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순 선생님과 ‘가을’- 김동찬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담임선생님이셨던 윤미순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부르시더니 동시를 몇 편 써오라고 하셨다. 글이라고는 일기나 독후감밖에 써보지 못한 나에게는 시라는 것이 유행가 가사처럼 뭔가 멋있는 것이라는 정도의 개념밖에 없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내가 쓴 시가 목포의 지방신문인 《호남매일》에 실릴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나는 목포에서 기차역으로 세 정거장 떨어진 ‘일로’라는 시골의 촌놈이었다. 대도시 목포의 신문에 실릴 것이라면 정말로 뭔가 그럴 둣한 것이어야만 했다.
원고지를 놓고 아무리 싸워도 좀처럼 써지지가 않았다. 밖으로 나가 내가 밥 먹듯이 오르내리던 감나무 위로 올라갔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헌 줄’ 아니면 ‘새 줄’을 기다리던 옛날이야기 속의 아이들처럼 기막힌 행운에 의존하기로 하고 무작정 앉아 있었다. 감나무는 물기 없이 조금씩 말아 올려진 이파리들을 떨어뜨리고, 쌀쌀한 바람이 옷깃으로 스며드는데 혼자 청승맞게 감나무 위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안돼 보였는지, 그 주름 하나 없이 푸르던 하늘이 튼튼한 ‘새 줄’을 내려주었다.
입에서 갑자기 줄줄 시구가 풀려 나왔다. 순식간에 한 편의 시를 완성시켰다. 제목은 ‘가을’, 그 첫 두 행은 너무나 환상적이어서 마지막에 반복 사용해 내 일생의 첫 시작품의 끝을 맺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그 두 행은 이것이다.
‘가을은 쓸쓸한 계절 / 가을은 고독한 계절’
여세를 몰아 「고양이」라는 시시한 동시를 하나 덤으로 더 써서 의기양양하게 선생님께 드렸다. 말을 미소로 대신하길 좋아하시던, 말수 적은 선생님은 「가을」을 보자마자 터뜨리기 직전의 웃음을 보이셨다. 기대했던 칭찬은 없었다. 눈치 빠른 나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신문이 나왔을 때 그것을 확인했다. 《호남매일》에는 「고양이」가 실렸고, 위대한 영감의 산물인 「가을」은 빠져 있었다.
목포에서 동시 작가들의 동인 활동에 참가하시던 선생님은 교과서에 없는 좋은 동시들을 칠판에 적어 소개하시곤 했다. 「가을」 사건 이후 나는 그 칠판 위 동시들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동시 가운데 하나는 아직도 가끔씩 생각나곤 하는데, 아이들이 놀다 가버린, 바람만이 서성이는 조용한 학교 운동장에서 고무신 한 켤레가 어둠을 맞는다는 내용이었다.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로 씌어진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동시들이 가져다주는 그림과 감동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이 「가을」 대신 「고양이」를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시’란 추상적인 관념어로 모호하게 쓰는 것보다 쉽고 고운 우리말로 구체적으로 그려내야 한다는 시 창작의 기본을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미 깨달았다고(?) 하면 조금 과장된 얘기일까? 대학 교육까지 마치고 시를 좀 쓴다는 분들도 간혹 이 시 창작의 기본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내가 참으로 훌륭한 은사를 갖고 있는 행운아임을 느끼곤 한다.
한편 좀처럼 밥벌이가 되지 않는 시 창작에 이 땅의 많은 시인들이 정성을 쏟고 있는 것은, 좋은 성적을 올려야 하고 상급 학교에 진학시키는 등의 가시적인 성과에 쫓기는 어려운 교육 여건 속에서도, 윤미순 선생님과 같은 훌륭한 선생님들이 보이지 않는 노력을 기울인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가려져 있는 그분들의 노고와 성과에 대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의 감사와 박수를 보낸다.
이파리들의 색깔이 변하고 떠날 채비를 하는 가을이 오면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의 일을 생각하게 되고, 나에게 시를 눈뜨게 한 윤미순 선생님과 「가을」을 떠올리게 된다. 교대를 갓 졸업하셨던 윤 선생님, 피부가 유난히 하얗고 콧잔등의 주근깨가 소녀 같은 느낌을 주던 선생님도 약 30년이 지난 지금은 주름살도 늘었고 머리도 많이 하얘지셨을 것이다.
사람이란 만나면 헤어지게 되고, 헤어지면 좀처럼 다시 만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생각에 우울한 마음 또한 떨쳐버릴 수 없다. 가을은 정녕 ‘쓸쓸한 계절, 고독한 계절’인가. 어렸을 적부터 가졌던 이 느낌이 이제는 좀 익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현대수필4'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탄과 연민 (0) | 2022.08.20 |
---|---|
오빠의 바다 (1) | 2022.08.20 |
백정과 박서방의 차이 (0) | 2022.08.20 |
어물전에서 (0) | 2022.08.20 |
집단 규율과 절대 권력의 횡포 (0) | 2022.0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