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 앨리스
스틸 앨리스를 보았다. 2015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영화였다. 단란한 가족이 식사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엄마의 생일에 아들과 딸 그리고 남자친구 마지막으로 둘째딸 등이 와인으로 축배를 들면서 행복한 한때를 즐기는 듯한 단란한 가족을 보여준다. 아빠와 엄마도 좋아 보이고 가족들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중이었다. 엄마는 컬럼비아대학의 언어학교수로 나왔다. 유능했고 지적이었으며 충실하게 삶을 살아온 50살의 중년여성이 어느날 갑자기 기억이 감퇴하는 증상을 보이고 이를 규명하기 위해 진료를 받는다. 그녀는 조발성 알츠하이머로 진단받고 치료를 받는다. 증상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계속적으로 악화된다. 사람도 못 알아보게 되고 잦은 실수를 저지른다. 기억의 상실이라는 것에 몰입한다. 자신은 어떻게 해서든지 맞서 보려하고 이겨보려 하지만 병의 악화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암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한다. 그러면서 수술하고 항암치료하고 그것과 싸워볼 수라도 있는데 알츠하이머는 어떻게 해볼 방법을 찾을 수가 없는 것에 절규한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중에도 갑자기 적절한 말을 생각해 내지 못하게 되고 멍한 상태로 보내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병에 관해 고민한다. 정밀검사를 받고 하나씩 자신의 기억을 잃어 가는데 대해서 대응하고 적응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간다. 학교에서도 강의가 형편없다는 등의 평가로 인해 결국 자신의 병을 밝히고 교수회의에 알려지게 된다. 어느 날 한밤중에 남편에게 실토한다. 그리고 병원에 같이 간다. 유전성이라는 것으로 인해 아이들에게까지 고백한다. 딸아이는 임신 중이었다. 다행이 아이에게는 유전자가 발견되지 않는다. 막내딸은 연극을 하려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것에 부정적인데 반해 엄마는 딸이 대학에 가기를 바란다. 기억을 잃어가던 그녀는 화장실로 가던 중에 화장실을 찾지 못하는 일이 발생된다. 그리고 오줌을 바지에 선상태에서 지려버린다. 그럼에도 남편인 존은 아내에게 자신이 씻겨주겠다고 하고 그녀를 목욕탕으로 데리고 간다. 한밤중에 자신이 잃어버린 핸드폰을 찾기 위해 이곳 저곳을 뒤진다. 깜짝 놀라 뛰쳐나온 남편은 아내를 다독이고 내일 아침에 찾아보자고 하고 지금을 잠을 자야할 때라고 설득한다. 한 달 후 우연히 핸드폰을 찾게 된 남편은 그것을 아내에게 건넨다. 한번은 남편과 중요한 약속을 해놓고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 채 바람을 맞힌다. 어처구니없어하는 남편에 대해 아내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자책도 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었음으로 핑계를 댄다. 자신의 증상에 전혀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한 주인공은 결국 자신이 모든 것을 잃을 때를 대비해 영상을 만들어 놓는다. 그것은 자신에게 자신을 죽이도록 명령을 실행하는 식이었다. 계단을 올라가서 어디 장롱의 윗서랍에 보면 알약이 있는데 그것을 다 먹고 조용히 침대에 누우라는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올라간다. 그러나 그 기억을 계속 지탱하지 못하자 노트북을 들고 동영상을 실행시키면서 자신의 자살을 실행에 옮긴다. 그런데 그런 실행의 마지막 단계에서 간병인이 들어오고 그녀는 약병을 바닥에 쏟으면서 실패한다. 그녀는 알츠하이머 병자들을 위해 연설을 준비해서 감동적인 연설을 한다. 기억의 상실로 인해 자신들이 잊혀 가는 것에 안타까움을 호소한다. 노란 형광펜으로 한 줄 한 줄씩 줄을 그어가며 연설을 해낸다. 남편은 미네소타로 일을 찾아 떠나고 결국 막판에 자신을 간호해 줄 이는 작은 딸 리디아였다. 그녀는 연극을 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녀는 연극인으로 살아가고 싶어했다. 반면 엄마는 대학의 연극영화과에 진학을 해서 꿈을 실현해가길 권고한다. 책도 읽을 수 없었던 앨리스는 작은 딸의 대본을 읽어보려다 그녀의 일기장을 읽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갈등하고 대판 싸운다. 그런데 다음날 그녀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요양병원을 알아보러 다니기도 하고 쌍둥이를 낳은 딸을 방문해서 아이를 안아보기도 하지만 그것마저 불안한 눈길로 바라다보는 남편과 딸의 시선은 따갑기만 하다. 결국 남편은 아내를 막내딸에게 맡기고 떠나고 막내딸이 엄마를 돌보기로 한다. 정성을 다해 지극정성으로 엄마를 돌보겠다고 하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엄마와 딸을 맞이하는 간병인에게 엄마는 낯설어하고 적응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누구에게나 닥쳐올 병마와 싸우는 한 인간의 애절함이 녹아있는 모습에 우리는 자연스레 공감을 하게 된다. 루게릭 병을 앓은 감독을 위해 이 영화를 바친다는 자막이 인상적이었다. 간단한 일에서도 조차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고 일상적인 생활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가족의 심정은 오죽할까 하는 연민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듯했다. 자신의 잘못으로 촉발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속에 내재된 유전자로 인해 자신의 가족에게 그 피해가 고스란히 계속 이어지게 된다는 부분에 관해서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앨리스는 딸에게 자신으로 인해 그 유전자로 인해 고통받는 부분에 속죄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인간이 받아들여야할 숙명이고 운명이리라. 그러나 그것을 계속 유전되어가고 그것으로 인해 불행해진다면 그것을 어떻게 참고 견뎌낼 수 있겠는가. 예전 ‘더 저지’라는 영화에서 그런 장면이 있었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그대로 선 채로 배설물을 쏟아내는 장면이 있었고 그것을 조용히 처치하는 아들이 있었다. 그렇게 존경받고 신뢰받았던 판사셨던 아버지가 그런 일상적인 것에서 어린아이 보다 못한 상태에 놓였을 때 아들로서의 심정이 어떻겠느냐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병마와 싸우는 본인 자신도 힘들고 어렵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가족의 심정도 오죽할 것인가. 아무튼 인간은 본성에서 기본적인 사지육신이 멀쩡하고 제대로 된 정신으로 살아가고 삶을 유지시켜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하고 보배로운 것인가를 다시 한번 일깨워 준 영화가 아니었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