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의견을 즐겨라/김형철(공감신문칼럼)
미국에서 외국에 대사를 파견할 때는 부대사 한 명을 따라 붙인다. 그 부대사가 하는 일은 간단하다. 대사가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 결재할 때, 반드시 반대의견 3가지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면 대사가 그 반대 의견을 검토한다. "흐음, 1 번은 이렇게 처리하면 되고, 2번은 저렇게 처리하면 되고, 3번은 어어...이건 문제가 심각하군! 3번에 대한 보완대책을 가져 오게나!" 쓴소리를 즐겨라. 쓴 소리가 쓴 이유를 아는가?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쓴 거다. 얼마 전에 "인문학자가 본 리더의 지혜"라는 주제로 특강을 나갔다. 한 청중이 손을 들더니 질문을 했다. "교수님, 저희가 리더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위에 모시고 있는 상사도 있습니다. 팔로우십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 주시죠." 머리를 한 대 맞은 충격이 왔다. 그러나 바로 정신을 차리고 이렇게 답했다. "쓴 소리를 하라. 자신의 직을 걸고. 단 주의해야 할 점은 예의를 공손하게 갖추고 분위기를 잘 살피고 난 후에."
1980년 대 미국의 한 IT기업에서 있었던 일이다. 일본 기업들의 추격이 엄청 거세던 시절이다. 한 임원이 사장실을 노크한다. "사장님 우리 회사가 위기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작년 영업실적이 바닥을 친 거 말인가? 나도 보고를 받아서 알고 있네" "사장님 우리 회사 위기의 진짜 원인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게 뭔데?" "아직도 우리 회사 엔지니어들이 일본 엔지니어들보다 우수하다고 착각하는 데 있습니다." "자네는 무슨 대책이라도 있나?" "만약에 이사회가 현재의 경영진을 전격교체한다면, 새로 들어온 팀들은 우리회사를 어떻게 경영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하던 것을 싹 다 바꿔버리겠지" "사장님 우리가 그것을 지금 하면 안됩니까?" 그로부터 1년 뒤 그 회사는 일본 기업의 추격을 뒤로 뿌리친 채 고공행진을 계속한다. 그로부터 6개월 뒤 당시의 사장은 회장으로 취임하고, 그 쓴 소리를 했던 임원은 사장에 취임한다. 인텔의 앤디 그로브 사장과 고든 무어 회장 간에 있었던 대화다. 리더의 그릇의 크기를 자신보다 똑똑한 사람을 몇 명 밑에 두고 있는가를 보면 안다. 마키아벨리가 한 말이다.
비행기가 운항하는 중 가장 위험한 순간이 언제인가? 다 알다시피 착륙할 때이다. 땅과 가까워질수록 땅에 추락할 일이 더 많아지는 거다. 목적지에 다 왔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거다. 조직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언제 가장 위험한가? 만장일치가 일어난 경우이다. 만장일치는 마치 보트를 타고 가다가 모든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서 한 편으로 동시에 거서 서있는 것과 같다. 보트는 뒤집어질 위험에 처하는 거다. 누군가가 반대할 때, 그리고 그 의견이 존중되어질 때 그 조직은 건강함을 유지한다. 알고 지내는 CEO 한 분이 계신다. 그는 늘 자랑한다. "나는 직원들을 절대로 윽박지르지 않는다. 모든 일을 진행할 때는 설득하는 편이죠." 아마도 그 부하들에게 가서 인터뷰해 보면 이런 말이 나올 것이다. "아 회장님이 저희를 설득하려고 하면, 바로 설득당했다고 자백합니다. 안 그러면, 항복할 때가지 저희를 고문할 테니까요." 이렇게 만장일치가 나오는 거다. 그러면 도대체 리더는 어쩌란 말인가? 먼저 말하지 말라. 그냥 남이 하는 말을 참을성있게 잘 듣고, 판단만 내리면 된다. 이게 無爲가 아닐까.
리더가 앞장서서 챙기는 일은 반드시 실패한다. 왜? 아무도 나서서 쓴 소리를 못하기 때문이다. 배가 산으로 갈 정도로 나서는 사람이 많은 것을 혼돈으로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이 많다는 증거로 생각하라. 의견을 조율하려고 하지 말라. 그냥 그 혼돈의 상태를 일정 기간 내버려둬라. "99명이 찬성하더라도 1명의 반대의견은 반드시 들려져야 한다."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아트 밀이 한 말이다. 밀의 논거는 이렇다. 만약에 한 명의 의견이 옳은 데 그 의견을 묵살하면, 우리는 진리를 알게 될 기회를 영원히 놓친다. 만약 그 의견이 틀린 것으로 드러나면, 99명의 의견이 옳았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티벳에서 승려들을 양성할 때 쓰는 방법이 하나 있다. 두 명의 승려들을 짝을 지어서 하루에 10시간씩 서로 대화하도록 한다. 입에 단 내가 나도록 훈련시킨다. 그것도 아주 저비용으로 말이다. 규칙도 아주 간단하다. "말을 이어나가라." A가 말한 것을 B가 듣고 나서 반박한다. B가 한 말을 듣고 A가 반박한다. 대화인지 토론인지 모를 그 세션이 끝나고 나면 뭔가 남기도 하고 비워지기도 한다. 반대파의 말에서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발견하라.
여의도에 가 보면 나하고 생각이 똑같은 사람하고만 맨날 몰려 다니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야 편하겠지. 마음 놓고 적을 욕해도 되고, 뒷탈날 일도 없겠지. 하지만 정작 상대방을 만났을 때는 적의 논리 앞에서 쩔쩔 맨다. 논리가 딸리니까 괜히 화만 버럭 낸다. 상대방을 이기려면 정작 자체 내에서 얼굴 붉혀가면 토론한 쪽이다. 상대방에게 얼굴을 붉힌다는 것은 제 삼자가 볼 때 패배를 자인하는 것이다.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은 열심히 찾아라. 그 사람이 당신 조직을 구해 줄 것이다.
사막에서 물을 마실 것인가?
반쯤 찬 물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어떻게 반응할까? 어떤 사람은 컵에 물이 반밖에 없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반이나 남아 있다고 말한다. 전자는 비관주의자이고 후자는 낙관주의자다. 여러분은 어느 쪽 입장을 취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과연 인생을 살아가는 데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이 말이 처한 문맥을 먼저 보자. 한 사람이 사막을 건너고 있었다. 한참을 가다가 목이 말라서 가져온 물통을 열어 보았다. 물이 반 정도 들어 있다. 자, 출발할 때 분명히 물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지금 반이 남아 있다. 한 번도 마시지 않았고 지금 처음 열어 본 것인데 이런 상태다. 왜 그랬을까? 자세히 보니 물통의 입구 부분이 살짝 깨져서 그쪽으로 물이 샌 것 같다.
자, 이제 당신은 "어, 물이 이제 반밖에 안 남았네!"라고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아, 아직도 반이나 남았네!"라고 생각할 것인가?
어떻게 이 사건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느긋해지기도 하고, 초조해지기도 할 것이다. 긍정심리학자들의 권고에 따라서 낙관주의적 관점을 취하기로 하자. 사실 초조한 상태에서는 그릇된 결정을 내릴 확률이 엄청 높기 때문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가지고 오는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여전히 남는 문제는 이제 "그 물을 마실 것인가? 안 마실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우리는 그 결정을 내리는 데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가.
아메리카를 처음 발견한 유럽인은 콜럼버스다. 원래 인도로 가는 바닷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아랍이 인도로 가는 육로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인도에 가서 금은보화와 향료를 발견하기만 하면 대박이 터진다. 문제는 아무도 스폰서를 서지 않는다는 거다. 결국 19년 만에 스페인 여왕의 투자 결정으로 항해가 가능해진다. 출항한지 한 달이 넘도록 나온다던 육지는 보이지 않는다. 초조해진 선원들이 콜럼버스를 갑판 위에 있는 돛대에 묶는다. 선상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지금 당장 배를 항구로 돌려라. 그렇지 않으면 널 바로 죽이겠다." 목에 칼을 들이대고 협박한다.
"이틀만 다오. 그래도 육지가 나타나지 않으면 돌아간다." 이 한 마디에 풀려난다. 그러고는 선창 밑에 있는 함장실로 돌아온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콜럼버스는 기도하면서 말한다. "나도 한 번도 안 가본 길인데…" 당시 많은 사람은 지구가 평평하고, 그래서 바다 끝에 가면 커다란 폭포로 배가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처음 주장한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믿고 처음 실행에 옮긴 사람이 콜럼버스다. 선장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출항을 하기는 했지만, 가도 가도 육지가 나타나지 않자 초조해진 선원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콜럼버스는 자신도 처음 가는 길을 설득해야 했다. 플라톤이 말한 철인왕처럼. 이틀 뒤 기적처럼 육지가 나타난다.
영화 '왕의 남자'를 보면 광대들이 외줄 타는 장면이 나온다. 줄 위에서 부채 하나에 의지한 채 앞뒤로 왔다 갔다 한다. 어려서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고서야 사람들 앞에 설 수 있다. 어설프게 하다가는 땅으로 고꾸라지기 일쑤다. 유튜브 같은 볼거리가 제대로 없던 시절, 장터에서 벌어지는 외줄 타기 묘기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을 것이 분명하다. 아무런 훈련도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외줄을 타보라는 제안을 받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가령 높이가 약 1미터 정도 되고 길이가 한 5미터 정도 되는 외줄을 타보라는 얘기다. 조금 호기심 있고 배짱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 도전해 볼 만하다. 줄 위에서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설마 죽기야 하겠는가? 기껏해야 다리가 좀 삐거나, 어깨가 좀 다치거나 할 거다. 운 좋으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또 도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100미터 상공에서 5미터 외줄을 탈 것을 제안받는다면 수락할 것인가? 아마도 웬만큼 배짱이 큰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런 차이가 나오는 것일까? 똑같은 5미터 외줄이라도 100미터 높이에서는 한 번의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 삐끗하면 죽음이다. 자기 몸길이의 몇 배나 긴 장대를 손에 들고 수백 미터 높이의 상공에서 외줄 타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낮은 높이에서는 부채면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높은 곳에서는 10미터 정도의 긴 장대가 반드시 필요하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장대가 아니라 장대 할아버지를 가지고 건너라고 하더라도 거절할 것이다. 심지어 등에 끈을 달아 외줄에 연결해두고 만일의 추락 시 대롱대롱 매달릴 수 있게 해준다 하더라도, 100미터 높이에서는 절대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 오금이 저려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할 것이다. 건너편 빌딩에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에 처해있다고 가정하자. 당신은 이제 100미터 높이에서 그 5미터 외줄을 탈 리스크를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지켜만 볼 것인가.
지구상에서 제일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다. 그 산을 정복하기를 평생 꿈꾸어 온 사람이 있었다. 그저 자나 깨나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하는 것이 인생 프로젝트다. 보통 사람은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트래킹 코스도 걷기 힘들어한다. 고산병도 극복해야 한다. 당연히 체력도 단련해야 한다. 도대체 이런 곳에 왜 가려고 하는지는 묻지 않는 것이 좋다. 거기에 산이 있어서 간다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저 한 번 필이 꽂히면 끝까지 해내고 말아야지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다. 다만 그 목표가 얼마나 험악한 가에 따라 달라지기는 한다. 자, 드디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출발한다. 순조롭게 에베레스트를 향해서 올라간다. 이제 정상까지 불과 100미터 남았다. 그런데 갑자기 기상이 악화하기 시작한다. 앞이 보였다 안 보였다를 반복한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지금 그 정상을 올라가기로 결정한다면 성공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정상에 오르고 난 뒤다. 사진이야 안 찍는다고 하더라도, 과연 무사히 베이스캠프까지 돌아갈 수 있을까. 이것이 더 큰 문제다. 정상에 오를 경우 무사히 생환할 확률은 겨우 20퍼센트에 불과하다. 정상을 포기하고 내려갈 경우 생존에는 거의 문제가 없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추정에 불과하지만, 나름대로 다 과학적 분석과 통계에 기초한 판단들이다. 여러분은 여기서 정상 정복을 강행하겠는가? 아니면 눈물을 머금고 포기할 것인가? 지난 6개월 동안 훈련하고 또 훈련했던 고난의 시절이 생각날 것이다. 그리고 여기 한 번 오기 위해서 엄청난 시간과 노력 그리고 자금을 사용했던 것이 한 편의 영화처럼 눈앞에서 지나갈 것이다. 그럼에도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어느 것이 진정으로 용기 있는 결정일까?
이제 사막에서 물 마시는 문제로 돌아 오자. 물통에 물이 반밖에 없다고 생각하든 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든 물을 마실 것인지 말지는 결정해야 한다. 반밖에 없다고 비관적으로 생각한다고 절대 안 마시는 것도 아니고, 반이나 남았다고 낙관적으로 생각한다고 무조건 마시는 것도 아니다. 사막의 절반을 건너 온 이 시점에서 지금 물을 조금이라도 마시는 것이 더 나은 결정인지, 더 험악한 상황을 대비해서 그나마도 아끼는 것이 더 나은 결정인지는 세 가지 요소에 기초해서 결정해야 한다. 첫째, 사막을 횡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절박한 목표인지를 자신에게 되물어야 한다. 절박한 것이 아니면 되돌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둘째, 지금 물을 마시는 것이 사막에서 버티는 데 더 도움이 되는지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셋째, 다음에 다시 이 사막 횡단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여러분은 지금 인생의 어떤 시점에 와있는가? 반을 지났는가? 아니면 아직 사막을 건너지도 않은 상태인가? 거의 다 지나가고 있는가? 아니면 막 시작한 상태인가? 어떤 경우에도 분명한 것은 절대 초조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버티는 것이다. 버티면서 내공을 쌓고 있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반드시 온다. 포르투나(행운의 여신)를 거칠게 낚아채라. 그러려면 비루투(내공)를 쌓아라. 마키아벨리의 말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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