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시들면서도 노래한다 / 유경환
공기가 투명하여 원거리도 잘 보인다. 방금 소나기 지나간 듯 그렇게 맑게 보인다. 서양화 가운데 유화(油畵)가 가장 발달한 그 이유처럼, 선명한 색채로 다가오는 먼 곡식 밭 그리고 가까운 목초지 또 눈앞에까지 다가온 나무 울타리.. 산에 오른 것이 아니라, 바람에 불려 온 것 같은 느낌이다.
그 너머 노랑과 초록이 밑바탕 된 들판이, 언덕을 타고 끝없이 이어진다. 원근법(遠近法)이 뚜렷한 그림이다. 하느님은 이런 그림을 위해 얼마나 많은 초록 물감을 만들어 산허리마다 넘치게 쏟아부은 것일까. 하느님은 우리에게 안 보여도 좋으나, 풀 꽃 나무를 키워내는 하느님은 꼭 필요하다. 이 싱그러운 자연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하늘이 길게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아래쪽 골에 산기슭 마을이 보인다. 구름과도 함께 하는 산마을에는, 패인 곳마다 물웅덩이가 되어 거울처럼 햇살에 반짝인다. 내 어린 시절에 할머니는 날 위해 착한 일을 많이 하셨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좋은 풍광을 만날 수 있을 텐가.
지구가 둥글다는 걸 도무지 믿지 못하도록 하늘 떠받친 봉우리들이 우뚝 우뚝 전나무숲 기둥 틈새로 비껴 보인다. 가끔 길 잃은 산구름과 길에서 이마로 마주치게 된다. 오대산 산기운이 소리 없이 내리 산등 휘돌아 내리는 산길을 조심스레 적셔 준다.
정직한 아이들처럼 곧게 자란 전나무들은 목초지를 둘러친 울타리로 섰고, 갈색 지붕의 농가가 그 틈새로 보이기도 한다. 산에 쏟아지는 햇살을 높은 키로 가로채는 전나무들은, 우산처럼 키다리로 자라 저희들끼리 숲을 이루고 서서 수런수런 무슨 말을 나누고 있다. 낯선 사람이 지나고 있다고 경계하는 속삭임일까.
땅 위의 이해관계가 삶터 뒷골목 지붕 밑에 전깃줄 얽히듯 엇갈려, 그런 것에서 좀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 벼르다 나선 산행이다. 나서기를 잘한 것이다. 산길은 흘러내리다 엇갈려 여며진 곳으로 빠져나가고,, 비탈진 목초지엔 초록색이 흘러내려 마치 조용한 음악이 미끄럼을 타듯 보인다.
마침내, 한 산동네가 눈 아래 있다. 할 일 없어도 며칠 머물다 가고 싶어지는 그렇게 여유롭게 보이는 산동네다. 몇 집 안 되는데 네모진 창틀 앞에 꽃분이 가지런히 놓였다. 그림엽서 속의 그림 같은 집들. 납작한 너와지붕이 겨우 고개를 든 그런 농가이다. 누가 우릴 향해 ‘살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더 이야기할 것인가.
초록 목초지 사이로 이리저리 흙길이 드러난 그 흰 빛 그림자가 추상화로 아름답다. 기계로 목초 깎아낸 자국이 한없이 평화롭게 돋보인다. 뙤약볕 속에 진행되었을 그 힘든 노동이 지금쯤 향기 좋은 커피 한잔으로 풀리고 있겠지 싶다. 농사짓는 밀밭이나 보리밭보다 목초 기르는 초지가 더 자주 눈에 띈다. 세상이 어느새 이만큼 바뀐 것을 지금 보고 있다.
저 멀리 이른 단풍색으로 보이는 지붕들이 목초지 한 옆으로 비켜서 숨어 있다. 겨울엔 더 잘 보이겠지. 이런 앞지르는 생각도 해 보면서 그 곳이 내가 갈 곳인 양 바라본다. 사람은 풍경을 미리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좀 서글픈 능력이다. 잠시 생각해 봐야 느낌이오는, 그런 서글픔이긴 하지만……. ‘겨울엔 더 잘 보이겠지’라는, 엉뚱한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시원해진다.
하늘 도화지에, 반은 초록색 그리고 나머지는 온통 하느님 차지다. 사람이 차지한 것은 낮은 갈색 지붕뿐이다. 기슭마다 햇살 흘러내려 잠시 핀 곳엔 으레 그래야 하듯 작은 산마을이 햇볕에 깊이 담겨 있다. 산의 고요는 이런 산마을에 모여 와서 고즈넉이 쉬고 있고, 사람은 보이지 않아 빈집처럼 보인다. 너무 멀어서 안 보이는 것이겠지.
언제부터 이곳 오대산 산골짜기 뾰족당이 들어선 것일까. 나무십자가를 이마에 단 이은(ᄂ)자 집. 어디쯤에서 산정 가는 길 알리는 표지판이나 만날 것이라는 생각은 맞지 않은 생각일 뿐이다. 역사는 언제나 승리자의 역사로 기록된다더니, 세월도 바람 부는 쪽으로 흐르고, 그리고 자연은 승리자에게 무덤을 내주며 자비로워진다.
목초지 오래된 나무 울타리 안쪽으로 이름 모를 들꽃이 무더기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런 곳에 들꽃은 왜 피었을까 싶도록 아까운 무더기 들꽃. 꽃들은 시들면서도 노래한다. 그 앞에서 짐짓 내가 부끄러워진다.
아련히 바라보이는 곳에, 검은 포장길이 드러난다. 마침내 기름 넣는 주유소 가게가 보이자, 느리게 안도의 숨을 쉰다. 하산 길을 지름길로 찾아낸 것과 다름없다. 몸을 흔들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산의 모든 목숨들 숨결 따라 나도 몸에 밴 산 기운에 겨워하며 몸을 흔들어댄다. 짧은 리듬의 율동이 몸 안에 기쁨을 채워준다.
마음으로 유화 한 점을 그린 셈이다. 사진기가 발명되기 전 사람들은 나처럼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며 즐겼을 것이다. ‘한 쪽 문을 닫으면 다른 한쪽 문은 여신다.’는 하늘에 대한 옛말은 맞는 말이거니 싶다.
이것은 나의 오대산 종단기다. 야영(野營)에서 출발할 때, 어떻게 하면 저 별빛을 내 뺨에 닿게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별빛 대신 하느님 숨소리를 뺨으로 느끼며 하산한다. 땅에 붙어사는 벌레나 게의 눈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발을 땅에 붙이고 산다 하여도 높은 눈으로 내려다보면 삶은 훨씬 고맙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