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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단편소설2

112. 사제와 제물

by 자한형 2022.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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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와 제물 현길언

 

1

 

목사가 그의 자리에서 수청 기생이 따라주는 술잔을 기울이다가 보드라운 계집의 살결과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심란한 타관의 객고를 풀려고 할 즈음에 호방이 주책없이도 황겁스레 달려들었다.

주저주저하며 얼른 말머리를 열지 않는 호방의 시원찮은 표정에 목사는 울화가 치밀었다. 그런데도 호방은 주위를 흘끔흘끔 둘러보며 송구스러운 듯이 꾸물거리기는 하면서도 찾아온 용건을 얼른 꺼내질 않았다. 며칠째 불어대는 진눈깨비 섞인 높새바람이 타관에 와 있는 목사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던 요 며칠이었다. 더구나 밤마다 머리맡과 맞닿아 있는 갯가에서 들려 오는 파도소리와 물결에 씻겨 내려가는 자갈소리에 며칠을 불면에 시달리던 참이었다.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파들파들 뛰는 계집의 몸뚱어리도 밤중에는 징그러운 구렁이처럼 늘 불안하기만 하였다.

그런 밤이면 꼭꼭 악몽이 찾아들었다. 변덕 많은 벼슬길에서, 그 동안 말이 좋아서지 삼 년을 퇴관하였다가 겨우 하해 같은 성은에 덕 입어 이 절해 고도인 제주목에 자리를 얻게 되었으니, 이게 다시 벼슬길로 치닫는 계기가 되느냐, 아니면 마지막으로 몇 년 해먹다가 그냥두느냐는 중요한 관건이 되는 직책이므로, 거세인 풍랑에 몸을 맡겨 죽기 아니면 살기로 찾아든 곳이었다. 그런데 부임하여 두 달이 넘어도 낯선 땅과는 조금도 친숙해지질 않았다, 그래서 낮에는 사냥으로, 밤에는 주색으로 외톨이 된 마음을 달래는 중이었다. 이 저녁에도, 여느 저녁과 마찬가지로, 계집이 따라주는 청주로 가슴을 녹인 다음, 나릇나릇한 살결로 몸을 녹이며 설한풍 이는 이 밤의 뒤숭숭한 꿈자리를 피하여 보려는데, 호방이 '사또 긴히 여쭐 말씀이 있어 이렇게 느지막이 찾아 왔습니다' 하고 달려들 게 뭐란 말인가. 혹 이 작가가 주색에 녹아나면서 정사를 소홀히 하는 목사의 밤 정사를 훼방하려는 소의가 아닌지, 낮에는 엿볼 수 없는 목사의 체통을 넘겨보려는 것이나 아닌지, 의심이 불끈 솟기도 하였다.

그러나 설사 심란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내보여서는 목사의 체신이 무엇이 되겠는가. 목사는 앞에 앉아 있는 호방을 여유 있게 넌지시 바라보며 위엄을 내보이려는 것보다도 자신을 진정하려고 헛기침부터 하였다. 내가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 예까지 흘러왔다고는 하지마는,

예부터 제주 목사는 육방 관속들에게 잘못 보였다가는 바지저고리에 꼭 알맞은 허울좋은 꼴이 되기 십상이어서 신세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이야길 귀가 따갑도록 들어서 알고 있었다.

"무슨 긴한 일이기에 이리 일기 궂은 야심한 때에 찾아왔는고?"

목사는 되도록 귀찮은 기색을 내보이지 않으면서 느긋하게 말문을 열었다,

"사또 나으리, 이미 공사를 논할 시간이 아닌 줄 아옵니다만, 일이 워낙 긴하여서 이렇게 시간 불문코 찾아왔습니다."

호방도 말문을 열었으나 그 다음 정작 해야 할 말은 얼른 꺼내질 않았다. 꿍꿍이속이 다 있는 것이다. 목사의 마음을 얼마쯤 죄어논 다음 이야기해야 훨씬 잘 풀릴 수도 있다고 호방은 생각했다. 이런 계산에야 제주목의 육방 관속들을 따를 자가 또 어디 있을까?

"어서 이야기해 보시오."

곁에 앉아 있는 계집을 물리치며 목사는 호방을 건너봤다. 그러면서 혹 백성들이 탐관에만 뜻이 있고 정사에 마음이 없는 목사를 논죄하는 정보나 갖고 오지 않았는지, 아니면 이곳 터주대감들인 토호나, 글들이나 읽었다는 유림들이, 무능하고 계집질에 정신이 팔린 목사의 정사에 대한 분분한 여론을 내놓고 다니는 것을 염탐하고 왔는지, 목사는 여간 가슴이 죄어드는 게 아니다.

"대정 고을 창고내란 마을에 사는 강 좌수란 자가 사또의 정사를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순간 쿵 하고 목사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말로만 듣던 시끄러운 제주 백성들이 기어이 내 신세 망치게 파려고 일을 만드는구나. 민란이 일어나면 그 연고나 과정이 어떻든 목사가 책임을 져야 한다.

"강 좌수란 자가? 아니 좌수가?"

목사는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호방에게, 어른에게 무엄하게 대드는 어린애처럼 소리쳤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어떻게 좌수가 목사의 정사를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손이 맞아야 도둑질도 한다는데, 좌수와 속사가 손발이 안 맞고 부임 몇 달이 안 되어 이러쿵저러쿵 말이 있는데서야, 이곳에서 이 하잘난 목사 자리나마 그 임기를 채울 수 있으랴.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머리가 어찔해지면서 눈앞이 뽀얗게 아득해 진다.

"무슨 영문인가. 차근차근 말해 보시오."

", 사실은 이렇습니다."

호방은 그의 특유한 말투로 그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대정 고을 창고내란 곳에 벼 오백 석, 소 삼백 마리, 말 이백 마리를 치는 강 좌수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지방 토호요 세도가로서 대정현 좌수까지 지낸 자인데 그곳에서는 제법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처지입지요, 지난 여름에 그의 감귤원에서 진상용 감귤로 소유자 3,000, 대유자 2,500, 동정귤 3,000, 생귤 3,200개 등등 도합 일만 삼천 오백 육십 칠 개를 헤아려, 동짓달에 팔천 구백 열 두 개를, 나머지는 세말에 헌납하도록 영이 내려져 있었는데, 이번에 그 중에 동짓달에 헌납할 것을 어떻게 거둬들이고 있는가 하고 대정현으로 하여금 살펴보도록 한 결과, 그 백여 그루 귤나무들이 몽땅 잘려져 있어 한 톨의 귤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괴변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동짓달 진상에 차질을 빚음은 물론, 세말 진상에는 더 없는 어려움이 닥칠 것이라, 너무 황망하고 어쩔 바를 몰라서, 더구나 이 일이 단순한 일같이 생각되지 않아서 사또께서 편히 쉬실 이 시간에 염치 불구하고 알현을 청하였사옵니다."

호방의 말은 한없이 이어 내려질 것 같아서 목사는 듣는 중에 몇 번이고 헛기침을 하였다. -겨우 그런 일을 가지고, 난 또 뭐라고, 호방의 군사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목사는 차츰 불안했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감귤나무들이 죽다니, 나무들도 돌림병이라도 들었던가."

목사는 호방이 괴변이라는 등, 황망하다는 등, 급박한 처지를 말하는데도, 그런 일들이 도시 귀에 솔깃하게 들려오질 않았다. 호랑이 이야기로 어린애를 겁주려는 것이로구나 생각하면서, 자기를 첫번 시험대에 올려놓으려는 것 같아서 호방이 저으기 고약하기도 하였다.

"사또 나으리. "

호방의 사또를 바라보는 눈매에 한없는 연민이 서렸다. 이 어린애 같은 사또가 어떻게 험한 풍랑 같은, 이 한시도 쉬임 없는 이 제주목에서 목사 자리를 지켜나갈까, 생각하니 애처롭기까지 사였다.

"그게 아니옵고, 나무들이 돌림병을 얻은 게 아니옵고, 그것을 그 자가 일부러 죽여 놓고 잘라 버린 것이옵니다."

", 일부러? 그런 멍충이가 어디 있나. 그 좋은 나무들을 일부러 죽이다니."

호방의 사또를 바라보는 눈매에 은근한 경멸의 빛이 어린다. 그러나 그걸 눈치챌 목사는 아니다.

"사또, 이곳 사정을 미처 모르셔서 그러실 것입니다. 진상용 감귤을 모으기 위해서 섬 안 모든 집집의 울 안에 심어져 있는 귤나무에 귤이 매달려 있을 6월 달쯤에 호방에서 직접 나가서 헤아려 두었다가, 겨울이 되면 그 수대로 거둬들이는 관례가 있습니다, 만약 수대로 바치질 않으면 한 개마다 볼기 한 대가 아니면 돈 한 냥씩을 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하늘이 주는 햇빛과, 땅이 주는 물과 바람과 이슬과 그런 것을 먹고 자라는 과일나무라 할지라도, 바람에 떨어지는 것도 있고, 까마귀나 새들이 쪼아먹어 버리는 것도 있고, 제 스스로 떨어져 버리는 것들이 부지기수인데, 그것들의 간을 돈으로나 볼기 맞는 것으로 갚아야 하니, 사실 백성들은, 과수나무 키우는 것이 천생의 죄를 지은 것처럼 생각하여 왔기에, 차라리 일부러 뿌리에 독약을 타 묻어 죽여 버리는 사례가 종종 있어 왔사오나, 이번 일처럼 그릴게 많은 과수나무를 몽땅 죽여 버린 변괴는 제주 섬이 생겨난 이후 처음 일이온데, 이 어찌 큰일이 아니옵니까."

목사가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이해가 가는 모양이다.

"헌데 그런 관례는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어찌 여름에 달린 수대로 받을 수야 있나."

목사는 우선 여름에 헤아려 논 수대로 바치지 못하면 볼기나 돈으로 그것을 대신한다는 말에 놀라면서, 지금껏 부임 후 두 달이 넘도록 계집의 치맛자락에 감싸여 어린애처럼 지낸 자신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하였다. 뭔가 그런 방법이라도 생각하는 가운데, 이 지옥 같은 섬에서 생활이 재미없을 거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심하다니요. 그렇게 지독하게 해놓지 않으면 영악한 백성들의 꾀에 진상용 물품을 거둬들일 수가 없습니다. 잘못하다가는 목사님 전답 팔아 그것을 충당하여야 할 판입니다. 백성의 곤궁함을 감찰하신 후에, 그런 저런 일들을 이행하려 하시다간, 정말 목사님 쓰고 오신 갓까지 팔아야만 할 판이 돌아옵니다."

목사는 호방의 말을 듣는 가운데 차차 뭐가 잡히는 게 있었다. 그러면서 강 좌수란 자가 갑자기 괘씸해지기 시작하였다.

"틀림없이 그 자가 고의로 그런 일을 벌였단 말인가."

목사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지는 바람에, 호방이 화들짝 놀랐다.

"제 심중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워낙 함부로 다를 인물이 아니오라 이렇게 아뢰는 것이옵니다. 더구나 사또께서 도임하신 후에 처음 당하시는 일이고, 이 일이 어쩌면 사또님의 권위를 시험해 보는 일 같기도,,,,"

호방은 목사의 관심이 아주 쉽게 강 좌수의 일에 쏠려지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되도록 그의 비위를 거슬리게 할 말만 골라서 야금야금 하기 시작하였다.

"뭣이, 목사의 권위에 대한 시험이라고, 괘씸한, 고얀 놈들이 있나?"

버럭 화를 내면서, 이곳 제주목으로 간다니까, 친구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건네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제주는 까다로운 곳이니까 가면 아주 선정을 펴서 청백리가 되든지, 아주 악정을 펴서 백성들의 피고름을 잘근잘근 짜고 올 정도가 되든지 해야지 미지근하게 처신하다가는 쓰고 간 갓까지 빼앗기거나 난동꾼들의 몽둥이에 온전하지 못하고 돌아올 것이라'는 반 우스개 삼아 한 소리였다. 그런 저런 일들을 생각하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호방, 이제 당장 대정 현감에게 연락하여 그 진상을 좀더 소상하게 조사하도록 영을 내리시오. 이것은 목사인 나에게 대한 문제가 아니라, 진상하는 일 자체에 대한 거역이니 허술하게 다를 일이 아니오"

목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니 굴무기(괴목) 마룻바닥을 울려서 높새바람 속으로 스러져 갔다.

"그 자는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사옵니다. 어느 해 사또께서 지나시다가 그 자가 부리는 말이 하도 훌륭해서 진상마로 정하였는데, 며칠 후에는 그놈이 집을 뛰쳐나가 놓쳐 버렸다는 거였습니다. 말이 워낙 영리해서 뭍으로 나갈 것을 미리 눈치채고는 제 스스로 집을 뛰쳐나갔다고 변명을 했지만, 그게 어디 엄지손가락이 귓구멍에 들어갈 말입니까. 그 자는 재력이 있고 힘이 세고 그 주변에 있는 낮은 것들의 신망을 얻고 있는 터라, 사또나 현감 알기를 우습게 여기는 자입니다만, 지금까지 어느 사또도 더 큰 말썽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럭저럭 넘겼습니다. 헌데 이번 일은 도저히 그냥 묵과할 수 없는 일이라

고 소인은 생각합니다."

이제는 그만하고 들어가 애첩의 엉덩이나 두드리고픈 목사의 심금을 더 짜증스럽게 흔들어 놓으려 마구 지껄여대었다. 목사의 마음이 점점 뒤틀려 갔다,

"내 알아서 할 테니 호방은 좀 생각이나 잘해 두시오. 이 섬에서 내게 불충하는 것은 곧 성상께 불충하는 것이고, 그것은 대대로 내려온 왕업에 대한 거역이니, 그걸 어떻게 용납한단 말이오."

목사는 도임 후 오랜만에 호기를 부리며 자신을 내세워본다. 생각하니 지금껏 육방관속들의 말놀이에 덩달아 춤을 추었거나, 야들야들한 계집들의 말소리와 그 치마 속에 놀아난 꼴이 되어 버린 자신을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이번 일로 따끔한 맛을 보여 주리라는 생각이 머리끝까지 솟구치는데, 옷 적삼 속으로 스며드는 냉기가 오히려 가슴을 활활 타게 만들었다.

호방을 보내 놓고 생각하니 더욱 분통이 자꾸 가슴을 쳤다. 감히 어느 전에 바칠 것인데 감귤나무를 고의로 죽게 만들다니. 이건 하늘 무서운 줄 몰라도 분수가 있지, 상상도 못할 일이 아닌가, 어전에 바칠 진상품을 우습게 생각하다니. 더구나 목사를 무엇으로 생각하였관데, 감히 그런 엄두를 내다니..,,,,

목사는 호방을 보내고 나서 계집이 아양떠는 눈웃음에도 더욱 부아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죄 없는 술만 연거푸 들이마셨다.

사또, 무슨 심려될 일이관데 이 밤중에 그리 공사가 다망하시나이까."

계집이 또 끼어 들었다.

으흠. 이 섬것들은 어찌 그리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방자한고. 세상 분별을 모르는 무식한 것들이라 해도 그렇지, 어찌 감히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목사는 쉽게 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계집에게 화풀이하는 식으로 소리지르듯 했다.

"무슨 일이옵니까. "

계집이 아양을 떨며 목사의 목을 휘감더니 사알살 문웃음을 쳤다.

이 섬까지 온 것도 억울한데, 쥐 같은 놈들이 나를 괴롭히려 들다니 ,,,,"

남자는 여자 앞에 들면 어린애 같은 것, 더구나 잔뜩 심란한 판국 에 마음이 산란하고 보니, 이 계집도 의지가 된다고 여자에게 아까 호방과 주고받았던 말을 전부 늘어놓았다.

"아이고, 사또님도. 그런 놈들은 잡아다 혼줄을 내놔야 합니다. 섬 것들이란 게 우악스럽고 사악스럽기 그지없어서 잘못하다가는 목사님 갓끈과 도포자락도 건사하기 힘들게 된답니다."

파직 당하기 십상이라고 은근히 겁을 준다.

"그래? 저것들이 그런단 말이지."

목사는 아까 호방도 같은 말을 했던 것을 생각하고는, 저는 섬것이 아니라더냐' 하고 되물으려다가 참았다. 이들의 말을 듣고 보니 사실 섬사람들의 마음이 고약하다는 게 사실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바람은 어느 날보다도 더 세차게 불면서 갯가 파도소리와 그 자갈 쓸어 가는 소리가 더 극성스러웠다.

 

2

 

대정현 현감은 새벽같이 날아든 제주 목사의 전갈을 받고 난감해 했다. 강 좌수라면 서로 교분이 두터운 사이이고, 크고 작은 일들을 그와 의논하여 처리하는 처지였다, 공사에 분명한 그의 인품됨이나 사리에 어그러지지 않는 그의 처신을 자기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더구나 그는 이 대정 지역 사람들의 정신적 지도자가 아닌가. 일을 잘못하다가는 기름을 안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격으로 일을 크게 벌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대정 사람들이란 억세고 의지가 굳고, 한번 한다 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기질을 가졌다. 현감은 이 일을 대정현 호방과 의논을 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이상하게 생각했었습니다만, 그저 모른 척하고 넘기려 했사옵니다. 사실이 밝혀진다 해도 우리로서는 더 딱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강 좌수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알고도 묵인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그럭저럭 넘기려 한 것이온데, 사또까지 노발대발하신다 하니 일이 더욱 난감해집니다."

현감은 가만히 눈을 감고 듣는지 마는지 그대로 있다.

"헌데, 사또로서도 이 일에 대해서 아주 엄중하게 처리하시려는 모양인데, 그렇게 일이 쉽게 해결이 날까 모르겠습니다. 설령 강 좌수가 고의로 귤나무를 죽여 놓았다는 게 판명된다 하더라도, 강 좌수를 단죄하지는 못할 일 아닙니까. 어쩌면 강 좌수는 일이 크게 벌어지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를 것입니다. 이 기회에 진상에 따른 관리들의 공공연한 수탈을 문제삼으려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신관 사또가 부임하여 얼마 되지 아니하였고, 더구나 그렇게 똑똑하게 선정이나 베풀 위인도 아닌 것 같고, 듣건대 계집의 치마폭에서 어린애같이 술만 마 시며 밤이면 갯가 바람소리에 심란하여 잠 못 이루어 계집의 품 속으로 얼굴만 파묻는단 소문이 좌 하게 난 지금이니까 강 좌수인들 무서운 데가 없겠지요, 죄를 지어야 무서운 법, 자기네 귤나무를 설사 고의로 죽였다 해서 어떻게 할 것입니까. 문제는 진상을 핑계로 진상품 몇 배를 거둬들이며 백성들의 고름을 짜는 관리들이 문제지요."

호방의 말을 듣는 동안 현감은 몇 번이나 이마를 찡그렸으나, 자기로서도 그의 말을 중도에서 막을 처지는 못 되었다. 그도 비록 한 고을 현감이긴 하였으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더구나 제주 태생인 자기로서도 이 섬의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호방의 말은 백 번 들어도 옳다. 더구나 그는 백성들의 물건이라면 글 하나에라도 손대는 법이 없는 깨끗한 자가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국록을 먹는 입장. 옳고 그른 것은 나중에 가리기로 하고 이 일을 우선 어떡허면 되겠어요. 강 좌수 집에를 호방이 직접 다녀오시오. 사실을 알리고 그저 무사하게 일을 넘겼으면 하는 게 내 생각이니 알아서 다 처리하여 주시오."

현감은 다시 더 할말이 없었다, 자기로서도 난감한 일이다. 어쩌면 더 큰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강 좌수와는 소시적부터 동학을 한 처지였다. 그를 좌수로 천거토록 한 것도 현감 자기였다. 한 고을 현감이 된 입장에서 그래도 백성을 위하여 경전에서 읽은 대로 정사를 해 보려 했었으나,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아는 요즈음, 벼슬 길에 오르려고 그렇게 애썼던 자기가 한얼이 서글퍼지기까지 하였다.

호방은 혼자 말을 타고 창고내 마을 강 좌수댁을 찾아 나섰다. 대정 들판을 휘몰아 오는 바람이 귀 뺨을 따갑게 후리쳤다. 말도 거센 눈 바람에 자꾸 고개를 뒤로 젖히며 히힝히힝거렸다. 진눈개비가 어지럽게 흩날리면서 하늘이 어둑어둑 어두워지더너 차차 눈발이 거세어 갔다. 호방은 자꾸 흐트러지려는 몸을 세우며 말채찍을 휘둘렀다.

이 발걸음이 유쾌할 수만은 없기에 말 잔등에 내리치는 채찍도 자꾸 헛쳐지는 것 같았다. 산방산을 지나 너른 들판에 나서니 온통 눈발에 파묻힌 들녘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창고내의 우거진 숲이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도 서언하게 그 푸른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 그 아래 군산봉의 조용한 자태가 눈 속에서인지 더욱 돋보였다. 호방은 이 길을 수없이 오갔으면서도 이러한 자연 정취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왜 오늘 이럴까 생각하면서, 공연스레 쓴 맛이 한입 가득 채워지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그리고 그 너른 들판에 추수 끝난 낟가리들이 오두막처럼 띄엄띄엄 서 있는 거랑 보리를 파종한 검은 밭들이 눈으로 들어왔다. 이 너른 창고내 들녘을 밭과 논으로 만든 것은 모두 강 좌수 선친이었다. 사시사철 배고픔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이 창고내 마을의 일은 상당히 기운을 갖게 하였다. 강 좌수의 할아버지 대에, 그들은 이 허허벌판에 들어와 움막을 짓고 터를 잡았다. 그때 그는 장정 서너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그들의 힘이 놀랍도록 세었다 한다.

군산 아래 그 너른 평지를 창고내 물을 그리로 끌어들여 논을 만든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전해 내려왔다, 불과 삼 대가 못 되어 그는 이 제주섬에서 손꼽을 부자가 되었다. 보통 생각하기는 부자일수록 아랫사람의 피와 땀을 긁어모아 그 부를 더욱 늘리려고 애를 큰다지만 그는 아주 달랐다. 매년마다 되풀이되는 춘궁기 때에, 그는 대단한 식량을 대정 군민들에게 내놓으면서도 그 값을 마다하였다. 어쩌다 어려운 사람이 곡식을 꾸려고 가면 두말없이 내주었는데, 흔히 부자 집 마나님 됫박 소리에 뼈마디가 녹아난다던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겨운 한스런 소리가, 강 좌수네 집을 드나든 부녀자들의 입에선 나오질 않았다, 더구나 추수 때가 되어도 꾸어 준 곡식을 독촉하는 예가 없다.

있으면 물고 없으면 다음해에 물고, 곡식이 아니면 품으로라도 물고, 그러니까 이 주변 사람들이 강 좌수네 일을 자기네 일보다도 더 마음 써서 했다.

그는 재산만 늘어난 게 아니라 인심까지 얻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부자로서의 교만과 거드름이나, 세도가로서 행패를 부리는 일이 없었다. 더구나 그의 검약한 생활은 모든 사람의 본이 되었다.

그 집 종들은 모두 식구이고 친척과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없는 사람에게는 후한 그도 관리들에 대하여서는 까다롭기 그지없다. 역대 대정 군수가 그 앞에서 큰소리를 못 치는 것은, 그가 갖고 있는 앞에 보이지 않는 그 힘 때문이었다. 관가의 아랫사람들의 뒷바람을 그가 많이 감당해 주었고, 그의 공명정대한 생활 태도가 양반들이 따를 바가 못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의 근본을 아는 자가 없다. 그의 조부 때에 이곳에 정착하여 땅을 일구기 시작했으니, 설령 사대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 경영하는 일을 보면 범상한 인물이 아니란 건

모든 사람이 느껴 아는 일이다.

호방은 흩날리는 눈발 속에 뼈를 깎는 높새바람을 맞으면서 말을 천천히 몰았다. 그는 자기의 강 좌수네 집안 출입이 얼마나 더 계속 될 수 있을까 하면서 말 잔등 위에서 강 좌수에 대한 허구한 일들을 생각했다. 어쩌면 이번 감귤나무 사건은 고의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그로서는 능히 그럴 만도 하다. 그는 늘 진상하는 감귤을 목에서 경영하는 과원에서 소출된 것으로 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강제로 징수하는 일을 극히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감귤나무를 일부러 많이 심었다. 그것은 여러 백성들에게서 거둬들이는 감귤을 그 혼자서 전부 감당하려고 그의 부친 대에서부터 일부러 재배하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 소출도 어느 정도 대정 고을 몫을 충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진상용 감귤 징수에 따른 관리들의 수탈이 심하였다. 여름 한철 나무에 열린 감귤의 수를 일단 헤아리면 그것은 곧 나라 것이 되었고, 그 수대로 바치지 못하면 나라 것을 도둑질한 죄가 되어 그 값을 물어야 하였다.

예전에 최 풍이란 자가 자기 감귤나무에서 감귤을 따서 조상 의 제사상에 올린 게 관가에 알려져, 나라 재물을 도둑질한 죄로 곤장을 맞은 일이 있어 말썽을 빚었으나, 그와 비슷한 일들이 그후에도 수없이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 그도 세운이 다한 거로군' 하고 늙은 호방은 한숨을 쉬었다. 그럭저럭 생각에 꼬리가 이어지다 보니 강 좌수 집에 이르렀다. 긴 올래에는 울창한 동백들이 벌써 꽃들을 피우고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니 사랑채 앞에서 큰 개가 내달으며 짖었다. 벌써 말방울소리를 듣고 알았는지 장정들 서넛이 내달아 허리를 굽혔다. 얼굴이 익숙한 강 좌수는 필묵과 종이를 벌여 놓고 들어서는 호방을 안채로 맞았다. 그는 의외에도 난초를 치고 있었다. 한편 구석에 어지럽게 파지들이 널려 있었다.

"어서 들게. , 자네가 올 줄 알고 있었어."

호방은 그가 난초를 친다는 사실도 의외려니와, 절친한 친구를 맞아 주는 그의 표정과 말투에 더 놀랐다. 그들은 죽마고우였으나 늘상 만나면 고을 호방이요 지방 토호 세력가인 좌수로 대하였다, 어릴적 정이 식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서로를 편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엊저녁 꿈에 자네를 봤어. 내게 등을 돌리고 가 버리더군. 그래서 오늘은 아침부터 자네 생각을 하면서 혹시나 찾아올는지도 모른다고 격에 안 어울리게 난을 쳐보는 중이야."

소시적에 사랑채에 묵었던 적객에게서 글씨와 난을 익힌 적이 있었으나, 그는 오히려 말타기나 활 쏘는 일이 격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둘은 술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오십을 넘긴 초로의 나이에 세상 물정에 익숙할 대로 익숙한 그들이었다. 부잣집 아들인 강 좌수였으나, 오십을 넘긴 이때까지 손에서 일감이 떨어져나간 적이 없었다. 그것이 이미 몇 번이나 읽었던 고서이거나, 아니면 서투른 필묵이거나, 아랫것들이 하는 새끼 꼬는 일일망정, 그는 빈손으로 장시간을 보내거나, 긴 담뱃대를 두드려 허세를 부리며 큰기침과 어줍잖은 목청으로 사람들을 호령해 본 적이 없었다. 철저하게 일하는 사람이었다.

둘은 방문을 닫고 말없이 대작을 시작하였다.

정 호방도 그렇다. 가난한 대정 고을 호방이나마 10년 넘게 하였으면 떨어지는 이삭이라도 제대로 주워 한집안 넉넉하게 살림을 꾸릴 만한 자리인데도 그는 늘 궁색하게만 살았다. 그래서 강 좌수가 세말이 되면 그의 집에 몰래 곡식 가마와 고깃근을 넘겨 보냈다. 그러기에 몇 사람의 현감이 갈리는 가운데도 그는 호방 자리를 지켰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강 좌수 덕분이었다. 그가 어려운 일은 거의 맡아 주었기 때문이다.

"어쩐 일인가. 이 궂은 날씨에."

강 좌수는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서도 물었다.

"자네가 난을 치는 걸 구경하고파서 왔지."

불그레 상기되어 가는 얼굴로 어린애같이 웃으며 정 호방이 응수를 하였다. 그런데 강 좌수가 느끼기에는 그 천연스런 웃음이 너무나 섬뜩하였다. 그는 들었던 술잔을 놓으며 다시 초췌한 정 호방의 얼굴을 넌지시 넘겨다봤다.

"자네 꿈 이야기를 듣고프네."

정 호방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그 순간 희미하게 어른거리기만 했던 꿈이 선명하게 강 좌수의 눈앞에 떠올랐다.

"이상도 하지. 저 잘라 버린 감귤나무에 무성하게 싹이 돋아서는 곧 한 길이 넘는데 곧 이어 꽃들이 피더군. 그런데 말이야. 이상하게도 꽃이 무성하게 피긴 했어도 글은 하나도 안 달렸어. 그리고는 다시 곧 시들시들해지면서 죽어 버리는 거야. 그 죽어 버리는 나무들을 보면서 처연히 서 있는데, 돌아가는 자네의 뒷모습이 보였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더군."

꿈 이야기를 끝내고 강 좌수는 쓸쓸하게 웃었다.

"엊저녁에 목에서 사람이 왔었어. 목사가 감귤나무 고사 사건을 자세히 알아보라는 엄명이었어."

되도록 정 호방은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말하려고 하였으나, 그런 눈치쯤 모를 강 좌수도 아니다.

"일이 크게 벌어질 줄로 각오를 하고 있었어. 감귤 몇 개에도 곤장이 내려졌었는데 무사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지. 헌데 말이야---"

강 좌수가 잠간 말을 끊었다가 다시 시작하려는데,

"나 호방을 그만둘까 하네."

정 호방이 강 좌수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그만두는 일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아무래도 이 일이 자네에게 화를 미치면,,,,,,"

"술이나 마시세."

둘은 말을 중단하고 술잔만 기울였다.

"헌데 말야, 이렇게 보고를 하게. 내가 고의로 그 짓을 했다고."

강 좌수 말에 정 호방은 입으로 가져가던 잔을 멈췄다

"진실을 알고프네."

"사실일세."

그런 엄청난 일을.

정 호방이 다음 말을 이으려다는 입을 다물었다.

"내 감귤나무 내가 자른 게 무슨 대수야. 생각해 보게. 이 일로 귤 진상에 따른 제주 사람들의 고통이 덜해진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세상에 이런 억지는 없어. 성상께서 이 일을 아시면 그 진상한 글을 드실까."

강 좌수의 목소리는 아주 잔잔했다.

-그랬었군. 계획적이었지. 이 친구면 그럴 만도 해

정 호방은 일이 크게 벌어질 것을 걱정한 자신이 공연스러웠다고 얼굴을 붉혔다.

-역시 쌍 좌수는 큰그릇이군.

밤이 어둑어둑해지도록 둘은 잔을 기울이다 헤어졌다. 밖에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술에 취한 정 호방은 건장한 종이 끄는 말에 올라탔다.

강 좌수는 말을 끌고 올래를 나가는 하인을 불러 두둑한 엽전 꾸러미를 건넸다.

"이걸 호방 어른 모르게 그 부인께 전해라. 내가 보낸 거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두고 와야 한다."

설사 친구에게 무슨 일이 닥쳐도 그 식구들은 굶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거덜날지도 모를 재산인데 친구에게 마지막 정리를 표하는 것이란 걸 저놈도 알 테지. 혼자 중얼거리며 강 좌수는 몰래 밖으로 나서서는 눈발을 맞으며 사라지는 정 호방 일행을 바라보다가, 그들이 눈앞에서 완전히 가라져서야 방안으로 들어 왔다.

 

3

 

대정현에서 올라온 소식은 목사의 술맛을 떨어지게 만들어 버렸다. 과수나무를 베어 버린 일에서 고의성이란 단서는 잡을 수 없다는 보고였다.

"이는 필시 사또를 우롱하는 처사라 생각하옵니다."

제주목의 호방이 목사의 부아를 더 긁어 놓으려 했다. 그러나, 목사는 좀 차근차근하게 일을 생각하려고 그 부아를 겨우겨우 눌렀다.

"고의로 과수나무를 죽게 만들었다면 필시 무슨 연유가 있을 게 아니오."

호방의 딱한 눈총이 다시 목사의 얼굴에 잠깐 스쳐 지나갔다.

"아뢰옵기 송구스러우나 그 이면에는 강 좌수의 그 무서운 흉계가 도사려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을 어떻게 사또께서 처리하는 가를 주시하고 다음 일을 계획하려는 것이옵니다. 만약 사또께서 일을 관대하게 처리하신다면 진상용 감귤을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인다는 일은 앞으로 어렵게 될 것이며, 만약 사또께서 이 일을 엄중하게 처리하신다면, 그 자는 다른 무리들을 회동하여 시끄럽게 소요라도 일으킬 것입니다. 그렇게 일이 크게 벌어지면 감귤 진상에 따른 백성들의 원성이 조정에까지 이르게 되고, 사또께서 혹 어려운 처지에 이르게 될 것이 며, 더군다나 앞으로는 감귤을 거둬들여 진상하는 일이 어렵게 될 것입니다. 일은 실로 난감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마 강 좌수란 자가 후자의 경우를 노려 계획적으로 일을 저질러 놓고는 사또에게서 어떤 처벌을 기다리는 것 같사옵니다."

호방의 사설이 한없이 길어지자 옥사는 짜증스럽기도 하였으나, 듣고 보니 짜증을 내는 일로 해결될 것 같지 않아 실로 난감해지기 시작하였다.

"내가 직접 사람을 보내 강 좌수란 자를 만나보도록 하겠오. "

목사는 호방의 긴 사설에 뭉뚱그려진 그의 흉계가지 느끼기 시작하였다.

목사는 자기가 데리고 온 식객이나 다름이 없는 권가를 허름한 선비 행색으로 창고내골 강 좌수네 집으로 보냈다. 가서 그의 사람됨이며 그 주위에서의 그의 행동거지 등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가 가서 두어 날 지내고 와서 보고라고 하는 말을 듣고 목사는 바싹 긴장하였다. 우선 그는 그 주변 마을에서 더 나아가 대정 고을 안에서 현감보다 더 신망이 있을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했을 경우, 목사의 말보다는 그의 말을 따를 지경으로 백성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며, 더구나 그의 사람됨이 범상하지 않았다는 보고였다. 외모는 물론 몸에서 풍기는 그 인품이, 자기가 한양에서 숱한 사람들과 상종하여 다녔지마는, 그런 사람을 대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며, 또 그의 사저만 하여도 보통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선 그 우람한 집재목이며, 그 고래등 같은 저택의 위용이며, 특히 그 기둥들이 둥근 게 이상하다고 했다. 보통 사가의 집 기둥은 거의 네모로 깎아 세우는데 그 집의 기둥은 관가의 기둥 그대로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보다 더 목사를 긴장시킨 것은, 그의 집 사랑에서 몇 해 전 제주도 귀양왔다 풀려나서는 이어 얼마 안

돼 역적의 혐의로 사형을 당한 김 아무개의 친필 병풍이 버젓이 보란 듯이 펼쳐져 있었다는 것이다. 김은 제주 귀양 일곱 해 만에 풀려 성은으로 성균관 부제학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불과 두 달만에 왕위 책봉을 획책하는 일에 깊숙하게 관련이 되어 사약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면 김과 그 자는 깊숙하게 관련이 된 게 아니겠습니까. 그 자가 김의 죽음을 모를 리 없고, 언제고 그 여파가 자기에게까지 미칠 것을 알고는 이곳에서 역모를 죄하여 이 섬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으려는 거였겠지요."

다녀온 권가는 아주 확신이라도 선 듯이 장황하게 보고를 한 후 결론을 내렸다. 목사의 심사가 편할 리 없었다. 일이 이렇게 점점 더 어려워지는가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이런 일이 새로 부임한 목사 자신을 얕보고 한 일일 수도 있다는 데까지 이르자 울화가 치밀었다.

목사는 권가를 물리고 호방을 불렀다. 그에게 전일 김의 귀양살이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 그 자가 창고내 강 좌수 집에서 몇 년 지낸 일이 있습니다. 그때만도 그는 중죄인이 아니었고, 학식과 서예에 일가를 이룬 사람이다 하여 비록 죄인의 몸이었으나 그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곤 하였고, 더구나 그 자는 강 좌수로부터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목사는 묵묵히 듣기만 하다가 호방을 물리쳤다. 모든 일이 차차 트여 갔다. 그는 강 좌수에게 감귤 고사 사건보다 더 중한 죄를 찾아내는 일을 궁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길고의 틈도 주지 않고 일을 척결함으로써 실로 통쾌하게 그의 위엄을 보이고 싶었다.

목사는 다시 권가를 불렀다.

"사또, 어려워 마십시오. 일을 아주 간단하게 처리하는 길이 있습니다. 고작 감귤나무를 베어 버린 그 일만을 가지고 곤장 몇 대, 돈 몇 푼 긁어내다가 오히려 간교한 놈들의 오랏줄에 걸려 사또가 곤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권가는 사또의 귀를 빌어 소곤거렸다. 사또의 눈이 순간 번쩍하더니 이어 고개가 끄덕여졌다.

며칠 후에 대정 근방에는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하였다. 강 좌수네 집터가 왕후지지라는 풍문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얼굴이 새파래지면서도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였다.

결국 이야기는 현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현감은 정 호방을 불러 그 이야기의 진원을 들었다.

"이런 고얀 일이 있나. 어떻게 하루아침에 강 좌수네 집터가 왕후지지란 말인가."

현감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호방은 그냥 눈을 감고는 대답을 안 했다.

그 이야기는 다시 목사의 귀까지 도로 되돌아왔다. 목사는 시치미를 떼고는 대정 현감을 불러들였다.

"이런 해괴한 소문이 어디 있소. 옛날에 혹시 그런 일이 있었소?"

". 옛날 산방산 아래 해안가 용머리란 곳이 바로 왕후지지라 하여서 중국에서 온 고 종달이란 사람이 일부러 파혈하여 버렸다는 이야기는 있습니다만 그런 이야기는 모두 해괴한 일입니다."

현감은 난감한 얼굴로 자신없게 말하였다.

"그러면 현감, 생각해 봅시다. 그 자가 그곳에 와서 살기 시작한 지가 겨우 삼 대째라는데, 어떻게 그리 크게 번창할 수가 있겠소. 더구나 그 자의 인물됨이 범상하지 않고, 그 자의 뒤에 있는 아랫것들까지 모두 그 외모가 범상하지 않다 하니, 이는 필시 무슨 연고가 있는 게 아니오?"

목사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하였다,

"더구나 그 자는 일전에 귀양왔던 김과 아주 가깝게 지냈다 하며, 그 자가 그린 그 병풍을 자랑스럽게 사랑에 펼쳐 놓고 있다는데, 이것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오. 이는 필시 그 사랑채에 드나드는 자들에게 암암리에 무슨 뜻을 전하거나,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겠소?"

대정 현감은 그저 들으면서 앞으로 벌어질 사태에 대하여 두려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대정 현감이 목사를 만나고 돌아오던 날 저녁, 정 호방은 은밀하게 강 좌수를 찾아갔다. 눈이 퍼들거리며 내리는데, 마당에서 눈을 쓸던 젊은이들이 정 호방을 보더니 황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들이 다시 나와선 정 호방을 사랑채로 안내하였다.

"잠시만 기다리시랍니다."

젊은이가 사라지고 얼마 안 되어서 다키 안으로 드십사는 전갈이 왔다. 정 호방이 강 좌수의 방으로 들어서는데, 그는 마루에 나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꽤 쌓일 것 같구먼."

둘이 마주 보고 앉아서도 피차간에 말이 없다가 강 좌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평년보다 이른 눈이 아닌가. "

정 호방이 말을 받았다. 이어 다시 침묵이 흘렀다.

"공연히 자네에게 심려만 끼쳐 드리어서 미안하네."

잠시 후 강 좌수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정 호방은 그 말소리가 얼른 귀에 들리질 않았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모두 알고 있어. 그 소문의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 것까지 다 각오하고 있고, 다 준비가 되었네. 지금 막 아이들을 내보내려고 일을 마쳤어. "

무슨 말인지 정 호방의 귀에 생소하였다.

"내 앞일은 내가 다 아네. 난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 신신당부하였어. 어떤 일이 있어도 침착하게 처신하고 경거망동을 하지 말라고. 동네 경민장에게도 신신당부하였네. 무고한 백성들이 혹 잘못하여 어려운 일이라도 당하는 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닐세. 과거에 무고한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려 소란을 떨었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걸 나른 알고 있네. 그러나 아무리 큰 명분을 내세운다하여도 그것이 백성들을 위하는 일이 아닐 때, 또 하나의 큰 범죄를 만드는 것이네. 지체 높은 사람들이 무고한 백성을 우롱하는 것이나 옳은 일이라는 명분으로 순진한 이들을 끌고 불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나 모두 죄악이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어디 가서도 살아갈 채비를 애 주기 위하여 종의 문서를 내어 주고 돈푼이나 쌀 말들을 나누어주고 모두 내보내기로 하였어. 어디 산 속에라도 숨어서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사노라면 그래도 살 길이 있을 거라고 단단히 타일러 주었어. 사실 많은 재산을 이뤄 논 것은 다 저네들 힘이 아니었나."

정 호방은 그의 말을 듣고서야 모든 것이 트이었다.

"내 가족들에게고 다 일러 놓았어.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처신하라고."

술상이 들어왔다.

", 한 잔 하세. 어쩌면 이게 자네와 마지막 잔이 될 수도 있어. 그저 아무 이야기 말고 마시세."

그가 정 호방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러나 정은 그 술이 목구멍 안으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아서 우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둘은 잔을 들어 말없이 마셨다. 그이고 서로가 상대방의 잔에 술을 채웠다. 말없이 그저 마시기만 하였다. 그렇게 얼마를 마셨다,

"자네에게 부탁이 하나 있어. 내 둘째 말일세. 그놈이 성질이 좀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날 경우에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여. 그놈을 어디 멀리로 좀 보내고 싶어. 아니면 자네가 맡아서 어디 글 읽을 선생이라도 마련하여서 얼마 동안 세상에서 곰 떨어져 있도록 했으면 해.어렵겠지만,,,,,,"

정 호방은 그저 술만 마시고 자기 이야기는 한마디도 못하고 자리를 떴다. 강 좌수는 예전처럼 올래 앞 골목길에 나와서는 하얀 눈발을 맞으면서 정 호방이 탄 말방울소리가 안 들릴 때까지 있다가 들어왔다.

그가 들어섰을 때, 마당에는 스무남은 되는 젊은 남녀들이 울면서 마지막 하직을 고하려 눈 위에 엎디어 있었다. 어깨에 잔뜩 짐을 짊어진 채 그들은 눈 쌓인 마당에 엎디어 소리 없이 흐느꼈다.

"어서 떠나라. 한시 앞일도 모를 내 처지다. 어딜 가서도 몸 잘 보전하고 부지런히 일하며 고운 맘을 먹고 살아간다면 너희들에게는 좋은 세상이 돌아올 게다."

강 좌수는 겨우 이 한마디를 남기고 안방으로 들어와서는 문을 닫아 걸었다. 밖의 그 젊은이들은 자리11서 일어날 줄을 모른 채 흐느끼기를 얼마간 계속하였다. 짐을 짊어진 그들의 등 위에 눈이 소리 없이 쌓였다.

 

4

 

얼마 후에 창고내 강 좌수에 대한 또 다른 소문이 세상에 떠돌아 다니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강 좌수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았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시일이 지날수록 더 많은 이야기를 달고 더 빨리 나돌아다녔다. 어릴 적부터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았었는데, 그 부친이 그걸 숨기고 키웠으며, 강 좌수 자신도 그걸 숨겨서 지내면서, 언제고 세상을 뒤엎을 기회를 벼르며 살아왔다는 거였다. 소문은 처음에 아주 은밀하게 퍼져 나가더니, 차차 아주 날개가 돋은 듯이 재빠르게 퍼져 나갔고, 조금 있으니까 아주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처럼 퍼져 나갔다. 이상한 것은 목사나 관가에서도 그런 소문을 못 들은 척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일이었다. 속만 타는 것은 대정 현감과 특히 정 호방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듣고도 못 들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

"창고내 마을 강 좌수란 자에 대하여 말로 다할 수 없는 해괴한 소문이 나도는데 그 소문이 사실인가?"

소문이 아주 소문이 아닌 사실로 굳어질 쯤 해서 목사는 강 좌수의 문제를 내놓았다. 판관 이하 육방 관속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였다. 누구 한 사람 그 소문이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 할꼬. 그 자를,,,,,"

목사는 여유가 있었다. 그 여유를 보고는 호방이 탄복을 하였다. 과연 그 벼슬아치의 권모술수 속에서, 삼 년 넘게 쉬다가 제주 목사로나마 재등용된 그의 능력을 어렴풋이 생각하게 되면서, 공연스레 한때나마 목사를 별 볼일 없는 자로 생각했던 자신이 갑자기 부끄럽고 죄스러워지기 시작했다,

", 그 자는 국법에 의하여 마땅히 처단을 하여야 옳은 줄 아옵니다."

아랫사람들이 일제히, 그 동안 소홀했던 자신들의 직무에 대하여 사죄하는 얼굴로 말하였다.

"이 섬에는 옛부터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날개 돋은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이거나 또는 관가에 알리지 않고 숨겨두는 일을 말함이었다.

목사의 한마디에 섬 출신 판서나 육방 관속들은 쥐구멍을 찾았다. 강 좌수와 소문을 사실로 인정하고 안 하고가 문제가 되기 전에, 그에 대한 모든 사건이 모두 이 섬에 사는, 더구나 국록을 먹고사는 자기네들의 과실로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날 밤 강 좌수는 삼엄한 경계 속에서 잡혀와 직접 목사에 의하여 국문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미 반죽음이 되어 있었다. 동헌 앞뜰에 장작불이 하늘을 향하여 그 불꽃을 날름거리는 가운데, 판서, 육방 관속들이 입회한 자리에서, 목사의 지엄한 국문소리가 동헌 뜰을 울려 하늘로 퍼져 싸갔다. 모여 있는 자들은 목사의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형방 나졸들이 매를 내리칠 때마다 터져 나오는 강 좌수의 비명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면서, 자신이 국문을 당하는 것처럼 몸을 사리지 못했다. 강 좌수가 저런 일을 저지른 것이 모두 자신들에게 그 과실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네 이놈, 나라를 뒤엎으려는 그 변란 음모를 감히 어떻게 생각했느냐? 그게 얼마나 큰 죄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저는 죄를 지은 일이 없습니다."

"네 이놈, 어디다 대고 거짓을 발설하느냐. 죄지은 게 없다면 네가 왕이 되려고 했던 것은 떳떳한 일이었다는 말이냐?"

목사의 목소리가 불꽃을 타서 밤하늘 별들에게까지 전해질 듯이 우렁찼다.

"사또, 왕이 되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추호라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 소문은 다 거짓으로 만들어 논 해괴망측한 일입니다. 누가 고의로 만들어 퍼뜨린 것이옵니다."

강 좌수는 이 자 앞에서 이런 이야기가 아무런 효험이 없을 것을 빤히 알면서도 사실을 사실로 밝혀 보려고 마지막 힘을 모아 말하였다.

"이놈, 우매하고 충직한 백성들에게 쌀되나 주면서 인심을 얻고 그들을 충동질하여 소요를 일으킬 간교한 계획을 세우면서, 얼마의 재물로 어려운 관리들을 매수하여 자기의 세력을 암암리에 뻗치려 하였고, 그러다가 때를 보아 이 성은을 한량없이 받고 있는 섬을 자기 손아귀에 넣고 휘두를 흉칙스런 계획까지 세우는 네 되는 내가 다 아는 바이어늘, 어찌 딴소리를 나불대는 것이냐. 더구나 네 모든 행동은 이미 성총을 받고 사는 백성의 처지를 망각한 바이어늘, 마땅히 국법으로 다스려 중죄에 처함이 마땅하거늘, 행여 네 스스로 잘못을 깨우쳐 알고 성은에 감사하여 새로 충실한 백성으로 본분을 깨달아 알까하여, 마지막 기회를 주었는데도 뉘우치기는커녕, 하물며 더욱 불충한 말만을 토해내니---"

목사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부르르 떠는 시늉을 했다. 이 자는 이제 목을 치면 그것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그렇게 국문을 오래 계속하는 데는 다른 의도가 있었다. 자기의 위엄을 이 섬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확실히 심어 주려는 것이었다. 목사는 자신은 이제부터 정말 포악한 사또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 자의 징벌이 끝난 다음에 자기에 대한 섬사람들의 눈과 마음가짐이 확연히 달라질 것을 확신했다.

"이놈, 이래도 바른 대로 안 대겠느냐?"

목사가 눈을 부라리며 다시 호령을 하였다

"나는 죄가 없소. 어서 죽여주시오."

강 좌수의 목소리가 아주 조용하고 깊숙하게 토해졌다.

"이놈, 아직도 부족한 게 있는 거로구나. 저놈을 좀더 바른말을 실토할 때까지,,,,,,"

목사가 그만 흥분한 척 떠들자, 시뻘겋게 달구어진 쇠 젓가락이 그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후비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이놈들아, 불이 식었다. 다시 더 뜨겁게 달구어라."

강 좌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쇠 젓가락을 든 형방 나졸들을 뒷걸음질치게 하였다. 그뿐이 아니다. 순간, 목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강이에서 부연 연기가 피어오르고 살 타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도, 그는 아주 태연하게 눈을 부라리며 이번에는 목사를 쏘아보았다,

"에이, 독한 놈."

목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그에게 내달으려다가, 그의 부릅뜬 눈정기에 움찔했다. 실로 무서운 눈이었다.

"이놈, 누구를 쏘아보는 거냐. 나는 왕명을 받아 거행하는 목사다. 나 곧 왕을 대신하며, 내 명은 곧 성상의 명이다. 어디다 대고 쏘아보느냐? 저 불충스런 놈, 저놈을, 저놈을, 저 저 놈노옴."

갑자기 목사의 목소리가 휘뚱거리기 시작하면서 그의 얼굴과 눈자위가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당신의 간사한 흉계를 모두 알고 있소. 마지막 부탁이니 성상에 충성하는 일은, 바로 사또가 이 섬에 성상의 자애로운 모습을 심어놓는 일이오. 이 온 섬을 다니며 백성들을 붙들고 물어 보오. 누구가 성상의 은덕에 감사하는가고. 사람은 언제고 한번 죽으니 내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죽기까지 밥한 끼 배부르게 먹지 못하고 살아갈 이 섬 백성들이 불쌍할 따름이오."

너무나 조용한 그의 목소리가 동헌 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섬찐하게 하였다.

"이 노옴, 어디다 대고 불충스럽게,,,,,,"

목사는 제 정신이 아닌 양 '불충'이란 말에 힘을 주면서 시뻘건 눈에 살기를 띠고 정신을 차리지 못해 했다. 다시 시뻘건 화젓가락이 그의 허벅지 다리 위에서 제멋대로 춤을 추었고, 살점을 태우는 연기가 백성을 다스리는 동헌 마루와 그 기왓장과 석가래 안과 섬돌 아래와, 그 연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그 옷섶과 그 콧구멍과 그 땀구멍 속으로 사정없이 스며들어 갔다.

 

5

 

창고내 강 좌수가 그렇게 죽은 후에 그 많던 재산이 관가에 귀속되었고 그 식구들은 대정 고을 노비가 되었다.

그런데 그후 얼마 안 되어 이상한 소문이 그 마을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밤에 강 좌수의 둘째아들이 날랜 용마(龍馬)를 타고 그 집 앞에 나타나서는 목청을 빼어 하늘을 향해 슬피 울다가 창고내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는 그 둘째아들을 태운 용마가 하늘로 올라갔는데 곧 내려올 것이라 했다. 어떤 사람은 그 둘째아들이 바로 장군이 되어 용마를 타고 온 것을 직접 보았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사실은 강 좌수가 날개 돋은 장수였고 그 집터가 바로 왕이 날 땅이었는데 때를 제대로 만나지 못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타 언제고 그 아들이 바로 못다 이룬 아버지의 뒤를 이어 용마를 타고 올 것이라고 했다. 이야기는 더 날개가 돋아 강 좌수네 집을 지키던 나졸들이 그 모든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였다는 것이며, 그 집 앞에서는 밤마다 군사들이 훈련하는 소리가 들린다고도 했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소리는 확실히 들었다는 것이다. 그 소리는 바로 그 집에서 살다가 사건이 터지기 전에 뿔뿔이 헤어진 그 집 종들의 목소리였다고 했다. 또 어떤 이야기는 목사가 하룻밤 그 집에서 유하다가 군사들의 훈련하는 소리를 듣고 깨었는데, 그 용마를 탄 둘째아들을 보고는 혼비백산 줄행랑을 쳤다고도 했다.

창고내 사람들은 둘만 모이면 아주 조용하고 은밀하게 그리고 신나는 얼굴로 용마 이야기를 하였고, 그러는 동안에 아주 그 이야기를 믿고는 용마 타고 오는 장군을 기다리며 강 좌수를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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