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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5

평론과 수필

by 자한형 2022.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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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수필 -김열규

에세이크리틱을 가름하는 것은 성가신 일이다. 그것은 한국적인 관례를 따라서 수필과 평론(혹은 논평)을 구분 짓는 것과는 달리 힘든 일이다. 우리의 수필이 대체로 에세이의 범주에 들기는 하겠지만, 서구식 에세이가 꼭 수필과 일대일로 맞바꾸어질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에세이는 어원적으로 시도’, ‘탐색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에세이의 속성을 이해함에 있어 의연히 유효하다. 그것은 서구식 에세이가 지적인 모색, 정신적 기획 그 자체인 인간 활동이고 또한 그 결과이기 때문이다. 뭣인가 새로이 시도해 보는 것, 남들과는 달리 시험 삼아 해보는 것과 관련된 텍스트라는 속성을 에세이는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해서 크리틱은 어원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을 의미한다. 남들의 행위, 지적 정신적 소산에 대한 품평이라는 의미를 갖추고 있다. 해설이나 해석 행위, 설명을 하는 행위도 이에 포함된다.

에세이와 크리틱의 어원적 의미는 에세이를 일차적인 텍스트로, 크리틱을 이차적인 텍스트로 변별할 때도 여전히 유효하게 활용될 수 있다.

무엇인가를 처음 시도(기도) 해 보는 지적 작업의 언어적 표현이 일차적 텍스트라는 것은 더 설명할 나위가 없다. 사물과 인간과 세계를 소재(객체)로 삼아 필자의 사상 감정을 피력한 글이기 때문이다. 세계와 인간과 사물에 관한 필자의 개인적 직접적 경험이 언어 진술화되어 있다는 것을 일차 텍스트라는 말이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크리틱은 이미 남들에 의해 작성된 텍스트에 대한 또 다른 언어 진술이라는 뜻으로 이차 텍스트라고 명명될 수 있다. 조르주 뿔레가 비평 의식은 그 정의상, 타자의 사고에 기댄다"라고 한 것이 참고가 되겠지만, 평론은 텍스트에 대한 또 다른 텍스트인 것이다. 에세이가 크리틱의 비평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고려에 넣어도 좋다. 이 경우 크리틱 활동의 대상인 텍스트는 반드시 자연 언어 진술체일 필연성은 없다. 인간 행위, 언어 이외의 인간 커뮤니케이션 등에 의해서 이룩된 코드라고 이름 지어질 기호의 체계, 그리고 그것에 수반된 의미작용이 인지될 수만 있으면 텍스트라 불러도 무방하다. 정치 평론, 사회 평론, 문화 평론 등이 문제가 될 때 이런 텍스트성이 강조되어야 하지만, 이때 자연 언어 진술체도 기호 체계의 일부라고 간주되는 게 좋다.

이같이 크리틱은 이차 텍스트이고 텍스트에 대한 또 다른 텍스트이기 때문에 에세이와는 달리 메타성()’을 지니고 텍스트 내련성이 문제가 된다. 일차 텍스트가 텍스트로서 어떻게 존립하고 있는가를 물을 수 있기 때문에 이차 텍스트인 크리틱은 당연히 메타성을 향유한다. 이때 메타란 말은 언어 진술체에 대한 언어적 반성 행위 내지 그것이 문제 삼고 있는 텍스트 사이에서 형성되는 것이지만 이것은 이차 텍스트인 크리틱이 일차 텍스트에 대한 관계 또는 그 양자의 상호 관계라고 바꾸어 표현될 수도 있다. 크리틱이 바르게 일차 텍스트를 분석하고 있고 해석하고 있고 평가하고 있고 또 그 존재성을 올곧게 파악하고 있는가 하는 등속의 물음에 따라 내련성이 추구될 수 있고 그 결과 크리틱이 참인가 거짓인가 하는 것이 판정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크리틱과 에세이를 가름하기 위해 또 다른 기준을 활용할 수 있다. 지금껏 보아 온 가름의 기준이 두 가지의 글, 곧 크리틱과 에세이가 지닌 텍스트성에 있었다면 또 다른 기준은 그 두 가지가 지닌 언어적 기능에 있다. 크리틱은 독자를 확신시키고 나아가서 이념 사고의 체계까지 바꾸어 가지게 하도록 작용한다. 이것이 논증이라는 언어 기능이지만 이에는 논쟁까지도 포함되고 있다. 또한 논증은 독자를 무엇인가가 진실 또는 진리라고 확신시키는 과정에서 설명이라는 언어 기능도 활용해야 한다. 이런 일련의 언어 기능은 크리틱이 전달 기능을 위주로 삼은 언어라는 것을 보여 주게 된다. 그러나 에세이는 상대적으로 보아 언어의 정서 기능내지 감정 기능에 보다 더 강하게 작용한다. 언어의 감정 기능은 독자를 대상으로 한 지시나 전달 교환 등을 목적으로 삼는 전달 기능과는 달리 독자를 예상하지 않고도 수행된다. , 필자가 스스로 자신의 내면세계의 경험을 자체 내에서 확인, 재정리하기 위한 동기가 감정 기능에서는 보다 더 중요시되는 것이다. 전달 기능이 대화라면 감정 기능은 독백이다. 감정 기능의 언어가 전달 기능을 수행할 때라도 이해나 설득을 통해서이기보다는 독자의 감정 이입이나 공감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된다. ‘달은 지구의 위성인 천체다라는 글과 오늘 저녁달은 외롭다라는 글을 서로 비교하면 전달 기능과 감정 기능의 차이가 쉽게 잡히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크리틱과 에세이의 구분은 이 낱말들의 어원적 의미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구분은 상대적이라는 것 등을 전제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항존적인 것도 아니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에세이로 이름 붙여진 텍스트들 가운데에는 본격적인 논문도 포함되어 있고 따라서 별도로 크리틱이라고 이름 붙여 마땅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평론에 관한 에세이라는 제목의 글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흔히 이 같은 에세이를 포멀 에세이’, 곧 격식을 갖춘 에세이라고 해서 그렇지 않은 인포멀 에세이와 구분한다. 가치 판단적이고 성찰적인 주제를 엄격한 문제, 논리적으로 잘 짜인 글의 엮음새에 담아 표현하는 것이 전자라면 비교적 가벼운 화제를 개인적이고도 단순한 문체에 담아 표현하는 것이 후자라고 하는 구분법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같이 크리틱까지를 포함하여서 에세이라는 말이 포괄적으로 쓰일 때 그것은 인간의 지적 정서적 언어 활동의 전 영역에 널리 다양하게 걸쳐 있게 된다. 학문 영영으로도 문학 예술 철학 사회학 때론 자연과학에까지 확대되는 것이다. 그래서 에세이는 인간의 전체 정신, 감정 영역에 대한 탐조자(探照者)로 야경꾼 구실을 톡톡히 치러 낼 수 있다. 그것들에 대한 창의성 높은 탐험 가요, 감각도 높은 감시자가 곧 에세이스트들이다.

한편 한국적인 현실로 화제를 옮긴다면 수필과 평론 사이의 혼선의 거의 피할 수가 있다. 적어도 크리틱과 에세이 사이에서 빚어질 정도의 혼선은 없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우리의 수필은 중세기 선비 및 유학자들의 문집에 실린 대다수의 글, 일부 소설(백운소설)이라 불린 글들의 전통을 오늘날에 이어받은 것이라고 보이지만, 그 전통에 있어서 그랬듯이, 소재는 일상생활 주변, 신변에서 구하고 주제는 삶을 위한 교훈, 정서적 감동 등에서 구하고 문체는 부담이 적은 간결한 데서 구하고 있다. 글의 길이도 짧은 편이어서 그 이데올로기의 세계도 막중하거나 엄숙하도록 심각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기에 수필에서 독자들이 한때의 읽을거리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실토한다고 해서, 그게 곧 수필에 대한 비난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수필의 단순함, 간결성 등이 커팅을 잘한 작은 보석의 조형미에 견주어져도 좋을 만하다는 것을 실증하고 있는 실제 수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수필은 그 간결성과 단순함 때문에 형식의 탄력성과 내용의 함축성을 요구하게 된다. 간결함 속의 여운의 깊이, 울림의 넓이 그런 것을 수필이 요구한다는 뜻이다.

언어 조직으로서, 좀 더 정확하게는 언어적 분절 단위의 구성체로서 수필이 그 단위들의 독자성과 전체 연계성에 상당한 자유와 여유를 부여하고 있는 것을 형식의 탄력성 내지 구조의 탄력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종래 흔히 수필에 형식이 없다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지칭한 것이지만 자칫 오해를 살 만도 하기에 크게 권장할 만한 게 못된다. 이른바 문법적 논리적 의미론적 분절 단위 (이미지, 센텐스, 문단, 모티프 등에 걸친)들의 이음새에 비약과 암시와 때로 단절이 용납되는 정도가 수피에서는 매우 크고 높다. 따라서 보다 더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엮음새가 풍성하고 여유만만한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이른바 예기성마저도 극소화될 수도 있는 게 수필이라는 글의 텍스트성이다. 이것들이 모두 형식의 탄력성이라는 개념에 포괄될 수 있다. 그것은 산만이나 해이함과는 다르다. 심리적 여유와 관용이 인품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좀 과장스럽게 말하면 수필은 그때그때 씔 적마다 붓 끝에서 구성된다고 말해도 좋다. 다른 텍스트처럼 범 장르적인 추상도 높은 단일하거나 단일한 것에 가까운 규범 형식을 수필에서는 예상하기 어렵다. 쓰는 것이 곧 구성하는 일이라는 말에 특별히 유념해 두고 싶다. 미리 나 있는 길을 따라가는 걸음이 아니고, 걸어감으로써 비로소 길을 여는 걸음과 같은 속성을 수필은 갖추고 있다.

우리 수필이 이 같은 속성으로 해서 평론과 비교적 쉽게 가름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대체로 정격을 갖추지 않는 에세이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필은 역시 수필대로 그 특이한 전통, 양식을 갖추고 독특한 독자 의식에 작용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일상적 체험을 정리, 재구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향해 그 의미를 묻고 캐고 하는 한국의 수필은 삶의 재확인이라는 면모를 갖추고 있다.

삶의 혼돈과 불안과 무의미를 그때그때 현장에서 기동성 높게 넘어서기 위한 노력이 곧 수필 쓰는 일이다. 삶과 세계를 재조직하고 인식의 유대를 정착케 하는 일이다. 삶의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언어가 곧 수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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