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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연재물 ( 일본이 선진국이었던 이유9)

61년생 정동분3

by 자한형 2023.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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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생 정동분 3 : 아가씨, 저 짝에서 우리 형님이 잠깐 보자는데요/꼬마목수추천

김고은 배우를 좋아한다. 그가 나오는 영화는 빼놓지 않고 본다. [유열의 음악앨범]도 그래서 본 영화다. 김고은, 역시 연기 잘한다. 정해인, 잘생겼다. 근데 스토리, 너무 억지다. 자꾸만 우연을 가장해 만난다. 한두 번이라야 그런가 보다 하겠는데, 해도 너무 한다. 이런 걸 개연성 떨어진다고 하지. 나는 이렇게 개연성 떨어지는 영화나 소설을 싫어한다. 그건 그냥 작가가 게을러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갑자기 웬 개연성 얘긴가 싶을 거다. 지금부터 시작할 연애 이야기가 딱 그렇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 동분과 그 남자가 자꾸만 우연히 마주친다. 그래서 미리 밑밥 까는 거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니까 우연이 반복돼도 그런가 보다 하시라.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바야흐로 동분 나이 열여덟 살 때, 동분은 섬유공장에 다녔다. 열여섯에 친구 따라 처음 공장 다니기 시작해 여러 공장을 전전한 이력이 있다. 동분의 직업사()는 따로 다뤄보자.

당시 동분은 주야 2교대였다. 야간 근무 끝내고 이른 아침 퇴근하려던 참이었다. 함께 일하는 한 살 어린 동생이 동분을 붙잡았다. 대전에 사는 50대 이상은 혹시 알려나 모르겠다. 서대전 네거리에서 충남도청 방향으로 좀만 가다 보면 무궁화 백화점이 나온다. 지금도 그 건물이 있다. 그 자리가 40년 전엔 성보극장이었다.

그 성보극장에서 일요일마다 노래자랑을 했어. 일반인들 나와서 노래 부르고 그랬어. 동생이 나한테 언니, 거기서 노래 자랑한다는데 놀러 가보자.’ 하더라고. 그래서 따라나선 거지. 뒤에 서서 한창 구경하고 있는데, 웬 머시매가 하나 쓱 오더니 아가씨, 저 짝에서 우리 형님이 잠깐 보자는데요하는 거여, 글쎄.”

싫다고, 안 가겠다는 걸 자꾸만 엉겨 붙는 통에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따라나섰다. 그렇게 동분과 동생, ‘웬 머시매우리 형님이 다방에 마주 앉았다.

그 형님이라는 사람이 결과적으로다가 니네 아빠가 되는 건데, 호호호. 몸에 맞지도 않은 깜장색 가다마이를 쫙 빼입고 까만 구두까지 신고 왔더라고. 안에는 국방색 셔츠를 입었던 거 같은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니네 큰아빠 걸 빌려 입은 거랴. 그 영화 뭐냐? , , 하정우 나오고 최민식 나오는, 그래그래, 범죄와의 전쟁. 딱 그 모습이었어. 머리는 단발에다가 건들건들하는 게. 근데 말도 없어. 니네 아빠가 지금도 말주변이 없잖냐. 그냥 가만 앉아가지고 뒷주머니에 꽂아놨던 빗을 한 번씩 꺼내서 머리를 싹싹 빗어 넘기더라. 그 모습이 썩 나쁘지 않더라고. 깔꼼한 게 괜찮네 싶었지. 니네 아빠가 그래도 빠지는 인물은 아니잖냐.”

웬 머시매우리 형님은 처음부터 작정했던 모양이었다. 잠깐 딴생각하고 어쩌고 하는 사이 웬 머시매가 동생을 데리고 나갔다. 동분과 우리 형님’, 단둘만 남았다. 일단 나가자고 해서 따라나섰더니, 대뜸 버스에 올라타더라는 것. 그렇게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동네에 내려 한참 걸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엄마는 그냥 순박한 신탄진 촌년이었지. 신탄진에서만 살았으니까 대전을 아냐? 암 것도 모르지. 날은 자꾸만 어둑어둑해지는데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슬슬 무섭더라고.”

여기서 신탄진이라는 동네를 설명해야겠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대전광역시 대덕구 신탄진동이다. 근데 그건 말 그대로 행정 편의상 지정한 거고, 지금도 신탄진 사람들은 그냥 신탄진이라고 한다. 스스로들 신탄진을 대전이라 생각하지 않는 거다. 대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지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별도의 도시라고 해야 할까. 신탄진은 그런 특수성이 있는 동네다.

그러니, 신탄진에서 공장만 왔다 갔다 하던 열여덟 소녀에게 어딘지도 모르는 대전의 밤거리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첫인상 나쁘지 않아 따라나섰던 낯선 남자는 저만치 훌쩍 앞서 걷기만 하고 있으니, 그 속을 알 수 없어 더 두려웠을 것.

1978, 송일영 처음 만났을 즈음의 18살 동분(오른쪽).

함께 공장 다녔던 친구와.

니네 아빠가 얼마나 엉큼한지 아냐? 내가 아들한테 별 얘기를 다 허네. 휘적휘적 걸어가던 니네 아빠가 딱 멈춰 서는 거여. 여인숙 앞에서. 엄마가 얼마나 놀랬게. 그때까지 엄마가 제대로 된 연애를 해봤겄냐, 뭘 해봤겄냐. 남자랑 한 번 자면 죽으나 사나 결혼하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었는데. 여인숙 앞에서 니네 아빠는 들어가자, 나는 절대 안 된다, 한참 실랑이를 벌였지. 겨우겨우 뿌리치고 집으로 왔어. 그날 집에 가서 니네 큰 외삼촌한테 얼마나 뚜두려 맞은 줄 아냐?”

온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한 번도 그런 적 없던 여동생이 밤늦게 들어왔으니 동분 큰오빠 입장에선 걱정도 되고, 화도 잔뜩 났을 터. 큰오빠가 삽자루를 들고 달려들었다. 큰오빠의 아내, 그러니까 올케가 말린 덕에 삽자루는 피했지만, 그날 동분은 태어나 처음으로 큰오빠에게 매질을 당했다. 그런 시절이었다.

회초리 같은 걸로 한참 나를 때리더니 방에 가둬. 니네 큰 외삼촌이 그러더라. 동분이 저거 내일부터 일 못 가게 지키라고. 방에서 한 발자국만 나오면 패 쥑여버린다고. 그래서 며칠 동안 일도 못 갔어. 그걸로 니네 아빠랑은 끝인 줄 알았지. 생각해 봐. 나이도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데, 오늘 처음 본 남자가 집에 안 보내줄려고 했으니까. 니가 생각해도 그건 좀 아니지 않냐? 더군다나 니네 아빠 때문에 집에 늦게 가서 맞기까지 했으니, 인상이 좋게 남았을 리 있겄어? 나쁜 놈으로 낙인이 따~악 찍힌 거지.”

그날 그 시간 그 자리, 두 사람이 마주칠 확률

방에 갇힌 지 며칠이 지났을까. 큰오빠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 “너 한 번만 더 늦게까지 돌아 댕기면 이 정도로 안 끝나는 줄 알어!!”라는 무서운 경고와 함께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다음날부터 다시 공장에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 우리 형님’, 즉 송일영이 서 있었다. 동분은 기절하는 줄 알았다. 설마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엄마가 방에 갇혀있는 며칠 동안 매일 공장에 찾아왔던 모양이더라고. 내가 깜짝 놀라서 여긴 어떻게 알고 왔냐고 했더니, 그날 내 목에 걸려 있던 공장 출입증 카드를 봤다는 겨. 아휴. 그래서 나는 당신 만날 생각 없으니까 빨리 돌아가라고 막 밀치고 후다닥 공장으로 들어갔지.”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송일영이 공장 앞으로 찾아왔다. 동분은 난감했다. 공장 사람들 보는 눈도 있는데 괜한 소문이라도 퍼질까 두려웠다. 그런 시절이었다.

결단이 필요했다. 다방에서 커피 한 잔만 딱 하자는 송일영을 따라나섰다.

엄마가 그래도 그때는 괜찮았어. 호호호. 얼굴도 순하니 괜찮고, 몸무게도 47kg이었으니까 적당히 늘씬했지. 군살도 없고. 키도 그때로 치자면 큰 편이었고, 무엇보다 비율이 좋았지. 엄마 다리가 지금도 길잖냐. 그래가지고 공장에도 엄마 좋다는 머시마들이 꽤 있었지. 호호호. 그러니까 니네 아빠도 엄마한테 완전히 푹 빠졌던 거여. 나 좋아해 준다는데 기분 나쁠 사람 어디 있겄냐? 그렇긴 한데, 아무튼 니네 아빤 아니었어. 나한테 완전 찍혔잖아, 나쁜 놈으로!”

1980, 왼쪽부터 20살의 동분.

조카, 여동생과 함께.

다방에 마주 앉은 송일영은 정식으로 연애해 보자고 제안했다. 동분은 선뜻 알았다고 했다. 먼저 나서서 주말에 데이트하자는 말까지 덧붙였다. 사실은 모든 게 동분 계략이었다.

니네 아빠 성깔 너도 잘 알잖어. 그 양반이 그냥 물러날 사람이냐? 일단은 그렇게 약속을 한 거지. 그 양반이 우리 집 주소를 알았겄어, 우리 집 번호를 알았겄어. 아는 거라고는 내가 다니는 공장뿐이었으니까. 주말에 어디서 몇 시에 보자고 해놓고 안 나갔지. 공장도 그만둬버리고. 니네 아빠는 분명 그날 데이트 장소에 나갔을 거고, 바람맞았으니까 화가 잔뜩 나서 다음날 공장으로 쫓아왔겠지. 그럼 뭐 하냐. 호호호. 엄마는 벌써 그만뒀는데.”

이제는 완전 끝이라고 생각했다. 이 넓은 하늘 아래, 그 남자를 설마 다시 보게 될까 싶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또 흘러가고 있었다.

동분 나이 스무 살. 제화 공장에 다닐 때였다. 출근하는 길이었다. 또각또각, 구두 신고 걸어가고 있었다. 동분 옆으로 택시 한 대가 쌩 지나갔다. 또각또각 또각또각. 쌩 지나갔던 택시가 저 앞에 멈춰 섰다. 그러더니 스윽 후진해서 동분 앞에 딱 세우는 게 아닌가.

택시 기사가 내려서 라이방 선글라스를 벗는데, 보니까 니네 아빠여. 엄마가 얼마나 깜짝 놀랬게. , 영화 뭐여. 송강호 나오고, 외국인 나오는 거. 그래그래 택시운전사. 딱 그 복장이었어.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택시가 흔하던 시절이 아니었잖어. 택시 기사들도 제대로 채려입고 댕길 때였거든. 니네 아빠도 퍼런 셔츠에 기지 바지 칼주름 딱 잡아가지고, 허연 면장갑 쫙 끼고 있더라고. 엄마는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지. 2년 전에 그렇게 바람맞히고 도망치듯 공장을 그만뒀던 거니까 이 남자가 해코지하면 어떡하나 무서워가지고.”

예상과 달리 송일영은 점잖게 인사를 건넸다. 그도 그럴 게 그사이 2년이 흘렀다. 송일영 나이도 어느덧 스물여섯 살. 백수건달로 동네 주름잡고 다니던 시절은 지났던 것.

니네 아빠 하는 말이, 자기가 변변한 직업이 없어서 차였나 싶은 생각이 들더래. 그날로 바로 운전 배우기 시작해서 그 뒤로 회사택시를 몰았다는 거여. 노력이 가상하긴 한데, 어디 사람 마음이라는 게 뜻대로 되냐. 니네 아빠가 종이에다가 뭘 적더니 나한테 툭 주더라. 이렇게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거 자기 집 주소니까 편지 써 달래. 그러고는 쿨하게 가더라? 택시가 슉 가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종이를 벅벅 찢어 내삐렀지. 내가 미쳤냐. 내가 너한테 편지를 왜 쓰냐? ! 하면서. 호호호.”

한반도가 반으로 뚝 갈라지고, 안 그래도 좁은 땅이 더 좁아졌다지만, 그날 그 시간에 그 자리에서, 출근하는 동분과 택시 몰던 송일영이 마주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설령 스치듯 지나갔다 해도, 서로를 알아보고(이 경우는 송일영이 먼저 알아본 거지만) 대화까지 나누게 될 확률은 또 어떻고.

1978~80년 사이, 택시 몰기 전 잠깐 공장에 다닌 20대 중반의 송일영(윗줄 가운데).

2년 전, 몇 날 며칠을 쫓아다녔어도 끝끝내 차였던 송일영이 자기 집 주소 덜렁 적어주고 쿨하게 퇴장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확신 아니었을까. 이렇게 마주칠 정도면 운명이구나, 오늘 당장 동분과 매듭을 못 지어도 분명 다시 만날 것이다, 뭐 이런 확신 말이다.

간절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거짓말처럼 두 사람은 또다시 재회하게 된다.

그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사건은 다음 시간에.

1989, 처음으로 찍은 가족사진.

오른쪽 아래 꼬맹이(당시 3)가 본인 송주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