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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4

미스 에세이

by 자한형 2022.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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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에세이 - 김정화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연락이 닿지 않아 답답하다는 말씀도 있었지요. 이곳이 그대의 영토와 달라 즉각 답신이 어려운 점도 이해 바랍니다. 살다 보면 함께해야 하는 일도 많지만 만나지 않아도 힘이 되는 경우가 있지요.

당신은 절 만난 이후 매일 글을 썼노라고 고백했습니다. 백지를 마주하면 첫 줄부터 어렵다 하더군요. 언젠가 제가 단정한 첫 문장이 나를 안심시킨다고 한 말에 더욱 글문으로 들어가기 두렵다고 투정했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 문학이겠지요. 글판이 낱말만을 쏟아놓는 곳이 아닌 까닭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것을 쓰지 않으면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 역시 글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국가대표 축구 선수도 매번 공 넣는 게 어렵고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도 새로운 패러다임에는 기존 이론이 뒤집히며, 평생 정치에 매달리는 사람들도 나라를 구하기 힘든 현실입니다. 모르는 게 맞습니다. 안다고 하는 순간부터 모순도 함께 만들어집니다. 우직하게 시간을 밀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지요. 이미 문학의 길이라는 마라톤 대열에 들어섰으니 오기로 계속 달리는 겁니다. 열정으로 뛰다 보면 지식과 이론은 자연히 뒤따라온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릴케의 시가 있습니다. “눈이 멀어도 보이게 하고, 귀를 막아도 들리게 하는, 발이 없어도 당신께 이르게 하고, 팔이 부러져도 가슴으로 당신을 붙잡는.” 그가 열렬히 사랑했던 루 살로메에게 헌정한 시죠. “나는 당신을 피에 실어 나르겠습니다.”라는 마지막 문구가 기가 막힙니다. 그럼 피마저 마르면 어떡할까요. 영혼의 그림자로 그대를 지킬까요, 바람의 화석이 되어 곁에 머무를까요. 연애시 중에서 이보다 더 절절한 문구가 있을까요. 릴케는 병적으로 루에게 집착했지요. 루를 사랑하면 미구에 불후의 명저를 쓰게 된다는 속설처럼 릴케 역시 당대 누구보다 멋진 서정시를 구사했지요. 물론 실연의 고통은 혹독했지만 열정이 없었다면 사랑도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피에 실을 만큼 간절한 것이 있는지요. 열정을 가진 작가라면 당연히 나는 문학을 피에 실어 나르겠습니다.”라고 되뇌지 않을까요.

가끔 당신의 안부가 궁금하면 그대, 열심히 쓰고 있는가.” 하고 낮게 중얼거려 봅니다. 삶을 사랑하는 당신이니 글 또한 치열하게 쓰리라 믿습니다. 글을 쓰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겠지요. 만약 작가가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면 삶 또한 이어가기 힘들겠지요. 버지니아울프가 강물에 들고, 야스나리는 독가스를 물며, 헤밍웨이와 로맹 가리가 총을 들었듯이, 한국의 우울한 영웅 마광수 역시 스카프로 생을 묶었지요. 반면 치열하게 사는 작가들도 많다는 건 당신이 더 잘 알 테지요. ‘광기狂氣라는 두 글자를 바람벽에 붙이고 글에 매달린 소설가와, ‘골방의 시인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시인과 수생수사隨生隨死를 외치며 수십 권의 저서를 편찬한 노 수필가도 있지요.

이렇듯 작가의 생명은 유연성을 지닙니다. 생물학적 목숨 이외에 작가적 목숨이 존재하지요.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은 언제 작가로 태어났는지. 등단할 때였나요, 책을 발간한 날인가요, 아니면 비로소 마음에 드는 글 한 편 썼을 때였는지요. 작가란 글쓰기의 종신형을 선고받은 존재라는 말에 기어이 공감합니다. 일 년을 십 년같이 살 수 있고 십 년을 일 년처럼 살기도 합니다. 작가로서 남은 생은 스스로 연장선을 만들 수 있게 되지요.

감동을 잘 받는 사람이라면 글을 쓸 수 있는 재능을 지녔다고 합니다. 그러니 대상에 말 걸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먼저 다가가십시오. 겨울 바다에 손을 담그고, 여름 들판에 몸을 태우고, 살아 있는 것과 숨죽인 것들과 마주하십시오. 새벽이슬도 맞고, 낮달도 보고, 달빛 아래에도 서며, 비바람 부는 날도 가 보십시오. 퇴락한 뒷마루의 나뭇결, 흙길에 구르는 돌멩이 하나, 오래된 책장의 먼지까지 눈에 담으십시오. 작가라면 세상의 모든 것을 스승으로 보아야 제대로 된 글 한 편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에서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지요. 기초 검술 교육을 받던 아들이 칼이 너무 짧아 찌를 수 없어요.” 하고 불만을 호소하자 얘야,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서 찌르려무나.”라고 아버지가 답합니다. 한 발 더 가까이 가는 것. 딱 한 번만 더 해보는 것, 이것이 열정이지요. 그 마지막 한 번이 성패를 가르게 되는 것이지요. 1도가 더해져서 물이 끓는 원리와 같습니다. 끈질기게 하는 것이 열정의 불씨를 꺼지지 않게 합니다.

글을 쓰는 것이란 불러내는 일입니다. 그것은 타인을 부르며, 내 속의 나를 깨우게 됩니다.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은 나마스테라고 인사합니다. 이 말은 단순한 안부를 뛰어넘어 당신에게 깃들어 있는 당신의 신께 문안드립니다.”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석공들이 군더더기만 쪼아내고 안에 있는 부처의 형상을 들어내는 것과 같은 이치이죠. 작가 역시 글의 여백을 지워가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발전하려면 불편한 것과도 친해져야 합니다. 의식이 깨어나야 해석도 다르게 할 수 있습니다. 손편지도 쓰고 시골길도 걸어보고 가능하다면 텃밭도 가꿔 보십시오. 물론 실패도 하고 길도 잃겠지만 낯선 것에 눈 주기를 하고 귀찮은 것도 즐겨 보십시오. 쉬엄쉬엄 가야 오래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새로운 감성의 물줄기가 온몸을 덮는 경이로움을 느끼게 될 겁니다.

지금도 당신은 글을 씁니다. 명작 한 편은커녕 문단 말석에서 이름조차 불리지 않지만 작가라는 필생의 소업을 받들고 밤을 새워 하염없이 글줄을 엮습니다. 그대가 진정으로 나를 원하신다면 오늘도 신명나게 열정에 갇히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느새 그대 곁에 제가 우뚝 다가가 있을 테니까요. 그럼, 우리의 운명적인 만남을 기다리며 이만 총총. 미스 에세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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