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르와 디그니타스 / 오차숙
영화 《아무르》를 감상했다.
몇 년 전 광화문 시내큐브에서 접한 적도 있었지만, 며칠 전에는 EBS를 통해 재차 음미할 수 있었다. ‘아무르’는 그 어떤 작품과는 달리, 주인공 ‘안느’의 쓸쓸한 모습이 많은 여운을 주며 잡다한 생각을 하게 했다.
쓰나미처럼 엄습하는 나이 탓도 있으렷다.
안느가 남편 조르주와 마주 앉아 식사하던 중, 점점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장면부터 시작해 일상의 삶이 무너져가는 노부부의 모습이 생각의 쓰나미로 몰아치게 하며 발바닥까지 축축하게 했다. 죽음을 향해 허물어져 가는 그 과정들이, 정신없이 달려가는 순간의 삶보다 100만 배쯤 어렵다는 생각에 닿게 되자 거실의 먼지까지 애련하게 느껴졌다. 두 주인공의 삶은 곧 우리들의 일상이 되어 극복해 가야 할 과제임을 실감하게 했다.
인간의 생生은 결국 병듦과 죽음으로 치달아 흔적이 없어질 때, 비로소 그때 ‘삶의 완성’임을 깨닫게 하는 건가. 세상의 미물은 자기의 뜻과는 거리가 먼 부모의 임의에 의해 태어난 생명이 아니던가. 남녀의 애정 놀이가 후손에겐 묵중한 짐을 짊어지고 사막을 걸어가게 하는 형상으로 나타났으니.
다행인 것은,
영화 《아무르》는 삶의 무게와 죽음의 무게가 있었지만, 사랑의 무게가 두 무게보다 무거워서 그 본질에 감동하게 했다. 하지만 지구상에 ‘아무르’의 두 주인공처럼 살아가는 부부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 부부도 ‘사랑’이란 이름으로 연을 맺고 산다 해도 천만에, 조르주와 안느처럼 살아갈 가능성은 1% 미만이다.
자의식이 강한 안느가 남편 조르주와 근사한 사랑을 하면서도, 견딜 수 없는 순간들이 그 아내를 질식시켜 생生을 마감하게 했으니, 즉흥적인 사건이지만 남편 조르주의 사랑 철학은 심오하다 못해 씁쓸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생生을 마무리하는 과제가 만만치 않음을 절감하게 한 영화, 감독 ‘미카엘 하네케’는 사랑의 진정성을 피력하기 위해 안느의 영혼으로 환생한 비둘기, 시신이 안치된 방을 꽃으로 장식하고 테이프로 밀봉하며 영화를 깊이 있게 연출했지만, 숨이 막히도록 답답한 그 영화, 안느가 죽고 나서도 환상으로 보이는 아내를 따라 집을 나서는 조르주가 초월적인 사랑을 보여주긴 했지만, 인간이 늙어가는 모습, 병든 모습, 죽음을 맞이하는 고통이 잔혹하게 느껴진 상황이다.
중병과 죽음은 성난 파도처럼 고약해 의식이 있는 채론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부분이다.
뒤끝이 헛헛한 영화 ‘아무르’, 안느와 조르주의 생生이 비참해서가 아니라, 삶의 한계를 철학적으로 풀어나간 감독의 고민은 곧이 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고민, 우리 모두의 과제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무르》처럼, 부부가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려고 버둥대다 극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결국 사랑이란 이름으로 아내를 질식시켜야만 하는 그 혹독함이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였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울음을 터트리며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갓난이와는 달리, 인간의 최후는 참으로 씁쓸해 ‘태어남’ 자체가 오류라는 생각이 든다.
1대 1로 최후의 고통까지 감수해야 하는 세상, 2세를 낳아 그들에게 그 과제를 넘겨 줄 필요가 없는 세상, 인간의 삶과 그 뒤에 따르는 죽음은 허망하고 비정해서 잡다한 생각이 춤을 추게 한다.
감독은 영화의 구성미에서 사랑의 상징성을 군데군데 도입시켰지만, 인간의 최후는 유기견보다 적막한 것이 사실이다. 그것으로 볼 때 생生을 줄기차게 살아가는 우리들은 거대한 장벽과 거룩한 공허가 기다리고 있음을 감지하며,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때가 되면 탁한 침까지 탁탁 뱉고 모든 것을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마른 장작이 되어 활활 타다 미련 없이 스러지는 재가 되기 위해 순간순간 땀을 닦으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요즘은 구호를 외치듯 장수시대, 100세 시대라고 부르짖곤 하지만 견딜 수 없는 삶,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존엄사가 행해지는 나라, 스위스의 비영리단체 디그니타스DIGTTAS를 찾아가게 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
한국 사람들도 자기만의 고통을 다스리지 못해 그곳을 찾아가긴 하지만, 지난해에는 호주의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 박사(104세)도 그곳을 택하지 않았던가. 구달 박사는 당시 특별하게 아픈 데가 없음에도 고령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삶을 이어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존엄한 죽음을 택했으니, 구달 박사가 취한 행위는 우리에게 그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을까.
살아있다고 산 것이 아니라는 것, 끝나지 않을 듯하면서도 끝나는 것이 인생임을 증명하며 생을 마감한 구달 박사. 104세의 노인이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선택한 뒤 비행기에 탑승해 혈혈단신 호주에서 스위스로 날아갔으니. 그리고 한 줌의 재가 되고 말았으니….
환기시켜 볼까 잠시.
세상에 태어난 이상, 현실을 견디는 힘은 ‘운명’이란 불가항력의 세계이며 신의 영역이 아닌가. 그렇다고 구 누구도 개인의 삶을 탓할 수는 없는 시대, 장수로 변해가며 질병까지 다스려지는 시대라 해도, 인명재천人命在天과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울 마음에 새겨야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대여!
진정 극적으로 취해진 조르주의 선택과 구달 박사의 선택은, ‘완벽한 사랑’이며 ‘완벽한 인생’임엔 틀림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