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촌지 –전중관(화가)
사전적 의미로 촌지(寸志)는 촌심(寸心)으로도 쓰이며 ‘속으로 품은 작은 뜻’이라는 의미이나, 실생활에서는 ‘마음이 담긴 작은 선물’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현대사회에 와서 ‘정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주는 돈’으로 변질되면서, 뇌물 형식의 대가를 바라는 부정한 돈으로, 흔히 선생이나 기자 등 에게 주는 것을 이르는 것으로 본래의 뜻과는 다르게 변질된 대표적인 용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용어 자체는 좋은 의미의 말이었으나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오용(誤用)해버린 것이다.
군 입대 전 나는 3년 정도 산골 면소재지의 조그만 초등학교 교사로 봉직한 적이 있다. 부임 첫해에 5학년 1반을 담임하였다. 눈이 초롱초롱한 63명의 남녀 아동들과 1년간 전임으로 국어, 사회, 산수, 자연, 도덕, 음악, 미술, 체육, 실과 등 전 과목을 슈퍼맨(Superman)처럼 혼자서 다 가르치고, 방과 후에는 산과 들, 개울로 다니며 붕어, 피라미, 다슬기, 우렁이, 개구리 잡기와 곤충채집, 들꽃놀이, 밤 구워먹기, 옥수수, 수수, 감자, 고구마 삶아먹기, 밭에서 콩이삭 주워 두부와 바꿔먹기, 사방치기, 고상놀이, 고누두기, 그림 그리기, 글짓기 들을 하고 놀았다. 선생님이라기보다 나도 애들 구성원 중의 한 명이었으며 스스럼없이 손을 잡고 놀았다. 알루미늄 도시락 뚜껑에 개구리 뒷다리를 구워 먹은 것도 처음이었으며, 닭고기보다도 더 맛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한 시간당 삼, 사만 원씩 수강료를 받고 하는 ‘방과후학교’가 아니라, 밤새 철판에 철필로 원지를 긁어 갱지에 프린트하여 배부한 특별교재로 등불을 켜놓고 밤늦게까지 배우기를 원하는 학생에게는 무료로 가르쳤다. 매일 밤 남포등<lamp>의 얇은 유리로 된 등피를 미리 닦아놓아야 했고, 등불의 매캐한 연기로 아이들과 내 코 속은 새카맣게 되었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그때는 열정이 있었다.
인사기록카드의 특기와 취미 란에 모두 ‘미술(그림 그리기)’라고 기록해 놓은 덕택에 미술과 공작(工作)연구학교인 본교 교장선생님께서 교육청에 요청하여 나를 데려오신 탓에 부임 초부터 미술과 연구발표 담당자로 일약(一躍) 픽업되어 맹활약을 하게 되었다. 물론 미술부 활동도 내가 도맡아했다.
나는 부임 초에 나로서는 일생동안 잊지 못할 ‘촌지(寸志)’를 받아보게 되었다. 그 일화를 여기에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1968.9.1.자로 이 학교에 병아리 교사로 부임했으니, 43년 전의 일이다.
청명한 가을 어느 날, 그날은 5일장이 열리는 장날이었으므로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 모두 면소재지 근처의 장터에 가시느라 축제같이 제법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산골 마을인지라 장(場)이래야 정육점, 어물전, 만물상회식의 철물점과 유기전, 의류점과 양장점, 미용실, 항상 맛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죽과 국밥, 순대, 막걸리를 파는 밥집이 고작이었고 대부분의 매매물(賣買物)은 지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밤<栗>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역에 밤나무가 많아 밤이 생산되는 10월 중순부터 월말까지는 한시적으로 ‘밤장’이 열렸다. 대부분 이 ‘밤장’에서 밤을 팔아 일 년 동안의 가용을 쓰고 자녀의 학비로 충당했다
장날은 학부모님들이 학교를 찾는 일이 많았다. 평시에는 농사일에 바빠 학교를 찾지 못하다가 장날에 맞춰 그동안 미뤄왔던 자녀문제를 상담하려 하기 때문이다.
2교시를 막 시작 할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조용했던 목조교실의 앞문이 뜻하지 않게 ‘드르륵’ 열렸다. 나는 수업을 시작하려다 말고 출입문 쪽을 돌아보았다. 5mm강철재가 두 줄로 깔린 문틀의 레일(rail)위로 놋쇠 도르래가 장착된 낡고 뻑뻑하여 잘 열리지 않은 문이어서, 그 문소리는 매우 컸다. 모두들 ‘무슨 일인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았다.
“나 봉순이 할머니우! 봉순아 도시락은 왜 안가지고 갔냐? 여기 도시락 갖구 왔다.”
출입구 문틀에 몸을 기댄 채 보자기에 싼 도시락을 손에 높이 들고 흔들어댔다. 봉순이는 할머니의 그러한 무례한 행동이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책상위에 엎드려있는 게 아닌가! 봉순이 할머니는 귀가 어두운지 목소리조차 컸다.
나는 봉순이의 심정을 생각하여 보자기를 얼른 받아든 후, 할머니를 복도로 모시고 나가
“봉순이 할머님, 거동이 불편하셔서 그냥오시기도 힘드실 텐데 손녀 도시락까지 챙겨 오시느라고 애 많이 쓰셨어요. 봉순이가 매우 감사해하는 눈치던데요.”하며 봉순이 할머니를 부축하여 복도 입구까지 모셔다 드리고, 봉순이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도시락을 건넸다. 봉순이는 5학년 학생이라지만 여느 아이보다 한 살 늦게 입학한 관계로 몸집이 크고 어른스러웠으며 공부도 여학생 중에서 가장 잘하는 나무랄 데 없이 예쁜 여자 아이였다. 봉순이는 얼굴을 책상에 묻은 채 손만 내밀어 도시락을 받았다. 어려운 시절이어서 도시락이래야 신문지로 돌돌 말아서 싼 고구마 두덩이가 전부였다. 봉순이는 평상시 고구마 도시락을 학교에 가져오는 게 창피한 모양이어서, 오늘도 가져가지 않은 고구마 도시락을 마침 장보러 오신 할머니가 가져온 것이었다.
그러구러 수업은 계속되어 4교시 중반에 들어섰다.
다시 또 앞 출입문이 ‘드르륵’ 열렸다. 장을 보고 다시 들르신 봉순이 할머니였다. 하얀 외씨버선에 흰 고무신을 신은 채로 교실에 다짜고짜로 들어오시더니, 속치마 속에서 신문지에 싼 물건을 꺼내 내가 서있던 교탁 안 중간 선반에 들이 밀어놓고 “선생님 선물이우. 잘 잡수시우.” 하시며 뒤도 안돌아보고 나가시는 거였다.
나오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겨우 출입문까지만 바래다드리고 돌아와 중단된 수업을 다시 시작하였다.
그러고서 10분이 채 못 된 4교시의 끝 무렵이었다.
또 앞 출입문이 ‘드르륵’ 열리는 것이 아닌가!
“아이고 선물이 바뀌었수. 엣소, 진짜는 이것이유. 좀 전 것은 나 도로 주시소!”하시며 교탁 속에 얼른 집어넣는 것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10여분 전에 나에게 주셨던 물건을 집어 전해드렸다. 할머니는 신문지 꾸러미를 잘못 바꿔 넣은 일이 무안 하셨던지 치마 끝으로 얼굴을 감추며, 할머니 특유의 뒤뚱 걸음으로 나가시는 것이었다. 나는 신문지 꾸러미를 들쳐보지 않았지만 바꿔치기한 물건이 무엇인지 만져본 감촉으로 이미 감지되었다. 처음 나에게 전달한 물건은 당신이 피우실 가장 값싼 파랑새 담배 두 갑이었고, 다음에 바꿔주신 물건은 손녀의 담임선생님께 선물할 고급 담배로 금박글씨가 찍혀진 ‘거북선’ 두 갑이었다. 일이 잘못되느라 서로 뒤바뀌어 그런 해프닝(happening)이 벌어진 것이었다.
나는 순간 코끝이 찡하고 가슴이 먹먹하게 아파왔다.
하나는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손녀의 담임선생님에게 무언가 고마운 표시를 하고픈 할머니의 속 깊은 마음에 감복한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도시락 문제만으로도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던 봉순이가 할머니의 담배 선물 해프닝으로 얼마나 많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것인가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내성적이고 부끄럼 많은 봉순이는 집에 돌아가 할머니에게 원망스런 타박을 많이 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점심시간에 봉순이를 데리고 노랗게 물들어있는 플라다너스나무 아래 앉아서 봉순이 할머니가 가져온 고구마 도시락을 나누어 먹었다. 나누어 먹었다기 보다 선생님이 오늘 도시락을 가져오지 않았다 핑계 대고, 봉순이 도시락 절반을 빼앗아 먹은 셈이었다. 봉순이는 제 점심을 절반이나 빼앗기면서도 즐거운 눈치였다. 그리고 나는 봉순이가 재잘대는 장래 희망에 대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었다.
그런 뒤 4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때 내가 열정을 다하여 가르쳤던 학생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봉순이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50대 초반의 엄마가 된 봉순이는 자신의 아이와 손잡고 노랗게 물든 플라다너스나무 밑에 앉아 엄마의 어렸을 때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었다. 안보아도 눈에 선하다. 이 장면은 나에게 환각으로 떠올랐다. 아마도 모교의 플라다너스나무 밑이 아니고 도시 어느 아파트의 한쪽 결에 서있는 플라다너스나무 아래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그 추억의 학교도 댐건설공사 때문에 수몰지구가 되어있을 것이므로……
나는 산골 초등학교에서 순박한 학생들과 보낸 1년간을 항상 그리워하고 있다.
봉순이 할머니의 순박한 마음이 알알이 박힌 ‘거북선’ 담배 두 갑의 ‘아름다운 촌지(寸志)’의 추억을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선물로 가슴속에 잘 간직하고 있다.
------------
몇 년 전 학교에서 촌지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학년 초 가정방문을 중지시키고, ‘스승의 날’에는 촌지 때문에 선생님과 학생들을 학교에 나오지 못하게 하고 하루를 휴업하였다는 보도를 접하고, 가장 순수하여야할 교육공동체와 교직사회가 어찌 이 지경까지 가게 되었는지 한탄스러웠다.
학년 초 가정방문은 교사들이 학생들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꼭 실시해야할 중요한 교육행사다. 교육이 학교, 가정, 지역사회가 연계되어 삼위 일체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때, 가정과 학교의 긴밀한 관계는 필수적이어서 하루쯤 선생님들이 학생의 가정을 방문하여 학생들의 교육․생활환경을 파악하고 학부모와 학생들의 요구사항, 가정에 부탁할 점 등 자녀교육을 위한 의견교환의 장이며, 학급을 이제 막 맡은 교사로서는 시급하고 절실하게 필요한 교육활동이다. 물론 전학생을 대상으로 몇 일간에 일률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문제점은 있지만 그 정도의 단점은 가정방문의 효용 (效用)을 뛰어넘지는 못한다.
‘스승의 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애초에 스승의 날은 1963년 5월 26일. 청소년적십자중앙학생협의회가 매년 5월26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여 사은 행사를 했던 것이 시초였다. 그러던 것이 1966년에 와서 5월15일로 변경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초기에는 촌지가 끼어들 틈 없이, 옛 스승을 찾아뵙는다던지 병중에 있거나 어려운 스승을 위문한다든지 하는 순수한 의미로 시작되었다. 그 후 각 학교에서 스승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사제 간에 정을 두텁게 하는 다양한 행사를 갖는 좋은 의미의 날임에도, 요즈음 학부모들이 스승의 날을 기화로 촌지와 분에 넘치는 선물을 시작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 스승의 날의 좋은 뜻을 기릴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런 의미로 ‘스승의 날’의 최초 발원지인 충남 논산 강경고의 자정(自淨) 노력은 매우 좋은 사례다. 충남 논산 강경고 교사 42명은 2004.5.15. 스승의 날’을 맞아 ‘좋은스승되기운동위원회’를 발족, ‘좋은스승되기운동’을 전개하고 나섰다. 교사들이 이러한 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것은 공교육에 대한 불신과 일부교사의 촌지수수 등 갈수록 황폐화돼가는 교육현실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이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던 것이다.
나는 교사뿐만 아니라 학부모들도 이러한 자정운동에 적극 동참하여야한다고 생각한다. 교육환경이 이토록 황폐화 된 것은 일부 학부모의 책임도 크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학부모 80%이상이 촌지를 준 경험이 있다는 기사가 생각난다.
그 학부모들은 어떤 의미로 촌지를 건넸을까?
다음은 어느 학부모의 말이다. 새겨들어볼 필요가 있기에 여기에 줄여서 요지만 기록해 본다.
“학부모들부터 바뀌는 게 촌지 없는 세상이 될 듯합니다. 촌지 받고 내 아이한테 상장 하나 더 챙겨준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촌지라는 게 선생님이 원해서라기보다 부모들이 아이를 잘 봐달라고 보내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촌지는 필요 없다는 생각입니다. 아이가 장난이 심하거나 말썽을 자주 부린다면 담임선생님 찾아뵙고 인사하고 말씀도 잘 나누시고 하시면 될 것 같구요, 그렇지 않다면 준비물 잘 챙겨주시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면 아무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단, 스승의 날 만든 쿠키나, 학년 끝마치면서 감사의 표시는 예외로 치구요.”
“촌지는 결국 가져다주는 학부모 쪽이 더 잘못이 큽니다. 내 아이에게 좀 더 특혜를 주기를 바라는 것이죠. 내 아이에 대한 삐뚤어진 사랑이 결국은 사회에 더욱 큰 병폐를 만들고 사회악을 만드는 것이죠. 촌지를 건네면 철학이 흔들리는 교사의 경우 촌지 받고 해당 학생에게 상이라도 만들어주려고 하겠죠. 철학이 없는 교사는 먹고 땡이고 누가 더 안주나 킁킁댈 수도 있죠. 결국 이것은 우리 학부모가 만든다는 것, 촌지 줄 생각하지 말고 아이를 예의바르고 인성 바른 아이로 키우기에 최선을 다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학부모가 먼저 변해야 학교가 산다는 생각입니다.”
“부모가 이기적으로 되니 아이도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결코 학교나 선생님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학부모들도 많이 계신다. 자신을 경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요즘 선생님들 중에는 좋은 분들도 계시지만 대다수는 선생님이라는 느낌보단 그냥 직장인이랄까? 돈을 벌기위해 선생님이 됐다는 느낌? 딱 이 수준이죠.”
“아무리 다른 뜻이 없는 순수한 의미로 촌지를 주고받고 하여도 주변에서는 자연스럽게 보일리가 없습니다. 거의 '뇌물'이라고 받아들일 정도로 의미가 크게 확대되어버려서, 그냥 선생에게 돈이 직접적으로 공개적으로 들어가는 경우는 요즘 세상에는 거의 없습니다만, 아직까지도 내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많죠. 특히, 초딩 쪽이 무진장 심하지요. 또한, 은근히 원하는 선생도 정말 많습니다.”
“아니, 왜 신고를 안 하냐 했더니, 저 아이 엄마가 이러쿵저러쿵 했다고 선생님들 사이에서 소문나고, 생활기록부에 적히고 아이한테 피해 갈까봐 못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전학가도 그 소문이 따라 다닌다고 하면서, 저도 아이 학교 보내보면 그 심정 알거라고 하더군요.”
2006.10.13. ‘KBS 뉴스데스크’에서 윤효정 기자와 촌지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 중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박○○ (중학교 교사): 차라리 10만 원 이하라도 받지 않고 깨끗하게 학생들과 학부모들 앞으로 다가가는 게 더 올바르다고 생각하거든요.
기 자:교원단체들은 처벌 강화에 드러내놓고 반대하지는 않지만 처벌 강화만으로는 촌지를 몰아내기 어려울 것이라며 회의적인 반응입니다.
이○○ 대변인(전국교직원노동조합): 촌지라는 불법적인 형태가 아니고도 학교 운영에 참여하 수 있고, 교사와 신뢰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 마련과 함께 갈 때 실효성이 있다고 봅니다.
기 자:일부 학부모들은 현실적으로 교사의 촌지 요구를 입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촌지가 적발되더라도 대부분 경징계에 그칠 수밖에 없다며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어느 학교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전국적으로 공문서를 내려 보내 획일적인 행정조치를 취하는 교육행정당국의 태도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빈대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울 건가?
교육의 순기능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문제점만을 도려낼 수는 없는 것일까? 일회적이고 획일적 극약처방의 행정조치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개선할 수 있을지 시간을 갖고 지속적으로 깊이 연구해보아야 할 일이다. 교육이란 인간 대 인간의 일이다. 행정적 조치도 필요하지만, 국지적이거나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촌지(寸志)는 교직사회 전반에 있다기보다는 몇몇 교사들이 잘못 때문이다. 촌지가 문제가 된다면 학교에서 자정(自淨)의 노력을 할 수 있도록 인내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학교현장의 자율성을 키워주어야 한다. 일회성 행정적 단속이나 통제 등의 처리방법은 외적자극이 없어지면 다시 옛날로 회귀(回歸)한다는 게 가장 큰 결점이다. 그래서 ‘문제 발생→행정적 단속→시간이 갈수록 행정적 단속의 느슨해짐→슬그머니 동일한 문제의 재 대두→더 강력한 행정조치’ 식으로 악순환의 고리는 끊이지 않는다. 행정력은 현장의 자정의 노력이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뒤에서 지원해 주는 것으로 그치고 스스로 자정하도록 유도해야 자정의 자생력이 정착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촌지(寸志)’가 되살아나 순수하고 감동적인 교육세상(敎育世上)은 언제나 올까?

'현대수필5'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를 늙게 만드는 것 (0) | 2022.09.18 |
---|---|
우리 계레 모두가 기다리는 인물 (1) | 2022.09.18 |
반려견을 떠나보내며 (0) | 2022.09.18 |
고 (1) | 2022.09.18 |
지금은 비빔밥 시대 (1) | 2022.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