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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학(인문과학, 사회과학, 철학, 역사, 기타)

글을 왜 쓰나

by 자한형 2022.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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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왜 쓰나

이오덕

자기 표현과 글의 공해

책방에 가면 책이 산으로 쌓여 있다. 신문과 잡지들, 무슨무슨 회보니 사보니 하는 인쇄물들이 달마다 주마다 날마다 홍수로 쏟아져 나온다. 거기에다 온갖 광고문과 성명서, 심지어 입으로 말한다는 방송까지 글 그대로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또 글을 써야 하나? 바야흐로 글이 온 세상을 덮었고 사람의 숨통을 막기도 하는 판 아닌가!

세상에 나온 책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책만 골라 내고, 그렇게 골라낸 책들 가운데서 다시 또 알짜만 찾아내서, 그것만을 두고 평생을 읽어도, 다른 일은 일체 안하고 방안에 앉아 그것만을 읽어도 죽을 때까지 다 못 읽는다고 하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귀한 시간을 글쓰기에 바쳐야 할까?

기차를 타면 그 많은 사람들이 몇 시간이고 앉아서 잠을 자거나 술을 마시거나 화툿장을 만지거나 하면서도 책 읽는 사람은 거의 볼 수 없는데, 또 글을 써서 어디에다 싣겠다는 것이냐?

원고료를 벌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하긴 하루종일 공사판에서 땀흘려 일해 봐야, 잠시 앉아 쓴 원고지 몇 장 값도 안 되는 세상이니 글쓰기란 직업에 마음이 팔릴 만도 하다. 글이 자본에 잡혀 놀아나고 있으니 온갖 잡동사니 글이 이렇게 넘치고 사람의 정신을 어지럽힌다.

"돈을 얻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얻기 위해서 쓴다."

이렇게 말하면 아주 근사하게 들린다.

그러나 진리를 얻기 위해서라면 글에 파묻힐 것이 아니라 글을 좀더 멀리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글이 없어서 진리를 잃고 세상이 이 지경으로 된 것이 아니다. 일하기 싫어서, 자기만 편안하게 살고 싶어서, 남이 한 일의 결과를 앉아서 얻어가지고 싶어하니까 이렇게 되었다. 일은 안 하고 교과서와 책만 들여다보고 시험 점수만 따내는 것을 공부라고 가르치고 길들였기 때문에 진리는 간 곳 없고 거짓과 속임수가 판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글을 쓰지 말자, 세상에서 책이란 책은 모조리 불살라 버리자!"

그러나 이것은 그 옛날에 포악한 임금이나 했던 말이다.

가령, 오늘날 어떤 독재자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글쓰기를 그만둘 리 없다.

그렇다. 사람은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쓰는 것이다. 돈벌이로 글을 파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자기 표현으로 글을 쓴다. 책이 책방에 산으로 쌓이고 거리에 넘치더라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역시 글을 써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이어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어느 자리에서 글쓰기 이야기를 했더니 한 아주머니가 질문을 했다.

"글을 쓰라고 해도 쓸 것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나는 대답했다.

"쓸 것이 없다고요? 그럼 안 써야지요. 세상에 아무것도 쓸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글을 씁니까? 쓸 이야기가 많은데 쓸 시간이 없거나 써서 발표할 자리가 없는 것도 괴롭지만, 아무것도 쓸 것이 없는데도 자꾸 무엇을 써야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고통스럽겠어요. 시시한 글 거짓 글도 이렇게 해서 나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글로 움직이는 우리 사회가 잘못되어 가는 큰 까닭의 하나가 바로 이 점에 있는 것 같다. 꼭 써야 할 사람은 못 쓰고 있는데, 제발 좀 쓰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 사람, 아무것도 쓸 말이 없는 사람이 끊임없이 써내는 것이다. 그래서 글 공해, 책 공해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그 아주머니는 왜 쓸것이 없다고 했나 생각해 본다. 그 아주머니는 아마 평소에 말을 많이 하는 분 같다. 누구든지 만나면 자기 생각을 다 토해내어 버리니 다시 더 할말을 글로 쓸 필요가 없겠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아주머니도 다른 사람들---우리 나라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름없이 아주 어릴 때부터 자기 표현을 글로 할 수 없도록 하는, 남의 흉내만 내는 짓에 길이 들어 버렸기 때문일까? 그래서 자기 표현 대신에 가정에서나,직장에서나 또 버스 안에서나 밤낮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남의 표현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동안에 어느덧 그것을 자기 표현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글이 공해를 일으켜 사람의 정신을 어지럽히는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바른 글쓰기를 하려고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쓰는 글이 공해를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글쓰기가 공해를 일으키지 않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쓰는가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발표도 문제가 된다. 무엇이든지 쓰는 대로 다 발표해서는 안 된다.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발표하고, 꼭 남들이 읽어서 유익하고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설 때만 발표해야 한다. 또 같은 발표라도 한 가족이나 한 직장 동료들에게만 읽히는 글, 그 지방 사람들에게만 보여 줄 글은 그렇게 해서 그 이상 더 퍼뜨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글을 함부로 쓰지 말고(꼭 할 말만 쓰고), 깨끗한 말로 쓰는 일이다.

생활글과 문학 작품의 관계

글을 못 쓰거나 안 쓰는 사람 가운데는 앞에서 말한 아주머니같이 쓸 것이 없다는 사람도 있지만, 슬 것은 있는데 쓸 줄을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 더 많다. 쓰는 방법을 모른다고 하는 사람은 거의 모두가 글을 말과는 아주 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또 글을 쓰는 사람은 특별한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거나 남다른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글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태도가 글을 못 쓰게 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초등학교 때부터 올바른 글쓰기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나라에는 아주 옛날부터 글을 쓰고 읽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옛날에는 우리 글이 아니라 중국 글이었기 때문에 일하면서 살아가는 일반 백성들은 글을 쓸 수 없었다. 우리 글자를 지어낸 다음에도 그 우리 글은 중국 글에 눌려 모든 백성들이 널리 그것을 배워서 자기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삼지 못했다.

일제 시대에는 중국 글자를 섞어서 쓴 일본 글을 억지로 배워서 책을 읽어야 했다. 남북 분단 시대에는 우리 글을 의무 교육에서 배웠지만, 자기의 삶을 자기 말로 자유롭게 쓰게 하는 글쓰기를 배우지 못하고 남의 글과 남의 삶을 흉내내는 거짓글쓰기를 하게 되었다.

이래서 우리는 삶에서 쓰는 말과 글에서 배운 글말의 질서가 너무 다르게 되어 버렸고, 글쓰기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문 직업으로 삼은 사람만이 하는 특수한 기술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문학이란 것을 생각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문학이라 해서 글로 쓰고 읽는 것이 아니라 말로 들려 주고 노래로 부르고 했다. 그래서 문학을 창조하는 사람과 그것을 받아들여 즐기는 사람이 별다른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 누구나 그 일을 함께 했다. 아이들까지도! 그런데 글을 쓰고 읽는 문학이 되고부터는 그것을 지어 쓰는 사람이 따로 있어 이들 전문 작가나 시인들은 그것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문학이 일반 백성들의 삶에서 떠나 이른바 '비인간화'해 버린 까닭이 이러하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문학이란 것이 누가 무슨말로 변경한다고 해도 그것이 일반 대중 ---- 일하면서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즐기는 문학이 아니라는 것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문학이란 것이, 모든 사람이 극것을 창조하면서 즐기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일부 특수 계층만을 위한 문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히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삶의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민주주의를 바라고 있는 우리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생각이라고 본다. 따라서, 글쓰기는 일부 특수한 사람만이 즐기는 기술이 되어서는 안 안되며 모든 사람이 그것을 즐기고, 글쓰기로 자기 표현을 하는 가운데 삶을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문학은 비로소 그 뿌리를 내릴 땅을 얻게 될 터이고, 싱싱한 겨레의 문학으로 꽃필 것이다.

모든 삶의 글이 다 문학이 될 수는 없고 될 필요도 없지만, 문학이란 이름으로 씌어진 모든 글이 문학 아닌 삶의 글보다 그 가치가 더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마치 어른들이 쓴 글보다 아이들이 쓴 글에서 더 감동을 받는 경우가 흔히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가 문학을 걱정하고 논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 그 문학의 바탕이 되는 '모든 사람이 쓰는 삶의 글'을 걱정하는 것은 더욱 앞서야 하는 중요한 일이다.

글은 작가나 그 밖에 특수한 사람만이 쓰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써야 한다는 까닭을 이만하면 알 것이다. 농민도 어민도 노동자도 상인도 공무원도 교원도, 누구도, 누구나 써야 한다. 마치 말을 누구나 하듯이. 모든 사람이 쓰고 싶은 글을 마음대로 쓸 수 있어야 말이 살아나고 글이 살아난다. 사람이 살아나고 문학이 살아난다. 그런 시대가 되었다.

문학이 되는 문장이 따로 있는가

다음에 드는 몇 가지 짧은 글에서 를 견주어 보자. 은 보통으로 우리가 하는 말을 그대로 쓴 것이고, 는 그렇지 않다. 여기서 문학 작품으로 쓰는 문장은 같이 써서는 안 되고 같이 써야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더구나 요즘 젊은이들 가운데 많은 것 같다.(의 글들은 실제 작품에서 따온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땅

나의 사랑하는 대지(大地).새 한 마리가 푸른 하늘을 날아갑니다.

한 마리의 새가 창공을 비상합니다.

먼 하늘을 보았습니다.

먼 하늘에 눈을 주었습니다.

아침 하늘에 까치가 울고 있다.

까치가 아침을 쪼아먹고 있다.

길게 늘어진 목소리가 들려 왔다.

기지개처럼 늘어진 목소리 한 줄이 흘러 나왔다.

어느날 동화 작가(신춘 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온 지 10년쯤 되는 분)와 이야기하는 가운데 내가 "문장은 쉽게 읽혀야지요. 그리고 정확하게 써야 합니다. 부질없이 꾸며서 복잡하게 쓰는 것은 좋지 못해요. 문학 작품의 문장과 일상에서 쓰는 실용문의 글이 다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했더니 그 젊은이는 아주 뜻밖이란 듯 깜짝 놀랐다. 그가 놀라는 기색을 보고 나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에 알고 보니 동화작가뿐 아니라 소설가들도 괴상한 '문학적인 문장' 쓰기를 즐기고 있는 흐름이 되어 있었다.

소설이나 동화, 혹은 수필 같은 글을 처음 쓰는 이들의 글을 읽으면 흔히 첫머리가 부자연 스럽게 시작된다. 근사한 말로 요란스럽게 꾸며놓은 글이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 짐작할 수 없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다가 한참을 읽어나가면 그때야 이야기가 술술 풀린다. 해야 할 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왜 글 첫머리를 이렇게 쓰는가? 문학이란 것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이라면 보통 생활에서 쓰는 글같이 쉽고 분명하게 써서는 안 된다는 그릇된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 증거이다.

그토록 요란스럽게 시작한 글이 왜 차츰 되돌아가서 본래의 자기 말로 쓰게 되는가? 그 까닭은 첫째, 그런 겉꾸밈의 글은 머리로 억지로 만드는 것이라 쓰기가 대단히 어렵고, 다음은 쓰는 사람 스스로 재미가 없어 그 짓을 더 해나갈 수가 없고, 셋째로 그렇게 써서는 독자들이 읽어주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러는 이런 겉치레 꾸밈글을 끝까지 즐기는 사람도 있다. 글을 언제나 그렇게 꾸며 만들다 보면 그것이 버릇으로 굳어져 고상한 악취미를 즐기게도 된다. '비인간화'된 문화의 시대에는 참 희한한 글장난을 취미로 즐기는 사람도 나오게 되는데, 그런 사람은 사회에 여간 큰 해독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문학 작품이란 것이 이렇게 되고 보니 생활글을 쓰는 이들도 덩달아 사치스런 말장난을 하고 싶어한다.

대관절 '문학 문장' 곧 문학이 될 수 있는 글이 따로 있을 수 있는가?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편지글이나 일기글, 아니면 설명문이나 보고문 따위와는 아주 바탕이 다른 어떤 아름다운 문장이 되어야 문학이라 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대상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리는 것, 이것이 글쓰기의 바른 길이다. 소설이든 동화든 수필이든 생활문이든 편지글이든 아이들의 글이든 다 그러하다. 옛날의 글이고 오늘의 글이고, 동양의 글이고 서양의 글이고 이 점에는 다름이 없다.

그 옛날 중국의 유협이란 사람은문심조룡(文心彫龍)이란 책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공연히 글을 꾸미지 않도록 다음과 같이 주의해 놓았다.

문장의 표현에서 말을 다듬는 까닭은 논리를 좀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인데, 글을 함부로 꾸미고 기괴하게 늘어놓으면 마음과 논리는 구름에 가려 버리고 만다. 비취털 낚시줄에 계수나무 껍질로 만든 떡밥을 달면 고기가 모여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쥐다 도망가버린다. "말이 겉꾸밈 속에 묻혀 버린다."라고 한 말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싸르트르도 "작가는 펜대가 보여서는 안 된다."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은 글을 쓰는 사람은 문장 저쪽에 있는 사물을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물을 보는 그대로 나타내도록 해야지, 요란한 글 때문에 사물이 흐리게 보이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을 읽는 이들 쪽에서 보면, 글을 읽었을 때 그 글이 보여 주려 하는 사물이 바로 눈앞에 보이고 가슴에 와닿아야 하는 것이지 사물은 간 곳 없거나 흐릿하게 보이면서 문장이 훌륭하게 느껴지거나 압도해 온다면 그 글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다니자키 준이찌로도 문장 독본에서 '가장 실용적으로 쓰는 것이 곧 예술적 수완을 나타내는 것'이라면서, 좋은 글을 쓰는 비결은 잘 알 수 있도록 쓰는 것이고, 그렇게 잘 알 수 있도록 하려면 '잘 기억할 수 있도록' 써야 한다고 했다.

이오덕/40여 년 동안 올바른 글쓰기 교육을 연구, 실천해 왔다. 지금도 우리만 살리기 운동과 글쓰기를 통한 교육 운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우리글 바로쓰기,우리문장 쓰기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