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암 장지연의 날카로운 붓-김중배
휘청거리는 활자의 행렬을 볼 때마다 나는 지울 수 없는 큰 이름을 불러 본다.
지울 수 없는 그의 큰 문장도 함께 외워 본다.
그 이름은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그의 문장은 시일야 방성 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 날 목을 놓고 통곡하노라)이다.
아! 저 개, 돼지만도 못한 이른바 정부 대신이란 자는 자기네의 영달과 이익을 바라고 위험에 겁을 먹어 머뭇거리고 벌벌 떨면서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어 사천 년을 이어 온 강토와 오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바치고,이 천만 생령(生靈)을 모두 남의 노예노릇을 하게 하였다....... 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우리 이천만 동포여! 살았느냐, 죽었느냐. 단군 기자이래 사천 년의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 신문]에 실렸던 그의 논설은 우리 언론사에 빛나는 큰 문장의 하나다.
그의 증손녀 장남수의 증언에 따르면, 그 논설을 찍어 낸 위암 장지연은 수난을 각오하고 체포의 시간을 기다렸다. 오직 사환 하나만을 데리고 신문사를 지켰다.
마침내 일본 순사가 찾아왔다. 위암은 인력거를 불렀다. 이른바 피의자가 연행되면서 인력거를 탄다는 것은 용인될 수 없었다. 순사가 가로막자, 위암은 호통을 쳤다.
"내 돈주고 내가 타고 가는데 웬 잔말인가?"
그는 통감부 현관 앞에 이르러서야 인력거에서 내렸다.이또오와의 필담에서도 그는 기개를 잃지 않았다.
그의 기개에 이또오는
"아직도 이 나라의 국운은 다하지 않은 것 같다."
고 한숨지었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문초를 받았을 때 역시 위암의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 왜 검열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신문을 제작 배포해서 치안을 방해했느냐고 묻자, 그는 의연히 대답했다.
"무릇 나라가 있은 연후에야 치안 여부가 있을진대, 이젠 이미 나라가 없어졌으니 치안을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내가 붓대를 잡은 지 7,8년, 세상에 올바른 공론을 주장하다가 오늘 나라가 없어지게 된 사실을 어찌 있는 그대로 말하여 우리 국민에게 알리지 않을 것인가 불지어다. 내가 쓴 글이란 오히려 부족함이 있는 것이다. 소위 치안 방해란 일본 치안의 방해가 있다는 것인가........"
그는 자신의 논설이 모자랐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한가한 후세의 학자들은 그의 논설이 비분 강개에 흘렀으며, 일본의 침략주의를 지탄하지 못했다고 헐뜯는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은 위암으로서도 넘기 어려운 벽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남을 탓하기보다 먼저 우리의 잘못을 지탄하는 것이 온당한 순서가 아니었던가.
위암은 경세(經世)의 학문이었던 유학과 춘추(春秋)의 필법을 오늘의 저널리즘에 접목시켰던 선각의 인물이었다.
그는 언론에 첫발을 디뎠던 [시사 총보]의 발간 취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문에는 그 체가 두 가지 있으니, 하나는 논설이요, 둘은 잡보다. 논설이란 사가(史家)의 평론하는 체요잡보란 사건의 기사(記事)하는 체라........"
신문에 대한 그의 견해는 오늘 내놓아도 결코 진부하지만은 않다. 신문을 하나의 사초(史草)로 보는 견해는 선진의 신문학에서도 유력하다.
우리가 살아온 유학의 전통을 새로운 세계의 조류에 이어 붙인 그의 눈은 밝았다. 서양의 저널리즘도 곡필(曲筆)을 권하지는 않는다. 직필(直筆)은 동서 고금을 넘어선 언론의 철칙이다.
그 직필의 철칙을 몸으로 실천한 인물이 위암이다. 그는 1914년 10월, 일제의 기관지였던 [매일 신보]의 초빙을 받았으나 한 마디로 거절하고 말았다.
그 거절의 말에서도 위암의 굽힘 없는 신념은 그대로 드러난다. 그의 기신보사(奇申報社)라는 초빙 거절의 글은 이렇게 진술된다.
언론은 반드시 정직하여야 하며, 그 기사 또한 반드시 공명하여야 할 것이다. 아첨하는 말을 하거나 숨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후세의 이목 있는 사람이 신문을 받고 또한 그것을 공기(公器)로 삼을 것이다. 한데 그 사설을 읽어본즉, 아첨하는 말이 많고, 또 그 기사를 보면 은폐하고 숨기는 것이 허다하다.
그의 진술은 오늘의 언론 종사자에게도 따가운 일침이 된다. 전혀 70년의 상거를 실감하기 어렵다.
위암은 나라 안팎을 헤매는 유랑의 세월을 살면서도 끝내 곡필의 대열에 섞여들지 않았다. 그 유랑의 세월 속에서도 그는 '신문 없는 언론인'의 붓을 거두지 않았다. 나날의 일들을 그 나름대로 기록했다.
그 기록들은 부인의 속곳 안에 감추어졌다. 속곳에 꿰매 넣었다고도 전한다. 그것이<조록 시사(條錄 時事)>였다. 시사를 조목조목 기록해 둔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조록 시사>의 행방은 묘연하다. 아예 없어져 버렸는지 또는 어디에 숨어 있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
참으로 언론인의 길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보여 준 위암의 행적 앞에서 그 후예들은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그 '시범의 선구자'라는 점만으로도 위암은 이미 역사의 인물이다.
물론 위암은 언론의 선각자만은 아니었다. 그는 [조선 유교 연원]을 써 낸 유학자였다.
[증보 대한 강역고]를 엮어 낸 지리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동국 역사]를 써낸 역사학자였으며, 또한 '자강회 운동'을 주도했던 개화의 선구자였다. 실학을 존중했던 그는 경제에도 남다른 선견력을 지녔던 것 같다.
일용하는 기물로 말하여도, 각종 기구 품을 전부 외국 제조품에만 의존하면 수입품이 더할수록 우리 나라 금전이 외국에 흘러감이 많을 것이다. 이러하므로 대개 한 나라의 경제는 수입 수출의 균형 여하로써 짐작될 수 있다.
그의 경제론 역시 소박하나마 오늘에도 진부하지만은 않다. 위암은 한글 전용론 에도 열을 올렸으며, 민주적 가장의 면모가 뚜렷했다.
그는 행랑어멈을 종처럼 부리지 못하도록 집안 사람들에게 타일렀다. 부인에게 보낸 편지들은 가부장적 권위를 넘어선 부부애에 넘친다. 그는 며느리들과도 어울려 윷판을 벌였다. 한마디로 그는 선구적 거인이었던 셈이다. 나는 위암 장지연을, 역사를 앞서 달린 언론의 거목으로 추앙하고 싶다. 그것은 아전 인수의 편견만은 아니다.
유학의 전통과 춘추의 필법을 현대의 저널리즘에 접목시킨 그의 공헌은 그 어떤 분야에서의 업적들보다도 두드러진 다. 더구나 직필의 천명을 끝내 어기지 않았던 위암의 전철은 연 면하게 이어질 우리 언론사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
그는 스스로 지어낸 [자찬시(自讚詩)]에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네 뼈는 울근불근
네 모습 훤출하다.
눈은 어찌 반짝반짝
귀밑 털은 희끗희끗
석굴 속 석가모니가 아니라면
글 천치 술 미치광이가 분명하리라.
생전에 위암을 보았다는 노산 이은상은 그의 모습이 [자찬시]와 일치했다고 적었다. 그의 동시대인들의 진술도 동일하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 여자와 같았고, 말을 하고자 해도 여간해서 입밖에 잘 내지를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 심지어 소리내어 우는 일마저 드물지 않았다.
그는 표현 그대로 외유 내강의 언론인이었다. 입으로만 떠벌리고 붓을 감추는 언론인이 아니라, 입술은 무디어도 붓은 날카로운 언론인이었다. 그는 붓대의 인물이었지 혓바닥의 인물은 아니었다.(卽筆之人而非舌人也).
위암은 옥중에서도 직언과 직필을 가로막는 세태의 압력을 시로 남겼다.
험악한 시국 형편 갈수록 더해 가니
이 세상 살아갈 길 가엾기 짝이 없네
입 있어도 말하기란 새 날기처럼 어렵고
무심히 지내자니 물고기만도 못하구나.
오늘을 사는 우리의 가슴속에도 와 닿아, 오늘도 방성 대곡케 하는 절구다.
나는 이 시를 외울 때마다 빛나는 선구자와 대조되는 초라한 후예의 몰골에 소스라친다.
위암의 빛을 잇는 언론의 후예는 끝내 자라날 수 없는 토양인가를 되묻는다.
해평(海平) 윤희구(尹喜求)가 쓴 위암의 묘비명은 더더구나 오늘을 사는 나의 가슴을 울린다.
의지가 사라지지 않음이여
빛과 기운이 하늘을 비치 도다.
오히려 그의 글이 남아 있음이여
의기와 함께 길이 가리로다.
김중배/ 한겨레 신문사 사장. 저서로는 '인초여 새벽이 열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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