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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5

무영탑

by 자한형 2022.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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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탑(無影塔)-이 종 화(李 鍾 和)

게임이 시작되었다, 잠시 숨을 죽이고. 이내 패()가 섞였다. 보여주는 패가 먼저 놓이고, 벌거벗은 패는 시선만 현혹했다. 꽁꽁 감춰둔 척 반만 보이는 거짓 패와 끝까지 빗장을 잠근 진짜 패, 감췄다 슬며시 흘린 패와 흘리려다 짐짓 거둬들이는 패까지, 겁 없는 패싸움에 판돈은 점점 커져만 갔다. 말해줄 듯 아니할 듯, 보일 듯 말 듯, 이 야릇한 장난에 취해 군중은 모여들었다. 그러다 한쪽이 패를 들키면 순식간에 승부가 났다.

일터는 일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일만 하게 두질 않았다. 호사가(好事家)들은 걸핏하면 판을 깔고, 꾼들을 불러 모아 게임을 주선했다. 게임은 일이 되고 일은 게임처럼 변해갔다. 일과 게임의 경계가 모호해지면, 정치가 시작되었다. 권력자들은 호사가들을 곁에 두고 저마다 라인을 만들어 세()를 불렸다. 비선(秘線)조직은 숨겨둔 패, 공식 조직은 보여주는 패. 이 두 종류만 가지고도, 권력은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군중을 쥐락펴락할 수 있었다.

판돈이 커지면, 사람을 패로 쓰기도 한다. 패는 누군가의 패가 되고, 그 누군가는 다시 자신이 쥔 패의 패가 되어준다. 그렇게 패를 패로 돌려막으며 패와 패가 서로의 방패가 되면 패들은 새로운 팻감을 찾아 나섰다. 비대해진 게임판이 패의 놀이터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모여든 패들은 힘을 합쳐 권력이란 피라미드를 완성하고, 왕조를 열었다. 왕패는 피라미드의 정점에 올라 게임을 지휘했다.

패를 가져도 함부로 게임에 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누구보다 하루하루 충실히 보내는 사람, 호사가의 기교가 성실한 사람들의 업적을 지배해서는 아니 된다는 소신을 가진 사람, 일터에서는 일을 해야 하고 게임은 진정 풀리지 않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어야 함을 아는 사람, 살기 좋은 세상은 진심을 다해 경영할 때 비로소 만들 수 있음을 믿는 사람, 가진 패를 정의롭고 따뜻이 쓸 줄 알고, 무엇보다 떠날 땐 가진 패 전부를 내려놓고 홀연히 돌아설 수 있는 사람은, 질척거리는 이 게임판에 세력 없는 한 그루 무영탑(無影塔)을 전설처럼 남길 것이다.

패의 일터에서 팻놀이를 아니 한다는 건 아주 위험한 모험일 것이다. 기꺼이 권력의 패가 되어주거나 비밀스럽게 나만의 패를 만들어두지 않으면 게임에서 아웃되는 건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손도 내밀 때 잡아야 하는 법, 타이밍을 놓치면 행운은 도리어 독이 되었다. 이상(理想)으로 살 수 없는 세상. 머뭇거리다 놓친 행운이 얼마나 많으며, 엉겁결에 잡은 기회도 결국 독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게 또 얼마이던가. 남이 주는 사과는 아예 먹질 말아야 하는지. 분명한 건, 내가 거둔 수확은 우리 모두가 한 일로, 권력이 저지른 실책에 대해선 눈과 귀를 가리는 게, 왕패를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의 규칙이었다.

왕패가 그토록 꿈꾸던 만월(滿月)도 한 달에 하루뿐. 정작 보름달이 뜨면 달이 기울어질 내일을 걱정했고, 비가 내리는 보름엔 달조차도 볼 수 없었다. 바람이 지나가면 세상은 고요했다. 영원한 건 없었다. 아득히 보이던 권력의 첨탑도. 패 한 장 붙이지 않은 저 무영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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