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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낯설음 저너머

인생의 낙과 고

by 자한형 2023.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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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낙과 고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는 세가지의 즐거움과 고통이 있다고 한다. 그것을 일러 인생의 락과 고라고 한다. 삼락을 얘기한 사람은 넷이 있었다. 공자. 맹자. 신흠, 김정희이다. 먼저 공자의 삼락을 살펴보자. 성이란 마을에 영계기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사슴 털가죽을 두르고 노끈을 허리띠에 두른 허술한 사람으로 거문고를 타면서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공자가 그곳을 지나며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엇이 그렇게 즐겁고 기쁘게 합니까? 그러자 영계기가 이렇게 얘기를 했다고 한다. “ 하늘의 만물가운데 나는 사람으로 태어났고 둘째 그 중에서도 남자로 태어난 것이 둘째의 즐거움이고 셋째의 즐거움은 마흔까지 살아온 것이 그 셋째요 라고 얘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논어에서는 첫장 학이편에 그렇게 얘기하고 있다. 첫째는 때때로 배우고 익히면 얼마나 기쁘지 아니한가. 둘째로 멀리 있는 친구가 찾아오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셋째로 남이 자기의 뜻을 알아주지 아니해도 또한 화내지 아니하면 군자답지 아니한가 라고 설파하고 있다. 공자의 군자다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 두 번째 조선의 유학자 신흠이 얘기한 인생 삼락이 있었다. 그는 삼대 유학자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첫째 마음을 닫으면 마음에 드는 책을 읽고 둘째 문을 열면 마음에 있는 손을 맞으며 셋째 문을 나서면 산천경계를 찾아 가는 것이 삼락이라고 했단다.

다음으로 추사 김정희의 삼락이 회자했다. 첫째는 독()이다. 마음에 드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항상 배우는 자세로 선비정신을 곧추세우는 것이다. 세한도라는 국보의 그림이 그의 제자가 책을 한참 보내 준 것에 대한 답례로 보내준 것임을 아는 이들은 그의 책에 대한 애정을 절실하게 느껴볼 수 있으리라. 일설에 의하면 벼루를 10개를 손상시켰다고 한다. 얼마나 열심이고 정성으로 글을 쓰셨는지를 느낄 수 있다. 둘째로 색()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변함없이 애정을 나누는 것이다. 여인일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같이 정담을 나누는 이 일수도 있으리라. 셋째는 주()). 술이라는 얘기다. 벗을 청하여 술잔을 나누며 세상사를 얘기하고 가무와 풍류를 즐기는 것이다. 다음으로 가장 유명한 맹자의 인생삼락이다.

첫째는 부모형제 무고한 것이 일락이다. 둘째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는 것이다. 명경지수(明鏡止水)라고 했다. 셋째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라고 했다. 요즘시대를 대표하는 이 한사람 조00씨의 오락을 한번 살펴보자.

첫 번째의 낙은 축령산의 편백나무 숲을 산책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전남 장성의 자신이 조성해놓은 전원주택부근의 숲을 얘기하는 것이다. 둘째 장작을 지펴놓은 뜨끈뜨끈한 온돌방에서 등짝을 대고 지지는 일이다. 예전 얘기대로 등따습고 배부르면 장땡이라는 것이 일면이랄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차를 마시는 것이란다. 침향같은 차를 얘기하는 듯하다. 뼈속 깊숙히 그 맛을 즐겨볼 수 있는 부분이리라. 넷째는 지인들과 같이 맛집을 찾아다니는 일이라고한다. 그것은 별다르게 부연설명이 필요치 않을 듯하다. 다섯째로 나오는 얘기는 고전을 읽는 것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얘기되는 부분이 삼고라는 것이 있다. 이는 인생의 아픔이요 고통이라는 것이다. 첫째는 초년 출세다. 먼저 어린 나이에 급하게 출세를 하다보면 세상을 깔보고 안하무인이 되다보면 조락하게 된다는 경고를 하는 것이다. 둘째는 중년상처라는 것이 있다. 한창 애들의 뒷바라지를 해야하고 그들을 챙겨야하는 시기에 덜컥 상처를 하는 것이다. 이는 이루말할 수 업슨 비애이고 아픔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년 빈한이다. 다 늙은 나이에 땡전 한푼없이 나앉는 것이다. 이것은 생을 참으로 고달프게 하는 첩경인 것이다. 결코 이러한 삼고에 시달려서는 평온한 인생살이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고 어떤 즐거움과 낙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각자에게 되물어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단조롭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 뭔가의 즐거울 꺼리로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을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해나가면서 생을 영위하고 구가해 가야한다는 것이다. 일례를 들면 그런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거시기에 미치고 늙은 시절에는 손자에 미친다고 한다. 얼마전에 한 지인을 만났다. 그는 이제 손자 손녀를 다 본 상황이었다. 외손자. 친손자를 다본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다고 했다. 친손자는 오히려 예상과는 달리 더없이 대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들 때문이 아니라 며느리의 까칠한 성격 탓이었다. 아버님의 당뇨가 문제되고 청결이 문제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한번 안아보고 뽀뽀한번 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옛 노래가사 중에 그런 것이 있었다. 내 평생 소원이 손자 손잡고 금강산 구경이라는 것이 회자됐었다. 그런데 요즘 세태에서는 쉽지 않을 듯했다. 모든 것에서 조신해야할 할아버지께서 지켜야할 철칙을 지키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손자를 데리고 외국여행이란 것은 꿈도 못꿀 일이 되어져 버렸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손자의 털끝하나라고 다칠세라 호호하며 지극정성 끔찍이도 신주단주 모시듯이 그렇게 감지덕지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의 세태인 듯했다.

 

 할아버지는 손자가 곰팡이 피는 집에 사는 꼴을 못본다는 것으로 해서 또는 급발진 하는 차량을 계속타고 다니게 할 수 없다는 것에서 천금같은 노후자금 45백만원을 두말없이 건네주고 말았다는 것에서 참으로 신통해할 뿐이었다. 손자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하고 해주야 한다는 것을 목표로 가지게 될 때에는 결코 삶을 잃어버지지 않고 한낱의 실날 끈이라도 놓지를 않는다는 부분이다. 모든 만사를 제쳐두고 손자에게 뭔일이 생기면 달려가야 하는 것이 오늘날의 세태료 변해져 버렸다. 세상사 낙이 손자의 밝은 모습을 보는 것이고 성장해가는 것을 자랑스러워 해야하는 것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결국 얼마가 될지 또는 할지 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선영봉사라는 것에 의무지워져 있다는 것에서 실날 같은 기대와 희망을 품고 애지중지해서 보살펴가는 것인데 과연 그러한 것이 얼마만큼 효험이 있을지는 모를 일이리라. 자신의 분신으로 여겨지는 실물이 존재하고 있고 그의 실체를 증명시켜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에는 새로운 삶의 활력이 용솟음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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