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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5

구름옷

by 자한형 2022.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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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옷-이 종 화(李 鍾 和)

봄의 문턱인가 느껴질 만큼 따스하다가도 소슬한 날이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자연(自然)이 입는 옷은 파스텔 톤. 세월의 흔적이 내려앉은 인생의 옷을 비틀어 짜면 아마도 이런 물감이 주르르 쏟아질 게다.

뭐 하나 확실하지 않은 게 인생.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고, 다 가진 듯 보여도 아픈 기억 하나쯤 자신의 멍에로 오롯이 지고 가는 게 사는 건지도 몰랐다. 살면서 먼저 오는 것도 늦게 오는 것도 있었지만, 깨달음만큼은 항상 뒤늦게 문을 두드리곤 했다. 영영 다다를 수 없는 무지개. 그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부풀던 시간을 청춘이라 부른다는 걸 알게 된 것도 봄날의 끝자락이었다.

앎을 위해 배우지만, 앎에 진심을 더해야 비로소 삶이 되는 거였다. 가슴 없는 말, 사심 깃든 행동은 삶이란 종()을 울리지 못했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숱한 벽을 치고 산다. 하루가 시작되면 나는 벽과 벽이 만든 미로로 들어가 남이 친 벽을 피해 벽을 치고, 그 벽 사이에서 나의 영역을 만들기 위해 하루를 보낸다. 여전히 삶이 되지 못한 나의 앎은 타인의 벽이 만든 방에 갇히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건만, 그 미로를 나올 땐 늘 헛헛했다.

뜬구름 같은 인생. 우리는 각자의 구름을 베어내어 옷을 지어 입는다. 목구멍에 넣기 위해 밥을 구하러 흘러 다니다 배가 부르면 은하수너머 별도 본다. 여기저기 뒹굴다 사회에 물들고, 눈비를 맞아가며 비련에 온몸을 적시기도 한다. 하늘에 뜬 해를 보며 희망이란 무늬를 넣고, 멀어져가는 인연을 그리며 고독의 노을에 옷을 담그기도 한다. 누구나 닿고 싶어 하는 꿈의 언덕을 향해 아침나절 먼 길을 떠난 소년이 땅거미가 내릴 무렵 백발의 노구를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와 구름 같은 옷을 개키고 단정하게 죽으면 가히 천행(天幸)이라 할 만 했다.

죽어버린 지도자들의 빛바랜 옷가지를 수거해 시대라는 대야에 담가 거기서 침출된 빛깔을 탐구하던 역사가들은 이름 난 이들의 옷 빛깔은 대개 열정이었다고 말한다. 열정의 옷이 날개를 달면 전쟁과 평화가 번갈아 찾아왔다. 떨어진 사과에서 자연의 이치를 깨치고, 아스라이 먼 우주를 상상하며 새로운 차원을 증명하기도 했다. 산업이라 총칭하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끊임없이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뜨거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인생을 뜨겁게 달구려고만 한다. 모두 주연이 될 수 없는 사회라는 무대에서 다들 주인공이 되려고만 한다. 욕망을 열정이란 허명으로 물들인 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가진 자들은 권위로 벽을 높이고, 없는 자들은 가진 자들의 허욕을 부추겨 자신의 벽을 세운다. 그렇게 우린 지식이 아닌 요령, 삶이 아닌 처세를 배워가며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있었을 혼탁한 색깔로 구름 같던 흰 옷을 검게 물들이고 만다.

앎을 삶으로 만드는 사람, 마음으로부터 진정 배우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는 열정이 아닌 냉정함으로 자신의 옷을 물들인다. 얼음장 같은 그의 언행에는 군더더기라곤 없었다. 입에 발린 말도, 자신을 드러내는 말도 하지 않았다. 냉정했기에 그는 무척 고독했다. 주변의 냉대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원칙을 소중히 여긴 그를 답답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는 그 고독의 계절을 수양의 시간으로 삼고 있다. 길이 아니면 가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겸손한 마음. 함양(涵養)과 체찰(體察)을 거듭하는 그의 눈빛이 통찰로 빛나게 되면 사람들은 그제야 그에게 모여들 것이다. 이치를 알면 관습의 틀도 깰 수 있는 법. 법식을 잘 지키는 그였지만, 훗날 그는 그 법식의 틀을 부수며 자신의 길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숱한 전쟁은 우리가 따뜻하지 않아 일어나기도 하지만 우리가 냉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기도 하다. 숱한 평화는 우리의 따뜻한 마음 덕에 찾아온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냉철함을 되찾았기에 지켜낸 것이기도 하다. 눈부시게 화려한 겉옷이 삶의 목표가 된 시대. 감추기 보다는 드러내기 위해 옷을 입는 사회. 어긋난 열정으로 구름 같은 옷을 물들인 채 우린 꿈을 정복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훗날 백발이 다 된 우리는 흠뻑 젖어버린 옷을 개키며 각자의 삶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걸치던 옷과, 옷을 물들였던 우리를 하나씩 벗겨내면서.

내 옷은 과연 어떤 색으로 물들어있을까. 후대는 우리가 입던 옷을 두고 오늘을 이야기할 게다. 어떤 옷이 구름옷이었는지. 구름 같은 옷, 구름 같던 옷 그리고 구름이 된 구름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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