醫訓 (의훈)-김 석 주 (金錫胄) -선 종 순 옮김
몇 개월 동안 병을 앓고 난 후 김 씨는 몸이 퍽 수척해졌다. 집안 식구들에게 물으니 나무 심하게 말랐다 하고, 친구에게 물으니
“저런, 자네 왜 이렇게 말랐는가?”
하였으며, 하인들에게 물어보아도 역시 마찬가지 대답이었다.
이에 김 씨는 걱정이 되어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의원에게 진찰을 받아 보려던 차에 의술이 신통하기로 온 나라에 유명한 의원이 이웃 마을에 산다기에 마침내 모셔와 진찰을 받게 되었다.
의원은 자리에 앉아 먼저 유심히 살펴보고 귀 기울여 들어 보더니 앞으로 다가와 맥을 짚어 보고 물러나 앉으며 말하기를
“당신의 소리를 들어보고 안색을 살펴본 바로는 병이 든 것이 아니고, 맥을 짚어보니 그 전의 병도 이미 다 나았는데 대체 무슨 병을 고치려고 합니까?”
하였다. 김 씨가
“몸이 마르는 것을 고치고 싶습니다.”
하니 의원은 어이없어 하며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건 제가 고칠 병이 아니군요, 살갗에 든 병은 찜질로 고치고, 혈맥에 든 병은 침으로 고치고, 위장에 든 병은 술로 고쳐서, 고치지 못할 병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병은 병이 아니라 마르는 것이니, 제가 어떤 치료법을 쓸 수 있겠습니까? 살이 찌는 데 네 가지 조건이 있는데, 당신은 한 가지도 없으니 어떻게 살찔 수 있겠습니까? 네 가지 조건이란, 몸을 편하게 하는 것, 맛있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 눈을 즐겁게 하는 것, 귀를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으리으리한 집에 살면서 화려하게 꾸민 침실에서 잠자고 멋들어진 거실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 치고 마른 사람 보셨습니까? 날마다 갖가지 고기와 생선으로 진수성찬을 차려 먹는 사람 치고 마른 사람 보셨습니까? 주옥으로 단장한 이름다운 미녀를 수백 명씩 거느리고 시중을 받는 사람 치고 마른 사람 보셨습니까? 좋은 노래, 아름다운 선율을 감상하며 즐기는 사람 치고 마른 사람 보셨습니까? 이 네 가지가 바로 살찔 수 있는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집에 살아 편안하여 살이 찌고, 좋은 음식이 맛이 좋아 살이 찌고, 아름다운 미녀에 기분이 좋아 살이 찌고, 아름다운 선율에 즐거워서 살이 찌니, 이 네 가지를 갖추고 있는 사람은 살찌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살이 찌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런 조건을 갖춘 자들은 살찌는 것이 당연하지만 지금 당신은 가난하고 또 지위도 낮아 집은 오막살이 초가집이며, 먹는 것은 배고픔이나 면하는 정도이며, 이름다운 미녀들은 본 적도 없고, 좋은 음악은 들은 적도 없을 것입니다. 살찔 수 있는 조건이 하나도 없는데 살찌려고 한다면, 끝내는 살도 찌지 못하고 도리어 마음마저 마르게 될 것입니다.”
김 씨가
“맞습니다. 진짜 저는 그러한 조건은 없으면서 몸이 마르는 것을 고치려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마음을 살찌울 수 있겠습니까?”
하니,
의원은
“이른바 마음을 살찌운다는 것은 좋은 집, 좋은 음식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고, 좋은 음악, 아름다운 미녀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도덕으로 채우고 인의(仁義)로 윤기를 내어 얼굴이 돋보이고 용모가 수려해지는 것을 말하니, 이는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온전하게 만들고, 본래부터 없었던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며, 자기의 마음을 살찌우고 몸이 마르는 것은 걱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은 초(楚)나라 장사꾼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셨습니까? 초나라 장사꾼이 옥으로 유명한 형산(荊山)의 모든 옥을 모았는데, 그 가치는 여러 개의 성(城)으로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느 날 제(齊)나라에 갔다가 금은보화가 시장에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마음에 들어 옥과 바꾸어 가지고 돌아왔지요. 금은보화라는 것은 진실로 부를 누릴 수 있는 밑천은 되지만 부를 유지시켜 주는 형산의 옥보다는 못합니다. 옥을 이미 잃어버린 그 장사꾼은 마침내 금은보화마저 다 탕진하였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장사를 잘못했다고 말하면서 모두 초나라 장사꾼을 비웃었답니다.
지금 당신은 마음을 살찌우려 하지 않고 본래 없는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만, 설령 그것을 얻는다손 치더라도 잘한 장사는 못 되거니와 얻지도 못하고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을 먼저 잃어버리게 되면, 초나라 장사꾼보다 더한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옛날 현인군자는 먼저 살찌워야 할 바와 고쳐야 할 바를 살폈습니다. 조건이 갖추어져야 살찔 수 있는 것으로 몸을 살찌우지 않고 마음을 살찌웠으며, 몸이 살찌지 않는 것을 병으로 여기지 않고, 마음이 마르는 것을 병으로 여겼습니다. 나의 것이 이미 온전하고 남의 것을 부러워함이 없으니 어찌 나의 형옥(荊玉)을 금은보화와 바꾸겠습니까?”
하였다
김 씨가
“말씀 아주 잘 들었습니다. 옛날 분들이 했던 마음의 살찌움에 대해 듣고 싶군요. 역시 보통 사람과는 다르겠지요? 지금 제가 온전하게 하고 싶어도 아마 할 수 없겠지요?”
하니, 의원이
“옛날 분들이 했던 마음의 살찌움에 대해 듣고 싶으시다구요? 당신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옛날 분들은 이미 온전하게 했고 당신은 앞으로 그렇게 할 것이니, 완전하고 완전하지 않은 것이 다를 뿐입니다. 옛날의 군자는 몸이 마른 것을 병으로 여긴 적인 없기 때문에 역시 애써 온전해지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만 마음은 저절로 온전했습니다. 공자(孔子)께서는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에서 굶주리셨지만 성(聖)을 온전히 살찌웠으며, 안연(顏淵)은 형편없는 식생활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온전히 어짊[賢]을 살찌웠으며, 백이숙제(伯夷叔齊)는 수양산에서 굶주렸지만 온전히 절개[節]를 살찌웠으며, 굴원(屈原)은 강상(江湘)에서 수척하게 말랐지만 온전히 충성[忠]을 살찌웠으니, 이분들은 오직 의로움[義]만을 좇아 비록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몸이 마르는 것 때문에 자신의 지조를 바꾸겠습니까?
또한 당신에게 부족한 것은 몸을 살찌우는데 필요한 것들이고, 마음을 살찌우는 데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옛날의 군자가 오막살이 했던 것처럼 당신도 오막살이하고 있으니, 당신의 거처가 옛날의 군자와 같습니다. 옛날의 군자는 식생활이 보잘것없었는데 당신도 식생활이 보잘것없으니, 당신의 식생활이 옛날의 군자와 같습니다. 어지러운 여색(女色)이 당신의 눈을 홀리지 않으니 옛날 분들의 밝은 눈을 유지하고 있으며, 음탕한 노래가 당신의 귀를 어지럽하지 않으니 옛날 분들의 밝은 귀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지요. 자질이 이렇게 훌륭하므로 당신이 온전해지고자 한다면 인(仁)이 바로 온전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자께서는 ‘내가 인을 추구하기만 한다면 인이 곧바로 이를 것이다’라고 하셨던 것이니 어찌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 씨가 이에 일어나 두 번 절하고는
“처음에 제가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들었을 때, 식구들은 다만 나를 근심해 주었고 친구는 다만 나를 가여워했으며 하인들은 다만 놀라워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당신이 저를 깊이 아껴 주어 들려주신 말씀만은 못합니다. 애초에 저는 몸의 병을 고치려고 당신을 만났는데, 이제 당신의 말씀으로 마음의 병을 고쳤습니다. 제가 비록 영민하지는 못하지만 가슴 깊이 새겨 두겠습니다.”
하면서 감사를 드렸다.
의원이 처음에 들어와 좌정했다. 몸을 기울여 자세히 살피더니만 고개를 들어 소리를 듣는 듯이 하다가 앞으로 나아와 그 맥을 짚어 보았다. 그러고는 물러나 앉으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그대의 목소리를 듣고 그대의 낯빛을 살펴보니 아픈 사람 같지가 않았습니다. 제가 그대의 맥을 짚어 보니 병은 이미 나았습니다. 무엇을 더 고치고 싶은지요?”
“나는 야윈 것을 고치고 싶네.”
(중략)
“사는 집이 화려하면 편안해서 살이 찌고, 음식이 사치스러우면 맛이 있어서 살이 찝니다. 용모가 아름답고 보니 기뻐서 살이 찌고, 소리의 가락이 어여쁜지라 즐거워서 살이 찌지요. 이 네 가지를 몸에 지니면 살찌기를 애써 구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살이 찝니다. 저들이야 진실로 그 같은 바탕을 갖추고 있는지라 살찌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제 그대는 이미 가난한 데다 신분도 낮고 쑥대로 얽은 초가집에 살면서 채소와 거친 밥을 먹습니다. 눈은 다섯 가지 채색을 본 적이 없고, 귀는 다섯 가지 소리를 들은 적이 없으니, 바탕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다만 살찌기를 구한다면 끝내 살이 찔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양비(良肥)마저 잃게 될까 염려됩니다.”
내가 말했다.
“그렇구려. 내가 진실로 이 네 가지의 것이 없는데 또 병으로 야위기까지 하였소. 어찌 이른바 양비란 것이 있단 말이오?”
의원이 말했다.
“이른바 양비란 것은 화려한 거처나 사치스러운 음식 또는 즐거운 음악과 마음을 기쁘게 하는 여색을 바탕으로 삼지 않습니다. 도덕으로 채우고 인의로 윤택하게 해서 낯빛에 가득 차올라 얼굴에 환하게 드러나는 것을 말하지요. 이는 진실로 본래부터 지녔던 것을 온전히 해서 평소에 없던 것을 사모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그 마음을 살찌워서 몸이 마르는 것을 병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고요. 그대는 또 초나라 장사꾼의 일을 들어 보지 못했습니까? 형산(荊山)의 옥 하나를 쌓아 두니 그 값은 여러 개의 성으로도 능히 바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제나라로 갔다가 금은보화가 시장에 쌓인 것을 보고는 마음으로 기뻐하여 이것과 맞바꿔 돌아왔습니다. 대저 금은보화는 진실로 부자가 되는 바탕이지만, 형산의 옥 한 개가 지닌 양부(良富)만은 못합니다. 장사꾼이 그 타고난 부를 잃고 나서는 어느새 밑천 또한 다하고 말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장사를 잘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모두들 초나라 장사꾼을 비웃었지요. 이제 그대가 양비를 버리고 평소에 없던 것을 구하니, 설령 이것을 얻는다 해도 오히려 장사를 잘하지 못한 것이 되고 맙니다. 찾다가 얻지 못하고 또 본래 지녔던 것마저 잃게 되면 사람들이 이를 비웃으니 어찌 다만 초나라의 장사꾼 정도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옛날의 현인과 군자는 먼저 마땅히 살찌워야 할 것을 살피고 고쳐야 할 것을 살폈던 것입니다. 바탕이 있어 살찌는 것으로 그 몸을 살찌우지 않고, 양비로 그 마음을 살찌웁니다. 몸이 살찌지 않음을 병으로 여기지 않고 마음이 살찌지 않음을 가지고 병으로 삼지요. 이것이 온전해지면 저것을 부러워함이 없으니, 어찌 자기의 형옥(荊玉)을 가지고 금은보화와 바꾸려 하겠습니까?”
김석주(金錫胄) 조선의 문신. 1634년(인조 12) ~ 1684년(숙종 10). 자는 사백(斯百), 호는 식암(息庵). 강릉참봉 김흥우(金興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김육(金堉)이고, 아버지는 병조판서 김좌명(金佐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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