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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단편소설2

103. 마차의 행렬

by 자한형 2022.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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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馬車)의 행렬(行列) -홍구

 

이 한없이 넓고 기름진 이 벌과 뭇 곡식은 , 자기의 살아오던, 자기의 조상의 피로 땀으로 지경을 다졌으며 눈물과 한숨으로 역사를 기록해 놓은, 잊으려 잊을 수 없는 자기네들 땅에서 검붉은 억세인 주먹으로 오장이 끓어오르는 듯한 눈물을 소리 없이 씻어버리고 지경을 넘어온 이 땅 사람들의 손으로 씨를 뿌리고 김을 맨 곡식들이다.

 

이 벌은 몇십 리 몇백 리나 되는지 한없이 네 활개를 펴고, 쩍 벌어진 곳에 온갖 곡식은 누런 파도를 치고 있다. 이 파도는 성스런 우리들의 생명을 잡아 삼키기도 했다.

 

이 벌은 기름졌으며, 뭇 곡식은 무럭무럭 자라서 실념이 되었다. 그러나 가을이 되어 그 곡식을 베어 털고 나면 늙은 아버지는 아들을 치어다보고 눈물을 흘리며, 아들은 아버지의 눈물을 보고 기다란 한숨을 내뿜는다.

 

달 밝은 가을밤 그들은 떼를 지어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치어다보고 자기들이 이 지경을 넘을 때 흘리던 눈물은 또다시 식어 가는 가슴이 부어터지도록 복받쳐 나오는 것이다.

그네들이 이 지경을 넘을 때는 이 땅은 이름 없는 풀들이 우거졌으며 토끼나 승냥이나 산돼지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인간의 발자취라고는 한번도 가보지 듯하던 황무지였었다. 저 코작 광원을 지향없이 흘러 다니는 집시들의 떼와도 같이 그네들도 처음에는 그 황무지에서 갈 길을 모르고 헤매이었었다.

조국을 버리고 조선에서 쫓겨온 그네들은 슬픔과 억울과 분함을 풀 곳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다만 끝없이 넓은 황야가 그들 눈앞에 가로놓였었을 뿐이었다 그네들은 가슴에 뭉친 모든 것을 낫으로 풀을 베어내고 가래로 흙을 파고 쟁기로 흙을 골라 논을 풀며 밭을 매는 것으로 잊었으며, 잊으려고 하였었다.

이렇게 이 벌은 그들의 손으로 기름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네들에게는 이 벌에서 나는 곡식을 두고도 먹지 못하였다. 이 벌의 임자, 그 곡식의 임자는 그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 벌의 임자를 위하여 이 벌을 개척하였으며 이 벌에 곡식을 심어 농사를 하는 것이었다.

넓은 벌의 누런 곡식의 파도는 꺼먼 들판으로 변하여 아득한 까만 한줄기의 지평선이 보일 뿐이다.

 

대륙의 특징인 혹한의 음습은 수은 빛 하늘이 전달하는 것이다. 이윽고 이 땅에는 마소가 쓰러지는 추위가 다다라온다.

벌써 첫눈이 오늘 아침결부터 부실부실 내리기 시작하였다.

여보게 춘삼이 내일 출포한다나?

곰방 담뱃대에 담배를 퍼워 문 짝달막한 노인이 저쪽 벌에서 돌아오는 젊은 춘삼이에게 말을 걸었다,

, 헌대요.

옷의 눈을 툭툭 떨어버린다.

아니, 이 눈이 오는데도 허겠다고 그래?

노인은 뻑뻑 연기를 내뿜는다,

그것들의 고집이야 눈이 오나 비가 오나죠.

춘삼이는 기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그만이나 오고 말았으면 좋겠네. 그래, 차는 모두 몇 채나 될 모양인가?

-. 한 백 채 넘을 모양이든대요. 한 사날은 해야 될걸요.

그럴 것일세. 적어도 삼천여 석이나 될 것이니까. 이 벌도 굉장히 큰 것이야.

땅거미가 되어오는 벌판을 바라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요, 크죠. 그러나 무슨 소용이 있어요, 해마다 더 심해오니, 참 덕원이네는 너무 딱하더군요. 오늘 아침도 어떻게 저에게 소미 얼마를 얻어갔지만 그것도 얼마 해서 수다식구하구 모다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이러다가는 한꺼번에 죽구들 말 것이야요.

춘삼이의 얼굴에는 알지 못할 비참한 빛이 나타났다.

그렇지. 그래. 그래도 이곳에 올 적에는 얼마간 나을까들 하얗지만 와보니 역시 시원한 게 있나. 우리네들의 팔자야 매마찬가지지. 너무나 기막히네, 이 꼴들이.

노인은 담뱃대를 짚신바닥에다 대고 탁탁 털었다

참 팔자 소관이라면 너무들 팔자를 못 타고 났는걸요.

춘삼이는 노인의 얼굴을 슬쩍 치어다보았다

 

일문이 -

구환이-

덕호-

새벽녘 고요한 안개 낀 공기를 뚫고 이 모퉁이에서 저 모퉁이에서 서로들 불러대었다.

날은 괜찮군. 또 눈이 쏟아질 줄 알었드니.

나는 허리가 아퍼 죽겠네.

이 녀석, 어저께 엎으러 잤으니까 그렇지.

여라-, 도모지 요새는 곁에도 못 간다.J

이누마, 그럼 암소박이다.

암소박도 맞게 되었어. 좀 한가, 치마꼬리에 매달려 다니니. 저놈 어멈 얼굴을 좀 보아, 노랑꽃이 만발하였으니.

이것 보아, 춘삼. 저 칠복이 어머니 안 있나. 참 불쌍해. 죽으려면 얼른 죽지도 않고 그 영감님과 딸이 불쌍하데. 오늘도 새벽같이 뺄거벗고 우리 집으로 와서 나더러 칠복이를 찾아내라네 그려. 남의 일 같지 않어서.

, 그 금연이를 보면 칠복이 생각이 나지, 조고만 것이 그래도 어떻게 살어 보겠다고 날마다 하덕하덕 하다가 그렇게 죽은 것을 생각하면 너무 불쌍해. 제 명에 죽는 것도 슬픈데, 알지 못하는 총알에 맞어 죽으니.

그럼, 칠복이 어머니가 실성을 한 것도 그 탓이지.

아무렇든 우리네도 남과 같이 먹을 것이 있었으면 그런 일이 없었지.

그래, 우리네는 어떻게 된 거야. 남은 몇백 마차씩 곡식을 실어내는데 우리는 밤낮 허덕거리어도 한 마차가 무어야. 반 섬도 제대로 못 먹으니.

그렇지. 지금 세상은 있는 놈은 점점 부자가 되고, 없는 놈은 나종에 와서는 굶어죽거나 말러죽을 것이야.

그것이 왜 그런 줄 아나!

이것 또 학자 춘삼 선생의 연설이 나온다.

이 사람, 그런 것이 아니야. 우리가 일상 아는 것이야. 우리가 일년농사를 지 어 열섬 받을 것을 다섯 섬이나 여섯 섬만 받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일세. 생각들을 해보게.

젊은 장정들은 한 떼가 뭉치어 떠들면서 새벽어둠을 뚫고 걸어들 간다. 그들a오늘 출포하는 곡식을 실러 가는 이 마을의 장정이며 농군들이다.

 

- 백 채에 실어도 못 싣는다는군요.

그럼 그렇지. 그것이 싈하요?

이 마을의 여인네들은 해마다 보는 출포 때이면 공연히 긴장하여지며 떠들어댄다.

오늘도 밤편들을 출포에 내보내고 나서는 그 수많은 마차에 실린 곡식의 더미를 머리에 그리어보고 부러워도 하며 시기도 한다. 그리고 공연한 화도 내어보고 짜증도 내며 어린아이를 울려도 본다.

저 첫 수레가 저기 콩알만하게 보인답디다. 안 나가보료?

여인네들은 무슨 좋은 구경이나 난 것같이 부리나케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줄달음을 쳐서 동구 밖으로들 나와서는 멀리서 굴러오는 출포 마차가 오기를 기다린다. 아이들도 어머니의 치마꼬리에 매달리어 쫓아 나온다.

아니, 저것이 죄다야요?

한 여인이 멀리서 가까워오는 수많은 마차를 바라다보며 부르짖는다.

 

한 더미씩의 곡식을 실은 마차는 무거웁게 환한 길을 장엄한 무슨 행렬같이 규율 있게 마차 뒤에 마차가 달려서 소리 없이, 다만 바퀴의 구르는 단조로운 소리만 내고 구른다.

그 마차의 첫머리에는 까만 외투를 입은 사람이 한 서넛 쫓아온다. 그리고 그 뒤로는 드문드문 느린 걸음으로 또 쫓아온다. 그 사람들은 그 곡식 임자의 하인들이며 이 곡식의 도난을 감시하는 사람들이다.

어구머니, 저것이 모다 곡식야-

너무 많으니까 곡식 같지 않구먼-

저거 한 마차라도 우리를 주었으면 -

마차들이 마을 가까이 올 때에는 몰려 섰던 여인네들은 누구나 할 것없이 한마디씩 입을 연다.

그리고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수없이 굴러오는 마차를 바라다본다. 아이들은 제각기 고삐를 붙잡은 자기의 아버지를 찾느라고 눈을 쏘아 마차를 바라다본다.

몇 마차인가?

한 노인이 허랑대고 묻든다.

일백스물여덟 마차에요.

한 마차꾼이 이쪽을 바라다보며 멋없는 악을 쓴다.

어구머니. 일백스물 몇 차요.

한 여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부르짖었다.

또 그렇게 두 번은 더 가져가야 한다우.

?

그 아랫말은 그 여인의 가슴이 확 막히어 나오지 않았다.

엄마, -저 아버지-

한 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발견하고 어머니더러 보란다,

글쎄, 곡식이 저렇게 말똥보다도 많은데 우리는 등구미에 칠 홉쯤 놓고도 좋아하지.한 여인이 그 마차의 곡식을 훔칠 수 있으면 금방 가서 몇섬이라도 훔칠 듯이 외친다

마차는 조금도 틀림없이 찻길을 구르는 것같이 나란히 구른다. 한 채 두 채 세 채. 어느 마차나 똑같이 똑같은 섬을 실었다.

첫 마차에 딸린 사람은 이 마을의 춘삼이었다.

별안간에 여인네들 틈에 끼어 있던 어느 여인 하나가 첫 마차의 말고삐를 붙잡은 춘삼이에게 달려들었다.

이놈아, 우리 칠복이를 내라.

그 여인은 춘삼이의 멱을 붙잡았다. 그 사이에 마차의 구르던 바퀴는 슬그머니 서버리었다.

노세요 ! -, 들어가세요.

춘삼이는 잡힌 멱살을 풀려고도 않고 그 여인에게 빌듯이 말을 한다.

, 이놈아

그 여인은 춘삼이를 그대로 뒤로 밀쳤다. 춘삼이는 뒤로 비틀하였다.

이놈이다.

그 여인은 까만 외투를 입은 앞잡이 세 사람 중의 한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그 사람은 그대로 그 여인을 밀쳤다. 그러나 기리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이 사람이 밀치면 저 사람에게로 그

그 여인은 이 마을의 칠복 어머니다. 칠복이가 어느 겨울 산에 올라 나무를 하다가 날아오는 사냥 총알에 명중이 되어 죽었다. 그후로 그 여인은 미쳤다.

지금도 미쳐 날뛰는 것이다. 미친 사람에게 대항을 하면 그 사람은 더욱 미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이 칠복 어머니를 가만두지 않고 춘삼이가 말리어도 그대로 대항을 하였다.

그 사이 마차는 섰다. 중간에 섰는 까만 외투를 입은 사람들은 소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 사이는 한 4, 5분 되었다. 날뛰던 칠복 어머니가 길바닥에 나가 둥그러질 때는 마차를 끄는 일백스물여덟 명의 귀와 동구 밖에 섰는 수많은 여인 아이 노인의 귀에는 이상한 음향이 들렸다, 총을 쏘는 것이다. 가여운 여인의 거룩한 생명은 또다시 이 벌판에 붉은 물을 들이었다.

 

칠복 어머니가-

말고삐 소고삐를 쥐고 있던 젊은 사람들은 물밀듯이 앞으로 모였다.

이 곡식 끄는 말이나 소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우두커니 서서 새김질을 하며 앞발로 땅을 파고들 있다. 마차는 딱 섰다.

지금까지 철옹 같이 그 곡식에 가느다란 손꼬락 하나 못 대게 눈알을 내리 굴리고 치굴리던 사람들은 똥덩어리 같이 그 곡식머리에서 요란하여진 앞으로 모여든다.

지금까지 곡식을 보고 군침을 삼키던 여인네들은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그 곡식 섬으로 달려든다.

!

두 번째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춘삼이의 억세인 주먹은 그 사람의 볼따구를 내쳤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춘삼이의 바른쪽 다리에서는 검붉은 피가 지를 흘렀다.

-

젊은 장정들은 굵다란 목소리를 내질렀다. 이리저리 사람의 물결은 일었다.

 

곡식을 실은 마차에는 여인의 떼가 매어 달려 있다. 곡식 섬 틈으로 손을 넣어 한 움큼씩 곡식을 집어 앞 치맛자락에 담는다.

주린 이리가 고깃덩이를 만난 것같이 그 여인들은 정신없이 곡식 섬에 매어 달리었다. 슬픔을 새김질하는 무리.

한쪽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또 알려고도 않는다. 그들의 눈에는 곡식만이 보일 분이다. 곡식은 그들에게는 천추에 한이다. 곡식은 그들로 나라를 버리고 부모처자를 버리게 했다. 자기네의 남편들이 지금 어떻게 돼 있는지 그들은 그것을 알려고도 안 한다. 다만 곡식, 그들의 머리에는 주림이라는 쓰라린 경험이 뿌리깊이 무서웁게 박히었다.

-쓸데없는 희생은 내지 마라.

춘삼이는 한 손을 들어 여러 젊은 장정에게 부르짖었다.

그들의 노염은 산골의 산돼지가 포수를 보고 그대로 맞 덤비는 것 같은 것이다. 쓸데없는 소용없는 그들의 분노이다. 자연의 폭발이 다.

쓸데없는 희생을 마라.

춘삼이는 또 한번 외쳤다. 그러나 그네들의 그 노염은 그대로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 세상에 인간이 있고 인간들의 가진 감정이 있는 한 그네들의 노염은 필연이다. 자연이다.

그네들은 어느 때까지 그리들 하고 있을는지 지금까지 정렬하여 끌고 가던 마차는 딱 섰다. 움직이지 않는 마차의 행렬이 되었다. 마차의 곡식 섬에는 그대로 여인의 손이 기계와 같이 곡식을 앞치마 자락에 담는다,

히 여인네들은 앞에서 일어난 야단이 길수록 그들에게는 만족할 것이다.

아직도 그치지 않았다. 아직도 식지 않았다. 그들의 물결은-그러나 이것은 곧 그칠 것이다. 그것에는 영구라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한 조그만 인간들의 비극으로 보아도 좋겠지--

 

 

 

 

홍 구(洪九: 1908- ? ) 유성 | 목마

 

서울 출생. 경기 상고 졸업 후 <KAPF>에 참가함. 해방 직후 <조선 문학가 동맹> 총무부장 역임. 1933<신동아><마차(馬車)의 행렬(行列)>을 발표하여 등단함. 그는 사회주의 문학관을 가지고 문단 활동을 하였으나, 계급 의식보다는 남녀의 애정 관계를 감상적으로 다룬 작가로 알려져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코뿔 선생>, <젊은이의 고백>, <서분이>, <손님>, <유성>, <목마>, <자웅(雌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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