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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학(인문과학, 사회과학, 철학, 역사, 기타)

소외된 인간

by 자한형 2022.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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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인간-이 극 찬

머리말

현대의 인간은 대체 어떠한 상황 아래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현대의 인간 앞에 가로놓인 중대 문제는 대체 어떤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세기에는 '신이 죽었다'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20세기에는 '인간이 죽었다'라는 것이 문제다. 19세기에는 비인간적인 자기 소외를 의미한다. 지난날의 위험은 인간이 노예로 되어 버리는 데 있었지만, 앞날의 위험은 인간이 로봇으로 되어 버릴지도 모르는 데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이 지구상에는 40억에 가까운 형형 색색의 인간들이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엄연히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대의 인간을 '죽었다'라고 진단을 내리는 것은 대체 어떠한 뜻에서일까. 그것은 현대의 인간이 점점 자아의 감정을 잊어버리고, 일종의 정신 분열증 적인 자기 소외의 상태에 떨어짐으로써 인간답지 못하게, 즉 비인간적으로 되어 가고 있기 대문일 것이다. 프롬의 눈에 비친 현대의 인간은 바로 이와 같은 죽어 있는, 즉 일종의 로봇으로 변해 가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러면 , 프롬은 소외 현상을 대체 어떤 의미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소외란, 인간이 자기 자신을 한 사람의 이방인으로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머리 떨어져서 소원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세계의 중심이라든가, 또는 자기 자신을 자기의 행위의 창조자로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가 도리어 주인공이 되고 인간은 이것에 복종하며, 심지어 그것을 숭배하기까지 하는 것이다.……소외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자기의 힘이나, 객관화의 적극적인 담당자로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생한 본질을 투사하여 객관화시킨 한 개의 물체, 즉 자기의 외부의 힘에 의존하는 한 개의 빈약한 물체로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위의 설명을 통해서도 쉽게 이해될 수 잇는 바와 같이, 요컨대 소외된 인간이라는 것은 비인간적인 상태, 즉 개성을 상실한 상태에 있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의 이른바 시장 지향형의 인간은 이와 같은 개성을 사실한 비인간적인 상태에 떨어지기 쉽다고 프롬은 지적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주로 프롬의 주장에 따라서, 현대의 시장 지향형 성격의 인간에 대해 그 특질을 간략하게 고찰해 보려고 한다.

사용 가치보다 중요한 교환 가치

이른바 시장 지향형이라는 것은 현대의 인간에게서 현저하게 보여지는 특징으로서, 프롬이 이름 붙인 성격 유형의 하나이다. 이화 같은 시장 지향형 성격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대 시장의 논리를 알아야 한다.

현대 시장은 물물교환을 하던 전근대적 시장과는 그 양상이 다르다. 전근대적 시장에는 생산자와 고객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그것은 규모가 작은 집단으로서 수요는 많거나 적거나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생산자는 이러한 고객의 수요에 따라서 물품을 생산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시장은 생산자와 고객이 서로 그 얼굴을 잘 아는, 그리고 고객의 수요도 사정에 이미 알고 있는 소규모의 면접 장소는 아니다. 그 규모는 방대해졌을 뿐만 아니라, 추상적이며 비인간적인 수요라는 특징을 가진 시장을 위하여 생산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시장에서는 이른바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서 상품의 가격이 결정된다. , 고급이 수요보다 월등하게 많으면 상품의 가격은 떨어지게 되며, 그와 반대의 경우에는 상품의 가격은 올라간다. 그리고 공급과 수요가 거의 같을 경우에는 상품의 가격은 일 정선을 유지하게 된다.

어쨌든, 상품의 가격이 어떻게 결정되느냐 하는 것은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다른 것이며 그것이 상품의 판매량과 가격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구두 하 켤레의 사용 가치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만일 그러한 구두의 공급이 수요보다 월등하게 많아졌을 경우에는, 어떤 종류의 구두는 경제적으로 그 가치를 아주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상품이 시장으로 내보내지는 날은, 그 상품의 교환 가치에 관한 한 '심판의 날'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현대의 시장에서는 상품의 사용 가치보다는 교환 가치를 더욱 중시하게 된다. 새삼스럽게 지적할 필요도 없이, 어쩐 상품의 경우이든 사용 가치(상품의 유용성)가 높아야 교환 가치(상품의 가격)도 높아질 것이다. , 쓸모가 있어야 값도 비싸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용 가치는 교환 가치의 필요 조건이다. 그런데 현대의 시장에서는 사용 가치가 결코 교환 가치의 충분 조건으로는 되지 못하고 있는데 문제가 있다.

현대의 상품 생산 업계에서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이로 말미암아 어떤 색다른 종류의 상품이 시장에 나타나게 되면, 곧 이것과 비슷한 상품이 연달아 쏟아져 나오게 된다. 치열한 경쟁에서 어떻게 하면 자기네 공장의 상품이 인기를 얻어 값비싸게 많이 팔리 수가 있을까 --- 이것이야말로 현대의 상품 생산 업자들의 최대의 관심사이다.

어떤 상품이 고객의 인기를 얻어 값비싸게 많이 팔리게 하기 위해서는 그 속보다는 겉을 좀 더 신기하고 아름답게 만들도록 --- 내용보다는 눈에 보이는 겉의 디자인·형태·상표·포장 등을 훨씬 아름답게 만들도록 --- 힘써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 상품의 교환 가치가 높아진다.

겉모양을 아름답게

사용 가치보다는 오히려 교환 가치를 더욱 중시하는 현대의 시장적 가치 관념은 현대의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자기를 한 개의 팔아 버려야 할 상품으로 간주하고 자기 자신의 가치를 시장에서의 교환 가치 --- 자기에게 어느 정도의 가치를 부여해 주는가 하는 것 --- 에 의해서만 판단하는 경향성을 가진 인간, 바로 이것이 시장 지향형의 인간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상품을 팔고사는 상품 시장과 더불어, 사람을 구하며 사람을 파는 새로운 시장, 이른바 '인격 시장'이 급속도로 발달하게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성공을 거두려면 이러한 인격 시장에 등장하지 않으며 안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인격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에 대한 평가 방식은 상품 시장에서의 상품에 대한 평가 방식과 그 근본에 있어서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마치 어떤 상품이 값비싸게 많이 팔리려면 고객의 인기를 독차지하도록 해야 하는 것처럼, 사람도 성공을 거두려면 그의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인기를 얻어 값비싼 급료를 받도록 해야 한다.

인격 시장에서의 성공은 자기 자신의 인격을 얼마나 잘 팔아 버리느냐에 달려 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한 개의 상품으로서 체험한다. 인격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려면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사용 가치 --- 어느 정도의 기술이나 능력 ---를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인격 시장에서는 교환 가치의 필요 조건이긴 하지만 결코 중분 조건은 아니다. 아무리 유능한 기술자가 만든 품질 좋은 구두라 할지라도 만일 그 모양이 낡아 버린다면 상품 시장에서 사람들의 수요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비록 일정한 기능을 구비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오직 그것만으로써 인격 시장에서 반드시 높은 급료로 교용 된다고는 볼 수가 없다. 마치 값비싸게 잘 팔리는 인기 있는 상품의 경우처럼, 사람들도 성공을 거두려면 역시 그 속보다는 겉모양이 중요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현대의 인격 시장에는 상품 시장에서와 마찬가지로 겉모양이 중요시된다. 그곳에서는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값비싸게 팔 수 있는 기술'이 중시되는, 일종의 상업 미술적 인간론이 널리 유포되기 쉽다. 이러한 상업 미술적인 인간론에서는, 인간의 가치가 마치 화장품과 약품이 상품 그 자체가 지니는 기능적 가치보다도 오히려 용기의 디자인이나 화려한 광고 선전문으로써 소비자들을 매혹케 하는 것처럼, 남에게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속보다는 오히려 겉모양을 화려하게 보이려는 경향은 현대인의 생활의 여러 부문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이를테면 현대의 소비 생활에서도 그러한 일면을 찾아볼 수가 있다. 현대의 인가들 중에는 물품을 실제로 사용하고 이용하기 위하여 사들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소유하기 위하여 사들이는 이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비록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또는 그것을 능히 구입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실력이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사회적 위신의 원천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의 인간은 그 소요물에 대해서는 별로 각별한 애착을 느끼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 까닭은 보다 더 새로운 형태의 물품이 나오게 되면 그는 전에 갖고 있던 것을 조금도 애석함이 없이 내버리고 돌보지를 않던가, 또는 낡아빠진 것을 같고 있다는 것에 일종의 열등감조차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물품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새로움이다. 현대인에게는 최신형이 만인의 꿈이며, 이것에 비해 보면 그 물품의 사용 가치는 문제가 아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말미암아 현대인은 지나치게 유행에 민감하게 되며, 속을 튼튼히 하는 것보다는 겉모양을 꾸미는 제 더움 주력하게 되는 것이다.

교환하는 평등

시장 지향형의 인간들은 다른 사람을 보는 경우에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역시 하나의 상품으로 간주하기 쉽다. 시장에서의 상품은 '값이 비싼가 싼가', '교환 가치가 높은가 낮은가'라는 양적인 차원밖에 지니지 않게 된다.

유명한 화가가 그린 훌률한 그림도, 그리고 유행되는 멋진 구도도 모두 '가격'이라는 차원만을 가지며 그 개성이나 독자성은 상실되기 쉽다.

인간의 경우도 역시 차이와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이와 같은 상황 아래에서는 인간이 평등하다는 말의 의미도 변화된다고 프롬은 말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하는 관념은, 모든 인간들이 그 자체가 목적이지 결코 수단이 아니라고 보는 기본적 권리를 갖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평등이 수단이 아니라고 보는 기본적 권리를 갖고 있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인간의 개성을 부정해 버리는 관념이다. , 평등이라는 것은 개인의 특수성을 발전시키는 조건이 아니라, 도리어 개성을 해소시키는 것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원래 평등은 차이라는 것과 연결되었던 것이지만, 이제는 무차별과 같은 의미로 되었다.

원래 인간이 평등하다는 말은 각 개인이 모두 제각기 자기 목적이며, 그 개성의 독자성과 인격의 존엄성에서 평등하다는 의미였지만 이제는 그것은 서로 교환할 수가 있다는 의미로서, 말하자면 기계 부품으로서 평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평등이라는 rut이 획일화·규격화·표준화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이해 타산으로 움직이는 인간관계

이와 같은 시장 지향형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변화되지 않을 수 없다. 개개인의 자아가 무시되는 것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피상적으로 되기 마련이다. 이리하여 시장 지향형의 인간들 사이에서는 전인격적으로 접촉이 없어지게 된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전인격적으로 접촉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 각자는 더욱 고독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고독감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사람들은 더 많은 사람들과의 교제와 접촉을 희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접촉을 통해서 마음의 위안을 느끼기는커녕, 도리어 더 심한 고독감에 사로잡히기 쉽다. 그리하여 현대의 인간들의 생활에서는 이러한 악순환이 거듭된다.

시장 지향형의 인간에게는 사고 그 자체도 변화되기 마련이다. 사고한다는 것을 사물을 교묘하게 조종할 수 있도록 그것을 파악하는 기능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사물을 다루는 과정에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오직 사물의 표면적 성질, 즉 피상적 성질뿐이며, 현상이 본질을 투구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는 질실 따위는 일종의 폐물이 되어 버린다. 요컨대, 이러한 시장 지향형의 인간에게는 사물을 다루는 과정에서의 사고로서 오직 비교와 양적 측정만이 필요하며, 진리라든가 본질을 추구하는 일은 불필요하며, 또한 무의미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는 지식도 그 자체가 상품이 된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는 지식 그 자체가 하나의 상품으로 된다. ……사고와 지식은 결과를 낳게 하기 위한 도구로 여겨진다. 인간 자신에 대한 지식. 즉 전통적으로 덕과 올바른 삶의 방식, 그리고 행복의 조건을 추구해 온 심리학은 이제는 시장의 연구, 정치의 연구, 광고 등에서 다른 사람을 교묘하게 조작하기 위한 도구로 전략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이 지식 자체가 하나의 상품으로 간주됨으로써 교육도 많은 지식을 불어넣어 주기는 하지만, 올바로 사고하는 훈련을 지키지 못한다. 원해 지식은 사물 그 자체에 대한 흥미에서 추구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시장 지향형에 있어서는 그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그 지식에 의해서, '이른바 인격 시장에서의 자신의 교환 가치가 과연 어느 정도로 증대될 것인가 하는 관심에서' 추구되기 쉽다.

따라서, 현대의 대학도 인격의 도와야 진리의 추구를 주로 하는 전당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교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장소, 즉 더 좋은 취직이나 결혼 등을 위한 조건을 마현해 주는 장으로 변해 버린다.

이러한 유형의 사고는 우리들의 교육 제도에 분명히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초등 학교로부터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학습의 목표는 주로 인격 시장의 목적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될수록 많이 터득하는데 있다. 학생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워야 하므로, 생각하기 위한 시간과 에너지는 거의 갖고 있지 못하다. 지식을 터득함으로써 이른바 인격 시장에서의 교환 가치를 높여 보려는 것이 좀 더 훌륭한 교육을 받고 싶다는 주된 동기이다. 우리들은 오늘날 지식과 교육에 대한 비상한 열정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들은…… 인격 시장에서의 교환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써 실제적인 것이 되지 못하며, 따라서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고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으며 또는 멸시하는 태도로 보이는 것이다.

자아를 상실한 공허한 인간

위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이 이른바 인격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려면 단지 주어진 일을 충분히 수행해 갈 만한 기능과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더 나아가서 다른 많은 사람들과의 경쟁 속에서 자기의 인격이 '인정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격 시장의 경쟁에서 이기느냐 지느냐에 따라서 자기의 가치가 결정된다. 이러한 경쟁에서 다른 사람을 물리치고 팔리게 되면 성공한 사람이 되며, 팔리지 못하면 패배한 사람이 된다. 단지 패배자가 된 뿐만 아니라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나 자신감이라는 것도 인격 시장에서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동요되기 쉽다. 따라서, 안정된 자아의 감정은 없어지게 되며,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력감과 열등감, 불안감 등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인격 시장의 변동에 의해서 자기의 가치가 좌우된다면 안정된 자존심의 감정도 없이 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사람들의 자기 동일성의 감정도 불확실해지며 그것은 주로 외견 적인 지위나 역할이나 인기나 명성 등에 의해서 보전되어 간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기준이나 요구나 가치관이나 기호 등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게 되며, 또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도록 규정된다. 이로 말미암아 시장 지향형의 인간은 독특한 개성을 가지기보다는 오히려 개성을 결여한 공허한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 확고 부동한 개성을 가지기보다는 인격 시장의 요구에 따라서 여러 가지 역할을 필요에 따라서 바꾸어 가는 것이 성공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시장 지향형의 인간은 단순한 역할을 수행하는 일종의 '역할의 집합체'에 불과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이러한 인간은 확고한 주체성을 가지지 못하고 단순히 여러 가지 역할만 수행하는 여러 가지 역할만을 수행해 가는 존재이므로, 이를 핵심이 하나씩 하나씩 벗겨 가도 끝내 아무런 핵심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시장 지향형의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개성이 뚜렷한 능동적인 주체로서 경험하기보다는 오히려 아무런 핵심도 갖지 못한 공허한 존재로서 체험하기 쉬운 것이다.

맺는 말

프롬은 20세기에는 '인간이 죽었다.'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어찌하여 그는 현재 살아 있는 인간들을 죽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현대의 인간이 자기 소외와 자기 상실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하면 개성을 상실해 가는 인간으로 하여금 확고한 주체성을 가지 존재로 서게 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해결책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현대의 이른바 시장 지향형 성격의 인간에 대해 그 특질을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해결책에 관해서는 길게 언급하기 않겠다.

요컨대, 개성을 상실했다는 것은 인간이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정신적으로 건강한 인간이란 대체 어떠한 인간일까. 프롬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인간은 생산적인 인간이며, 결코 소외되고 있지 않은 인간이다. , 자기 자신에 대해 따사로운 애정을 가지고 자신을 이 세계에 관련시키며,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하여 이성을 발휘하는 인간, 자기 자신을 독특한 개인적인 존재로 경험하는 동시에 또한 그 동포들과도 일체감을 느끼는 인간, 비합리적인 권위에는 복종하지 않고 양심과 이성의 합리적인 권위를 즐거이 받아들이는 인간, 그리고 그가 살아 있는 한 언제나 새롭게 탄생하는 과정 속에 있으며, 삶이라는 하늘이 주신 선물을 가장 귀중한 기회라고 생각하는 인간 -- 바로 이런 인간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인간인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떠한 사회가 이러한 건강한 정신을 길러 내는가? 이런 문제에 관한 프롬의 다음과 같은 설명은 재삼 음미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건전한 사회의 구조란 대체 어떤 것일까. 첫째로, 건전한 사회란 누구도 다른 사람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지 않고, 언제나 -- 하나의 예외도 없이 -- 자기 자신이 목적으로 되는 사회이다. 따라서 그러한 사회에서는 누구도 목적을 위해서 이용되던가 또는 자기를 이용하는 일은 없다. 그곳에서는 바로 인간이 중심이며 일체의 경제적 활동은 인간의 성장이라는 목적에 종속된다. 건전한 사회란 탐욕이나 착취, 소유욕이나 자기 도취증과 같은 것들이 좀더 큰 물질적 이익이나 개인적 위신을 증대시켜 주기 위하여 사용되지 않는 사회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기의 양심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되며, 기회주의자와 원칙 없이 행동하는 것은 곧 비사회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사회이다. 개인이 사회문제에 관계를 갖는 것이 곧 그대로 개인 문제에 관계를 갖는 일이 되며, 그리고 그 동료들과의 관계를 개인적인 관계로부터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는 사회이다. 또한 건전한 사회란 …… 자기 자신이 생활의 주인공이 됨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사회 생활에 참여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하는 사회이다. 또한 그것은 인간의 단결을 증진시켜 사회 성원들이 서로 애정을 가지고 대하게 할뿐만 아니라 언제나 그것을 북돋아 주는 사회이다. , 건전한 사회란 뭇사람들이 노동을 할 때 생산적인 활동을 조장시키며, 이성의 발휘를 자극시키며, 또한 집단적인 예술이나, 의식의 형식으로 인간의 내적 욕구를 표현케 하는 사회인 것이다.

우리들은 새삼스럽게 휴머니즘의 정신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절감케 된다. , 인간의 주체성 상실(인간 상실)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면 될수록, 우리들은 새삼스럽게 인간은 자유와 존엄성을 가진 궁극적인 가치의 실체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이 마치 신화와도 같이 널리 인간의 의식 속에 튼튼하게 정착되면, 인간성 회복을 위한 진지한 해결책도 활발히 나올 것으로 생각된다.

이극찬/ 연세대학교 정치 외교학과 명예 교수이고, 저서로는 '정치학', '프롬의 자유 사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