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 일기
-현길언
1
"잠이 안 와?"
"응."
청년은 벽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새우처럼 오그라들며 신음하듯 대답했다.
이틀 동안 잠에만 파묻혀 있던 그는 사흘째되면서부터 다시 불면에 괴로워하기 시작하였다,
"왜, 겁나?"
"아니요."
"그럼?"
“……"
청년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한다면서도 말이 쉽게 이어지질 않았다,
그 동안 밤낮 이틀을 죽음처럼 잠에 빠져 있다가 엊저녁부터 긴 혼미에서 깨어난 그는, 비로소 차차 맑아지는 의식 속에 휑뎅그렁하게 내동댕이쳐진 자신을 보게 되었다.
두 사람이 발을 뻗고 누우면 꽉 찰 다락은, 창이라야 겨우 네모진 한 뼘의 통풍용뿐인데, 그것도 까만 천으로 꽁꽁 가려져 있었다. 방안의 어둠은 선풍기 조명등으로 약간 흐트러져 있었고 무료하게 위잉 윙 가냘픈 소리를 내며 돌고 있는 선풍기는 도는 게 아니라 잉잉 울면서 떨고 있는 느낌이다. 아래층 방의 벽장 속으로 사람이 겨우 드나들 만찬 통로가 널빤지로 덮여 있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고 다녀야 할 정도로 낮은 천정엔 거미줄이 먼지를 쓰고 덜렁거리고 있다.
경사가 약간 심하게 지어진 뾰죽지붕 속에 창고용으로 만들어진 다락이지만, 밤이 되어 어둠이 쌓이면 하나의 자유로운 공간으로 퍽 안온한 느낌을 청년에게 주었다. 캐시밀론 간이침대 위에 폭신한 양털 담요를 깔고 온 나절을 숱한 생각 속에 보내는 청년은, 밤이 오면 그 모든 것은 어둠과 함께 잊혀져 버린 채 깊은 잠 속에 빠져 버린다. 그것은 청년에게 유일한 자유였다.
똑, 똑, 똑---
꿈에서인가. 또렷한 소리가 백지 위에 까만 점을 찍듯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어깻죽지에 와 닿는 습한 냉기를 느꼈다. 그 기승을 부리던 늦더위 기억이 사라지기 전이어서 그 기운은 청신하게 느껴졌다. 가을이 오고 있다. 뭔가 변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청년은 벽을 향했던 몸을 뒤척였다.
"비가 와요?"
청년의 입에선 탁한 목소리가 급하게 울렸다. 그의 버릇이었다. 기대와 불안에 얽힌 마음은 그렇게 탁한 목소리로 튀어나오기 일쑤다.
"안개가 아주 짙어. "
여인은 어둠 속에서 청년의 몸짓을 눈 여기며 안심시키듯 말했다.
"저 소리는?"
"안개가 물방울이 되어 떨어지는 거지."
여인의 목소리는, 갓 입학한 국민학교 1학년 애들에게 하는 여선생처럼 자상하면서 가라앉아 있다.
청년은 후딱 자리에서 일어나 네모진 창으로 다가갔다. 아랫도리까지 내려온 헐렁한 긴 잠옷이 희미하게 여인의 눈으로 들어왔다. 미국으로 떠난 스미스 소령이 입던 것이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푹 나왔다.
도시도 잠 속에 묻혀 있었다. 안개에 눌리고 어둠에 에워싸여 있는 희미한 가로등들이 청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멀리 미군 병영에는 흡사 별처럼 보이는 등불들이 촘촘히 서러운 얼굴로 서 있고, 병영의 망대에서 내쏘는 강한 서치라이트가 이 잠자는 도시를 이따금씩 핥으며 지나갔다.
이곳을 향하여 천천히 다가오는 서치라이트 불빛에 청년은 겁에 질린 얼굴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와 동시에 섬광이 다락 벽을 할퀴며 지나갔다. 번개에 놀래는 어린애처럼 청년은 머리를 침구에 처박고 숨을 죽였다.
"저 빛 싫어?"
여인의 손이 청년의 가슴에 닿았다.
"저건 괴물 같아. 아니면 폭군이고"
청년은 신음같이 중얼거리며 숨을 헐떡였다.
"불빛을 왜 두려워해."
"저 강렬한 빛, 온 세상을 손아귀에 넣어 짓이겨 버리려는 저 오만한 빛이 날 콱 삼켜 버릴 것 같아요."
"빛이 희망을 줄 수도 있어."
"제겐 가망이 없어요. "
"그건 생각 나름이야. "
"생각이 아니고 그건 현실이에요. 전 쫒기구 있어요. 제가 설 땅은 이 다락밖엔 없어요. 여기가 마지막이에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찾는 심정으로 당신을 의지하고 있는 거요."
"그럼 난 지푸라기겠네."
"스미스가 있었더라면 거목일 텐데. 당신은 지푸라깁니다."
"스미스? 여긴 한국 정부의 치외법권 지대니까. 뭐 망명객 같군."
여인은 청년의 말을 들으며, 절망에서 허덕이는 그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팔로 청년의 가슴 위를 가만가만 쓸어주었다. 청년은 화들짝 놀라다가 그 손에서 따스한 온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손위에 자기의 손을 얹었다. 손과 손이 하나가 되었다. 청년은 여인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녀가 청년의 야윈 몸을 가슴으로 안았다. 청년은 목 안에서 이는 가는 슬픔 같은 것을 씹었다. 여인은 가슴에 와 닿는 청년의 숨결로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약한 자가 어떻게 큰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을까.
여인은 청년을 안고 있는 팔에 더 힘을 주었다. 두 몸이 점점 뜨거워졌다. 그러나 잠시 후, 청년은 탈진한 상태로 여인의 가슴에서 빠져 나와 이불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마음뿐이었다. 여인은 청년을 감싸고 있는 그 탄탄한 절망을 느꼈다.
2
밤 12시가 다 되어 대문에 이르렀는데, 누가 불쑥 나타나더니
“김 여사"
하고 속삭였다.
희미한 대문등 앞에 선 청년은 등산모에 흙 먼지투성이 바지랑 헐쭉한 모습에 왜 피로한 기색이었다. 그런데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청년은 연방 주뼛주뼛 주위를 살피더니,
"김 여사, 접니다. 미스터 최---"
순간 여인은 어디서 들었던 목소리라고 생각하면서 한 발짝 다가가자,
"절 도와줘요. 전 급합니다, "
다급한 청년의 목소리에 더 놀란 것은 오히려 여인 쪽이었다. 그건 정말 의외였다.
지난 여름, 한 대학생이 찾아왔었다. 사회학과 2학년이라는 그는 한국 사회의 소외 집단에 대한 리포트를 쓰기 위하여 현지 조사차 왔는데 좀 도와달라는 부탁을 해 왔다. 그는 자꾸 보채듯 애걸하다시피 하였고, 여인도 그 적극적인 자세에 마음이 끌려 힘닿는 데까지 협조하였다.
미군 ××부대에 근무하는 미군 소령과 동거하면서 미군 전용 클럽까지 경영하는 여인은, 그 대학생을 동거 미군 스미스에게 소개를 하였다. 그들은 서로 곧 친숙해졌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다는 스미스는 연령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학생에게 상당히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대학생은 일을 대강 마친 후 집에서 이틀을 같이 지냈다. 일을 마치고 떠난 후 그는 두 번쯤 편지가 오더니 소식이 끊어졌고, 스미스는 지난 달 일시 귀국하여 지금 부재중이었다.
여인은 대학생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와 밝은 불빛 아래서 그를 보았을 때 여인은 더욱 놀랐다. 청년의 얼굴은 여지없이 흐트러져 있었다. 꺼칠한 수염은 물론, 땀과 때에 절은 웃도리와 먼지투성이 구두와 바지, 가맣게 탄 윤기 없는 얼굴에 끼얹어 있는 넋 나간 표정, 그는 짙은 절망 속에 꽁꽁 절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쫓기구 있습니다. 절 좀 도와주십시오. 며칠간만 좀 머무르면 됩니다."
그는 계속 주위에 신경을 쓰면서 방문 앞에 엉거주춤 서서는 더듬거렸다.
"들어와서 말해요. 어쨌든 이 저녁은 여기서 지내도록 해요."
여인은 그가 무시무시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고 그러한 급박한 처지 속에서 자기를 찾아왔다는 게 가슴 뿌듯하니 반가웠다.
"스미스는?"
여인과 동거하는 미군 소령의 안부를 물었다.
"스미스?"
여인은 빙그레 웃더니 씁쓸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갔어."
"갔어요?"
청년은 낭패한 얼굴이 되더니, 자꾸 밖으로 신경을 쓰면서 더 초조한 몸짓을 하였다,
"들어와, 내가 고발해서 보상금이나 타먹게. "
여인은 청년의 팔을 끌었다.
"먹을 것들 좀,,,,,,"
방안으로 들어오자 그는 휘휘 방안을 돌아보더니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로 먹을 것부터 찾았다. 여인은 그렇게 패기 넘치고 도도했던 청년에게서 짙은 좌절을 보는 순간, 비애가 사르르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자기의 나약함을 스스럼없이 보여주는 청년에게서 오래 전부터 살을 같이하여 살아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특별한 신분인 여인에게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을 갖고 찾아온 청년이었으나, 그래도 여인은 마음이 축축하니 흐뭇하였다.
마련해 준 식사를 말끔하게 치운 청년은,
"자세한 것은 후에 다 알게 될 겁니다. 지금 떠나가야겠는데 돈 좀 꾸어 주십시오. 나중에 배로 갚겠습니다. 집에 연락을 할 수 있는 처지도 못되고, 친구들과도 오래도록 신세를 져서---"
자리에서 일어나 창에 등을 기댄 채 더듬거리는 청년의 얼굴엔 짙은 곤혹이 스물거리고 있었다. 여인은 그의 청이라면 모든 것을 다 들어 주고픈 간절한 연민을 느꼈다. 고액권 몇 장을 집어 건네주려다가 갑자기 청년을 방 안쪽으로 몰아세웠다.
"들어올 땐 마음대로 왔으나, 나갈 때는 그렇게 안 돼요."
그 옛날, 흥정하다가 몸값에 틀려 되돌아가려는 미군을 몰아세우듯 표독스럽게 다그쳤다. 청년은 얼떨떨해 하더니 낭패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아무 데 가서도 잡힐 몸, 같은 값이면 내가 보상금이라도 타먹게끔---"
여인은 절망에 절어 있는 청년의 등을 밀면서 벽장문을 열었다. 그리고 천장을 올려쳤다. 구멍이 펑 뚫어졌다. 거기 다락이 있었다.
대문을 걸어 잠그고 여인이 다락으로 올라갔을 때,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던 청년은, 화들짝 놀라면서 반사적으로 조그맣게 난 창을 향해 몸을 돌리다가 그냥 우두커니 서 버린다.
여인은 청년에게서 더 짙은 절망을 보았다.
다음 순간이었다.
청년은 잽싸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여인의 손을 후려잡으면서 충혈된 눈으로 노려봤다. 여인은 의외였다. 그 이글거리는 눈총 속에 인간의 마지막 욕망을 보았다. 여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는 확 그녀의 상체를 껴안으면서 갈급하게 숨을 몰아 쉬었다.
-버릇없이.
여인은 청년을 밀쳐 버리려다가, 자기는 아무 것도 그에게 해줄 것이 없음을 절감했다. 그런 생각을 할 동안 청년은, 여자의 실내복 자락을 더듬으며 더욱 세차게 여인을 껴안았다. 여인은 순순히 몸을 내맡기면서, 절망에 다다른 사람의 허세찬 마지막 발작을 생각했다. 이 사내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인가고 생각하면서, 그냥 묵묵히 그를 받아 주었다.
청년은 허겁지겁 일을 서툴게 끝내더니, 여인의 얼굴을 넋 나간 사람처럼 오래오래 쳐다봤다. 그러다가 벽을 향해 새우처럼 몸을 오그리고 잠에 빠져 버렸다.
한밤중에 깨어난 그는 잠든 여인의 얼굴을 어스름 속에서 더듬어 보더니 다시 잠에 곯아떨어졌다.
2
"너무 불안해하지마. 며칠 동안 잠만 잘 자더니,,,,,,"
여인은 타이르듯 청년을 위로하였다.
"잠 속에 떨어져 있을 전 아무 생각 없더니, 깨고 나니 불안해요. 이젠 잠도 안 오고,,,,"
"그건 조금씩 불안에서 헤어나고 있다는 증거일 거야. 여기는 안전해."
"안전한 곳은 없어요.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그래도 여기는 안전해."
여인은 절망에 찬 청년의 눈을 보며 아주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청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안전한 곳은 없어요. 당신도 곧 나를 기피할 거요. 모든 사람들이 그랬어요. 겉으로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속으론 모두 나를 꺼렸어요."
청년은 무엇인가 여인에게서 확인을 받고 싶은 얼굴이었다.
"안심해도 돼. 이 다락은 유일한 자유의 공간이니까. 그리고 난 미스터 최가 말하는 그런 사람들과는 달라. 우린 소외 지대 사람들이니까."
소외 지대란 말은 지난 여름 청년이 한 말이었다.
여인은 소외 지대란 말과 다락의 내력을 생각하다가 후훗 웃었다.
한때는 미군 군수물자를 숨겨 두었고, 어떤 때는 미국 사내를 겹치기로 받으며 잠깐 은닉해 두던 곳이었다. 이왕 이곳에 뛰어든 이상, 돈을 벌자고 마음을 먹고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스미스 소령을 만나기 전 이야기다.
하나를 받아서 일을 치르다 밖에서 찾으면, 그를 구슬려 윗다락에 숨겨 두고 찾아온 다른 사내를 받았다. 얼마 후 다락에서 내려온 그 순진한 사내는 힐쭉 한번 웃고는 더 신나게 일을 치렀다. 여자도 더 열심히 상대해 주었었다. 그런데 이제는 쫓기는 한 청년을 숨겨둘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멀리서 땅을 굴리며 지나가는 자동차소리가 밤을 가르며 달려왔다,
"통금이 해제뒬 시간인가요?"
"아직 멀었어."
그녀는 팔을 뻗어 시계를 보여, 같은 또래 친구처럼 청년에게 말했다.
"겨우 두 시 조금 넘었어."
"두 시? 밝으려면 아직도 멀었군."
"잠깐이야. 한잠 자면,,,"
여자는 흐트러진 청년의 상체를 두 손으로 가만히 감싼다.
"잠이 안 와요. 한 시간이 천 년쯤으로나 지루해요."
"약 줄까? "
"싫어요. 약 먹고 푹 자고 나면 더 머리가 맑아지구, 그런 연후엔 절망이 무섭게 달려듭니다."
"무슨 일을 저질렀어? 내겐 얘기해 줄 수 있지 않아."
청년은 몸을 뒤척이며 여자를 힐끔 넘겨다보다가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낮은 천장이 천천히 조금씩 미동하며 내려앉아 가고 있었다.
며칠 후에 그 천장이 폭삭 내려앉아 자신을 꼼짝 못하게 만들고 말 거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낮에 여인은 지난 며칠간의 신문를 뒤적여 보았다. 어떤 큰 사건을 찾으려 하였다. 그러나 별다른 사건은 없었다. 뉴스 시간마다 귀를 기울이며 청년의 범죄를 추리하였으나 허사였다.
"어떻게 된 거야?"
"꼭 알고 싶어요?"
"우리는 같은 처지야. 이렇게 한방에서 사흘을 같이 지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공범자가 된 거야."
"김 여사에게까지 피해를 입히지 않겠어요. 때가 되면 조용히 떠날 겁니다."
"말해 봐. 살인? 강도? 아니면 간첩?"
“……"
청년은 어이없는 얼굴이 됐다.
"난 죄가 없어요. 그냥 쫒기구 있을 뿐입니다."
"죄가 없는데 왜?"
"날 범죄자로 만들고 말았어요. 세상 사람들이---"
"결백하면 사직 당국에 나가 주장해요. 떳떳하게---"
"웃기는 소리 말아요. 결백은 주장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목 안에서 격하게 터져 나오는 탓으로 청년의 이마에서는 땀이 송송 솟아나고 있었다.
"인정하도록 알리바이를 내세워."
"알리바이가 없어요."
아주 허탈한 목소리다.
"뭐?"
여인은 처음으로 놀랐다, 설마하던 생각이 여지없이 무너져 버린 절망이었다.
"그러면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 있기만 해야 돼."
"시간이 지나면 혹 제 누명이 벗겨질지 모르죠."
"언제까지?"
"모르지요. 한엄이 길는지."
"그래도 자수해. 그게 얼마나 편한 일이야."
"똑 같은 소리하는군요. 난 지금까지 그런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왔어요. 한곳에 이틀만 숨어 있으면 자수를 하라더군요. 친구도 친척들까지도---"
청년은 천장을 향해 반듯하게 누우면서도 흔잣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그 얘기를 하기 전에 이곳을 떠나는 건데.,..,."
"떠나라는 말이 아니야. 이곳은 안전하니까 언제까지 눌러 있어도 좋아."
여인은 스미스 소령의 현지처라는 자신의 처지가 새삼 생각났다.
"그러나 전 대단한 일을 하지도 않았어요. 그러나 난 쫓기구 있구, 내가 머물 곳은 아무 데도 없어요. 여기가 아마 최후의 거처가 될 테지요."
여인은 청년의 말을 들으면서 후훗 하고 몇 번 코웃음을 쳤다.
"왜 웃어요?"
"코쟁이 현지처라는 내 신분이 미스터 최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다는 사실에 도리어 내 쪽에서 감격할 정도야."
여인은 가슴속으로 밀려드는 허탈을 털어 버리려 자조적으로 지껄였다.
"지난 여름 우릴 찾아왔을 때, 난 미스터 최 말대로 ‘버림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거든, 헌데 이건 뭐야. 도리어 내가 시혜자 입장이 되었지 않아."
"그러니까 학문은 엉터리지요. 내가 요즘 쫓기면서 바로 그 점을 절실히 느꼈어요. 진짜 소외 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따로 있어요. 이곳 여자들은 달러를 모으는 데 매달릴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난 매달릴 거나 붙잡을 건덕지가 없어요. 신은 아주 먼 곳에 있고."
"내가 있지. 아주 가까운 곳에---"
선풍기 조명등 불빛을 등뒤로 하여 누워 있는 여인이 빠는 담배 불빛이 유난히 반짝인다고 생각되었다. 어둠이 엷게 깔려 있는 이 다락방인데도 두 사람은 환한 방에서처럼 서로의 얼굴 표정까지 느낄 정도로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있었다.
여인은 자기가 피우던 담배를 청년의 입에 물려주었다. 그는 여자의 타액에서 전해지는 야릇한 맛을 음미하면서 먼 데서 들려오는 자동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층 다락이 소리에 따라 조용히 요람처럼 흔들거렸다. 소리가 더욱 가까이 들려왔다. 그럴수록 다락도 크게 흔들거렸다.
"한밤중인데 무슨 차들인가요?"
"이곳은 작전 지역이어서 그래."
"부대가 이동하는 건가요."
"몰라 항상 그러니까."
"날 잡으러 오는 것으로 알았어요."
"잠을 좀 자."
점점 방이 크게 요동쳤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울릉도로 수학여행 떠나던 그 배 안에서 겪었던 지독한 멀미가 되살아났다.
"왜 그래?"
"방이 흔들리고 있어요."
"마음이 흔들리는 거야. "
"아니, 방이 흔들리고, 몸이 흔들리고 심장이 흔들리고--- 결국은 마음까지 흔들리는 겁니다."
잠시 침묵이 방안을 휩쓸었다. 차 소리가 더 또렷이 가깝게 들렸다.
"지금 몇 시?"
목소리가 떨렸다.
"세 시 조금 넘었어."
"겨우 세 시?"
"불안해?"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
여인이 대답도 없이 다락의 통로가 되는 널빤지를 열고 아래로 내려가자, 청년도 후딱 따라 일어나 아래층 동정에 신경을 썼다. 부시럭거리는 인기척이 어둠을 가르며 들려왔다. 청년은 네모진 작은 창가로 가 집 주위를 살폈다. 스무 평 남짓한 뾰쭉지붕의 집채는 해골처럼 어둠 속에 버티어 있고, 음영을 달리하는 물체들이 집체를 중심으로 무질서하게 서 있었다. 흡사 죽음처럼, 장독대, 몇 그루 나무, 텔리비전 안테나, 대문,,,,,,
청년은 바깥을 내다보면서 여인이 살금살금 대문을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전화벨 소리라도 들릴 걸 기다렸다. 어서 그녀의 배신을 보고 싶었다. 그렇게 될 때 모든 것은 아주 홀가분해질 것 같았다.
"뭘 보고 있어? 그 창으로 도망이라도 칠 수 있으리라 생각해?"
청년의 등뒤에서 여자가 웃으며 속삭였다.
"이걸 한 잔 해.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을 거야."
여인은 잔을 입술로 가져가며 한 손에 든 잔을 내밀었다.
"조금씩 혀끝으로만 마셔 봐요. 독하기도 하지만 향긋한 냄새가 정신을 들게 할걸."
어둠을 흔드는 여인의 몸짓을 보며 청년은 잔을 받았다. 코를 찌르는 향기와 혀끝에 와 닿는 그 쏘는 맛이 벌써 전신으로 퍼져 갔다. 청년은 조금씩 마시라는 여인의 말에도 훅하니 모두 들이켜 버렸다. 독하질 않았다. 처음 대하던 그 향취와 맛이 약간 얼얼할 뿐이었다. 여인도 잔을 비우고 가만히 청년의 곁에 누웠다. 천장을 향한 그녀의 눈이 어둠이 얇게 깔린 허공을 가로세로 지르며 원과 사각형을 수없이 만들었다.
"잠 자?"
"예, 잠이 올 것 같아요."
4
나흘째 되던 날, 청년은 신문을 좀 구해 달라고 여인에게 부탁했다. 신문을 받지 않던 여인은 거리에 나가 몇 종류를 사다 주었다. 청년은 그 동안 보도 매체에 대하여 공포감을 갖고 있었다. 지난 신문이나 라디오 텔리비전의 오락 프로까지도 꺼렸다. 심심하면 들으라고 라디오를 틀여놔 주었을 때, 그는 고개를 돌린 채 손을 내저었다.
낮에는 잠만 잤다. 밤이면 여자와 비슷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시간을 묻고 이따금 독한 술을 마시고, 그리고 잠을 잤다. 첫날밤을 제외하고는 여자와의 그 일도 이뤄지지 않았다. 몇 번 시도하다가는 번번이 실패하였다.
밤 12시가 되어 여인이 돌아왔을 때 청년은 천장이 낮은 다락 안에서 작은 창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직도 안개가 걷히지 않은 밤은 어둠과 습기와 그리고 늦더위가 땅을 무지근하게 내려 누르고 있었다.
청년은 여인의 귀가를 기다리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여인과 식모 단 둘이서 사는 이 집엔 식모는 스미스 귀국 후 시골에 내려가 있고 그외 이 집엔 사람 출입이 거의 없다. 그래서 낮 동안은 그 좁은 창을 통해 마당과 거리의 풍경을 샅샅이 훑어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따금 동네 반장이나 우편배달부가 올 것 같으면 반사적으로 그는 몸을 움츠려 달아날 준비를 하곤 하였다. 허나 그건 마음뿐이었다. 내방객이 용무를 마치고 그냥 돌아갈 때면 청년은 새삼 낮은 천장과 사방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좁은 방을 훑어보다가 털썩 요 위에 누워 버린다.
그럴 때 전신에 퍼지는 그 좌절감과 그 뒤에 밀려드는 안도감을 아주 행복스럽게 만끽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불현듯 식욕이 일면, 미리 마련해 둔 우유와 빵과 고기 통조림을 꼭 여인이 지정해 준 양대로 먹었다.
신문을 읽기 위하여 창을 검은 휘장으로 촘촘히 막아 불을 켰다. 불이 밝혀진 방은 상당히 아늑하였고, 실내복에 감싸인 여인의 몸매 가 오두마니 느껴졌다. 순간 청년은 형편없이 처져 버린 자신에 대하여 모멸을 던져 보기도 하였다.
며칠만에 보는 활자는 낯이 설었으나 무척 반가웠다.
두 종류의 일간지를 읽는데 2,3분도 안 걸렸다. 별 기사가 없었다.
벌써들 모두 잊어버리고 있는가? 신문을 내던진 그는 요 위에 드러누워 사지를 뻗고 긴 기지개를 켜면서 하품을 하였다. 모든 것이 천천히 아주 녹아 버리는 듯한 안도감이 일었다. 청년은 여인을 보고 피식 웃었다.
"좋은 소식이라도 있어?"
여인이 싱긋 웃으며 횐 이를 드러내 보이자 청년은 후딱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여인의 목을 와락 껴안으며 그녀의 귀에다 소근거렸다.
"김 여사, 참 아름답게 보여요."
여인은 청년에게서 처음으로 착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을 때가지 청년은 여자를 놓아주지 않았다. 여인은 자신의 몸을 뱀처럼 칭칭 사려 감은 그의 팔과 다리에서 지금까지 숱한 남자에게 느껴 보지 못했던 강렬한 힘과 사랑을 느꼈다
5
닷새째 되는 날 저력, 여인은 청년을 자기가 경영하는 클럽으로 데리고 갔다. 아직도 깊은 잠에서 덜 깬 그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려 하였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클럽은 흥청이고 있었다. 특별 쇼 공연도 있는 날이다. 그러한 것들이 청년을 칭칭 휘감고 있는 무거운 사슬을 벗겨 주리라고 여인은 생각하였다.
작은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가수들과 무희들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떠드는 이국인들, 그들을 쳐다보는 청년의 눈은 생기가 흘렀다.
한 손에 캔 맥주를 들어 마시면서 다른 손과 발로는 바닥과 탁자를 치며 흥겨워하는 검둥이들, 무희들의 아름다운 원색의 몸매가 물결처럼 출렁거릴 때마다 두 손가락으로 고리를 만들어 입에 물고 휘파람을 불어대는 사람들, 한 손을 들어 까딱하며 여자들에게 사인을 하면, 그때마다 여자들은 웃음과 고갯짓과 손들을 흔들면서까지 답례를 한다. 그러면 어린애같이 더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이국 병사들.
청년은 여인이 따라 주는 독한 술을 혀끝으로만 핥듯 빨며 술맛보다 홀 분위기 속에 완전히 취해 있었다. 이국 군인들과 몸을 붙이고 껴안아 돌아가는 여자들의 얼굴엔 그늘이 없다. 이국 남성들의 품에 안긴 그 자그마한 여자들도 진정 즐거움에 젖은 듯 행복한 얼굴들이다. 이들을 소외 지대에 사는 사람으로 생각해 왔던 자신이 오히려 소외자 같이 생각되었다.
광란하던 음악이 멎었다. 그리고 흘 안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이곳저곳에서 휘파람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잠잠해졌다. 이어 조용하게 팡파르가 울리더니 무대 위에 빨간 조명이 태양처럼 떠올랐다. 그때였다. 무희가 나는 듯이 무대로 미끄러져 왔다, 반라의 몸매가 조명을 받으면서 찬란하게 출렁거렸다. 홀 안이 일제히 박수소리에 묻혔다. 음악이 더 요란스럽게 울리자 무희는 미친 듯이 무대를 돌면서 몸을 앞뒤 좌우로 흔들었다. 동작이 계속되면서 그녀는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어 나갔다. 음악은 흐느끼듯, 높은 언덕을 숨차게 오르면서 자지러지는데 무희의 동작이 갑자기 빨라졌다. 홀 안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이 흘렀다.
조용한 음악이 다시 광란처럼 울려퍼지자 여인은 마지막 옷을 벗어 던졌다. 완전한 전라의 몸. 청년은 눈을 감았다. 그건 여체가 아니었다. 하나의 무서운 불덩이였다. 그것이 청년의 얼굴을 향해 돌진해 오는 것 같았다. 이곳저곳에서 박수가 터졌고 휘파람 소리가 고막을 쏘듯 하였다. 여전히 여인은 발가벗은 몸으로 환락의 춤을 추는데, 음악은 흐느끼며 자꾸자꾸 꺼져들듯 하였다.
다시 홀 안이 밝아지고 무대가 텅 비었을 때 청년은 정신을 수습하였다. 알맞은 냉방인데도 그는 온통 열기 속에 앓는 사람처럼 허덕이고 있었다.
일이 끝나고 여인과 같이 집으로 귀가한 청년은 더없이 마음이 가벼웠다. 쫓기고 있다는 생각을 털어 버리고, 술과 여자와 음악과 꿈속에 서로 즐기고 즐겁게 살고 있는 무리들의 구김 없는 표정들만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엿새째 되는 날, 청년은 라디오와 텔리비전을 요구했다. 여인은 낮에 집을 나서면서 뭔가 트여 감을 느꼈다. 내일쯤 그 다락에서 내려올 것을 생각했다. 잠시 고향에 내려가 있는 가정부에게 스미스가 귀국할 때까지 올라오지 말라고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청년의 장기 체류를 위해서였다.
거실을 내실로 옮긴 것은 청년이 이 집에 온 후 꼭 일 주일 째 되는 날이었다. 내방객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그는 벽장을 통해 다락으로 오르는 연습을 몇 번이고 하였다.
스미스 소령과 함께 자던 넓은 침대에서 청년은 여자와 잠을 잤다.
청년이 내실로 거처를 옮긴 이틀 후였다. 여인이 외출해서 청년만 혼자 남아 있는데 초인종이 요란스레 울렸다. 텅 빈 마당이 온통 초인종소리로 가득 찼다. 청년은 벽장을 거쳐 다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네모진 창을 통해 마당의 동정을 살폈다. 50대 남자가 종이를 한 뭉치 들고 다니면서 집집에 돌리는 것 같았다. 그는 편지함 속에 종이를 쑤셔 넣는 것 같더니 옆집으로 가 버렸다. 청년은 문득 불길한 예감이 일었다. 곧 달려나가 그 종이쪽을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라디오의 리시버를 귀에 꽂고 볼륨을 조정했다. 가수들의 노래가 몇 곡 흘러나온 후,
"이것으로 오늘 정오의 로터리를 마치겠습니다. 잠시 후 한 시 시보에 이어서 뉴스를 들으시겠습니다."
낭랑한 여자 어나운서의 목소리를 듣고는 엉겁결에 리시버를 귀에서 떼어 버렸다. 그리고 벽을 향해 몸을 웅크렸다, 가슴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일곱 시쯤 되어 대문 흔드는 소리가 났다. 다락에 누워 있던 청년은 후닥닥 일어나 그 네모진 창으로 밖을 내다봤다. 올 것이 왔다는 예감에 가슴이 뛰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러면서도 도피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여자가 열쇠로 대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옆구리에 뭔가 가득 든 광주리를 끼고 있었다. 행복한 주부의 모습이었다. 청년은 창을 통해 여인을 쏘아봤다. 밤 열 한 시가 그녀의 귀가 시간인데도 이렇게 이른 귀가에 무슨 음모가 서려 있다고 생각되었다.
여인은 마당으로 들어서자 편지함을 뒤져 낮에 두고 간 종이를 꺼내 한참이나 읽었다, 몇 번이고 되풀이 읽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고 다락을 올려다보며 종이를 꾸겨든 채 집 안으로 들어왔다.
청년은 여인의 발소리에 신경을 모으면서, 이 집 주위에 자기를 쫓는 무리들이 깔려 있을 거라고 생각하자 분노가 가슴을 치듯 되살아났다. 방문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청년은 벽장으로 통하는 문 위에 떡 버티어 앉아 힘을 주었다. 누구도 이 다락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생각했다,
똑똑,,,,,,
밑에서 여인이 다락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래도 청년은 응하질 않고 그냥 앉아 있었다.
"나야 나. 미스터 최."
여인의 음성이 약간 짜증스럽게 들렸으나 그는 움직이질 않았다.
"나라니까."
다음 순간 무력하게 앉아 있던 청년은 후딱 옆으로 쓰러졌다. 아래서 판자를 힘껏 밀친 것이다.
"왜 여기 와 있어, 방에서 편히 쉬고 있지 않고."
청년은 모로 쓰러진 채 어서 다락문을 빨리 닫으라고 손짓을 하였다.
여인은 '나까지 의심해' 하고 말하려다가 너무나 초조해 있는 그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송 솟아나고 있었다.
"어디 아파?"
여전히 청년은 여인을 경계하였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저녁을 지어 같이 먹고 싶어서,"
여인은 편지함 속에서 찾아 읽었던 전단의 내용을 잠깐 잊은 채, 정말 행복한 여자답게 지껄였다.
"자, 내려와요. 여긴 안전 지대야. 내가 저력을 준비할 테니 그 동안 목욕을 해요."
여인은 청년을 끌고 방으로 내려왔다.
욕실로 들어선 청년은 샤월 크게 틀어놓았다. 솨 하니 물소리가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내일 잡히더라도 오늘만은 모든 것을 잊어 버리고 싶었다. 온몸을 비눗물 속에 처넣고 몇 번이나 씻고 또 씻었다.
문득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술대 위에 오르기 위하여 온몸에 털을 하나도 없이 깎아내고 목욕을 하듯 마지막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몸을 씻고 또 씻었다,
여인은 식당에서 그 구겨진 전단을 꺼내 보았다, 여섯 사람의 젊은 얼굴들 중에 청년도 끼여 있었다. 청년은 패기가 넘쳐 있었다. 여인은 보고 있던 전단을 불 속으로 던져 버렸다. 청년들의 얼굴이 화염에 휩싸이더니 재만 동동 떠오르다가 물동이에 떨어져 폭삭 사그라져 버렸다.
식탁에 앉은 청년의 몸에선 솜처럼 포근한 비누냄새가 피어났다.
"목욕하니 기분이 가볍지?"
여인은 청년의 손으로 수저를 넘겨주며 웃었다. 청년은 여인의 얼굴을 잠깐 보더니 수저를 들었다.
"편지함에 뭐 없었어요? "
몇 술 뜨던 청년은 여인을 차갑게 보며 물었다.
"응, 그거, 새로 개업한 의상실 선전 전단이었어.
여인의 말엔 조그만 틈도 없다.
"거짓말. "
청년은 투정을 부리는 어린애처럼 수저를 놓았다. 탁하고 급한 그의 음성은 두 사람 사이를 굳어지게 하였다.
"거기에 제 얼굴 있지요?"
"미스터 최 얼굴?"
"현상 붙은 얼굴들,,,,,,"
"웃기지마. 미스터 최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인가. 현상금까지 붙어."
너무나 구김 없는 여자의 대답에 청년은 오히려 면구스러워졌다.
즐거우리라 기대했던 저녁 식탁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정성들여 만든 반찬이 그냥 그대로 식탁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채,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인은 식탁을 와락 밀쳐 버리고픈 충동을 어렵게 참았다. 이런 일들이 모두 그 하찮은 종이쪽지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어처구니없었다.
여인 곁에 누워 텔리비전을 보던 청년은 아홉 시 시보가 울리자 스위치를 껐다, 여인이 왜 그러느냐는 얼굴을 하자,
"다락에 가 자요."
다락으로 눈을 보내며 여인을 재촉하였다.
"왜 그래. 여기도 괜찮아."
"그곳이 오히려 내겐 편해요."
그때 대문 흔드는 소리가 밤을 찢듯 요란스럽게 들렸다
여인이 침착하게 방안을 정리할 동안, 청년은 재빠르게 다락으로 올라갔다.
방문객은 동네 반장이었다. 그는 낮에 두고 간 전단을 봤느냐 묻고는, 비슷한 사람이라도 혹시 나타나면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 가 버렸다. 여인은 웃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무덥고 눅진한 안개가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다락 속에는 청년이 새우처럼 웅크리고 벽을 향해 누워 있었다. 여인은 청년을 끌고 방으로 내려왔다. 어제 클럽에서 즐거워 보였던 청년의 얼굴을 생각하고는 전축에 판을 올려놓았다. 경쾌한 리듬이 방안에 가득 흘러 넘쳤다.
"나 춤 배워 줄까."
여인은 억지로 청년을 끌고 방안을 돌았다. 청년의 얼굴엔 열기와 땀이 얼룩지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춤이 끝나자 청년은 침대에 쓰러져 죽은 듯이 눈을 감았다.
6
온종일 청년은 다락 속에서 위스키를 마시다가 취하면 벽을 향해 새우처럼 몸을 웅크려 잠을 자곤 하였다. 잠이 들면 비몽사몽에 허덕였다. 혼자 알몸으로 많은 사람 앞글 뛰어다니다가 부끄러워 쩔쩔매다가 자기가 지금 누워 있는 다락이 낡아 푸석푸석 마루가 부서져 버려서 어쩔 줄 몰라하는 뒤죽박죽된 꿈들이었다.
밤 열 시가 넘어 돌아온 여인은 한 뭉치 신문을 내밀었다.
청년은 신문에서 아버지 얼굴을 봤다. 함께 쫓기는 여섯 친구들의 아버지들과 함께, 자식들이 어서 사직 당국에 자수하기를 바라는 사연이 같이 실려 있었다.
그걸 읽던 청년은 갑자기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텔리비전을 보자면서 방으로 내려온 그는 다시 심야 프로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텔리비전 화면에 나타난 아버지 얼굴은 침통하게 보였다. 어서 돌아와 법의 심판을 받으라는 목소리엔 잔뜩 눈물이 끼여 있었다.
청년은 텔리비전을 껐다. 하늘과 땅이 맞붙어 버리는 절망감에 눈 앞이 아득하였다. 모두들 나를 범죄자로 취급하고 있구나
"난 이제 혼자야."
청년은 울듯한 얼굴로 여인을 넘겨다봤다.
"왜 혼자야. "
여자는 건성으로 받아넘기며 웃었다.
"내가 있지 않아."
"참 그렇군?"
청년이 횐 이를 드러내며 힘없이 웃었다.
"그 동안 많이 배려해 줘서 감사해요."
"자수하는 거야?"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
“……"
"견eu 보겠어요.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어떻게 자수를 해요."
그는 갑자기 목청을 돋구었다.
"그럼 무엇 때문에?"
"견뎌 보고 싶을 뿐입니다."
"잘 생각했어. 그러나 저렇게 겁이 많아서 어떻게 견딜까. 잘못도 없다면서,,,,,,"
"잘못이 없으니까 더 무섭군. "
"억지 이야기야. "
둘은 잠시 말을 잃었다.
둘은 모두 방안의 공기가 몹시 탁하게 느껴졌다.
"나 전화 좀 쓸까요?"
"어디?"
"집에."
"여유 있군."
여인은 청년의 거동에서, 꽉 닫힌 문을 쾅쾅 두드리며 울부짖는 마지막 안간힘을 보았다.
시외 전화를 신청한 청년은 선 채 방안을 빙빙 돌았다. 여인은 문에 기댄 채, 청년이 이 집에 온 후 여러 일들을 생각했다. 다락 속에서 보낸 일주일이 청년에게나 여인에겐 긴긴 세월이었다. 정말 영원히 밀폐된 공간 속에서 둘만의 세계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여인의 의도가, 시간 속에 차차 허물어져 버리는 그 짧은 과정을 생각했다. 불안과 안도와 불신과 신뢰와 욕정과 허탈과,,,,,, 어쩜 이 저력 모든 것이 다 끝난다고 생각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인이 달려가 받으려는 데 청년이 먼저 받았다,
통화가 시작될 때까지 방안은 싸늘한 정적 속에 빠졌다.
"여보셔요. 아, 나 오빠야. 아버지나 어머니 바꿔 줘,,,,,, 뭐 안 계셔. 왜 울어 울긴. 오빠는 잘 있어,,,,,,"
청년의 목소리가 컥컥 막히다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셨어. 엄마가? 뭐 오빠 때문이라고. 오빤 잘 있는데. 여기? 알 필요 없어,,,,,,"
청년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 들어갔고 여인의 눈에는 물기가 번져 갔다.
“---왜 울어? 오빠 잘 있으니까 염려하지 마라. 엄마 간호 잘 해 드리고 아버지께 오빠 전화왔었더라고 말씀드리고,,,,,, 뭐 자수? 동네에랑 학교 정문에 현상 붙은 오빠 사진을 봤다구,,,,,, 울지마. 울지마,,,,,,"
통화는 더 계속되질 않았다. 청년은 계속 '울지 마' 소리만을 되풀이하다가 자신도 극극 굵은 소리를 내다가 전화를 끊었다.
청년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창으로 다가갔다. 창을 여니 기다렸다는 듯이 숱한 기운이 방안으로 울컥 들어왔다. 그 동안 죽 닫고만 지냈던 창이었다. 어둠이 짙게 드리운 거리에는 가로등이 여전히 어둠에 눌려 있고, 무덥지근한 밤의 열기 속에 자신이 점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언제가지나 이대로 있고 싶었다. -오빠, 자수해. 학교 교문에랑 동네 길가 벽에 현상 붙은 오빠의 사진이 붙어 있어 -동생이 울먹이는 목소리가 가슴을 후비듯 파고들었다. 청년은 잠을 자듯 그냥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인은 마당에서 인기척을 들었다. 그와 동시였다.
"최 철민."
문이 열리면서 우람한 사내 셋이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청년은 어느새 그들에게 잡혀 있었다.
청년은 자기를 에워싼 남자들의 얼굴을 한번 훑고는 두 손을 내밀었다.
문에 장승처럼 서 있던 여인의 눈과 청년의 눈이 한번 마주쳤다.
청년은 사내들에 싸여 방문을 나서면서 이 여인에게 가벼운 목례를 보냈다. 그 표정이 너무나 안온해 있었다.
우리들의 조부(祖父)님
현길언
1
할아버지가 이상해지기 시작한 것은 엊저녁부터였다.
여든 다섯 나이에도 할아버지는 한시도 쉬지 않고 무엇을 하면서 지냈다. 집 주위 자잘한 일들을 손보기도 하였고, 어떤 때는 들이나 밭에까지 나가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없는 집안 살림이긴 하나 할아버지까지 일해야 할 처지는 아닌데도 늘 그렇게 무엇인가를 하면서 지냈다. 닷새 전에는 손자인 나를 데리고 마을 안을 한 바퀴 돌면서 가을 곡식과 감귤 밭들을 돌아보고 오더니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집안에서는 노인이 무리를 한 때문이라고 생각하다가, 이틀을 넘기면서부터는 나이도 나이어서 세상을 뜰 때가 가까웠다고들 수군거렸다.
그래도 읍내 병원으로 모시기 위해 경운기까지 준비하였으나 할아버지는 끝내 듣질 않았다. 그뿐이 아니다. 약은 말할 것도 없고 미음 한 모금 거두질 않았다. 원래 분명한 성품과 고집을 아는 식구들이라 속수무책이었다. 사흘을 넘기면서 종조부를 비롯한 친척들이 모여 밤을 지내면서 운명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초저녁 때였다. 낮부터 모였던 일가 어른들도 저녁을 먹고 온다고들 집으로들 돌아가고, 집에는 종조부와 두서너 사람들이 마루에 앉아서 잡담들을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누워 있는 안방과 마루 사이에는 샛문이 열려져 있어서, 사람들은 마루에 앉아서도 방안의 동정을 살필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내 아내와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얘야 ! "
마당에 서 있던 나는 황망스런 종조부의 부름에 후다닥 마루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누워만 있던 할아버지가 일어나서는 마루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돌연한 사태에 짓눌려 꼼짝도 못하였다. 그것은 이 다음 일어날지도 모를 어떤 사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모두들 죽음 직전의 한순간에 있을 수 있는 할아버지 거동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 다음 일이 이상하게 돼 버렸다. 마루로 들어서는 나를 보신 할아버지 눈이 이상히 빛났다. 그건 너무나 투명한 눈이었다. 눈빛만이 아니었다. 얼굴 이 점점 상기되더니 생기가 서리기 시작하였다. 그때였다.
"아, 네가 희빈이구나. 난 네 애비다."
순간, 나는 노망을 하시는구나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 더 가관스런 일이 벌어졌다.
"삼촌님,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할아버지가 종조부 앞에 넙죽이 엎드려 큰절을 하였다.
"성님!"
종조부가 얼른 두 손으로 할아버지 웃몸을 붙잡아 일으키면서 비통스럽게 부르짖었다. 늙어서 노망을 한다는 게 얼마나 가련한 일인가를 생각하다가, 어쩜 단순한 노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아심이 일었다. 그것은 할아버지 모습에서 죽은 아버지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를 모른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와 할아버지 모습에서 지금까지 나대로 아버지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바로 할아버지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종조부를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훅 일어서더니 툇마루로 나가 가지런히 놓여진 신을 찾아 신고는 마당으로 가 섰다. 두리번거리며 집 주위를 돌아다보다가 울타리 건너 빽빽하게 심어진 밀감나무 밭으로 눈을 돌렸다. 한참이나 그곳에 눈을 주며 서 있던 할아버지는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켜고는 "여보" 하고 집안을 향해 소리쳤다. 그 소리에 마루며 부엌에 있던 사람들이 의아하니 마당으로 나왔다. 부엌에 있던 어머니가 화들짝 놀라며 물 묻은 손을 털며 마당으로 나섰다.
꿈속에서만 듣던 생전의 아버지 음성을 들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아, 여보 얼마 만이라. 그 동안 고생이 말이 아니었수?"
할아버지가 어머니를 보더니 환하니 반가운 얼굴로 한 발짝 다가갔다.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하였다.
"난 집을 떠난 후 이리저리 떠돌아 댕기다가 다시 이렇게 와서. 참 세수를 해야크라 물을 좀 주어."
틀림없는 젊은 아버지 목소리였다. 목소리만이 아니다. 할아버지는 바로 20대의 아버지처럼 혈기가 넘치는 청년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여보'라고 하는 흉측스러운 처사에 당혹하면서도 너무나 돌연한 사태에 어리등절하였다. 종조부는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더니 그래도 집 밖 사람들이 없는 데 안심된 얼굴로 어머니에게 물을 떠오도록 눈짓하였다. 나는 어머니 얼굴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청상으로 50을 넘긴 나이에 늘 찐득하게 들러붙던 그 한스러운 수심이 싹 가시고 할아버지 얼굴에서처럼 생기가 스물거리는 걸 찾을 수 있었다. 그 생기가 점점 짙어 가더니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이 기막힌 사태 앞에 눈앞이 캄캄하였다, 어머니까지 할아버지처럼 되지 말기를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죽은 사람 혼이 들린 사람은 그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 모습과 꼭 같이 된다는 말은 들었으나, 그게 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로만 들어왔는데, 그 사실을 나는 할아버지에게서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받아들인다면 이건 마지막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천천히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큰 플래스틱 대야에 물을 가득히 퍼서 할아버지 앞으로 가져갔다. 할아버지는 천천히 소매를 걷어올리고는 왼손부터 대야에 담갔다. 그리고 이어 오른손을 집어넣더니 오래오래 그대로 있다가 꺼냈다. 그리고는 손을 씻기 시작하였다. 어머니와 종조부는 멀거니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삼십 년 전 일이다. 이 마을 민보단 부단장이었던 아버지는 어느 날 공비로 몰려 마을 앞동산 잔디밭에서 마을 청년 여덟 사람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그것은 공비들에게 피살된 마을 구장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나를 밴 만삭의 몸이었다. 외아들인 아버지 죽음은 장손인 할아버지에겐 크나큰 타격이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석 달 후에 어머니는 나를 낳았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선 전연 모른다.
그러나 이따금씩 엿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어머니의 한숨 섞인 말마디에서 나는 아버지를 나대로 상상하여 머리에 간직하며 살았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그 아픔과 외로움을 견디기 위하여 아버지 모습을 가슴에 심어놓고 살아 왔다.
한참이나 손을 씻던 할아버지는 물 묻은 손을 툭툭 털고는, 수건을 들고 서 있는 어머니를 보더니 싱긋 웃으면서
"전에 내가 입던 옷 좀 내줘. 하도 오래 옷을 갈아입지 못해서---”
말끝을 흐리며 수건도 받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말소리와 거동이 틀림없이 아버지 살았을 때라고 나는 생각되었다. 어머니는 종조부 얼굴을 한 번 보고는 뒷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얼마 안 있어 할아버지가 입던 옷 중에서 손보아 오던 것을 꺼내 들고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건네 드리는 옷을 받아든 할아버지는
"여보, 이게 내 옷인가? 원, 이건 아버님 옷이주. 정신두......"
할아버지는 심히 불쾌한 듯, 그러나 애써 참는 얼굴로 옷들을 물렸다. 어머니는 말없이 옷을 거두고 마루로 나왔다.
"제 애비 옷이 있느냐?"
종조부가 수심찬 얼굴로 물었다. 30년 전에 죽은 사람 옷을 간수해둘 리가 없는 줄 알면서도 해 본 소리다. 그런데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예."
하고 대답하면서 다시 뒷방으로 들어가더니 얼마 있다가 명주로 곱게 다듬어 만든 홑바지 저고리를 들고 나왔다. 그건 바로 아버지 옷이었다. 이런 기막히고 가슴 흔드는 일이 또 있을까.
어머니는 아버지 죽음이 정말 믿기지 않아서 언젠가는 할아버지에게 빙의(憑依)되어서라도 아버지가 나타날 것을 믿고서, 아니면 입던 옷으로라도 아버지의 모습을 고이 간직해 두려고 그 옷을 이제껏 장 속에 간수해 둔 것인가.
할아버지는 그 옷을 받아들고는
"여보, 잘 간수해둬서? 고마와, 고마와."
가까이 있었으면 어머니 손목이라도 푹 잡을 듯이 진심으로 고마워 하였다.
"난 이제 잠을 좀 자야크라."
옷을 갈아입은 할아버지는 모여 있는 사람들이 다 들으라는 듯이 크게 말하고는 풀석 요 위에 쓰러져 버렸다. 공중에서 줄을 타는 심정으로 아슬아슬하게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몸을 움직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어머니는 벌써 코를 고는 할아버지 얼굴을 잠깐 훑어보고는 이불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조부가 방안으로 들어와 눈을 감은 할아버지 모습을 보시더니
"틀림없이 신규와 닮았다."
탄식처럼 말하고는 마루로 나와 담뱃불을 붙였다. 신규는 아버지 이름이었다.
"노망은 아니어. 성님이 신규를 들린 거여."
할아버지가 아버지 혼령에 빙의되었다는 이야기이다.
2
할아버지는 꼬박 스무 시간 동안 죽은 듯이 잠만 잤다. 사람들은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바람이었다. 종조부는 장례 절차를 내게 분부하기도 했다. 소식을 들은 일가 친척들이 부산히 드나들었다. 그러나 어저께 일어났던 이야기는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아니했다. 단지 할아버지 병세를 말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노망기까지 보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어머니는 아침이 되자 집 울타리를 사이에 둔 밀감 밭에 들어가 종일 나오질 않았다. 일할 게 있어서가 아니다. 노란 글시 주렁주렁 달린 귤나무 아래 땅을 호미로 '박박' 긁으며 그냥 둬도 그늘에 짓눌려 죽을 잡초들을 뽑고 있었다. 꼭 잡초들을 뽑아 버리려는 게 아니다. 그냥 여러 번 호미 질을 하는 것으로 족한 것이다. 언뜻 뒤에서 보면 호미로 땅을 파는 게 손가락으로 땅을 후비는 것 같았다. 마음 깊숙한 곳에 쌓여진 깊은 상처를 '박박' 긁어 새빨간 궂은 피를 철철 흘려내 버리려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호미로 땅을 긁어낼 때의 어머니 심정은 늘 그런 것이었다. 이 사태에 아버지를 그렇게 잃어버린 어머니는 그냥 슬픔만을 간직하여 살아갈 수는 없었다. 내일도 기약할 수 없었던 그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구장을 죽인 공비로 몰려 죽었으니까, 어머니가 공비 계집으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던 때였다.
사태가 좀 가라앉자 이번에는 배고픔이 앞섰다. 사태로 몇 년 동안 농사를 짓지 못한 처지들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시체를 제대로 매장하지도 못한 채 세 살난 나를 등에 업고 40리 넘는 길을 걸어 외가집엘 갔다. 외삼촌은 우리 모자를 보시고는, '죽은 사람은 죽어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면서 밀감 묘목을 줬다. 육묘장을 경영하던 외삼촌은 감귤에 대한 생각을 다른 사람보다 먼저 가졌었다, 어머니는 나를 외가집에 둔 채 그 묘목을 등짐으로 지고 다시 40리 길을 되돌아와 그걸 심었다. 그로부터 어머니는 마음이 상할 때마다 그 밭으로 가서 땅과 씨름을 하였다. 이제는 옛일이 되었으나 외삼촌 말과 같이 산 사람은 살아야 되는 것을 어머니는 밀감 밭을 만들며 터득하였다.
나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할아버지가 잠들고 있는 방을 건너다보다가 공연히 땅만 긁어 헤치는 어머니를 생각하였다. 그런데 다음 순간 난 극심한 곤혹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만약 어머니까지 아버지로 나타난 할아버지를 정말 아버지로 알아 버린다면.... 생각하기조차 흉측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사실은 어쩌면 가깝게 다가오는 것같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어머니 가슴속에 응어리진 한이 아직도 풀려지지 못한 걸 생각하면 그런 일을 전연 생각 안 할 수도 없었다.
마루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수런거리기 시작하더니 종조부님이 나를 손짓하여 불렀다. 그와 거의 동시에 할아버지 방문이 벌컥 열려졌다.
"야, 희빈아! "
할아버지가 툇마루로 나오며 나를 불렀다. 오랜 잠 속에 묻혔던 얼굴이 아니었다. 목소리가 걸걸하니 힘이 있었고 여전히 번쩍이는 눈빛에 혈기가 넘치고 있었다. 순간 나는 스무 몇 살 때 찍었다는 아버지 사진에서 본 그 모습이 생각났다.
"어머니는 어델 갔나."
어머니가 어느 틈엔지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얼굴은 숙였는데 걸음걸이가 약간 휘청거렸다. 할아버지는 꿈을 꾸듯이 멍청히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나 손을 좀 씻어야겠어. 물을 좀 갖다 주어."
어머니에게 물을 청했다.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감히 말문을 열지 못하는 놀람에 숨을 죽이는데 어머니는 물을 떠다 할아버지 앞에 놓았다. 어제처럼 오래오래 손을 씻었다. 오랜 잠 때문인지 눈 언거리에 눈곱이 흥건하게 끼었으나 그건 상관하질 않았다.
"희빈아 같이 갈 곳이 있다."
손 씻기를 마친 할아버지는 앞장을 서며 내게 재촉하였다.
"성님, 어디를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
마루에 서 있던 종조부가 황급히 내달아 나오며 할아버지 손을 붙잡았다. 실성한 몸으로 동네를 돌아다닌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삼촌님, 저 양 구장네 집에 다녀오쿠다."
"양 구장이라니요 ? "
"아니 양 구장도 모르우과. 그 넓은드르 양 구장 말이우다."
아버지가 죽던 그 시절 마을 구장(區長)을 했던 사람을 말함이다. 아버지 죽음을 몰고 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 아들을 만나 내가 구장을 죽이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여야 허쿠다."
사람들은 아연했다. 30년이 넘어 모두 잊어버린 일들을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그때 어머니 뱃속에 있던 내가 세상에 나와 죽은 아버지보다 더 나이를 먹었는데 그 일을 다시 끄집어내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되어 그때의 그 정황을 기억하고 있는 것인가.
할아버지는 멍청하게 서 있는 사람들을 둔 채 그냥 밖으로 걸어나갔다. 순간 아버지에 대한 막연한 생각들이 내 가슴속에서 굉장히 크게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그건 지금까지 아주 잊어버렸던 일들에 대한 것들이었다. 아니 일부러 잊어버리려 했던 것들이기도 했다. 나는 신들린지도 모른 할아버지에게서 불현듯 아버지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나는 황급히 할아버지 뒤를 쫓았다. 떡 벌어진 어깨며, 팍 펴진 허리며 등, 길쭉한 아랫도리며,,,,,, 할아버지는 혈기가 왕성한 20대의 모습으로 내가 따르기 힘들게 내닫듯 걸어나갔다.
할아버지는 옛날 양 구장네 집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 아들이 죽은 아버지 또래니까 60을 바라보는 나이다. 양 구장이 살아 있다면 할아버지 나이다.
1948년이었다. 봄부터 어수선했던 섬 사정은 가을이 접어들면서부터 더 극심해졌다. 중산간 마을 사람들은 해변마을로 소개를 하였고, 공비들의 습격과 이에 대한 군경합동 토벌대들의 작전이 벌어지면서 섬은 온통 수라장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마을은 그냥 평온하였다. 일주도로변에서 5리쯤 떨어진 부락이었으나 공비가 되어 야단스럽게 날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찰관서는 없었으나 청년들이 스스로 민보단을 만들어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큰일이 벌어졌다. 구장이 공비들에게 납치 당한 것이다. 온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어 마을 주위를 뒤지다가 마을 냇가 숲 속에서 처참하게 죽은 구장을 찾아냈다. 발가벗겨 사지를 나무가지에 묶어놓고 창과 돌멩이로 찌르고 쳐서 거의 갈가리 찢겨진 채로 죽어 있었다. 마을이 생기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구장의 죽음을 본 마을 사람들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그 아들과 가족에게 그 증상이 나타났다. 그들은 경찰관서로 달려갔다. 아버지를 죽인 공비들이 마을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비롯한 여덟 청년이 희생됐다. 나는 그런 사실을 어렴풋이 느낄 뿐 더 자세하게 알려고도 아니했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다. 할아버지도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과연 구장을 죽였는가 하는 문제의 해명에 우리의 관심은 멀어져 갔다. 그런 일들은 있을 수 있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그건 세월 탓만은 아니다. 그 시국에 그런 죽음은 흔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모두들 잊어버리는 것이 그 아픔을 치유하는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죽은 구장의 아들인 길삼씨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밖에서 일을 하다가 잠깐 들어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 싶은 모습이었다. 그는 훌렁훌렁 마당으로 들어서는 할아버지를 보더니 훅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이어 나와 종조부를 비롯한 몇몇이 뒤따라 들어오는 걸 보더니 이상한 얼굴을 하였다.
"길삼이, 오랜만이네."
인사를 할까말까 어정쩡하게 서 있는 길삼씨 손목을 할아버지가 덥석 잡으며 반갑게 흔들었다. 순간 그의 얼굴 표정이 묘하게 움직였다. 틀림없는 노인인데 목소리는 젊은이 같고 어디서 많이 들은 듯이 귀에 익었다. 더구나 할아버지에게서 전연 딴 사람의 인상을 받아서 더더욱 놀랐다.
"날 모르크라. 나야 나, 신규나."
신규가 아버지 이름임을 안 길삼씨는 또 한번 놀랐다. 할아버지는 이제 완전히 아버지로 변신한 것이다. 길삼씨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면서 내게 구원을 청하는 눈길로 뭐라고 말하려 하였다. 그러나 나도 그에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미쳤다고, 아니면 노망한다고 할 것인가.
"길삼이, 난 자네 부친을 죽이지 않았네."
그건 할아버지 심장 깊숙한 데서 울려나오는 목소리였다. 우는 듯 애원하는 듯, 귀기가 서린 듯, 동짓달 한밤중 울담을 에워싼 삽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처럼 들렸다. 그 한마디는 마당을 갑자기 싸늘하게 만들었다.
길삼씨의 얼굴에 주름살이 파르르 떨렸다. 말문이 턱 막힌 듯 눈만 멀뚱거렸다. 그때 종조부가 나섰다, 그러자,
"삼촌님, 전 결코 구장을 죽이지 않았수다."
할아버지가 종조부 앞으로 다가오며 사정투로 말했다. 그리고 마당가에 몰려선 사람들을 멀거니 바라봤다. 마치 법정에 선 죄인이 무죄를 하소연하는 그 얼굴이었다. 그 무죄는 증거가 없다. 단지 심증만 그럴 뿐이다. 완전범죄를 획책한 범인의 덫에 걸려든 피고는 벗어날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믿는 건 자신은 무죄하다는 그 사실뿐이었다. 나는 이상한 충격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정말 아버지 혼이 할아버지에게 옮겨간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인 할아버지 말은 사실일 수도 있다. 헌데 종조부는 그게 아니었다.
"성님, 정신을 차리십서. 무슨 말을 경 허염쑤과. 이제 다 잊어버린 걸 무사 다시 시작허염쑤과."
'정신을 차립서'에 힘주어 말하는 종조부의 얼굴엔 귀찮고 두려운 표정이 역력하게 서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종조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길삼씨에게 얼굴을 돌렸다.
"길삼이, 자네도 잘 아는 일이라. 우린 그때 어떻게 해서라도 마을의 평온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애쓰지 않았는가. 헌데 일이 일어난 거주."
할아버지는 목이 마르는지 침을 자꾸 삼켰다. 옆에서 보니까 주름이 쭈글쭈글한 목에 선하게 서려 있는 힘줄이 자꾸만 꿈틀거렸다. 그리고 힘이 부치지도 않는지 그냥 우뚝 선 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이야기를 해나갔다. '자네 내 이야기를 잘 들어보게'로 시작한 할아 버지 이야기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풀어놓듯이 표준말씨로 거침없이 이어졌다.
그날 우리는 윗동네 정 서방네 집에서 화투를 쳤지. 민보단원들의 친목회로 메밀 국수를 해 먹은 후에 닭잡아 먹기 내기로 시작한 게 판이 커졌어. 민보단 사무실은 향사를 지키는 당직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그 집에 모여들어 판에 끼거나 구경들을 했었지.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놀 때 자네 부인이 달려와선 구장 어른이 공비들에게 납치 당해 갔단 소식을 전했어. 우린 공비란 말에 그만 혼비백산 자리를 박차고 흩어졌지. 내가 곧바로 향사로 와 보니 민보단원들은 철창(鐵槍)을 옆에 두고 코를 골고 있었어. 우리들은 비상을 걸고 대원들을 모았어. 허나 쉽게 모여지질 않더군. 총 가진 공비와 싸운다는 게 겁이 났는지도 모르지. 그럭저럭 날이 밝아서 겨우 모여 자네 집엘 갔었네. 자네 모친과 동생들만 겁에 질려 있었어. 자네가 없길래 물었더니 지서에 갔다더군. 난 그때 우리가 즉시 경찰관서에 연락을 못 취한 게 생각났어.
지서에서 경찰관들이 오고 해서 우리는 구장 어른을 찾기 위해 마을 주위를 샅샅이 뒤졌어. 이틀만에 찾았지. 허나 그건 끔찍스런 현장이었어. 난 그때 자네에게 어떤 말을 해 줘야 할지 말문을 찾지 못했네.
구장 어른의 장사가 끝난 며칠 후였지. 지서에서 경찰관들이 큰 트럭을 타고 와서 민보단원들을 집합시켰어. 우리는 이제부터 토벌대에 배치되어 공비를 잡는 일에 나서는가 생각했어. 모두 스물 두 사람이었어. 우리는 지시에 따라 차를 타고 지서까지 갔어. 그때부터 경찰
관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 공비 취급을 하기 시작했어. 그날 새벽 구장을 납치한 일에 가담한 자를 색출하는 거야. 우린 처음에 어처구니가 없어 고개만 흔들었지, 허나 노름을 했다는 사실이 꺼림칙하여 그날 저녁 행적을 얼버무려 버린 것이 화근이었지. 그날 저녁 우리는 회식을 끝내고 각자 헤어졌다고 대답한 사람들은 거의가 끝까지 노름판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었어.
며칠 후에 우리들의 진술이 우리들 자신에게 퍽 불리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사실대로 말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었어. 더구나 단장과 부단장이 큰 사태가 발발했는데도 지서에 연락도 취하지 않고 뒷날 아침까지 작전을 지연시킨 것은 이상하다는 거야. 또한 그날 저녁 대원 회식을 빙자하여 마을 경계를 소홀히 한 점 등은 모두 의심을 받게 되었어. 우리는 할말이 얼었지. 그러나 우리가 구장을 납치하거나 그 일에 가담하지 않은 사실만은 명백하기 때문에 크게 걱정을 안 했지. 우리는 결국 마지막으로 자네의 증언을 필요로 한 거야.
끝까지 자네가 우리와 함께 있었으니까 일은 쉽게 판가름 날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취조관은 자네의 증언을 듣기로 결정하였네. 일은 간단한 거였지. 자네 부인이 그 소식을 갖고 그 정 서방네 집에 왔을 때 우리가 모두 함께 있었다고 딱 한마디만 해 주면 다 되는 일이었어. 그러나 그 기대는 허물어지고 말았어.
할아버지는 말을 끊고 원망스러운 눈으로 길삼씨를 넘겨다보았다. 어느덧 할아버지 주위를 에워싼 사람들의 눈도 이상하게 빛났다. 모두들 어떤 사태가 일어날 순간을 기다리듯 초조한 얼굴들이다. 80노인과 60노인이 한바탕 붙기라도 할 것을 기대하는 호기심 찬 눈들이었다.
더구나 종조부는 안절부절못하였다. 정신나간 할아버지가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아버지 죽음에 대한 할아버지 말보다도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날 것을 더 마음썼다. 모여 있는 사람들도 같은 생각들이었다
"자네를 만나자 일이 곧 마무리될 줄 믿었네. 자네의 한마디면 우리의 혐의는 다 풀려지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자네의 눈에서 우리를 증오하는 살기를 보았을 때 우리는 덜컹 겁부터 났어. 지금까지는 취조관들도 그렇게 겁이 나지 않았는데 자네의 싸늘한 표정에 그렇게 겁이 난 것은,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마지막이었기 때문이었어."
할아버지 목소리가 '걱걱' 하니 울음과 한숨이 섞여 있었다.
-그날 밤, 하도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우리 집사람이 그 소식을 갖고 온 그때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을 확실히 기억할 수 없읍니다. 중간에도 들고나고 했으니까요. 그때 설령 함께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 부친의 납치 사건에 관련이 안 됐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자네에게 마지막 매달리려던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네는 쇳소리처럼 그 한마디를 하고 홱 나가 버렸네. 자네에게 걸었던 한 가닥 기대가 허물어진 것은 물론 그런 증언은 우리에게 더 불리한 결과를 가져왔어. 계획적이란 거야. 구장의 납치를 위장하기 위하여 그날 밤
민보단원들이 연회를 열었다는 거야."
이런 이야기들은 누구도 몰랐던 사실들이었다. 단지 당시 수사관과 길삼씨만 알고 있다. 허나 그들도 이미 30년 전 일인데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을 리 없다. 헌데 그걸 할아버지는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여선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관심
을 보이지 않았다.
"자, 길삼이, 이제랑 다 말을 하게. 그날 밤에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자네 곁에 있었지 않아서 ?"
길삼씨 얼굴이 점점 하얗게 되며 입술 언저리가 까맣게 타들어 가면서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후딱 서너 발짝 앞으로 나서 더니 길삼씨 오른편 팔을 확 붙잡았다. 순간 휘청, 길삼씨 몸이 중심을 잃었다. 그것은 붙잡힌 손을 빼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자네, 우리 그 집에 가보세. 그날 밤 일을 내가 모두 그대로 말할 테니까."
할아버지는 길삼씨를 붙든 채 마당에 모여선 사람들을 헤치고 밖으로 내달았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60이 안 된 길삼씨가 80이 넘은 할아버지에게 몰려가고 있었다. 종조부와 모여선 사람들이 어리둥절하다가 우하니 뒤를 따라 나갔다.
나도 할아버지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바싹 그 뒤를 따랐다.
할아버지는 길삼씨를 끌고 마을 어구에 있는 정 서방네 집으로 들어갔다, 쓰러져 가는 초가가 한 채 있었다. 댓돌 위에 앉아 있던 개가 인기척에 짖지도 않고 집 뒤울 안으로 달아나 버렸다. 집은 문이 열려진 채 사람은 없었다.
마당에 들어선 할아버지는 길삼씨 손을 풀고는 집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참, 저 방이군."
하면서 마루 건너 안방을 가리켰다. 그때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3
"난 그날 밤 일들을 모두 기억하고 이서. "
할아버지는 길삼씨 손을 잡고 집 동편 울 안으로 들어갔다. 동백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뒤울은 햇볕이 가려져 고즈넉하고 침침한 느낌을 주었다. 거기에 작은방 방문이 나 있었다. 사람 하나 드나들 정도로 작은 문이었다.
"더러는 마루에서 윷을 놀았고, 우리는 이 방에서 화투를 쳤어. 자네는 여길 앉았고, 그 곁에 내가, 내 곁에 단장이 앉았었지."
방문 곁에서 시렁 쪽에 길삼씨가, 그 곁에 할아버지가 직접 앉았다. 시렁 가운데 편, 그러니까 방의 가운데쯤 민보단장의 자리라고 설명을 했다. 그렇게 자리에 앉은 후 직접 화투를 치는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울 안에 모여든 사람들은 참 희한한 일도 다 있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빙긋이 웃거나, 심각해 하면서 잔뜩 호기심에 찬 눈으로 구경들을 했다.
"자네가 돈을 다 잃었던 때쳤주. 매우 초조한 얼굴을 나는 지금도 기억허염서."
할아버지는 조금 여유를 얻은 듯이 길삼씨를 보며 빙그레 웃기까지 하면서 말했다. 길삼씨는 완전히 넋 나간 사람이 되어 할아버지 얼굴을 순간 순간 뚫어져라 바라볼 뿐 입은 조개처럼 꽉 다물었다.
"자네가 돈을 다 잃고 어디 가서 돈을 좀 변통하여서 다시 들어와 얼마 안 돼서 자네 부인이 왔었네. 그때 자넨 손에 들었던 화투장을 던지며 일어서더니 같이 둘러앉아 있던 우리들을 획 둘러보더군. 그건 후에야 느낀 것인데 같이 갈 동료를 찾는 것이었어. 헌데 우린 공
비라는 바람에 모두 혼이 나간 거지. 자네의 처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이 그냥 뿔뿔이 흩어져 버렸어. 그런 우리들 처사가 자네 가슴을 아프게 했겠지. 그러나 그 시각에 내가 자네와 함께 있었다는 건 확실한 사실이 아닌가. 그때 죽은 여덟이 바로 자네가 화투장을 던지고 우리를 둘러볼 때 자네 눈 속에 박힌 얼굴들이야.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 아닌가. 어, 길삼이 대답을 좀 해 보게. 응, 왜 입을 다물엄서."
말을 끝낸 할아버지는 눈으로 나를 찾았다. 사람들은 갖가지 이상한 눈총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는데 그런 것에 아랑곳 않고 나를 손짓해 불렀다.
"야, 회빈아. 넌 들었지. 내가 여기 이 방에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가슴이 찡하니 울리면서 뭣이 섬뜩하였다. 30년 전에 죽어간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나도 같이 미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난 미치지 말고 할아버지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간직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난 공비가 아니라 구장을 죽이지도 않았다."
할아버지는 길삼씨를 붙잡고 어서 대답을 하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길삼씨는 바들바들 떨면서도 입을 꼭 다문 채였다
"대답을 해. 대답을,,,,”
할아버지는 애걸하듯 하였다. 그러나 길삼씨는 먼 허공만을 응시하며 썩은 나무처럼 대답을 하지 않았다.
"넌 들었지. 믿을 수 있지. 내가 공비가 아니란 걸."
할아버지는 길삼씨가 대답을 안 하자 내게 눈을 부릅뜨며 확인시키듯 하고는 후다닥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내달았다.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면서 한마디씩 하였다. 길삼씨는 그냥 허공만 쳐다보고 서 있다.
"완전히 미쳤어. "
"노망을 하는 거여.
"그때 일이 언젠데. 다 잊어버린 일 왜 다시 꺼내시는 건가."
"아들을 들렸어. 거 봐. 아들이 살았을 때와 닳지 않나, 목소리며 걸음걸이까지,,,,,"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귓가로 흘리면서 불끈 뜨거운 게 가슴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걸 도로 꾹 삼켰다. 그리고 할아버지 뒤를 따라 달렸다.
"빨리 가 봐라. 큰일이다, 큰일."
종조부의 걱정스런 음성이 등뒤에서 들려왔다.
정 서방네 집에서 곧장 돌아온 할아버지는 다시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는 울담 건너 그 감귤 밭에서 흙을 긁어 파고 있었다. 그건 마치 아버지가 죽은 후 그냥 아무렇게나 흙만 덮어두었다가 오랜 뒤에 시국이 평안해지자 장사를 지내려 흙을 헤집으며 뼈를 추리던 그때 그 손놀림이었다. 그걸 보면서, 나는 문득 그 한스러움을 이기려, 아니면 한의 깊숙한 곳으로 영원히 빠져 버리려는 아프고 괴로운 몸짓처럼 느껴졌다. 다 잊어버릴 때에 다시 생각나게 하는 할아버지의 처사가 야속하기도 했지마는,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잊어버릴 뻔한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다시 되살리는 계기가 된다는 데서, 어머니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흙을 파 헤집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어머니가 떠 온 줄에 여느 때처럼 손을 오래오래 씻더니 배고프다면서 밥을 달라고 했다. 부엌에서 정성을 다하여 상을 마련, 방으로 들어가자 할아버지는 냄새만 한동안 맡다가 수저로 뜨는 시늉만 하고서 상을 물렸다. 그리고는 냉수를 청하여 한 그릇을 다 비운 후에 곧 잠자리에 들어 코를 골기 시작하였다.
저녁이 되자 일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성님은 오늘 저녁을 넘기지 못할 것이여. 그러니 권당들은 일들을 미리미리 좀 해 줘야겠어."
할아버지 말고는 일가 중에서 가장 어른인 종조부는 할아버지 장례 문제에 마음을 쓰면서 일을 준비시켰다.
나는 그러한 집안의 분위기에 못마땅하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모두들 할아버지의 이틀 동안의 일들에 관해서는 약속이나 한 듯이 입들을 다물고 있는 일이 이상하기만 했다. 가만히 종조부의 눈치를 보건대 의식적으로 그 일을 피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할아버지 장례를 미리부터 요란스럽게 서두는 것 같았다.
"종조부님."
나는 뭔가 확인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죽던 그때 그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건 종조부밖에 없다.
"오늘 할아버지 말씀이 모두 허황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아버지 줄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 하자,
"다 옛날 이야기다. 잊어버린 일들을 공연히 꺼내어 무얼 하겠다는 거야. 이제 큰일 앞에 두고 그런 사사한 일에 마음쓰는 건,,,,,, 너는 더구나 상주될 몸이 아니냐."
종조부의 말은 핀잔에 가까웠다. 나는 의기가 소침하였으나 그렇다고 아버지 죽음에 대산 일을 넘겨 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꺼내려는데,
"알아서 좋을 게 있구 몰라서 좋을 게 있는 거여. 이제 어떡 허려는 것이야. 더구나 실성한 노인네 말을 믿고서,”
종조부의 말은 내 뜻을 완전히 분질러 버렸다. 저 방에 누워 있는 분은 할아버지임에 틀림이 없다. 할아버지에 빙의되어 아버지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나타났다 해도 그것 역시 실성한 할아버지로 받아들여 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나는 방안에 모여 앉은 친족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모두들 뭔가 불안한 표정들이었다. 그것은 할아버지 죽음에 대한 불안이기보다는, 오히려 저 잠에서 할아버지가 다시 깨어나는 데 따른 불안이었다.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는 데 대간 불안이었다.
4
밤새에도 별일이 없었다. 밤은 무사히 넘겼다. 동이 트고 해가 마당 가운데로 솟아올라도 할아버지 방에선 별 기척이 없었다
밤을 무사히 넘긴 할아버지는 다시 깨어나 어떤 일을 만들지도 모른다는 기우를 사람들은 갖고 있었다.
"오늘을 넘기진 못할 것이여."
"그만하면 만수를 누린 셈이지."
"속 아픈 일도 많이 당했지만 그래도 복 있는 분이어. 증손자까지 봤으니.”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죽음에 다다라서 할아버지가 어떤 큰일을 저지를까 하는 염려가 끼여 있는 말이기도 했다. 종조부는 그런 일에 대비해서 건장한 청년 몇을 집 주위에 배치해 놓기도 했다
열 한 시쯤 되어 할아버지는 어제처럼 우닥탁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빈아."
마루에 모여 앉은 사람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마당으로 나오더니 나를 찾았다. 내가 얼른 나서자,
"왜 이리 시끄러우냐. 오랜만에 나를 봐도 반가운 인사 한 마디 하는 사람이 없구나."
심히 불쾌한 얼굴로 사람들을 휘둘러보더니 세숫물을 청하였다. 어머니가 여느 때처럼 물을 떠가자 다시 손을 씻고 또 씻었다.
"성님."
종조부가 갑갑한 얼굴로 손만 씻는 할아버지 곁으로 다가서며 불렀다.
"성님, 소원이 뭣입니까. 굿을 하여 원을 풀어드리리까?"
말소리엔 눅직한 습기가 잔뜩 끼여 있었다. 사람들은 벌써부터 굿 이야기를 하였었다.
"무슨 굿 말이우꽈. 내가 구장을 안 죽였다는 것만 알아주면 됩니다. 난 공비가 아니우다."
할아버지는 종조부가 원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어머니가 흐흑 하며 치맛자락으로 콧물을 훔쳤다.
"회빈아, 저 앞동산으로 가자. 그리고 삼촌님, 길삼이를 글로 보내주십서. 꼭 마지막으로 헐 말이 있수다."
할아버지는 내 팔을 부여잡고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붙잡힌 오른 팔목이 뻣뻣하게 저려 오도록 할아버지 손목엔 힘이 있었다.
우리들은 마을 가운데 있는 앞동산이찬 잔디밭에 이르렀다. 이곳은
밤낮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하란 곳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여덟 청년들이 죽은 곳이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한동안 뒷짐을 지고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희빈아, 넌 저리로 가거라."
할아버지는 무슨 큰일이나 일어날 것처럼 나를 손짓하여 쫓아내듯 하였다. 그리고 빙 둘러싸여 있는 사람들을 죽 훑어보다가 길삼씨를 알아보고는,
"어이, 길삼이 여기로 좀 오게."
길삼씨가 사람을 비집고 나갔다. 벌써 그는 할아버지에게 완전히 매인 몸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흥미롭게 두 사람을 건너다보며 가슴을 조아렸다. 나는 사람들과는 떨어져 이 광경을 보는데 눈꺼풀이 싸르르 떨리면서 가슴이 콱콱 막혀 갔다.
"길삼이, 그날 우리는 결국 자네 부친을 납치한 공비가 되어 이곳으로 끌려왔어. 마을 사람들 앞에서 우리 죄상이 폭로될 참이었지."
사람들은 숨소리를 삼켰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호주머니에서 식칼이라도 꺼내어 콱 길삼씨 가슴을 찌르는 사건이라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우리는 낙담하질 않아서. 죽기 직전이라도 자네가 나서서 해명해줄 줄 알았지."
할아버지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길삼씨는 경계하는 몸짓으로 뒤로 멈칫멈칫 물러섰다.
"그런데 우리가 포승에 묶여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자네 모친의 악받친 목소리를 들었지. 그와 동시에 우리들의 어깨와 등을 향해 돌멩이와 몽둥이들이 내려쳐졌어. 그들 중에 자네를 보았구. 핏발선 눈으로 우리를 향해 저주를 보내고 있었어. 난 모든 기대가 허물어짐을 느꼈구. 그러면서도 죄 없이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여서,"
할아버지는 길삼씨를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두 사람 사이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맥이 풀린 듯 몸들을 뒤척이며 긴장들을 풀었다. 그때였다. 후다닥 할아버지가 길삼씨를 제쳐놓고 내닫기 시작하였다. 나는 사람들 틈에 끼여 있다가 엉겁결에 몇 걸음 쫓아가다가 서 버렸다. 할아버지는 80노인답지 않게 마을 북쪽 길로 내닫고 있었다.
"어어,,,,,,"
사람들은 이 의외의 사태에 입을 벌렸다.
"여보게들 뭣들을 하는 거여. "
종조부가 젊은이들을 향해 소리치자 와 하고 여남은 장정들이 할아버지 뒤를 따랐다.
나는 죽으라고 뛰는 할아버지와 쫓아가는 청년들을 바라보다가 아버지의 최후를 생각하였다. 들은 이야기로는 아버지도 지금 할아버지와 같이 처형 직전에 포승을 풀고 내빼어 달아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붙잡혀 와 죽었다고 했다. 나는 죽음 직전의 탈출을 시도한 아버지의 그 마음을 85세의 늙은 몸을 끌고 달려가는 할아버지 모습에서 생생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역시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듯 '어어 아아' 하고 할아버지와 청년들 간의 거리가 좁혀지는 데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나는 이제 달아나는 할아버지를 붙잡는 일이, 그날 탈출하던 아버지가 붙잡히는 것처럼 할아버지에겐 절망스런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그저 좁혀지는 거리만 보며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청년들은 왜 할아버질 쫓고 있는 것일까. 결국 할아버지는 미친 사람밖에 될 수 없는 것인가. 할아버지 이야기는 미친 사람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인가.
할아버지는 건장한 청년들에게 붙잡힌 채 몸부림치면서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걸 보는 뿐간 꿈속처럼 깊은 수렁에 빠져 가는 절망감에 고개를 숙여 버렸다. 얼마 후였다.
"희빈아!"
하는 아버지 목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할아버지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를 찾는 눈빛이 유난히 번쩍였다.
내가 사람들을 비집고 할아버지에게로 다가갔을 때 뭐라고 말할 듯 입을 달싹이다가 푹 쓰러져 버렸다. 사람들이 약간 웅성거렸고 종조부가 달려나와
"성님, 성님."
소리를 몇 번 하였다.
할아버지는 집으로 옮겨진 후 곧 숨을 거뒀다. 사람들은 조용조용히 움직이며 종조부 지시에 따라 장례 준비를 했다. 그 정도 노망을 하고서 돌아가신 게 천만다행이란 얘기가 친족들과 일꾼들 사이에 오갔다. 누구도 아버지 죽음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꼭 약속한 일 같았다.
지은이 : 현길언(玄吉彦: 1940- )
제주 출생. 제주대학 국문학과 졸업. 1980년 <현대문학>지에 <성 무너지는 소리>와 <급장 선거>가 추천되어 등단. 그는 제주도라는 향토적 삶의 세계를 소재로 하여 분단된 민족 비극의 실상을 파헤치는 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우리들의 신부님>, <귀향>, <열전(1-5)>(연작), <사제와 제물> 등이 있다.
다락 일기
-현길언
1
"잠이 안 와?"
"응."
청년은 벽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새우처럼 오그라들며 신음하듯 대답했다.
이틀 동안 잠에만 파묻혀 있던 그는 사흘째되면서부터 다시 불면에 괴로워하기 시작하였다,
"왜, 겁나?"
"아니요."
"그럼?"
“……"
청년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한다면서도 말이 쉽게 이어지질 않았다,
그 동안 밤낮 이틀을 죽음처럼 잠에 빠져 있다가 엊저녁부터 긴 혼미에서 깨어난 그는, 비로소 차차 맑아지는 의식 속에 휑뎅그렁하게 내동댕이쳐진 자신을 보게 되었다.
두 사람이 발을 뻗고 누우면 꽉 찰 다락은, 창이라야 겨우 네모진 한 뼘의 통풍용뿐인데, 그것도 까만 천으로 꽁꽁 가려져 있었다. 방안의 어둠은 선풍기 조명등으로 약간 흐트러져 있었고 무료하게 위잉 윙 가냘픈 소리를 내며 돌고 있는 선풍기는 도는 게 아니라 잉잉 울면서 떨고 있는 느낌이다. 아래층 방의 벽장 속으로 사람이 겨우 드나들 만찬 통로가 널빤지로 덮여 있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고 다녀야 할 정도로 낮은 천정엔 거미줄이 먼지를 쓰고 덜렁거리고 있다.
경사가 약간 심하게 지어진 뾰죽지붕 속에 창고용으로 만들어진 다락이지만, 밤이 되어 어둠이 쌓이면 하나의 자유로운 공간으로 퍽 안온한 느낌을 청년에게 주었다. 캐시밀론 간이침대 위에 폭신한 양털 담요를 깔고 온 나절을 숱한 생각 속에 보내는 청년은, 밤이 오면 그 모든 것은 어둠과 함께 잊혀져 버린 채 깊은 잠 속에 빠져 버린다. 그것은 청년에게 유일한 자유였다.
똑, 똑, 똑---
꿈에서인가. 또렷한 소리가 백지 위에 까만 점을 찍듯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어깻죽지에 와 닿는 습한 냉기를 느꼈다. 그 기승을 부리던 늦더위 기억이 사라지기 전이어서 그 기운은 청신하게 느껴졌다. 가을이 오고 있다. 뭔가 변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청년은 벽을 향했던 몸을 뒤척였다.
"비가 와요?"
청년의 입에선 탁한 목소리가 급하게 울렸다. 그의 버릇이었다. 기대와 불안에 얽힌 마음은 그렇게 탁한 목소리로 튀어나오기 일쑤다.
"안개가 아주 짙어. "
여인은 어둠 속에서 청년의 몸짓을 눈 여기며 안심시키듯 말했다.
"저 소리는?"
"안개가 물방울이 되어 떨어지는 거지."
여인의 목소리는, 갓 입학한 국민학교 1학년 애들에게 하는 여선생처럼 자상하면서 가라앉아 있다.
청년은 후딱 자리에서 일어나 네모진 창으로 다가갔다. 아랫도리까지 내려온 헐렁한 긴 잠옷이 희미하게 여인의 눈으로 들어왔다. 미국으로 떠난 스미스 소령이 입던 것이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푹 나왔다.
도시도 잠 속에 묻혀 있었다. 안개에 눌리고 어둠에 에워싸여 있는 희미한 가로등들이 청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멀리 미군 병영에는 흡사 별처럼 보이는 등불들이 촘촘히 서러운 얼굴로 서 있고, 병영의 망대에서 내쏘는 강한 서치라이트가 이 잠자는 도시를 이따금씩 핥으며 지나갔다.
이곳을 향하여 천천히 다가오는 서치라이트 불빛에 청년은 겁에 질린 얼굴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와 동시에 섬광이 다락 벽을 할퀴며 지나갔다. 번개에 놀래는 어린애처럼 청년은 머리를 침구에 처박고 숨을 죽였다.
"저 빛 싫어?"
여인의 손이 청년의 가슴에 닿았다.
"저건 괴물 같아. 아니면 폭군이고"
청년은 신음같이 중얼거리며 숨을 헐떡였다.
"불빛을 왜 두려워해."
"저 강렬한 빛, 온 세상을 손아귀에 넣어 짓이겨 버리려는 저 오만한 빛이 날 콱 삼켜 버릴 것 같아요."
"빛이 희망을 줄 수도 있어."
"제겐 가망이 없어요. "
"그건 생각 나름이야. "
"생각이 아니고 그건 현실이에요. 전 쫒기구 있어요. 제가 설 땅은 이 다락밖엔 없어요. 여기가 마지막이에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찾는 심정으로 당신을 의지하고 있는 거요."
"그럼 난 지푸라기겠네."
"스미스가 있었더라면 거목일 텐데. 당신은 지푸라깁니다."
"스미스? 여긴 한국 정부의 치외법권 지대니까. 뭐 망명객 같군."
여인은 청년의 말을 들으며, 절망에서 허덕이는 그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팔로 청년의 가슴 위를 가만가만 쓸어주었다. 청년은 화들짝 놀라다가 그 손에서 따스한 온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손위에 자기의 손을 얹었다. 손과 손이 하나가 되었다. 청년은 여인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녀가 청년의 야윈 몸을 가슴으로 안았다. 청년은 목 안에서 이는 가는 슬픔 같은 것을 씹었다. 여인은 가슴에 와 닿는 청년의 숨결로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약한 자가 어떻게 큰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을까.
여인은 청년을 안고 있는 팔에 더 힘을 주었다. 두 몸이 점점 뜨거워졌다. 그러나 잠시 후, 청년은 탈진한 상태로 여인의 가슴에서 빠져 나와 이불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마음뿐이었다. 여인은 청년을 감싸고 있는 그 탄탄한 절망을 느꼈다.
2
밤 12시가 다 되어 대문에 이르렀는데, 누가 불쑥 나타나더니
“김 여사"
하고 속삭였다.
희미한 대문등 앞에 선 청년은 등산모에 흙 먼지투성이 바지랑 헐쭉한 모습에 왜 피로한 기색이었다. 그런데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청년은 연방 주뼛주뼛 주위를 살피더니,
"김 여사, 접니다. 미스터 최---"
순간 여인은 어디서 들었던 목소리라고 생각하면서 한 발짝 다가가자,
"절 도와줘요. 전 급합니다, "
다급한 청년의 목소리에 더 놀란 것은 오히려 여인 쪽이었다. 그건 정말 의외였다.
지난 여름, 한 대학생이 찾아왔었다. 사회학과 2학년이라는 그는 한국 사회의 소외 집단에 대한 리포트를 쓰기 위하여 현지 조사차 왔는데 좀 도와달라는 부탁을 해 왔다. 그는 자꾸 보채듯 애걸하다시피 하였고, 여인도 그 적극적인 자세에 마음이 끌려 힘닿는 데까지 협조하였다.
미군 ××부대에 근무하는 미군 소령과 동거하면서 미군 전용 클럽까지 경영하는 여인은, 그 대학생을 동거 미군 스미스에게 소개를 하였다. 그들은 서로 곧 친숙해졌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다는 스미스는 연령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학생에게 상당히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대학생은 일을 대강 마친 후 집에서 이틀을 같이 지냈다. 일을 마치고 떠난 후 그는 두 번쯤 편지가 오더니 소식이 끊어졌고, 스미스는 지난 달 일시 귀국하여 지금 부재중이었다.
여인은 대학생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와 밝은 불빛 아래서 그를 보았을 때 여인은 더욱 놀랐다. 청년의 얼굴은 여지없이 흐트러져 있었다. 꺼칠한 수염은 물론, 땀과 때에 절은 웃도리와 먼지투성이 구두와 바지, 가맣게 탄 윤기 없는 얼굴에 끼얹어 있는 넋 나간 표정, 그는 짙은 절망 속에 꽁꽁 절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쫓기구 있습니다. 절 좀 도와주십시오. 며칠간만 좀 머무르면 됩니다."
그는 계속 주위에 신경을 쓰면서 방문 앞에 엉거주춤 서서는 더듬거렸다.
"들어와서 말해요. 어쨌든 이 저녁은 여기서 지내도록 해요."
여인은 그가 무시무시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고 그러한 급박한 처지 속에서 자기를 찾아왔다는 게 가슴 뿌듯하니 반가웠다.
"스미스는?"
여인과 동거하는 미군 소령의 안부를 물었다.
"스미스?"
여인은 빙그레 웃더니 씁쓸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갔어."
"갔어요?"
청년은 낭패한 얼굴이 되더니, 자꾸 밖으로 신경을 쓰면서 더 초조한 몸짓을 하였다,
"들어와, 내가 고발해서 보상금이나 타먹게. "
여인은 청년의 팔을 끌었다.
"먹을 것들 좀,,,,,,"
방안으로 들어오자 그는 휘휘 방안을 돌아보더니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로 먹을 것부터 찾았다. 여인은 그렇게 패기 넘치고 도도했던 청년에게서 짙은 좌절을 보는 순간, 비애가 사르르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자기의 나약함을 스스럼없이 보여주는 청년에게서 오래 전부터 살을 같이하여 살아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특별한 신분인 여인에게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을 갖고 찾아온 청년이었으나, 그래도 여인은 마음이 축축하니 흐뭇하였다.
마련해 준 식사를 말끔하게 치운 청년은,
"자세한 것은 후에 다 알게 될 겁니다. 지금 떠나가야겠는데 돈 좀 꾸어 주십시오. 나중에 배로 갚겠습니다. 집에 연락을 할 수 있는 처지도 못되고, 친구들과도 오래도록 신세를 져서---"
자리에서 일어나 창에 등을 기댄 채 더듬거리는 청년의 얼굴엔 짙은 곤혹이 스물거리고 있었다. 여인은 그의 청이라면 모든 것을 다 들어 주고픈 간절한 연민을 느꼈다. 고액권 몇 장을 집어 건네주려다가 갑자기 청년을 방 안쪽으로 몰아세웠다.
"들어올 땐 마음대로 왔으나, 나갈 때는 그렇게 안 돼요."
그 옛날, 흥정하다가 몸값에 틀려 되돌아가려는 미군을 몰아세우듯 표독스럽게 다그쳤다. 청년은 얼떨떨해 하더니 낭패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아무 데 가서도 잡힐 몸, 같은 값이면 내가 보상금이라도 타먹게끔---"
여인은 절망에 절어 있는 청년의 등을 밀면서 벽장문을 열었다. 그리고 천장을 올려쳤다. 구멍이 펑 뚫어졌다. 거기 다락이 있었다.
대문을 걸어 잠그고 여인이 다락으로 올라갔을 때,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던 청년은, 화들짝 놀라면서 반사적으로 조그맣게 난 창을 향해 몸을 돌리다가 그냥 우두커니 서 버린다.
여인은 청년에게서 더 짙은 절망을 보았다.
다음 순간이었다.
청년은 잽싸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여인의 손을 후려잡으면서 충혈된 눈으로 노려봤다. 여인은 의외였다. 그 이글거리는 눈총 속에 인간의 마지막 욕망을 보았다. 여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는 확 그녀의 상체를 껴안으면서 갈급하게 숨을 몰아 쉬었다.
-버릇없이.
여인은 청년을 밀쳐 버리려다가, 자기는 아무 것도 그에게 해줄 것이 없음을 절감했다. 그런 생각을 할 동안 청년은, 여자의 실내복 자락을 더듬으며 더욱 세차게 여인을 껴안았다. 여인은 순순히 몸을 내맡기면서, 절망에 다다른 사람의 허세찬 마지막 발작을 생각했다. 이 사내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인가고 생각하면서, 그냥 묵묵히 그를 받아 주었다.
청년은 허겁지겁 일을 서툴게 끝내더니, 여인의 얼굴을 넋 나간 사람처럼 오래오래 쳐다봤다. 그러다가 벽을 향해 새우처럼 몸을 오그리고 잠에 빠져 버렸다.
한밤중에 깨어난 그는 잠든 여인의 얼굴을 어스름 속에서 더듬어 보더니 다시 잠에 곯아떨어졌다.
2
"너무 불안해하지마. 며칠 동안 잠만 잘 자더니,,,,,,"
여인은 타이르듯 청년을 위로하였다.
"잠 속에 떨어져 있을 전 아무 생각 없더니, 깨고 나니 불안해요. 이젠 잠도 안 오고,,,,"
"그건 조금씩 불안에서 헤어나고 있다는 증거일 거야. 여기는 안전해."
"안전한 곳은 없어요.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그래도 여기는 안전해."
여인은 절망에 찬 청년의 눈을 보며 아주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청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안전한 곳은 없어요. 당신도 곧 나를 기피할 거요. 모든 사람들이 그랬어요. 겉으로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속으론 모두 나를 꺼렸어요."
청년은 무엇인가 여인에게서 확인을 받고 싶은 얼굴이었다.
"안심해도 돼. 이 다락은 유일한 자유의 공간이니까. 그리고 난 미스터 최가 말하는 그런 사람들과는 달라. 우린 소외 지대 사람들이니까."
소외 지대란 말은 지난 여름 청년이 한 말이었다.
여인은 소외 지대란 말과 다락의 내력을 생각하다가 후훗 웃었다.
한때는 미군 군수물자를 숨겨 두었고, 어떤 때는 미국 사내를 겹치기로 받으며 잠깐 은닉해 두던 곳이었다. 이왕 이곳에 뛰어든 이상, 돈을 벌자고 마음을 먹고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스미스 소령을 만나기 전 이야기다.
하나를 받아서 일을 치르다 밖에서 찾으면, 그를 구슬려 윗다락에 숨겨 두고 찾아온 다른 사내를 받았다. 얼마 후 다락에서 내려온 그 순진한 사내는 힐쭉 한번 웃고는 더 신나게 일을 치렀다. 여자도 더 열심히 상대해 주었었다. 그런데 이제는 쫓기는 한 청년을 숨겨둘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멀리서 땅을 굴리며 지나가는 자동차소리가 밤을 가르며 달려왔다,
"통금이 해제뒬 시간인가요?"
"아직 멀었어."
그녀는 팔을 뻗어 시계를 보여, 같은 또래 친구처럼 청년에게 말했다.
"겨우 두 시 조금 넘었어."
"두 시? 밝으려면 아직도 멀었군."
"잠깐이야. 한잠 자면,,,"
여자는 흐트러진 청년의 상체를 두 손으로 가만히 감싼다.
"잠이 안 와요. 한 시간이 천 년쯤으로나 지루해요."
"약 줄까? "
"싫어요. 약 먹고 푹 자고 나면 더 머리가 맑아지구, 그런 연후엔 절망이 무섭게 달려듭니다."
"무슨 일을 저질렀어? 내겐 얘기해 줄 수 있지 않아."
청년은 몸을 뒤척이며 여자를 힐끔 넘겨다보다가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낮은 천장이 천천히 조금씩 미동하며 내려앉아 가고 있었다.
며칠 후에 그 천장이 폭삭 내려앉아 자신을 꼼짝 못하게 만들고 말 거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낮에 여인은 지난 며칠간의 신문를 뒤적여 보았다. 어떤 큰 사건을 찾으려 하였다. 그러나 별다른 사건은 없었다. 뉴스 시간마다 귀를 기울이며 청년의 범죄를 추리하였으나 허사였다.
"어떻게 된 거야?"
"꼭 알고 싶어요?"
"우리는 같은 처지야. 이렇게 한방에서 사흘을 같이 지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공범자가 된 거야."
"김 여사에게까지 피해를 입히지 않겠어요. 때가 되면 조용히 떠날 겁니다."
"말해 봐. 살인? 강도? 아니면 간첩?"
“……"
청년은 어이없는 얼굴이 됐다.
"난 죄가 없어요. 그냥 쫒기구 있을 뿐입니다."
"죄가 없는데 왜?"
"날 범죄자로 만들고 말았어요. 세상 사람들이---"
"결백하면 사직 당국에 나가 주장해요. 떳떳하게---"
"웃기는 소리 말아요. 결백은 주장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목 안에서 격하게 터져 나오는 탓으로 청년의 이마에서는 땀이 송송 솟아나고 있었다.
"인정하도록 알리바이를 내세워."
"알리바이가 없어요."
아주 허탈한 목소리다.
"뭐?"
여인은 처음으로 놀랐다, 설마하던 생각이 여지없이 무너져 버린 절망이었다.
"그러면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 있기만 해야 돼."
"시간이 지나면 혹 제 누명이 벗겨질지 모르죠."
"언제까지?"
"모르지요. 한엄이 길는지."
"그래도 자수해. 그게 얼마나 편한 일이야."
"똑 같은 소리하는군요. 난 지금까지 그런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왔어요. 한곳에 이틀만 숨어 있으면 자수를 하라더군요. 친구도 친척들까지도---"
청년은 천장을 향해 반듯하게 누우면서도 흔잣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그 얘기를 하기 전에 이곳을 떠나는 건데.,..,."
"떠나라는 말이 아니야. 이곳은 안전하니까 언제까지 눌러 있어도 좋아."
여인은 스미스 소령의 현지처라는 자신의 처지가 새삼 생각났다.
"그러나 전 대단한 일을 하지도 않았어요. 그러나 난 쫓기구 있구, 내가 머물 곳은 아무 데도 없어요. 여기가 아마 최후의 거처가 될 테지요."
여인은 청년의 말을 들으면서 후훗 하고 몇 번 코웃음을 쳤다.
"왜 웃어요?"
"코쟁이 현지처라는 내 신분이 미스터 최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다는 사실에 도리어 내 쪽에서 감격할 정도야."
여인은 가슴속으로 밀려드는 허탈을 털어 버리려 자조적으로 지껄였다.
"지난 여름 우릴 찾아왔을 때, 난 미스터 최 말대로 ‘버림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거든, 헌데 이건 뭐야. 도리어 내가 시혜자 입장이 되었지 않아."
"그러니까 학문은 엉터리지요. 내가 요즘 쫓기면서 바로 그 점을 절실히 느꼈어요. 진짜 소외 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따로 있어요. 이곳 여자들은 달러를 모으는 데 매달릴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난 매달릴 거나 붙잡을 건덕지가 없어요. 신은 아주 먼 곳에 있고."
"내가 있지. 아주 가까운 곳에---"
선풍기 조명등 불빛을 등뒤로 하여 누워 있는 여인이 빠는 담배 불빛이 유난히 반짝인다고 생각되었다. 어둠이 엷게 깔려 있는 이 다락방인데도 두 사람은 환한 방에서처럼 서로의 얼굴 표정까지 느낄 정도로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있었다.
여인은 자기가 피우던 담배를 청년의 입에 물려주었다. 그는 여자의 타액에서 전해지는 야릇한 맛을 음미하면서 먼 데서 들려오는 자동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층 다락이 소리에 따라 조용히 요람처럼 흔들거렸다. 소리가 더욱 가까이 들려왔다. 그럴수록 다락도 크게 흔들거렸다.
"한밤중인데 무슨 차들인가요?"
"이곳은 작전 지역이어서 그래."
"부대가 이동하는 건가요."
"몰라 항상 그러니까."
"날 잡으러 오는 것으로 알았어요."
"잠을 좀 자."
점점 방이 크게 요동쳤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울릉도로 수학여행 떠나던 그 배 안에서 겪었던 지독한 멀미가 되살아났다.
"왜 그래?"
"방이 흔들리고 있어요."
"마음이 흔들리는 거야. "
"아니, 방이 흔들리고, 몸이 흔들리고 심장이 흔들리고--- 결국은 마음까지 흔들리는 겁니다."
잠시 침묵이 방안을 휩쓸었다. 차 소리가 더 또렷이 가깝게 들렸다.
"지금 몇 시?"
목소리가 떨렸다.
"세 시 조금 넘었어."
"겨우 세 시?"
"불안해?"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
여인이 대답도 없이 다락의 통로가 되는 널빤지를 열고 아래로 내려가자, 청년도 후딱 따라 일어나 아래층 동정에 신경을 썼다. 부시럭거리는 인기척이 어둠을 가르며 들려왔다. 청년은 네모진 작은 창가로 가 집 주위를 살폈다. 스무 평 남짓한 뾰쭉지붕의 집채는 해골처럼 어둠 속에 버티어 있고, 음영을 달리하는 물체들이 집체를 중심으로 무질서하게 서 있었다. 흡사 죽음처럼, 장독대, 몇 그루 나무, 텔리비전 안테나, 대문,,,,,,
청년은 바깥을 내다보면서 여인이 살금살금 대문을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전화벨 소리라도 들릴 걸 기다렸다. 어서 그녀의 배신을 보고 싶었다. 그렇게 될 때 모든 것은 아주 홀가분해질 것 같았다.
"뭘 보고 있어? 그 창으로 도망이라도 칠 수 있으리라 생각해?"
청년의 등뒤에서 여자가 웃으며 속삭였다.
"이걸 한 잔 해.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을 거야."
여인은 잔을 입술로 가져가며 한 손에 든 잔을 내밀었다.
"조금씩 혀끝으로만 마셔 봐요. 독하기도 하지만 향긋한 냄새가 정신을 들게 할걸."
어둠을 흔드는 여인의 몸짓을 보며 청년은 잔을 받았다. 코를 찌르는 향기와 혀끝에 와 닿는 그 쏘는 맛이 벌써 전신으로 퍼져 갔다. 청년은 조금씩 마시라는 여인의 말에도 훅하니 모두 들이켜 버렸다. 독하질 않았다. 처음 대하던 그 향취와 맛이 약간 얼얼할 뿐이었다. 여인도 잔을 비우고 가만히 청년의 곁에 누웠다. 천장을 향한 그녀의 눈이 어둠이 얇게 깔린 허공을 가로세로 지르며 원과 사각형을 수없이 만들었다.
"잠 자?"
"예, 잠이 올 것 같아요."
4
나흘째 되던 날, 청년은 신문을 좀 구해 달라고 여인에게 부탁했다. 신문을 받지 않던 여인은 거리에 나가 몇 종류를 사다 주었다. 청년은 그 동안 보도 매체에 대하여 공포감을 갖고 있었다. 지난 신문이나 라디오 텔리비전의 오락 프로까지도 꺼렸다. 심심하면 들으라고 라디오를 틀여놔 주었을 때, 그는 고개를 돌린 채 손을 내저었다.
낮에는 잠만 잤다. 밤이면 여자와 비슷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시간을 묻고 이따금 독한 술을 마시고, 그리고 잠을 잤다. 첫날밤을 제외하고는 여자와의 그 일도 이뤄지지 않았다. 몇 번 시도하다가는 번번이 실패하였다.
밤 12시가 되어 여인이 돌아왔을 때 청년은 천장이 낮은 다락 안에서 작은 창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직도 안개가 걷히지 않은 밤은 어둠과 습기와 그리고 늦더위가 땅을 무지근하게 내려 누르고 있었다.
청년은 여인의 귀가를 기다리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여인과 식모 단 둘이서 사는 이 집엔 식모는 스미스 귀국 후 시골에 내려가 있고 그외 이 집엔 사람 출입이 거의 없다. 그래서 낮 동안은 그 좁은 창을 통해 마당과 거리의 풍경을 샅샅이 훑어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따금 동네 반장이나 우편배달부가 올 것 같으면 반사적으로 그는 몸을 움츠려 달아날 준비를 하곤 하였다. 허나 그건 마음뿐이었다. 내방객이 용무를 마치고 그냥 돌아갈 때면 청년은 새삼 낮은 천장과 사방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좁은 방을 훑어보다가 털썩 요 위에 누워 버린다.
그럴 때 전신에 퍼지는 그 좌절감과 그 뒤에 밀려드는 안도감을 아주 행복스럽게 만끽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불현듯 식욕이 일면, 미리 마련해 둔 우유와 빵과 고기 통조림을 꼭 여인이 지정해 준 양대로 먹었다.
신문을 읽기 위하여 창을 검은 휘장으로 촘촘히 막아 불을 켰다. 불이 밝혀진 방은 상당히 아늑하였고, 실내복에 감싸인 여인의 몸매 가 오두마니 느껴졌다. 순간 청년은 형편없이 처져 버린 자신에 대하여 모멸을 던져 보기도 하였다.
며칠만에 보는 활자는 낯이 설었으나 무척 반가웠다.
두 종류의 일간지를 읽는데 2,3분도 안 걸렸다. 별 기사가 없었다.
벌써들 모두 잊어버리고 있는가? 신문을 내던진 그는 요 위에 드러누워 사지를 뻗고 긴 기지개를 켜면서 하품을 하였다. 모든 것이 천천히 아주 녹아 버리는 듯한 안도감이 일었다. 청년은 여인을 보고 피식 웃었다.
"좋은 소식이라도 있어?"
여인이 싱긋 웃으며 횐 이를 드러내 보이자 청년은 후딱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여인의 목을 와락 껴안으며 그녀의 귀에다 소근거렸다.
"김 여사, 참 아름답게 보여요."
여인은 청년에게서 처음으로 착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을 때가지 청년은 여자를 놓아주지 않았다. 여인은 자신의 몸을 뱀처럼 칭칭 사려 감은 그의 팔과 다리에서 지금까지 숱한 남자에게 느껴 보지 못했던 강렬한 힘과 사랑을 느꼈다
5
닷새째 되는 날 저력, 여인은 청년을 자기가 경영하는 클럽으로 데리고 갔다. 아직도 깊은 잠에서 덜 깬 그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려 하였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클럽은 흥청이고 있었다. 특별 쇼 공연도 있는 날이다. 그러한 것들이 청년을 칭칭 휘감고 있는 무거운 사슬을 벗겨 주리라고 여인은 생각하였다.
작은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가수들과 무희들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떠드는 이국인들, 그들을 쳐다보는 청년의 눈은 생기가 흘렀다.
한 손에 캔 맥주를 들어 마시면서 다른 손과 발로는 바닥과 탁자를 치며 흥겨워하는 검둥이들, 무희들의 아름다운 원색의 몸매가 물결처럼 출렁거릴 때마다 두 손가락으로 고리를 만들어 입에 물고 휘파람을 불어대는 사람들, 한 손을 들어 까딱하며 여자들에게 사인을 하면, 그때마다 여자들은 웃음과 고갯짓과 손들을 흔들면서까지 답례를 한다. 그러면 어린애같이 더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이국 병사들.
청년은 여인이 따라 주는 독한 술을 혀끝으로만 핥듯 빨며 술맛보다 홀 분위기 속에 완전히 취해 있었다. 이국 군인들과 몸을 붙이고 껴안아 돌아가는 여자들의 얼굴엔 그늘이 없다. 이국 남성들의 품에 안긴 그 자그마한 여자들도 진정 즐거움에 젖은 듯 행복한 얼굴들이다. 이들을 소외 지대에 사는 사람으로 생각해 왔던 자신이 오히려 소외자 같이 생각되었다.
광란하던 음악이 멎었다. 그리고 흘 안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이곳저곳에서 휘파람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잠잠해졌다. 이어 조용하게 팡파르가 울리더니 무대 위에 빨간 조명이 태양처럼 떠올랐다. 그때였다. 무희가 나는 듯이 무대로 미끄러져 왔다, 반라의 몸매가 조명을 받으면서 찬란하게 출렁거렸다. 홀 안이 일제히 박수소리에 묻혔다. 음악이 더 요란스럽게 울리자 무희는 미친 듯이 무대를 돌면서 몸을 앞뒤 좌우로 흔들었다. 동작이 계속되면서 그녀는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어 나갔다. 음악은 흐느끼듯, 높은 언덕을 숨차게 오르면서 자지러지는데 무희의 동작이 갑자기 빨라졌다. 홀 안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이 흘렀다.
조용한 음악이 다시 광란처럼 울려퍼지자 여인은 마지막 옷을 벗어 던졌다. 완전한 전라의 몸. 청년은 눈을 감았다. 그건 여체가 아니었다. 하나의 무서운 불덩이였다. 그것이 청년의 얼굴을 향해 돌진해 오는 것 같았다. 이곳저곳에서 박수가 터졌고 휘파람 소리가 고막을 쏘듯 하였다. 여전히 여인은 발가벗은 몸으로 환락의 춤을 추는데, 음악은 흐느끼며 자꾸자꾸 꺼져들듯 하였다.
다시 홀 안이 밝아지고 무대가 텅 비었을 때 청년은 정신을 수습하였다. 알맞은 냉방인데도 그는 온통 열기 속에 앓는 사람처럼 허덕이고 있었다.
일이 끝나고 여인과 같이 집으로 귀가한 청년은 더없이 마음이 가벼웠다. 쫓기고 있다는 생각을 털어 버리고, 술과 여자와 음악과 꿈속에 서로 즐기고 즐겁게 살고 있는 무리들의 구김 없는 표정들만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엿새째 되는 날, 청년은 라디오와 텔리비전을 요구했다. 여인은 낮에 집을 나서면서 뭔가 트여 감을 느꼈다. 내일쯤 그 다락에서 내려올 것을 생각했다. 잠시 고향에 내려가 있는 가정부에게 스미스가 귀국할 때까지 올라오지 말라고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청년의 장기 체류를 위해서였다.
거실을 내실로 옮긴 것은 청년이 이 집에 온 후 꼭 일 주일 째 되는 날이었다. 내방객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그는 벽장을 통해 다락으로 오르는 연습을 몇 번이고 하였다.
스미스 소령과 함께 자던 넓은 침대에서 청년은 여자와 잠을 잤다.
청년이 내실로 거처를 옮긴 이틀 후였다. 여인이 외출해서 청년만 혼자 남아 있는데 초인종이 요란스레 울렸다. 텅 빈 마당이 온통 초인종소리로 가득 찼다. 청년은 벽장을 거쳐 다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네모진 창을 통해 마당의 동정을 살폈다. 50대 남자가 종이를 한 뭉치 들고 다니면서 집집에 돌리는 것 같았다. 그는 편지함 속에 종이를 쑤셔 넣는 것 같더니 옆집으로 가 버렸다. 청년은 문득 불길한 예감이 일었다. 곧 달려나가 그 종이쪽을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라디오의 리시버를 귀에 꽂고 볼륨을 조정했다. 가수들의 노래가 몇 곡 흘러나온 후,
"이것으로 오늘 정오의 로터리를 마치겠습니다. 잠시 후 한 시 시보에 이어서 뉴스를 들으시겠습니다."
낭랑한 여자 어나운서의 목소리를 듣고는 엉겁결에 리시버를 귀에서 떼어 버렸다. 그리고 벽을 향해 몸을 웅크렸다, 가슴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일곱 시쯤 되어 대문 흔드는 소리가 났다. 다락에 누워 있던 청년은 후닥닥 일어나 그 네모진 창으로 밖을 내다봤다. 올 것이 왔다는 예감에 가슴이 뛰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러면서도 도피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여자가 열쇠로 대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옆구리에 뭔가 가득 든 광주리를 끼고 있었다. 행복한 주부의 모습이었다. 청년은 창을 통해 여인을 쏘아봤다. 밤 열 한 시가 그녀의 귀가 시간인데도 이렇게 이른 귀가에 무슨 음모가 서려 있다고 생각되었다.
여인은 마당으로 들어서자 편지함을 뒤져 낮에 두고 간 종이를 꺼내 한참이나 읽었다, 몇 번이고 되풀이 읽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고 다락을 올려다보며 종이를 꾸겨든 채 집 안으로 들어왔다.
청년은 여인의 발소리에 신경을 모으면서, 이 집 주위에 자기를 쫓는 무리들이 깔려 있을 거라고 생각하자 분노가 가슴을 치듯 되살아났다. 방문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청년은 벽장으로 통하는 문 위에 떡 버티어 앉아 힘을 주었다. 누구도 이 다락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생각했다,
똑똑,,,,,,
밑에서 여인이 다락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래도 청년은 응하질 않고 그냥 앉아 있었다.
"나야 나. 미스터 최."
여인의 음성이 약간 짜증스럽게 들렸으나 그는 움직이질 않았다.
"나라니까."
다음 순간 무력하게 앉아 있던 청년은 후딱 옆으로 쓰러졌다. 아래서 판자를 힘껏 밀친 것이다.
"왜 여기 와 있어, 방에서 편히 쉬고 있지 않고."
청년은 모로 쓰러진 채 어서 다락문을 빨리 닫으라고 손짓을 하였다.
여인은 '나까지 의심해' 하고 말하려다가 너무나 초조해 있는 그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송 솟아나고 있었다.
"어디 아파?"
여전히 청년은 여인을 경계하였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저녁을 지어 같이 먹고 싶어서,"
여인은 편지함 속에서 찾아 읽었던 전단의 내용을 잠깐 잊은 채, 정말 행복한 여자답게 지껄였다.
"자, 내려와요. 여긴 안전 지대야. 내가 저력을 준비할 테니 그 동안 목욕을 해요."
여인은 청년을 끌고 방으로 내려왔다.
욕실로 들어선 청년은 샤월 크게 틀어놓았다. 솨 하니 물소리가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내일 잡히더라도 오늘만은 모든 것을 잊어 버리고 싶었다. 온몸을 비눗물 속에 처넣고 몇 번이나 씻고 또 씻었다.
문득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술대 위에 오르기 위하여 온몸에 털을 하나도 없이 깎아내고 목욕을 하듯 마지막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몸을 씻고 또 씻었다,
여인은 식당에서 그 구겨진 전단을 꺼내 보았다, 여섯 사람의 젊은 얼굴들 중에 청년도 끼여 있었다. 청년은 패기가 넘쳐 있었다. 여인은 보고 있던 전단을 불 속으로 던져 버렸다. 청년들의 얼굴이 화염에 휩싸이더니 재만 동동 떠오르다가 물동이에 떨어져 폭삭 사그라져 버렸다.
식탁에 앉은 청년의 몸에선 솜처럼 포근한 비누냄새가 피어났다.
"목욕하니 기분이 가볍지?"
여인은 청년의 손으로 수저를 넘겨주며 웃었다. 청년은 여인의 얼굴을 잠깐 보더니 수저를 들었다.
"편지함에 뭐 없었어요? "
몇 술 뜨던 청년은 여인을 차갑게 보며 물었다.
"응, 그거, 새로 개업한 의상실 선전 전단이었어.
여인의 말엔 조그만 틈도 없다.
"거짓말. "
청년은 투정을 부리는 어린애처럼 수저를 놓았다. 탁하고 급한 그의 음성은 두 사람 사이를 굳어지게 하였다.
"거기에 제 얼굴 있지요?"
"미스터 최 얼굴?"
"현상 붙은 얼굴들,,,,,,"
"웃기지마. 미스터 최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인가. 현상금까지 붙어."
너무나 구김 없는 여자의 대답에 청년은 오히려 면구스러워졌다.
즐거우리라 기대했던 저녁 식탁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정성들여 만든 반찬이 그냥 그대로 식탁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채,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인은 식탁을 와락 밀쳐 버리고픈 충동을 어렵게 참았다. 이런 일들이 모두 그 하찮은 종이쪽지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어처구니없었다.
여인 곁에 누워 텔리비전을 보던 청년은 아홉 시 시보가 울리자 스위치를 껐다, 여인이 왜 그러느냐는 얼굴을 하자,
"다락에 가 자요."
다락으로 눈을 보내며 여인을 재촉하였다.
"왜 그래. 여기도 괜찮아."
"그곳이 오히려 내겐 편해요."
그때 대문 흔드는 소리가 밤을 찢듯 요란스럽게 들렸다
여인이 침착하게 방안을 정리할 동안, 청년은 재빠르게 다락으로 올라갔다.
방문객은 동네 반장이었다. 그는 낮에 두고 간 전단을 봤느냐 묻고는, 비슷한 사람이라도 혹시 나타나면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 가 버렸다. 여인은 웃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무덥고 눅진한 안개가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다락 속에는 청년이 새우처럼 웅크리고 벽을 향해 누워 있었다. 여인은 청년을 끌고 방으로 내려왔다. 어제 클럽에서 즐거워 보였던 청년의 얼굴을 생각하고는 전축에 판을 올려놓았다. 경쾌한 리듬이 방안에 가득 흘러 넘쳤다.
"나 춤 배워 줄까."
여인은 억지로 청년을 끌고 방안을 돌았다. 청년의 얼굴엔 열기와 땀이 얼룩지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춤이 끝나자 청년은 침대에 쓰러져 죽은 듯이 눈을 감았다.
6
온종일 청년은 다락 속에서 위스키를 마시다가 취하면 벽을 향해 새우처럼 몸을 웅크려 잠을 자곤 하였다. 잠이 들면 비몽사몽에 허덕였다. 혼자 알몸으로 많은 사람 앞글 뛰어다니다가 부끄러워 쩔쩔매다가 자기가 지금 누워 있는 다락이 낡아 푸석푸석 마루가 부서져 버려서 어쩔 줄 몰라하는 뒤죽박죽된 꿈들이었다.
밤 열 시가 넘어 돌아온 여인은 한 뭉치 신문을 내밀었다.
청년은 신문에서 아버지 얼굴을 봤다. 함께 쫓기는 여섯 친구들의 아버지들과 함께, 자식들이 어서 사직 당국에 자수하기를 바라는 사연이 같이 실려 있었다.
그걸 읽던 청년은 갑자기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텔리비전을 보자면서 방으로 내려온 그는 다시 심야 프로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텔리비전 화면에 나타난 아버지 얼굴은 침통하게 보였다. 어서 돌아와 법의 심판을 받으라는 목소리엔 잔뜩 눈물이 끼여 있었다.
청년은 텔리비전을 껐다. 하늘과 땅이 맞붙어 버리는 절망감에 눈 앞이 아득하였다. 모두들 나를 범죄자로 취급하고 있구나
"난 이제 혼자야."
청년은 울듯한 얼굴로 여인을 넘겨다봤다.
"왜 혼자야. "
여자는 건성으로 받아넘기며 웃었다.
"내가 있지 않아."
"참 그렇군?"
청년이 횐 이를 드러내며 힘없이 웃었다.
"그 동안 많이 배려해 줘서 감사해요."
"자수하는 거야?"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
“……"
"견eu 보겠어요.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어떻게 자수를 해요."
그는 갑자기 목청을 돋구었다.
"그럼 무엇 때문에?"
"견뎌 보고 싶을 뿐입니다."
"잘 생각했어. 그러나 저렇게 겁이 많아서 어떻게 견딜까. 잘못도 없다면서,,,,,,"
"잘못이 없으니까 더 무섭군. "
"억지 이야기야. "
둘은 잠시 말을 잃었다.
둘은 모두 방안의 공기가 몹시 탁하게 느껴졌다.
"나 전화 좀 쓸까요?"
"어디?"
"집에."
"여유 있군."
여인은 청년의 거동에서, 꽉 닫힌 문을 쾅쾅 두드리며 울부짖는 마지막 안간힘을 보았다.
시외 전화를 신청한 청년은 선 채 방안을 빙빙 돌았다. 여인은 문에 기댄 채, 청년이 이 집에 온 후 여러 일들을 생각했다. 다락 속에서 보낸 일주일이 청년에게나 여인에겐 긴긴 세월이었다. 정말 영원히 밀폐된 공간 속에서 둘만의 세계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여인의 의도가, 시간 속에 차차 허물어져 버리는 그 짧은 과정을 생각했다. 불안과 안도와 불신과 신뢰와 욕정과 허탈과,,,,,, 어쩜 이 저력 모든 것이 다 끝난다고 생각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인이 달려가 받으려는 데 청년이 먼저 받았다,
통화가 시작될 때까지 방안은 싸늘한 정적 속에 빠졌다.
"여보셔요. 아, 나 오빠야. 아버지나 어머니 바꿔 줘,,,,,, 뭐 안 계셔. 왜 울어 울긴. 오빠는 잘 있어,,,,,,"
청년의 목소리가 컥컥 막히다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셨어. 엄마가? 뭐 오빠 때문이라고. 오빤 잘 있는데. 여기? 알 필요 없어,,,,,,"
청년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 들어갔고 여인의 눈에는 물기가 번져 갔다.
“---왜 울어? 오빠 잘 있으니까 염려하지 마라. 엄마 간호 잘 해 드리고 아버지께 오빠 전화왔었더라고 말씀드리고,,,,,, 뭐 자수? 동네에랑 학교 정문에 현상 붙은 오빠 사진을 봤다구,,,,,, 울지마. 울지마,,,,,,"
통화는 더 계속되질 않았다. 청년은 계속 '울지 마' 소리만을 되풀이하다가 자신도 극극 굵은 소리를 내다가 전화를 끊었다.
청년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창으로 다가갔다. 창을 여니 기다렸다는 듯이 숱한 기운이 방안으로 울컥 들어왔다. 그 동안 죽 닫고만 지냈던 창이었다. 어둠이 짙게 드리운 거리에는 가로등이 여전히 어둠에 눌려 있고, 무덥지근한 밤의 열기 속에 자신이 점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언제가지나 이대로 있고 싶었다. -오빠, 자수해. 학교 교문에랑 동네 길가 벽에 현상 붙은 오빠의 사진이 붙어 있어 -동생이 울먹이는 목소리가 가슴을 후비듯 파고들었다. 청년은 잠을 자듯 그냥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인은 마당에서 인기척을 들었다. 그와 동시였다.
"최 철민."
문이 열리면서 우람한 사내 셋이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청년은 어느새 그들에게 잡혀 있었다.
청년은 자기를 에워싼 남자들의 얼굴을 한번 훑고는 두 손을 내밀었다.
문에 장승처럼 서 있던 여인의 눈과 청년의 눈이 한번 마주쳤다.
청년은 사내들에 싸여 방문을 나서면서 이 여인에게 가벼운 목례를 보냈다. 그 표정이 너무나 안온해 있었다.
우리들의 조부(祖父)님
현길언
1
할아버지가 이상해지기 시작한 것은 엊저녁부터였다.
여든 다섯 나이에도 할아버지는 한시도 쉬지 않고 무엇을 하면서 지냈다. 집 주위 자잘한 일들을 손보기도 하였고, 어떤 때는 들이나 밭에까지 나가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없는 집안 살림이긴 하나 할아버지까지 일해야 할 처지는 아닌데도 늘 그렇게 무엇인가를 하면서 지냈다. 닷새 전에는 손자인 나를 데리고 마을 안을 한 바퀴 돌면서 가을 곡식과 감귤 밭들을 돌아보고 오더니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집안에서는 노인이 무리를 한 때문이라고 생각하다가, 이틀을 넘기면서부터는 나이도 나이어서 세상을 뜰 때가 가까웠다고들 수군거렸다.
그래도 읍내 병원으로 모시기 위해 경운기까지 준비하였으나 할아버지는 끝내 듣질 않았다. 그뿐이 아니다. 약은 말할 것도 없고 미음 한 모금 거두질 않았다. 원래 분명한 성품과 고집을 아는 식구들이라 속수무책이었다. 사흘을 넘기면서 종조부를 비롯한 친척들이 모여 밤을 지내면서 운명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초저녁 때였다. 낮부터 모였던 일가 어른들도 저녁을 먹고 온다고들 집으로들 돌아가고, 집에는 종조부와 두서너 사람들이 마루에 앉아서 잡담들을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누워 있는 안방과 마루 사이에는 샛문이 열려져 있어서, 사람들은 마루에 앉아서도 방안의 동정을 살필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내 아내와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얘야 ! "
마당에 서 있던 나는 황망스런 종조부의 부름에 후다닥 마루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누워만 있던 할아버지가 일어나서는 마루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돌연한 사태에 짓눌려 꼼짝도 못하였다. 그것은 이 다음 일어날지도 모를 어떤 사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모두들 죽음 직전의 한순간에 있을 수 있는 할아버지 거동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 다음 일이 이상하게 돼 버렸다. 마루로 들어서는 나를 보신 할아버지 눈이 이상히 빛났다. 그건 너무나 투명한 눈이었다. 눈빛만이 아니었다. 얼굴 이 점점 상기되더니 생기가 서리기 시작하였다. 그때였다.
"아, 네가 희빈이구나. 난 네 애비다."
순간, 나는 노망을 하시는구나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 더 가관스런 일이 벌어졌다.
"삼촌님,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할아버지가 종조부 앞에 넙죽이 엎드려 큰절을 하였다.
"성님!"
종조부가 얼른 두 손으로 할아버지 웃몸을 붙잡아 일으키면서 비통스럽게 부르짖었다. 늙어서 노망을 한다는 게 얼마나 가련한 일인가를 생각하다가, 어쩜 단순한 노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아심이 일었다. 그것은 할아버지 모습에서 죽은 아버지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를 모른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와 할아버지 모습에서 지금까지 나대로 아버지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바로 할아버지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종조부를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훅 일어서더니 툇마루로 나가 가지런히 놓여진 신을 찾아 신고는 마당으로 가 섰다. 두리번거리며 집 주위를 돌아다보다가 울타리 건너 빽빽하게 심어진 밀감나무 밭으로 눈을 돌렸다. 한참이나 그곳에 눈을 주며 서 있던 할아버지는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켜고는 "여보" 하고 집안을 향해 소리쳤다. 그 소리에 마루며 부엌에 있던 사람들이 의아하니 마당으로 나왔다. 부엌에 있던 어머니가 화들짝 놀라며 물 묻은 손을 털며 마당으로 나섰다.
꿈속에서만 듣던 생전의 아버지 음성을 들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아, 여보 얼마 만이라. 그 동안 고생이 말이 아니었수?"
할아버지가 어머니를 보더니 환하니 반가운 얼굴로 한 발짝 다가갔다.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하였다.
"난 집을 떠난 후 이리저리 떠돌아 댕기다가 다시 이렇게 와서. 참 세수를 해야크라 물을 좀 주어."
틀림없는 젊은 아버지 목소리였다. 목소리만이 아니다. 할아버지는 바로 20대의 아버지처럼 혈기가 넘치는 청년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여보'라고 하는 흉측스러운 처사에 당혹하면서도 너무나 돌연한 사태에 어리등절하였다. 종조부는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더니 그래도 집 밖 사람들이 없는 데 안심된 얼굴로 어머니에게 물을 떠오도록 눈짓하였다. 나는 어머니 얼굴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청상으로 50을 넘긴 나이에 늘 찐득하게 들러붙던 그 한스러운 수심이 싹 가시고 할아버지 얼굴에서처럼 생기가 스물거리는 걸 찾을 수 있었다. 그 생기가 점점 짙어 가더니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이 기막힌 사태 앞에 눈앞이 캄캄하였다, 어머니까지 할아버지처럼 되지 말기를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죽은 사람 혼이 들린 사람은 그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 모습과 꼭 같이 된다는 말은 들었으나, 그게 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로만 들어왔는데, 그 사실을 나는 할아버지에게서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받아들인다면 이건 마지막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천천히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큰 플래스틱 대야에 물을 가득히 퍼서 할아버지 앞으로 가져갔다. 할아버지는 천천히 소매를 걷어올리고는 왼손부터 대야에 담갔다. 그리고 이어 오른손을 집어넣더니 오래오래 그대로 있다가 꺼냈다. 그리고는 손을 씻기 시작하였다. 어머니와 종조부는 멀거니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삼십 년 전 일이다. 이 마을 민보단 부단장이었던 아버지는 어느 날 공비로 몰려 마을 앞동산 잔디밭에서 마을 청년 여덟 사람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그것은 공비들에게 피살된 마을 구장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나를 밴 만삭의 몸이었다. 외아들인 아버지 죽음은 장손인 할아버지에겐 크나큰 타격이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석 달 후에 어머니는 나를 낳았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선 전연 모른다.
그러나 이따금씩 엿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어머니의 한숨 섞인 말마디에서 나는 아버지를 나대로 상상하여 머리에 간직하며 살았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그 아픔과 외로움을 견디기 위하여 아버지 모습을 가슴에 심어놓고 살아 왔다.
한참이나 손을 씻던 할아버지는 물 묻은 손을 툭툭 털고는, 수건을 들고 서 있는 어머니를 보더니 싱긋 웃으면서
"전에 내가 입던 옷 좀 내줘. 하도 오래 옷을 갈아입지 못해서---”
말끝을 흐리며 수건도 받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말소리와 거동이 틀림없이 아버지 살았을 때라고 나는 생각되었다. 어머니는 종조부 얼굴을 한 번 보고는 뒷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얼마 안 있어 할아버지가 입던 옷 중에서 손보아 오던 것을 꺼내 들고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건네 드리는 옷을 받아든 할아버지는
"여보, 이게 내 옷인가? 원, 이건 아버님 옷이주. 정신두......"
할아버지는 심히 불쾌한 듯, 그러나 애써 참는 얼굴로 옷들을 물렸다. 어머니는 말없이 옷을 거두고 마루로 나왔다.
"제 애비 옷이 있느냐?"
종조부가 수심찬 얼굴로 물었다. 30년 전에 죽은 사람 옷을 간수해둘 리가 없는 줄 알면서도 해 본 소리다. 그런데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예."
하고 대답하면서 다시 뒷방으로 들어가더니 얼마 있다가 명주로 곱게 다듬어 만든 홑바지 저고리를 들고 나왔다. 그건 바로 아버지 옷이었다. 이런 기막히고 가슴 흔드는 일이 또 있을까.
어머니는 아버지 죽음이 정말 믿기지 않아서 언젠가는 할아버지에게 빙의(憑依)되어서라도 아버지가 나타날 것을 믿고서, 아니면 입던 옷으로라도 아버지의 모습을 고이 간직해 두려고 그 옷을 이제껏 장 속에 간수해 둔 것인가.
할아버지는 그 옷을 받아들고는
"여보, 잘 간수해둬서? 고마와, 고마와."
가까이 있었으면 어머니 손목이라도 푹 잡을 듯이 진심으로 고마워 하였다.
"난 이제 잠을 좀 자야크라."
옷을 갈아입은 할아버지는 모여 있는 사람들이 다 들으라는 듯이 크게 말하고는 풀석 요 위에 쓰러져 버렸다. 공중에서 줄을 타는 심정으로 아슬아슬하게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몸을 움직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어머니는 벌써 코를 고는 할아버지 얼굴을 잠깐 훑어보고는 이불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조부가 방안으로 들어와 눈을 감은 할아버지 모습을 보시더니
"틀림없이 신규와 닮았다."
탄식처럼 말하고는 마루로 나와 담뱃불을 붙였다. 신규는 아버지 이름이었다.
"노망은 아니어. 성님이 신규를 들린 거여."
할아버지가 아버지 혼령에 빙의되었다는 이야기이다.
2
할아버지는 꼬박 스무 시간 동안 죽은 듯이 잠만 잤다. 사람들은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바람이었다. 종조부는 장례 절차를 내게 분부하기도 했다. 소식을 들은 일가 친척들이 부산히 드나들었다. 그러나 어저께 일어났던 이야기는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아니했다. 단지 할아버지 병세를 말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노망기까지 보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어머니는 아침이 되자 집 울타리를 사이에 둔 밀감 밭에 들어가 종일 나오질 않았다. 일할 게 있어서가 아니다. 노란 글시 주렁주렁 달린 귤나무 아래 땅을 호미로 '박박' 긁으며 그냥 둬도 그늘에 짓눌려 죽을 잡초들을 뽑고 있었다. 꼭 잡초들을 뽑아 버리려는 게 아니다. 그냥 여러 번 호미 질을 하는 것으로 족한 것이다. 언뜻 뒤에서 보면 호미로 땅을 파는 게 손가락으로 땅을 후비는 것 같았다. 마음 깊숙한 곳에 쌓여진 깊은 상처를 '박박' 긁어 새빨간 궂은 피를 철철 흘려내 버리려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호미로 땅을 긁어낼 때의 어머니 심정은 늘 그런 것이었다. 이 사태에 아버지를 그렇게 잃어버린 어머니는 그냥 슬픔만을 간직하여 살아갈 수는 없었다. 내일도 기약할 수 없었던 그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구장을 죽인 공비로 몰려 죽었으니까, 어머니가 공비 계집으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던 때였다.
사태가 좀 가라앉자 이번에는 배고픔이 앞섰다. 사태로 몇 년 동안 농사를 짓지 못한 처지들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시체를 제대로 매장하지도 못한 채 세 살난 나를 등에 업고 40리 넘는 길을 걸어 외가집엘 갔다. 외삼촌은 우리 모자를 보시고는, '죽은 사람은 죽어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면서 밀감 묘목을 줬다. 육묘장을 경영하던 외삼촌은 감귤에 대한 생각을 다른 사람보다 먼저 가졌었다, 어머니는 나를 외가집에 둔 채 그 묘목을 등짐으로 지고 다시 40리 길을 되돌아와 그걸 심었다. 그로부터 어머니는 마음이 상할 때마다 그 밭으로 가서 땅과 씨름을 하였다. 이제는 옛일이 되었으나 외삼촌 말과 같이 산 사람은 살아야 되는 것을 어머니는 밀감 밭을 만들며 터득하였다.
나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할아버지가 잠들고 있는 방을 건너다보다가 공연히 땅만 긁어 헤치는 어머니를 생각하였다. 그런데 다음 순간 난 극심한 곤혹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만약 어머니까지 아버지로 나타난 할아버지를 정말 아버지로 알아 버린다면.... 생각하기조차 흉측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사실은 어쩌면 가깝게 다가오는 것같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어머니 가슴속에 응어리진 한이 아직도 풀려지지 못한 걸 생각하면 그런 일을 전연 생각 안 할 수도 없었다.
마루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수런거리기 시작하더니 종조부님이 나를 손짓하여 불렀다. 그와 거의 동시에 할아버지 방문이 벌컥 열려졌다.
"야, 희빈아! "
할아버지가 툇마루로 나오며 나를 불렀다. 오랜 잠 속에 묻혔던 얼굴이 아니었다. 목소리가 걸걸하니 힘이 있었고 여전히 번쩍이는 눈빛에 혈기가 넘치고 있었다. 순간 나는 스무 몇 살 때 찍었다는 아버지 사진에서 본 그 모습이 생각났다.
"어머니는 어델 갔나."
어머니가 어느 틈엔지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얼굴은 숙였는데 걸음걸이가 약간 휘청거렸다. 할아버지는 꿈을 꾸듯이 멍청히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나 손을 좀 씻어야겠어. 물을 좀 갖다 주어."
어머니에게 물을 청했다.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감히 말문을 열지 못하는 놀람에 숨을 죽이는데 어머니는 물을 떠다 할아버지 앞에 놓았다. 어제처럼 오래오래 손을 씻었다. 오랜 잠 때문인지 눈 언거리에 눈곱이 흥건하게 끼었으나 그건 상관하질 않았다.
"희빈아 같이 갈 곳이 있다."
손 씻기를 마친 할아버지는 앞장을 서며 내게 재촉하였다.
"성님, 어디를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
마루에 서 있던 종조부가 황급히 내달아 나오며 할아버지 손을 붙잡았다. 실성한 몸으로 동네를 돌아다닌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삼촌님, 저 양 구장네 집에 다녀오쿠다."
"양 구장이라니요 ? "
"아니 양 구장도 모르우과. 그 넓은드르 양 구장 말이우다."
아버지가 죽던 그 시절 마을 구장(區長)을 했던 사람을 말함이다. 아버지 죽음을 몰고 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 아들을 만나 내가 구장을 죽이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여야 허쿠다."
사람들은 아연했다. 30년이 넘어 모두 잊어버린 일들을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그때 어머니 뱃속에 있던 내가 세상에 나와 죽은 아버지보다 더 나이를 먹었는데 그 일을 다시 끄집어내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되어 그때의 그 정황을 기억하고 있는 것인가.
할아버지는 멍청하게 서 있는 사람들을 둔 채 그냥 밖으로 걸어나갔다. 순간 아버지에 대한 막연한 생각들이 내 가슴속에서 굉장히 크게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그건 지금까지 아주 잊어버렸던 일들에 대한 것들이었다. 아니 일부러 잊어버리려 했던 것들이기도 했다. 나는 신들린지도 모른 할아버지에게서 불현듯 아버지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나는 황급히 할아버지 뒤를 쫓았다. 떡 벌어진 어깨며, 팍 펴진 허리며 등, 길쭉한 아랫도리며,,,,,, 할아버지는 혈기가 왕성한 20대의 모습으로 내가 따르기 힘들게 내닫듯 걸어나갔다.
할아버지는 옛날 양 구장네 집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 아들이 죽은 아버지 또래니까 60을 바라보는 나이다. 양 구장이 살아 있다면 할아버지 나이다.
1948년이었다. 봄부터 어수선했던 섬 사정은 가을이 접어들면서부터 더 극심해졌다. 중산간 마을 사람들은 해변마을로 소개를 하였고, 공비들의 습격과 이에 대한 군경합동 토벌대들의 작전이 벌어지면서 섬은 온통 수라장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마을은 그냥 평온하였다. 일주도로변에서 5리쯤 떨어진 부락이었으나 공비가 되어 야단스럽게 날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찰관서는 없었으나 청년들이 스스로 민보단을 만들어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큰일이 벌어졌다. 구장이 공비들에게 납치 당한 것이다. 온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어 마을 주위를 뒤지다가 마을 냇가 숲 속에서 처참하게 죽은 구장을 찾아냈다. 발가벗겨 사지를 나무가지에 묶어놓고 창과 돌멩이로 찌르고 쳐서 거의 갈가리 찢겨진 채로 죽어 있었다. 마을이 생기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구장의 죽음을 본 마을 사람들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그 아들과 가족에게 그 증상이 나타났다. 그들은 경찰관서로 달려갔다. 아버지를 죽인 공비들이 마을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비롯한 여덟 청년이 희생됐다. 나는 그런 사실을 어렴풋이 느낄 뿐 더 자세하게 알려고도 아니했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다. 할아버지도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과연 구장을 죽였는가 하는 문제의 해명에 우리의 관심은 멀어져 갔다. 그런 일들은 있을 수 있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그건 세월 탓만은 아니다. 그 시국에 그런 죽음은 흔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모두들 잊어버리는 것이 그 아픔을 치유하는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죽은 구장의 아들인 길삼씨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밖에서 일을 하다가 잠깐 들어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 싶은 모습이었다. 그는 훌렁훌렁 마당으로 들어서는 할아버지를 보더니 훅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이어 나와 종조부를 비롯한 몇몇이 뒤따라 들어오는 걸 보더니 이상한 얼굴을 하였다.
"길삼이, 오랜만이네."
인사를 할까말까 어정쩡하게 서 있는 길삼씨 손목을 할아버지가 덥석 잡으며 반갑게 흔들었다. 순간 그의 얼굴 표정이 묘하게 움직였다. 틀림없는 노인인데 목소리는 젊은이 같고 어디서 많이 들은 듯이 귀에 익었다. 더구나 할아버지에게서 전연 딴 사람의 인상을 받아서 더더욱 놀랐다.
"날 모르크라. 나야 나, 신규나."
신규가 아버지 이름임을 안 길삼씨는 또 한번 놀랐다. 할아버지는 이제 완전히 아버지로 변신한 것이다. 길삼씨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면서 내게 구원을 청하는 눈길로 뭐라고 말하려 하였다. 그러나 나도 그에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미쳤다고, 아니면 노망한다고 할 것인가.
"길삼이, 난 자네 부친을 죽이지 않았네."
그건 할아버지 심장 깊숙한 데서 울려나오는 목소리였다. 우는 듯 애원하는 듯, 귀기가 서린 듯, 동짓달 한밤중 울담을 에워싼 삽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처럼 들렸다. 그 한마디는 마당을 갑자기 싸늘하게 만들었다.
길삼씨의 얼굴에 주름살이 파르르 떨렸다. 말문이 턱 막힌 듯 눈만 멀뚱거렸다. 그때 종조부가 나섰다, 그러자,
"삼촌님, 전 결코 구장을 죽이지 않았수다."
할아버지가 종조부 앞으로 다가오며 사정투로 말했다. 그리고 마당가에 몰려선 사람들을 멀거니 바라봤다. 마치 법정에 선 죄인이 무죄를 하소연하는 그 얼굴이었다. 그 무죄는 증거가 없다. 단지 심증만 그럴 뿐이다. 완전범죄를 획책한 범인의 덫에 걸려든 피고는 벗어날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믿는 건 자신은 무죄하다는 그 사실뿐이었다. 나는 이상한 충격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정말 아버지 혼이 할아버지에게 옮겨간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인 할아버지 말은 사실일 수도 있다. 헌데 종조부는 그게 아니었다.
"성님, 정신을 차리십서. 무슨 말을 경 허염쑤과. 이제 다 잊어버린 걸 무사 다시 시작허염쑤과."
'정신을 차립서'에 힘주어 말하는 종조부의 얼굴엔 귀찮고 두려운 표정이 역력하게 서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종조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길삼씨에게 얼굴을 돌렸다.
"길삼이, 자네도 잘 아는 일이라. 우린 그때 어떻게 해서라도 마을의 평온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애쓰지 않았는가. 헌데 일이 일어난 거주."
할아버지는 목이 마르는지 침을 자꾸 삼켰다. 옆에서 보니까 주름이 쭈글쭈글한 목에 선하게 서려 있는 힘줄이 자꾸만 꿈틀거렸다. 그리고 힘이 부치지도 않는지 그냥 우뚝 선 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이야기를 해나갔다. '자네 내 이야기를 잘 들어보게'로 시작한 할아 버지 이야기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풀어놓듯이 표준말씨로 거침없이 이어졌다.
그날 우리는 윗동네 정 서방네 집에서 화투를 쳤지. 민보단원들의 친목회로 메밀 국수를 해 먹은 후에 닭잡아 먹기 내기로 시작한 게 판이 커졌어. 민보단 사무실은 향사를 지키는 당직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그 집에 모여들어 판에 끼거나 구경들을 했었지.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놀 때 자네 부인이 달려와선 구장 어른이 공비들에게 납치 당해 갔단 소식을 전했어. 우린 공비란 말에 그만 혼비백산 자리를 박차고 흩어졌지. 내가 곧바로 향사로 와 보니 민보단원들은 철창(鐵槍)을 옆에 두고 코를 골고 있었어. 우리들은 비상을 걸고 대원들을 모았어. 허나 쉽게 모여지질 않더군. 총 가진 공비와 싸운다는 게 겁이 났는지도 모르지. 그럭저럭 날이 밝아서 겨우 모여 자네 집엘 갔었네. 자네 모친과 동생들만 겁에 질려 있었어. 자네가 없길래 물었더니 지서에 갔다더군. 난 그때 우리가 즉시 경찰관서에 연락을 못 취한 게 생각났어.
지서에서 경찰관들이 오고 해서 우리는 구장 어른을 찾기 위해 마을 주위를 샅샅이 뒤졌어. 이틀만에 찾았지. 허나 그건 끔찍스런 현장이었어. 난 그때 자네에게 어떤 말을 해 줘야 할지 말문을 찾지 못했네.
구장 어른의 장사가 끝난 며칠 후였지. 지서에서 경찰관들이 큰 트럭을 타고 와서 민보단원들을 집합시켰어. 우리는 이제부터 토벌대에 배치되어 공비를 잡는 일에 나서는가 생각했어. 모두 스물 두 사람이었어. 우리는 지시에 따라 차를 타고 지서까지 갔어. 그때부터 경찰
관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 공비 취급을 하기 시작했어. 그날 새벽 구장을 납치한 일에 가담한 자를 색출하는 거야. 우린 처음에 어처구니가 없어 고개만 흔들었지, 허나 노름을 했다는 사실이 꺼림칙하여 그날 저녁 행적을 얼버무려 버린 것이 화근이었지. 그날 저녁 우리는 회식을 끝내고 각자 헤어졌다고 대답한 사람들은 거의가 끝까지 노름판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었어.
며칠 후에 우리들의 진술이 우리들 자신에게 퍽 불리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사실대로 말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었어. 더구나 단장과 부단장이 큰 사태가 발발했는데도 지서에 연락도 취하지 않고 뒷날 아침까지 작전을 지연시킨 것은 이상하다는 거야. 또한 그날 저녁 대원 회식을 빙자하여 마을 경계를 소홀히 한 점 등은 모두 의심을 받게 되었어. 우리는 할말이 얼었지. 그러나 우리가 구장을 납치하거나 그 일에 가담하지 않은 사실만은 명백하기 때문에 크게 걱정을 안 했지. 우리는 결국 마지막으로 자네의 증언을 필요로 한 거야.
끝까지 자네가 우리와 함께 있었으니까 일은 쉽게 판가름 날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취조관은 자네의 증언을 듣기로 결정하였네. 일은 간단한 거였지. 자네 부인이 그 소식을 갖고 그 정 서방네 집에 왔을 때 우리가 모두 함께 있었다고 딱 한마디만 해 주면 다 되는 일이었어. 그러나 그 기대는 허물어지고 말았어.
할아버지는 말을 끊고 원망스러운 눈으로 길삼씨를 넘겨다보았다. 어느덧 할아버지 주위를 에워싼 사람들의 눈도 이상하게 빛났다. 모두들 어떤 사태가 일어날 순간을 기다리듯 초조한 얼굴들이다. 80노인과 60노인이 한바탕 붙기라도 할 것을 기대하는 호기심 찬 눈들이었다.
더구나 종조부는 안절부절못하였다. 정신나간 할아버지가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아버지 죽음에 대한 할아버지 말보다도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날 것을 더 마음썼다. 모여 있는 사람들도 같은 생각들이었다
"자네를 만나자 일이 곧 마무리될 줄 믿었네. 자네의 한마디면 우리의 혐의는 다 풀려지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자네의 눈에서 우리를 증오하는 살기를 보았을 때 우리는 덜컹 겁부터 났어. 지금까지는 취조관들도 그렇게 겁이 나지 않았는데 자네의 싸늘한 표정에 그렇게 겁이 난 것은,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마지막이었기 때문이었어."
할아버지 목소리가 '걱걱' 하니 울음과 한숨이 섞여 있었다.
-그날 밤, 하도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우리 집사람이 그 소식을 갖고 온 그때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을 확실히 기억할 수 없읍니다. 중간에도 들고나고 했으니까요. 그때 설령 함께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 부친의 납치 사건에 관련이 안 됐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자네에게 마지막 매달리려던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네는 쇳소리처럼 그 한마디를 하고 홱 나가 버렸네. 자네에게 걸었던 한 가닥 기대가 허물어진 것은 물론 그런 증언은 우리에게 더 불리한 결과를 가져왔어. 계획적이란 거야. 구장의 납치를 위장하기 위하여 그날 밤
민보단원들이 연회를 열었다는 거야."
이런 이야기들은 누구도 몰랐던 사실들이었다. 단지 당시 수사관과 길삼씨만 알고 있다. 허나 그들도 이미 30년 전 일인데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을 리 없다. 헌데 그걸 할아버지는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여선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관심
을 보이지 않았다.
"자, 길삼이, 이제랑 다 말을 하게. 그날 밤에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자네 곁에 있었지 않아서 ?"
길삼씨 얼굴이 점점 하얗게 되며 입술 언저리가 까맣게 타들어 가면서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후딱 서너 발짝 앞으로 나서 더니 길삼씨 오른편 팔을 확 붙잡았다. 순간 휘청, 길삼씨 몸이 중심을 잃었다. 그것은 붙잡힌 손을 빼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자네, 우리 그 집에 가보세. 그날 밤 일을 내가 모두 그대로 말할 테니까."
할아버지는 길삼씨를 붙든 채 마당에 모여선 사람들을 헤치고 밖으로 내달았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60이 안 된 길삼씨가 80이 넘은 할아버지에게 몰려가고 있었다. 종조부와 모여선 사람들이 어리둥절하다가 우하니 뒤를 따라 나갔다.
나도 할아버지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바싹 그 뒤를 따랐다.
할아버지는 길삼씨를 끌고 마을 어구에 있는 정 서방네 집으로 들어갔다, 쓰러져 가는 초가가 한 채 있었다. 댓돌 위에 앉아 있던 개가 인기척에 짖지도 않고 집 뒤울 안으로 달아나 버렸다. 집은 문이 열려진 채 사람은 없었다.
마당에 들어선 할아버지는 길삼씨 손을 풀고는 집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참, 저 방이군."
하면서 마루 건너 안방을 가리켰다. 그때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3
"난 그날 밤 일들을 모두 기억하고 이서. "
할아버지는 길삼씨 손을 잡고 집 동편 울 안으로 들어갔다. 동백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뒤울은 햇볕이 가려져 고즈넉하고 침침한 느낌을 주었다. 거기에 작은방 방문이 나 있었다. 사람 하나 드나들 정도로 작은 문이었다.
"더러는 마루에서 윷을 놀았고, 우리는 이 방에서 화투를 쳤어. 자네는 여길 앉았고, 그 곁에 내가, 내 곁에 단장이 앉았었지."
방문 곁에서 시렁 쪽에 길삼씨가, 그 곁에 할아버지가 직접 앉았다. 시렁 가운데 편, 그러니까 방의 가운데쯤 민보단장의 자리라고 설명을 했다. 그렇게 자리에 앉은 후 직접 화투를 치는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울 안에 모여든 사람들은 참 희한한 일도 다 있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빙긋이 웃거나, 심각해 하면서 잔뜩 호기심에 찬 눈으로 구경들을 했다.
"자네가 돈을 다 잃었던 때쳤주. 매우 초조한 얼굴을 나는 지금도 기억허염서."
할아버지는 조금 여유를 얻은 듯이 길삼씨를 보며 빙그레 웃기까지 하면서 말했다. 길삼씨는 완전히 넋 나간 사람이 되어 할아버지 얼굴을 순간 순간 뚫어져라 바라볼 뿐 입은 조개처럼 꽉 다물었다.
"자네가 돈을 다 잃고 어디 가서 돈을 좀 변통하여서 다시 들어와 얼마 안 돼서 자네 부인이 왔었네. 그때 자넨 손에 들었던 화투장을 던지며 일어서더니 같이 둘러앉아 있던 우리들을 획 둘러보더군. 그건 후에야 느낀 것인데 같이 갈 동료를 찾는 것이었어. 헌데 우린 공
비라는 바람에 모두 혼이 나간 거지. 자네의 처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이 그냥 뿔뿔이 흩어져 버렸어. 그런 우리들 처사가 자네 가슴을 아프게 했겠지. 그러나 그 시각에 내가 자네와 함께 있었다는 건 확실한 사실이 아닌가. 그때 죽은 여덟이 바로 자네가 화투장을 던지고 우리를 둘러볼 때 자네 눈 속에 박힌 얼굴들이야.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 아닌가. 어, 길삼이 대답을 좀 해 보게. 응, 왜 입을 다물엄서."
말을 끝낸 할아버지는 눈으로 나를 찾았다. 사람들은 갖가지 이상한 눈총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는데 그런 것에 아랑곳 않고 나를 손짓해 불렀다.
"야, 회빈아. 넌 들었지. 내가 여기 이 방에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가슴이 찡하니 울리면서 뭣이 섬뜩하였다. 30년 전에 죽어간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나도 같이 미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난 미치지 말고 할아버지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간직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난 공비가 아니라 구장을 죽이지도 않았다."
할아버지는 길삼씨를 붙잡고 어서 대답을 하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길삼씨는 바들바들 떨면서도 입을 꼭 다문 채였다
"대답을 해. 대답을,,,,”
할아버지는 애걸하듯 하였다. 그러나 길삼씨는 먼 허공만을 응시하며 썩은 나무처럼 대답을 하지 않았다.
"넌 들었지. 믿을 수 있지. 내가 공비가 아니란 걸."
할아버지는 길삼씨가 대답을 안 하자 내게 눈을 부릅뜨며 확인시키듯 하고는 후다닥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내달았다.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면서 한마디씩 하였다. 길삼씨는 그냥 허공만 쳐다보고 서 있다.
"완전히 미쳤어. "
"노망을 하는 거여.
"그때 일이 언젠데. 다 잊어버린 일 왜 다시 꺼내시는 건가."
"아들을 들렸어. 거 봐. 아들이 살았을 때와 닳지 않나, 목소리며 걸음걸이까지,,,,,"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귓가로 흘리면서 불끈 뜨거운 게 가슴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걸 도로 꾹 삼켰다. 그리고 할아버지 뒤를 따라 달렸다.
"빨리 가 봐라. 큰일이다, 큰일."
종조부의 걱정스런 음성이 등뒤에서 들려왔다.
정 서방네 집에서 곧장 돌아온 할아버지는 다시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는 울담 건너 그 감귤 밭에서 흙을 긁어 파고 있었다. 그건 마치 아버지가 죽은 후 그냥 아무렇게나 흙만 덮어두었다가 오랜 뒤에 시국이 평안해지자 장사를 지내려 흙을 헤집으며 뼈를 추리던 그때 그 손놀림이었다. 그걸 보면서, 나는 문득 그 한스러움을 이기려, 아니면 한의 깊숙한 곳으로 영원히 빠져 버리려는 아프고 괴로운 몸짓처럼 느껴졌다. 다 잊어버릴 때에 다시 생각나게 하는 할아버지의 처사가 야속하기도 했지마는,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잊어버릴 뻔한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다시 되살리는 계기가 된다는 데서, 어머니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흙을 파 헤집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어머니가 떠 온 줄에 여느 때처럼 손을 오래오래 씻더니 배고프다면서 밥을 달라고 했다. 부엌에서 정성을 다하여 상을 마련, 방으로 들어가자 할아버지는 냄새만 한동안 맡다가 수저로 뜨는 시늉만 하고서 상을 물렸다. 그리고는 냉수를 청하여 한 그릇을 다 비운 후에 곧 잠자리에 들어 코를 골기 시작하였다.
저녁이 되자 일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성님은 오늘 저녁을 넘기지 못할 것이여. 그러니 권당들은 일들을 미리미리 좀 해 줘야겠어."
할아버지 말고는 일가 중에서 가장 어른인 종조부는 할아버지 장례 문제에 마음을 쓰면서 일을 준비시켰다.
나는 그러한 집안의 분위기에 못마땅하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모두들 할아버지의 이틀 동안의 일들에 관해서는 약속이나 한 듯이 입들을 다물고 있는 일이 이상하기만 했다. 가만히 종조부의 눈치를 보건대 의식적으로 그 일을 피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할아버지 장례를 미리부터 요란스럽게 서두는 것 같았다.
"종조부님."
나는 뭔가 확인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죽던 그때 그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건 종조부밖에 없다.
"오늘 할아버지 말씀이 모두 허황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아버지 줄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 하자,
"다 옛날 이야기다. 잊어버린 일들을 공연히 꺼내어 무얼 하겠다는 거야. 이제 큰일 앞에 두고 그런 사사한 일에 마음쓰는 건,,,,,, 너는 더구나 상주될 몸이 아니냐."
종조부의 말은 핀잔에 가까웠다. 나는 의기가 소침하였으나 그렇다고 아버지 죽음에 대산 일을 넘겨 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꺼내려는데,
"알아서 좋을 게 있구 몰라서 좋을 게 있는 거여. 이제 어떡 허려는 것이야. 더구나 실성한 노인네 말을 믿고서,”
종조부의 말은 내 뜻을 완전히 분질러 버렸다. 저 방에 누워 있는 분은 할아버지임에 틀림이 없다. 할아버지에 빙의되어 아버지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나타났다 해도 그것 역시 실성한 할아버지로 받아들여 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나는 방안에 모여 앉은 친족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모두들 뭔가 불안한 표정들이었다. 그것은 할아버지 죽음에 대한 불안이기보다는, 오히려 저 잠에서 할아버지가 다시 깨어나는 데 따른 불안이었다.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는 데 대간 불안이었다.
4
밤새에도 별일이 없었다. 밤은 무사히 넘겼다. 동이 트고 해가 마당 가운데로 솟아올라도 할아버지 방에선 별 기척이 없었다
밤을 무사히 넘긴 할아버지는 다시 깨어나 어떤 일을 만들지도 모른다는 기우를 사람들은 갖고 있었다.
"오늘을 넘기진 못할 것이여."
"그만하면 만수를 누린 셈이지."
"속 아픈 일도 많이 당했지만 그래도 복 있는 분이어. 증손자까지 봤으니.”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죽음에 다다라서 할아버지가 어떤 큰일을 저지를까 하는 염려가 끼여 있는 말이기도 했다. 종조부는 그런 일에 대비해서 건장한 청년 몇을 집 주위에 배치해 놓기도 했다
열 한 시쯤 되어 할아버지는 어제처럼 우닥탁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빈아."
마루에 모여 앉은 사람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마당으로 나오더니 나를 찾았다. 내가 얼른 나서자,
"왜 이리 시끄러우냐. 오랜만에 나를 봐도 반가운 인사 한 마디 하는 사람이 없구나."
심히 불쾌한 얼굴로 사람들을 휘둘러보더니 세숫물을 청하였다. 어머니가 여느 때처럼 물을 떠가자 다시 손을 씻고 또 씻었다.
"성님."
종조부가 갑갑한 얼굴로 손만 씻는 할아버지 곁으로 다가서며 불렀다.
"성님, 소원이 뭣입니까. 굿을 하여 원을 풀어드리리까?"
말소리엔 눅직한 습기가 잔뜩 끼여 있었다. 사람들은 벌써부터 굿 이야기를 하였었다.
"무슨 굿 말이우꽈. 내가 구장을 안 죽였다는 것만 알아주면 됩니다. 난 공비가 아니우다."
할아버지는 종조부가 원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어머니가 흐흑 하며 치맛자락으로 콧물을 훔쳤다.
"회빈아, 저 앞동산으로 가자. 그리고 삼촌님, 길삼이를 글로 보내주십서. 꼭 마지막으로 헐 말이 있수다."
할아버지는 내 팔을 부여잡고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붙잡힌 오른 팔목이 뻣뻣하게 저려 오도록 할아버지 손목엔 힘이 있었다.
우리들은 마을 가운데 있는 앞동산이찬 잔디밭에 이르렀다. 이곳은
밤낮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하란 곳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여덟 청년들이 죽은 곳이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한동안 뒷짐을 지고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희빈아, 넌 저리로 가거라."
할아버지는 무슨 큰일이나 일어날 것처럼 나를 손짓하여 쫓아내듯 하였다. 그리고 빙 둘러싸여 있는 사람들을 죽 훑어보다가 길삼씨를 알아보고는,
"어이, 길삼이 여기로 좀 오게."
길삼씨가 사람을 비집고 나갔다. 벌써 그는 할아버지에게 완전히 매인 몸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흥미롭게 두 사람을 건너다보며 가슴을 조아렸다. 나는 사람들과는 떨어져 이 광경을 보는데 눈꺼풀이 싸르르 떨리면서 가슴이 콱콱 막혀 갔다.
"길삼이, 그날 우리는 결국 자네 부친을 납치한 공비가 되어 이곳으로 끌려왔어. 마을 사람들 앞에서 우리 죄상이 폭로될 참이었지."
사람들은 숨소리를 삼켰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호주머니에서 식칼이라도 꺼내어 콱 길삼씨 가슴을 찌르는 사건이라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우리는 낙담하질 않아서. 죽기 직전이라도 자네가 나서서 해명해줄 줄 알았지."
할아버지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길삼씨는 경계하는 몸짓으로 뒤로 멈칫멈칫 물러섰다.
"그런데 우리가 포승에 묶여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자네 모친의 악받친 목소리를 들었지. 그와 동시에 우리들의 어깨와 등을 향해 돌멩이와 몽둥이들이 내려쳐졌어. 그들 중에 자네를 보았구. 핏발선 눈으로 우리를 향해 저주를 보내고 있었어. 난 모든 기대가 허물어짐을 느꼈구. 그러면서도 죄 없이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여서,"
할아버지는 길삼씨를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두 사람 사이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맥이 풀린 듯 몸들을 뒤척이며 긴장들을 풀었다. 그때였다. 후다닥 할아버지가 길삼씨를 제쳐놓고 내닫기 시작하였다. 나는 사람들 틈에 끼여 있다가 엉겁결에 몇 걸음 쫓아가다가 서 버렸다. 할아버지는 80노인답지 않게 마을 북쪽 길로 내닫고 있었다.
"어어,,,,,,"
사람들은 이 의외의 사태에 입을 벌렸다.
"여보게들 뭣들을 하는 거여. "
종조부가 젊은이들을 향해 소리치자 와 하고 여남은 장정들이 할아버지 뒤를 따랐다.
나는 죽으라고 뛰는 할아버지와 쫓아가는 청년들을 바라보다가 아버지의 최후를 생각하였다. 들은 이야기로는 아버지도 지금 할아버지와 같이 처형 직전에 포승을 풀고 내빼어 달아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붙잡혀 와 죽었다고 했다. 나는 죽음 직전의 탈출을 시도한 아버지의 그 마음을 85세의 늙은 몸을 끌고 달려가는 할아버지 모습에서 생생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역시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듯 '어어 아아' 하고 할아버지와 청년들 간의 거리가 좁혀지는 데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나는 이제 달아나는 할아버지를 붙잡는 일이, 그날 탈출하던 아버지가 붙잡히는 것처럼 할아버지에겐 절망스런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그저 좁혀지는 거리만 보며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청년들은 왜 할아버질 쫓고 있는 것일까. 결국 할아버지는 미친 사람밖에 될 수 없는 것인가. 할아버지 이야기는 미친 사람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인가.
할아버지는 건장한 청년들에게 붙잡힌 채 몸부림치면서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걸 보는 뿐간 꿈속처럼 깊은 수렁에 빠져 가는 절망감에 고개를 숙여 버렸다. 얼마 후였다.
"희빈아!"
하는 아버지 목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할아버지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를 찾는 눈빛이 유난히 번쩍였다.
내가 사람들을 비집고 할아버지에게로 다가갔을 때 뭐라고 말할 듯 입을 달싹이다가 푹 쓰러져 버렸다. 사람들이 약간 웅성거렸고 종조부가 달려나와
"성님, 성님."
소리를 몇 번 하였다.
할아버지는 집으로 옮겨진 후 곧 숨을 거뒀다. 사람들은 조용조용히 움직이며 종조부 지시에 따라 장례 준비를 했다. 그 정도 노망을 하고서 돌아가신 게 천만다행이란 얘기가 친족들과 일꾼들 사이에 오갔다. 누구도 아버지 죽음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꼭 약속한 일 같았다.
지은이 : 현길언(玄吉彦: 1940- )
제주 출생. 제주대학 국문학과 졸업. 1980년 <현대문학>지에 <성 무너지는 소리>와 <급장 선거>가 추천되어 등단. 그는 제주도라는 향토적 삶의 세계를 소재로 하여 분단된 민족 비극의 실상을 파헤치는 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우리들의 신부님>, <귀향>, <열전(1-5)>(연작), <사제와 제물> 등이 있다.
'현대단편소설2'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3. 마차의 행렬 (0) | 2022.03.31 |
---|---|
102. 독 짓는 늙은이 (0) | 2022.03.31 |
100. 곡예사 (0) | 2022.03.31 |
99. 고향 (0) | 2022.03.31 |
98. 객지 (0) | 2022.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