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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4

동청도사리암이씨심방

by 자한형 2022.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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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청도사리암이씨심방*/ 이 정 화

오르막길이 놓였다. 삼복염천에 계획에도 없던 산길을 오른다. 두 다리는 갈수록 무거워지건만, 비탈길과 층층 돌계단은 더욱 가팔라진다. 중력을 거스르는 걸음에 힘을 주어 지구를 묵직하게 밀어 올릴 수밖에 없다.

사리암 앞에까지 차가 들어간다는 말을 들었던 것도 같다. 막상 와 보니 산기슭에서 산꼭지까지 올라가야 법당 문고리라도 만져볼 수 있는 곳이다. 막막한 심정으로 쳐다보니 산 능선 아래 암자 처마가 살포시 고개를 들어 반긴다. 애추崖錐를 이룬 벼랑은 아득하지만 그곳에 다다르는 길이 놓였다. ‘귀찮다’, ‘가기 싫다는 마음의 소리를 애써 외면하면서 발을 내딛는다.

한때 기암괴석으로 우뚝 섰던 바위가 풍화에 부서져 검은 파석이 흘러내린다. 암괴류로 굴러 내리는 돌은 푸른 이끼로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거뭇거뭇한 돌들 속에 유독 눈길을 끄는 흰 돌이 빛을 낸다. 깎은 듯 납작한 모양이 화분 받침으로 쓰면 참 어울릴 것 같았다. 자연물마다 제 자리가 있다지만, 흔하디흔한 돌무더기 속에서 돌 하나 건져 내 것으로 차지하는 게 대수인가.

문득, 큰 것도 아닌 자잘한 것들에 집착하면서 내 욕망이 바닥을 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파른 비탈과 무더위로 심장은 뛰고 머리는 하얗게 비워졌지만 물욕만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치사하지만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고 올라갈 길을 쳐다보면서 흰 돌이 놓인 자리를 점찍었다. 잊어버리지 않으려 주변 나무도 몇 그루 눈에 집어넣는다.

불현듯 흰 돌에서 시인 백석을 떠올린다. 시집과 평전을 읽어서라기보다는 백석의 이름 탓인지도 모르겠다. 근대를 살았던 백석 시인은 시대의 멋쟁이였다. 올돌한 키와 훤한 인물은 어디에서나 돋보였다. 동료들과 같이 어울릴수록 검은 돌 사이에 낀 흰 돌처럼 눈길을 끌었다. 좌절 속에서 삶의 의지를 다지는 이는 빛이 난다. 소박한 겸손은 순수해서 그 빛을 잃지 않는다. 오석烏石더미 속의 백석白石하나가 한 시대를 풍미한 백석 시인의 환생만큼 눈부시기만 하다.

백석은 시인이 아닌가. <남신의주(南新義州)유동(柳洞)박시봉방(朴時逢方)>에서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라고 읊는다. 시인은 신의주 남쪽에 위치한 유동 마을의 박시봉 집에 머물며, 슬픔과 무기력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삶을 다짐한다. 이 시에는 서른한 번의 쉼표가 찍혔다. 비평가들은 감상에 빠지지 않기 위한 시인의 수법이라고 하지만, 내겐 자신을 향한 엄한 검은 돌이라 여겨진다. 하얀 돌바닥에 놓인 오석 같은 쉼표는 분명 대책 없이 흐르는 정서를 막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처럼 흑과 백은 상극이 아니라 서로를 보하고 조한다.

흰 돌白石은 그에겐 순정한 마음을 표상하는 상징이다. 계곡을 덮은 검은 돌 무리에서 유난히 빛나던 흰 돌이 백석이다. ‘백기행이라는 본명보다 백석으로 남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 박꽃보다 희고, 눈이 푹푹 나리는 날,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 마가리에 살고 싶어 했던 시인이다. 순수하고 숭고한 색을 지닌 돌을 자신의 성씨에 붙이면 흰 돌처럼 정갈한 아름다움을 지니리라 기대했는가 보다.

순간 내 눈이 나를 들여다본다. 돌 하나에 대한 욕심이 일순간에 무수히 많은 탁한 돌무더기를 끌고 왔다. 천 팔 계단을 오르며 만 팔백 개도 모자랄 만큼 많은 돌들이 회초리 같았다. 사방천지가 돌무더기, 돌무덤이었다. 탐내던 흰 돌을 비로소 놓은 손으로도 육신의 무게를 물고 있는 욕망을 떼어내기가 어려웠다. 욕심을 잡은 것은 순간이지만 욕심에서 발을 떼어내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땀구멍마다 구슬땀을 흘리고 갖은 고통에서 놓여나려고 발버둥을 치며, 세속을 벗어난 절을 찾아 오랜 애를 써야 간신히 벗어난다. 뒷걸음치기만 하면 만사 끝이다. 벗어나려는 때에 벗어나려는 집착을 차라리 끈기라 할 만하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쏟아지는 폭염인 탓에 울창한 숲속이라도 시원한 바람을 찾을 수 없었다. 중간쯤 돌 허벅에 고인 물로 뱃속을 식히고 손수건을 적셔 얼굴과 목덜미를 닦았다. 그마저 잠시뿐이었다. 육신에 속죄의 고통을 더할까 하여 계단을 계속 오르지만 눈앞에 이어진 돌계단을 보니 오르기를 포기하고 싶어졌다. 그럴수록 몸뚱어리 하나를 받쳐주지 못해 벌벌 떠는 다리를 다독인다. 산길은 자유로 향하는 길이다. 내면이 무엇임을 알려주는 고행이다.

백석은 시 한 편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며 심적 통증을 씻으려 했다. 나는 더위로 지친 몸을 한 잔의 석수와 천 팔 계단의 걸음으로 고통을 맛보며 흰 돌을 더 이상 탐내지 않게 되었다.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의 마지막 행은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이다. 갈매나무라는 마무리가 얼마나 힘찬가. 어깨에 짊어진 미련한 삶의 자락 한가운데 갈매나무를 심은듯하다. 한순간에 검은 수피나무를 내려놓았다는 결단으로 들린다.

나뭇잎으로 가려진 하늘이 드러난다. 맞은편을 바라보니 고갯마루 능선이 겹겹이 펼쳐진다. “옳은 것도 놓아버리고, 그른 것도 놓아버려라. 긴 것도 놓아버리고, 짧은 것도 놓아버려라. 하얀 것도 놓아버리고, 검은 것도 놓아버려라.” 원효 스님의 말씀이 시원한 한 줄 바람으로 스친다. 몸이 안락하면 욕망을 더 채울 궁리만 하는 게 인간이다. 욕망을 산꼭대기에서 굴리면 쪼개지고 부서지고 깨어질 텐데. 그리하여 영험한 흰 돌까지 내 것으로 만들려는 마지막 욕망도, 몸의 고행 앞에서 사라질 것인데. 모든 물욕은 몸뚱어리 하나에 기생하는 것. 육신에 대한 마지막 한 조각 집착조차 놓는다면 흰 돌이 될까.

세월만큼 옷장에는 옷이 빼곡하고, 신발장에는 신발이 가득하다. 책꽂이에는 책이 넘쳐난다. 마당에도 화분이 그득하다. 집 주위는 사방이 돌 천지인데 흰 돌 하나 가져다가 집 안에 두려 했던 빗나간 미감美感에 낯 붉어진다. 나도 고통스러운 영혼을 고귀하게 어루만져 티끌 같은 욕망조차 글 속에 녹여낸다면, 쉼표 하나 문장 속에 제때 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생의 짐이 될 뻔한 흰 돌은 횡재수가 아니었다. 계획에도 없이 청도 사리암邪離庵으로 이끌렸던 그날의 복점卜占이었다. ‘바르지 못할 사자와떠날 리자를 쓰는 암자를 오르며 콩죽 같은 땀을 호되게 흘린 날, 간사한 마음과 이별하라는 계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건넛산 위에 조용히 얹힌 구름 테두리에 붉은 노을이 도드랍다. 저녁예불 올리는 비구니 스님의 낭랑한 소리가 삼라만상을 검게 덮은 어둠빛을 부른다. 남신의주 유동에 있는 박시봉의 집에서 지었다는 시 한 편으로 내 마음의 초석을 삼는다. 동청도 사리암자에서 얻은 생의 쉼표 하나가 내 등짐을 내려놓게 할 줄이야.

올라갈 때 보물 같던 흰 돌의 자리를 내려올 때 찾지 못했다. 잊었는지 잃었는지 모르지만, 그 돌은 지나가는 나를 지켜보며 염화시중의 미소를 지었으리라.

백석白石, 동청도東淸道사리암邪離庵방하착放下着이로구나.

 

*동청도(東淸道)사리암(邪離庵)이씨(李氏)심방(尋訪)

백석의 <남신의주(南新義州)유동(柳洞)박시봉방(朴時逢方)>에서 패러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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