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선진국이었던 이유2 (2/2)
4. 그 밖의 일본 민주주의의 모양 ; 삼권분립·언론·선거
일본은 최고권자에 대한 탄핵 제도가 없다. 한국이나 미국과 같은 대통령제의 경우, 국민들은 선거결과를 인정하고 대통령은 주어진 절대 기간 동안 강한 권한과 동시에 책임이 따른다. 책임정치의 대표적인 장치가 탄핵이다. 주어진 절대 기간 동안에 대통령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 하면 탄핵을 통해 물러나게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천황도, 총리도 탄핵될 수 없다. 헌법재판관에게만 탄핵제도가 적용된다. 총리가 스스로 물러날 수는 있어도 국민들을 대표하는 의회에 의해 총리를 물러나게 만들 수 있는 별도의 장치가 민주주의 시스템 안에 구축되어 있지 않다.
민주주의의 기본원리 중 하나는 삼권분립이다. 그런데 총리에 대한 탄핵이 없는 일본은 입법부와 사법부가 행정부를 견제할 장치가 마땅치 않다. 한편, 행정부는 의회 해산을 통해 입법부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있다. 의회 다수당의 총수가 행정부의 수반이 되는 원리를 가진 의원내각제의 특성상 헌법재판관을 탄핵할 수 있는 제도 또한 행정부와 입법부의 사법부 견제장치로써의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종합해서 말하면, 총리(행정부)는 입법부나 사법부를 흔들 수 있는 장치를 가지고 있는 데 반해, 그 반대방향으로는 마땅한 견제장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론을 조성할 수 있는 언론을 보통 제4권력이라 일컫는다. 국경 없는 기자회에서 매년 발표하는 언론자유지수에서 일본은 2020년에 66위를 기록했다. 같은 해 한국은 42위로 아시아 1위를 기록했다. 뉴욕타임스는 2019년 7월 5일 기사에서 일본의 정부와 언론에 대해, "일본은 언론의 자유가 헌법에서 소중히 다뤄지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정부는 가끔 독재 체제를 연상시키는 행동을 한다", "어떤 언론인들의 기자회견 접근을 거부하거나 기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정치와 언론사 경영진 사이의 사교 관계를 활용한다"라고 평했다.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은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란 것이다. 그런데 국가의 주인인 국민들이 언론을 통해 정확한 정보를 알지 못 한다면 제대로 된 판단과 의사표시를 할 수 없다. 일본에 살던 시절, 일본 서점에 가면 경악하던 것이 여럿 있다. 베스트 셀러 1위가 혐한(嫌韓) 책인 것과 문재인 대통령이 반일의 화신으로 그려져 있는 뉴스위크 일본판 표지를 보았을 때다.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과 미국, 중국과의 관계에 관심이 컸지, 일본을 불쾌하게 만들 생각이 없는 스탠스를 취했다고 본다. 북한과의 관계 개선과 미•중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에 큰 관심을 두고 있는데, 일본에까지 굳이 필요 이상으로 신경 쓰지 않는 듯 하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와 언론은 일본국민들을 위한 떡밥으로 한국을 자주 이용한다. 도쿄에 있던 시절, 가끔 뉴스를 보면 첫 꼭지가 한국이나 북한 소식으로 시작할 때를 자주 봤다. 문재인 대통령, 김정은 국방위원장, 조국 전(前)장관 등이 비춰졌다. 마치 한국의 우파가 오랜 세월 북한을 이용해 여론몰이를 하였던 것처럼(ex, 북풍, 서울시 공무원 간첩 의혹 증거조작 사건) 일본은 한국을 이용해 국민들을 호도한다. 아주 무책임하게.
일본의 아날로그 문화는 선거 제도에도 남아있다. 투표자는 투표용지에 지지하는 후보자의 이름 혹은 정당명을 손으로 정확히 써야 한다. 그 때는 한자를 쓰거나 한자의 발음을 히라가나로 써도 된다. 이름에 동그라미를 치거나 낙서를 하면 무효표가 된다.
이렇다 보니, 동일 지역구에서 대를 이어 정치를 하기가 한결 용이하다. 일본은 이름없이 성을 써서 상대방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같은 지역구에서 대를 이어 같은 동일한 성을 가진 후보로 나오는 것은 익숙함과 친숙함을 조성하기 쉽게 만든다. 모국어라고 하지만 한자는 일본인들에게도 어렵다. 더군다나 젊은 세대들은 스마트폰의 자동완성 기능으로 인해 한자를 정확히 숙지하고 있지 않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펜으로 이름을 쓰는 방식의 투표는 무효표도 많고 젊은층이 선거에 무관심해지는데 영향을 준다.
자민당은 이러한 자서식(自書式) 투표용지를 고수해왔다. 1994년 선거제도 개혁 때 중의원의 투표용지는 기호 선택식으로 개정되었다. 그러나 자민당이 정권을 되찾은 후 1995년 11월에 자서식으로 재변경되었다.
일본의 투표율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 선거 가능 연령을 2016년에 18세로 낮추는 등 국민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애쓰고 있지만, 2019년에 있었던 참의원 선거에서 역대 두 번째로 저조한 48.1%를 기록했다. 만18, 19세의 투표율은 31.33%를 기록하며 도입 직후 46.78%에서 점점 떨어지고 있다.
과거 일본은 투표율이 낮지 않았다. 그러나 극우의 노림수인지 21세기 들어 매우 낮아지고 있다. 일요일이 선거일인 것도 원인 중 하나로 보여진다. 또한 일본 교육 정책상 학생들에게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며 정치 참여를 적극적으로 막고 있다. 교외 정치활동을 일부만 허용하며 규제한다. 일본 젊은층이 정치에 무관심해지는 게 당연해 보이는 환경이다. 그런데다가 이름을 적어야 하는 구시대적인 선거방식은 세계적 기준에 눈이 밝은 젊은 층을 유인하기에 너무나 부족해 보인다.
문제는 투표소에도 있다. 한국에서 투표소는 4면이 천막으로 가려져 있고 기표 부스(booth)들이 간격을 둔 채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 투표소는 그렇지 않다. 위와 뒤는 아예 뚫려 있고 양옆의 가림막도 그렇게 높지 않다. 그리고 연이어 붙어 있다. 한국의 은행창구와 유사하다.
일본의 투표소에는 투표자가 후보자명, 정당명을 기재할 때에 쓰는 책상의 뒤를 가리는 커튼이 없다. 가까운 투표 테이블을 구분하는 가림판은 있어도 투표자의 모습은 명확하게 감시할 수 있다. 더욱이, 투표용지는 자필식이며, 알루미늄판 위에서 연필로 후보자명을 기입하는 경우, 어느 정도 큰소리가 난다. 투표용지에 기입할 때의 획수로 어느 후보자에게 투표했는지 추측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표면상으로는 선거의 공정을 기한다는 목적으로 투표소에는 지역의 유권자, 자치회장 등이 투표 관리자, 입회인으로서 투표자를 지켜본다. 일본의 선거에서 투표란 이러한 지역 공동체 내의 감시 압력을 받으며 행해져 온 것이다. 한편 해외의 투표소에서는 비밀투표를 보장하기 위해서 커튼이 설치된 경우가 많다. 국제 조직의 선거 감시단이 일본의 투표소를 보면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 책 [일본 자민당 장기집권의 정치경제학]中에서
일장기(일본어로 일장기를 뜻하는 히노마루(日の丸)는 태양 같은 동그라미란 뜻)는 가운데가 태양빛에 의해 빨갛게 구멍이 나 있는 것 같다. 도쿄는 천황의 궁궐로 인해 중심부가 텅 비어있다고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기호의 제국>에서 말했다. 또 네덜란드의 저널리스트이자 교수 블페렌(Van Wolferen)은 저작 <일본권력 구조의 수수께끼>에서 일본의 정치•경제 체제를 정점(頂点)이 없는 피라미드, 혹은 ‘머리없는 닭'에 비유하여 아무도 정책 결정에 책임을 지지 않고 그저 시스템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라고 평했다.
일본은 중심이 없다. 일본에는 궁극적으로 모든 책임을 짊어지는 원탑(one top) 리더가 부재한다. 다만, 대대손손 권력을 누리며 이어지는 가문들과 그들이 만들어놓은 제도들이 있을 뿐이다.
5. 정치는 한 나라의 지성과 욕망을 보여준다
민주주의의 ABC를 학습하지 않은 나라, 도금된 민주주의, 피, 땀, 눈물이 묻어있지 않은 민주주의, 허약한 민주주의, 위로부터의 민주주의, 정•경•관•언(각 분야의 엘리트들) 유착, 가부장적 민주주의. 의미와 어감은 조금씩 달라도 일본 민주주의를 비유할 만한 명칭들이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ABC든 피와 눈물이든 그게 부재한 건 알겠는데 그게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중우정치다. 고대 그리스 플라톤부터 우려했던 민주주의의 폐해다.
민주주의는 대의제든, 직접 민주제든 언제든지 중우정치(다수의 어리석은 민중이 이끄는 정치)로 흐를 수 있다. 민주주의는 개인들이 충분히 토론해서 의사 결정을 하면 좋은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많다는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늘 그렇게 되는 건 아니다. 다수의 지배라는 건 언제나 다수가 잘못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을 포함한다.
- 유시민, JTBC [차이나는 클라스] 中
한 나라의 리더는 그 나라를 대표하고 상징한다. 우리가 이명박 씨를 선택한 건 우리가 이명박 만큼의 욕망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덕성에 어느 정도 흠결이 있어도 좋으니,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를 원했다. CEO 이미지의 경제대통령을 원했다. 도덕적 흠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되는 욕망을 택했다.
일본 또한 마찬가지다. 아버지, 할아버지가 유력 정치인이었던 게 경력의 전부인 극우 보수파 아베 신조에게 세계 3대 경제대국의 1억 2천5백만 시민들은 오랜시간 동안 총리를 맡겼다. 리더는 그 나라의 정신이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자는 그 문제의 일부다. 사회구조 혹은 리더에게 문제가 있다면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으로 바꿀 줄 알아야 한다. 한국은 둘 다 해봤다. 그게 국민이 주인인 나라다. 그러나 일본은 그런 역사가 없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1978년 10월 야스쿠니 신사에 도조 히데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총리를 포함한 A급 전범 14명이 비밀리에 합사되었다. 그 후 총리로서는 최초로 1985년 8월 15일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 그 때 일본 국민들은 반대했는가?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매년 1차례씩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는 5회에 걸쳐서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했다. 야스쿠니 신사는 A급 전범의 합사(合祀)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기념물 등이 모두 일본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 또한 문제이다. 카미카제(神風) 자살공격을 했던 소년들을 찬양하는 기념물도 축조해놓았다. 버젓이 수도 한복판에서 마치 그것이 아름답고 고귀한 일이었던 것처럼 알리고 있다. 많은 일본인들이 자신들을 2차 세계대전의 가해자가 아니라 미국의 원자폭탄에 의한 피해자로만 인식하고 있다. 매년 8월 15일은 그들에게 희생된 선조들을 위한 추모일로서의 휴일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스가 요시히데 모두 일본인들의 얼굴이다. 3대, 4대 족벌(族閥) 정치를 허용하고 그대로 방치하는 일본인 개개인의 얼굴이다. 민주주의를 능동적으로 학습하지 않은 나라의 2020년 얼굴이다. 그리고 한국보다 40년 앞서 민주주의를 달성한 그들의 민주주의 지수는 몇 년째 한국을 앞서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긴 민주주의 역사만큼 확실히 여러 면에서 민주주의가 앞섰었다. 민주주의의 중요한 영역 중 하나인 시민사회(市民社會, civil society) 또한 일본은 한국보다 일찍부터 발달했다. 서울시장을 하기에 앞서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등 국내 시민사회 활동에 많은 족적을 남긴 고(故)박원순 서울시장은 90년대, 2000년대에 일본을 자주 왕래하며 그들의 시민사회를 공부하기도 했다.
그런데 현재의 일본 민주주의 전체 모습을 보면 어느 순간부터인지 동력을 다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그들의 경제처럼 말이다.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들이 저성장시대를 맞이하여 이미 성숙기에 접어든 여러 분야가 과거처럼 빠르게 발전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유독 일본의 정체됨이 심한 듯 보인다. 미국인들이 만들어준 헌법과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자기주도 학습을 못해서일까.
그들의 피, 땀, 눈물이 묻어있지 않은 민주주의가 힘을 다했다. 일본에 깨어있는 시민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일본인 개개인을 만나 보면 친절하고 성실하고 지적인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들은 조직된 힘으로 정치영역에서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이뤄낸 경험이 근대화 기간 200년 동안 한 차례도 없다. 민주주의의 기초학습이 안 되어 있다.
2019년 일본 총무성(総務省)의 자료에 따르면 일본은 65세 이상 인구가 28.4%다. 고령화사회, 우경화되어 가는 사회 속에서 지금의 분위기는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일본 사회 모습을 보았을 때 매우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앞으로도 피, 땀, 눈물을 흘려 민주주의를 학습하는 경험은 없을 듯하다.
3화에서는 경제대국 일본의 자본주의를 다뤄보고자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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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일본 자민당 장기집권의 정치경제학] 사이토 준 지음, 김영근 옮김. 고려대학교 출판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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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제임스 렉서 지음, 김영희 옮김. 행성:B 온다
김웅진,안승국,김세걸,이상훈,김형기,김형철,홍재우,김경묵,김숙현,박수옥,정정숙,김혜숙 지음. 르네상스
책 [박원순이 걷는 길] 임대식 지음. 한길사
홍콩 시위: 한국 대학가에서 한-중 대학생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다 (링크)
미국의 역사와 민주주의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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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자유’와 일본의 민주주의 ― 한일 지식인과 시민의 대화를 위하여 ― 다카하시 데츠야(高橋哲哉)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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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V 국회방송 세계사 산책 민주주의 이야기 - 자민당 일당우위체제, 일본의 선거와 정당 (링크)
최장집. (2006). 노동 없는 민주주의로의 전환. 아세아연구, 49(2), 112-146.
한정선. (2013). 일본에서 민주주의의 형성과 변천. 역사와현실, (87), 10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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