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며
지난 휴일이었다. 우리 식구는 오랜만에 나들이 겸 외식을 하러 집을 나섰다. 아들내외도 왔다. 며느리가 의료보험 심사평가 자격시험에 합격을 해서 축하를 해주기 위해서 집사람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지난주에는 아들이 1박 2일 워크숍을 가는 바람에 하지 못했고 다음주에는 집사람이 일본 연수일정이 잡혔기에 날을 어렵게 잡아서 하게 된 식사자리였다. 집근처인 신림사거리 부근의 미금 대게집이었다. 휴일이어서 그런지 다른 손님은 없었다. 한쪽 벽면에는 이곳을 다녀간 개그맨들의 사진과 사인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한켠의 수조에는 대게와 킹크랩 등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막 식탁에 좌정을 하고 음식이 나오는 중이었다. 스마트폰을 보니 동생에게서 온 전화가 있었다.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이미 3개월 전부터 발병이 되어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던 형님이 돌아가셨다는 부고였다. 지난 봄부터 입원 가료중이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은 미처 몰랐다. 갑작스러운 부고에 황망해졌다.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자리를 파하고 곧바로 집으로 왔다. 옷을 갈아입고 서울역으로 나갔다. 다행히 열차표를 예매할 수 있었다. 부산으로 내려가는 열차편은 오후 3시 40분 서울역 발이었고 귀경하는 열차는 8시 59분 구포발이었다. 급한 마음에 택시를 탔다. 30분쯤을 달려 서부역에 도착했다. 20분쯤 여유가 있었다. 2016년과 17년 2년간 김천구미역을 오가며 수도 없이 왔었던 서울역이었다. 편의점에서 물을 한병 샀다. 차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초여름의 모습이었다. 푸르런 산천초목이 언제나 그런 것처럼 세상의 인간사에는 무심하게 느껴졌다. 열차속에서 회상에 잠겼다. 형님은 나보다 6년정도 연배셨다. 특별한 인연은 1970년대 중반쯤에 3-4년쯤 우리 집에 기식을 했던 적이 있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초년생 시절을 우리집에서 보낸 셈이었다. 한참 농촌인구의 도시유입이 이뤄졌던 시절이었다. 형님도 시골에 있다가 부산의 봉제공장에 취업이 되어 부산으로 내려온 것이다. 직장생활은 무척이나 힘들었고 고달팠다. 야근도 잦았고 힘든 부분도 많았지만 잘 해나가셨고 어엿한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디뎠고 군에 입대할 무렵까지 우리집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부분은 그렇게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굳건하게 세상의 험한 파도를 헤쳐나갔고 이겨 나갔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결혼도 했었고 자식도 낳았다. 듬직한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애썼다. 대학까지 공부도 시켰고 굴지의 대기업인 삼성에 입사도 제대로 했다. 아들은 때맞춰 결혼도 시켰고 손자, 손녀도 낳았다. 할아버지로서 형님은 항상 더할나위없이 자애로웠다. 형님은 장손으로서 조상님들의 제사를 다 모셨다. 형수님은 아들의 맞벌이로 인한 육아를 위해 서울로 올라오셔서 한 두달씩 손자, 손녀를 돌보아 주기도 했다. 이제는 편안히 여생을 즐기며 노후를 보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갑자기 발병이 되었다. 열차는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서울역에서 출발한지 2시간 40분쯤 후에 부산역에 정확하게 도착했다. 곧바로 택시 승강장으로 가서 택시를 타고 한중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수정터널과 백양터널 두곳을 통과했다. 일일이 현금으로 통행료를 납부했다.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문상을 하고 저녁식사를 했다. 밥알이 거의 모래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누님과 형님들도 상주와 같이 문상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조문객들을 만날때마다 처연한 곡소리를 내며 울음바다를 만들었다. 참으로 젊은 나이에 유며을 달리하신 것이다. 아직 한창때임에도 저세상으로 가신 것이다. 곡소리의 처절함 속에는 유족들의 안타까움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평촌누님께서는 형님이 입원해서 치료를 받던 중에 세 번에 걸쳐 병문을 하셨다. 처음 왔을 때에는 그래도 괜찮았었고 편안해 보였단다. 그렇게 심각할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다. 두 번째 병문안을 왔을 때에는 머리쪽에 돌출부분이 있었다. 처음 발병된 병명은 폐암이었다. 나중에 암세포가 폐에서 뇌까지 전이가 되었다. 항암제 치료는 계속되었다. 병세가 워낙 위중해서 수술적인 치료가 어려울 정도로 병세가 깊었다. 얼마전 수요일에 세 번째 병문안을 왔을 때에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었다. 이리저리 뒤척이고 움직이는 통에 병간호를 하던 형수님도 무척 애를 먹고 있었다. 묘자리는 의령 용덕면 가락의 선산에 부모님 묏자리 앞쪽에 평장으로 할 것이고 비석이 세워져 표식을 해놓을 것이라고 했다. 형님은 생전에 고향집이었던 기왓집을 모두 허물고 새롭게 단장할 작정을 했다. 외가가 본래 평지에서 좀 움푹 꺼져 있는 형태로 야트막하게 낮은 지형이었는데 그곳에 흙을 채워놓았다. 덤프트럭 26대 분이었다. 자형에게도 집을 짓게되면 좀 도와줄 것을 요청하게 했다. 외가의 밭에는 형님이 작물 심기위한 준비작업으로 흑색PE필름으로 멀칭작업까지 다 해 두었는데 작물은 심지 못한 채 떠나시고 만 것이다. 내가 문상을 마치고 식사를 할 때쯤에 사촌동생 유환이 내외가 문상을 와서 같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가족모임의 회인 담안회의 회칙에는 경조사비로 집행할 수 있게 규정되어져 있었고 부조금으로 50만원이 책정되어져 있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에도 병문안을 하기도 했다. 김천 사촌형님네와는 병문안 시간대가 맞지않아 만나지 못했다. 유환이는 문상을 마치고 가면서 발인할 때 다시 찾아뵙겠다는 얘기를 하고 갔다. 하루를 휴가를 내고 탈상행사에 참가를 할 요량이었다. 불교 경전의 하나인 법화경에 이르기를 생자필멸(生者必滅), 거자필반(去者必返)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했다. 살아 있는 이는 반드시 죽게 되어져 있고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있고 만난 사람은 언젠가 헤어지게 되는 것이 인생사라 했다. 형님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며 아쉬움이 남고 안타까움이 가득하지만 가는 사람은 가야하고 남은 사람은 남은 사람대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이리라.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고 짊어져야할 멍애 같은 것이리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형님이 극락왕생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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