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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 일대기. 조훈현론, 조훈현의 생각법 ,기타

조훈현 일대기 5

by 자한형 2023.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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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 5

만화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여기서 확실하게 조훈현의 독서 편력을 소개할까 한다.

소년 시절 만화방에 진열된 만화는 모조리 섭렵한 조훈현은 청소년기에 무협지에 심취했다가 청년기엔 추리애호가가 된다.

나는 어렸을 때 삼촌의 방에서 날마다 제목이 바뀌어 쌓여있는 무협지 시리즈들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한두 권도 아니고 대여섯 권에서 열 권에 달하는 무협지들을 삼촌은 밤새워 읽어치웠던 것 같다.

아침이면 무수한 감귤 껍질과 함께 방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무협지들.

외할머니는 그럴 때마다 쯧쯔 혀를 차시며 방을 치우셨다.

잠이나 푹 잘 것이지......뭔 놈의 책을 밤새워 읽는다냐?”

그랬다.

그 무렵은 조훈현의 폭격시대로 일컬어지는 전관왕 직전의 시절이었다.

삼촌 조훈현은 거의 매일 벌어지는 타이틀전의 피로 속에서도 밤마다 보문동 골방에서 혼자만의 은밀한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비록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마음의 창이라는 눈망울에는 핏줄이 벌겋게 섰지만 그는 상상의 나래를 달고 무협의 세계로 들어가 에너지를 재충전했던 것 같다.

만화와 무협지, 그리고 미스터리.

품위와 다소 거리가 멀지만 조훈현은 그런 장르를 과식하면서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배양했던 것이다.

오십이 다된 지금도 그의 독서량은 상상을 불허한다.

웬만한 대중소설은 거의 손때를 묻혔고 한 번 읽으면 주인공의 캐릭터와 줄거리를 오래도록 기억하는 비상한 재능이 있다.

언젠가 나는 새로 출간한 책에 사인을 해 삼촌에게 드린 적이 있었다.

삼촌은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말했다.

이거 내가 읽었던 건데?”

그 책은 출판한 지 3년이 지나 표지갈이를 한, 리바이벌 작품이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몇 초 만에 그 사실을 알아내고 만 거였다.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난 삼촌이었다.

작가인 조카뿐만 아니라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평생 재직한 둘째 누나 조경자도 조국수의 독서량을 익히 알고 있는 증인이다.

내가 근무한 도서관마다 훈현이 도서대여 카드가 수십 장 될 거다.

소설이라면 안 읽은 책이 없어.”

일반인들에게 하루 두 권밖에 대출해주지 않는 규정이 있지만 조훈현은 누나의 배경을 십분 활용해 그처럼 엄청난 비리(?)를 저질러가며 독서를 즐겼던 것이다.

믿기 어렵다면 그에게 책에 관한 질문을 넌즈시 한 번 해보라.

아마 쑥스럽게 웃으면서도 전문가 못지않은 식견을 들려줄 것이다.

나는 그의 바둑이 그처럼 자유분방하고 강하게 단련된 이유를 독서량에서도 찾아보고 싶은 사람이다.

만화와 무협지, 그리고 미스터리 물에서 잔뜩 키운 상상력이 자연스럽게 바둑판 위에서 녹아나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닐는지....

프로바둑에 입문하기란 사법고시보다 어렵고 신춘문예의 관문보다 어렵다는 것이 통설이다.

요즘에는 연구생과 일반인들의 입단제도가 공존해 조금 나아졌다지만 과거 우리 바둑계이 입단과 승단제도는 일본보다 훨씬 어렵고 엄격했다.

그런 관문을 조훈현은 아홉 살에 통과했다.

사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세계기록이며 기네스북에도 올라있는 공식기록이다.

천재의 기록은 오래가기가 쉽지 않은데 조훈현은 아직도 왕성하게 기록의 보물창고에 하나하나 전리품들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2001년 도쿄에서 열린 제14회 후지Wm배 우승으로 개인 통산 154회 우승과 국제대회 9회 우승 및 세계 최다승 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485개월로 국제대회를 제패했으니 앞으로 2년 후에 세계 최고령 우승기록까지 노려볼 만한 입장에 와 있는 것이다.

19624.

조훈현은 당당하게 실력으로 제16회 프로 입단대회를 통과한다.

그의 나이 아홉 살.

목포에서 상경한 지 4년 만이었고, 입단대회에 도전한 지 세 번째 만에 얻은 결실이었다.

바둑 층이 얕은 한국의 기록이라 일본에서는 그리 중시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어쨌든 아홉 살 프로기사의 탄생은 전무후무한 일이어서 언론의 요란한 조명을 받으며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16회 입단대회를 통과한 기사는 단 두 명.

김수영과 조훈현이었다.

입단 기수(期數)로만 따져도 조훈현은 현재 활동하고 있는 기사들 중에서 단연 왕고참급에 해당한다.

아직 오십이 넘지 않은 나이임에도 그가 원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그 만큼 입단이 빨랐다는 이야기.

이 무렵 초단 조훈현의 바둑은 잔수가 밝고 싸움을 즐기는 기풍이었다고 한다.

명색이 프로였지만 그 당시에 프로들은 거의 수입이 없었다.

하지만 조훈현은 프로로서의 혜택을 나름대로 톡톡히 누릴 수 있었다.

바둑으로 용돈을 얻어 좋아하는 만화책과 군것질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 프로기사가 탄생했다는 소식에 정계의 거물들이 관심을 보였고, 급기야 야당의 중진 정해영(鄭海永) 의원은 조훈현과 김수영을 자택에 기거시키고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했다.

옛날 우리바둑의 노국수들을 여유 있는 권세가들이 사랑방에 들여놓고 후원했던 형태와 다르지 않은 방식.

그 뒤를 이은 후원자는 박종규(朴鍾圭) 청와대 경호실장 이었다.

5.16혁명과 함께 정권의 핵심으로 떠오른 박종규 실장이 야당의원으로부터 탐나는 보배 조훈현을 인수받은 것은 자연스런 흐름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조훈현은 그런 인연으로 무수한 정관계 및 재계, 예술계의 인사들과 교분의 고리를 갖게 된다.

그보다 조금 후인 1968년 관철동에 5층짜리 한국기원 건물을 지으며 총재로 등장한 이후락 씨도 조훈현과 각별한 관계를 자랑하고 5공화국의 전두환 대통령도 명절 때면 한 수 지도를 요청해오는 애제자(?)임은 모두가 주지하는 사실-

여기서 이 글을 쓰는 작가의 비화 한 토막을 덤으로 소개한다.

1989년 필자는 KBS[전국일주]라는 프로그램의 작가로 전국을 떠돌아 다니다 경기도 이천에 들를 기회가 생겼다.

온천과 쌀, 도자기로 유명한 고장 이천에는 취재거리가 무궁무진 했지만 필자는 다소 엉뚱한 취재감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당시 정국은 6공화국 청문회의 계절.

노태우 대통령은 대선을 통해 집권할 수 있었지만 정통성 시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 동지 전두환 전대통령을 백담사에 유폐시키는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무렵 필자는 젊은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군사정권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캐내고 싶은 마음에 모 PD와 함께 백담사 부근 용대리에 잠입취재를 하기도 했었고 12,12 사태를 풍자하는 영화 <시비시비(是非是非)>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었는데-

이천에 오니 3공화국의 거물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세상을 등지고 이 곳의 도요(陶窯)에 산다는 것이었다.

군청 공보실에 인터뷰를 의뢰하니 일언지하에 NO.

아직까지 이후락 씨는 일체 외부인과 접촉한 적이 없다며 만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그때 나는 이후락 씨가 한국기원 총재로 역임했던 사실을 떠올리고는 정중하게 이런 요청을 했었다.

어르신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방송과 관계없이 한 번 뵙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조훈현 국수의 조카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후락 씨로부터 OK사인이 떨어졌다.

그는 친히 마당까지 걸어 나와 풋내기 방송작가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응접실에 앉혀놓고 술상까지 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 분과 노코멘트 약속을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지만 그날 밤 나는 참으로 많은(혁명,평양 방문 등의) 정치비화를 들을 수 있었다.

작가의 입장에서 그처럼 만나기 어려운 거물과 한자리에 마주앉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영광인데, 그 복도 다 알고 보면 삼촌 조훈현의 빽이 통했기 때문 아닌가?

이야기가 가끔씩 다른 길로 흐르더라도 조국수의 팬 여러분들께서는 충분히 아량을 베풀어 주실 줄 믿는다.

천하의 조훈현에 관해서 우리가 더 이상 모르는 게 뭐 있겠는가?

날고 기는 바둑평론가, 관전기자들의 필설을 통해 그는 밝혀질 대로 밝혀진 공인이다.

그렇기에 홈페이지의 라이프 스토리는 아무래도 정통전기 작법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비화들을 발굴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편하게 써내려 가는 것이 여러분께 편하게 어필하리라 믿는다.

피스톨 박으로 유명한 박종규 실장은 4~5급 실력이었는데 조훈현을 집에 들여놓고 시간 날 때마다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박실장도 어지간히 승부욕이 강한 인사라 그냥 친선으로 두거나 배움을 목적으로 하는 바둑은 두지 않았다.

무조건 내기바둑이었다.

프로기사는 내기를 둘 수 없지만 소년 조훈현은 어쩔 수없이 후원자와 한 집에 1원씩을 걸고 바둑을 두었다.

물론 돈이 걸린 바둑을 훈현이 져줄 리 만무했다.

그 때 박종규 실장이 잃어준 돈을 모두 합하면 꽤 큰 금액이었으리라.

남들은 평생 바둑공부를 해도 1급에 도달하기 힘든데 아홉 살 만에 프로기사가 된 조훈현은 관철동에서 분명 이채로운 존재였다.

이 빛나는 원석(原石)을 갈고 닦아준 사람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각별한 애정으로 돌봐준 기사는 김인과 정창현.

6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기타니 도장에서 수업을 받고 이듬해인 63년 귀국해 조남철의 아성을 넘보던 김인 9(당시 4)은 틈날 때마다 조훈현 초단을 앞에 앉혀놓고 복기를 해주었다.

그 역시 일찌기 호남땅에서 천재 소리를 듣고 홀로 상경해 정상등극을 눈앞에 둔 주인공이었으니 어린 조훈현을 보는 시각이 남 같지는 않았을 터, 열 살 연상의 선배로서 그는 아낌없이 조훈현에게 무공을 전수해주었다.

김인은 태생적으로 입이 무거워 곰살맞은 애정표현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오직 19로 위에서 흑백의 수담으로 친밀한 감정을 토해낼뿐이었다.

잔수가 밝고 싸움을 즐기는 그 시절 조훈현의 바둑에 김인 선배는 부단히 보다 더 넓고 큰 틀의 패러다임을 제시함으로써 공력을 배가시켜 준 것이다.

아마 자신처럼 외로운 승부사의 길을 택한 동향의 후배소년 조훈현에게 운명적인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와 반대로 정창현은 당시 한국기원 원생들의 사감역을 자임하며 호랑이 선생으로 군림했던 인물.

날카로운 기풍처럼 언어표현도 거침이 없었던 정창현은 조훈현의 모습만 발견하면 그렇게 반가워 할 수 없었다.

훗날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조훈현을 사위로 칭하며 끔찍히 아꼈던 정창현, 그 역시 반상의 전투에 일가견이 있어 녹록치 않은 스파링파트너 역할을 해준 은인이다.

어쩌다 강한 완력으로 훈현을 궁지에 몰아넣으면 통쾌한 웃음으로 소년의 오기를 자극했고, 번뜩이는 소년의 재기에 당해 궁지에 몰리면 과장스럽게 신음을 토하며 격려하곤 했었다.

이름의 끝 자인 현() 자를 같이 쓴다는 이유만으로도 훈현을 제자식처럼 아꼈던 쾌남 정창현, 그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조훈현의 찬란한 성취를 바라보고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을 것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조훈현의 입단 전후에 실질적 매니저 역할을 해준 후원자는 바둑계의 원로인 이학진 옹이다.

이학진 옹은 조선조 마지막 왕족인 의친왕의 사위로서 조남철 국수와 막역한 사이로 우리 바둑계의 발전에 큰 관심을 기울여 온 분이다.

그는 천재기사 조훈현의 떡잎을 알아보고 알뜰살뜰 비료와 물을 뿌려주었다.

흔치 않은 바둑서적은 물론이고 일본의 명국기보 등을 수집해 전해주었다고 한다.

조훈현을 일본으로 보내는 데도 이학진 옹이 앞장을 섰다.

그 이후로 9년의 유학생활과 3년의 군대생활을 거쳐 조훈현은 자연스럽게 홀로서기를 하게 됐으므로 이 옹의 후원자 역할을 계속할 기회는 없어지고 말았지만-

1회 응창기배 대회가 열렸을 때 그는 한국기원의 젊은 기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한국 바둑계가 천 년에 한 번 오는 대운을 만났어. 이 번 세계바둑대회에서 조훈현이 우승할 걸세. 이 기회를 잘 잡으면 크게 도약할 거야. 모두들 열심히 공부하라구.”

당시에 이학진 옹은 역학(易學)에 심취해 있었다는데, 젊은 기사들은 원로의 예언을 그저 희망사항 정도로 치부하고 말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옹의 예언은 정확하게 들어 맞았다.

조훈현의 응창기배 우승을 신호탄으로 한국바둑은 동양증권배와 단체전인 진로배를 휩쓸면서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정상을 정복해버린 거였다.

4인방으로 압축되는 대표기사들의 투혼과 실력이 이뤄낸 업적이긴 하지만 이쯤되면 이학진 옹의 예언도 나름대로 어떤 근거가 분명히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아무튼 황태자의 면모를 갖춘 소년기사 조훈현은 어려운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그다지 어렵지 않게 화려한 비행을 위한 활주에 나선다.

세계 최연소 기록으로 입단한 천재소년의 존재가 일본에 알려지자 양국의 바둑관계자들이 사상최초의 전화대국을 기획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기타니 가문의 이시다(石田)가 천재성을 유감없이 떨치고 있었는데, 한일 양국의 천재들을 맞붙여보자는 기획이었다.

전화대국의 장소는 사간동 한국일보 사옥.

훈수를 방지하기 위해 양국의 기자들이 입회한 뒤에 드디어 기발한 전화대국이 진행되었다.

결과는 조훈현의 패배.

명문 도장에서 체계적인 수업을 받고 기라성 같은 동문 실력자들과 실전을 쌓은 이시다의 바둑은 탄탄하면서도 행마가 부드러웠다.

그 전화대국을 계기로 바둑계에서는 조훈현의 일본 조기유학을 서두르게 되었고-

1962년 입단한 조훈현은 1년도 채 안돼 2단으로 승단하고 나서 이듬해인 196310월에 일본으로 떠났다.

만으로 겨우 열 살이 된 소년 조훈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집을 떠나야 했다.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그렇다고 가기 싫은 건 아니었다.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호기심과 본격적인 바둑공부를 할 수 있다는 계획에 한껏 가슴이 부풀었었다.

훈현의 도일이 결정 나자 조선일보에서 항공료를 부담해주었다.

소년과 동행한 사람은 재일교포 박순조씨.

조훈현은 박순조씨와 함께 두 달 가량 동경에 머물며 앞날에 관한 포석을 그리기 시작했다.

낯설은 이국땅이었지만 소년은 금새 그 곳 풍토에 적응하고 있었다.

언어소통이 불편했어도 그 무렵 찢어지게 가난했던 고국에 비해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있던 일본은 그야말로 살기에 너무 편한 세상이었으므로.

바둑팬이라면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그 무렵 한국의 기사들이 일본에 유학을 가게 되면 거의 무조건 기타니 문하로 들어가는 게 관례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일본 바둑계의 원로 기타니 9단은 당연히 조훈현도 관례에 따라 자신의 도장에 들어올 줄로만 믿고 있었다.

기타니 뿐만 아니라 한국의 후원자들과 현지 보호자인 박순조씨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운명의 나침반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우연이라는 자력(磁力)이 그 관례를 어긋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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