 년이라면,,,,,, 자넨 뭘 할 수 있을 거 같나? 우리 큰애가 국민학교엘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난 아마 쓸모 있는 인간이었을 거네. 월급쟁이. 소시민. 책임이 중한걸 알면서 한 평 짜리 책상 앞으로 매일 출근을 했었어. 그때 우리 큰애가 병원에 입원을 한 일이 있었는데, 퇴원을 하고 나서 어느 날 그러드군. 아빠, 나 또 팔 부러져서 입원하고 싶어. 그 이유가 뭐였는지 아나? 입원을 하고 있으니까 같은 반 애들이 병문안을 온다고 우유랑 사과랑 사 가지고 왔던 걸세. 우리 애는 그 우유랑 사과가 또 먹고 싶었던 거야. 무슨 얘긴지 알겠나? 내 가난을 말하고 있는 걸세. 그리고 나서 몇 년 후--- 강변의 우리 집 배추밭이 팔리기 시작했네. 땅콩 밭도 팔리고, 닭장도 돼지우리도 다 팔리더군. 아버님이 농사를 짓고 계시던 땅들이지. 개발붐, 투기붐, 붐 붐 붐--- 우린 이제 부자가 됐어. 돼지울이 있던 땅을 백 평만 잘라 팔면 일년을 먹고사는데, 내가 왜 애 우유도 못 먹이는 회사엘 나가겠나. 이해할 수 있겠나? 나도 그런 생각이네, 날 합리화하자는 게 아니라 나 아닌 누구라도 그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을 거라고 말일게.

예금통장 하나 가지고 앉아서, 이따금 건물 하나 지어 세나 받아먹고 ,,,,,, 그렇게 사는 것도 차츰 습관이 되더군. 뭔가를 가지려고 하고 뭔가가 되려고 하는-그럴 욕망이 전연 없는 자가 결국 어떻게 되는 줄 아나? 난 그랬네. 처음엔 아무 것도 안 해서 좋았다가, 그 다음엔 하려고 해도 할 게 없다가, 나중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능력이 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어. 일을 하지 않고, 놀기만 하며 살던 내게 한번은 희망이 하나 생겼는데, 그게 뭔지 아나? 좀 아파 보고 싶다는 거였네, 병에라도 걸리고 싶었어,,,,,,"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손가락으로 꾸욱꾸욱 쥐어짜듯 눈가를 눌렀다. 나는 그 모습을 끝내 바라볼 수가 없었다.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이건 알아야 하네. 우리 아버님은 달랐어. 그 양반은 그냥 농사꾼으로 남드군. 시골에 땅을 사서 또 거기 들어가 농사를 짓더란 말일세. 여전히 배추도 심고 돼지도 기르고 비닐하우스도 하시는 거야. 우린 노인네가 청승을 떤다고들 그랬지. 아냐, 그게 아니었어. 그때 난 몰랐던 걸세. 어찌 알았겠나--- 왜 아버님이 그 일을 버리지 않았는지를 그 때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나.”

현창(舷窓) 밖에서 휘날리고 있는 안개를 바라보던 그가 눈길을 돌렸다. 그는 내 앞에 놓인 국수를 내려다보았다.

"이 사람아, 국수가 다 불지 않나=

나는 입술이 메말라 와서 혀를 굴렸다. 입안도 건조했다. 메마른 입술이 나의 것 같지 않게 느껴졌다. 그것은 어젯밤에 마신 술 탓만은 아니었다.

"어때, 자네도 한 잔 하려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나. 술이나 먹고, 들어가서 잠이나 자세. (청도)로 돌아가는 데야 잠이 안 올 이유가 없지.”

그는 소주 한 병을 더 시켰다. 불어터진 우동 가락이 그릇에 불룩 올라 와 있었다. 우리가 서로의 잔에 소주를 부어놓고 났을 때였다. 발소리를 덜커덩거리며 달려온 것은 김씨였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 여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오. 빨리 좀 와 보셔?”

김씨가 장사장의 팔목을 잡았다.

"도둑을 맞았다 이말이요. , 그 송가라는 녀석 있지 않아요. 그 녀석이 내가 방엘 들어가니까 장 사장님 가방을 뒤지고 있질 않겠수. 날 보더니만 이 녀석이 놀래서 뛰쳐나갔는데, 내가 따라가며 소릴 질렀더니만 들고 가던 장사장님 지갑 같은 걸 바다로 내던지더란 말이오. 지가가면 어딜 가겠소, 바다 위에 뜬 밴데, 독안에 든 쥐보다 나을 거 없지. 고얀 놈,,,,,, 어서 가자니까요.”

식당안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들에게 쏠렸다, 장 사장은 김씨에게 잡힌 손을 뽑았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버려두십시오. 돈이 모자랐던가 보죠. (청도)에서도 난 몇 번 그 사람을 봤습니다.”

내가 물었다.

"(청도)애서요?”

"밀항을 하려는 사람이야. 일본으로 갈 배를 구하드군. 비용이 좀 모자랐나 보지.”

"지갑을 버렸다잖습니까?”

"지갑--- 내 주민등록증이 바다에 빠졌다구--- 나 대신 투신을 했군. 갑자기 그가 끌끌끌끌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는, 조율사(調律師)의 손에서 두들겨져 나가는 피아노 소리처럼 점점 드높아졌다.

"이보게. 자네 아나? 안약 어젯밤 비가 안 와서 물결이 잔잔하고 달도 떴다면. 그랬다면 말일네 난 아마 죽었을 걸게.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난 아주 꼼꼼하게 모든 것을 보면서 왔어. 뭔지 알아? 이 세상 모든 게 내가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난 죽을 작정이었네. 내가 (아라도)에 대해서 해 준 얘기, 그건 다 거짓말일세.”

 

세면장 앞에서 만난 최 선생은 물 물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웃었다. 눈이 부어 있었다.

"배 가 돌아산다면서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십니까? 어젠 많이 취하셨던데.”

"어쩌다가---, 또 마셨는지 모르겠어. 어젠 정말 끊자고 마신 술이었는데."

"아직은 안 끊으셔도 되겠습니다. 분명히 오늘은 섬엘 안 가도 되니까요. 그렇죠?”

최 선생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번 문질렀다. 안개가 배 안으로 스멀스멀 기어들고 있었다. 어젯밤에 본 그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최 선생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혹시, 어제 섬엘 가면 다시는 못 나을 것 같다는 얘길 안합디까?”

"들은 것 같습니다.”

"배가 (청도)로 돌아간다는 게---, 이상한 생각이 드는군. 내가 술을 안 끊으니까 그런 거나 아닌지 모르겠어.”

최 선생은 아주 가까이에, 확실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아라도)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지간, 어쨌든 마신다는 건 좋은 거 아니오? 식당에 사람 많습디까? 한 잔 해야겠군. 배는 (청도)로 가고 있으니까,,,,,, 어쨌든, 섬으로 가고 있는 건 아니잖소.”

선실로 돌아왔을 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윤자뿐이었다, 작은 손 거울을 펴들고 화장을 하고 앉았다가 윤자는 나를 흘끔 쳐다보았다.

"섬에서 남자분이 많이 기다리겠군요. 배가 계속 이 모양이니---.

"기다리라죠.”

윤자는 눈가에 푸르게 아이새도우를 칠했다. 색깔이 짙어지면서 큰 눈이 더 커지고 있었다. 윤자는 손거울 속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뭘 봐요? 코 잘못 세워서 시퍼렇게 된 여자 첨 봤어요? 하긴 뭐, 강 윤자 인생에 멍든 데가 한두 군데래야지.”

그녀가 입술에 루즈를 칠하기 시작했다.

"--- 그만둘까 봐요. 내가 섬에 가서 뭘 하겠어요, 이별이야 뭐 어디는 많지 않아요. 암튼 난 내가 귀여워 죽겠어요. 내가 이만큼이라도 왔다간다는 게 얼마나 귀여워요. 하마터면,-, 정말 갈 뻔했잖아요--- (아라도).”

그녀가 루즈를 든 채, 입술을 뾰족히 내밀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오므렸던 입술을 펴면서 웃었다. 소리 없이, 종이가 팔랑거리듯이, 화사하게 .

"다들 어디 갔어요? 오라구 해요. 그냥들 갈 거예요? 화투라도 쳐야할 거 아녜요. 안 그래요? 뭐 이래 정말.”

 

 

9

 

나는 깊이 안개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어젯밤 우리들이 앉아서 술을 마시던 벤치도 안개에 젖어서 축축했다. 바다 위에 떠서, 안개에 둘러싸여서 나는 담배를 피웠다.

------하고 나는 가만히 불러보았다. 나는 박명(薄明)의 시간에 떠났었다. 서울은 밤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박명이었다. 안개 속의 바다.

왜 어딘가에 가서 이르는 데는 어둠의 시간이 필요한가. 그 낯선 공간에 숨어들기 위해서인가. 언제나 또 하나의 박명의 공간으로 남아서 우리를 기다리는 섬, 아아, 섬에 가기는 어렵다. 나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갇혀 있는 자유, 그것이 섬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 가슴에 들어와 있는 섬을 보았다. 어떤 땅과 나 사이에 하나의 실이 풀어져 나가 끈으로 맺어진다는 것, 누군가와 나 사이에 솜털 같은 잔뿌리가 서로 얽혀 있음을 느낀다는 것, 하나의 섬과 육지 사이에 안개 가득한 뱃길이 열린다는 것---, 그 따뜻한 유대와 친화의 물결 위에 떠 있는 섬. 이제 섬은 내 안에 들어와 있었다. 비와 안개가 퍼둠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밤을 함께 보내고, 그들의 침묵과 꿈과 실패와 비굴이 모여서 만들어진 섬--- 선실에서의 하룻밤, 그것이 나의 (아라도)였다.

내 가슴에 들어와 있는 섬,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아니면 이웃이라고.

 

 

 

지은이 : 한수산(韓水山: 1946- )

 

강원도 내설악 출생. 춘천고 졸업. 경희대 영문과 졸업. 1972<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사월의 끝>이 당선되어 등단. 1973년 장편 <해빙기(解氷期)의 아침><한국일보>에 입선. 그는 특히 산문시와 같은 부드러운 문체를 통하여 시간과 생명과의 상관 관계 및 생명의 가치에 대한 탐구를 보여 주는 작가로 평가된다.

주요 작품으로는 <부초>, <안개 시정 거리>, <유민(流民)>, <밤의 찬가>, <욕망의 거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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