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탄과 연민-고재동
눈 들어 산을 바라보면 연두 초록 마구 번지는 사이로 산벚꽃, 철쭉꽃, 조팝꽃이 펑펑 제 황홀을 터트린다. 발자국 옮겨 들길을 걸으면 보리밭 서리서리 물결치는 그 곁에 자운영, 민들레, 제비꽃은 또 꽃수를 놓고, 어느 담장 안을 들여다본들 영산홍, 금낭화, 홍도화 한 무더기 피지 않은 집이 없다.
산벚꽃의 휘황함이요, 철쭉꽃의 정열이요, 조팝꽃의 떨림이라 했던가. 민들레의 미소요, 자운영의 유혹이요, 제비꽃의 교태라 했던가. 무릇 영산홍의 출중함과, 금낭화의 붉은 입술과, 홍도화의 귀기어린 관능을 보아라. 그 색깔과 향기의 길에 한번쯤 푹 빠져본다 한들 부처님이라도 어디 나무랄쏜가.
친구 중에 유난히 감탄을 잘하는 친구가 있다. 그는 들길을 걷거나 여행을 하다가도 그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열려 곧잘 탄성을 발하곤 한다.
“이것 봐, 이것 봐! 이 제비꽃은 보라색인데 저건 흰색이야. 또 이 흰색 민들레와 노란색 민들레 좀 봐. 어쩌면 한 종류이면서 이렇게 각기 독특한 색깔을 가졌지?”
“그래. 그 꽃들보다 오히려 세상이 신비로 가득 찬 듯 여기는 자네가 더 꽃 같구먼. 어쩌면 그렇게 나이 먹는 줄도 몰라?”
누군 열두 살에 세상을 다 알아버렸다고 했던가. 이후로 견디기만 하는 생의 환멸과 권태가 얼마나 끔찍한 줄 아느냐 했던가.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실 세상의 아웃사이더인 나 같은 자에게도 생은 수고와 병고만으로도 그렇게 감탄할 만한 것만은 아닌 성싶다. 더더욱 오늘날 자본이니 사이버니 하는 것들이 천정부지로 설쳐대는 세상에서, 거기에 앞서거나 뒤서거나 온통 혈안(血眼)을 하고 날뛰어야만 되는 삶으로, 누가 길섶의 작은 꽃 하나를 보고 감탄하며 누가 동백꽃에만 사는 동박새와 산록 맑은 계곡의 산천어에 눈길을 주겠는가.
생의 고통을 혹독히 치르고 꽉 찬 중년에 와서야 생명 찬양의 길에 들어선 천양희 시인의 「한 아이」란 시에서도 그 눈은 어린애 같은 감탄으로 가득 차 있다.
시냇물에 빠진 구름 하나를 꺼내려다
한 아이 구름 위에 앉아 있는 송사리 떼 보았지요
화르르 흩어지는 구름 떼들 재잘대며
물장구치며 노는 어린 것들
샛강에서 놀러 온 물총새 같았지요
세상의 모든 작은 것들, 새끼들
풀빛인지 새소린지 무슨 초롱꽃인지
뭐라고 뭐라고 쟁쟁거렸지요
무엇이 세상에서
이렇게 오래 눈부실까요?
사실 이런 시를 보면 감탄이 아니라 경탄(敬歎)까지 든다. 부유하는 먼지같이 메마른 세상에서 가장 오래 눈부신 것을 발견해 내어 그것을 애절하게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곱고 아름다운가.
“헌데 친구야. 이 금낭화를 좀 보아. 이 꽃엔 꼭이 며느리발풀꽃에 얽힌 것과 비슷한 사연이 숨어 있다네. 가난 가난 열두 가난 시절, 시집살이가 험난한 어느 산골마을의 며느리가 밥을 다 푸고선 어찌나 배가 고팠던지, 주걱에 묻은 밥풀 몇 알을 떼먹고 있었다지. 그러다 마침 들에서 돌아오던 시어머니에게 들켜선 저 혼자 밥 다 처먹는다고 작대기로 늘씬 얻어맞아 죽은 뒤, 이듬해부터 그 집 뒤란 장독대에 피었다는 게 이 꽃이야. 여자의 새빨간 입술에 흰 밥알을 문 듯한 모습이 그 며느리의 한을 상징한다는 거야.”
“어머머. 그래? 세상에 이런 슬픈 일도 있다니?”
친구는 어느새 말을 잊고 눈시울이 젖어든다. 그의 눈은 이미 금낭화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그가 벌써 배꽃, 사과꽃, 황매화 펄펄 바람에 흩날려선 길가에도, 강물에도, 풀섶에도 함부로 처박히는 세월을 어찌 다 보겠는가. 그런 그가 연두, 초록, 진초록 겁 없이 마구 번지는 자리에 소쩍소쩍 쏟아지는 불여귀(不如歸)의 가르침은 또 어찌 다 듣겠는가. 아니 그런 그가 그렇게 배꽃 펄펄 날리는 길 위를 절뚝절뚝 절뚝거리는 노부부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걷는 모습에 망연자실 않겠는가. 아니 그런 그가 그렇게 초록 산천 마구 날리는 들판에서 새참 담배 피우다 우두망찰, 불여귀 울음에 눈시울 젖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초록 햇살을 왜 모르겠는가.
그렇게 그렇게 강물은 흐르고 백양나무도 금은물살 치는 강변에 오늘 또 무엇이 그리 서러워 울고 서 있는 그의 슬픔, 어찌 한없이 맑아지지 않겠는가.
연민의 마음, 그렇다. 그 친구는 세상에 대한 감탄뿐만 아니라 언제나 스러지고 상처 입는 이들에 대한 연민이 가득찬 사람이다. 모두들 황금에 눈이 멀고 이기주의로만 똘똘 뭉친 요즘 세상에서 참으로 드문 일이다.
연민이란 “상대의 고통을 동정하는 감상” 정도로 여겨 되레 악덕 취급을 하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삼라만상의 엄정한 법칙면에서 보면 우리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이다. 필히 죽어가야만 하는 이런 실존의 고통을 이해하고 같이 슬퍼하는 것은 그러므로 인간 본질에 대한 따뜻한 이해이다. 그래서 연민의 자리는 신의 슬픔이 닿는 자리라고 말할 수도 있다.
혼자 사는 게 안쓰럽다고
반찬이 강을 건너왔네
당신 마음이 그릇이 되어
햇살처럼 강을 건너왔네
김치보다 먼저 익은
당신 마음
한 상
마음이 마음을 먹는 저녁
함민복 시인의 「만찬(晩餐)」이란 시이다. 혼자 사는 게 안쓰럽다고 어떤 지인이 마음을 써서 김치를 보내왔다. 그 김치를 햇살로 여긴다. 그 지인이 보낸 연민의 마음을 흔쾌한 마음으로 받아들인 까닭에 한 저녁 홀로 먹는 초라한 식탁이 황제의 만찬이 되어 있다. 상대에게 연민을 확대하고자 할 때는 한없이 낮고 열린 자세가 필요하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자도 흔쾌하게 열려야 한다.
감탄과 연민, 이 둘은 메마르고 닫힌 세상의 꽃이나 초록이나 같은 것이다. 감탄과 연민,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우리는 초라한 일상을 신의 나날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고재종
1984년 『실천문학』에 「동구밖집 열두 실구」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신동업 창작기금ㆍ시와시학상ㆍ젊은시인상ㆍ소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에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새벽 들』『사람의 등불』『날랜 사랑』『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음』『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쪽빛 문장』 등이 있으며, 산문집에 『쌀밥의 힘』『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 등이 있다. 현재 계간 『문학들』 주간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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