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법 -김이랑
한살이를 마친 담쟁이를 바라본다. 여름이면 햇살바람에 이파리를 반짝이다가, 가을이면 마지막 정열로 붉게 흐르다가 겨울이면 빛바랜 벽화로 남는다. 바람이라도 불면 바스락 부서지는 모습이 얼핏 덧없어 보이지만, 가만히 음미하면 생의 필법 하나가 있다.
빠끔 얼굴을 내민 싹이 신기한 듯 주위를 둘러보며 배밀이를 시작한다. 일어서 본다. 털썩, 다시 몸을 일으켜본다. 어? 이게 아닌데, 비로소 담쟁이는 자신은 곧추설 수 없다는 걸 안다. 화려한 자태 속에 가시를 품거나, 달콤한 향기 뒤에 회초리를 품지도, 칡넝쿨처럼 여린 체 엄살 부리며 남의 목을 죄지도 못하는, 말 그대로 ‘쟁이’다. 발톱이 있다만 그건 벽을 붙잡는 고리다.
하지만 좌절에 빠지기엔 생이 너무 짧다. 옆을 보니 억새가 있다. 가느다란 억새를 붙잡았다간 약자 허리 부러뜨린다고 욕을 먹기 십상이다. 저쪽에 알통 굵은 소나무가 있다. 소나무에게 기대면 누가 함부로 대하지 않겠지만 강자에게 빌붙어 산다고 조롱을 받을지 모른다.
하! 누구를 붙잡고 서지?
뒤를 보니 벼랑이 버티고 섰다. 물 한 방울 없는 바위엔 듬성듬성 이끼만 거무튀튀하게 끼었을 뿐 아무도 삶을 나누지 않는다. 불심이라도 있다면 부처를 조각하고 척추라도 곧다면 문자라도 새기겠다. 하지만 담쟁이는 붓 한 자루도 들지 못해 낫 보고 기역자도 쓸 수 없는 사시랑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줄기를 뻗는 재주뿐이다.
담쟁이는 바위를 기어오른다. 한 발 한 발 줄기를 뻗고 이파리를 펴서 바위를 푸르게 덮는다. 피 한 방울 없는 바위의 혈맥이 되어 푸르게 흘러주다니, 이쯤이면 아무리 견고한 바위도 감정이 생길 만도 하다. 담쟁이가 온몸으로 그리는 그림은 대보다 줄기차고 솔보다 푸르니, 아름다운 공존이다.
글자랑은 하지 말라는 고장, 전남 장성을 지나다가 한 무덤에 들렀다. 솔향기 그윽한 길을 따라가다 보니 비석에 점 하나 찍히지 않는 무덤이 있었다. 빈 벽을 보면 낙서라도 하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이다. 그러나 백비(白碑) 앞에서는 마음이 하얘졌다.
박수량 선생은 오래도록 높은 관직을 누리면서도 가족에게 자신의 몸을 거둘 돈조차 남기지 않았다. 백비는 이 뜻을 기려 임금이 하사한 느낌표다. 공을 적으면 오히려 그 덕을 가릴까 비석에 글자 하나 새기지 않았으니, 감히 내가 점 하나 찍을 수 있으랴. 선생의 맑고 깨끗한 필법 앞에서 무념무상, 돌아오는 길에서 유념유상한 사람의 행적을 그려볼 뿐이었다.
화가는 고뇌를 쥐어짜 그림을 그리고 문필가는 가슴 고갱이를 태워 글을 쓴다. 생의 흔적, 그것은 어느 골짜기에서 쉬어가다가 바위에 새겨놓은 아무개거나, 절간 기왓장에 써놓은 이름일 수도 있다. 이름에는 남을 해코지하라거나 헛되이 살라거나 하는 뜻은 없다. 龍이 되어 세상을 잘 다스리거나 군자가 되어 사람에게 德을 베풀거나, 그렇지 못하면 眞善美를 쓰라고 얻은 이름이다.
세종은 스물여덟 자를 써서 문맹의 눈을 밝혔다. 붓다는 海印을 써서 깨달음의 길을 닦았다. 테레사는 몸을 깎고 깎아 더 쓸 수 없는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順命을 썼다. 행적 하나 하나가 생의 의미였던 것이다.
나무는 제 몸이 붓이다. 땅속으로 하늘로 획을 뻗는다. 발이 달리지 않았을지라도 허공에 평생 정직한 木을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아름다운 花를 친다. 딛고 설만큼의 땅만 차지하고 세상에 열매를 바친다. 마지막에는 제 몸을 태워 火를 그리고 한 줌 잿빛으로 소멸한다.
내 행적을 도화지에 옮겨본다. 배밀이로 시작해 직립하고 뜀박질까지 배워 온 누리를 돌아다니다가 여기까지 왔다. 동선을 그리면 마치 실꾸리를 풀어놓은 듯 복잡할 듯하다. 산골짜기 개천에서 태어나 龍이 되겠다고 여의주를 찾아 온 세상을 누비며 돌아다녔으니, 이쯤이면 내 인생의 상형문자는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龍龍
龍龍, 수다스럽다는 뜻을 가진 ‘절’자 이다.
뭐가 그리 바빴을까. 달음박질치다가 질주를 제어하지 못해 부딪치고, 지치면 물살에 이리 밀리고 바람에 저리 쓸렸다. 이러다가 평생 수다를 떨다 마침표를 찍지나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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