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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4

생각의 모래알을 줍다

by 자한형 2022.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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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모래알을 줍다 / 곽 흥 렬

 

해운대 앞바다를 거닐고 있다. 가물가물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백사장, 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금빛 모래가 파아란 바닷물 색과 어우러져 좋은 대비를 이룬다. 대체 이 하고많은 모래 알갱이들이 언제 어디서 어떤 사연으로 이곳까지 실려 오게 된 것일까.

아마도 여기 모래들의 먼 조상은 본시 어느 깊고 깊은 산골짜기의 집채만 한 바윗덩이였으리라. 허구한 나날들을 부산을 떨면서 서로 부딪치고 떠다밀고 섞갈리는 기나긴 여정 끝에 마침내 실향민이 되어 이곳에 몸을 뉘고 있는 것이리라. 어느 미지의 세계를 꿈꾸고 있기에 자신이 정붙이고 살던 심산계곡을 버려두고 이렇게 타관살이의 아픔을 겪어야 하는 걸까. 이 모래들을 보면서 청운의 뜻을 가슴에 품고 고향을 등진 채 무작정 대처로, 대처로 찾아든 뿌리 잃은 우리네 소시민들의 삶의 모습을 읽어낸다.

모래의 성정은 무엇보다 그 바탕이 부드러움이다. 거추장스런 구두와 양말을 훌훌 벗어던지고 맨발인 채로 서푼서푼 걸음을 옮겨 본다. 자잘한 모래 알갱이들이 발가락 사이사이로 비어져 나오면서 고물고물 바닥을 간질인다. 어린아이 손등 같은 보송보송한 감촉, 아무리 밟고 매만지고 쓰적거려도 모래는 살갗에 작은 상처 하나 입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처음 생겨났을 때부터 지금과 같은 유순한 성정을 지녔던 건 물론 아닐 것이다. 삐쭉삐쭉 모가 나고 우툴두툴 거칠었음에 틀림이 없다. 수천수만 번 거듭되는 물살의 정을 맞고서야 마침내 보드랍고 살가운 이 백사장의 주인공들이 되었을 게다. 하기야 이것이 어디 모래 알갱이뿐이겠는가. 까탈이 심하던 젊은 날의 불칼 같은 성질도, 무수히 걷어차이고 쥐어박히고 뒤채이는 아픔을 겪고서야 비로소 야들야들 순편한 가슴을 지니게 되는 것이 아닐까.

백사장의 금모래만 보면 자주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난다. 갓 서른을 넘기자마자 얻은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한평생을 고통 속에서 부대끼다 가신 어머니. 지난날 당신께서 살아 계실 때는 여름철이면 연례행사처럼 동네 아낙들과 어울려 그리 멀지 않은 강변으로 모래찜질을 다녀오곤 하셨다. 유치원 아이들이 소풍을 가듯, 모래찜질은 그 시절의 부녀자들에게 주어지던 그리 흔치 아니한 생활의 활력소 가운데 하나였다.

백사장은 천연의 찜질방이다. 칠팔월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한낮, 장작불로 달군 듯 화끈거리는 모래더미 속에다 온몸을 푹 파묻고 있으면 그 열기가 피부에서부터 서서히 오장육부와 뼈마디 사이사이로 전해져 신경통이며 관절염 같은 만성질환에는 그만이다. 그렇게 한두 차례 모래찜질을 다녀오고 나면 얼마 동안은 한결 지내기가 수월하다며 어린아이처럼 마냥 즐거워하곤 하셨다. 그런 어머니였건만, 모래알처럼 이름 없이 사시다 덧없이 스러지고 말았으니 생각하면 마음이 애잔해 온다.

바닷새며 사람들의 훌륭한 놀이터로도 백사장만 한 곳이 있을까. 망망대해를 거침없이 날다 지친 갈매기들이 잠시 내려앉아 쉬면서 모래 위에다 오종종한 발자국들을 수도 없이 남겨 놓아도, 금세 파도가 와서 씻겨 주어 일시적으로 헝클어져 있던 모습을 본래대로 되돌려 놓는다. 그뿐이랴. 찌는 듯한 무더위에 지친 고단한 심신을 달래려고 찾아드는 피서객들에게도 모래는 기꺼이 자리를 내어준다. 그들은 이 자유의 공간에서 며칠간의 달콤한 휴식으로 일상에 찌든 삶의 피로를 털어내고 새로운 활력을 얻어 간다. 이것은 모래가 베푸는 무주상보시가 아닌가.

백사장은 바닷가 아이들의 추억의 제조공장이다. 모래성을 쌓는 아이, 조개껍데기를 주워 소꿉장난을 하는 아이, 파도에 몸을 맡기고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아이,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이런 귀에 익은 동요를 부르며 그 너른 모래벌판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던 어린 날의 고운 기억을,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면 갖지 않은 이 누가 있을라고.

혹자는 파편화된 현대인의 삶을 해변의 모래알에다 빗대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리 여긴대도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못하겠다. 하기야 점성 없음이란 그의 외면적 속성만을 두고 따진다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모래로선 퍽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의 모래알이란 근본 파란 꿈으로 가슴 부풀었던 어린 시절의 그 금빛 백사장을 두고 이른 말은 아닐 줄 믿는다.

모래란 자기 고집을 내세우지 아니하는 살가운 존재이다. 파도가 와서 때리면 때리는 대로, 아이들이 달려들어 모래성을 쌓으면 쌓는 대로 얼마든지 그들의 취향에 따르도록 내맡겨 둔다. 사람들이 이따금 모래로 근사한 예술작품을 빚어내기도 하지만, 한 번의 파도에도 여지없이 허물어져 본래의 평형상태로 되돌아가 버린다. 불가의 가르침인 무상의 이법을 가장 확연히 깨우침 받게 하는 존재가 바로 이 모래가 아닐까 싶다. 여름날 그 특유의 시원스러운 풍광으로 피서객들을 불러 모으다가도, 이내 썰물처럼 빠져나간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며 겨울날의 쓸쓸하고 황량함을 저 혼자 묵묵히 견뎌 내어야 한다. 모래는 여기서 인욕忍辱을 배운다.

해운대 백사장은 모래들의 중간기착지에 불과하다. 애초 못 말리는 집시의 성향을 타고나서일까, 이들의 길고 긴 방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들여다볼 수 없는 깊은 바닷속 어느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동경의 마음을 버리지 않고 있기에 그는 그 거대한 몸뚱어리를 밤낮 쉴 새 없이 들썩인다. 그러다가 거센 폭풍우 휘몰아치는 어느 여름날, 긴긴 세월 정들었던 백사장을 떠나면서 모래는 그의 타고난 집시로서의 일생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그리하여 완전한 정착의 꿈을 이루는 날, 비로소 고단한 역정歷程을 끝내고 오랜 안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영원의 삶을 꿈꿀 것이다.

그때는 거기서 또 다른 소임을 맡게 될 테지. 혹독한 아픔을 겪어 본 사람이라야 남의 세정細情을 아는 법, 모래는 자신이 깊은 산중의 바위였다가 자잘한 모래 알갱이로 육신이 부서져 오는 동안 겪었을 숱한 고통으로 인해 마음 아픈 자의 서러움을 속속들이 헤아린다. 그 푼푼한 가슴으로, 신변의 위험이 닥치면 몸을 숨기고서 겨운 삶을 꾸려가야 하는 힘 약한 바다생물들의 안전한 피난처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이다. 뭇 생명들을 보듬어 키워내는 일로 삶의 보람을 삼을 것이다. 그렇게 지심地心깊숙이 파묻혀 누대 만년의 세월을 지내오는 동안 모래 알갱이들은 다시금 단단히 굳어져서, 지각 요동치는 어느 여름날 거대한 융기작용에 의해 본래의 모습이었던 집채만 한 바윗돌로 환생할 것이다.

오늘 나는 광활한 해운대 백사장을 거닐며, 이 우주공간 만유 존재의 가고 머무름이며 달라지고 같아짐, 그리고 순간과 영원 같은 것들의 의미를 붙들고 하염없이 생각의 모래알을 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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