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설가

이광수

by 자한형 2021. 10. 11.
728x90

(1892~1950)

일제강점기 무정」「소년의 비애, 방황등을 저술한 소설가.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개설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춘원(春園)이다. 아명은 이보경(李寶鏡)이며, 필명으로는 장백산인(長白山人고주(孤舟외배·올보리·노아자·닷뫼·당백·경서학인(京西學人) 등을 썼다.생애 및 활동사항189221(음력)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생으로, 1899년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28월 콜레라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어 누이동생 둘과 함께 외가와 재당숙 집에서 자랐다. 1903년 동학(東學)에 입도하여 천도교의 박찬명(朴贊明) 대령(大領)의 집에 기숙하며 서기 일을 맡았다.19058월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19063월 다이세중학[大城中學]에 입학하였으나 학비 곤란으로 같은 해 11월 귀국하였고, 1907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하였다. 메이지학원 동창회보인 백금학보(白金學報)19호에 일본어로 쓴 사랑인가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1910소년에 신체시 우리 영웅을 발표하였고, 대한흥학보(大韓興學報)11호에 평론 문학의 가치와 단편소설 무정을 발표하였다. 3월 메이지학원 보통부 중학 5학년을 졸업하고 귀국해 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원이 되었으며, 7월 백혜순(白惠順)과 중매로 혼인하였다.1911년 오산학교 학감으로 취임하였으며, 1913년 스토(Harriet Beecher Stowe) 부인의 검둥이의 설움을 초역해 신문관에서 간행하고, 말 듣거라새별에 발표하였다. 11월 세계여행을 위해 오산학교를 그만두었고, 상하이[上海]에 들러 홍명희(洪命熹문일평(文一平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지냈다. 1914년 미국에서 발간되던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로 내정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미국에 가지 못하고 귀국하였다.19159월 김성수(金性洙)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하였다. 191711일부터 514일까지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하였고, 이어소년의 비애·윤광호·방황등의 단편 소설을 청춘에 발표하였다. 같은 해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였다.1917년 두 번째 장편 개척자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해 청년층으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나 1918년 폐병이 재발하였다. 병상에서 허영숙(許英肅)의 간호가 인연이 되어 결혼을 약속하고, 191810월 허영숙과 베이징[北京]으로 도피하였다. 이 시기 전통적인 가부장 제도를 비판하고, 자유로운 결혼생활을 등을 주장한 신생활론·자녀중심론등의 글을 발표해 당시 사회에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191811월 중순경 파리평화회의 개최 소식을 듣고귀국하였다가, 12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91월 일본에서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해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뒤 상하이로 넘어가 신한청년당에 가담하였다.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회 주임을 맡았고,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이 되었다. 19204월 흥사단에 입단하였다.19213월 상하이에서 귀국한 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나 곧 불기소 처분되었으며, 같은 해 허영숙과 정식으로 혼인하였다.1922년 종학원(宗學院) 교사로 초빙되어 철학·논리학을, 경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5개벽에 조선 민족에 대한 전면적 개조의 필요성을 강조한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였다. 이 무렵 단편 할멈·가실(嘉實)을 집필하였고, 김성수·송진우(宋鎭禹)의 권고로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였으나, 1924동아일보에 연재하던 민족적 경륜의 내용이 사회적 논란을 일으켜 퇴사하였다.19261월 수양동우회 발족에 참여하였고, 11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하였다. 동아일보1924재생, 1927마의태자, 1928단종애사, 1930혁명가의 아내, 1931이순신, 1932등을 연재하였다. 19327월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 및 집행위원을 맡았고, 19338월 조선일보사 부사장에 취임해 19345월까지 활동하였다.1937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6개월 후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며, 193811월 수양동우회 사건의 예심을 받던 중 전향을 선언하였다.193812월 전향자 중심의 좌담회 시국유지원탁회의에 참석하였고, 193911월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해 회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달 20일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협회 주체 전선(戰線)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1940215일자 매일신보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20일자 매일신보창씨(創氏)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3월부터 7월까지 녹기(綠旗)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를 연재하였으며, 9월 직접 작사한 노래 지원병 장행가(壯行歌)가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방송되었다. 12월에는 국민총력에 지원병훈련소 참관기인 지원병훈련소의 하루를 발표하였고, 황도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1941년 일본어 산문집 동포에 부침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되었다. 8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41935일자 매일신보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지지하였다.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전시생활부장으로,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1942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1942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6월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였다.19434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선출되었고,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19446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다.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을하였으며, 11월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45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과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해방 후, 19469월부터 광동중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다. 19471월 도산 안창호기념사업회의 의뢰로 집필을 시작해 5도산 안창호를 출간하였으며, 6을 출간하였다. 194912월에는 일제강점기 자신의 행적에 대한 경위와 맥락을 밝힌 나의 고백을 출간하기도 하였다.1949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3월 병보석 되었고, 8월 불기소 처분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7월 납북되었다가 1025일 사망하였다. 사망 후 19622월 전기 춘원 이광수, 196311이광수 전집이 출간되었다.이광수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1: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62~857)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이광수와 식민지 문학의 윤리(최주한,소명출판,2014)친일문학론(임종국,민족문제연구소,2013)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1: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현대문화사,2009)친일인명사전2(민족문제연구소,2009)이광수와 그의 시대1·2(김윤식,,1999)한국근대문인대사전(권영민,아세아문화사,1991)이광수 전집120(이광수,삼중당,1963)춘원 이광수(박계주·곽학송,삼중당,1962)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광수(李光洙))]

 

'소설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염상섭  (0) 2021.10.11
박종화  (0) 2021.10.11
나도향  (0) 2021.10.11
김유정  (0) 2021.10.11
김동인  (0) 2021.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