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비밀- 브레이크
그대 사랑을 사람들에게 알리려 말라.
사랑이란 사람에게 말할 수가 없는 법.
산들바람이 소리도 없이
은근히 부는 것과 마찬가지니라.
참다 못해 나는 사랑을 고백하였나니
마음 속의 모든 것을 그이에게 말했다.
그대 기리는 노래 부르고 있나니 고요히 고요히 흘러 내려라
내 사랑 마리가 물살지으며 흐르는 아프턴 강가에 잠들어 있다.
아름다운 아프턴 강이여, 마리의 꿈을 깨우지 말고 고요히 흘러라.
골짜기에서 꾹꾸룩대고 있는 산비둘기여
가시덩굴 둥지에서 지저귀는 티티새여
초록색 머리털이 솟은 댕기물떼새, 너희 울음을 멈추어라.
아름다운 아프턴 강이여, 굽이쳐 흐르는
수많은 맑은 가는 물줄기를 굽어 보는 주위의 언덕은
그 얼마나 높이 우뚝 솟아 있는가.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 나는 온종일 언덕을 헤매며 거닌다.
양떼와 마리가 누워 있는 곳을 그리면서.
강둑과 초록빛 감도는 골짜기는 행복에 겨워 보이는구나.
근방 숲에는 제비꽃이 추억 어린 꽃잎을 피운다.
온화한 저녁놀이 풀밭에 살며시 다가오면
향기 그윽한 자작나무가 마리와 나를 캄캄하게 감싼다.
아프턴이여 네 수정 같은 물줄기가
나의 마리가 사는 오두막 근방을 감도누나, 그 아름다움이여.
맑은 흐름은 마리의 눈과 같이 하얀 발을 희살지으며 씻고 있다.
가련한 들꽃을 꺾으면서 물 속을 걷는 마리를.
가지 않은 길 –프르스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가지 않은 길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피천득 옮김]
외국 시는 왜 읽는가
세계의 시정
시는 인간의 언어 예술 중 가장 깊은 연윈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시라는 문학양식은 거의 단절 없이 기나긴 역사를 이어 오고 있으며, 공간적으로도 세계 어느 민족에서나 즐겨 창작되고 향수되고 있는 장르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 외국의 시 작품도 읽어 둘 필요를 느끼게 된다.
왜냐 하면 우리와 정서와 사상이 다르고 문화적 토양과 역사의 뿌리가 다른 여러 민족의 뛰어난 시인들의 작품을 집합으로써 새로운 인식과 사유에 눈 뜰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국의 작품을 읽으려면 먼저 언어의 장벽이 뒤따른다. 물론 그 나라의 언어에 정통하여 원어로 시를 읽을 수 있고 또 그 정서를 만끽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으나, 우리말로 된 작품을 읽을 경우 번역이 라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생긴다.
여기서 우리는 잘 된 번역을 찾을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그러한 안목을 가진 후에야 원작의 정서를 훼손하지 않고 거의 근사치로 느낄 수 있는 독자로서의 자질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원작을 번역했을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의미의 '굴절' 현상이다.
그것은 의미의 왜곡과는 다르다. 의미가 틀려지게 할 경우 그것을 우리는 오역이라고 하거니와, 굴절이란 다만 번역자의 안목과 양식에 따라 어느 정도 윤색되는 의미, 다시말하면 번역자의 시적 감수성에 따른 부분적 재창조를 말하는 것이다. 그만큼 시의 번역은 어렵고 또 그만큼 중요하다. 우리는 잘 된 번역을 통해 외국 시를 읽고, 그리고 나서 원어에 접근해 가야 할 것이다.
외국 시를 읽는 까닭
한 민족의 시는 그 민족의 문화와 정서를 정확하게 반영한다. 따라서 한 민족의 시에는 그 민족의 보편적인 정서, 곧 민족성이 그 민족 특유의 모국어에 담겨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한민족의 구성원인 우리로서는 되도록 우리 시를 많이 읽고 그 작품 세계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진솔하고 건강한 삶의 모습과 정서를 다양하게 누릴 필요가 있다.
자기 민족의 구성원들이 남긴 시 작품을 온전하게 읽고 누릴 수 있는 능력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 민족의 내부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는 정서적 가능성, 곧 사랑과 분노, 섬세함과 선 굵음, 그리고 절망과 희망의 교차를 통한 삶의 파노라마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만큼 문화와 지적, 정서적, 의지적 토양이 다른 민족의 시들을 읽을 필요가 당연히 부각된다. 왜냐 하면 역사적, 문화적 배경 또는 문학적 전통이나 시적 규범이 다른 민족의 창작물인 시들을 많이 접함으로써 우리는 민족을 초월하는 인간 보편적인 정서와의 접촉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낯선 정서와의 교감은 처음에는 당혹감을 줄 수도 있으나, 점점 그 세계를 이해하고 공감해 가는 중에 우리의 세계도 그만큼 넓어지게 된다.
외국 시 작품을 읽는 까닭은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의 시뿐만 아니라 다양한 민족적 채취와 그 민족들 고유의 정서, 나아가서는 탁월한 외국 시인들의 시 세계를 경험함으로써 우리의 경험 세계를 역사적·공간적으로 넓히는데 있는 것이다.
외국 시들을 강조하는 까닭이 우리 시들을 평가 절하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시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외국의 좋은 작품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외국의 좋은 시들을 섭렵해 가야 한다. 전통적인 문화국인 서구의 여러 나라는 물론, 동양 및 제3세계의 시 작품도 독서의 대상에 포함하면 좋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류가 보편적으로 누려 온 삶의 양식과 그로부터 빚어지는 다양한 시적 정서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출처 : 김열규 신동욱 문학 동아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