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이 돈을 낳는다-클라우스 뮐러
몇 해 전 리리끄 극장 소속의 여가수 젤리 양은 타히트 군도에서 독창회를 가졌다. 그녀는 오페라 <노르마>중 아리아 한 곡과 다른 몇 곡을 더 부르고 총수입이 1/3을 받기로 하였다. 그런데 수입을 모두 계산해 보니 그녀의 몫은 3마리의 돼지, 23마리의 칠면조, 44마리의 닭, 5,000개의 야자 열매, 엄청나게 많은 바나나와 레몬 등이었다. 파리에서 그만한 가축과 과일을 사려면 4,000프랑은 가져야 했을 것이며, 그만한 노래 다섯 곡 부른 보수로는 괜찮은 편이었을 것이다. 타히티 군도에는 화폐라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수입의 일부만을 겨우 처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 상당량의 과일이 돼지와 가금류들의 차지가 되었다.
100년 전 영국의 윌리엄 스탠리 제본스는 화폐가 없다면 얼마나 불편할 것인가를 이렇게 묘사했다.
소재 자체가 어떤 사물을 화폐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금, 은, 은행권이 본래부터 화폐는 아니었다. 그들은 동고 동락하는 인간 삶의 일정한 조건아래에서만 화폐까 된다. 따라서 화폐는 모든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아니며, 상품 교환이 행해지는 곳에서만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하찮은 유리 구슬을 가치 도 아니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천재적인 착상의 산물이나 인간이 연구 끝에 찾아낸 발명품도 아니다. 더욱이 화폐는 목적 의식을 가지고 공동 생활을 하기 위해서 두 유인원이 갑자기 떠올린 생각의 산물도 아니다. 화폐는 의식적으로 창조되지는 않았다. 일상의 경제 생활을 순조롭게 진행시켜야 한다는 필연적인 압력 때문에 자연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고, 무의식 중에 자신의 영역을 얻는 것이었다.
우연한, 그리고 말이 없는 교환
두 남자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늪지와 통과하기 어려운 덤불, 이리저리 뒤엉킨 오솔길, 수정같이 맑은 물이 굽이 치는 공짜기 들을 지나, 그들은 벌서 부족 거주지로부터 멀리 벗어났다. 수염이 가득한 얼굴에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들 중 한사람은 열매와 나무 뿌리가 담긴 바구니를 들었고, 다른 한 명은 등에 가죽 배낭을 메고 있었다. 배낭 속에는 곡식이 들어 있었다. 올해 수확은 대단히 좋았다. 그들이 속한 부족은 수확 중 일부를 팔 수 있었다.
목적지가 가까워졌다. 낮은 구릉과 돌출바위, 그 뒤에는 분명히 자작나무 숲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곧 숲속의 작은 빈터를 발견했다. 그들은 물건들을 내려놓고, 돌아가서 그 동안 미루었던 휴식을 취했다.
이틀 밤이 지나 낯선 사람들이 그 장소에 나타났다. 이번 두 사람은 그곳에 놓은 물건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나서, 무엇인가를 거기 남겨 놓고 다시 사라졌다. 그들은 창대와 창촉을 남겨 놓고 갔다. 바구니와 배낭은 그대로 있다. 그러나 처음 두 사람은 실망했다.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원했다. 다시 한번 그들은 자신들의 은신처로 돌아갔다. 한 시간쯤 뒤에 아까의 그 낯선 사람들이 반대편 숲에서 교환 장소로 나왔다. 그리고 더 많은 창대를 남겨 놓고 다시 빈터를 떠났다. 이제 처음 두 사람은 만족한 것같이 보인다. 그들이 바랐던 창대와 창촉을 가지고 그들 부족이 있는 곳으로 다시 떠났다.
초기에는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노동 생산물의 교환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것처럼, 대(大)카르타고에서 온 상인들의 거래는 아무 말 없이, 계산해 보거나 화폐를 사용하지 않고 이루어졌다.
'그들은 배를 타고 와서 가지고 온 생산물을 낯선 해안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네 배로 돌아가서 불을 놓아 연기를 피워 신호를 한다. 원주민들은 연기를 보고 바닷가로 와서 금을 지불하고 물건들은 가지고 다시 돌아간다. 카르타고인들은 배에서 내려와 금을 확인하고, 금이 그 상품의 대가로 적당하다고 생각되면 금을 가지고 떠난다. 만약 금이 충분하지 않으면 다시 배로 돌아와서 거기서 계속 머문다. 원주민들은 다시 바닷가로 오서 충분할 때까지 추가로 금을 갖다 놓는다.'
헤로도토스가 주장하다시피, 아무도 다른 사람을 속이려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금은 초창기에는 아직 화폐가 아니었다. 단지 장신구나 체면치레를 하기 위한 도구로 더 많이 사용되었다. 화폐의 기원은 멀리 태고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우연히 조심스럽게 원시적으로 이루어지던 생산물 교환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시기에서 찾아야 한다. 늦어도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서는 화폐가 그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을것이다. 부족들은 아주 다양한 지리적 조건들 아래에서 생활했다. 그들은 다양한 식량 공급원과 원료들을 가지고 있었다. 한 부족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부족이 간절히 원하기도 했다. 어떤 부족은 자신의 영토 안에 가축들이 뜯어먹을 부드러운 풀이 자라는 초지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부족의 영토에는 물고기가 많이 서식하는 하천이 있었으며 또다른 부족의 영토에는 맛 좋은 야생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몇몇 부족들은 원료 특히 부싯돌이나 흑요석과 같은 양질의 돌을 가지고 있어, 그 돌로 흑색 안료(산화제 2망간, 산화제 2철 등)를 만들기도 하였다. 또 어떤 부족은 특정 물건을 만드는 데 필요한 희귀한 식물을 구할 수 있어서, 수공으로 바구니나 돗자리 따위를 만들어 가지고 있었다. 부족 가운데는 그 영토 안에 화려한 장신구를 만드는 데 쓰이는 보석, 상아, 조개 껍질 등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원시 공산제 사회에서의 생산은 자급 자족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차츰 자연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우연히 공동체내에 오랫동안 잉여가 남아 있게 되었다. 결국 그 잉여는 다른 부족에게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초기의 생산물 교환은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교환이 이루어지는 데는 아직 화폐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교환되는 물건을 생산하는 데 들어간 노동 시간이 가치의 척도였다.
원시 공동체 부족들의 영토 경계에서 빈번히 이루어지는 교환의 기초는 바로 사용 가치였다. 물건의 효용이 보장되어야만 교환이 이루어졌다. 물건에 따라서는 손으로 만져 촉감을 느껴 보고 주무르고 발로 밟아 봄으로써 자신들이 얻게 될 물건의 품질을 시험 하였다. 심지어 입술을 대 본다거나 핥는다거나 이빨로 씹어 봄으로써 물건의 질을 확인하였다.
그 당시에는 이처럼 오늘날의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ㅎ할 만한 방식으로 교환 관계가 성립했다. 데이비드 피셔는 피터 미뉴잇이라는 사람이 지금은 뉴욕 시의 중심지가 된 지역을 인디언들로부터 어떻게 구입했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는 멘헤이트족 족장에게 다 합쳐야 60굴덴밖에 되지 않는 여러 가지 도자기류와 수건 몇 장 그리고 풍문에 따른다면 추가로 유리 구슬 몇 개와 잡동사니를 지불하고, 허드슨 강 어귀에 위치한 길이 21km, 폭 4km, 넓이 57km 인 섬을 받았다.
19세기의 한 역사학자가 그 당시 토용되던 시세로 60굴덴을 대충 계산해 보았는데 그 엄청난 맨하탄 섬을 차지하는 데 단돈 24달러밖에 들지 않았다는 눈물나는 이야기였다."
본격적인 교환의 시작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지 않고 또 자연적, 기술적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만들수도 없는 물건들을 교환을 통해서 얻고자 한다. 그러므로 다른 부족에 속하는 사람이 방문했을 때나 부족들 간에 축제가 열리는 동안에 선물의 형태로 교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 선물을 주면 다른 선물로 '지불'받게 된다. 특정한 보답을 받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선물을 주면 그 대신 바라던 물건을 덛게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선물과 보답에 상대적으로 안정된 관계가 성립하여 본격적인 교환을 위한 다리가 놓이게 된다. 농업 및 가축 사육에서 최초로 광범한 사회적 분업이 일어나고 도구 사용이 발달하면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잉여 생산물이 생겨났다. 동물 살코기, 생선, 재배한 식물, 꿀과 같이 산에서 나는 산물들이 교환되었다. 나아가 양질의 돌들, 흑색 안료, 소금, 흑연, 납, 구리, 주석 그리고 나중에는 철과 장신구, 조개 껍질, 호박, 귀금속 등이 교환되었다. 분업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몇몇 품목이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교환을 위해서 생산되었다는 것도 의미한다. 이렇게 하여 상품 생산이 시작되었다. 부족이나 집단이 돌, 구리, 주석, 소금 등 원하는 물건의 산출지에서 1,000km 이상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상품 교환은 원시 농경 사회 초기에 이미 나타났다. 수공 기술의 발전과 그에 따른 광범위한 제 2 차 사회적 분업의 결과 상품 교환은 더욱 발전하였다. 선진적인 계급 사회의 사회의 상인들이 후진적인 부족 주민들과 경계 지역이나 시장에서 만난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 없니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알려지지 않았던 생산물, 더 많은 사용 가치를 가진 매혹적인 물건들은 교환에서 한 몫을 톡톡히 했다. 문화 수준이 한 걸음 앞선 부족이 미개한 부족에게 공급하는 물건은 급속도로 수요가 증가하였다. 예를 들면 그릇류, 도구, 철 등의 금속으로 만든 무기, 유리 구슬, 낯선 장신구, 면화, 화려한 의상, 화려한 무기나 그릇, 포도주 따위의 마실 것 등이다. 바라는 것을 얻으려면 그 부족이 가지고 있는 물건에 다른 부족이 관심을 가져 줘야 했고 실제로 그러한 관심들이 있었다. 북쪽 지방에서 얻을 수 있는 모피나 털가죽, 아프리카에서 나는 상어 · 고무 · 사금, 동양의 약초 · 향료와 그 밖에 화장품, 여자의 머리카락, 가축 곡물, 삼림의 산물, 금속, 귀금속 등은 타지 상인들에게 매력적인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곧 분업 관계가 확립돼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생산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북쪽 지방의 호박 수집자들은 멀리 로마 상인들의 '태양석(Sonnenstein)'과 자신의 생산물을 교환했다. 실제로 상당히 세월이 흐른 뒤에 당시 상인들이 지나다녔던 남북으로 뻗은 '호박로(琥珀路)'가 발견되어 위의 사실은 정확하게 밝혀졌다.
의미가 없어진 효용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생산물들을 교환하게 되자 효용은 더 이상 교환 관계의 기초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완전히 상이한 사용 가치를 가진 물건들의 효용은 어떤 기준으로 측정되어야 하는가? 원시인들에게 그런 문제의 해결이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의자나 탁자, 칼, 접시, 닭, 염소, 양, 기장죽, 과자 등의 요횽의 크기를 측정하고 이런저런 물건들의 서열을 매겨 놓은 것을 누가 곧이곧대로 믿으려 하겠는가?여러 가지 생산물들에서 사람들은 상이한 효용과 목적을 갖는다. 탈지유나 치즈가 영양 섭취를 위해서 소주나 담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밥상에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막아 줄 기와가 우아한 부인을 시원하게 해줄 부채보다 두 배, 세 배, 아니 열 배 더 유용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숨 막히는 살롱보다 푸른 숲을 더 좋아하는 시골 아주머니라면, 연기 가득한 댄스 홀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과는 달리 최신 유행하는 부채보다는 좀약 상자를 펴? 鄂求? 단순히 물건의 양이나 무게를 비교하여 거래가 성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상의 무슨 방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가능한 대안은 대단히 제한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 급해서 10m 의 화장지가 한 대의 냉장고보다 열 배 더 유용하다고 솔직하게 털어 놓는다면, 그 냉장고 한 대는 제 값을 받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미개한 부족들은 이런 식으로 혹은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교환함으로써 서로 의지하며 살아 왔따. 허버트 스펜서의 보고에 따르면, 쿠ㄱ키스족과 뱅골 지방의 베파리스족은 '닭의 무게와 면화의 무게를 같은 가치로 따져서' 닭과 면화를 교환했다고 한다. 비스마르크 제도에서는 과거에 보통 커다란 물고기에 대해 같은 길이의 조개 껍질 화폐더미를 지불했다고 한다. 또 뉴기니아의 남쪽 산악 지방에 위치한 마풀러스에서는 돼지의 입에서 꼬리까지의 길이에 해당하는 개 이빨로 만든 사슬과 돼지 한 마리가 교환되었다. 때때로 교환하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서 교환 비율이 달라지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아웨스타 지방에서 환자의 치료비는 다음과 같았다. 의사가 집주인을 치료해 준 경ㅇ우 치료비로 하등품의 황소 한 마리를 요구할 수 있었으며, 마을 유지에게는 중등품의 황소를, 도시의 장(長)에게는 상등품의 황소를, 그리고 그 지방의 대표에게는 네 쌍의 소를 치료비로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부인을 치료한 경우에는 그 신분에 따라 각각 암당나귀, 암소, 암말, 암낙타 한 마리를 치료비로 받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치료비로 얼마를 받았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누가 제일 빨리 건강을 회복하고 누가 가장 늦게 병이 나았을지는 뻔한 사실이다.
이와 같은 교환 수단들은 상품 경제의 요구에 부응할 만큼 지속적으로 늘어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생산물 일정량과 다른 생산물 일정량을 교환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는 누구도 두 시간이면 생산하는 물건과 생산하는 데 이틀이 걸리는 물건을 서로 교환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로부터 노동 시간이 비교의 척도가 되었다. 교환을 위해서 생산된 물건들은 상품으로 전화되었다. 상품으로 전화된 생산물들은 사용 가치 즉일정한 유용한 속성만 아니라,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들여야 할 사회적 필요 노동시 간으로 크기가 측정되는 가치까지도 가지게 되었다. 생산물들은 대단히 차별적이며 서로 다른 사용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치는 그 본성상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사용 가치를 가진 물건들은 무게를 달아서 교환한다든지 할 수 있었다. 두 가지 상품이 맞닥뜨리면, 한 상품이 다른 상품의 가치를 표현하게 된다. 이러한 표현은 여러 형태를 띠고 이루어졌다. 여기서 단순한, 개별적인 또는 우연적인 가치 형태가 시작된다. [도표 1]은 상품 아마포가 다른 상품인 곡식으로 그 가치를 표현하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아마포는 상대적 가치 형태이며, 곡식은 아마포의 가치를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 [도표 1]의 등식에서 나중에 화폐가 들어설 자리가 확보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구체적인 상품인 곡식이 다른 상품의 가치를 표현하고 측정해 준다. 상대적 가치 형태가 되는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은 그 구체적인 상품과 비교됨으로써 사회적으로 규정된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교환
점차적으로 분업이 진전되었다. 사람들은 보다 많은 양을 생산했다. 사람들은 구식물건이건 새로운 물건이건 더욱더 많이 생산하는 데 열중했다. 끊임없는 과잉 생산의 결과, 가족 및 개인의 소유가 확립될 수 있었다. 생산물의 생산이 공동체의 노동의 결과가 아니라 개인 노동의 결과인 곳에서 처음으로 가족 소유 및 개인 소유가 나타났다. 그 결과 의복, 장신구, 무기, 도구, 천막 등이 그것들을 생산하거나 사용하는 가족이나 개인의 소유가 되었다. 말, 낙타, 양, 염소, 당나귀, 돼지, 소 등은 가족 일부의 소유가 되거나 가족 집단 내지 가족 중 한 성원의 소유가 되었다. 주인이 죽으면 그가 소유했던 다른 물건들과 함께 산 채로 매장되어야 하는 여자들 역시 개인적인 소유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사회적 명성은 그가 소유하고 있는 가축, 여자, 장신구, 식량등 일용품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상류층 사람들은 축제, 추수 감사제, 장례식 등에서 개인의 부를 과시하고 베풀고 제물로 바침으로써, 마침내 열망하던 고귀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였다. 개인 소유의 확립은 필연적으로 상업의 발달로 진전되었다. 왜냐 하면, djEJs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무 대가 없이 선물로 주어지든지 교환의 형태를 띠든지 간에 다른 사람에게 양도될 수 잇기 때문이다. 분업의 진전, 가족 및 개인 소유의 확대, 계속 생산 가능한 잉여 생산물, 상품 종류의 증가, 생산량의 급증 등으로 인해 교환 관계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다소 우연적이지만 이제 더 이상 한 상품만이 다른 상품들의 가치를 등가로 표현하는 임무를 맡지 않았다. 많은 상품들이 그러한 역할을 수행했음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총체적인 또는 전개된 가치 형태가 성립되었다.
총체적인 또는 전개된 가치 형태는 이미 생산력이 상당히 높아졌다는 걸 말해준다. 교환할 수 있는 생산물의 종류가 다양해짐에 따라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들이 생겨났다. 실제로 상품 교환은 번잡하고 복잡한 일일 수 있었다. 다음의 한 아프리카 여행자의 기록에서 상품 교환이 얼마나 번잡한 일인지 알 수 있다.
"탕가니카 호를 건너기 위해서 나는 거룻배를 빌리려고 했다. 나는 사이드 이븐 하비드라는 사람에게 배 한 척을 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그 대가로 상아를 요구했다. 나에게는 물론 상아가 없었으며, 무하메드 벤 살리브라는 사람이 상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왜냐 하면, 그 사람은 상아를 주는 대가로 면화를 받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는 면화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무하메드 이븐 가리브라는 사람이 면화를 가지고 있으며 그는 철사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다행히 내게 얼마간의 철사가 있었다. 나는 무하메드 이븐 가리브에게 적절한 양의 철사를 주고 면화를 가지고 잇으며 그는 철사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다행히 내게 얼마간의 철사가 있었다. 나는 무하메드 이븐 가리브에게 적절한 양의 철사를 주고 면화를 받아서, 다시 그 면화를 무하메드 벤 살리브에게 주고 상아를 받았으며, 그 상아를 이번에는 사이드 이븐 하비드에게 줌으로써 마침내 원하고 원하던 거룻배 한 척으로 빌릴 수 있었다."
[도표 3]을 참조하면, 상품 교환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어야 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양고기(상품 A)를 사고자 하는 사람은 양고기나 양을 팔려고 하는 사람을 우선 찾아야 한다. 물론 그것으로 만사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양고기를 사고자 하는 사람이 양이나 양고기를 팔 사람이 갖고자 하는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만 그는 양고기나 양을 수중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양고기를 피는 사람이 바라는 것이 옷가지라면, 양고기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옷가지를 건네 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구매자가 얻고자 하는 물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임의의 어떤 물건을 바라고 있으며 바라는 그 물건을 구매자가 가지고 있고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이 두 번째 전제 조건이 항상 만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교환을 위한 거래는 대단히 지루하고 번잡해질 수 있는 것이다. 배 고픈 재단사가, 바지 하나를 받는 대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러 마리 양 중 한 마리를 내놓겠다고 하는, 남루하고 추위에 떠는 양치기를 만난다는 것이 여간해서 일어날 일이겠는가. 그러므로 처음부터 의도적인 교환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더많은 거래 상대자가 교환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필연적이었다. 그런 '우회적인' 상품 교환은 대부분의 경우 도박과 같은 것이었다. 교환되는 물건의 종류가 다양해질수록 상품 교환은 더욱 빈번히 이루어졌다.
현물 화폐의 등장
그리하여 보통의 상품군(群) 중에서 하나의 상품이 특별한 임무를 맡도록 자연스럽게 합의되거나 지정되었다. 그 상품은 상품들간의 교환을 매개하는 임무를 수행할 뿐 더 이상 그 자체만을 위해서 수요되지 않는 절대적 척도로 사용되는 물건이어야 했다.왜냐하면, 사람들이 언제라도 그 상품을 실제로 필요로 하는 물건과 맞바꿀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실질적인 화폐가 출현하는데 있어 본질적으로 새로운 진보가 이루어졌다. 어떤 특별한 상품이 사람들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물건들과 교환되고, 그 상품으로 물건의 대가를 지불할 수 있음으로써, 그 상품은 모든 상품들 중에서 특별히 선택받게 되었다. 그 특별한 상품은 유통 수단으로 기능하고 상품 교환의 매개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 상품은 더 이상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고 교환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이제 모든 상품의 가치가 언제라도 어느 상품과도 교환될 수 있는 특별한 상품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그 특별한 상품은 '일반적' 등가물이라고 불리었다. 그것이 바로 화폐였다. 원시인족들에게는 많은 원시적 형태의 화폐가 있었는데 영양 섭취에 필수 불가결한 생산물들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유목 민족에게는 다른 어떤 가축들보다도 소가 최우선이었다. 소는 그들 모두가 필요로 했던 상품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 생선과 어획물, 고물류, 소금, 차 장신구(달팽이 껍질, 산호, 진주, 조개 껍질), 소공예품(가죽, 털가죽, 모피, 돗자리, 수건, 옷가지)등도 일잔적 등가물로 기능했다. 그리고 점차로 금속이 이자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특히 귀금속류가 점차 이용되어끨. 사람들은 화폐를 세거나 무게를 다는 데 귀금속류를 기준으로 사용했다. 이모든 것들은 '현물 화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형태의 현물 화폐들은 많든적든 하나의 척도로서 일반적인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상당히 큰 그리고 다양한 사용가치(유용성)를 지니고 있고, 사용가치의 손실 위험이 적어서 장시간 보존 할 수 있으며 양적인 구분 즉 가분성(可分性)이 있어서 가치 관계를 적절히 드러낼 수 있어야 했다. 얼마냐고 묻는데 염소 1/2마리, 금속 접시 한 개, 혹은 달팽이 12와 1/2마리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의 화폐가 탄생하기까지는 물론 그와 유사한 대답들이 가능했다. 20세기에조차 우가다의 지역 대표들이 했던 임무중 하나는 채무 변제에 관한 소송에서 화폐로 기능하는 uath가 얼마나 나이를 먹고 얼마나 여위었는가를 판단해 주는 것이었다는 영국인 케인즈의 보고가 있다. 그지방에서는 염소가 널리 이용되는 표준 화폐, 즉 가치 척도이며 유통 수단이었다.
클라우스 뮐러 / 돈이 세계를 지배하는 곳의 저자
'비문학(인문과학, 사회과학, 철학, 역사,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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